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북한의 지배자들을 싫어한다.
그들이 어려운 시기를 헤쳐나간 뛰어난 능력자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그렇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권력을 독점하며 인민을 지배할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네 대한민국의 민주공화국이 참 공허하듯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신도 참으로 공허하다.

예전에 경향신문 대담을 할때 김상봉 선생님이 북한에 관심을 두지 않는 지식인은 진보적 지식인이 아니라고 했는데, 관심을 두지 않는 건 아니지만 왜 그곳의 문제를 우리가 결정하려 드는지를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북한의 인민들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끔 연대하고 도와주는 역할은 할 수 있지만 그네들의 삶을 우리가 결정하고 이끌 수 있을까?

이런 복잡한 감정 때문인지 탈북자 또는 북한이탈주민 또는 새터민, 기타 등등으로 불리는 사람들에 대한 감정도 복잡하다.
그런데 아무리 상황이 복잡하다해도 북한에서 권력을 누렸던 사람들이 뛰쳐나와 북한을 비판하는 것에 대해서는 좋은 감정을 가질 수가 없었다.
아마 그런 좋지 않은 감정의 정점에 황장엽이라는 인물이 있었던 듯하다.
이미 돌아가신 분이라 좀 그렇지만, 그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만 가득 품고 있었다.

그러던 중 도서관 서가를 돌다 우연히 황장엽의 [민주주의 정치철학]이란 책을 발견했다.
예전에 봤을 수도 있지만 아마 부정적인 감정이 그 책의 존재를 무시했을 것이다.
더구나 출판사도 시대정신이고...
얼마 전도 황장엽이라는 이름을 먼저 봤다면 당연히 넘어갔겠지만 책의 표지가 없고 두껍고 낯선 하드카바의 책이라 슬쩍 꺼내봤다.
몇 페이지 읽다 좀 진지하게 읽어봐야겠다 싶어 대출해서 읽었다.

아, 그런데 이건 왠 일인가...
황장엽이라는 인물이 북한 최고의 이데올로그였다는 사실은 틀리지 않았다.
자신의 사상을 이처럼 명쾌하게 정리할 수 있는 사람이, 그것도 민주주의에 관한 얘기를 고대 아테네나 공화주의같은 서구정신에 기대지 않고 풀어낼 수 있는 지식인이, 약 60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을 각주에 의존하지 않고 한달음에 써낼 학자가 한국에 몇이나 될까.
책의 내용에 전적으로 공감하지는 않지만 그의 사유의 폭과 깊이에 감탄하며 몇 일간 이 책에 푹 빠져 있었다.
나의 편견을 비판하며...


이 책의 몇몇 핵심 구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자연개조사업에 기초하여 이루어지는 인간의 사회생활이 경제생활이며 인간개조사업에 기초하여 이루어지는 인간의 사회생활이 정신문화생활이고 사회관계개조사업에 기초하여 이루어지는 인간의 사회생활이 정치생활이다.” 황장엽 선생은 정치의 기본개념을 권력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적 협조성에서 찾는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재부를 어떻게 결합시키는가에 따라 사회에서 차지하는 사람들의 자주적 지위와 창조적 역할에서 큰 차이를 가져오게 된다. 그러므로 사회는 자기의 생존과 발전의 근본요구인 사회에서 차지하는 인간의 자주적 지위와 창조적 역할을 높이는 방향에서 자기의 구성요인들을 결합시키고 관리하는 기능을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정치의 본질은 사회관계를 개조하고 관리해 나가는 사회의 자체 관리기능이라는데 있다.”


“인간은 경제관계와 문화관계에 의거하여 경제생활과 정신문화생활을 하지만 경제관계나 문화관계 자체를 개조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경제나 문화 분야의 과업이 아니라 정치의 과업인 것이다.…경제관계나 문화관계를 개조하는 활동을 보장하기 위하여 맺어지는 사회관계가 다름 아닌 정치관계이다.”


“정치는 고립된 개인의 생명을 위대한 집단의 생명으로 결합시킴으로써 사람들에게 위대한 집단의 생명을 지니고 사는 끝없는 기쁨과 행복을 안겨주며 세계의 주인,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서 살며 발전할 수 있는 불패의 힘을 안겨준다. 물론 개인은 집단의 생명을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공동의 주인으로 된다. 위대한 생명의 공동의 주인으로 된다고 하여 주인으로서의 지위가 약화되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부부가 결합된 생명을 공유한다고 하여 결합된 생명의 주인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생명과 생명을 결합시키면 생명력이 비상히 강화될 뿐 아니라 개인의 생명과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게 된다. 생명과 생명이 결합되면 인간의 자주성과 창조성이 비상히 강화된다.”


황장엽 선생은 자신의 민주주의 정치철학을 “개인주의적 인본주의 사상이며 개인중심 민주주의 정치사상”이라 정의한다. 그는 자신의 정치철학을 정의의 원리와 사랑의 원리로 설명한다. “정의의 원리가 인간이 개인적 존재라는 특징과 결부되어 있다면 사랑의 원리는 인간이 집단적 존재라는 특징과 결부되어 있다.”


“사회에서 차지하는 인간의 지위와 역할을 규제하는 사회관계를 개변시키는 것은 정치의 임무에 속한다. 경제의 민주화를 떠나서는 정치의 민주화가 불가능하지만 정치의 민주화를 떠나서는 경제의 민주화가 완성될 수 없다. 세계민주화의 물질적 조건은 경제의 세계화를 통하여 마련될 수 있지만 세계민주화는 세계 인민들의 민주주의적인 정치적 협조와 결부됨으로써만 실현될 수 있다.”




 

요즘 사람들이랑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말문이 막힐 때가 간혹 있다. 똑같은 단어를 쓰긴 하는데, 서로 생각하는 바가 조금씩 달라서 얘기를 나누지만 정작 서로 아무런 얘기도 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얼마 전 우연히 뉴라이트쪽 사람을 만나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한때 논란이 되었던 ‘건국절’과 관련된 토론회였다. 그 사람은 어두운 기억을 버리고 밝고 건강한 기억을 가지자는, 식민지의 아픈 과거를 되새기지 말고 헌법을 만들고 산업화를 이룬 ‘한강의 기적’을 기억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나는 그 얘기에 공감할 수가 없었다. 우리에게 식민지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경험이고 산업화의 기적은 수많은 사람들의 인권을 철저하게 짓밟은 성과이기 때문이다.

나를 더 놀라게 한 것은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온 ‘반공주의’였다. 그 사람은 공산주의를 막기 위한 이승만, 박정희의 노력이 국가보안법으로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의 인권보다 더 중요하다고 얘기했다.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고문당하고 희생된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나의 물음에, 그는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은 공산주의를 막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고 답했다.

그 답을 들으며 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 사람의 생각이 케케묵은 반공주의에서 나왔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념이라고 하는 그 덧없는 것을 위해 사람의 생명이 이토록 허무하게 여겨질 수 있구나, 이들에겐 목적만이 있을 뿐 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이란 참으로 덧없는 것이구나. 이들에게 역사란 자신의 편견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기록일 뿐 자기를 되돌아보고 반성하기 위한 계기일 수는 없겠구나. 과거를 되돌아보지 못한다는 점에서 이런 사람들에게 미래는 없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같은 얘기를 하고 있지만 공감할 수 없는 사람들은 뉴라이트만이 아니다.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촛불집회에 관한 얘기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 물론 어떤 사건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서로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다른 편의 논의를 지나치게 축소시키는 건 단지 시선의 차이로 설명될 수 없다.

촛불집회에 관한 토론회에서 만난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은 촛불시위에 나오지 않았고 비정규직이라는 중요한 사회경제적 의제를 배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얘기했다. 가난의 기준이 무엇이고 어떤 점에서 비정규직을 배제했다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다양한 형태로 진화하고 있는 한 사건에 대해 그렇게 한정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어떤 의도를 담고 있을 것이다.

물론 한 사건에 지나치게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경계하고 차분하게 현실을 바라보자는 의도가 그 말에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차분하게 보는 것과 현실을 자신의 관점에서 재단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거리의 정치에 대한 열광이 제도정치에 대한 냉소로 이어지고 보수세력이 중요한 사회적 의제를 독점하리라는 우려는 귀담아 들을 얘기이다. 하지만 그런 정치적 결과에 대한 우려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건의 의미를 규정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참세상>의 집계에 따르면, 촛불집회와 관련되어 구속된 사람이 33명이고 29명이 수배중이며 1,530명이 체포되었다(9월 3일 기준). 경찰의 과잉진압과 인권유린, 과거로 돌아간 듯한 검찰의 수사 등 엄청난 공권력의 탄압을 받으면서도 촛불의 움직임을 이어가려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도 시민이고 한국이 민주공화국이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람을 가진 사람들에게 우리는 ‘어떤 민주주의’를 얘기해야 할까. 아직도 분에 못 이겨 촛불을 든다는 사람에게 우리는 현실정치에서의 패배와 냉소를 얘기해야 할까.

나를 더 놀라게 한 건 대의민주주의에서 비롯된 민주주의의 실패를 다시 대의민주주의로 환원시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한국에서 정당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진보정당을 세우는 노력이 거리에서 머리가 깨지고 경찰에 짓밟힌 사람들보다 더 중요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제도권의 정치가 자신을 얼마나 철저히 배제하는지를 절실히 깨달은 사람들에게 투표로 심판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올바른지도 잘 모르겠다. 내가 알고 믿는 건 촛불을 든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 목소리를 내고 싶어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런 목소리가 사회를 움직이는 힘이 되어야 한다고 바란다는 점이다.

아마 앞으로도 계속 우리는 선거와 관련된 얘기를 듣고 할 것이다. 내년의 보궐선거, 2010의 지방선거, 2012년의 총선... 그러면서 우리는 그 선거 결과를 가지고 촛불의 의미를 다시 해석하고 변화에 관해 얘기할 것이다. 때로는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한 반이명박, 반한나라당 전선을 얘기하고 그것에 촛불의 힘을 동원해야 한다고 얘기할지 모른다.

그러면서 우리가 잊어버리는 건 무엇일까? 정치와 민주주의에 관한 기존의 편견을 깨려는 노력과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의지일 것이다. 작지만 소중하고 소박한 꿈일 것이다. 언제나 우리가 불가능의 영역으로만 밀어놓고 고민하려 하지 않았던 꿈들. 하지만 그렇게 망각된 것들은 그냥 사라지지 않고 풀지 않은 숙제처럼 다시 등장해서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언제나 편견은 시선을 고정시키고 그 시선에 잡히지 않는 것들을 배제하고 망각한다. 그러나 배제되고 잊혀진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다. 그리고 무언가를 잊게 하려는 정치가 있다면 그것을 기억해내고 받아들이려는 기억의 정치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내야 할까? 그것은 짓밟히고 무시된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그 사람들의 인권이 보장되는 정치구조와 민주주의일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한국의 현대사를 장식했던 수많은 비극적인 사건들에서 사람들이 요구했던 바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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