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들어가며


스콧의 『The Art of Not-being Governed』는 정치에 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뒤흔든다. 그의 관점을 받아들인다면, 국사(國史)를 배운 우리들에게 너무나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고조선-삼국시대-고려-조선의 역사는 허구이다. 그렇게 이어지는 ‘연속된 국사’는 불가능하다. 더불어 국사책의 지도도 허구이다. 단일한 국가공간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관점을 정치적으로 해석한다면 이런 판단도 가능하다. 홉스나 로크를 읽을 때 든 의문과 비슷하다. 누가 국가를 만드는데 동의했던가? 암묵적인 동의(tacit consent)가 실제 역사적인 개념이 아닌데도 왜 우리는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는가? 그리고 단일한 국가주권은 가능한가? 단일민족-단일국가가 근대가 만든 환상이라는 점은 여러 역사학자들이 동의하는 바인데도 왜 우리는 그것을 환상이라 인정하지 않는가? 스콧의 관점을 정치적으로 응용한다면, 국가를 구성한다는 영토, 국민, 주권 모두가 근대적인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통용되지 않는 공간이 국가 내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II. 2장 국가공간: 통치와 징발의 공간


스콧이 보기에 모든 공간이 국가공간일 수는 없다. 국가가 등장하려면 왕가가 주민과 땅을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핵심적인 위치로 집중시켜야 한다. 농사를 짓지 않는 엘리트들은 농민들을 통해서만 먹고 살 수 있다. 국가공간의 등장에 단초를 제공한 것이 인도네시아벼(padi)이다. 벼는 적은 인구로 많은 양을 생산할 수 있게 했고, 이로써 국가는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거리 내에서 생산될 수 있는 곡식의 양을 최대로 높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벼의 생산주기는 일정해서 국가는 수확량을 예측해서 세금을 걷을 수 있었다. 즉 벼는 국가의 가독성(legibility)을 높이고 징발될 수 있으며 수송하거나 저장하기에도 쉬웠다. 따라서 벼보다 더 이상적인 국가작물(ideal state crop)은 찾아보기 어렵다.


고대사회에서 국가형성을 막은 기본적인 장벽은 바로 거리였다. 식료품을 수송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육지보다는 해상수송이 더 수월했다. 육지의 국가는 보통 120km를 넘지 못했지만 해상수송은 거리의 제한을 거의 받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육지와 해상을 똑같이 1km로 표시한 근대의 표준지도는 매우 잘못되었다. 육지와 해상은 매우 다른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유대관계를 가진다. 육지 내부도 마찬가지이다. 평지와 산, 늪, 습지, 숲은 구분되어야 하고, 국가 통제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지역(state space)과 국가통제에 내심 저항하는 지역(nonstate space)이 구분되어야 한다. 근대의 표준지도는 지방의 관행과 어울리지 않는다.


어쨌거나 내륙국가보다 해상국가가 곡식과 인력에 의존하지 않는 고도의 ‘국가성(stateness)’을 갖춘다. 좁은 해협과 같은 전략적인 위치의 해상국가는 핵심적인 무역상품에 대한 통제, 즉 세금, 통행세, 압수 등을 통해 자원을 확보했다. 허나 이런 이점이 절대적이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해상국가는 기본적으로 육지의 농업국가보다 훨씬 적의 수의 주민들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농업국가는 수의 힘으로 해상국가를 제압할 수 있었다(마치 펠로폰네소스전쟁에서 농업국가인 스파르타와 시라쿠사가 해상국가인 아테네를 제압했듯이).


그런 점에서 벼 재배는 국가형성에 매우 중요한 조건이다. 동남아시아에서 벼 재배는 주기적으로 홍수가 범람하는 강가에서 잘 되었다. 벼를 재배하는 심장지대가 크고 이어진 곳에서 강대국이 등장했다. 반면 고지대의 농업지대에서는 소국가(statelets)가 등장했고, 이들의 연맹이나 연합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벼를 재배하는 핵심지대가 존재하는 대규모 국가에서도 왕가의 통제권이 전체를 관장하지는 못했다. 습지나, 늪, 고지대는 왕실과 가까워도 정치적인 통제를 거의 받지 않았고 조공을 바쳐도 그건 예속관계가 아니라 정치적인 선택이었다. 이런 공간들은 독자적인 언어와 주거양식, 친족구조, 인종적인 자기동일성, 자급관행, 종교를 가졌다. 즉 이런 지대에 사는 사람들은 전략적으로 이중 주권의 상황을 만들어냈다. 21세기 국민국가의 표준인 야심 없고 단일한 주권은 소수의 곡창지대의 핵심부 외에 드물었다. Beyond such zones, sovereignty was ambiguous, plural, shifting, and often void altogether. Cultural, linguistic, and ethnic affiliations were, likewise, ambiguous, plural, and shifting(61).



III. 3장 인력과 곡물의 집중: 노예와 물을 대는 논


인적자원을 중앙집중화시키는 것은 근대 이전 동남아시아 정치권력의 핵심요소였다. 이것이 치국(治國)의 첫 번째 원리이고 이 지역에서 식민지 이전 왕국의 모든 역사에서 mantra였다. 그리고 그런 국가공간을 만드는 것은 평평한 땅과 강의 주기적인 범람으로 비옥한 땅, 통행할 수 있는 수로에서 멀지 않은 넓은 공간이 있는 곳에서 가장 쉬웠다.


허나 이런 공간들이 국가형성을 결정하지는 못했다. 물을 대는 논은 주민과 식료품을 중앙으로 집중시키기에 가장 편리하고 대표적인 방식들을 가리키는 정치적인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사실 쌀을 재배할 핵심지대가 없을 경우, 중앙집중화는 다른 수단들로, 예를 들어 노예화나 무역로에 대한 통행세, 약탈 등으로 이루어졌다.


비교적 땅이 풍부했던 동남아시아의 주민들은 적은 노동력으로 많은 수확을 확보할 수 있고 가족에게 유리한 이동경작을 선호했다. 그래서 인구는 분산되었다. 반면에 물을 대는 논은 인구를 밀집시켰고 상당한 양의 잉여를 보장하는 강력한 심장지대를 만들었다. 그래서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논이 있는 땅으로 이주했을 것 같지만 이것은 이론적인 얘기이고 전쟁, 전염병, 수확량의 변동, 기근, 미친 군조, 내전 등은 주민들을 동요시켰다. 국가가 없었던 사람들의 평화롭고 점진적인 군집이라는 왕가의 기록은 허구인 경우가 많다. 특히 이런 주장은 전쟁과 노예제, 억압이 국가를 만들고 유지함에 있어 본질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The accumulation of population by war and slave-raiding is often seen as the origin of the social hierarchy and centralization typical of the earliest states(67). 많은 왕가의 칙령들은 주민들을 강제로 정착시키려는 의도를 가졌다.


그래서 보통 땅보다 인간을 놓고 전쟁을 벌였고, 그래서 전쟁은 피비린내나지 않았다. 이런 논리는 원거리 무역보다 핵심적인 농업생산에 더 많이 의존했던 내륙의 농업국가에서 가장 강력했다. 땅보다 인간이 중요했고, 이는 단지 곡식의 수확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전쟁을 위해서도 필요했다. 전투에서의 승리도 생존한 포로들의 수로 판정되었다(투키디데스의 말처럼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이데올로기나 인종이 아니라 공물을 놓고 싸웠고 에게해의 가장 중요한 무역상품은 노예였다).


근대 이전의 동남아시아 내륙지방의 지배자들은 GDP보다 ‘국가가 접근할 수 있는 생산(state-accessible product, SAP)’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The state-accessible product had to be easy to identify, monitor, and enumerate (in short, assessable), as well as being close enough geographically(73). 경작자에게는 이것이 그다지 좋지 않은 일이지만 국가에는 많은 보상을 주었다. 동남아시아의 국가는 기본적으로 ‘벼-국가(paddy-state)’였다. The superior productivity of wet rice per unit of land permits enormous population densities, and the relative permanence and reliability of padi rice, so long as the irrigation system is functioning well, helps ensure that the population itself will remain in place(74).


주요한 단일작물을 재배하는 것이 가독성과 징발을 위해 필요했다. 단일작물은 동일한 생산리듬을 가지고 토지가치도 하나의 기준에 따라 정해질 수 있으며, 이런 농업환경은 가족구조에도 영향을 미쳐 사회적, 문화적 동질성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국가처럼 보기』에서처럼 스콧은 가독성을 강요하는 정책이 국가형성의 지름길이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인구를 분산시키고 혼합파종을 권하며 새로운 땅을 주기적으로 개간하는 이동농업과 화전농업은 국가형성의 적이었고(스콧은 화전농이 생태계를 파괴한다는 주장도 근대시기에 만들어진 조작이라고 주장한다), 국가는 국가공간 외부에서 사람이 생존할 수 있는 기회를 최소화시키려 노력했다.


허나 이런 국가의 성격이 문화적 동질성을 강요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그것은 크리올 중심(The Creole Center)을 형성했다. 즉 these padi states were ethnically plural, economically open, and culturally assimilationist(82). 특히 다른 지역의 관리와 작가, 왕족을 포로로 잡은 경우 새로운 혼종 왕실 문화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인적 자원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은 쉬운 동화와 빠른 이동을 선호했고 매우 유동적이고 침투할 수 있는 인종적 경계를 만들었다. 남부 버마의 두 개 언어를 쓰는 지역에서 인종적 정체성은 혈통으로 주어진 것이라기보다 정치적인 선택이었다. 옷이나 머리 스타일, 주거형태, 인종적 정체성도 변화했다. 어느 곳에서나 인적 자원이라는 절대명령은 차별과 배제를 거부했다. 왕국이 잃은 것보다 더 많은 주민들을 끌어들일 때 그 왕국은 부득이하게 점점 더 세계주의적이 되었다. 흡수된 사람들의 다양성이 커질수록 본국의 문화는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받아들였고, 사실상 그런 문화적 혼종성이 성공의 조건이었다.


그래도 국가공간의 주요한 주민들은 노예로 확보되었고, 모든 국가들, 특히 해양 국가는 노예에 기반한 국가이다. 노예는 식민지 이전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환금작물(cash crop)’이었다고 말해도 옳다.


그래서 포로를 노예로 삼는 것 외에 다른 많은 방식들이 정치체제에서 등장했다. 부채노예(debt bondage)가 일반적이었고, 아이들은 팔렸다. 대부분의 노예들은 문화적으로 다른 구릉지대(hill) 주민들이었고 전리품으로 노예사냥이 인정되었다(그래서 구릉지대의 사람들은 유괴에 관한 신화와 전설을 가지고 있다). 이런 노예무역의 규모와 영향은 상상을 초월했다. 분지(valley)의 주민들은 전쟁포로와 범죄자들의 재정착과 더불어 상업적인 노예사냥을 통해 늘어났다. 버마와 타이 모두 ‘노예국가(slaving states)’로 불러도 옳다. 노예사냥은 관리와 군인들의 전략적인 투자, 연합무역사업(joint trading venture)에 가까웠고, 약탈자들은 포로들이 돌아가지 못하도록 곡물과 주거지를 파괴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런 포로들은 대부분 왕가의 재산이 아니라 개인적인 재산이자 신분의 기호로 인정되었다.

허나 사람을 끌어 모으려는 벼-국가의 계획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위험하고 불안정한 기획이었다. 첫째, 재정적 가독성 때문이다. 주민등록과 비옥한 땅의 측량지도가 가독성의 핵심적인 행정도구인데, 이를 측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더구나 왕실은 인적 자원과 곡식을 놓고 관리와 귀족, 성직자들과 경쟁해야 했다. 내부와 경쟁하지 않고 외부에서 사냥할 경우 소규모 노예사냥은 위험이 적은 반면 확보할 인력의 비율이 낮았고 대규모 전쟁은 수천명의 포로를 확보할 수 있지만 질 경우 왕가의 파멸을 불러왔다.


둘째, 자멸로서 국가공간(state space as self-liquidating)의 성격이다. 자신의 주변으로 많은 주민들을 포획해서 집중시킬수록, 주민들은 멀리 달아나려 한다. The heartland or core region of the padi state is the most legible and accessible concentration of grain and manpower.…the greater the pressure exerted on it, the more likely it would simply flee out of range or, in some cases, rebel(95).



IV. 나오며


스콧의 설명을 한국역사에 적용하면 몇 가지 흥미로운 설명이 가능하다. 가령, 민심이 곧 천심이다라는 유교적인 명제 역시 인적 자원을 통제하려는 왕가의 노력으로 설명될 수 있다. 민심, 즉 노동력을 확보하지 못하는 권력은 스스로를 유지할 수 없다. 또한 일제 시대에 조선총독부가 부랑자를 단속하고 강제로 수리조합을 만들어 관개농을 확대시킨 것 역시 한국의 국가형성에 특징적인 지점이 될 수 있다. 농업의 확산과 근대국가의 형성이라는 관점은 뻔한 관점과 결론을 반복하는 한국정치를 흥미롭게 재해석할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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