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승리로 연출되던 한 편의 드라마가 그 참혹한 결말을 향해 치닫고 있다. 한편에서는 아직도 음모와 조작을 얘기하며 실날같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지만 결론을 완전히 되돌리기는 어려울 듯하다. 집에 TV가 없는지라 나는 그 드라마를 실시간으로 감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과학자가 아니기에 줄기세포복제라는 과학기술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그 사실여부를 섣불리 판단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기술이 이야기되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흥미로운 시선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복제라는 자연적 한계를 넘어선 인위적인 기술에 대해 우리는 왜 그리 열광했고 아직도 그 흥분을 쉬이 버리지 못하는 걸까? 과학적인 논쟁이어야 할 기술에 관한 논란이 왜 영웅과 역적이라는 경계에 갇혀버린 걸까? 왜 아직도 내가 전체주의 사회에 살고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쉽게 지우지 못하는 걸까? 책 속엔 정말 현실의 문제를 풀어갈 현명함이 담겨 있을까?



대중은 왜?


줄기세포 실험을 위해 스스로 난자를 기증하겠다는, 심지어 자신의 딸들에게도 기증을 권하겠다는 놀라운 발언들은 내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약물을 복용하고 신체적인 고통을 겪어야 하는 난자기증은 어느새 도덕적인 이타성의 가면을 쓰고 등장했다. 기증에 반대하거나 복제기술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주장들은 “네 가족이라면…”이라는 위험하고 당위적인 가정과 ‘국익’을 앞세운 국가주의 논리 앞에서 그 비판의 각이 무뎌질 수밖에 없었다. 사람에 대한 사랑을 막을 수는 없겠지만 그 지나친 애정은 2002년 월드컵의 붉은 열풍이 무참히 짓밟았던 가냘픈 인권의 논리를 떠올리게 했다.

대체 이런 열광은 무엇으로부터 생겨났을까? 소위 냄비근성은 한국인의 핏줄을 타고 흐르는 유전적인 요인일까? 20세기 파시즘의 시대를 살았던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는 이 물음에 답하는데 평생을 바쳤고 자기 나름의 해답을 얻은 듯하다. 라이히는 『오르가즘의 기능』(윤수종 옮김, 그린비, 2005)이라는 발칙한 제목의 글에서 “6천 년이나 된 낡은 가부장적­권위주의적 문화를 재생산하는 오늘날 인간의 성격구조는, 자신의 내적 본성에 대항하여 그리고 외적인 사회적 불행에 대항하여 성격적으로 무장한다는 특징”을 갖는다고 얘기한다. 이 말에 따르면 무엇에 냉소하거나 열광하는 우리의 본성에는 그렇게 하게끔 만드는 어떤 구조적 요인이 잠재되어 있고, 그 요인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이다.

이런 화두를 고민하던 라이히는 『파시즘의 대중심리』(황선길 옮김, 그린비, 2006)에서 연구를 더 진척시켜 “사회적 조건과 변동이 인간의 원초적, 생물학적 요구를 변화시켜 그것을 성격구조의 한 부분으로” 만들고, 그 성격구조가 “이데올로기의 형태로 사회적 구조를 재생산”한다는 점을 간파했다. 즉 “사회의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심리적 구조를 변화시킴으로써 인간 속에 스스로를 재생산해 왔다.”

『파시즘의 대중심리』를 읽다 보면 몇 가지 후련함을 느낄 수 있다. 적절한 수준에서 고만고만한 비판을 하는 한국의 지식인들과는 다른 호쾌한 비판이 있고 지금 우리 사회와의 연관성을 떠올리게 되기 때문이다. 여전히 성과 관련된 얘기를 공개적으로 다루지 않으려는 한국사회, 그러면서도 성을 팔고 사는 행위가 묵인되는 한국사회, 제대로 된 피임교육이나 성을 즐기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 한국사회, 성적인 일탈이 온전히 개인의 성향 탓인 양 전자팔찌만 채우면 안전하리라 믿는 한국사회야말로 라이히의 분석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어릴 적부터 강요되는 성적인 불만족은 왜곡된 형태로 표출될 수밖에 없기에 성적인 억압이야말로 사회적인 억압과 열광의 자원이다. 라이히의 ‘성경제학’은 어려운 정치경제학보다 더 명쾌하게 변태적이고 기형적인 한국사회를 분석한다.


그리고 프로이드의 제자였으나 정신분석학계에서 배척을 받았고 사회주의를 지지했으나 공산당에게 버림받았던 라이히는 결국 미국 땅에서 미국연방수사국(FBI)이 아니라 식품의약국(FDA)에게 기소되어 감옥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마쳐야 했다. 이런 경력에서 드러나듯 라이히는 어느 한 편에 서지 않고 자신의 현실과 치열하게 맞섰으며, 도덕적 엄숙주의와 교조주의에 빠져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던 당시의 좌파들도 강하게 비판했다. 라이히가 보기에, 파시즘의 성장은 그것을 가능케 한 심리적인 구조가 존재했기에 가능했다. 그런데 기존의 자유주의 이론이나 맑스주의 이론들은 이런 심리구조를 파악하지 못하고 파시즘에 대한 원론적인 비판에 머물렀다. 즉 이들은 “대중들이 지닌 심리 구조의 본질과 그것이 유래한 경제적 토대와의 관계를” 깨닫지 못했다. 자연히 좌파는 대중이 열광하는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무능력한 좌파, 지금 우리 눈앞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무리들이다.

또한 흔히 얘기되는 것과 달리 라이히는 파시즘이 대중들 때문에 가능했다고 보면서도 대중을 매도하지 않았다. 오히려 라이히는 대중에 대한 강한 희망을 품었던 민주주의자였다. 라이히는 파시즘을 성장시킨 원동력이 대중이고 그들에게 그 책임을 물어야 하지만 범죄자처럼 고발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대중의 그런 열광은 수천 년 동안 지속적으로 억압 받아온, 그리고 그 과정에서 형성된 본성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라이히가 대중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그들이 근본적으로 어리석기 때문이 아니라, 책임을 지우지 않는 것이 대중을 무능력하고 무기력한 존재로 파악하게끔 만들기 때문이다. 라이히는 대중에게 책임을 물음으로써 그들이 이 사회에서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를 강조한다. 그리고 파시즘을 막을 수 있는 대중의 능동성이 살아나려면 “남의 뜻대로 움직이고, 비판능력이 없고, 생물학적으로 병들고, 노예상태에 빠져버린 대중들을 위에서 ‘이끌고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이 모든 억압을 즉시 감지하고 적시에, 최종적으로, 돌이킬 수 없도록 그 억압을 떨쳐버리는 방법을 익히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한 라이히는 권력과 진실이 서로 대립한다고 보면서 국가의 해체와 사회적 자치야말로 대중의 역량을 부활시키는 핵심적인 과제라고 주장했다. 이는 대중에 대한 공포만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일상의 파시즘 이론가들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입장에 서 있다는 점을 증명한다. 똑같이 대중을 논해도 그 애정의 깊이가 다르다.

라이히의 주장에 따르면 소수의 엘리트가 이끄는 사회변화는 결코 대안이 될 수 없다. 그리고 대중의 열광은 이성적인 설득이나 계몽적인 질타가 아니라 대중의 자율적인 결정과 책임의식을 통해서만 해소될 수 있다. 만족되지 못한 열정은 대리만족을 요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대리만족은 이제 그만!!!



자율적인 판단을 가로막는 교육과 정치

라이히는 독일 파시즘이 대중심리를 장악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으며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을 길들이려 노력했다고 봤다. 한국사회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아주 어릴 적부터 우리는 체계적으로 자신의 본성을 억압하고 타성에 길들여지는 법을 배운다. 가장 열려있고 새로운 것에 눈을 돌려야 할 시기에 청소년은 학교와 학원이라는 감옥에 갇혀 규율을 몸에 익혀야 한다. 그러니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소통수단 역시 댓글 문화에서 드러나듯 개인의 왜곡된 심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뿐이다. 누리꾼의 세계는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있고, 자기 주장을 강하게 내세우는 듯하지만 사실 그 강함은 판단의 왜소함을 감추는 가면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거리의 철학자’라 불렸던 김상봉은 『도덕교육의 파시즘』(도서출판 길, 2005)에서 “한국의 도덕교육은 착한 노예를 기르기 위한 것이었을 뿐, 한 번도 긍지 높은 자유인을 기르기 위한 도덕교육이었던 적이 없었다.”라고 주장한다. 인간은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구성되는 존재이기에 반드시 교육이 필요하다. 특히 도덕교육은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세우고 어떤 인간이 되고자 하는가를 판단하도록 돕는 중요한 과정이다. 그러나 과거 한국의 도덕교육은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따르는 민족, 국민을 길러내기 위한 장치였고, 그런 장치는 아직도 작동하고 있다. 우리는 도덕을 암기하라고 가르치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래서 김상봉은 “한국의 도덕 교과서의 이데올로기를 한마디로 요약하라면 우리는 그것을 주저없이 노예도덕과 파시즘이라 표현할 수 있다”고 얘기한다.

우리네 도덕은 남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는 파시즘적인 이타성을 가르친다. 물론 자율적인 판단에 따라 남을 돕는 이타성이야 아름답기 그지 없지만, 강요된 이데올로기에 따라 자신의 몸과 정신을 초개처럼 바치는 이타성은 파시즘의 주요한 자원일 뿐이다. 따라서 이타성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자율적인 판단을 가르쳐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김상봉의 말처럼, “모든 자기부정은 보다 확장된 자기긍정을 위한 것이 아닐 때 그리하여 자기부정이 단지 부정을 위한 부정일 때, 그것은 노예도덕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노예도덕은 “타인에 대한 희생과 봉사를 넘어 실체화된 국가를 위한 희생과 충성을 맹목적으로 강요”함으로써 파시즘의 이데올로기로 변신한다.

특히 억압적인 노예도덕은 이질적인 목소리를 참지 못한다. 언제나 질서(뛰지 말 것)와 정숙(떠든 사람 이름적기), 통합(뭉쳐야 산다)을 강조하는 교육은 갈등과 시끄러운 토론, 차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리고 인간 사회에서 정치야말로 만남과 토론을 전제하는 영역이고 사회의 구성원으로 당당히 서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인데, 한국의 교육은 청소년의 정치참여를 철저히 차단하고 ‘중립성’을 칭송한다. 결국 중립이라는 명목하에 청소년은 자신의 의견을 가지지 않고 시키는대로 복종하는, 아니면 무조건 거부하는 모 아니면 도 식의 논리에 길들여지게 된다. 이처럼 한국에서 파시즘은 학습되고 있다.

어찌 보면 수능이 교육의 100%를 차지하는 한국사회는 노예를 양산하는 교육을 벗어날 수 없을지 모른다. 사회학자 김덕영의 강력한 표현을 빈다면, “한국의 교육부라는 파쇼적 집단은 학생들에게 위에서 일방적으로 부과하는 틀과 도식 안에 자신을 철저하게 가두라고 다그친다. 그리고 철저하게 복종하라고 다그친다. 교육부장관을 교주로, 교육방송을 성전으로, 수능강사를 성직자로 그리고 수능교재를 경전으로 받들지어다!”(『위장된 학교』, 인물과사상사, 2004)

대중의 의식을 마비시키고 수동적이고 자기억압적인 본능구조를 확립하는 것은 교육만이 아니다. 그 엄청난 진부함으로 언제나 강력한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정치도 톡톡히 한 몫을 담당한다. 그리고 그런 정치에 구태의연한 이데올로기를 공급하는 한국의 지식인들도 빼놓을 수 없다. 그들이 제시하는 것은 언제나 ‘뉴(new)’, ‘신(新)’이라는 접두어를 달지만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식상한 담론들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사회에서 새로움은 마치 권태로움과 맞닿아 있는 듯하다.

그러나 권태롭다고 해서 사회에 대한 시선을 거둘 수는 없다. 어찌보면 그 권태로움이야말로 대중이 정치적으로 무관심해지기를 바라는 세력들의 치밀한 계산일 수 있기 때문이다. 로버트 팩스턴(Robert O. Paxton)은 『파시즘』(손명희, 최희영 옮김, 교양인, 2005)에서 독재자의 이미지보다 “파시즘 지도자와 국가, 그리고 파시스트당과 시민사회의 상호작용을 탐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파시즘은 위기감을 조장하고 개인주의가 공동체를 몰락시킬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자극하면서 폭력적인 방식으로라도 공동체를 정화해야 한다는 믿음, 타고난 지도자에 대한 갈망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파시즘은 이런 감정적인 분위기를 자극할 뿐 아니라 냉정한 계산과 현실판단을 이용했다. 즉 “파시스트들은 중도파와 보수파의 무능력을 잽싸게 이용해 대중정치를 파악해 들어갔다. 명망 있는 거물들이 대중 정치를 경멸하는 사이, 파시스트들은 대중 정치를 이용해 좌파에 타격을 입힘과 동시에 민족주의를 널리 선전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파시스트들은 흥미진진한 정치적 볼거리를 만들어내고 능숙한 홍보활동을 펼쳐 대중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또 이들은 준군사 조직과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력으로 대중의 규율을 잡았으며, 마침내, 승패가 불확실한 선거 제도를 없애고 가부만을 결정하는 국민투표로 대체했다.” 팩스턴이 분석하고 있는 파시즘 사회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사회와 과연 얼마나 다를까? 파시즘에 대한 대중의 지지보다 정치적 “양극화, 교착상태, 내·외부의 적에 대항한 대중 동원, 전통적 엘리트층과의 공모”가 큰 역할을 했다고 보는 팩스턴의 관점은 지금 우리사회에 대한 경각심을 높인다. 파시즘은 멀리 있지 않고 현실의 조건은 이미 갖춰져 있는지 모른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권태나 냉소, 무관심이 아니라 자율적인 열정과 능동적인 관심이다.


균열과 희망찬 시도들

한때 라디오는 자동차와 함께 대표적인 파시즘의 선전수단이었다. 히틀러의 심복이었던 괴벨스는 대대적으로 라디오를 보급하고 그것을 중요한 선전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독일라디오는 ‘괴벨스의 입’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런데 요시미 슌야(吉見俊哉)는 『소리의 자본주의』(송태욱 옮김, 이매진, 2005)에서 그런 사회에서도 균열과 틈새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현대사회에서 라디오가 소통의 매체라기보다 일방적인 소리를, “우리 삶의 시간과 공간을, 나아가 사회적 현실의 성립을 거의 전면에 걸쳐 점령해버렸다”는 점은 분명하다. 라디오를 통과한 소리는 장소를 초월해 전 세계로 퍼져나가고 세계를 동질화시킨다는 점에서 파시즘의 매개이기도 하다. 라디오와 같은 매체는 “‘소리’를 부르주아적인 기호로서 유통시키고 소비해가려는 사회적 전략”인 ‘소리의 자본주의’를 구성했다. 또한 일본에서도 메이지 정부는 전신망과 유선전화를 “국민의 신체를 감시하고 관리하기 위한 규율 훈련용 미디어”로 이용했다.

그렇지만 요시미 슌야는 젊은이들이 이런 장치를 새로운 문화적 수단으로 발전시켰다는 점에도 주목한다. 지역의 중심부에 설치된 방송국에서 각 가정에 설치된 스피커로 음향을 내보내는 유선방송 전화는 “젊은이들 중 전기 매니아가 하드웨어 측면을 리드하며, 지역의 전기점이 설비를 담당하고, 마을 사람들이 이것을 뒷받침하는, 말 그대로 촌락 공동체의 풀뿌리 운동으로 탄생”했기 때문이다. 요시미 슌야는 전화가 “국가장치 뿐만 아니라 자생적 목소리 문화로도 기능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런 관점은 무선 네트워크인 무선통신에 대한 분석으로도 이어진다. 20세기초 미국 “젊은이들 사이에 무선 라디오 붐이 일어나 아마추어들의 풀뿌리 전파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다. 즉 영화 <볼륨을 높여라>처럼 무선라디오를 기반으로 한 지역공동체와 네트워크가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미국 전역에서 생겨난 라디오 클럽들은 서로 연계되며 “ 미국 전역을 뒤덮는 풀뿌리 정보망”으로 발전했고 “1916년, 민주주의 이념을 담은 메시지를 자신의 네트워크만으로 미국 전역에 전달하는 실험을 해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볼륨을 높인다면 새로운 네트워크가 구성될 가능성은 존재한다.

이런 사례에 주목하면서 요시미 슌야는 “19세기 이후 복제기술의 발전 과정에는, 오늘날에는 자명해진 방송이나 통신으로 대표되는, 모두 거리를 없애면서 국토나 지구를 뒤덮어가는 미디어로 일원화되는 움직임만이 아니라 다양한 중간적인 커뮤니케이션의 영역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과학기술적인 장치 그 자체가 어떤 사회적 진보성을 담보성을 담보하지는 못한다. 그런 장치는 파시즘의 매체로도 또는 민주주의의 매체로도 활용될 수 있다. 인터넷도 마찬가지이다. 특정한 과학기술 자체가 새로운 의미를 가지는 게 아니라 그것의 사용하는 인간의 판단과 행위가 중요하다.

나찌즘의 마수를 피해 미국으로 도피해야 했던 20세기의 탁월한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이런 판단과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이진우·태정호 옮김, 한길사, 1997)에서 인간이 처한 새로운 상황을, 즉 “인간생명을 ‘인공적’으로 만듦으로써 인간을 자연의 자녀로 속하게 만드는 마지막 끈조차 제거하고자” 하는 과학기술을 우려했다. 그리고 자동화에 의한 노동 없는 노동사회, 인간 삶의 터전인 지구를 벗어난 우주로의 진출 같은 새로운 조건들도 판단의 과제로 제시되었다. 어찌보면 자유로운 존재이기에 인간이 만들 수 있었던 이런 새로운 조건은 우리에게 그것을 판단할 수 있는 새로운 사유를 요구하고 있는 셈이다.

『과거와 미래사이』(서유경 옮김, 푸른숲, 2005)에서 아렌트는 우리 시대를 유서 없이 유산이 남겨진 시대라 명명했다. 즉 “상속인에게 무엇이 그의 정당한 소유인가를 명시하는 유서는 과거에 속한 것의 미래적 용도를 지정”하는데, 만일 유서가 없다면 그 무엇도 그 소유의 미래를 규정할 수 없다. 이 비유에서 드러나듯이 우리는 과거가 미래의 의미를 분명하게 밝혀주지 못하는 시대, 따라서 우리 스스로 과거와 미래 모두와 대면하며 우리 현실의 틈을 판단하고 과거와 미래 모두에게 진지하게 맞서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전체주의에 대한 피해의식으로 대중을 경계했지만 아렌트는 인간의 위대함을 믿었다.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에 자신의 불멸을 위해, 기억을 통해 전승되는 이름을 위해 위대한 행위를 추구한다. 그런데 이런 행위는 그 결과를 미리 예측할 수 없다는 점에서 우연적이다. 아렌트가 보기에 근대적인 인간의 비극은 이런 행위의 우연성을 인간이 전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 인간이 자연적인 조건 속에서 행위할 뿐 아니라 그 자연조차 만들어 냄으로써 세계를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다는 착각에서 비롯된다. 17세기 이래로 탐구의 주된 관심은 인간이 스스로 만든 것만을 알 수 있다는 가정 하에 사물 자체보다는 사물이 만들어지는 과정으로 옮겨갔다. 자연히 그 형성과정을 탐구하는 ‘역사’가 중요해졌고, “역사는 인간이 만든 하나의 과정, 즉 그 실존을 인류에게 전적으로 빚지고 있는 유일하게 총체적으로 이해되는 과정이 되었다.” 그리고 건국역사라는 말처럼 인간의 삶 역시 하나의 ‘만드는’ 과정으로 파악된다.

그런데 역사를 과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듯하지만, 이 관점은 미래를 위해 과거를 재배치하거나 현재를 정당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근대의 역사는 다양한 인간들이 어울려 내는 위대한 화음이 아니라 현재의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과거를 재배치하고 미래를 조작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그리고 이런 오만함이야말로 파시즘의 사상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렌트는 “행위하기 시작한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시작한 행위의 결과를 결코 예견할 수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아렌트의 역사관은 역사를 빌미로 현재를 정당화하고 미래를 조작하려는 경향이 강한 한국사회에, 인간의 다원성을 부정하고 하나의 정체성으로 통합하려는 사회에 좋은 치료제가 될 수 있다. 갑갑한 현실에서 아렌트의 책을 자꾸 손에 쥐게 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아렌트에게 정치는 “인간과 세계의 실존 전체를 포괄할 수 없”고 “인간이 의지로 변화시킬 수 없는 사물들에 의해 제한을 받”는다. 인간 이성의 범주는 “인간의 감각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기에 우리의 두뇌는 “지상에 속해 있고 지구에 한정되어 있다.” 유작(遺作)인 『정신의 삶』(홍원표 옮김, 푸른숲, 2004)에서 아렌트는 인간이 “현재라고 명명한 것은 희망 속에서 그를 앞으로 떠미는 과거의 무거운 짐에 대한 평생의 투쟁이며, 그가 확신할 수 있는 실재에 대한 향수와 회상 속에서 ‘과거의 적막’을 향해 그를 뒤로 밀치는 미래(그것의 유일한 확신은 죽음인)의 공포에 대한 평생의 투쟁“이라고 얘기했다. 우리의 현재는 과거로부터 결정되는 것이나 미래를 위해 준비해야 할 것이 아니다. 우리의 현재는 과거와 미래 모두와 치열하게 맞서며 그 틈을 벌여야 할 시공간일 뿐이다.

절망의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미래의 희망을 얘기하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멀리 떨어져 있는 원대한 공상이 아니라 내 삶에서 소소하게 만나고 실현할 수 있는 희망은 여전히 남아 있다. 시인 김신용이 노래했듯이, “불면, 찢어질 듯 가냘픈 날개를 가진 나비가 그 드넓은 바다의, 죽음의 혀 같은 물결 위를 마치 곡예를 하듯 아슬아슬하게 날아가는”, “그 어떤 질긴 목숨도 들어 올릴 수 있다는 듯이, 그렇게 나래를 치는! 나래를 치는...... 그 비애의 힘”(『환상통』, 천년의 시작, 2005)이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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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기획회의]라는 서평지에 쓴 글인데 최근 우리 사회의 돌아가는 모습이 이 때와 비슷해서 다시 올려본다.

경희대 대학원보에 쓴 글이다.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공포의 실체가 무엇인지 좀 드러내보려 했다.
어쩌면 드러난 명박이보다 그것의 실체 없음, 사람들의 생각하지 않음이 그 실체일지 모르겠다는 추측으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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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족족’ 검거하기 바라고 설사 인도에 산재되어 있더라도 공격적으로 쫓아가서 검거해 주길 바랍니다. 검거위주로 해서 시위대를 좀 많이 잡아야 돼”, 시위대를 보면 무조건 쫓아가서 잡으라는 경찰의 섬뜩한 무전내용이다. 그런데 이 무전의 시점은 과거 군사정권 때가 아니다. 2009년 5월 촛불 1주년 집회 때 주상용 서울지방경찰청장이 일선 경찰에게 내린 명령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지금 과거로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최근의 상황을 보면 그런 면들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어느 순간 우리 사회에서 다시 ‘반대’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했던 단체들은 불법폭력시위단체로 규정되어 정부지원이나 기업지원에서 배제되고 있다. 노동자들의 파업은 국가브랜드와 국가경쟁력을 갉아먹는 집단이기주의로, 철거민들은 도심 테러리스트로 내몰리고 있다. 얼마 전 박원순 변호사는 국정원의 민간인 사찰을 폭로하기도 했고, 군조직인 기무사가 움직인다는 소문도 솔솔 퍼지고 있다. 또한 정부는 새로운 저항의 양산박으로 떠오른 인터넷을 저작권법, 통신비밀보호법, 정보통신망법 등 각종 법들로 규제하려고 들고 있다.

정부에 반대하기 때문에 사회의 악으로 ‘만들어지는’ 사람들은 대화와 설득의 대상이 아니기에 더 이상 정치는 필요 없다. 이렇게 정부의 억압이 강해지고 정치가 사라지면서 ‘파시즘’, ‘파쇼’, ‘전체주의’같은 단어들도 다시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면이 공포의 전부는 아니다.

 

플루토크라트와 대중의 공포

 

옆 나라 일본에서는 불안을 뜻하는 precarious와 노동자를 뜻하는 proletariat의 합성어인 프리케리아트(precariat)라는 말이 유행이라 한다. 미래를 계획하며 삶을 준비할 수 없는 비정규직/일용직 시대, 효율성과 경쟁력만을 강조하는 승자독식의 시대를 사는 노동자는 하루하루를 불안에 떨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공평하게 불안을 나눠 갖는 건 아니다. 금권정치(金權政治)를 뜻하는 플루토크라트(plutocrat)는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나라, 한국을 잘 설명해주는 단어이기도 하다. 재벌 총수들은 줄줄이 사면되고 파업노동자와 촛불시위대는 줄줄이 감옥으로 향하는 나라, 고위공직자들의 부패가 능력으로 가난한 이들의 몸부림이 떼잡이로 낙인을 찍히는 나라에서는 공포도 사람을 가린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불안함을 견뎌야하는 대중은 자기 삶을 틀어쥔 금권정치가 두려울 수밖에 없다. 재래시장이 대형마트나 기업형슈퍼만한 경쟁력을 갖추는 ‘미션 임파시블’을 강요하는 대통령의 모습을 보면서도 못내 미련을 떨치지 못하는 건 권력의 무서움보다 삶의 가벼움 때문이다. 사람들이 정말 두려워하는 건 폭력적인 이명박 정부보다 갑작스런 경제위기나 철거, 실업, 비참한 상처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과거를 돌이켜보면 1920년대의 대공황과 혼란 역시 사람들에게 이런 두려움을 줬다. 그리고 그 시대는 전체주의(totalitarianism)라는 완전히 새로운 정치체제를 출현시켰다. 이 체제는 수많은 유대인, 집시, 빈민들을 죽음의 벼랑으로 밀었을 뿐 아니라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개마고원, 2008)를 쓴 힐베르크(R. Hilberg)의 표현을 빈다면) 독일인의 일상을 ‘파괴기계’로 만들었다. 600만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낸 아이히만(Eichmann)의 인상은 피에 굶주린 악마가 아니라 평범한 공무원이자 옆집 아저씨였다. 악마는 사악한 의도를 가진 범죄자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협조하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숨은 악마는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사람을 생명이 아니라 사물로 대하는 사회 시스템이었다.

 

불확실성의 생존경쟁, 전체주의의 작동방식

 

사실 그 원인을 분명하게 알면 사람들은 그다지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 화장실의 귀신, 거울 속의 내 모습이 공포스러운 건 그것이 우리 일상 속에 잠재해 있을 뿐 아니라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언제 어느 때 어떤 식으로 등장할지 모르는 공포, 규칙도 합리성도 없는 공포, 그런 점에서 바우만(Z. Bauman)은 『유동하는 공포』(산책자, 2009)에서 불확실함이야말로 공포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얘기한다. 정체를 모르기에 맞서 싸워볼 의지조차 품을 수 없는 상태, 그것이 바로 공포이다. 그리고 그런 공포가 모두에게 평등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은 하나같이 안전벨트를 단단히 차고, 한층 더 여행을 즐기고” 있는데 “홀로 남겨지는 공포, 추방당하는 공포”야말로 공포의 최고봉이다.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한길사, 2006)에서 전체주의 지배의 가장 큰 특징이 비밀경찰이나 친위대같은 폭력적인 국가기구보다 ‘무정형(無定形)의 지배구조’라고 지적했다. 공무원과 정당, 정당 밖의 돌격대 등 여러 세력들이 제각기 지도자의 뜻을 받들고 있다며 주장하고 경쟁하는 구조에서는 어떤 사건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6명의 사람이 목숨을 잃었음에도 어느 누구도 용산참사의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하고 4대강 사업의 실체가 무엇인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 사회, 그러면서도 “지도자의 의지는 모든 곳에서 언제나 구현될 수 있으며, 지도자는 어떤 위계질서에도, 심지어 그 스스로 구축한 것에도 묶이지 않”는 사회가 바로 전체주의 사회이다.

더 나아가 아렌트는 전체주의가 불러오는 공포에 대한 오해도 지적한다. 전체주의 공포정치는 정치적인 반대파를 제거할 때가 아니라 그들을 제거하고 난 뒤에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는 사실이다. 공포정치의 필수품인 숙청과 비밀경찰은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반대파가 사라지고 난 뒤에 등장하고 특정한 사람들이 아니라 모든 시민을 감시한다. 이들은 국가를 오염시키고 파괴하는 ‘객관적인 적’을 규정하고 “생각할 능력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용의자”를 만든다. 지목된 용의자들은 갑자기 ‘수용소’에 갇히고 이 사회에서 사라진다(올 10월 7일 정부의 표창을 받기도 했던 이주노동자 미누가 잠복해 있던 출입국관리소 단속반원들에게 갑자기 표적단속되어 추방을 기다리고 있듯이). 어느 순간에 어떤 이유로 용의자가 될지 모르기 때문에 시민들은 서로를 고발하며 충성을 증명하고, 그렇게 서로에게 죄를 지으며 그 체제의 공범자가 되고,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그 정권을 지키려 안간힘을 다한다. 전체주의는 모래알처럼 분리된 대중에 의해 힘을 얻고 그렇게 지속된다.

전체주의의 진정한 무서움은 드러난 억압보다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생각하지 않으며 서로를 불신하도록 만든다는 사실에 있다. 눈에 드러난 독재자보다 형체 없는 지배가, 승자독식의 파괴적인 사회에 홀로 버려져 있다는 대중의 두려움이 전체주의 사회를 움직이는 힘이다.

 

공포와 희망의 변증법

 

허나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암울한 상황에서도 언제나 저항하는 사람들이 존재했다. 우리 역사를 살펴봐도, 언제나 시민들의 수많은 저항이 강력한 독재정권을 무너뜨려 왔다. 현실세계의 불안을 떨쳐버리기 위해 사람들은 사이버 세계에 진지를 구축하고 키보드 워리어로 변신하기도 한다. 한편으론 공포에 시달리지만 그 공포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스스로 희망의 뿌리를 내리려 한다. 억압을 감내하는 능동적인 정치행위와 동료 시민에 대한 믿음․연대는 전체주의 체제에 조금씩 균열을 내면서 희망을 퍼트리고 공포를 몰아낸다.

하지만 단지 눈에 보이는 정치인을 바꾸거나 정권을 바꾸는 것으론 부족하다. 권력의 형체를 드러내고 승자독식의 경쟁구도를 무너뜨리고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행동하는 시민이 등장하지 않는다면 공포의 정치는 언제든 다시 부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함께 생산하고 함께 다스리는 삶의 기반을 다질 때에만 우리는 공포를 극복할 수 있다.

가장 급한 과제는 모래알처럼 분리되어 적대적으로 경쟁하는 대중에서 벗어나 서로 보살피고 협동하는 시민이 되는 것이다. 공포를 희망으로 만들 변증법의 힘은 서로의 고통에 슬퍼하고 연민하는 시민들의 소통과 공감, 울림에서 나온다. 의심을 거두고 먼저 손을 내밀어야 희망이 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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