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학들의 속내를 들여다보는 건 한 편의 코미디를 감상하는 것과 비슷하다.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교육’의 이름으로 정당화되고 ‘학문’의 권위로 포장되는 곳이 바로 대학이기 때문이다. 더 재밌는 건 대학의 실상을 모르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는 사람들도 별다른 대안이 없다며 자식들을 코미디의 주인공으로 만든다는 점이다. 우리는 대학에서 무엇을 배우는 것보다 어느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더 중요한 사회에 살고 있으니까.

 

교육기관이 아니라 취업기관, 학벌유지기관으로 전락한 대학이 유지되는 건 일그러진 사회구조를 지탱시키는 다양한 욕망들 때문이다. 4년이라는 시간과 수천만 원의 돈을 낭비해도 졸업장만 따면 학벌을 유지할 수 있다는 욕망, 수도권에만 있으면 어찌 되었건 학생들을 충원할 수 있으니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욕망, 남들도 다 하는데 나만 쳐질 수 없다는 욕망, 어렵게 꿰찬 교수자리이니 자리를 지키며 누릴 걸 다 누려야 한다는 욕망 등이 모여 지금의 뒤틀린 대학을 유지한다. 하지만 비극적이게도 이런 욕망은 다가오는 여러 사회적 위기들을 대비하지 못한다. 대학에서는 농사를 짓는 법도, 에너지를 만드는 법도, 스스로 삶을 개척하는 법도 배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욕망들은 현재의 위기를 더욱더 심화시킬 뿐이다.

 

이 글은 대학 현실에 대한 간략한 스케치이다. 나는 2002년부터 여러 대학을 돌며 강의를 했고, 직함도 시간강사, 겸임교수, 연구교수, 객원교수를 거치며 다양한 이야기를 들고 경험을 했다. 그동안 보고 들은 바들을 자세하게 적는 건 무언가를 목적해서라기보다는 현실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누군가는 드러내야 또 다른 누군가가 그 다음 단계를 밟을 게 아닌가.

 

 

1. 대학 강의실의 풍경

 

한때 대학을 가리켜 진리의 장, 상아탑이라 불렀지만 과연 그럴까? 대학의 교육이 자아를 발견하고 전공과 교양을 강화시킬 수 있을까? 그러려면 영화 <어셉티드>에 나오듯 학생들이 무엇을 배우고 싶은지에 관한 욕구조사를 먼저 하거나 학생들과 논의를 한 뒤 그에 맞게 교육과정이 구성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과정은 대학에 없다.

 

사실상 대학의 교과과정에는 학생들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는다. 한때 총학생회의 힘이 강했을 때는 학생회가 요구하는 강좌가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교양학부나 각 전공학과들이 그때그때 자의적인 기준에 따라 강좌를 개설했다 없앴다 한다. 각 전공/학과/학부의 내규에는 개설할 수 있는 기본과목목록이 있는데, 과목을 없애거나 새로 만드는 건 교수들의 전공이나 강의와 연관되어 있어 논의가 쉽지 않다. 그러다보니 옛날의 과목들이 기계적으로 강의되고 있다. 강의평가제도가 있지만 그건 사후적인 평가이고 강좌의 개설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한다.

 

가끔 교과과정을 바꾸기도 하지만 그 과정에 학생이 참여하지는 못한다. 그건 자율과 인문학을 내세운 과정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대학들이 따라잡기에 열중인 서울대에 다니는 한 대학원생의 말을 들어보자. “2009년에 신설된 자유전공학부는 다양한 전공의 학습을 통해 폭넓고 깊이 있는 사고를 지닌 인재를 양성하겠다던 본래 취지와 달리, 경제․경영학과의 정원을 간접적으로 늘리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됐다. 2009년 이후 의무화된 제2전공도 학생들이 좀더 다양한 교양수업을 수강할 수 있는 권리를 제한하면서 많은 학생이 ‘스펙에 도움이 되는 전공’을 복수 전공하도록 권고하는 조치가 되었다.”[각주:1] 대학들은 사지선다도 선택과 자율이라 생각하는지 선택의 기회를 제한하고서는 그걸 자율이라 우긴다.

 

그러면서 인문학이 트랜드이니 여기저기서 인문학을 들먹인다. 하지만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떤 상태인가, 이곳은 대학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스스로 던지지 못하는 교육이 무슨 인문학인가? 인문학을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고전이라 불려야 할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는 고전들을 기계적으로 배우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그리고 취업을 빌미로 기업이 교육과정에 미치는 영향도 적지 않다. 현재 대학에서 진행되는 인문학이란 기업이 활용할 창의력을 기르면서도 자본주의에 순응하는 인간형을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는 비판도 있다. 예를 들어, “기업 인문학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이윤 목적에 인문학을 종속시킨다. 지식생산의 측면에서 기업 연구소들은 주로 경제, 경영적 주제에 집중해 왔지만 점점 기업 연구소들의 연구는 사회 전략, 정치, 정책 등 인문적 영역으로 확대된다. 이러한 기업문화 조성을 목적으로 하는 기업 인문학은 이미 대학 생활 깊숙이 파고들어 와 있다. 기업들은 이미 주요 대학들을 장악했고 적어도 대학을 통제할 수 있는 위치에 놓임으로써 학생들의 의식은 상당한 정도로 친기업적이고 친자본주의적 방향으로 기울어져 왔다.”[각주:2]

 

또한 교과과정에서 학문의 다양성도 충족되지 않는다. 교육과학기술부의 ‘2012년 교육기본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4년제 대학 교수들 중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10명 중 7명이 미국박사이다. 이러니 학문이 미국의 식민지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영어수업이다, 국제화다 해서 교수채용과정에서도 영어 인터뷰가 필수이다. 유럽이나 동남아시아, 남미를 이해하고 그 언어를 쓸 수 있는 능력은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한다. 한국 대학들이 주장하는 세계화는 미국화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설령 교수들이 신경을 써서 강좌를 개설해도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지금 대학의 시스템에서는 강좌개설과 수강신청이 별개의 문제이다. 수강과 학점취득과정이 전산화되면서 학기 초마다 ‘수강신청대란’이 벌어진다. 홈페이지에 접속해서 수강신청을 해야 하는데, 제법 인기가 있는 과목들은 순식간에 정원이 초과된다. 그래서 컴퓨터 앞에서 대기하며 수강할 과목들을 재빨리 체크하지 않으면 한 학기가 실패이다(새벽에 일어나 명절 기차표를 예매하려 했던 사람들은 이 기분을 알 것이다). 때문에 수강신청한 과목을 서로 거래하거나 심지어 사고파는 웃지 못할 일까지 벌어진다. 그리고 알바 시간에 맞춰 강의를 신청해야 하니 강의주제보다 강의시간이 먼저이다. 내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과목을 듣는 가장 기본적인 욕구조차 제대로 만족시키기 어려운 곳이 바로 대학이다. 그곳에서는 수강이라는 형식이 교육이라는 내용을 압도한다.

 

이런 대란에 대학이 대처하는 방법은 있다. 그것은 수강인원을 마구 늘리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고등학교 한 반보다 학생 수가 늘어난다. 심지어 시간강사 월급을 아끼겠다며 20, 30명이 차지 않으면 과목을 폐강시키는 학교들도 제법 많다.[각주:3] 대형강의실엔 100명 가까운 학생들이 수업을 듣는다. 이런 식으로 어떻게 고등교육이 가능한가?

 

이 과정에서 죽어나는 건 시간강사들이다. 전체 대학 강좌의 절반 정도를 시간강사들이 담당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시간강사는 강의시간이나 강의실 배정, 수강생 수에 관한 아무런 권한도 가지지 못한다(강의를 하지 않을 자유는 있다). 많은 시간강사들이 애매한 시간대의, 학생수가 많은 강좌를 담당한다.

 

그럼에도 강좌의 내용이나 질이 아니라 교수가 아니라는 신분 때문에 시간강사의 보수는 전임교수의 1/5에 지나지 않는다. 방학이 긴 대학인지라 1년에 4개월을 실업으로 지내야하고 그 시간을 버티기 위해 온갖 아르바이트에 손을 대야 한다. 그런데 강의평가는 시간강사들이 많이 맡는 교양강좌에 집중된다.

 

사실 시간강사가 한 학기 강좌를 맡고 맡지 못하는 방식 또한 비상식적이다. 모든 건 학연과 인연으로 연결된 교수들의 손에 달려 있다. 대학에는 기본 규칙이 없고, 휴대전화로 해고 문자를 보내는 야만적인 규칙조차 없다. 다음 학기에도 강의를 맡는다는 연락이 없으면 그걸로 끝이다. 2012년에 통과된 고등교육법 개정안은 학기마다 맺던 고용계약을 최소 1년으로 연장한다고 하지만 눈 가리고 아웅하는 짓이다. 정식으로 계약서를 작성해본 적이 없는데, 어떤 조건으로 강의를 맡는지 확인한 바 없는데, 기한만 연장하는 게 무슨 소용일까? 결국에는 강의를 주겠다며 전화를 하는 교수에게, 대학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다.

 

이런 악조건에서도 시간강사들의 강의내용이 교수들보다 훨씬 낫다는 얘기는 상식이다. 교수들은 몇 년을 우려먹은 강의노트, 이미 지나간 이론들로 강의를 대충 때우는 경우도 많다. 시간강사들에 비하면 천국의 삶이지만 어떤 면에서 교수들에게는 학생들과 상담하거나 진득하게 자신의 사상적, 사회적 과제를 고민할 시간이 없기도 하다. 대학평가제도에서 교원평가의 기준은 논문발표실적과 연구비 수주실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의 대학 제도 안에선 표면적인 성과가 너무 중요해서, 채 배움이 무르익기도 전에 결과를 내놓아야 하고, 또 내놓은 것을 곱씹을 여유도 없이 다음 실적을 위해 경쟁해야 한다. 신자유주의적 대학 평가가 우리를 끝없이 채찍질하는 가운데 교수도 학생도 자신들이 어제보다 더 ‘학문하고 있는가’를 성찰할 수 없게 되어 가고 있다.”[각주:4]

 

이런 처지의 선생과 학생들이 만나 강의실에서 공부를 한다. 요즘 대학들은 강사들에게 파워포인트와 동영상을 활용해서 수업을 하라고 권유(거의 강요)한다. 맞다, 그래야 학생들의 시선이 조금이라도 더 맞춰지기는 한다. 하지만 쉬는 시간이 되면 학생들은 책상에 얼굴을 파묻는다. 고등학교의 쉬는 시간 풍경과 다를 바 없다. 그럴 수밖에 없다. 한 대학생의 기록을 보자.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집에 돌아오면 어느새 밤 11시. 주섬주섬 늦은 저녁을 먹거나 씻고 나면 이미 자정이다. 온몸이 피곤에 찌들어서 그냥 쓰러져 잠들고 싶지만 아직 하루는 끝나지 않았다. 내일이 과제 제출일이기 때문이다.…과제를 하고 난 뒤엔 완전히 탈진 상태로 잠이 들어 버리고, 어쩔 땐 학교에 늦어서 밤새 한 과제를 제출하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교에 다니는 동안 나는 하루에 세끼를 제대로 먹은 기억이 없다. 아침에 달려 나오느라 빈속으로 학교에 도착하고 공복을 달래느라 수업 시간에 간단한 과자나 커피를 마시고 나면 점심시간은 자연스레 어중간해지고 헛배가 불러서 밥 생각이 없다."[각주:5]

이런 상황이니 강의시간에 소통은 불가능하다. 더구나 수업의 평가방식이 세분화되고 상대평가가 강화되다보니 과제와 시험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교수와 학생이 서로 토론하며 학풍을 만들어가는 원래 대학의 취지는 이미 완전히 사라졌다. 팀별 발표를 하고 조별 토론을 해도 그 목적이 평가이고 평가의 권한이 온전히 강사의 몫이기 때문에 큰 변화는 없다(슈퍼스타K니 각종 오디션 프로그램이 협동을 얘기해도 최종 과정에서는 승자가 결정되듯이 말이다). 대학 밖의 혁명은 있었지만 대학 내의 혁명은 아직 없었기에 강의실 풍경은 중고등학교와 다를 바 없다.

 

강의실 풍경은 그대로이지만 연구실의 풍경은 많이 바뀌었다. 한국연구재단이나 기업들이 발주하는 외부의 연구프로젝트가 늘어나면서 교수들이 학부생이나 대학원생들을 조교로 쓰는데, 그 업무의 경계가 없다. 조교는 각종 자료조사로부터 자료정리, 요약까지 상당한 내용을 맡는데 노동의 대가는 형편이 없다(대학원생들의 부담은 더욱더 크다). 열정이 노동으로 변하는 곳은 기업만이 아니다. 기업들은 시설비 들지 않고 인건비가 값싼 대학에 프로젝트를 발주하고, 교수와 학생들은 학생들의 열정을 착취해서 이득을 취한다.

 

이공계의 상황은 더욱더 심각하다. 특히 이공계 대학원생들은 교수들이 받은 기업 프로젝트에 이용당해 왔다. 이공계 출신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털어놓는 이공계 대나무숲(@bamboo12347)에 올라온 내용들을 보자. “나보고 학회가서 무료봉사 하라고 해서 교통비 왕복 3만원은 연구실 비로 처리해 달랬더니, 니 돈으로 가라며 나한테 엄청 욕했지? 근데 당신은 얼마 전에 룸싸롱가서 여자 가슴 만지느라 백 만원 썼다며?” “석사과정은 공노비, 박사과정은 사노비.” 일부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는 곳이 대학이다.

 

때로는 지치고 힘들어 대학을 쉬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다. 학벌사회이다보니 지방대의 학생들은 대학입시만큼 편입시험에 매달리고, 서울에 있는 학교들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대학에 합격하고 나면 휴학을 하고 다시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반수’를 한다. 이런 반수를 막기 위해 대학들이 고안한 방법은 ‘1학년 휴학 금지’이다. 많은 대학들에서 남학생들이 군대를 가는 경우를 제외하면 1학년이 휴학원을 내지 못한다. 가정형편이 어려워도 휴학이 안 되니 돈을 빌려서라도 학교를 다녀야 하고 빌린 돈을 갚아야 하니 아르바이트에 목을 맬 수밖에 없다. 그러니 학교를 다니나 공부를 하지 못하는 학생들도 제법 있다.

 

이처럼 21세기 대학 강의실의 풍경은 아주 황량하다. 신분이 매우 불안정하고 노동조합도 만들지 못하는(또는 않는) 선생들이 알바와 과제, 시험에 찌들은 학생들과 메마른 대화를 나누는 곳이 강의실이다. 파랗게 질려 쓰러질 것 같은 학생들이 삶에 그다지 도움을 주지 못하는 지식을 기계적으로 학습하는 곳이 강의실이다. 이 황폐한 강의실이 존재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래도 대학교가 자식들에게 학벌을 주고 자본주의의 첨병으로 만들어 줄 거라 부모들이 기대한다면, 그것은 엄청난 착각이다. 왜냐하면 학교는 학생들을 자본주의의 총아로 만들어주는 곳이 아니라 그 자체가 자본주의의 총아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학생들은 이윤을 벌어들일 대상일 뿐이다. 강의실을 나와 대학캠퍼스를 둘러보면 현실은 더 황량하다.



2. 대학 캠퍼스의 풍경


지금의 대학 캠퍼스를 표현할 말은 다른 듯하지만 같은 의미의 두 단어이다. 하나는 세계화와 발전을 내세운 ‘공사판’이고, 다른 하나는 온갖 프랜차이즈의 ‘장터’이다. 대부분의 대학들이 미래․글로벌․전문인력 양성이라는 목적을 내세워 대학의 운영체계를 바꾸고 있고 캠퍼스 곳곳을 팔아 기금을 모으느라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학교발전비전이 강조되면서 대학본부 중앙의 기획단위에 지나치게 많은 권한이 집중되고 학생이나 평교수, 직원들이 학교운영에 참여하는 건 더욱더 어려워졌다. 이런 과정은 대학의 폐쇄적인 의사결정구조를 더욱더 심화시키고, 글로벌 스탠다드를 내세운 각 전공별, 학과(학부)별 경쟁을 더 심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대학들은 발전기금 모금과 재정 확보/확충을 내세워 산학협력․협동 강화, 재정수입의 다양화, 수익사업 추진 등을 추진하고 있다. 그런데 산학협력은 대학연구의 사유화․독점화를 불러올 가능성이 높고, 대학의 연구들이 외부프로젝트에 의존하게 된다. 그리고 재정수입의 다양화나 수익사업 추진은 시장논리에 맞춰 대학운영이나 학사행정을 재구성할 가능성을 높인다. 결국 한국사회의 비상식적인 시장논리나 발전논리가 대학의 교과과정과 운영을 지배하고 있다.

 

설마 대학이 그럴까 의심할 수도 있지만 실제 진행과정을 보면 그런 의심이 사라진다. 왜냐하면 대학들의 비전은 하나같이 인프라 혁신․첨단화를 내세운 캠퍼스 공간의 물리적인 재편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연구복합단지, 제2캠퍼스, 유비쿼터스 캠퍼스 등을 내세운 공간의 물리적인 재편은 용역회사와 세콤 등의 기업체들이 대학의 주요공간을 점유하고 ‘관리의 효율성’에 맞춰 생활공간을 재편성하고 있는 상황에서 캠퍼스의 ‘사유화’를 부추길 것이다. 더구나 이런 캠퍼스의 재편성은 대학들이 ‘일방적으로’ 축적하고 있는 적립금을 정당화시켜준다.

 

실제로 전국 사립대의 적립금 규모는 2007년에 약 8조원이었으나 2011년에는 11조 1,500억 원으로 3조 이상 늘어났다. 그리고 대학당국은 적립금을 보유해야 하는 주요 논리로 캠퍼스 건립이나 물리적인 공간의 재편성 등을 내세우고 있다(대부분의 대학 적립금이 건축 적립금인데, 장학금을 위한 장학적립금은 건축 적립금의 1/10 수준이다). 예를 들어, 2012년 홍익대는 건축 적립금으로 5,221억을 보유하고 있는데, 전체 적립금의 89% 수준이다. 이에 비해 홍익대의 장학적립금은 557억원으로 10분의 1수준에 그친다. 그리고 한국대학교육연구소에 따르면, 2009년 1년 동안 전국 사립대가 땅을 사고 건물을 올리느라 쓴 돈이 무려 1조 2,668억 원이다. 그런데 그중 사립대 법인이 부담한 돈은 겨우 1,366억 원(10.8%)이다. 결국 1조원 넘는 학생 등록금이 공사판에 들어갔다. 학생들을 위해 그랬다는 건 궁색한 변명이다. 학생은 졸업해도 건물은 남으니까.

 

더구나 그런 돈도 없으면 기업들의 후원을 받고 학교 건물에 기업명을 붙여준다. 그래서 대학에 ‘포스코관’, ‘삼성관’, ‘현대차 경영관’ 등의 건물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 대학캠퍼스는 학문의 전당이기는커녕 기업의 홍보관 또는 전시장으로 변해간다.

 

더구나 2009년에만 사립대학들이 기업들에 학내 공간을 임대해서 얻은 수익이 총 1,225억 원이다. 이렇게 번 돈을 주식에 투자했다가 2010년에만 약 150억 원의 손해를 봤고 2011년에도 중앙대, 고려대 등 42곳의 대학들이 적립금을 수익증권 등 금융상품에 5,000억 원을 넘게 투자했다가 약 144억의 손해를 봤다. 이런 상황에서도 사립대학들은 수익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않는다. 한국의 사립대학들은 교육기관이 아니라 영리를 추구하는 학원이니까.

 

사학재단들의 적립금은 이미 10조원을 넘어 섰는데 반해, 학자금 대출을 받았다가 원금을 상환하지 못한 학생들의 수는 2010년에는 2만 5천 366명으로, 2006년 670명에 비해 5년 사이에 약 38배나 증가했다. 학부모와 학생들이 비싼 등록금을 마련하느라 허리가 휘었던 지난 10년 동안 대학적립금은 2배 이상 증가했다. 2012년 조사에 따르면 정부의 학자금 대출을 받고 6개월 이상 대출금을 갚지 못해 신용불량자가 된 대학생이 5년 전보다 약 10배나 늘어난 3만 7,400여명에 달한다. 돈을 빌려 학교를 다니는데 졸업해도 취업이 되지 않으니 학교를 떠난 사회의 첫발을 빚쟁이로 시작하게 된다.

 

현재의 사립학교법에 따르면, 지금의 현실과 정반대로 학교법인은 수익용 재산을 보유해서 등록금 비중을 낮추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2011년 전국 사립대학 법인들 중 15곳은 수익금 중 단 한 푼도 학교로 내놓지 않았고 수익의 80% 이상을 학교의 운영경비로 내놓아야 한다는 규정을 위반한 법인이 1/3에 달했다. 경제사정이 어려우니 법인의 상황도 어려워 그렇지 않겠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울산대, 동국대, 서강대, 숙명여대 등 제법 알려진 대학법인들이 규정을 어겼다. 더구나 사립대 법인 166곳이 수익용 기본재산으로 보유한 땅이 200㎢가 넘고 시가로 4조 5000억 원대에 달한다고 한다. 그런데 대학이 이 땅을 통해 실제로 창출한 수익은 자산가치의 0.6%에 불과하니 부동산 투기라는 의혹을 피하기 어렵다. 대충 조건을 갖춰 학교를 만들기만 하면 학생들의 등록금으로 학교를 운영하며 각종 사업에 뛰어들 수 있으니 대학설립은 손해 볼 게 없는 ‘장사’이다.

 

캠퍼스의 일상생활로 들어가면 그 장사속이 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보편적 복지를 얘기하는 교수들이 정작 자기 학생들의 복지에는 관심이 없다는 아이러니!). 일단 가장 기본적인 먹거리를 보자. 외식업체들이 대학식당을 위탁운영하는 경우가 많고 대부분이 학생들의 건강보다 가격을 먼저 고려한다. 대학식당에서 저렴한 가격에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건 옛날 이야기이다. 심지어 세종대에서는 학생들에게 싼 가격에 질 좋은 먹거리를 제공하는 <대학생활협동조합>을 학교에서 강제로 몰아내려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대학생협>이 운영하는 매점이나 식당은 기업체가 운영하는 곳보다 훨씬 싼데도 학교에 기금을 내놓지 않는다며 위협했고 <대학생협>을 상대로 학교식당 및 복지시설의 운영권을 위임하라는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예전에는 학교 내의 자판기를 학생회가 관리해서 장학금을 만들기도 했지만 요즘은 그것도 학교가 파는 사업권일 뿐이다.

 

그리고 대학 기숙사들은 민간투자(BTL) 방식으로 세워진다. 즉 기업은 일정 기간 기숙사를 운영해 자금을 회수하고 15~20년 뒤에 기숙사를 대학에 기증하는 방식이다. 대학은 공짜로 건물을 받으니 이득이고, 기업은 안정적인 수익을 보장받을 수 있어서 좋다. 그런데 기업의 요구에 따라 대학이 신입생의 기숙사 입실을 권유하거나 의무화하는 곳도 있다고 한다. 결국 피해를 보는 건 일반 기숙사보다 2~3배 비싼 입주비를 내야 하는 학생들이다. 심지어 학생들에게 강제로 기숙사 식권을 사도록 하고 사지 않는 학생들을 강제퇴사시키는 일까지 있었다. 학교가 ‘끼워팔기’까지 시도하는 상황이다.

 

심지어 학교운동장 운영권을 학교가 외부에 팔아먹기도 한다. 민간업자가 운동장에 각종 시설을 설치하고 대여료를 받는 대신 20년 뒤에 대학에 시설을 넘겨준다는 조건이다. 앞서 얘기한 민간투자방식이 운동장에도 적용되는 셈이다. 그러다보니 체육동아리들이 운동장조차 제대로 쓰지 못하는 희한한 풍경이 연출된다. 이 과정에서 학교측은 학생들에게 아무런 의견도 구하지 않았다.

 

강의실도 마찬가지이다. 예전에는 학생들이 자유로이 강의실을 이용하고 심지어 강의실에서 밤을 지새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런 일이 불가능하다. 첨단강의실을 만든다는 명목으로 강의실마다 컴퓨터와 빔프로젝터를 갖추다보니, 이를 관리한다는 명목으로 대학들은 민간경비업체들에게 건물의 관리권을 넘겼다. 그러니 값비싼 공간이 될수록 학생들이 자치할 영역은 줄어드는 셈이다.

 

그 뿐이 아니다. 대다수의 대학들은 학생증을 은행의 체크카드로 만들어서 학생들의 개인정보가 학교의 주거래은행으로 넘어가게 했다. 학생증 맡겨 놓고 외상술을 먹었다는 얘기는 이제 불가능하다. 누가 자신의 카드를 술집에 맡기겠는가? 그리고 학생증을 비롯한 각종 서류를 발급하는 비용도 외주화되다보니 계속 가격이 높아진다. 이 역시 행정시스템 효율화라는 명목으로 정당화된다.

 

캠퍼스에서 소외되는 사람들은 학생들만이 아니다. 대학에서 일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외부의 용역업체에서 파견된 사람들이다. 강의실 청소나 주차관리 등 서비스가 필요한 곳에서 여러 사람들이 일한다. 그런데 홍익대 청소노동자들의 사례로 증명되었듯이 파견노동자라 노동조건이 아주 열악할 뿐만 아니라 사고를 당해도 학교는 전혀 책임을 지지 않는다. 학교에서 일하는 행정직원들도 비정규직이라 기본적인 노동권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인권과 평화의 대학이라 알려진 성공회대에서도 비정규직들이 비슷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아이러니!).

 

교수들의 상황은 다른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1976년에 도입된 교수재임용제도에 따라 교수들도 재임용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재단이나 정부의 입맛에 맞지 않는 교수들이 탈락하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영화 <부러진 화살>로 유명해진 성균관대 김명호 교수도 재임용 과정에서 탈락했다). 정년을 보장받고 있지만 교수들이 재단 측과 나쁜 관계를 맺지 않으려는 건 이 때문이다. 학교 외부에서 진보적이라고 알려진 교수들이 학교에서 보수적인 행태를 보이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대학은 캠퍼스 내의 언로마저 막고 있다. 강제로 대학생협을 내쫓아내려던 세종대는 학생들의 대자보를 막고 있고, 심지어 진보적으로 알려진 대학조차 ‘취업률 상승’을 빌미로 대자보판을 철거한다거나 동아리를 통폐합하는 일까지 벌이고 있다. 대자보조차 마음대로 붙일 수 없으니 대학이 사회운동의 보루나 해방구 역할을 하던 시기는 이미 지나가 버린 셈이다.

 

대학의 공공성을 강화시켜야 할 정부는 그동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대학이 교육기관이라는 정체성을 버리고 사업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2005년 정부가 ‘대학설립운영규정’을 개정해 기업이나 개인이 기숙사나 식당 같은 시설을 운영할 수 있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부는 2012년에도 ‘대학자율화 추진계획’이라는 명목으로 대학에 많은 권한을 이양하고 정부지원금의 용도제한도 완화시켰으며 사립대들이 교육용 기본재산을 수익용 재산으로 손쉽게 용도변경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캠퍼스 내 건물 신ㆍ증축 관련 규제도 대폭 완화시켰고, 교원인사에서도 대학총장이나 이사회의 권한을 강화시키고 교원을 임면할 때 교과부에 제출할 서류를 간략하게 하고 보고의무를 없앴다. 정부는 교육공공성을 보장하거나 강화시키기는커녕 자율화․특성화라는 명목 하에 사립재단의 운영권한과 대학의 상업성을 강화시키고 있다.



3. 사립대학의 이사회 풍경,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전체 대학 중 사립대가 차지하는 비중은 학교 수로 74.9%이고 학생 수는 87%에 달한다. 그런데 사립대학이라해서 설립자가 마음대로 학교를 운영하지는 못한다. 고등교육법에 따르면, 대학 법인은 공공기관이기 때문이다(그래서 정보공개법에 따라 사립대학도 공공기관으로서 정보를 공개할 의무를 갖는다). 개인이 마음대로 운영하지 못하고 법인을 설립해서 운영하도록 정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리고 사립학교의 교원이라 하더라도 사립학교법에 의해 그 지위와 신분을 보장받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이다. 그러니 대학은 사유화된 소유물이 아니라 공공의 자산이어야 여겨져야 한다.

 

그리고 사립학교법은 “사립학교의 특수성에 비추어 그 자주성을 확보하고 공공성을 앙양함으로써 사립학교의 건전한 발달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목적을 규정한다. 즉 사립학교의 목적은 공공성을 기르는 것이고, 이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창업자가 마음대로 학교를 운영하지 못하도록 법인 내에 이사회를 두고 이사회가 중요한 사항에 공동책임을 지도록 만들었다. 아울러 이사회의 기능과 소집, 의결정족수 등을 법으로 규정하고 그 회의록도 공개하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의 사학재단들은 왜 이 모양일까? 짐작하다시피 대학 법인들은 철저하게 사유화되어 있다. 2011년 9월에 열린 한 사립대학교의 이사회 회의록을 살펴보자. 총 12명의 이사 중 10명이 참석하고 감사 2명, 직원 5명이 참석해 회의가 진행된다. 교원 인사와 교원인력운영계획, 행정직원 징계의결요구 승인, 기본재산 취득, 기숙사 신축 등 학교 내의 세세한 문제까지 이사회 의결을 거쳐 결정된다.

 

흥미로운 건 이사장 선임에 관한 내용이다. 임기가 만료된 이사장이 후임 이사와 후임 이사장을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선임해 달라는 덕담을 남기고 회의장을 떠난다. 그리고 이사 한 명이 이사장 권한을 위임받아 회의를 진행하면서, 앞서 떠난 이사장의 이사 임기가 오늘로 끝나니 지금 새로운 이사를 선임하자고 이사회의 의견을 묻는다. 이에 신중하게 이사를 선임해야 한다며 한 이사가 반대하자 현 총장이 이사장의 연임을 제안한다. 이에 반대하던 이사는 “회의 진행이 밖에서 들었던 소문 그대로 진행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부분들이 그렇습니다.”라는 의견을 낸다. 그러자 이사장 권한대행은 이 말이 이사 선임과 관련 없는 얘기라며 무기명 투표로 결정을 내리자고 결정한다. 그러자 반대하던 이사는 투표를 거부하고 회의장을 떠난다. 남은 이사 중 8명(전원)의 찬성으로 이사장이 연임되고, 연이어 다시 이사장으로 추천된다.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자 이사장은 연임되고 회의는 계속 진행된다.

 

큰 문제 없이 회의가 끝났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사회의 결정에 반대하며 회의장을 떠난 이사와 현 총장이 모두 학교 설립자의 아들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생각거리가 많아진다. 특히 반대하며 떠난 이사는 현 총장 이전의 총장이었다. 그리고 이사장이 능력부족을 인정하며 사임했는데 이를 다시 추대해 이사장으로 임명하는 과정도 뭔가 석연치 않고, 이 이사장을 현 총장이 추대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더 그렇다. 다른 원인들도 있겠지만 이 모습은 설립자의 아들, 딸이 이사회의 이사직을 차지하고 있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서울대와 더불어 소위 하늘(SKY) 대학이라 불리는 연세대와 고려대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연세대 재단의 이사장은 방우영 조선일보 상임고문으로 1997년부터 이사장 자리를 꿰차고 장기집권하고 있다. 학교 설립자인 기독교 교단의 반대에도 자기 뜻대로 재단 정관까지 뜯어고치며 권력을 휘두른다. 고려대 재단의 이사장 역시 설립자인 김성수 가문의 혈족이다. 그러니 김성수 일가의 소유인 동아일보가 고려대의 운영에 개입한다는 소문도 무조건 부정하기 어렵다. 유명 사립재단들의 사정조차 이러니 여론의 눈길이 닿지 않는 다른 대학들의 상황이 나을 리 없다. 학내비리가 적발된 대부분의 대학에서 많은 문제들은 설립자의 가족들이 학교일에 개입하는 것에서부터 비롯된다.

 

이런 사정 때문에 이사장이나 이사의 배우자나 직계존비속의 학교장이나 회계직원 임명을 제한해야 한다는 얘기가 있지만 사학재단들의 저항이 워낙 거세다. 2007년도에 사립학교법이 개정될 때에도 사학재단들의 저항이 거셌다. 그리고 개정된 법에 따라 대학평의원회가 만들어져 대학의 발전계획이나 학칙, 대학헌장, 교육과정의 운영 등을 심의하도록 했지만 대학평의회가 제대로 활동한다는 얘기를 듣기 어렵다.

 

이 와중에 재단과 가까운 대학 총장들이 학교를 좌지우지한다. 지금은 많은 대학에서 총장이 직선제로 선출되고 있다. 재단이 총장을 선임했던 시절보다 지금이 나쁘다고 얘기할 수는 없지만 곳곳에서 대학직선제의 폐해도 드러나고 있다. 학교 내에서 자기 세력을 키우기 위해 연구나 교육보다 학내정치에 몰두하는 사람들이 많고, 그런 사람들이 총장으로 임명되면서 실제로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왜 교수들은 총장이 되고 싶어할까? 대학체계에 손댈 권한도 가지지만 개인적인 이득이 더 크다. 얼마 전 사표를 낸 건국대 김진규총장은 과도한 연구업적 요구와 무리한 학과구조조정, 4억이 넘는 연봉, 수 억의 업무추진비를 썼다는 문제로 사퇴했다. 카이스트에서는 학생과 교수가 연이어 자살할 만큼의 보여주기식, 업적 쌓기식 개혁 때문에 총장이 사퇴했다. 수원여자대학교에서는 총장이 납품업체에게 뇌물을 받고 회계서류를 조작했다는 이유로, 백석대에서도 공사대금 중 수십 억원이 리베이트비용으로 총장 처남의 계좌에 입금되었다는 이유로, 부산대에서도 민간투자사업을 둘러싼 비리 정황이 포착되어 총장이 사퇴했다. 교육기관이라고 하지만 실제 모습을 보면 이권을 둘러싼 아사리판에 가깝다.

 

진보적인 목소리를 내는 지식인들이 대학에 제법 많은데 왜 이런 문제가 바로잡히지 않을까? 앞서 말했듯 이는 재단의 권한이 강해지면서 교수직이 위태로워진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렇지만 신분과 관련된 문제 외에 인식론적인 문제도 있다. 미국의 지식인 마셜 버만(Marshall Berman)은 『맑스주의의 향연』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나는 많은 지식인들이 각자의 정치적 견해와 상관없이 일상생활의 문제와 흐름에서 단절돼 있는 것이 지식인들의 직업적 위기라고 본다. 그러나 이것은 좌파 지식인들에게는 특별한 문제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다른 어떤 정치운동보다도 민중에 주목하고, 민중을 존중하며, 민중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민중의 요구에 관심을 기울이며, 민중을 뭉치게 해, 자신들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 싸우게 한다는 사실에 특별한 자부심을 느끼기 때문이다.…우리가 민중의 구체적 삶과 연결지점을 잃어버린다면, 장차 민중의 삶을 한데 묶을 사상을 만들어 낼 수 없다. 민중이 세계를 바라보고 느끼고 경험하는 것처럼 민중들을 인식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민중이 자기 자신들을 인식하거나 세계를 변화하는 데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을 것이다. 거리의 신호들을 읽지 못하는 한, 그 잘난 『자본론』을 읽어봤자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밖으로 아무리 비정규직과 사회적 약자, 소수자를 떠들어도 결국은 자신의 일상이 그 사람들과 단절되어 있다면, 자신의 생활근거지에서 그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욕구에 주목하고 그들과 더불어 함께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제아무리 똑똑하고 좌파이론에 박식한 사람들일지라도 그들은 진보적일 수 없다. 진보적이라는 딱지가 그 삶의 진보성을 보증하지는 못한다.



4. 교수와 학생, 직원의 폴리스?


이것이 한국만의 특수한 상황은 아니다. 한국전쟁 전문가로 알려진 브루스 커밍스(B. Cumings)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이 지은 『대학과 제국』이란 책을 보면 정부와 기업이 대학을 어떻게 길들여왔는지가 잘 드러난다. 카멜롯 프로젝트, 트로이 프로젝트 등 미국이 남미나 다른 제3세계를 지배하기 위한 전략들이 대학의 프로젝트로 발주되고, 사회과학자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이 그 프로젝트에 참여한다. 이 책에서 로렌스 솔리(Lawrence Soley)는 정부만이 아니라 기업이 대학을 어떻게 지배하게 되었는지를 분석한다. “교육을 목적으로 기업이나 기업재단에서 대학으로 흘러 들어가는 돈은 냉전시대에 정부보조금이 학문분야에 영향력을 행사한 것과 거의 같은 방식으로 학문분야의 방향에 영향을 끼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가령 보수적인 군수제조업체가 설립하고 재정지원을 하는 존 M. 올린 재단은 시카고대학, 예일, 스탠포드, 하버드, 콜롬비아, 조지 메이슨, 조지타운, 듀크 대학을 포함하여 일류 법과대학을 가지고 있는 몇몇 대학들에서 진행되는 ‘법률과 경제학’이라는 연구 프로그램을 후원해 주고 있다. 이 ‘법률과 경제학’은 이 재단의 극우이데올로기와 일치하는 법철학으로서, 공화당의 분석가 K. 필립스는 자신의 저서 『부자와 빈자의 정치학』에서 ‘법률과 경제학’은 H. 스펜서와 W.G. 서머의 시각을 상기시키는 신다윈주의 ‘이론’이라고 쓰고 있다. “시장에서의 상품선택 과정은 정부의 의사결정을 대체할 수 있다”고 전도하고 있는 ‘법률과 경제학’같은 강좌가 나날이 인기가 높아지고 있는 현실을 개탄한다.” 이처럼 기업들은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대학의 강좌를 만들거나 그 강좌를 지원하면서 학문의 흐름을 주도한다.1)

뿐만 아니라 기업은 소위 산학협동과정을 통해 막대한 이득을 보기도 한다. 솔리에 따르면, “외국기업을 포함하여 기업들이 대학에 연구기금을 제공한 또 한 가지 이유는 경제학 측면에서 설명될 수 있는데, 납세자와 수업료에 의해서 세워진 대학연구소에서 연구를 수행하는 것이 그에 상당하는 건물과 장비를 갖춘 기업실험실에서 하는 것보다 더 저렴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학은 낮은 비용으로 대학원생들을 연구보조원으로 고용하여 민간부문의 연구원들보다 훨씬 더 적은 숫자로 동일한 연구를 수행할 수 있다.”2) 기업이 갖춰야 할 실험 장비를 대학이 마련하게 하고(그러면서 생색도 내고), 값싼 노동력인 대학원생들을 착취하는 거다. 꿩 먹고 알 먹고란 이런 걸 얘기하는 게 아닐까?

이런 게 미국 대학만의 문제점은 아니다. 오히려 이는 한국대학에서 사회주의나 기타 비판적인 강좌들이 모두 사라진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대학의 커리큘럼들을 두루 살펴보면 이런 영향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대학 곳곳에 자리잡은 산학협동단지나 벤처단지 등등을 보면 이미 대학은 기업의 영향력에 완전히 압도당했다고 얘기할 수 있다. 그러니 대학이 상식적으로 움직이길 바라는 게 어쩌면 몰상식한 건지도 모른다. 대학이 비판적 지식인들의 온실이라는 얘기는 이미 옛날 얘기가 되어버렸다. “대학이 기업화되었다는 것은 또한 생산의 과정을 사기업의 방식으로 관리한다는 의미를 포함하기도 한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대학을 포함한 학교에서 ‘평가’라는 용어가 시대적 화두로 등장했는데, 이러한 변화의 이면에는 교육과 배움의 과정을 과학적인 차원에서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철저하게 관리하겠다는 발상의 전환이 깔려 있다. 이제 더 이상 대학의 주체는 교수와 학생이 아니며 기업형 행정관리체제가 대학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3)

중앙대에서는 급기야 학교 구조조정을 반대하는 대학생들이 공사장의 타워크레인에 오르고 한강대교 아치에도 오르는 일까지 생겼다. 학생들의 입장에선 할 만큼 한 셈이다. 그러나 이런 행동도 구조조정을 막지는 못했다. 그뿐이 아니다. “타워크레인에서 내려오자마자 연행되면서 나는 두산건설로부터 고소를 당했다. 그리고 4일 뒤인 4월 12일, 학교로부터 2,500여만 원의 손해배상 청구를 받았고 그로부터 한 달 뒤 퇴학당했다.”4) 고려대에서는 학교결정에 반대하는 학생들을 ‘출교’시키기도 했다.

이런 대학에서 어떤 대학을 꿈꿀 수 있을까? 엄기호는 “학교를 사적인 일상과 공적인 정치가 만나는 공간으로 만들고자 했던 그 꿈”을 얘기한다. “이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다시 공적으로 입을 여는 것이다. 비록 힘들고 외롭고 지치더라도 아렌트가 말한 것처럼 우리가 누구인지를 “리얼하고도 교환 불가능한 방법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이것은 학교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자존감이 달린 문제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공적인 것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물론 우리가 드러내는 것이 진리가 아닌 의견이며 의견이 때로는 이견이 되는 한 불화는 피할 수 없다. 두 번째로 이 불화를 자신의 능력으로 혼자서 뚝딱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바우만이 지적한 것처럼 “함께 결정”할 때 불화는 폭력이 아니라 정치가 될 수 있다. 불화가 폭력이 아니라 정치가 될 수 있도록 조정하는 곳, 그것이 폴리스가 아니겠는가?”5)

사실 대학을 바꾼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고, 대학생협을 학교에서 내쫓으려는 세종대 재단의 시도를 ‘갑’이라며 인정하는 법원의 태도에서 드러나듯 정부 또한 사학재단 앞에서 무기력할 때가 많다. 그래도 찍 소리 못하고 당하는 것보다는 꿈틀이라도 하는 게 올바르다. 지금 대학에는 불화가 필요하다.

일단 정보를 가지면 구체적인 대응을 하며 불화를 일으킬 수 있다. 2011년 9월에 개정된 ‘고등교육법’은 학생위원이 등록금심의위원회의 3/10 이상을 차지해야 하고 회의록을 학교 홈페이지에 공개해야 하며 위원회가 학교측에 자료를 요청할 권리가 있다고 규정한다. 즉 대학생위원이 등록금의 산출근거나 대학의 회계운영현황 등을 학교 측에 요구할 수 있다는 얘기이다. 그리고 기본적인 자료나 다른 학교의 자료, 기본적인 통계가 궁금하면 한국대학교육연구소(http://www.khei.re.kr/)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렇게 자료를 모으면 학교의 논리를 구체적으로 반박할 수 있다.

물론 학교 측이 순순히 이런 자료를 주지 않을 수 있고, 그럴 경우에 법적으로 처벌할 방법도 마땅치 않다. 그럴 경우 국․공립대학만이 아니라 사립대학도 공공기관이라 정보공개청구의 대상이라는 점을 활용해야 한다. 실제로 2011년 11월 중앙행정심판위원회는 교육과학기술부 산하의 한국사학진흥재단이 보유하고 있는 사학재단의 결산서를 공개하라고 결정했다. 이런 사례가 있으니 학교가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다면 직접 청구할 수 있다. 정보공개센터(http://www.opengirok.or.kr/)를 통하면 정보공개청구에 관한 노하우를 배울 수 있다.

이렇게 해도 대학의 입장이 바뀌지 본격적인 정치가 필요하다. 국민권익위원회가 운영하는 국민신문고(www.epeople.go.kr)에 가면 민원을 넣을 수 있다. 내용과 상관없이 민원을 넣으면 위원회가 관련부서를 알아서 찾아 통보하고 처리결과를 알려주니 효과적이다. 다만 요구사항을 분명히 해야 구체적인 답변을 들을 수 있다. 아니면 국가인권위원회의 인권상담포털(http://consult.humanrights.go.kr/)에 진정이나 민원을 접수하면 된다. 1학년 휴학을 교칙으로 금지한다거나 상대평가제도를 강화하고 수강신청을 제한하는 것 등 생각해보면 제기할 내용이 많다.

그래도 안 되면 지난 총선을 통해 국회의원이 된 청년대표들에게 자료를 받아달라고 부탁하면 된다. 국회의원이 교육과학기술부를 통해 자료를 요청하면 대학들은 반드시 관련 자료를 제출해야 한다. 그리고 국회 홈페이지(http://www.assembly.go.kr/)에 가면 지금 국회가 다루는 법률이나 국회의원들에 대한 정보들을 얻을 수 있다. ‘정보광장’코너에서 회의관련정보와 법률관련정보 등을 검색할 수 있고, ‘의원광장’코너에서는 국회의원 현황과 국회의원들을 검색해서 볼 수 있고 그들의 홈페이지에도 찾아갈 수 있다.

물론 열심히 노력해도 자료를 거의 구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도 실망은 하지 말자. 이런 시도를 하는 것만으로도 학교는 긴장한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 학교가 꼼수를 부리기 어렵다. 학교가 상대평가방식을 선호하는 것은 그것이 학생을 통제하는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 대학들은 많은 돈을 홍보비로 쓰고 있기 때문에 언론이나 외부에 학교 일이 퍼지는 것을 부담스러워 한다. 그리고 신문이나 TV같은 언론사에 제보하거나 트위터, 페이스북 등의 소셜네트워크를 활용해 압박을 가하면 학교 측의 태도가 달라진다.

그리고 등록금을 낮추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내가 낸 등록금이 제대로 쓰이고 있는지, 그리고 등록금을 내는 사람으로서 나의 권리를 제대로 누리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학교의 공간을 이용하고 도서관에 책을 신청하고 실험실습비를 쓰는 그 모든 과정에 학생의 권리가 있다. 그리고 빼곡한 강의실에 흥미도 없는 주제의 강의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강의를 개설하도록 요구하는 것도 학생의 권리이다. 교육내용은 교수의 몫이지만 교육과정은 공동의 몫이니까, 그리고 재단이 아니라 우리가 교수들의 월급을 주니까.

그리고 대학 공간이 외부 기업에게 팔리면 팔릴수록 그만큼 생활비가 많이 든다. 반면에 대학생활협동조합이 있으면 낮은 가격에 질 좋은 상품을 구매할 수 있다. 그러니 대학생협을 만들도록 학교에 요구하거나 대학생들이 직접 만드는 것도 생활비를 줄이는 방법이다. 2012년 협동조합기본법이 제정되어 출자금 규모에 상관없이 5인 이상이 모여 신고하면 협동조합을 만들 수 있고 여러 가지 지원도 받을 수 있다.

혼자서 학교의 문제를 지적하기 어려우면 학내의 비정규직, 일용직 노동자들과 연대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백짓장도 맞들면 났다고 청소노동자나 주차관리원, 시간강사 등과 연대하여 학내를 점거하고 그곳에서 새로운 사건을 만드는 것도 좋다. 실제로 성공회대의 노숙모임인 ‘꿈꾸는 슬리퍼’는 2009년부터 학교 내에 텐트를 치고 살고 있다.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H. Arendt)는 이런 말을 남겼다. 고대 아테네의 “폴리스는 지리적으로 자리잡은 도시국가가 아니다. 폴리스는 사람들이 함께 행위하고 말함으로써 발생하는 사람들의 조직체이다. 그리고 폴리스의 참된 공간은, 그들이 어디에 있든지 간에, 이 목적을 위해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한다. “네가 어디로 가든지 간에 너는 폴리스가 될 것이다.” 이 유명한 말은 단순히 그리스의 식민지화의 모토가 아니다.”6)

지금 대학을 폴리스로 만들 수 있는 것도 교육과정이나 캠퍼스가 아니다. 진정한 대학에 관해 말하고 행위하며 폴리스를 꿈꾸는 사람들의 연대이다. 그것만이 희망이다.

  1. 문수현, “학문하지 않는 대학”, 《오늘의 교육》2011년 5․6월호, 55쪽. [본문으로]
  2. 정용주, “기업화된 대학: 잔인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야만”, 《오늘의 교육》2011년 5․6월, 121쪽. [본문으로]
  3. 학기가 개강하고 난 뒤에 수강인원이 결정되기 때문에 시간강사들은 하루 아침에 아무런 대책도 없이 일자리를 잃기도 한다. 보통 수강신청 정정기간이 개강 후 2주차에 있기 때문에 1주 강의를 하고 난 뒤에 일방적으로 강좌폐지 통보를 받는 경우도 많다. 이렇게 불안한 삶을 사는 일용직 노동자들이 시간강사이다. [본문으로]
  4. 문수현, 앞의 글, 59쪽. [본문으로]
  5. 서유정, “공부할수록 가난해지는, 가난할수록 공부할 수 없는”, 《오늘의 교육》2011년 5․6월호, 89쪽. [본문으로]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