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여는 역사>에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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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 관심을 좀 두려 하면 어김없이 “왜 선거 나가게?”라고 묻는 한국사회, 자신이 뽑은 대표자 앞에서 말 한 마디 제대로 못하는 사람들도 술자리에서 질펀하게 정치인의 자질을 논하는 한국사회에서 정치에 대한 인식은 부정적이다. 정치인이나 공무원의 부정부패를 “그럴 줄 알았다”는 상식으로 받아들이는 한국사회에서 정치에 대한 인식은 매우 부정적이다. 정치현실이 부정적이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이런 인식의 문제점은 부정한 정치현실을 바꿀 힘도 정치에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한다.

그런 점에서 생활정치의 의미는 소중하다. 생활정치는 단순히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인을 몰아내자는 주장으로 그치지 않고 시민을 정치의 주인공으로 세우려 한다는 점에서, 추상적인 이념이나 구호보다 실질적인 생활의 변화, 삶의 변화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정치에 관한 부정적인 인식을 긍정적인 것으로 바꾼다. 즉 생활정치는 특정 정치인의 교체가 아니라 정치참여과정과 정치의제의 변화를 요구한다.

정치적인 장의 관객이 아니라 주인이라면 나는 더 이상 정치를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 그리고 정치는 선악의 기준이나 단순한 논평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생활정치에서 정치는 ‘전지적 작가’ 시점이 아니라 ‘1인칭’, ‘2인칭’의 시점을 갖는다. 따라서 나는 또 다른 주인들과 공동체의 합의를 만들어가야 한다.


정치보스들이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한국사회에서 생활정치라는 말이 등장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생활정치라는 말이 등장하려면 먼저 그런 정치의 장이 마련되어야 했고, 따라서 우리는 지방자치제도의 부활을 준비해야 했다. 그리고 각종 정치적인 사건들에 관해 시민들이 자유로이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여전히 한국에서는 조중동같은 기득권화된 언론사들이 여론을 주도하고 선거 때마다 색깔논쟁이 불거지고 있다. 그래도 인터넷이나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 등에서 다양한 의제가 소통되면서 생활정치의 기반이 마련되고 있다.

이 글은 한국사회에서 생활정치가 활성화될 수 있을지를 살펴보고 활성화를 위한 조건을 따져본다. 아울러 생활정치의 관점에서 중앙집중화된 복지국가 담론을 넘어서 분권화되고 지방화된 복지사회론을 전개한다. 또한 총선, 대선이 실시되는 2012년에 이런 실질적인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을지, 그 가능성을 살펴보려 한다.


1. 생활정치는 어떤 변화를 꿈꾸나?

한국사회에 생활정치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92년 총선 때였다. 이때는 단순히 주민들을 위한 정치를 펼치겠다는 의미로 생활정치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그러다 생활정치라는 말이 기성정치와 다른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여성단체를 비롯한 시민사회단체들이 1995년 지방선거를 준비하면서부터였다. 보육과 교육, 복지가 이루어지는 지역사회, 생활세계를 잘 아는 여성들이 지방의회로 진출하거나 그런 생활상의 의제들이 선거공약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생활정치라는 말이 조금씩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YMCA>를 비롯한 시민단체들이 ‘생활정치아카데미’나 ‘생활정치네트워크’를 결성해서 지방선거에 후보자를 낼 뿐 아니라 시민교육, 즉 민주적인 토론역량과 합리적인 갈등해결능력, 정치적인 의사표현능력 등을 키우고 가부장적 권위주의를 극복하며 시민의 정치역량을 강화시키자는 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런 운동은 시민사회단체의 활동가나 전문가들을 제도정치 속으로 보낼 뿐 아니라 시민사회 자체의 역량을 강화시킨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다.

그런데 그동안 한국사회에서 생활정치가 전개되어온 과정을 살펴보면 몇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한국사회에서 생활정치가 활성화되려면, 다양한 정치의 장이 구성되고 각자 고유한 의제를 개발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한국사회에서 정치는 중앙정치, 수도권정치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지방이나 지역사회의 주체나 의제들이 시민들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지방선거 때에도 언제나 중앙의 정치바람이나 국가적인 사안이 후보자들의 당락에 영향을 미쳐왔고, 지역사회를 대변하는 후보자나 의제들은 선거에서 배제되었다. 생활정치를 내세운 여성운동이나 시민운동도 여성후보공천비율을 확대하거나 여성의 정치활동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꾸는 역할을 했지만 국가 중심의 정치구조를 바꾸지는 못했다.

둘째, 한국사회에서 정치는 주로 선거로 드러났고 선거를 준비하는 정당이 정치의 중심에 있었다. 그런데 한국의 정당이 비민주적으로 운영되고 시민사회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대표하지도 못한 채 보수화되어 있기 때문에 제도정치와 생활정치의 거리는 좁혀지지 못했다. 선거 때가 오면 정당과 시민사회운동이 전술적으로 연대하고 공동의 의제나 정책을 마련하기도 했지만 선거 이후에는 그런 연대가 이어지지 못했다. 즉 한국사회에서 생활정치운동은 ‘정치개념의 확장’이라는 역할을 담당하지 못했다.

셋째, 일제 식민지 시기부터 뿌리를 내려온 지역의 토호세력들이 지방의회나 지방정부를 장악하며 지방자치를 보수화시키고 생활정치를 가로막았다. 사실상 기득권 세력들이 다수의 지방정부와 지방의회를 독점한 채 이권을 나눠먹어 왔다. 그러니 구청장이나 시장, 지방의원들이 부패하고 제대로 임기조차 마치지 못하는 상황이 비일비재하다. 심지어 경기도 시흥시나 성남시처럼 시장들이 몇 대째 계속 구속되는 어이없는 상황도 벌어졌다.

넷째, 일터와 삶터가 분리되면서 생활정치의 의제는 노동의제를 배제하게 되었다. 시민운동과 노동운동이 분리되었듯이, 생활의제도 노동의제와 분리되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노동조합운동이 협동조합운동이나 문화운동이 자연스레 결합되었는데 한국에서는 노동정치가 생활정치를 무시하고 생활정치가 노동운동을 배제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다섯째, 한국의 시민사회운동들이 주요한 사회적 의제들을 제기하고 정당의 빈 곳을 메워온 것은 맞지만 그들 역시 공공성이라는 추상적인 가치를 구체적인 생활상의 문제로 접목시키지 못했다. 시민사회운동은 전문가나 활동가를 중심으로 진행되었고 시민의 생활로 파고들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생활정치 역시 추상적인 가치로만 얘기되지 실제 생활을 바꾸는 운동으로서 논의되지 못했고, 생활정치의 주체로 나서야 할 시민들은 관객은 아닐지라도 운동의 객체나 수혜자로 머물 수밖에 없었다.

여섯째, 일본에서는 소비자생활협동조합이 정치활동에 참여하고, ‘가나가와네토’나 ‘도쿄생활자네트워크’같은 정치모임을 구성해서 ‘생활자정치’를 활성화시키고 있다. 그런데 한국의 소비자생활협동조합운동은 일본의 ‘생활자운동’에 큰 관심을 보이지만 적극적으로 정치운동을 펼치고 있지 않다. 한국의 생협법(제 4조)이 생협의 정치활동을 금지한 탓도 있지만, 소비자생협들 스스로 정치활동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다. 소비자생협만이 아니라 많은 시민사회단체들도 스스로 정한 ‘정치적 중립성’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생활정치라는 말은 자주 쓰이게 되었지만 정치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변하지 않고 시민사회 자체가 강화되지도 못했다. 이런 분위기가 바뀔 기미를 보인 것은 2010년 지방선거였다. 민선 5기를 맞이하는 지방선거에서는 중앙의 정치바람이 잦아졌고 공동지방정부라는 개념이 등장했으며 기득권세력의 독식현상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무상급식이나 마을만들기, 사회적 기업과 같은 생활의제들이 주요한 선거쟁점으로 떠올랐고 다양한 시민사회단체들이 자신의 정치성을 커밍아웃하기 시작했다. 특히 주민참여예산제도를 비롯한 주민참여제도들이 적극적으로 도입되었고, 시정(구정)공동운영위원회나 도정협의회같은 거버넌스 기구들이 만들어졌다. 이런 변화는 분명 생활정치의 영향력을 높일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고 있다.

그러나 앞서 얘기했던 한국사회의 특징들이 근본적으로 변했다고 판단하기는 아직 이르다. 여전히 정치는 관전이나 논평의 주제이지 내가 직접 뛰어들 수 있는 장은 아니다. ‘나는 꼼수다’처럼 주요한 현안을 재미있게 소개하고 시민의 정치참여를 유도하려는 시도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이런 시도들이 생활정치를 강화시킬지 아니면 제도정치를 강화시킬지를 미리 예측하기는 어렵다.

특히 중앙정부나 수도권이 주요한 정치의제를 독점하고 중앙언론이 여론을 좌지우지하는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교육, 문화, 경제 등 모든 사회자원이 수도권으로 빨려들어가는 초집중화 현상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정치의식을 가진 시민들의 시선도 중앙에 집중되어 있지 자기 주변을 둘러보지 않는다.

생활정치가 꿈꾸는 변화는 내 욕구를 대신 해결해줄 ‘해결사’의 등장이 아니라 나의 욕구를 공통의 욕구로 만들며 함께 꿈꿀 ‘공동체’의 등장이다. 생활정치는 다른 사람이 내게 필요하거나 중요한 것을 정해주는 과정이 아니라 내 자신이, 우리 스스로 그런 필요와 중요성을 정해가는 과정이다. 어떤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곳에서 도움을 받아도 좋지만 같이 힘을 모아 해결할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좋다. 왜냐하면 그런 자립(自立)을 통해 자치(自治)의 힘이 강화되고 자존감도 높아지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는 공생(共生)이나 공존(共存)도 그런 자립을 전제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2. 복지국가와 복지사회의 큰 차이점

과거와 달리 한국사회에서 복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다. ‘권리’없이 ‘의무’만이 강조되고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한국사회에서 복지는 상식의 전환을 가져온다. 그런데 복지국가가 곧 시민의 복지와 행복을 대변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고 그것이 생활정치의 방식일지는 의문이다.

<녹색평론> 김종철 발행인의 다음과 같은 얘기는 생활정치와 관련해 중요한 고민꺼리를 던져준다. “복지국가와 복지사회는 다른 개념이죠. 국가와 사회가 기본적으로 다른 것이니까요. 복지국가는 국가적 시스템으로 시민들을 보호하겠다는 것이고, 복지사회는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우리들 자신이 자주적으로 상호 연대하고 협동함으로써 만들 수 있는 사회입니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 당장에 실현 가능할 뿐 아니라, 확실한 민주주의를 실천할 수 있는 틀입니다.”

김종철 발행인의 말처럼 복지국가와 복지사회는 다르고, 생활정치는 복지국가보다 복지사회와 가까운 개념이다. ‘복지국가 소사이어티’를 비롯한 여러 단체들이 주장하는 주요 정책들에 공감하고 그것이 사회에서 배제된 사람들의 권리를 보장해 주리라는 점을 모르지 않지만 그것이 궁극적인 변화일지는 의문이다. ‘보편적 복지’가 가진 장점도 분명히 있지만 ‘보편적 복지 대 선별적 복지’라는 구도로 해명되지 않는 부분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김종철 발행인은 “개인들의 자립적 역량과 자기책임을 무엇보다 강조하는 나라”인 덴마크의 아이들이 스스로 도시락을 싼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한 무상급식이 필요하지만 자기 먹을 것을 스스로 장만하는 교육도 그만큼 중요하다는 얘기이다. 모두에게 똑같이 대우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모두가 스스로 필요한 것을 고민하게 만드는 것도 필요하다.

어른들이 청소년의 판단을 대신하고 그들의 성장을 대신하려는 사회에서 생활정치는 활성화되기 어렵다. 남성들이 여성들의 필요를 예측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려는 사회에서 생활정치는 왜곡되기 쉽다. 모든 복지를 한꺼번에 실시할 수 없다면 우선순위가 필요한데 그 우선순위는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정해야 한다. 그런데 복지국가의 관료조직은 그렇게 유연하지 않다.

그리고 복지국가에 관한 담론은 한국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점들을 드러내지 않는다. 예를 들어, 서울특별시의 모든 학교들이 친환경 무상급식을 한다고 치자. 조그만 공터에도 아파트를 짓는 서울시는 그 많은 쌀이나 식재료를 어디서 마련할 수 있을까? 지산지소(地産地消)나 로컬푸드(local food)를 전제하지 않은 무상급식은 다른 지역사회의 복지를 파괴할 수 있다. 피크 오일(peak oil) 시대를 맞이한 에너지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전력자급률이 1.9%에 지나지 않는 서울특별시가 에너지 복지를 실현하려면 다른 지역의 에너지를 빼앗아와야 한다. 많은 결정권한을 소유한 수도권이 주요한 사회자원을 배분하면서 전체적인 균형복지를 추진할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복지국가 담론은 중심부가 주변부를 지배하는 ‘내부식민지’라는 구조적인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또한 복지국가 담론은 김종철 발행인이 지적하듯이 “복지국가가 유지되려면 반드시 경제성장이 계속돼야 한다는 대전제”를 유지한다. 복지는 세금을 높이고 세금을 내는 사람들의 수를 늘려야 가능하다. 하지만 최근의 잇따른 경제위기에서 드러나듯 성장은 ‘신화’가 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김종철 발행인의 얘기는 시사적이다. “거듭 말하지만, 덴마크 같은 사회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국가적 제도 개혁 이전에 시민들 자신의 자주적․협동적 결사운동이 활발했기 때문입니다. 시민들의 자주적 결사체가 활발해져야 국가도 국민의 의사를 존중하고, 건강해질 수 있어요. 원래 근대국가의 논리는 그대로 두면 폭력이 되기 쉽습니다. 국가는 국민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것을 원합니다. 반면에, 우리가 국가나 자본의 폭력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단결하고 연대하는 방법밖에 없어요. 단, 개인들이 자신의 독자적 인격과 자립성을 유지하면서 연대하는 것이죠. 우선 나 자신이 강인한 인간, 실력있는 인간이 돼야 합니다. 그러자면 끊임없이 인간관계를 통해서 단련을 해야 합니다. 타인이야말로 내가 가진 가장 큰 재산이라는 진리를 이해하는 게 중요합니다. 가장 훌륭한 복지는 제도가 아닙니다. 풍요로운 인간관계입니다. 물론 그 인간관계는 민주적인 관계여야 하죠.”

따라서 복지국가와 생활정치의 방향도 매우 달라질 수밖에 없다. 복지국가가 위로부터의 제도적 보장을 강조한다면, 생활정치는 아래로부터의 상호부조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생활정치는 어떤 식의 복지를 구상할까?

복지국가를 얘기할 때 많이 다뤄지는 것은 일정한 ‘기준’이다. 국가가 국민의 최저생활수준을 보장하는 내셔널 미니멈(national minimum)처럼 다양한 기준을 통해 복지국가의 복지는 실현된다. 문제는 이런 기준들이 시민의 ‘실제 욕구’와 얼마나 일치하고 그 욕구를 충족시키는 과정이 얼마나 민주적인가이다.


앞서 말했듯이 수도권으로 초집중화된 한국사회의 현실을 고려할 때, 중앙정부가 모든 기준을 결정하는 것은 구조적인 비민주성을 낳을 수밖에 없다. 가령 수도권의 기초생활수급자가 느끼는 불편과 어려움이 지방에서 생활하는 기초생활수급자의 불편이나 어려움과 똑같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지방자치단체가 복지수준을 정하는 시빌 미니멈(civil minimum)이라는 기준을 활용하고 있다. 시빌 미니멈은 도시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누려야 하는 최소한의 생활환경기준, 예를 들어 보행로나 공원, 복지시설, 편의시설이 어느 정도 확보되어야 하는지를 정한다. 지방자치단체가 시민들의 참여를 통해 시빌 미니멈을 정하기 때문에 지역주민들의 실제 욕구가 이런 기준들에 충실히 반영될 수 있다.

그런데 일본 <생활클럽생협>의 요코다 카쓰미는 이와 또 다른 커뮤니티 옵티멈(community optimum)을 제안한다. 내셔널 미니멈이나 시빌 미니멈이 필요하지만 “상호부조와 상호지원에 의한 복지로 지역복지에 최적의 조건을 가능하게 만드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이다.
지역사회의 복지를 최저수준이 아니라 ‘최적수준’으로 보장하려면 시민이 복지의 수혜자이면서 동시에 복지의 제공자이기도 해야 한다. 즉 “미니멈에 입각한 복지서비스를 제공받는 것은 시민의 권리이기에 이러한 기준에 입각한 서비스를 제공받으면서도 자기 자신이 생활하는 지역사회에서 ‘최저 기준’에 입각한 복지 서비스를 창출해 그 수익자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고 “자기 자신을 위해 상부상조의 인간관계(커뮤니티)를 만드는 데 참가하는 것을 통해 미니멈보다 더 만족스러운 복지기준을 만들어내고 상호 활용하는 것”이다. 일본에서 생활자 정치가 활성화되고 있기에 가능한 주장이기도 하다.

나는 이런 논의가 한국에도 필요하다고 본다. 우리의 정치가 소수의 정치인과 다수의 시민관객으로, 수도권과 비수도권으로 양분되었듯이, 우리의 복지도 언제나 수혜자층이 누구인가를 놓고 다툼을 벌인다. 허나 생활정치의 관점으로 본다면, 일방적인 수혜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복지의 관점이 놓치는 것은 복지가 필요한 사람들의 ‘처지’이다. 더글러스 러미스는 “가난이 왜 고통스러운가 하면, 가난하기 때문에 싫은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고, 가난하기 때문에 관리나 억압에 저항하지 못하고 착취당하기 때문입니다. 상사가 아무리 보기 싫어도 이를 악물고 일해야 하고, 경멸당하고 무시당해야 하니까 그것이 고통스러운 거죠. 물질이 풍요롭지 않다는 것, 즉 가난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관계의 문젭니다. 관리되는 인간관계에서 자신의 위험이 상처받는 것이 고통스러운 게 아닐까요?”라고 묻는다.
복지국가가 복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처지를 개선시키려면, 필요한 것은 일방적인 수혜관계가 아니라 호혜성이다.

근대사회에서 생활정치가 살리려 하는 것도 바로 그 호혜성이다. 서로가 서로를 보살피고 각자의 목소리를 내며 함께 행동할 때 정치의 장이 풍요로워지고 행복해진다. 그것은 선거가 아니라 추첨이 민주적인 대표자 선출방식이라는 오랜 지혜처럼 낯설지만 손쉽게 가능한 해결책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런 해결책을 향해 가고 있을까?


3. 2012년은 전환점이 될 수 있을까?

박원순 변호사가 서울시장으로 당선되면서 정치에 대한 기대나 희망이 싹트고 있다. 투표율이 올라가고 정치에 관심을 가지며 자기 목소리를 내는 시민들의 수도 늘어나고 있다. 트위터나 페이스북의 세계에 들어가면 다양한 사회의제들이 시민들 사이에서 얘기되고 있다.

그럼에도 이런 조건들이 생활정치를 활성화시킬 것이라고 낙관하기는 어렵다. 우리의 정치조건이 근본적으로 변화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일단 우리의 세계를 정의하는 언어 자체가 분명해져야 한다. 그런데 우리 현실은 너무 어지럽다. ‘녹색성장’, ‘공정사회’, ‘공생발전’처럼 그 의미와 현실이 완전히 분리된 경우도 있고, 민주주의나 시민처럼 그 의미가 모호한 언어도 많다. 그런 점에서 프란시스 무어 라페는 우리의 언어 자체가 민주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얘기하며 대안용어를 주장한다.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용어

혼란스럽게 만드는 암시들

더 정확하고 힘있게

소통하게 하는 대안용어

행동가

선동가, 자신만의 의제를 지닌 극단주의자

참여하는 시민, 능동적 시민, 권리있는 시민

반세계화주의자

퇴행적이고 이기적인 고립주의자

민주주의 옹호자, 강력한 공동체 옹호자, 반(反)기업통제, 반(反)경제집중

시민권

부담, 의무, 지겨운 것

공적인 참여, 공동체 만들기

관행 농업

무해하며 오랜 경험으로 입증된 것(둘 다 사실이 아니다)

화학의존적 농업, 자연착취적 농업, 공장식 농업

보수주의자

환경과 공동체를 보존하는데 헌신적임을 암시

극우, 반(反)민주 우파(적용가능할 때)

민주주의

투표와 정부에 한정된 것

살아있는 민주주의: 공정함, 포용, 상호책임성같은 민주적 가치들이 우리 공적 삶의 모든 지평에 스며드는 삶의 방식

자유무역

정부통제의 부재, 자동 메커니즘 암시(자동 메커니즘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기업 우선의 불공정 무역

세계화

연결보다는 상호의존, 자유무역, 저가상품을 암시

세계적인 기업 통제, 세계적 기업주의, 경제 집중화, 경제 봉건주의, 임금 수준에 대한 세계적 하향 조정 압력

사회정의

급진좌파, 평등강요와 연결

공정성, 공정한 기회, 자유

자유선호의․자유당의

거대정부 선호

진보적, 민주적

최저임금

인간에 대한 영향력을 전달하지 못하는 용어

빈곤임금 vs 생계임금

일인당 국가 부채

대부분 사람들에게 의미 없는 것

출생 세금(2005년 각 신생아가 직면한 국가의 부채 액수는 15만 달러이다)

비영리조직

부정적인 뜻으로 정의됨

사회에 기여하는 조직, 시민의 조직

유기농, 저투입

화학살충제, 화학비료같은 물질의 부재에만 초점을 맞춤

생태 친화적 농업: 환경을 향상시키는 한편, 생태학을 생산성과 품질 향상에 사용하는 강력한 지식을 요하는 농업

선택 홍호

(낙태 합법화 옹호)

사소하게 들린다

양심 옹호

저항, 데모

제한적, 방어적

시민불복종: 민주적 가치를 옹호하기 위한 적극적 행동

공적 삶

공무원과 유명인사에게만 한정된 것

구매자, 노동자, 고용주, 부모, 유권자, 투자자, 그리고 거대한 파문을 만들면서 매일 수행하는 모든 역할들에서 각자 하고 있는 것

동성 결혼권

성에 초점을 맞춘 것

결혼할 수 있는 권리, 동등한 결혼

세금

부담, “우리” 돈의 갈취

강력하고 건강한 사회를 위한 구성원의 의무, 판사 올리버 웬델 홈스 주니어가 이야기한 그대로, “문명의 비용”

복지국가

사람들의 요구를 다 받아주는 체제, 거대한 관료주의

공정한 기회를 제공하는 국가

 

언어는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과정이다. 우리의 언어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은 우리가 공유할 세계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정치는 우리가 함께 발 딛고 있는 세계를 이해하고 그 세계에 나의 가치를 심는 것으로 시작된다. 우리가 처한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공통의 언어와 감각이 요구된다. 생활정치는 그런 언어와 감각을 발견하고 발전시키는데 노력을 집중해야 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제이슨 델 간디오는 다른 세계를 가능하게 하는 신급진주의를 제안하고 그런 의제를 발전시킬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을 얘기한다.

• 신급진주의는 인간이 소통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현실을 창조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 신급진주의는 사람들에게 자기 내면에 자리잡은 정치적 욕망을 쫓아가라고, 선택한 현실이 무엇이든 창조하라고 주문한다.
• 신급진주의는 다른 현실을 방해하지 않는 한 무엇이든 수용되고, 존중되고, 인정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 신급진주의는 사람들이 욕망하는 현실을 자유롭게 창조하게 해주는 사회체제를 수립하려고 애쓴다. 이렇게 하려면 이 과정을 방해하는 사회체계가 무엇이든 그것을 탐구하고 대결하고 근절하는 것이 필요하다.
• 이 투쟁은 무한히 계속된다. 심지어 중심 없는 현실의 세계를 창조한다고 해도 지속된다. 방해하고 통제하고 억압하는 힘이 다시 출현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우리의 현대사는 힘없는 사람들이 주변을 잘 살피고 조용히 말을 하도록 내면화시켰다. 옳고 그른 것, 바르고 나쁜 것을 논하기 전에 사람들 각자가 마음 속에 있는 얘기를 털어놓을 장이 필요하다. “내가 한들 뭐가 바뀌겠어”,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대안이 없어요”라는 말이 아니라 내 속에 자리잡은 감정과 언어를 나눌 시간과 여유가 필요하다.

지금 당장 막아야할 사업과 지켜야 할 가치들이 있는데, 그렇게 막연한 얘기를 하냐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허나 내 속의 언어를 끄집어내는 과정과 세계를 함께 이해하고 공유하는 과정이 없다면 제 아무리 급진적인 변화라도 기성체제 속으로 흡수될 수밖에 없다. 2012년 역시 수많은 정책과 사람들 속에서 필요한 것을 취사선택하는 과정이 아니라 서로의 목소리와 꿈을 공유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2012년은 지나온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는 반복에 그칠 것이다.

2012년 대선을 두고 안철수 씨의 등장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은데, 그런 평론 역시 지식인의 ‘전문성’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개운한 반응은 아니다. 왜냐? 아마추어도 정치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하고 때로는 전문가들의 정치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물론 지식인들은 ‘비판적인 거리’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허나 그것이 거리를 유지하기 위한 비판이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안철수 씨나 박원순 씨의 등장 자체가 생활정치의 성격과 맞을지도 의문이다.

특히 우리가 맞닥뜨린 근본적인 위기가 있다. 서울시 노원구 월계동 아스팔트에서 방사능이 검출되면서 두려움이 일고 있다. 그나마 서울에서 터진 일이기에 사건이 되었고, 그와 더불어 이미 2011년 2월에 경주시, 포항시의 아스팔트에서도 방사능이 검출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방사능은 이미 우리 일상생활 속에 깊이 침투했을 수 있다.

그렇게 검출된 방사능만이 문제는 아니다. 정부는 원자력 클러스터를 만들고 전 세계에서 가장 밀집된 핵발전 단지를 만들려 하고 있다. 일본 핵발전소 사고를 바로 곁에서 겪고서도 우리는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하고 있다. 단지 30년 동안의 풍족한 에너지 소비를 위해 수만년의 부담을 후손들에게 떠넘기면서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생활정치를 아무리 떠들어도 부질없는 짓이다.

원자력만이 아니다. 먹고사는 문제의 핵심인 식량과 종자도 근본적인 위기를 예고하고 있다. 한미FTA를 비롯한 협약들과 초국적기업의 침투는 농민들의 삶과 우리의 식량주권
을 위협하고 있다.

어떤 정당, 어떤 정치세력이 이런 예고된 비극을 막을 수 있을까? 2012년은 희망의 완결점일 수 없고 희망의 시작일 뿐이다.


4. 결론

문강형준은 파국의 상황에 맞닥뜨린 우리의 실존을 좀비와 비교한다. “좀비는 포스트-정치적 상황과 결합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체제가 날로 분명히 몰고 오고 있는 파국의 분위기에 최적화된 주체일지도 모른다. 모든 사회적인 것을 개인화하고, 이윤을 위해서 자원을 모조리 끌어다 쓰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지구적 환경문제는 외면한다. 이로 인해 결국 사회적 갈등과 지구적 문제가 연쇄적으로 폭발하는 상황을 파국이라 할때, 그 파국 상황에서도 ‘묵묵히’ 걸어 다니며 자신의 식욕을 채우는 ‘일차원적’ 존재를 우리는 좀비라는 아이콘을 통해 발견한다. 좀비는 파국의 상황을 예비하면서 동시에 파국을 전파하는 존재다. 완벽하게 자유롭지만 완벽하게 속박된, 인간의 형상을 했지만 인간이 아닌, 포식하면서 소진하는, 살아 있으면서 죽어있는, 존재이면서 비존재인, 주체이면서 반주체인, 노예이면서 소비자인, 결핍이면서 과잉인, 이 모순적 존재는 바로 오늘 우리가 처한 상황의 온갖 모순을 체화하고 있다. 우리를 둘러싼 그 모든 모순이 터지는 날, 어쩌면 ‘우리’는 ‘그들’ 중 하나가 되어 파괴된 거리를 서성이고 있을 것이다. 좀비가 된 우리들에게도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하나있으니, 파국 상황 속에서 고통받는 이들은 ‘인간’이지 ‘좀비’는 아니라는 것이다.”
날카롭고 무서운 지적이다. 파국의 상황에도 ‘지금 당장의 식욕’만을 채우려는 일차원적 존재인 존비가 우리의 실제 모습일지 모른다.

좀비임을 한탄만 하지 않고 인간이고자 한다면 우리는 선택을 내려야 한다. 생활정치를 펼치며 사람의 삶을 살 것인지, 아니면 기득권의 정치에 끌려다니며 좀비의 삶을 살 것인지. 2012년은 그 시작을 알리는 해일 뿐이다.


※ 참고하면 좋은 책

김종철, “우애의 경제를 위하여”, 《녹색평론》2011년 7~8월호(통권 제 119호)
요코다 카쓰미 지음, 나일경 옮김, 『어리석은 나라의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시민: 생활클럽 운동그룹과 풀뿌리 민주주의 운동의 모델 만들기』(논형, 2004)
C. 더글러스 러미스․쓰지 신이치 지음, 김경인 옮김, 『에콜로지와 평화의 교차점』(녹색평론사, 2010)
프란시스 무어 라페 지음, 우석영 옮김, 『살아 있는 민주주의』(이후, 2008)
제이슨 델 간디오 지음, 김상우 옮김,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동녘, 2011)
아네트 아우렐리 데스마레이즈 지음, 박신규․엄은희․이소영․허남혁 옮김, 『비아캄페시나: 세계화에 맞서는 소농의 힘』(한티재, 2011)
문강형준, 『파국의 지형학』(자음과 모음, 2011)
이지원, “현대 일본의 자치체 개혁운동: 혁신자치체와 시빌미니멈을 중심으로”, 서울대 대학원 사회학과 1999년 박사논문.
장석준, 『신자유주의의 탄생』(책세상, 2011)
김홍우 외 지음, 『삶의 정치, 소통의 정치』(대화출판사, 2003)
오사무 우오토, 『현미 선생의 도시락 1~8권』(대원씨아이, 2009~2011)
하승우․유해정, 『도시생활자의 정치백서』(북하우스,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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