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의 위기’라는 말이 지난 몇 년간 유행어처럼 되풀이되었다. 위기라는 말의 등장보다 더욱더 긴장감을 주는 것은 좀처럼 그 위기를 벗어날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한국의 진보는 위기를 불러온 원인을 근본적으로 성찰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진보는 위기의 원인을 정치개혁이나 민생정책의 실패에서 찾거나 정부와 언론의 ‘진보 흔들기’에서 주로 찾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무능한 진보보다 부패한 보수가 더 낫다”는 한탄(恨歎)까지 나오는 걸 보면 시간이 위기를 해결해주기는 어려울 듯하다. 도대체 얼마나 무능하다고 여겨졌으면 차라리 부패가 더 낫다고 얘기할까? 어쨌거나 이런 한탄은 진보의 위기가 매우 근본적인 것임을 알려준다.만일 무능함만이 문제라면 진보는 자신의 능력을 길러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그리고 소위 진보인사라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그리 능력이 없어 보이진 않는다. 그러나 무능한 사람들이 대안을 제시하겠다고 나선 게 실제로 위기를 불러왔을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진보의 실패는 무능함보다 무책임함과 종파주의에서 비롯되었다.

 

속 빈 진보의 무책임함

 

무엇이 진보일까? 역사를 살펴보면 박정희가 지배하던 시절에는 김영삼, 김대중이 진보였고, 김영삼보다는 김대중, 김대중보다는 노무현이라는 사람이 진보이다. 진보는 어느 정도 상대적인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대적인 진보와 함께 이념적 진보(좌파)는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비판하는 다양한 사상들, 즉 사회주의, 아나키즘, 생명사상 등을 뜻한다. 그래서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같은 정당들은 상대적인 진보주의자들을 자유주의자라 부르며 자신들과 구별을 짓고 진정한 진보를 자처해 왔다.

상대적인 의미에서 보면 노무현 정부에서 이명박 정부로의 교체는 사회가 진보에서 보수로 흘러가고 있음을 뜻한다. 상대적인 흐름이 바뀌더라도 이념적 진보가 단단히 자리를 잡고 있으면 사회 전체의 흐름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이념적 진보의 뿌리는 매우 약하다. 소위 ‘원전’을 들이밀며 누가 더 노선에 충실한가를 따지고 주도권 싸움을 벌이는데 힘썼지 대중과 함께 호흡하며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사회를 강화시키려는 진보의 노력은 그동안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진보의 위기는 최근의 현상이 아니다.

따져보면 이념적 진보는, 특히 사회주의 세력은 1989년 현실 사회주의권의 붕괴 이후 자기 이념을 새로이 구성하지 않았다. 그동안의 사회주의 전략은 ‘혁명’과 ‘집권’을 강조했는데, 그럴 가능성이 없다보니 진보는 자기 이념을 구체화시킬 필요가 없었다. 이념을 외치기만 하고 정작 그 이념의 쓸모를 밝히지 않은 채 한국의 진보는 민중에게 무조건 자신을 따르라고 외쳤고 따르지 않는 민중을 비난해 왔다. 더구나 그 이념을 설명하는 언어들조차 이미 낡은 것들이었다. 진보는 국가나 자본을 비판하는 것 외에 딱히 자신의 대안적인 담론을 만들지 못했고, 새로운 주체를 발굴하거나 성장시키지도 못했다. 그러니 무능력보다는 오히려 무책임함이 한국 진보의 특징이라 하겠다.

역설적이지만 그런 무책임함은 이념의 기준을 좌에서 우로 옮긴 소위 뉴라이트(어떤 점이 new인지 도통 알 수 없지만)나 권력의 떡고물을 따라다니는 소위 진보인사들의 모습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념을 자신의 삶으로 녹여내지 않았기에 그들은 아무런 제약 없이 자기 이익에 맞춰 입장을 바꿀 수 있었다. 사회의 밑바닥에서 박박 기며 삶을 이념에 맞추려 했던 사람들을 과거에 사로잡혀 있다고 비난하면서도 자신은 마치 대단한 애국자인양 미화해 왔다. 민중이 바보가 아닌 이상 어찌 이런 진보를 버리지 않을 수 있을까?

 

신좌파는 없다!

 

물론 이런 문제가 한국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서구에서도 이런 문제가 드러났고 그 과정에서 신좌파가 등장했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에도 신좌파가 있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신좌파가 존재하려면 구좌파가 정치세력으로 미리 자리를 잡아야 하는데, 한국의 상황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구에서 신좌파의 등장을 설명하려면 노동계급의 정치세력화와 체제 내로의 흡수, 그에 따른 좌파 내부의 이념적, 정책적 갈등을 함께 얘기해야만 한다. 그런 갈등이 진보정당의 정강이나 정책을 바꾸고 새롭고 대중적인 사회운동이 권위적이고 관료화된 구좌파의 의사결정구조를 비판하면서 신좌파는 형성되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런 조건들이 없었다. 아직도 빨갱이라는 비난이 등장하는 한국사회에서 좌파는 정치세력으로 자리를 잡을 수 없었다. 노동계급의 정치세력화는 아직도 머나먼 과제이고, 좌파 내부의 갈등은 이념이나 정책 갈등보다 정파의 싸움에 가까웠다. 자신과 다른 의견을 차이가 아니라 잘못이라 비난하니 비판이나 대결은 곧바로 분열로 이어졌다. 이념이 추상의 수준에 머물렀기 때문에 이런 갈등은 쉽게 해소되기 어려웠다. 겉으론 대단한 이념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특정한 인물을 따르거나 특정한 원칙만 고집하며 정파의 이익을 따지기 때문에 타협이 안 되면 보따리를 싸서 떠나버린다. 그러니 제대로 된 정치경쟁이 있을 수 없다.

분명히 억압적인 사회 환경이 정파의 비밀스런 대립을 강화시킨 면도 없지 않지만 한국의 진보는 그것을 극복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서구의 신좌파는 ‘대항문화(counter-culture)’운동과 결합해 권위주의적이고 교조적이며 가부장적인 문화를 적극적으로 바꾸려 했다. 아래로부터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자발성이 신좌파의 성장을 도왔다. 하지만 한국의 진보는 권위주의와 교조주의, 가부장주의만이 아니라 학벌과 연고주의에서도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

미국의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G. Lakoff)는 진보가 자기 프레임(frame)을 개발하지 못하면 보수를 이길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한국의 진보는 오히려 ‘이익집단’이라는 보수의 프레임에 갇혀 버렸고 노동조합이나 시민사회단체들의 비리사건들은 그런 프레임을 정당화시켰다. 자연히 시민운동으로 대표되던 NGO와 사회운동단체, 진보정당 모두의 사회 신뢰도가 함께 추락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한국의 진보는 ‘녹색’이라는 대안가치마저도 ‘저탄소 녹색성장’에 빼앗겨 버릴 정도로 자신의 프레임을 확장시키지도 못했다(이제는 ‘공동체’라는 가치마저 시장에 빼앗길지 모른다).

 

관점의 진보가 필요하다!

 

자기 가슴과 몸으로 진보의 내용을 새로 채우지 않는다면 진보정치의 가능성은 없다. 자신을 진보라 주장하는 사람이나 세력은 많지만 실제로 그렇게 사는 경우는 드물다. 말만 뻔지르르하고 실제 사는 모습은 개판인 경우가 많고, 보통 사람들의 언어로 자신의 진보성을 풀어내는 사람들도 드물다. 그러니 진보의 이념에 동의할 수 있는 사람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명박 대통령보다 조금 더 상대적으로 진보한 사람은 나올 수 있지만 지금 우리가 사는 위기의 시대는 그런 상대적인 진보로 실마리를 찾을 수 없다. 경제위기와 식량, 에너지 위기의 시대는 근본적인 변화를, 이념적 진보가 새로운 틀을 만들 것을 요구한다. 노무현 대통령을 기리는 마음이 미래의 해법일 수 없는 것도 바로 이 점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진보의 관점이 새로워져야 한다. 자신은 내버려둔 채 남을 변화시키겠다는 건 오만한 발상이다. 일찍이 무위당 장일순 선생은 진보에게 바닥으로 기어라고 말했다. 오만함을 버리고 낮은 시선에서 민중의 삶을 바라보고 민중 속으로 들어가 만나고 반기고 사랑해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책임감을 지닌 진보적 리더십은 혁명을 이끄는 전위조직이 아니라 더불어 살려고 치열하게 움직이는 모임을 통해서만 발휘될 수 있다.

그리고 비정규직이나 청년실업을 비롯한 사회현안을 해결하는 것은 분명 진보의 중요한 과제이다. 하지만 정규직으로의 전환, 무상교육, 무상의료같은 추상적이고 당위적인 정책들이 민중의 조건 없는 지지를 받으리라 기대하긴 어렵다. 그런 정책들이 실현될 수 있는 자발적인 문화를 만들고 아래로부터의 자발성을 끌어내지 못하는 한 그런 정책들은 지지의 기반을 만들 수 없다. 그러니 구좌파/신좌파의 무의미한 논쟁에서 벗어나 즐거운 진보의 양산박을 만들어야 한다(최근 일본청년 마쓰모토 하지메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이런 필요성을 증명하는 게 아닐까?).

관점과 삶의 변화가 쉽게 이루어지리라 기대할 순 없다. 허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진보가 망한들 우리네 살림살이는 결코 나아지지 않는다. 한국의 기득권 보수만큼 부패할 뿐 아니라 무능한 세력도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지 않으면 쓰러진다.



 

요즘 사람들이랑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말문이 막힐 때가 간혹 있다. 똑같은 단어를 쓰긴 하는데, 서로 생각하는 바가 조금씩 달라서 얘기를 나누지만 정작 서로 아무런 얘기도 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얼마 전 우연히 뉴라이트쪽 사람을 만나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한때 논란이 되었던 ‘건국절’과 관련된 토론회였다. 그 사람은 어두운 기억을 버리고 밝고 건강한 기억을 가지자는, 식민지의 아픈 과거를 되새기지 말고 헌법을 만들고 산업화를 이룬 ‘한강의 기적’을 기억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나는 그 얘기에 공감할 수가 없었다. 우리에게 식민지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경험이고 산업화의 기적은 수많은 사람들의 인권을 철저하게 짓밟은 성과이기 때문이다.

나를 더 놀라게 한 것은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온 ‘반공주의’였다. 그 사람은 공산주의를 막기 위한 이승만, 박정희의 노력이 국가보안법으로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의 인권보다 더 중요하다고 얘기했다.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고문당하고 희생된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나의 물음에, 그는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은 공산주의를 막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고 답했다.

그 답을 들으며 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 사람의 생각이 케케묵은 반공주의에서 나왔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념이라고 하는 그 덧없는 것을 위해 사람의 생명이 이토록 허무하게 여겨질 수 있구나, 이들에겐 목적만이 있을 뿐 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이란 참으로 덧없는 것이구나. 이들에게 역사란 자신의 편견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기록일 뿐 자기를 되돌아보고 반성하기 위한 계기일 수는 없겠구나. 과거를 되돌아보지 못한다는 점에서 이런 사람들에게 미래는 없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같은 얘기를 하고 있지만 공감할 수 없는 사람들은 뉴라이트만이 아니다.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촛불집회에 관한 얘기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 물론 어떤 사건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서로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다른 편의 논의를 지나치게 축소시키는 건 단지 시선의 차이로 설명될 수 없다.

촛불집회에 관한 토론회에서 만난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은 촛불시위에 나오지 않았고 비정규직이라는 중요한 사회경제적 의제를 배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얘기했다. 가난의 기준이 무엇이고 어떤 점에서 비정규직을 배제했다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다양한 형태로 진화하고 있는 한 사건에 대해 그렇게 한정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어떤 의도를 담고 있을 것이다.

물론 한 사건에 지나치게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경계하고 차분하게 현실을 바라보자는 의도가 그 말에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차분하게 보는 것과 현실을 자신의 관점에서 재단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거리의 정치에 대한 열광이 제도정치에 대한 냉소로 이어지고 보수세력이 중요한 사회적 의제를 독점하리라는 우려는 귀담아 들을 얘기이다. 하지만 그런 정치적 결과에 대한 우려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건의 의미를 규정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참세상>의 집계에 따르면, 촛불집회와 관련되어 구속된 사람이 33명이고 29명이 수배중이며 1,530명이 체포되었다(9월 3일 기준). 경찰의 과잉진압과 인권유린, 과거로 돌아간 듯한 검찰의 수사 등 엄청난 공권력의 탄압을 받으면서도 촛불의 움직임을 이어가려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도 시민이고 한국이 민주공화국이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람을 가진 사람들에게 우리는 ‘어떤 민주주의’를 얘기해야 할까. 아직도 분에 못 이겨 촛불을 든다는 사람에게 우리는 현실정치에서의 패배와 냉소를 얘기해야 할까.

나를 더 놀라게 한 건 대의민주주의에서 비롯된 민주주의의 실패를 다시 대의민주주의로 환원시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한국에서 정당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진보정당을 세우는 노력이 거리에서 머리가 깨지고 경찰에 짓밟힌 사람들보다 더 중요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제도권의 정치가 자신을 얼마나 철저히 배제하는지를 절실히 깨달은 사람들에게 투표로 심판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올바른지도 잘 모르겠다. 내가 알고 믿는 건 촛불을 든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 목소리를 내고 싶어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런 목소리가 사회를 움직이는 힘이 되어야 한다고 바란다는 점이다.

아마 앞으로도 계속 우리는 선거와 관련된 얘기를 듣고 할 것이다. 내년의 보궐선거, 2010의 지방선거, 2012년의 총선... 그러면서 우리는 그 선거 결과를 가지고 촛불의 의미를 다시 해석하고 변화에 관해 얘기할 것이다. 때로는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한 반이명박, 반한나라당 전선을 얘기하고 그것에 촛불의 힘을 동원해야 한다고 얘기할지 모른다.

그러면서 우리가 잊어버리는 건 무엇일까? 정치와 민주주의에 관한 기존의 편견을 깨려는 노력과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의지일 것이다. 작지만 소중하고 소박한 꿈일 것이다. 언제나 우리가 불가능의 영역으로만 밀어놓고 고민하려 하지 않았던 꿈들. 하지만 그렇게 망각된 것들은 그냥 사라지지 않고 풀지 않은 숙제처럼 다시 등장해서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언제나 편견은 시선을 고정시키고 그 시선에 잡히지 않는 것들을 배제하고 망각한다. 그러나 배제되고 잊혀진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다. 그리고 무언가를 잊게 하려는 정치가 있다면 그것을 기억해내고 받아들이려는 기억의 정치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내야 할까? 그것은 짓밟히고 무시된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그 사람들의 인권이 보장되는 정치구조와 민주주의일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한국의 현대사를 장식했던 수많은 비극적인 사건들에서 사람들이 요구했던 바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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