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낯설지만 탈협동화(demutualization)협동조합의 법적 형식이 합자회사나 주식회사 등으로 사유화되는 과정을 뜻한다. 협동도 제대로 되지 않는 우리 사회에서 무슨 탈협동화냐고 되물을 수 있다. 닥쳐올 것(아니, 이미 닥쳐왔을 수도 있는 것)을 미리 조망한다는 의미로 이 글을 읽으면 좋겠다.

 

 

1. 해외 협동조합의 탈협동화

 

유럽의 협동조합들은 생산과 소비, 신용, 문화 등의 영역에 폭넓게 퍼져 있다. 세계가 몇 차례의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곳은 신용조합이나 협동조합은행이다. 유럽의 조합원 수나 매출고는 한국과 비교가 안 될 수준이다. 한국에서 유명한 몬드라곤 협동조합 복합체의 자산은 약 53조에 달한다. 금융, 제조업, 유통, 지식 등을 포괄하는 자산규모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재벌인 현대중공업보다 조금 적다. 그리고 몬드라곤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수는 8만 4천명으로, SK나 롯데보다도 많은 수의 노동자를 고용한다. 그리고 전 국민의 60%가 조합원인 스위스에서는 협동조합이 카르푸의 매장을 인수했고, 이탈리아의 볼로냐는 한국 협동조합 관계자들의 순례코스가 되었다.

 

이런 소식만 들으면 호황기에 무슨 탈협동화를 논할까 싶다. 하지만 협동조합을 연구하는 갈러(Z. Galor)가 홈페이지(www.coopgalor.com)에 올려놓은 자료들을 읽다보면 협동조합의 부흥기 뒤에 협동조합 정체성의 변화가 숨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갈러는 전 세계 다양한 협동조합들에서 탈협동화 경향이 나타나고 그것이 소비자협동조합과 에너지협동조합에서 두드러진다고 지적한다. 갈러가 지적하는 주된 원인은 조합원의 관심과 참여 부족이다. 협동조합이 탈협동화되어도 조합원들은 관심이 없거나 외려 주식회사로의 전환을 지지한다.

 

물론 모든 문제가 조합원들 탓은 아니다. 조합원의 삶을 지지하거나 조합원과 함께 성장하지 않는 협동조합의 구조도 문제이고, 세계화에 따른 경제구조 변화나 초국적기업들과의 경쟁, 협동조합이 낡은 것이라는 편견같은 외부요인들도 탈협동화를 부추긴다.

 

한 사례를 구체적으로 따져 보자. 이스라엘의 트누바(Tnuva)는 연계형 협동조합(secondary cooperative)으로 농업공동체인 모샤브(Moshavim)와 키부츠(Kibbutzim)가 생산한 농산물을 가공해서 판다. 지난 몇 십년 동안 트누바는 빠르게 성장했고, 각 조합의 지분과 가치도 높아졌다. 그런데 조합원들이 아니라 위원회가 트누바를 운영했고, 조합원들은 트누바의 성장에서 몫을 공유하지 못했다.

 

1990년대부터 낙농업을 하는 조합원들이 문제를 꾸준히 제기했고, 트누바를 변화시키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그런데 이 움직임에는 이스라엘의 대기업이 트누바를 인수하려는 움직임도 있었고, 에이팩스(APAX)사가 10억 달러(트누바의 실제 자산가치는 8억 달러 정도)를 제안하자 총회는 압도적인 비율로 지분의 매각을 결정했다(에이팩스사가 51%의 지분을 차지!).

 

갈러는 조합에 관심을 가진 조합원 그룹이 존재했다면 그들이 탈협동화에 맞섰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한다. 어쨌거나 이런 전환의 결과 2011년 7월에는 트누바의 비싼 치즈가격 때문에 이스라엘 시민들이 불매운동을 조직하는 일까지 생겼다. 이 일이 이스라엘의 협동조합운동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협동조합간의 연대도 좋지만 연계형 협동조합이 조합원들의 관심과 참여구조를 마련하지 못할 경우 언제 어디서든 발생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리고 앞서 얘기했던 몬드라곤 협동조합복합체는 1990년대부터 주식회사 형태의 자회사들을 만들어 확장전략을 펼쳐왔다. 그 결과 유통이나 금융부문의 자회사들 중 상당수가 협동조합이 아니고 해외의 현지기업에 고용된 노동자들도 조합원이 아니다. 이 역시 협동조합이 시장에서의 생존과 확장전략을 최우선으로 내세울 때 언제 어디서든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다.

 

그런데 나는 이런 변화가 온전히 협동조합만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앞서 갈러가 탈협동화의 외부요인이라 얘기한 것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결정권의 집중’이다. 세계가 ‘1 대 99의 사회’로 전락한 것은 99%의 사람들에게 결정권이 없기 때문이다. 전 세계적으로 국가와 시장의 경계가 점점 사라지는 상황에서 협동조합이 계속 성공하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분노하라’의 열풍을 생각하면, 지금까지의 위기는 시작에 불과할 뿐이다.

 

 

2. 왜 협동조합은 번성했을까?

 

그럼에도 우리가 앞선 경험에서 받아들여야 할 시사점은 분명히 있다. 유럽 협동조합의 기본은 농민과 소상공인, 도시노동자들을 지원하는 구조였다. 그리고 그런 역할을 위해 협동조합은 분권화를 추구했고 지역과 지방은행을 강화시켰다. 중앙에서 조직되어 지방으로 퍼지는 방식이 아니었다. 자급이 기본이고, 불가피할 경우에만 중앙이 개입했다. 중앙이 가서 판 깔아주고 컨설팅해주고 하는 구조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유럽연합(EU)으로 통합된 이후에도 협동조합들은 자급의 원칙을 지키고 있고, 분권화되어 있어 유연하고 조합원이나 외부의 변화에 민감하다. 그리고 중소기업들이 협동조합과 긴밀한 연계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사회나 협동조합이 조직되는 방식은 어떤가? 수도권과 중앙 중심이고 그 구조가 집중화되어 있다. 우리는 이에 관한 물음을 던지거나 비판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협동조합이 번성한 곳들, 즉 독일, 이탈리아, 스위스, 네덜란드, 스페인과 같은 나라들이 연방국가라는 점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중소기업의 고용구조가 협동조합의 성장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점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물음을 던지지 않고 협동조합이 어떤 곳에서나 성공한다거나 외국의 모범사례를 따라 열심히 규모를 키우자고 주장하는 건 무책임하다.

 

사실 ‘뭉치고 힘을 키우면 이긴다’는 논리는 정신승리법에 가깝다. 과연 우리는 세계경제의 변화를 올바로 이해하고 있을까? 데이비드 맥낼리는 『글로벌 슬럼프』에서 세계경제 전체를 보면서 새로운 형태로 변이되는 경제위기의 속성을 파악하지 않으면 현재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위기를 주도하는 탈정치화의 경향에 맞서 정치를 되살리고 희망의 기운을 만들 다양한 고리들을 조직하는 것, 그것이 대안이라고 맥낼리는 얘기한다. 그러니 협동조합은 지역의 관점에서 세계경제의 변화를 읽고 지역적인 행동으로 변화에 개입하고 그 사건들을 조직해야 한다.

 

그리고 유럽이 이러니 따라가자, 복지국가도 따라가자, 이런 식의 발상이야말로 낡은 편견이다. 이미 협동조합의 주류는 유럽에서 아시아와 남아메리카 대륙으로 이동하고 있다. 그리고 구리모토 아키라 이사가 “아시아 협동조합의 과제와 전망”이라는 기사에서 지적했듯이, 아시아의 협동조합은 소비자운동과 결합되어 시작되었다. 생협운동이 사회운동과 무관하지 않았다는 얘기이다. 일본의 생협운동이나 인도의 낙농협동조합 ‘아물’, 그라민 은행 등이 그 예이다. 이 기사는 정부의존에서 벗어나 조합원의 요구에 따르고 조합원이 지지하는 사업과 활동을 펼칠 뿐 아니라 사회의 공익과제를 담아내 협동조합의 존재 의의를 높여야 한다고 결론을 맺는다. 그렇다면 한국의 협동조합은 조합원들의 삶에, 먹거리만이 아니라 그들의 가족구성, 노동조건, 생활하며 겪는 다양한 문제들에, 다양한 사회운동에 어떻게 개입하고 있나?

 

따지고 보면 이런 고민은 새로운 게 아니라 이미 있었던 것인데 잊혀진 것이다. 협동조합운동은 살림운동이다. 내 손 때가 묻어있는 물건은 낡아도 쉽게 버리지 못하고 새것에 현혹되지도 않는다. 협동조합운동은 그런 기억과 관계를 만드는 운동인데, 그걸 얼마나 실현하고 있는지 스스로 점검해야 한다. 국가나 시장이 ‘향수’를 만들거나 그것을 소비하도록 강요할 수는 있지만 진정한 풍취를 만들지 못하는 게 바로 이것이다. 이 가장 강력한 무기를 협동조합운동이 그동안 얼마나 갈고 닦아 왔는지 스스로 점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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