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국가와 시민사회의 자율성

 

■ 식민지 관료국가와 반공․규율사회의 형성: 자율성을 논할 수 있는 구조인가? 사회적 경제의 기반이 단단한가? 사회적 경제의 체제 내화.

• 강력한 중앙집권형 국가의 형성: 경찰국가, 국가폭력의 일상화. 중앙이 계획하고 지역이 집행하는 구조. 시민의 자기검열과 국가처럼 바라보기.

• 지방의 내부식민지화, 자치와 자급능력의 상실. 지역적인 앎과 지식의 평가절하.

• 강력한 관료국가. 선출직 공무원과 선발되는 공무원간의 권력관계와 긴장, 갈등, 공생. 민주화에도 관료제의 능력과 구조는 큰 영향을 받지 않음. 외려 민주화를 거치며 독재자에게 바치던 복종이 독자적인 이해관계로 변화됨.

■ 정치권력과 재벌의 결탁관계 강화. 부동산 계급사회. 재벌들의 문어발식 확장, 하도급 관계의 일상화.

■ 법과 제도에 기반한 시민사회운동의 한계와 정치세력화에서 배제된 노동․농민의제. 전문가와 조직 중심의 시민사회운동문화. 생활의제나 민주적인 실천들이 주목받지 못하면서 시민사회의 토대가 취약해짐. ‘시민없는 시민운동’이라는 호명에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능동적인 시민문화가 형성되지 못함.



2. 정책의 공동생산 또는 거버넌스 구조는 존재하는가?


■ 관료주의 문화, 관존민비 의식의 잔존: 1960년대 이후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로 대규모 공공수요가 발생하자 관료들이 예산, 인력, 지침들을 일방적으로 확정함. 성장주의가 흑백논리와 비밀주의를 강화시킴. 여기에 전통적인 정실주의, 가족주의, 연고주의 등이 뒤섞임. 선출직 관료들이 통제하기 어려운 구조가 형성됨.

•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시절의 관료제 개혁시도는 실패를 불러옴. 관료들의 저항만이 아니라 개혁의 방향이 현실적인 조건을 무시했음(수평적인 의사결정구조로 인한 힘의 집중과 표준화된 평가시스템으로 인한 리더십의 감소).

• 관료들이 ‘공공성’을 내세워 사적인 이해관계를 추구할 뿐 아니라 ‘조직의 이해관계’를 놓고 경쟁을 벌임. 정책집행단계보다 정책입안단계에서 이런 경쟁이 치열함. 보통 이런 갈등은 권력을 더 많이 가진 부처에 유리한 쪽으로, 즉 예산이나 인력규모, 기관의 법적․공식적 권한, 대통령의 관심과 지지를 더 많이 받는 부처에게 유리한 쪽에 유리함. (재정경제부, 기획예산처, 검찰청, 중앙인사위원회, 행정자치부, 외교통상부, 교육인적자원부, 법무부 등)


■ 주어진 기회이니 활용해야 한다는 논리의 빈약함: 누가 그런 권리를 주나? 기회는 우리에게만 주어지나?

• 거버넌스가 논의되고 있긴 하지만 지금도 한국사회에서 중요한 정책결정은 권력자나 관료의 손에서 결정됨. 국방이나 외교와 같은 큰 사안만이 아니라 일상생활과 밀접한 문제까지도 언제나 국가권력이 그 방향을 결정하고 있음.

• 국가와 시민사회가 같이 협력해서 결정을 내리려면 그 사안과 관련된 정보가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함. 협력하려면 신뢰가 필요하고 신뢰하려면 서로 이해할 수 있도록 충분히 토론해야 하고, 그리고 충분한 토론이 가능하려면 토론할 수 있는 이야기꺼리가 많아야 함.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은 채, 혹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보만 제공한 채 같이 논의해서 결정하자는 건 거버넌스를 형식적인 틀로 만드는 주된 원인임. 또한 그런 정보를 검토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공간도 마련되어야 함. 민주적인 과정의 의미는 정보를 꼼꼼히 검토하고 충분히 토론할 시간과 공간이 보장될 때에만 거버넌스가 제 의미를 찾을 수 있음. 그러나 이런 실질적인 부분을 꼼꼼히 챙기는 사례는 한국에서 찾아보기 어려움.

• 민주화가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던 사람들에게만 권력을 줬을 뿐이어서 그들이 다시 기존의 정치세력처럼 기득권층과 야합하는 과정으로 변질되었다는 주장도 있음.

• 설령 국가가 권한을 나눈다 하더라도 그것이 시민사회의 참여와 협력의 강화로 곧바로 이어지지는 않음. 왜냐하면 사회는 국가와 시민사회라는 이중 구조가 아니라 국가, 시장, 시민사회라는 삼각 구조로 이루어지기 때문임. 그래서 국가의 분권이나 역할변화는 시민사회의 강화가 아니라 시장의 강화로 이어질 수 있음. 국가의 ‘탈규제’와 ‘민영화’, ‘위탁관리’만이 국가의 문제점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주장은 그런 시각을 잘 보여줌.

• 거버넌스는 사안을 계획하는 단계에서가 아니라 그 사안을 진행하는 단계에서 갈등해결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제안되었고, 그렇기에 갈등의 씨앗은 여전히 남아 있음. 정부는 거버넌스를 주장하면서도 일반 주민이나 평범한 시민들을 중요한 논의대상이나 파트너로 여기지 않고 일방적으로 정책을 계획하고 집행하고 있음.

•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한국의 국가는 특정 주민들만을, 소위 ‘지역토호’라 불리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삼아 왔음. 뉴라이트의 권력기반이 강한 이유도 그것임. 이제는 이런 세력들이 시민사회, 제3섹터라는 영역 속에 자연스럽게 포함되고 있음.



3. 운동조직인가 사업조직인가, 운동과 사업을 병행하는 조직인가?


■ 자활,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 나눔장터 등 사회적 경제의 영역은 계속 넓어지고 있고 관련단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수도 늘어나고 있지만 규모와 활동가의 수가 운동의 목적을 증명하지는 못함. 외려 규모와 수가 늘어날수록 단체 내부에서조차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자기 담당사업 외에는 관심이 없다는 자기반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옴. 외부로 알려진 만큼 내실이 없다는 비판, 사업담당자만 있지 활동가는 없다는 성찰도 있음. 눈에 띄는 사업에 단체들이 몰리고 때로는 단체들이 서로 경쟁하며 기본적인 정보조차 공유하지 않는다는 볼멘소리도 들림.

• 민관협력이나 거버넌스가 원래의 취지와 달리 ‘관주도’라는 비판이 계속 제기되고 있음. 민관협력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관이 기획하거나 공모하는 사업을 단체가 지원해서 진행하는 식이고, 대충 기획된 것을 제대로 집행하느라 너무 힘이 든다는 얘기도 나옴. 그런데도 이런 사업관행에 대한 전면적인 비판은 없고, 이런 식이라면 당장 사업을 때려치고 싶지만 우리가 아니면 안 될 사업이라 울며 겨자먹기로 한다는 식의 얘기만...

• 국가의 일을 대행하는 것이 사회적 경제 진영의 역할일까? 물론 주민들의 삶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사업들을 제대로 실행하는 건 중요한 일이지만 그런 사업들에 모두 ‘사회적 경제’라는 말을 붙일 수는 없음. 특히 사업에 대한 ‘평가의 권한’을 사회적 경제 진영이 가지고 있지 않고, 외려 관이 그런 평가의 권한을 가지고 사업에 개입함. 따라서 사업을 제대로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왜 이 사업을 하는 것인가’, ‘사업이 올바른 방향으로 진행되도록 다양한 사회적 관계망을 맺고 확장하며 사업에 개입하고 있나’라는 물음을 던지지 않는다면, 많은 사업들은 사회적 경제의 기반을 다지는 운동을 하지 않는 상황에 대한 핑계일 뿐임.

• 사회적 경제의 제도화와 사회적 경제의 공고화나 확산에 도움이 될 것인가? 단체들의 고유활동을 지원사업으로 기획하거나 그 단체의 설립목적과 큰 관련이 없어 보이는 사업을, 소위 ‘뜨는 사업’을 추진하는 것도 문제임. 우리가 사업만을 위한다면 자본주의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고, 보조금만을 목적으로 삼는다면 관료주의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음. 그런 의미에서 필요한 인적, 재정적 자원을 마련하는 과정이야말로 중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함. 하지만 어느 순간 사회적 경제를 지행한다는 단체들도 쉬운 길만을 선택하고 있는 것 같음. 갈수록 단체들의 사업이 비슷해지고 있고, 지역특성을 반영한 활동들, 아니 유기체처럼 변화하는 지역특성을 제대로 파악하고 반영하는 활동들은 사라지고 있음.

• 공무원들이 바보는 아니고 자원이 제한되고 부족한 시민사회의 상황을 알고 있기에 더욱더 거만하게 나옴. 때로는 일부러 단체들끼리 경쟁을 붙이고 자기 말을 잘 듣는 단체들을 밀어주기도 함. 그러는 과정에서 운동의 목적은 자꾸 사라지고 사업만 남게 됨. 더구나 행정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이 사회의 밑바닥을 다지고 관계를 확장시키는 사회적 목적보다 앞서 나가게 됨.


■ 사회적 경제의 지속가능성이라는 면에서 하게 되는 고민도 있음.

• 요즘은 어디에 가나 박원순 시장 얘기를 듣게 됨. 하지만 박원순 시장과 같은 사람이 앞으로 더 나올 수 있을까? 운동이 사람을 성장시키지 못한다면 좋은 활동가, 뛰어난 활동가도 더 이상 나오지 못할 것임. 과거에는 학생운동 출신들이 이런저런 시민사회운동의 활동가로 충원되었지만 경쟁적인 교육체계, 대학 중심, 학벌 중심의 교육체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이제 그런 충원구조는 사라졌음. 10년 뒤, 20년 뒤에는 누가 어떤 과정을 밟아 운동에 참여할까? 아이디어나 기획력이 뛰어나고 그나마 사회정의감을 가진 대학생들도 아마 단체가 아니라 행정조직을 택할 것임. 왜냐하면 그곳이 실행력과 자원을 가지고 있으니까.

• 활동의 문화도 많이 바뀌었음. 목적을 공유하더라도 문화를 공유하지 못하는 ‘세대단절’의 문제가 풀뿌리운동 내에서도 드러남. 이런 단절을 이어가려는 노력을 풀뿌리운동이 적극적으로 고민하고 있는지 모르겠음. 그런 고민을 했다손 치더라도 그 고민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과정을 거의 못 봤음. 10년 정도 더 지나면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다른 생활리듬과 가치관을 가진 이질적인 존재가 한 단체 안에서 (그것도 운이 좋아야) 불편한 동거를 하게 될 것임.

• 박원순 시장이 되고 난 뒤에 서울시가 달라졌다는 얘기가 많이 들림. 시장 한 사람 바뀌었을 뿐인데, 라는 말을 활동가들에게서도 듣게 됨.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 상황이야말로 운동의 위기상황임. 지역에서 몇 년 동안 빡세게 일할 필요가 뭐 있어, 시장 한 명, 구청장 한 명 바뀌면 이렇게 분위기가 확 바뀌는데, 라는 생각을 시민들이, 심지어 활동가들마저 하게 되었다는 것임. 이게 운동의 위기가 아니라면 무엇이 위기일까?

• 운동이 바꾸고자 한 건 시장이라는 직책이 아니라고 생각함. 운동은 시민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결정이 내려지는 ‘구조’를 바꾸려고 한 것임. 그렇다면 지금 서울시의 의사결정구조, 정책결정구조는 어떻게 바뀌고 있나? 몇몇 시민사회단체 인물이 행정체계나 위원회에 들어가는 건 이전 정부 때도 자주 있던 일이고 구조적인 변화가 아님. 그리고 시장이 현장을 돌아다니며 직접 목소리를 듣고 챙기는 것이 한편으론 좋아 보이지만, 달리 보면 지방자치의 근본정신을 거스르는 것이기도 함. 무슨 일이 생기면 시장님의 트위터에 글을 남겨라, 이건 구조적인 변화가 아님. 또한 시장의 변화가 일선 공무원들의 변화로 이어지고 있는지는 의문임. 그리고 공무원들이 생각하는 제3섹터, 주민단체의 범주가 풀뿌리단체로 이해되는지도 의문임. 기존의 관변단체에 대한 지원과 묵인이 바뀌고 있는지도 살펴야 하고, 제 3섹터를 양성한다는 목적 하에 허투루 사업이 진행되는 건 아닌지 꼼꼼하게 감시해야 함.



4. 사회성의 강화인가 지식인 네트워크의 강화인가?


■ 지식인의 자율성 자체가 정부나 자본의 영향을 받으며 흔들리고 있음. 한국연구재단을 비롯한 연구지원에 따라 연구방향이 주로 제도로만 맞춰지고 실질적인 삶이나 방향성과 관련된 부분들은 약화됨.

• 지방으로 내려가면 이런 문제점은 더욱더 심각해짐. 즉 지식인 사회가 사회에 긍정적인 대안을 제시하기는커녕 제도권력과 결탁하며 이익을 추구하기도 함(각종 연구용역들이 그런 거래의 매개가 됨).

• 거버넌스는 이해당사자들만이 아니라 전문가의 참여를 보장하는데,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전문가는 누구인가? 주민들은 지역에 관해 추상적이고 보편적 지식보다 구체적이고 경험적 지식을 소유하고 있음. 그리고 이런 지식은 적어도 지역의 문제를 풀어감에 있어 전문가의 전문적인 지식만큼 소중함.

• 이에 따라 전문가의 역할도 주민들을 지도하거나 계몽하는 게 아니라 주민의 욕구를 읽고 그것을 전문적인 계획으로 해석하는 것이어야 함. 그렇지 않을 경우 거버넌스는 민주적인 참여를 보장하기는커녕 기술관료와 전문가들이 결탁한 기술관료주의(technocracy)를 정당화하는 틀이 되기 쉬움.


■ 정부와 협상을 할 힘은 존재하는가?: 정부에 대한 협상력은 무엇일까? 우리의 입장을 관철시킬 힘은 무엇일까?

• 민주화 이후 시민운동이 내부의 의사소통구조를 민주화하고 정부와의 거리를 가깝게 하려는 노력만큼 시민과의 거리를 좁히려는 노력을 했다면 이런 상황은 오지 않았을 것임. 결국 명망가나 지식인 중심의 시민단체는 이슈파이팅 방식을 제도권 내에서 추진하는 형태를 취하게 되었고, 이는 시민운동의 운동성 상실을 가져옴.

• 그동안 한국의 시민운동이 시민참여를 확산시키는 기폭제 역할을 하고 참여를 가로막는 구조적인 장벽을 제거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음. 결국 이는 ‘대표되지 않은 참여자’(unrepresentative participators)로 비난받을 여지를 제공했음. 따라서 시민참여의 효율성은 시민참여의 민주성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음. 시민단체가 전문적 연구나 로비, 대중매체를 통한 메시지 전달 기능을 수행하고, 재단이나 기업, 정부에게 재정을 의존할 경우 회원들과 상호작용하며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운동성은 줄어들 수밖에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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