2014년 12월 19일, 헌법재판소는 통합진보당에 정당해산결정을 내렸다. 4월 16일, 바다 속으로 침몰한 세월호 사건의 진실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제 18대 대통령선거에 개입했던 국가정보원과 군사이버사령부의 선거개입과 관련된 진상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고 책임자들도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 12월 9일 대통령소속 지방자치발전위원회는 ‘지방자치발전 종합계획’을 발표하고 특별시와 광역시의 자치구 기초의회폐지, 단체장과 교육감의 선거방식 개악을 발표했다.

 

2014년 12월 5일, 대한항공 부사장은 항공기를 회항시켰고, 2013년은 남양유업, 서울우유 등의 ‘갑질’로 장식된 한해였다. 12월 12일 서울고등법원은 이마트가 대형마트가 아니기에 의무휴업일 지정 및 영업시간 제한이 위법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2014년 11월 10일 대학생협의 모범이던 세종대학교생협은 비리재단에 밀려 사업종료를 공지했다. 지난 5년간 국내 10대 재벌가문 자산이 430조원이나 늘어나 1,240조원에 달한다. 지금 국회는 사회적경제기본법을 심의중이고, 12월 2일 박근혜 정부는 2018년까지 165조원을 투자하는 지역발전 5개년계획, 소위 제2의 새마을운동을 국무회의에서 확정했다.

 

사회운동, 풀뿌리운동이 여러 성과를 거뒀다고 얘기되는 한국사회의 거시적인 모습은 이렇다. 사회가 변했다고 자평하는 동안 고공농성, 철탑농성, 수십 일의 단식농성, 엄청난 손해배상은 일상의 풍경이 되었다. 우리가 원한 세상은 이런 것이었나?



1. 현실을 보며 드는 물음들


- 생활정치는 정말 생활 속의 다양한 문제들을 정치적인 의제로 만들었나?

- 거버넌스는 정말 대등한 관계에서의 협력인가?

- 마을운동은 취향의 공동체를 넘어서 공존하는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나?

- 사회적 경제는 진정 경제활동에서 이윤보다 사회적인 가치를 우선시하고 있나? 경쟁보다 협력을 앞세우고 있나?

- 협동조합은 협동하는 문화를 확산시키며 생산과 소비의 연계를 강화시키고 있나?

- 시민사회운동은 수도권 중심을 벗어나고 있나?

- 시민사회단체는 몇몇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사회적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시민들의 도구가 되고 있나?

- 시민사회단체의 활동은 노동이 아니라 활동인가?

- 시민사회단체는 관료주의에서 자유로운가?

- 시민사회운동은 자기 진영의 논리에서 벗어나 소통하고 있는가?

-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라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그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얼마나 이야기하고 있나?



2. 다른 세상으로 가기 위한 열쇳말


- 자본주의, 사회주의, 이분법을 극복해야 한다는 건 두말 할 나위 없다. 그런데 극복한다는 것의 의미가 뭘까? 원론이 아니라 한국 현실에서 두 이념이 어떤 문제와 한계를 가지는지를 파악하고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다른 가능성을 찾는다는 의미일 텐데, 지금까지 우리는 그런 과정을 밟아왔을까?

 

- 그동안 풀뿌리운동은 대중이 스스로 조직되며 삶과 공간을 변화시키는 과정이라는 점을 강조했는데, 이 역시 한국사회라는 특수한 현실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만 한다. 기존의 사회운동이 한국사회의 성격을 규정하려고 노력해온 만큼 풀뿌리운동도 나름의 사회를 분석하는 틀을 가졌던가를 반성해볼 필요해볼 필요가 있다.

 

- 4주제 연구모임이 그동안 아나키즘, 생명운동, 에코 페미니즘, 사회운동의 영성이라는 관점을 검토한 것도 이런 필요성 때문이다. 각 관점이 같고 다른 면을 가지지만 공통적이라고 여겨지는 열쇳말을 배치하자면 다음과 같다.

 

- 관계성: 전일성, 상호성, 부분과 전체의 연계성, 연방, 연대, 생산과 소비의 연계, 교감, 깨달음, 집단적 영성

- 다양성: 탈중심, 상호적 권리, 평등, 성찰, 중립성과 객관성 비판, 국가주의 비판

- 자율성: 자치, 자급, 자결권, 삶에 대한 책임의식, 자기 목소리, 임금제도 비판, 너를 위한 운동이 아닌 나를 위한 운동, 가부장제 비판

- 순환성: 성장 포기, 사용가치의 우선성, 공유, 사적 소유권 부정, 소농, 소비주의 비판

 

- 이런 것이 가능한 장으로서 마을, 공동체 등이 대안으로 얘기된다. 근대국가와 자본주의 시장은 이런 열쇳말과 대립되는 구조이기에, 풀뿌리운동은 이를 넘어설 방법과 과정을 지속적으로 논의해야 옳다. 특히 한국사회의 국가와 자본은 훨씬 더 기득권화되어 있고 억압적이며 중앙화되어 있어서 풀뿌리운동과 양립하기 어렵다. 강력한 국가와 자본에 맞서려면 다양한 실천과 연대가 필요할 텐데, 풀뿌리운동은 그동안 어떤 고민과 실천을 보여줬나? 주민조직화, 생활정치는 마치 주민운동의 몫인 양, 생산과 소비의 조직, 협동운동은 마치 사회적경제 조직의 몫인 양, 서로 몰라라 하고 있었던 건 아닌가. 더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이런 흐름을 자기 조직의 규모를 확대시키는 쪽으로 활용했을 뿐 그 몫 자체를 늘리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은 아닌가.

 

- 운동의 가짓수는 늘어나지만 사회구조가 바뀌지 않아 지속가능하지 않은 데도 마치 지속가능한 것처럼 운동이 마취제를 놓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정부나 재벌을 감시하고 비판하며 잡은 손 놓고 후려쳐야 할 때에도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대충 뭉뚱그리는 것은 아닌가. 단순히 정부나 재벌이 정서적으로 싫어서가 아니라 자기 운동의 가치를 근본적으로 훼손하는데도 이를 방치한다면 운동의 기반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풀뿌리운동은 단순한 방법론이 아니라 자기 가치를 가진 운동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우리는 방법만 이야기하고 사례만 강조하지 가치와 그 가치를 실현하는 과정에 대해서는 입을 닫고 있다. 운동과 사회의 위기는 여기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 풀뿌리운동은 스스로 대안적인 생활양식을 실천하고 이를 심화시키는 과정으로서의 운동을 지향한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에 대한 분석도 필요하고 사회운동가 개인의 영성을 형성하고 심화시키는 과정도 필요하다. 목적과 수단을 일치시키는 조직운영과 내용 방식에 대한 자각도.

 

- 한국사회에서 이런 키워드들은 현재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풀뿌리운동은 이런 키워드들을 실현하기 위해 어떤 활동을 펼치고 있을까? 그 활동 속에 이런 관점들은 얼마나 투영되고 있을까?

 

- 이런 관점들은 성장주의, 국가주의, 자본주의, 가부장제, 식민주의, 환원주의, 교조주의를 비판하는데, 우리 운동 속에는 이런 문제들이 없을까? 시민사회운동은 이를 점검할 수 있는 내부장치를 가지고 있을까?



3. 다른 세상을 고민하기 위한 질문


- 제도정치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 제도정치를 회피하는 것은 아닐 텐데, 우리도 어느 순간 정치적 중립성의 신화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일과 할 수 있는 일, 해야 하는 일의 경계를 너무 분명하게 정해버린 건 아닐까? 최근 박원순 시정에서 시민단체가 이중대 역할을 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왔는데, 풀뿌리운동의 거버넌스는 어떻게 실현되어야 할까? 협력과 파트너십을 당위적으로 강조하면서 제도정치를 압박할 수 있었던 감시와 비판기능이 어느 순간 퇴화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생활정치의 동력이 빠른 속도로 제도화되고 있다면, 그 가치의 올바른 실현을 위해 제도정치에 개입하는 것이 응당 필요하지 않을까? 제도정치에 개입할 경우 풀뿌리운동은 자기만의 실력과 전술을 가지고 있을까? 제도정치에 개입하려면 그것을 위한 제도 자체를 바꾸는, 경기규칙을 바꾸는 노력이 필요할 텐데, 이 부분은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 자본주의와 성장주의를 극복한다는 것이 말로만 그치지 않으려면 그만한 실력을 갖춰야 하는데, 우리는 그런 실력을 쌓고 있나? 소비자들은 생산자들의 삶에, 생산자들은 소비자들의 생활에 서로 관심을 가지고 있나? 풀뿌리운동은 노동운동에, 노동운동은 풀뿌리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있나?

 

- 우리는 우리가 살고 싶은 사회의 상을 구체적으로 만들고 있나? 주민/시민들이 피부로 느끼고 공감할 수 있는 삶의 틀로 만들고 있나? 운동이 추구하는 대안과 가치를 개인의 삶과 조직의 운영으로 구현하지 못한다면 공동체의 관계망이 확대되고 심화될 수 있을까? 활동가들은 자기 삶을 가치대로 변화시키고 있나? 위계적이고 관료화된 조직운영이 줄어들고 운영주체가 개방되어 늘어나고 세대나 직책에 구애받지 않는 평등한 운영방식이 확산되고 있나?

 

- 우리는 공유의 기반을 만들고 있는가? 많이 얘기하는 네트워크도 일종의 공유물일 텐데, 적절히 공유되고 있을까? 관계성과 상호성을 실현하는 네트워크는 기성사회로 흡수되지 않는 관계망을 만드는 것인데, 우리는 그런 관계를 만들고 있나?

 

- 집단화된 다수가 실질적인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끼리끼리의 정치, 끼리끼리의 문화를 극복할 수 있는 실천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사회운동의 역사가 길어질수록 구세대와 신세대의 소통가능성이 낮아지는데, 이런 틈을 좁힐 방법을 개발하고 있을까? 민주적이고 평등한 의사소통이라는 가치를 실질적으로 구현할 방법을 만들고 있을까? 활동가 개인과 조직에는 어떤 영성이 필요할까?

 

- 서울 중심의 운동에서 벗어나려면 주요 운동조직이 서울을 떠나는 것도 방법 아닐까? 공공기관도 이전하는데 시민사회조직이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그 내부에 어떤 다른 욕망들이 자리 잡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가 이렇듯 분열된 존재인데, 대중의 분열을 비판할 수 있을까?



4. 개인적인 고민들


- 제도가 문제라면 그 제도를 바꿀 수 있는 정치력을 만들어야 한다. 홀로 그 몫을 담당할 수 없다면 당연히 그 목적에 동의하는 주체들이 손을 잡아야 한다. 활동가들조차도 정치를 갈등요인으로만 보고 회피하려하는데 갈등은 인간사의 당연한 요소이고 이를 해결하면서 공동의 목적과 생활이 강화된다. 갈등의 제거가 아니라 갈등의 조절이 중요한데, 정치가 이 과정을 맡는다. 제도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만큼 정치적인 힘을 구성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대부분의 과정을 제도화로 넘기면서 그 제도가 알아서 좋은 방향으로 가길 기대하는 것은 운동이 무모함을 넘어 무책임함을 드러내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제 진보정당을 드러내놓고 지지하거나 스스로 정치적인 역할을 맡아야 하지 않을까. 미흡한 점은 고쳐갈 과제이지 배제할 이유가 아니다. 우리 내부에서 관계성이 살아나야 한다.

- 살림살이가 무너지면 여유도 없어지고 참여도 어려워진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럴수록 공동의 대책을 마련하고 정치와 경제의 연관성을 드러내야 하는데 그런 역할이 없다. 지금의 시민사회운동은 각자의 부문운동으로 후퇴해서 딱 고만고만한 이야기만 나누고 있다. 그리고 말만 무성하지 그 말에 힘을 실어줄 움직임은 별로 없다. 주민/시민들에게 자기 것을 내놓으라고 얘기하면서 정작 자기 것은 내놓지 않으니 곳간이 찰 수 있을까? ‘능력에 따라서 일하고, 필요에 따라 가져가고’, 우리 자신도 믿지 못하는 것을 누가 믿어줄까? 당위를 위해서가 아니라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우리 자신을 위해 적극적으로 연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말을 하면 꼭 우리 일을 팽개치고 다른 일에 헌신해야 하는가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잘 생각해보면 우리 일과 다른 일이 분리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생각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은 우리 내부에도 있다. 돌아보고 성찰하고 생각해야 운동의 미래가 있다. 다양성은 그런 과정에서만 싹틀 수 있다고 생각한다.

- 거시적인 것을 본다고 주장하는 운동은 미시적인 운동을 무시하고, 미시적인 것을 강조하는 운동은 거시적인 운동을 배제하고 있다. 이런 무시와 배제가 사라지려면 일단은 서로 자주 만나야 한다. 그리고 서로의 접점을 말이 아니라 실천으로 만들어야 한다. 멋지고 폼나는 일, 외부의 사례보다는 자그마한 실천들이 중요할 텐데, 이런 일들이 각 조직은 어느 정도의 역량을 쏟고 있나? 이런 일들이 여러 사업과 활동에서 어느 정도의 우선순위를 가지고 있나. 자기 사업이나 사업장 외에 관심이 없는 조직이 사회를 바꿀 수 있을까? 네가 살아야 내가 살 수 있다는 자세를 가지지 않으면 미래를 장담하기 어렵다. 자율성은 나 혼자 살아남겠다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살아남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자세이다.

- 어느 순간부터 운동에서 가치의 지속보다 사업의 지속이 더 중요해지고 있다. 그러니 서로 가치를 실현하지 못함을 알리바이로 덮어둔다. 평화박물관, 함께일하는재단에서 벌어지는 비상식적인 일들도 그냥 그렇게 무시된다. 강력한 도덕성이 아니라 최소한의 민주적인 절차마저 무시된다면 우리 내부는 너무 허약한 것이고 기득권층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내부의 문제를 감출 것이 아니라 더 많이 떠들고 그 문제가 충분히 논의되어 해결책을 찾을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마을 곳곳에서 들리는 문제들에 관해서도 이제는 털어놓고 이야기를 나눠야 다른 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아직 다들 쉬쉬 하고만 있다. 우리 내부에 있는 문제들을 도려내고 새 살을 돋게 만들어야, 저들이 우리를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고정된 위계, 고정된 가치는 내부를 부패하게 만들고, 시민사회단체는 특정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다. 우리 내부가 골고루 순환되어야 그 순환의 힘이 사회도 순환시킬 수 있다.

- 살림살이는 개인의 문제로 얘기되고 이는 운동단체 내부에서도 비슷하게 어렵다. 생활고로 어려움을 겪는 활동가들이 있다면 공동의 대책이 필요한데, 그냥 개인의 몫이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과 활동을 분리시키는 것이 가능할까? 서울에서 개인의 생활을 꾸리고 가족을 건사하는 것이 불가능한 데도, 개인의 헌신만을 강요할 수 있을까? 실무자의 저임금이 활동가의 헌신으로 포장되고 활동가의 답답함이 실무자의 업무능력으로 평가되는 시점에서, 노동과 활동은 서로에 대한 알리바이로 활용될 수밖에 없다. 그 경계를 넘어설 힘은 그것이 노동이냐 활동이냐를 따지고 규정하는 것보다 활용할 수 있는 공유물을 늘리고 그것의 민주적인 운영을 보장하는 것일 수 있다. 지금부터라도 그런 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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