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이 글을 읽는 지금도 리비아에서는 총성이 끊이지 않고 있다. 오랫동안 리비아를 지배해온 카다피 국가원수에 반대하는 저항세력이 무장투쟁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총격과 폭격으로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군대와 용병이 위협하고 시민들의 저항은 몇 달 째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민주주의가 뭐 길래 이렇게 질기게 싸울까?


그런데 리비아만의 일이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시민들의 저항에 불이 붙고 있다. 요즘 유행하는 ‘재스민 혁명’이라는 말도 2010년 12월 튀니지의 시민들이 시위를 벌이며 대통령을 몰아낸 사건을 가리키는 말이다. 군대가 출동한 상황에서도 튀니지 시민들은 바리케이트를 치며 저항했고 결국 대통령을 몰아냈다. 그 이후 알제리와 이집트 등으로 저항의 불꽃이 계속 번지고 있다. 왜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저항할까?


목숨을 걸고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중동과 아프리카의 시민들을 보며 민주적인 나라의 시민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당장 내 눈앞의 일은 아니니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팔짱 끼고 관망할 수 있다. 그리고 독재국가의 시민들이 민주주의의 가치를 뒤늦게 깨달은 것이라며 흐뭇하게 바라볼 수도 있다. 조금 더 적극적인 사람이라면 그곳의 사람들을 도울 방법을 찾아볼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그것일까?



강 건너 불구경이 아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은 어떤가? 국민의 절반 이상이 반대해도 4대강사업은 엄청난 예산을 쓰면서 ‘강 살리기’를 내세워 강을 파괴하고 있고, 반면에 시민 대다수가 찬성하는 무상급식사업은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열심히 일해서 재산을 모아야 한다는 게 상식인데도, 열심히 일해도 수도권에 집 한칸 장만하기 어려운 상황인데도, 재벌가의 아이들은 황금수저를 물고 세상에 태어난다(GS그룹 전무의 10살짜리 아들의 보유주식 평가액이 무려 680억원이다). 이만하면 굉장히 억울한 상황인데도 우리는 왜 문제를 제기하거나 저항하지 않는가?


지금은 차갑게 식어버린 듯하지만 한국은 전 세계적으로 ‘뜨거운 나라’였다. 불과 20년 전인 1991년 5월에 한국사회는 ‘분신정국’이라 불렸다. 4월에 명지대 대학생 강경대가 학교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 뒤쫓아온 전경의 쇠파이프에 맞아 목숨을 잃으면서 대학생들의 시위가 시작되었다. 사과나 사죄는커녕 오리발을 내미는 정권의 부조리함과 무자비한 탄압에 맞서 대학생들은 스스로 자기 몸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질렀다. 수십 만명의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31년 전인 1980년 5월, 광주는 피로 물들었다. 한 도시가 완전히 포위된 상황에서 민간인들이 학살되었고 공수부대가 시민들의 자존심을 짓밟았다. 하지만 총을 들고 싸우는 시민들이 있었기에 권력을 가진 자들은 더 이상 쉽게 군대를 동원할 수 없었고, 87년 6월 민주화 항쟁도 성공할 수 있었다. 그렇게 보면 우리의 민주주의도 재스민 혁명과 다르지 않았다. 튀니지, 알제리, 이집트, 리비아의 시민들은 우리의 또 다른 모습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저항했을까? 목 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듯이 사람들은 먹고 살기 어려울 때 민주주의를 원한다. 고대 아테네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이 등장했을 때도 그건 한가한 사람들의 낭만적인 토론장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다. 부자가 가난한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고 권력을 독점하려 했을 때 그들을 통제하려는 방법으로 민주주의가 등장했고 민주정이 수립된 뒤에는 부를 평등하게 분배하는 경제개혁조치가 뒤따랐다. 민주주의는 추상적인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시민으로 정당한 대우를 받고 사회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한국에서도 민주주의는 배부른 담론이 아니었다. 하루에 15시간을 일하고도 끼니조차 제대로 이을 수 없었던 노동자, 저곡가 정책에 신음하던 농민, 온갖 세금에 시달리던 시민, 비참한 현실을 보고도 말을 꺼내지 못했던 대학생들이 제 몫을 요구한 것이 민주주의의 출발점이었다. 저항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러니 재스민 혁명을 보며 우리가 생각할 바는 지금 우리의 삶이다. 튀니지, 알제리, 이집트, 리비아의 시민들이 지금 우리가 사는 모습을 보면 뭐라고 할까? 민주주의는 더 이상 강 건너 불구경할 문제가 아니다. 우리도 이제 민주적인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온전한 시민으로 살기 위해, 정당한 대접을 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배부르게 먹을 수만 있다’면 누가 권력을 잡든 무슨 상관이랴, 생각할 수도 있다. 허나 권력자들이 우리에게 시혜처럼 베푸는 정책들은 그들이 개인적으로 모은 재산을 나눠주는 과정이 아니다. 우리가 짬짬이 내는 세금들이 그들의 ‘껌값’으로 사용된다.


대학생들도 이미 일상생활 속에서 많은 세금을 내고 있다. 식당이나 커피전문점에서 밥이나 커피를 사먹을 때도, 편의점에서 물건을 살 때도, 교통수단을 이용할 때도, 담배를 피울 때도, 술을 마실 때도, 생활 속에서 세금을 낸다. 수업시간에 대학생들이 하루에 내는 세금을 계산해보니 만원이 넘을 때도 있었다. 그 돈들이 모여 우리 정부의 예산이 된다. 그러니 정부가 무엇을 해주기만 바라는 건 자기 밥그릇도 제대로 못 찾아먹는 어리석은 짓이다. 청년실업대책, 등록금 인상대책도 애타게 청원할 게 아니라 당당하게 요구할 문제이다. 내가 내는 세금 나를 위해 쓰라고 요구해야 한다.


그리고 세계화된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더 이상 한 나라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먹고 쓰는 것들은 한국에서만 생산되지 않고, 자연히 빈부의 격차나 권력의 독점도 한국사회만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시민이라는 추상적인 얘기를 꺼낼 필요도 없이 우리는 이미 그런 삶을 살고 있다. 내가 먹고 쓰고 이용하는 것들이 민주적인 방식으로 생산되고 결정되도록 요구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 모두의 삶이 행복해질 수 있다.


일본의 방사능 유출, 중국에서 불어오는 중금속 황사만 보더라도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려면 우리의 시야가 더 넓어져야 한다. 그들의 삶이 곧 우리의 삶이다.
잘 먹고 잘 사는 법은 치열하는 경쟁하며 혼자 살아남는 일이 아니다. 그런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민주주의에는 원조가 없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어디를 보면서 한걸음씩 나가야 할까? 민주주의하면 보통 우리는 세련되고 화려한 서구식 민주주의를 떠올린다. 허나 민주주의에 ‘원조’와 ‘선진국’이 있을까? 미국이 전 세계 민주주의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군대를 파견하고 소란을 떨고 있지만 그 속내는 다르다. 지금 미국 위스콘신주에서는 시위대가 주청사를 점거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노조의 단체협상권을 빼앗으려는 주정부에 맞서 수 천명이 시위를 벌이며 “법안을 죽여라(kill the bill)”고 외치고 있다. 법을 죽여라고 외치다니, 세상에 이렇게 과격한 시민들이 있다니, 이게 미국의 실상이다.


사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잘못 배워왔다. 그동안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책에서나 배우는 것이지 일상과 관련된 것이 아니었다.
모범시민이라면 라디오나 텔레비전, 케이블TV로 중개되는 정치를 듣거나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지 직접 행동하는 건 금지되었다. 누구든 정치인을 비판하고 그 문제를 지적할 수는 있지만 그 장은 반드시 거리가 아니어야 했다. 왜냐하면 거리는 어떤 매개(미디어)를 거치지 않고 시민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하며 흥분하고 연대할 수 있는 ‘위험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거리의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배워왔다.


그런 점에서 2008년 종로와 시청 앞 거리를 달궜던 시민들의 외침은 그런 모범시민의 틀이 깨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젊은 것들이 공부는 안 하고”, “니들이 뭘 알어”라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모범시민들은 여전하지만, 가상이 아닌 현실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 불붙었다 수그러들고 다시 불붙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지만 그런 꿈틀거림이야말로 우리의 민주주의를 꽃피우는 힘이다.


꿈틀거리며 자기 목소리를 내고 주권을 되찾으려는 시민들에게 권력은 대안을 가져오라고 요구한다. 사회적인 대안을 만들라고 위임한 권력인데, 주인이 자기 몫을 찾고 대안을 요구하려는데 머슴이 주인들에게 대든다. 그렇다면 대안을 찾을 때까지, 잘 만들어진 민주주의의 모델이 등장할 때까지 무작정 기다려야 할까?


『모비딕』의 작가로 알려진 허만 멜빌은 『필경사 바틀비』라는 요상한 소설을 썼다. 책에서 바틀비의 대사는 주로 “나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I would prefer not to)”이다. 우리 삶의 대안을 마련하라고 권력과 힘, 등록금을 줬는데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얘기하면서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바라고 얘기하는 부조리함에 바틀비는 부조리함으로 맞선다. 바틀비는 ‘나’라는 주어로 시작하는 ‘거부’로 내게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바틀비는 공손하지만 단호하게 ‘절대적 불복종’을 선언한다. 대안을 제시하진 못하더라도 내겐 부당한 삶을 살지 않을 권리가 있다.


실제로 미국의 교육학자 존 테일러 게토는 대학에서 시험을 거부하자는 운동을 조직하고 있다. 대학생은 비싼 등록금을 내고 학교에 들어왔고 그만큼 원하는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 그러니 시험을 치고 평가를 받을 게 아니라 대학생이 대학교육을 평가해야 한다. 시험답안지에 “나는 이 시험을 보지 않겠습니다”라고 적으며 학생의 권리를 되찾아야 한다고 존 테일러 게토는 주장한다. 대학본부는 교육의 특수성과 학문적 권위를 떠들겠지만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고객이 왕이라는 게 상식이다.


윤리적이고 당위적인 얘기를 하는 게 아니다. 당연한 사실을, 상식을 얘기하는 것이다. 저항을 위한 저항을 벌이자는 얘기가 아니라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위해 당당히 나의 권리를 요구하고 서로 손을 잡아야 한다는 얘기이다. 이도저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나의 입장을 당당히 밝히며 버텨라. 버티다 보면 새로운 길이 열리기도 한다. 언제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내가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라는 말이 있듯이, 내가 참여할 수 없다면 그건 민주주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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