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발견>
박상훈 지음·폴리테이아·2011

정치에 대한 날선 비판은 넘쳐나지만, 우리 사회에서 어떤 정치를 원한다는 얘기는 듣기 쉽지 않다. 그 점은 이른바 진보정당이 등장한 뒤에도 별로 달라진 바 없다. 그러나 정치를 무시하고 외면하는 것으론 좋은 세상을 기대할 수 없다. 오히려 정치가 살아나야 좋은 삶을 꿈꿀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정치의 발견>은 여러 가지 고민거리를 던진다.

<정치의 발견>은 몇 가지 장점이 있다. 보통 정치를 다루는 책은 자신의 논리를 장황하게 설명하는데, 이 책은 말하려는 바를 간결하고 분명하게 드러낸다. 정치는 현실 세계에서 다수의 사람들이 벌이는 활동이기에 정해진 이념이나 노선에 따라 진행되지 않는다. 근대 사회에서 정치는 선거와 정당을 중심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는데, 그런 제도와 조직을 민주적으로 만들고 퇴화되는 것을 막으려면 ‘지도자의 역할’, ‘정치가의 리더십’이 중요하다. 정치가의 리더십은 의사소통과 말의 힘을 통해, 일상생활의 경험과 언어를 통해 발휘된다. 진보정치는 권력을 거부하지 말고 오히려 권력을 잘 활용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200쪽을 조금 넘긴 분량에 저자의 주장을 잘 담았다.
 
정치와 진보

또 다른 장점은 독자층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진보정당 사람을 대상으로 진행된 강의를 정리했기에, 독자층도 ‘진보파’이다. 어정쩡한 선에서 타협하지 않고 진보파에 대한 불만과 충고를 과감하게 쏟아낸다. 목적만을 강조하는 진보파에게 이 책은 “좀더 정치적이고 좀더 인간적이 되어야 한다”고 충고한다. 그리고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이념과 가치의 다원주의, 타인에 대한 인간적 정중함과 관용을 핵심으로 하는 정치적 이성을 통해 경쟁”해야 하고, 무엇보다 진보적인 정치가는 “정치적 이성에 대한 자각을 통해 인격적인 깊이를 갖춰야” 한다(미국의 사회개혁가 솔 알린스키와 정치가 버락 오바마가 구체적인 사례로 제시된다). 진보파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밝히지 않지만 진보정치를 외치는 사람들이 진지하게 고민할 만한 화두를 제안한다.

또한 이 책은 ‘정치’라는 단어에 실린 지나친 무게감을 좀 덜어낸다. 어쩌면 정치에 대한 지나친 흥분과 냉소는 정치가 모든 것을 해결해주기 바라는 기대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할 거란 비관이 빚은 결과물일지 모른다. 조금은 편해져야 그 단어를 편하게 가지고 놀 수 있고, 그 속에서 자신의 미래를 볼 수 있을 텐데 지금까지 우리 정치는 너무 무거웠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정치를 ‘발견’해낸다.

물론 이 책의 모든 내용에 공감하는 건 아니다. 특히 3강 ‘민주주의를 이해하기 위한 싸움’에서 얘기되는 촛불집회 토론회에는 나도 참여했고, 민주주의와 관련해 저자와 각을 세울 수밖에 없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의 부제가 ‘정치에서 가능성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정치학 강의’가 아니라 ‘제도정치에서 가능성을 찾고자 하는 진보정당의 사람들을 위한 정치학 강의’였다면 내 평도 여기서 그쳤을 것이다. 짧은 지면에서 얘기하기엔 나눠야 할 얘기가 많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함께 고민하면 좋겠다 싶은 점을 몇 가지 얘기하고 싶다. 저자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가 “매우 일면적일 수 있다”고 “하나의 의견 내지 주장”이라 얘기하니 비판적인 대화로 받아들여주면 좋겠다.
 
현실주의와 편견

   
▲ <한겨레> 자료
첫 번째로 고민되는 점은 ‘정치란 무엇인가’이다. “정치는 누가 어떻게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책이 시작되는데, 정치 지평을 좁게 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정치에서 중요한 개념은 권력이고, 누가 권력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사회의 모습이 달라진다. 이 책에서 논의되는 권력은 국가의 공권력이다.

막스 베버와 달리 사상가 한나 아렌트는 “정치란 인간이 아니라 인간들 사이에서(in-between) 생겨나고 다양한 인간들 사이에 세계를 만드는 행위”라고 말한다. 아렌트에게 권력은 목적을 강요하는 수단이 아니라 서로 협력하는 사람들의 능력이고 다수의 시민들이 구성하는 공론장이다. 권력과 폭력의 차이점은 권력이 정당성을 갖는다는 점이고, 권력은 국가의 소유물이 아니라 시민사회의 능력이며, 정부만이 (공)권력을 가진다는 생각은 기득권층이 주입하는 편견이기도 하다. ‘시민사회’나 ‘정치적인 것’이 중요한 건 정치 지평이 넓기 때문이다(후마니타스 출판사에서 번역된 샹탈 무페의 책도 그러하다).

두 번째 논쟁점은 ‘정치와 도덕을 분리시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저자는 “도덕성이 정치적 행위를 규제하는 기준이 될수록 정치가 도덕적일 수 있는 기반은 파괴된다”고 주장한다. 어떤 맥락에서 이런 주장을 했는지는 이해된다. 사심 없는 정치, 권력을 잡지 않는 정치를 내세우는 진보정치의 속내를 드러내기 위해 이런 얘기가 필요할 수 있다.

그렇지만 도덕을 순결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현실 세계를 살아가는 시민의 덕목이자 공동체의 재화를 나누는 방식이라 본다면 정치와 도덕은 분리될 수 없다. 아니 분리돼서는 안 된다. 이런 기준과 가치가 없다면 정치는 끊임없는 협상과 타협의 과정일 뿐 가능성의 장이 아니다(“인간적 삶을 풍부하고 의미 있게 살게 하는 것”이 진보라는 말도 도덕적인 판단을 필요로 한다).
 
통치와 민주주의

세 번째 논쟁점은 정당이다. 저자는 정당민주주의가 현대민주주의의 기본이고 “리더십 있는 정당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우리 사회에서 좋은 정당이나 좋은 정치인이 필요치 않다고 주장할 사람은 없다. 문제는 그런 정당이나 정치인이 강한 시민사회 없이 등장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진보정당 사람들이 리더십 있는 정치인으로 거듭나더라도 그와 더불어 정치에 참여할 시민이 없다면 도루묵이다. 시민 없이 정치나 민주주의가 변화될 수는 없다. 민주주의가 지금껏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다는 점이 민주주의를 포기할 이유는 못 된다.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민주적으로 살아야 할 이유다.

대의제도를 깡그리 무시하고 새로운 정치 시스템을 만들자는 게 아니라, 대의제도가 자신의 본령을 벗어나지 못하는 정치 세계를 만들자는 말이다. 책을 읽으며 저자가 정치 세계와 생활 세계를, 정당 정치와 생활 정치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한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쟁점은 저자가 강조하는 ‘통치의 정치학을 익히는 문제’이다. 우리는 왜 통치의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봐야 할까? 제임스 스콧은 <국가처럼 보기>(에코리브르·2010)에서 통치의 관점이 진보의 이름으로 세계의 다양성과 시민의 경험적 지혜를 파괴해온 역사를 지적한다. 통치를 얘기하는 순간 우리는 민주주의와 멀어지게 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 책의 부록이 껄끄러웠다. "도시 재개발에 반대하지" 않고 용산 참사로 "도시계획자, 공무원, 법관, 경찰관들이 키워온 자부심"이 상처 입을까 걱정하는 저자의 정치학, 이런 일을 올바르게 결정할 "정부다운 자세"가 존재한다는 정치학이 어떤 의도에서 나온 것인지 알지만 적어도 나는 그런 관점에서 세상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글•하승우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운영위원. <세계를 뒤흔든 상호부조론>(그린비·2006), <참여를 넘어서는 직접행동>(한양대학교출판부·2007)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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