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에 쓴 서평이다.  

거의 수정되지 않고 올라갔고 맨 뒤의 문단만 짤렸다.
악의적으로 쓴 부분은 아니고 좀 걱정되어서 쓴 글인데 오해가 있었을라나...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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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막스 베버의 『소명으로서의 정치』라는 강연에 대한 평이 아니라 그 강연을 풀이한 최장집 교수의 책에 관한 서평이다. 최장집 교수가 베버를 해석하는 방식에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이 글은 베버보다 최장집 교수에게 초점을 맞춘다. 왜냐하면 아렌트나 하버마스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베버의 이론이나 합리성 개념의 문제점과 한계를 이미 지적한 바 있고, 권력과 폭력을 구분하지 않는 정치관이 현실에서 많은 비판을 받아왔으니 굳이 베버에 대한 비판을 되풀이할 필요는 없을 듯하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궁금한 건 한국정치의 미래를 논하면서 최장집 교수가 베버를 끌어들인 이유이다. 최장집 교수가 최근 한국사회에 베버라는 유령을 부활시킨 첫 번째 인물은 아니지만 “우리 현실에서 좀 더 시급하게 읽혔으면 하는 정치철학자”로 막스 베버를 꼽은 이유는 매우 궁금하다. 최장집 교수가 다른 사상가들을 빼고 굳이 베버를 먼저 얘기하는 건 그에게 기댈만한 구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글이 따지고 싶은 건 베버의 이론 자체보다 지금 이 시점에서 베버를 논의하는 ‘맥락’과 최장집 교수의 ‘판단’이다.



좋은 정치인이 필요하다?


이 책에서 최장집 교수가 주장하는 내용은 사뭇 상식적으로 보인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좋은 정치인’이 필요 없다고 얘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거나 부정적인 사람들조차도 좋은 정치인이 필요하다는 얘기에는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최장집 교수의 주장을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오독(誤讀)’이다. 최장집 교수가 단지 좋은 직업정치인 몇 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정치인이라는 사람의 문제를 다루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정치시스템의 문제를 얘기한다. 좋은 정치인이나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갖춰야 할 덕목들을 제안하고 발전시킬 방법을 찾는 것이 책의 중심주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당의 동원기구(머신)와 의회정치의 중요성을 주장한다.


이런 오독을 온전히 독자의 책임으로만 돌릴 수 없는 것은 최장집 교수가 “새로운 직업 정치가들이…직업 정치인으로서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와 관련해 더없이 중요하다”는 식의 얘기를 계속 흘리기 때문이다. 소명의식을 가진 정치인의 필요성이 강조되는 듯하지만 그 정치인의 범주는 정당머신을 가진 정당정치인이다. 정치인의 범주를 매우 좁게 보면서도 그냥 정치인이라 얘기하니 착각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최장집 교수는 민주주의와 정치인의 필요성도 같은 차원에서 다뤄 오해를 낳는다. 한국사회에서 ‘민주주의가 더디다’와 ‘좋은 정치인이 필요하다’가 같은 차원에서 논의될 수 있을까? 물론 민주주의 하에서도 좋은 정치인은 필요하다. 하지만 좋은 정치인들이 시민을 대신하는 정치체제를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최장집 교수는 “현대의 대의제 민주주의는 관료화된 강력한 국가가 그 사이에 위치함으로써 3자 관계의 구조를 갖기 때문”에 차이점을 가지지만 고대의 민주주의와 현대의 민주주의가 “지도자-대중의 관계라는 점에서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허나 민주주의는 지배양식이 아니라 민중이 권력을 행사하는 정부형태이다. 말의 뜻 그대로 민중이 지배권을 가져야 민주주의라 불릴 수 있다. 제 아무리 좋은 정치결과를 낳더라도 민중이 지배권을 갖지 못한다면 그것은 군주정이나 귀족정이라 불려야 한다.


민주주의가 다른 정치체제와 구분되는 건 민중이 정치인을 선택하는 만큼 그를 몰아낼 수도 있다는 단순한 사실에 있다. 시기심에 사로잡힌 시민들이 탁월한 정치지도자를 쫓아낼 수도 있고 전쟁에 이긴 개선장군을 처형할 수도 있는 체제가 바로 민주주의이다. 이렇게 시행착오를 거듭할 수 있는 정치체제, 시행착오를 거쳐야 하는 정치체제가 바로 민주주의이다. 그럼에도 민주주의가 좋은 정부형태라 불리는 것은 힘과 부를 독점한 소수의 사람들의 손에 정치공동체의 운명을 맡기는 것보다 민중들이 정치공동체를 운영하는 것이 훨씬 더 낫기 때문이다. 이런 공리(公理)를 무시한 채 정치를 설명하니 자꾸 헷갈린다.


최장집 교수가 자주 인용하는 미국의 정치학자 로버트 달은 자신의 구상을 ‘폴리아키’라 불러 오독을 막는데, 최장집 교수는 자기 구상이 민주주의라고 주장하니 오독이 생긴다. 더구나 자기 얘기와 일치하지 않는 논의를 민주주의에 대한 ‘잘못된 이해’라고 부르니 오독은 더욱더 심해진다. 그러니 엉킨 매듭을 풀어야 하는 사람은 최장집 교수인 것 같다.



한국시민이 정치를 부정적으로 이해한다?


독자의 오독이 있다면 최장집 교수의 오독도 존재한다. 최장집 교수는 이렇게 얘기한다. “오늘의 한국 상황에서 정치와 관련해 중요한 것은 정치를 부정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고, 이런 경향이 사회에 널리 확산돼 있다는 점일 것이다.…권력을 권위주의와 동일시하고 정치를 탐욕과 타락을 상징하는 인간 행위로 이해하는 우리 사회의 지배적 경향은, 민주주의를 하나의 통치 체제로서 받아들이고 이를 잘 운영하는 문제의 중요성을 경시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부정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부정적인 것’은 다르다. 잘못된 것을 잘못이라 비판하는 것은 부정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현재 한국의 정치상황이 부정적이지 않은가? 투표할 수 있고 선거가 치러지니 부정적이지 않다고 얘기할 수 있겠지만 그것만으로 민주주의를 따진다면 프랑스 사상가 루소의 말처럼 우리는 4년에 한번 투표하는 날에만 정치공동체의 주인이 될 뿐이다.


정치와 경제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공공영역이 사유화되는 한국의 정치는 매우 부정적이다. 개발의 속도전에 수많은 생명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 한국의 현실은 매우 부정적이다. 인사청문회가 진행되는 과정을 보면 정치상황은 충분히 부정적이다. 감시와 벌금으로 얼룩진 삶을 사는 활동가들에겐 지금의 정치가 꽤 부정적이다. 그리고 다른 통로로 자신의 의견을 얘기할 수 없는 사람들에겐 지금의 상황이 너무나 부정적이다. 이것은 “정치를 부정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아니다. 부정한 것을 부정하지 않은 것처럼 보자고 얘기하니 아Q의 정신승리법이라도 쓰자는 것일까?


그리고 정녕 사람들이 권력을 부정적으로 ‘이해’할까? 오히려 사람들은 권력이 중요한 힘이자 자원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부정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정치가 아니라 정치인이고 권력이 아니라 부패이다. 정치를 부정적으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 정치인들이 부정하기 때문에 권력을 탐욕과 타락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은 지나친 의심이나 열정이 아니라 합리적인 감시이다. 이것은 왜 정치가 아니란 말인가?


이것이 오독인지 의도된 계산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것은 이런 주장이 정치엘리트의 활동을 정당화시키기 때문이다. 부정적이고 냉소적인 대중이 정치에 직접 참여하기는 어려우니 엘리트들이 정치를 대신해야 한다는 식이다. “베버는 국가나 정당같은 자율적 정치조직이 인민주권, 인민의 이니셔티브를 통해 운영되고 그로 인해 작동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본다. 민주주의도 어디까지나 정치 엘리트에 의해 통치되는 것이고, 인민은 엘리트를 선출하는 수동적 역할 이상을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민주주의에 대해 지극히 현실적이고 극도로 절제된 이해를 발견하게 된다.” 베버의 이런 주장이 “지극히 현실적이고 극도로 절제된 이해”라니 그 판단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결국 최장집 교수의 핵심적인 주장은 이것인 듯하다. “베버에게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자신의 목적의식을 대중에게 호소하고, 대중이 그에 호응해서 그를 지지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지도자-대중의 관계, 즉 카리스마적 지도자와 이를 추종하는 대중의 열망 사이에서 발생하는 지배-정당성의 상호관계에 기초를 둔 통치 체제이다. 바꾸어 말하면 민주적 리더십이란 카리스마적 권위의 한 유형인 것이다.” 이 이율배반적인 명제가 타당하려면 시민은 부정되어야 한다. 미국식 정치관과 소련식 정치관이 매우 다른 듯하지만 실제로는 동일한 기반 위에 있다. 슘페터의 정치공학과 레닌의 전위당이 손을 잡는다.


그리고 최장집 교수는 “국가기구의 관료화와 자본주의 시장 구조의 독점화가 가져오는 제약적 힘에 대응하면서 역동성을 만들어”내려면 정당머신을 가진 지도자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얘기한다. 허나 베버가 지적했듯이, 관료제는 ‘수동적 민주주의’의 출현, 즉 지배를 받는 사람들의 평준화와 동시에 진행된다. 제 아무리 뛰어난 정치지도자라 하더라도 지배당하는 사람들을 대변할지언정 그들의 역량을 끌어내지는 못한다.


관료제는 단지 권력을 독점할 뿐 아니라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평준화한다. 최장집 교수가 말하는 좋은 정치는 쇠창살 안에 갇힌 무기력한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과정일 수 있다. 허나 그것이 진정 행복일까? 시민들이 누려야 할 공적 행복(public happiness)을 정치인들이 계속 독점해야 할까? 참여는 사람들의 욕구를 실현하는 과정일 뿐 아니라 자신의 역량을 강화시키고 공적인 존재로 성장하는 과정인데, 이런 과정을 밟으며 정치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가 늘어날텐데 최장집 교수는 이런 과정을 의도적으로 생략한다.



정치학자의 현실감각?


정치학자로서 최장집 교수는 신념윤리와 책임윤리의 균형을 얼마나 잡고 있을까? 최장집 교수는 2010년 9월 정치인 손학규 씨의 후원회장을 맡았고 얼마 전에는 손학규후원회 대표 명의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종로를 버리고 부산에 한 몸 던져 지역주의를 깨트리려 했던 것처럼 손학규의 국민통합을 위한 노력이 반드시 성공하리라 믿습니다”라는 지지의 인사말을 발표하기도 했다. 최장집 교수는 손학규 씨를 성공적인 정치인으로 만들려 하는 것일까?


손학규 씨의 진심을 파악하기란 어렵지만 적어도 뉴라이트전국연합과 한나라당의 일원이었던 손학규 씨의 신념윤리를 높이 사기는 어렵다. 그리고 그간의 행적을 보면 “사건의 전체 구조, 내지는 맥락에서 행위자가 자신의 결정이 가져올 수 있는 결과를 상상하고, 그가 원래 바라는 목표와 관련해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는 판단력, 사려 깊음”을 의미하는 책임윤리를 그에게 기대하기도 어려운 듯하다. 그런데도 왜 손학규일까?


그리고 그동안 노무현 정부를 비판해 왔음에도 뜬금없이 손학규와 노무현을 연장선상에 놓는 최장집 교수의 말은 자신의 책임윤리를 거스르지는 않더라도 신념윤리를 상당 부분 훼손한 듯하다(성공회대에서 비정규직 행정직원들이 해고되었는데도 외부에서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주장해온 지식인들이 침묵하고 있는 걸 보면 이런 윤리의 불균형은 한국 지식인들의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A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문제인데 이를 B로 해결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진정한 A가 아니었으니 무조건 A를 고쳐야 한다고 고집하는 건 신념이 아니라 집착과 모순이다. 무엇이든 뚫을 수 있다는 창과 무엇이든 막을 수 있다는 방패를 동시에 팔려는 사람은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다. 강력한 지도력과 민주주의를 모두 팔려는 최장집 교수의 입장도 그런 모순에서 벗어나기 못하고 있다. 어느 한 쪽을 내려놓아야 입장이 분명해지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이 책의 내용과 분량은 책세상 출판사의 문고판시리즈와 비슷하다. 허나 판형이나 가격은 책세상 출판사의 문고판이 훨씬 좋다. 불필요한 지면낭비를 줄인다면 훨씬 좋은 책이 될 것 같다. 앞으로 나올 시리즈는 합리적으로 편집되길 기대한다.

더글러스 러미스(D. Lummis)가 쓴 [래디컬 민주주의(Radical Democracy)]의 '들어가는 말'(introduction)에서 강조되는 말은 민주주의의 급진성(radical)이다. 보통 러미스는 경제발전과 민주주의의 대립관계를 설명한 사람으로 얘기되지만 이 책에서 러미스는 민주주의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보여준다. 그는 어디서나 급진적이어야 하는 민주주의가 왜 지금 우리 시대에는 상투적인 말이 되어버렸는지를 보여주려
한다.

그런 점에서 러미스의 얘기는 묘하게 지금 한국의 상황과 맞물려 있다. 민주주의는 인민이 지배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중간계급이나 정당, 지식인, 엘리트들이 인민의 이름을 내세워 지배하는 것과 다를 수밖에 없다. 러미스는 필리핀의 독재자 마르코스를 몰아냈던 '인민의 힘 혁명(People's Power Revolution)'이, 맑스주의나 자유주의 좌파가 이해하지 못한 그 혁명의 정치적 잠재력이 선거에 온 힘을 다 빼았겼기 때문에 급진성을 잃어버렸다고 지적한다. "민중운동의 본질이라 할 급진적인 희망은(5장에서 더 자세하게 다룰 것이다) 정확히 혁명적이라고 부를만한 정치상황을 만들었지만, 이 희망의 대상은 선거에서 승리하기만을 바라는 자유주의 정치가인 코라손 아키노(Corazon Aquino)였다. 급진민주주의는 자유주의 정치를 복구하느라 자신의 에너지를 다 써버렸다. 토지개혁은 진창에 빠졌고, 내전은 계속되었으며 1987년은 우울한 한해였다." 민주주의의 잠재력을 선거로 몰아넣으려는 한국의 상황도 마찬가지이다. 과거의 수많은 민중반란과 저항적인 사회운동에서 드러났던 많은 정치적 잠재력, 급진적인 민주주의는 지금 한국에서 선거의 틀로만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선거에서 '소위 민주후보, 소위 좌파후보, 소위 시민후보'가 당선되지 못하면, 인민들의 정치력은 '역시나' 어리석고 보수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이런 평가를 받아들인다면 인민들의 지배인 민주주의는 불가능하고 언제나 먼 미래의 일이고 지금 당장의 엘리트지배는 정당화된다. 러미스는 바로 이 점을 공격한다.

또한 좌파/우파라는 단순한 도식을 넘어서 러미스는 제1세계와 제3세계의 민주주의에 관한 우리의 편견을 지적한다. 러미스는 이 책을 필리핀에서 썼는데 자신이 민주주의에 관한 책을 미국이나 유럽이 아니라 필리핀에서 쓰는 것을 설명하기가 무척 어려웠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묻는다. "하버드 대학을 방문한 학자가 매사추세츠 지역의 정치나 문화를 연구하지 않는다고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게다가 동북아시아를 연구하러 코넬 대학에 가거나 아프리카 연구를 위해 런던대학에 가는 학자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이도 없다. 그러나 반대는 적용되지 않는다. 제3세계국가에 가는 학자는 그 나라에 대한 연구를 원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러미스는 보수/진보가 과거의 합의를 지키기 위해 타협하는 제1세계의 '현상유지 민주주의'가 아니라 제 3세계의 민주화를 설명할 살아있는 개념으로 민주주의를 다루길 원한다. 그러면서 민주주의는 그 지역의 풍토나 문화와 무관한 제1세계식 민주주의를 무차별적으로 보급하려는 지식인, 엘리트들의 음모를 비판한다. 이런 논리를 따른다면 결국 제1세계를 본딴, 또는 제1세계 만큼의 경제발전을 이루기 전에는 민주주의가 불가능하다. 우리 식으로 얘기하면 선진화 이후에나 민주주의가 가능하고 먹고 사는 문제를 풀고 난 후에나 정치를 얘기해야 한다. 이에 맞서 러미스는 민주주의가 삶의 양식이라는 점을, 일하고 생활하는 일상의 과정이 정치임을 주장한다.

아래의 글은 들어가는 말을 번역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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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1980년대쯤 동료인 무로 켄지(Muro Kenji)는 가끔씩 그의 스승이자 친구인 철학자 쓰루미 슌스케(Tsurumi Shunske)와 얘기를 나눈 뒤에 (여느 때처럼) 흥분에 들떠서 나를 찾아왔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참 흥미로운 시대에 살고 있어. 민주주의는 어디서나 급진적이야. 미국이나 소련, 일본, 중국, 필리핀, 아프리카, 남미, 어느 나라 어떤 시스템에서도 전복적이란 말야.” 민주주의에 대한 낡은/새로운, 단순한/복잡한, 확실한/모호한 생각은 나의 흥미를 잡아끄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리고 E. M. 포스터가 말했듯 두 번의 축배는 가능하지만 세 번은 불가능한 원리[민주주의]에 고취된 사람을 만나는 건 신기한 일이다.


거의 동시에 나는 미국에서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잡지를 발간한다는 한 통의 편지를 받았는데, 그 편지내용은 필자로 추천할만한 일본의 급진민주주의자를 소개해달라는 것이었다.
“급진민주주의자”에 관한 생각이 내 마음 속에서 자라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이웃집 소녀(혹은 소년)를 사랑하게 된 것과 조금 비슷한 경험이었다. 평상시에 알고 지내던 이 존재는 갑작스럽게 아주 새롭고 신선하고, 뭐랄까,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것으로 다가왔다. 나는 1960년대 초까지 미국과 일본 양국에서 결코 맑스주의자를 자처할 수 없는 사람들 중의 한 명이었지만 맑스주의가 자유주의 국가나 자유주의 경제를 비판하는 힘에 항상 의존했던 운동의 활동가였다. 이 시기의 운동정치에서 맑스주의는 항상 민주주의의 “좌파”라는 의미로, 즉 더욱더 “급진적”이라는 의미로 이해되었다. 다른 한편 민주주의자들은 맑스주의자와 자유주의 좌파 사이의 불편한 중간 지대에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그래서 자유주의 좌파와 구별되기 어려운 것으로 이해되었다). 프랑스혁명에서 처음 사용된 좌파-중도-우파라는 공간적 은유는 말하자면 우리가 정치를 배열하는 방식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자신의 정치적 “입장”이 이 둘 “사이”에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 자신의 분명한 정치원리가 없다면 타협이라거나 잡종이라는 평을 피하기가 어려웠다. 쓰루미-무로 공식(“민주주의는
어디서나 급진적이야”)은 이런 공간적인 이미지를 다시 배열하는 기초가 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하기 시작했다. 민주주의가 급진적인 입장 또는 급진주의 그자체로 여겨지면서 다른 모든 정치적 입장과 그 사이의 관계들도 새로운 조명을 받을 것이다. 이런 이미지는 정치현실을 더욱더 정확하게 반영하고 더욱더 비판적인 힘으로 민주주의 이론을 무장하는 것일 수 있다.


내가 처음 이 책을 구상한지 10년 이상이 흘렀다. 그동안 우리는 폴란드와 중국, 버마, 필리핀 같은 많은 나라들에서 격렬한 민주화 운동을 목격했다.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동유럽의 정부들이 차례로 무너졌고 결국 소련정부도 무너졌다. 동시에 민주주의 이론의 영역에서도 새롭고 활발한 움직임이 나타났다. 그동안 제목에 “민주주의”라는 말을 쓰는 책들이 북반구 공업국가들에서 현상유지(status quo)의 미덕을 지루하게 반복하면서 호황기를 누려왔다면, 민주주의를 “급진적”
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세대의 이론가들이 등장했다. 조지 부시(George Bush)가 자신의 임기동안 민주주의는 “승리했다”고 선언하는 동안, 다른 이들은 레이건(Ronald Reagan)과 부시의 정치를 비판하고 자유주의 관점에서 그들을 반대했던 사람들과 공유했던 이념적 틀을 비판하기 위한 기초작업으로 민주주의 개념을 구성하거나 재발견하려 했다.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민주주의에 대한 담론이 수년 만에 최초로
흥미로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이런 논의를 도우려는 의도로 이 책을 썼다.


흥미롭게도 내가 필리핀의 제3세계연구센터에 있을 때, 미국과 일본의 동료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필리핀의 동료들에게조차 나의 연구를 설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내가 필리핀을 연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민주주의 이론에 관한 작업을 준비하러 필리핀에 왔다는 사실이 그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였을 것이다. 감춰진 선입견은 여기에서 작용한다. 하버드 대학을 방문한 학자가 매사추세츠 지역의 정치나 문화를 연구하지 않는다고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게다가 동북아시아를 연구하러 코넬 대학에 가거나 아프리카 연구를 위해 런던대학에 가는 학자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이도 없다. 그러나 반대는 적용되지 않는다. 제3세계국가에 가는 학자는 그 나라에 대한 연구를 원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고정관념을 깨뜨린다면 아마도 예상치 못했던 것을 배우리라는 보편적인 원리에 입각해서 나는 이런 식의 고정관념을 깨뜨릴 요량으로 신중하게 필리핀 대학을 골랐다. 그러나 필리핀을 선택한 것이 결코 무작정 이루어진 선택은 아니었다. 1986년 2월의 인민의 힘 혁명(People's Power Revolution)이후 고작 1년이 지났다. “인민의 힘”은 역시 그리스어인 데모스(demos)와 크라티아(kratia)를 영어로 번역한 것이다. 인민의 힘, 즉 급진민주주의는 불가능해 보이던 것을 가능하게 했다. 인민들은 단순히 선거에서 승리했을 뿐 아니라 선거 결과가 존중받는다고 생각되는 지점까지 목숨을 걸었고, 부패하고 무장했으며 부도덕하게 부를 축적한 독재자를 나라밖으로 쫓아내고 권력을 빼앗았다. 나는 민주주의가 낡아 빠진 슬로건이 아니라 살아있는 이념이자 진정으로 중요한 원리, 인민의 열정과 헌신을 담은 원리로 자리잡은 공간에 가기를 원했다.


실제 상황은 생각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마르코스 정권이 무너질 즈음 공중의 분위기가 흥분과 급진적인 희망으로 불타올랐지만 1987년 봄까지 환멸에 빠졌다. 민중운동의 본질이라 할 급진적인 희망은(5장에서 더 자세하게 다룰 것이다) 정확히 혁명적이라고 부를만한 정치상황을 만들었지만, 이 희망의 대상은 선거에서 승리하기만을 바라는 자유주의 정치가인 코라손 아키노(Corazon Aquino)였다. 급진민주주의는 자유주의 정치를 복구하느라 자신의 에너지를 다 써버렸다. 토지개혁은 진창에 빠졌고, 내전은 계속되었으며 1987년은 우울한 한해였다.


그러나 이런 환멸에도 민주주의에 관한 긴급하고 풍부한 논의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는 단지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혹은 무슨 일이 잘못되고 있는가에 관한 질문으로 옮겨졌을 뿐이었다. 맑시스트들은 민주주의가 그토록 많은 일을 해냈다는 데 놀랐고, 자유주의 좌파는 민주주의가 별일을 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모든 사람들은 민주주의에 관해 가졌던 생각이 약간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이 시기는 행복하진 않았지만 지적으로 고무되었던 시기였다.


더구나 예상하지 않았던 것을 배우게 될 거라던 나의 기대는 틀리지 않았다. 필리핀 지식인들과 민주주의 이론에 관해 토론하고 그들의 책을 읽으면서 나는 계속 “발전(development)”이라 불리는 동일한 장벽에 부딪혔다. 민주주의와 발전 사이의 갈등은 제3세계의 시각보다 북반구 공업국가의 시각에서 볼 때 더욱더 어려운 문제이다. 사실 북반구의 공업국가에서 쓰인 민주주의 이론에 관한 책들 대부분은 제3세계에 관해 얘기하지 않는다. 제3세계에 관한 언급은 정치이론과는 다른 “장”인 “지역연구”나 “발전경제학”의 부류에 속한다. 그러나 만약 민주주의 이론이 전 세계의 문제라면 거센 민주화 투쟁이 일어났고 또 일어나고 있는 제3세계를 중요하게 다뤄야 한다. 나는 필리핀에서 제3세계(혹은 자국 안에 제3세계를 보유하고 있는 국가)의 민주주의에 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 모두가 발전의 문제와 그것의 반민주주의적인 편견을 다뤄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은 2장의 주제이다.


이 책은 어떠한 제도도 기획하
지 않는다. 내가 제도에 관해 말한다면 그것은 원리를 설명하려는 것이지 기획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기획을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오히려 기획들은 정치적인 논의에서 매우 중요하다) 다만 여기서는 민주주의의 본질을 인간사(人間事)의 원리로 살펴보려 한다(이것은 사람들이 이 원리를 실제로 실현하기 위해 만든 다양한 제도와 행위와는 다르다). 민주주의가 너무 자주 뒤섞이고 혼동되어 사용되다보니 우리는 마치 민주주의가 자유선거 혹은 인권의 법적보장, 노동자의 통제인 것처럼 말한다. 예를 들어 아직까지 우리는 평화가 평화조약이고 정의가 배심원에 의한 재판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배심원 재판에 의해 보장되는 정의, 혹은 평화조약에 의해 지켜질지도 모르는 평화는 우리가 경험으로 알고 있듯이 모든 경우가 아니라 몇몇 경우에만 진실로 증명되는 가설이다. 재판이나 조약과 상관없이 정의와 평화에 관한 개념들을 가지고 있어야 이런 가설의 상대적인 진실 혹은 성공을 판단할 수 있다. 비슷하게(아래에서 논의하겠지만) “선거”, “법적 보장”, “노동자의 통제”도 가설들이다. 이들의 가치를 판단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것들을 실현할 수 있는 인간관계의 원리들을 가능하다면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다르게 보자면, 이 책을 유토피아적인 이론에 관한 저작으로 의도하고 쓰지 않았다. 나는 누구도 이전에 한 번도 생각한 적 없는 어떠한 기획을 갖고 있지 않다. 그와는 반대로 테이블 위에는 이미 많은 수의 훌륭한 민주주의 기획들이 있고 그것은 몇 년 전에 어떤 것은 수백년 전에 등장했다. 모든 대륙, 각 나라, 사실상 모든 형태의 제도에서 민주주의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이 운동들 각각은 서로 다른 해결책을 요구하는 상이한 상황에 놓여 있다. 북반구의 거대 자본 정치(big money politics)의 민주화는 남반구의 군부독재 혹은 플랜테이션, “사회주의” 관료제, 혈연 정치, 신권정치의 민주화와 다르다. 이러저러한 제도들의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는 모든 운동들은 제 나름의 방법들과 목적, 희망을 가지고 있다. 나는 실제 현실에서 그 사람들이 투쟁해온 것을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이 책이 민주주의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수단과 목적을 명료화하고 평가하며 비판할 몇 가지 기준을 제공하고 “실제 벌어지고 있는” 민주주의 운동들을 이론적으로 지원하는 작은 공헌을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민주주의가 다른 정치제도들보다 뛰어난 이유를 사실상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이미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 또는 자신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려 한다. 누군가에게 그렇게 생각해야하는 이유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생각이 초래하는 결과를 연구하려는 것이 이 책의 의도이다. 만약 누군가가 급진민주주의의 입장을 취한다면 무엇이 필요한가? 이 점을 충분히 고려하기 위해 내가 가끔 사용하는 방법은 상상의 인물, 이상형의 급진민주주의자를 가정하는 것이다. 이런 인물은 연구주제들 중 하나이며 이후의 어떤 상황에서건 노련하게 증명하는 역할을 맡는 관계자들 중 한 명이 될 것이다. 이런 이슈와 관련해 급진 민주주의자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가? 이런 상황에서 급진민주주의자들은 무엇을 하는가?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면서 급진민주주의자들은 무엇이 되려 할까? 이 답에는 구속력이 없다. 누군가는 답을 알면서 다른 정치체제를 선택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책의 논의가 성공한다면 다른 체제를 선택한 이들이 최소한 자신의 선택을 “민주주의”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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