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다 결론을 못 냈다.

지금은 내라면 낼 수는 있는데...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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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활동가들은 대부분 여성이다. 왜 여성이 많을까? 내가 생물학적 남성이라서? 여자만큼 남자를 좋아하는 걸 보면 단지 그 때문은 아닌 듯하다. 그렇다면 여성활동가들의 활동방식에서 어떤 끌림을 느껴서? 솔직히 그런 끌림을 느낀다. 남성활동가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매력이 분명 있다. 그런데 그 매력이 단지 생물학적으로 여성이라는 점 때문에 생기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물론 타고난 무엇은 있는 듯하다. 학교를 관두고 아이를 돌보면서, 그리고 동네에서 주부들과 독서회나 공부모임을 꾸려오면서 든 생각은 생물학적으로 타고나는 면도 있고 사회적으로 강화되는 면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 아이를 보면 타고난 자질이 있는 것 같고, 내가 변하는 것을 보면 사회적으로 강화되는 면을 느낄 수 있다.

 

인간 모두가 고유하고 독특한 존재라는 건 인정해도 사람이 사회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는 없다. 분명한 건 나의 선호와 환경 때문에 나의 사유와 표현방식도 바뀌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런 가정이 가능하다. 내가 여성활동가들에게서 느끼는 끌림은 개인이 타고난 것일 수도 있고 사회 속에서 강화된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여성이라는 존재가 어떤 자질을 타고났다면, 어떤 공간이나 조직이 그 자질을 강화시킬 수도 약화시킬 수도 있다.

 

이 글의 가정은 여성적인 자질을 강화시킬 수 있는 조직이 협동조합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협동조합에는 여성활동가들이 많다. 협동조합운동의 기원을 보면 남성들이 대다수인데 어떤 점에서 협동조합이 여성에게 중요한 장이 될 수 있었을까? 협동조합운동이 중산층 여성들의 운동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일까? 알려진 만큼 실제로 여성들이 협동조합운동을 이끌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 이 글은 이런 물음을 던지고자 한다.



1. 협동조합은 중산층 여성들의 운동인가?


우리는 많은 편견 속에 살고, 공간과 시간, 관계망이 그런 편견을 없애기도 하고 강화시키기도 한다. 한국사회에는 힘을 가진 자들이 무수히 많은 편견들을 만들었지만 그 중 가장 심한 편견을 꼽으라면 남녀에 관한 편견이다. 세상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편견이 만들어지거나 작동하는 방식이 달라졌을 뿐 여성은 여전히 어떤 ‘규정’ 속에 갇혀 있다. 그 규정을 넘어서려고 하면 여전히 ‘쌈마이’나 ‘무서운 페미 언니’로 받아들여진다. ‘나는 내 생각의 주인인가?’라는 단순한(?) 물음을 던져보면 이런 규정이 타자를 배제할 뿐 아니라 결국 나 자신도 배제해서 모두를 불행하게 만든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감명을 받은 책들 중에 벨 훅스(bell hooks)의 『행복한 페미니즘』(백년글사랑, 2002년)이라는 책이 있다. 원제는 ‘페미니즘은 모두를 위한 것이다(Feminism is for everybody)’인데 여성만이 아니라 남성들에게도 페미니즘을 설명하는 책이다. 이 책을 쓴 훅스는 『나는 여자도 아닌가요: 흑인 여성과 페미니즘(Ain't I a Woman : Black Women and Feminism)』라는 책을 쓰기도 했는데 성차별과 인종차별을 겹치는 제목이 참 시사적이다.

 

그래서인지 훅스는 『행복한 페미니즘』에서 “억압자와 피억압자라는 간명한 범주에 집어넣음으로써 남성과 여성을 양극화하는 것은, 계급상승과 가부장제 권력의 공유를 추구하는 페미니스트 여성”이라고 규정한다. 여성의 불행한 가족사로 대통령 스토리를 만드는 한국이니만큼 말만 듣지 말고 누가 그 말을 하는지를 살펴야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사실 ‘모든 여성은 진보적’이라는 말은 ‘모든 노동계급은 혁명적’이라는 말처럼 공허하다. 진보와 혁명성은 타고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벨 훅스의 예리함은 성차별을 계급이나 인종에 대한 차별과 연계시킨다는 점이다. 같은 남성, 여성 내에도 차별선은 그어지고 그런 다양한 차원의 차별들이 삶을 위협한다. 그리고 그 차별선들은 같은 당사자들이 서로를 마주볼 수 없도록 만든다. 차별이 없음을 부정할 게 아니라 가부장제도는 모두에게 나쁜 것이기 때문에 남녀가 함께 물리쳐야 할 텐데 서로 마주보지 못하게 만든다. 왜? 남녀 중에도 힘을 가진 사람들이 있고 그들은 그런 차별선을 교묘히 이용하기 때문이다. 여성성의 힘은 그런 분할과 차별, 폭력을 없애고 상호성과 사랑, 상호자유를 강화시킨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페미니스트 정치학을 선택하는 것은 사랑하기를 선택하는 일”이라고 훅스는 강조한다.

 

협동조합 얘기를 시작하면서 벨 훅스의 얘기를 꺼낸 이유는 편견이 우리 속에도 자리를 잡고 있는 건 아닌지 묻기 위해서이다. 흔히 협동조합운동은 중산층 여성들의 활동무대라고 불린다. 한편으로 남성 중심의 시민사회운동이 그렇게 불렀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난한 남성과 여성들을 조직하는 시민사회운동이 그렇게 불렀다. 이 호칭에는 단순히 운동주체를 지칭하는 의미보다 ‘여유를 가진’ 주부들의 운동이라는 냉소적인 의미가 들어 있다. 심지어 협동조합운동 내에서조차도 조합원을 중산층 여성이라는 범주에 집어넣음으로써 조합원들의 다양한 삶과 욕구에 관심을 두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서로 다른 운동들의 갈등이나 대립을 나쁘다고 피하거나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그 대립이나 갈등의 지점이 제대로 잘 그려졌는지를 묻고 싶다.

 

일단 중산층이라는 개념 자체가 워낙 유동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개념이기도 하거니와 엄밀하게 따져보면 중산층 여성이란 누구인가? 자신이 중산층의 임금을 버는 여성, 아니면 중산층의 임금을 버는 남편을 둔 여성? 아마도 후자의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면 여성을 독립된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시각이 그 속에 깔려 있으니 호명 자체가 매우 차별적이다. 만일 그런게 아니라면 설령 남편이 중산층이라 해서 그 여성이 중산층 여성이라 낙인찍힐 이유는 무엇인가? 그런 낙인이 가능하려면 가계의 자산을 남녀가 공유하고 여성이 자신의 삶을 선택할 권한을 가져야 할 텐데, 실제로 그럴 가능성은 낮다.

 

더 근본적으로 보면 이런 정의는 ‘가족임금’이라는 가부장주의와 자본주의의 전제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가족임금제도가 여성들을 가사노동의 틀에 가두고 남성노동자들의 가부장성을 강화시키는 제도라는 점은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과거와 달리 내가 밖에서 돈을 버니 집안의 모든 일을 다하라는 가부장의 논리는 집안에서만 힘을 발휘하지 않는다. 사실상 가족임금은 노동시장에서 여성노동력에 대한 착취를 정당화시키거나 여성노동을 남성노동을 보완하는 예비노동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여성노동자들은 남성노동자들의 결정에 따라 쉽게 해고될 수밖에 없는 불안한 노동자가 되었다. 노동하는 여성들만이 아니라 가정주부도 외부의 힘에 깃댄 불안정한 삶을 살 수밖에 없고 남성의 경제력에 종속되어 자립하지 못한다.

 

반대로 가족임금은 가부장성을 유지하려면 기업의 가혹한 착취를 버텨고 생계부양자라는 짐을 혼자 져야 한다고  남성노동자를 세뇌시킨다. 그래서 남성들은 주말엔 할 일 없이 텔레비전과 휴식을 즐기고 주중에는 ‘노동기계’가 되는 삶을, 요즘에는 자기관리까지 강요당하는 삶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렇게 한편으로 강요당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즐기는 가부장성은 남성의 내면을 왜곡하고 획일화시키고, 생활능력을 감퇴시키고 감수성을 떨어뜨리며 점점 더 남성을 고립시킨다. 중산층이라고해서 남성이나 여성의 삶이 여유롭거나 대안사회에 열려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겉으로 우아하게 보이려 애쓰지만 속으로는 밑으로 떨어지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가장 여유 없는 계층이 중산층이다. 그러니 냉소할 이유가 없다.

 

주체의 면만이 아니라 조직의 면에서도 오해가 있다. 협동조합은 중산층의 결사체가 아니라 약자의 결사체이다. 협동조합의 기원 자체가 그러하다. 로버트 오웬(R. Owen)이 협동조합을 구상했던 이유는 가난한 노동자들의 삶을 개선시키기 위한 것이었고, 최초의 협동조합이라 불리는 로치데일 협동조합도 가난한 노동자들의 조직이었다. 한국에서도 협동조합운동은 가난한 농민과 노동자들의 삶을 뒷받침하는 디딤돌로 시작되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하나씩 따로 떨어져서 국가나 자본의 관리를 받지 않고 스스로 의식화되고 조직화되어 단결할 때 다른 가능성들이 하나씩 생겨난다. 다양한 협동조합들을 만들다보면 공동체가 강해지고 또 다른 협동의 가능성이 생길 수 있다.

 

협동조합은 홀로 살아갈 수 없는, 홀로 살아갈 필요가 없는 사람들의 조직이고 힘이었다. 어떤 의미에서건 조직이란 건 개인이 홀로 하지 못하는 힘을 발산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기득권층은 사람들이 모이는 걸 두려워하고 조직을 싫어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독점하고 관리해온 공조직 외에 또 다른 조직이 힘을 얻고 사람들의 신뢰를 받는 걸 두려워하기에 사람들의 인식에 개입한다(한때 NGO라는 말이 폭발적인 호응을 얻다 어느 순간 도덕성에 타격을 입고 사라지게 된 것이 대표적이고, 최근에는 협동조합의 해라며 흥분하는 모습에서도 그런 징후를 느끼게 된다). 그런 논리가 가부장적인 편견을 재생산하고 현실에서 자기 목소리를 온전히 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마주보며 손을 내밀 수 없게 만든다. 박노해의 ‘이불을 꿰매면서’라는 시에 나오듯 “거만하고 전제주의적인 기업주의 짓거리”를 비판하는 노동조합 활동가이지만 “아내를 착취하고 가정의 독재자”가 되는 모순이 생겼다. 비슷한 맥락에서 약자의 무기인 협동조합을 한가한 사람들이나 주부들의 계모임, 자원봉사활동, 때로는 일반기업 정도로 여기는 잘못된 인식이 사회에 뿌리를 내렸다.

 

그런데 이런 잘못된 인식의 원인을 기득권에게만 물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어떤 면에서 협동조합운동 스스로가 재생산한 인식이기 때문이다. 그동안의 협동조합운동은, 특히 소비자생활협동조합운동은 생활의 주체인 여성들을 중요한 주체로 삼았지만 가부장주의에서 해방시키려 하지 않았다. ‘밥상공동체’가 한 가정부터 우주를 포괄하는 이념이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그 이념은 ‘누가 그 밥상을 차릴 것인가’라는 물음에 답해주지 않는다. 그리고 함께 먹고 함께 즐기는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한국의 생협운동은 함께하는 과정에서 여성들의 인식과 지식을 적극적으로 부각시키지도 않았다(예를 들어, 일본 <가나가와 네토>처럼 여성을 ‘전일시민’, 남성을 ‘반일시민’이라 규정하려는 노력도 없었다).

 

2005년에 나온 『한살림운동과 조합원노동의 이해』라는 보고서를 보면, 생활협동조합운동이 주부를 주체로 삼은 이유는 “생명을 낳고 기르고 가르치고 보살피고 치유하며 죽음을 맞이하는 생활을 화폐로 평가하는 시장시스템, 평균화시키는 행정시스템에 위탁하는 것의 위험을 자각한 주부들이 먹을거리를 매개로 생활을 자치해 나간다는 운동전략”을 세웠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고립된 소비를 “사회적 힘으로 조직하는 ‘공동구입’”이 필요했고, 이런 과정에서 주부들이 “사적영역을 공공화시키는 사회적 의사소통 능력을 키우고 사회적 책임과 의무를 훈련”받기를 기대했다. 비슷하게 1989년 <함께가는 생활소비자협동조합>에서 시작된 <여성민우회 생협>은 ‘사회주부’, 즉 “바람직한 사회상의 실현을 추구하며 가정과 사회의 발전을 위해 이바지하는 기혼여성”을 운동의 주체로 삼았다. 사회주부는 “자신들의 가족 내 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문제를 인식함으로써 사적인 돌봄을 공적인 돌봄으로 확장시켜나가는 생활정치를 전개하는 과정을 통해 사회의 치유자로서의 어머니의 역할”을 자처했다. 문제는 그런 주체의 성장에 공동구입이라는 시스템이 매우 중요한데, 그런 시스템이 이미 무너졌다는 점이다. 반공급을 유지하는 몇몇 지역생협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소비자생협이 개인공급방식을 받아들였고 그러다보니 사회적인 힘을 조직하는 과정은 별도의 교육과정으로 대체되어야 했다. 교육은 생활 속에서 구체화되는데, 그 생활에 사회적 관계가 없다보니 교육은 형식화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앞의 한살림 보고서가 지적하듯 공급활동 외에 조합원활동이나 조합원노동을 통해 “한살림의 활동을 매개로 지역사회에서 자기실현의 관계망을 형성하는 과정”이 존재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협동조합운동은 가족임금제도를 비롯한 노동현장의 문제점을 자신과 연결된 문제로 인식하지 않았다. 삶터만이 아니라 일터도 바꿔야 삶터가 바뀌고 그 변화가 지속될 수 있을 텐데, 전체를 보는 시야는 부족했다. 소비자생협운동이 농민과 농업을 살리려는 노력에 힘을 쏟아온 점은 인정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한국사회가 근본적으로 변하기 어렵다. 급속한 도시화와 산업화는 한국사회의 풍경을 이미 바꿔놓았다. 더글러스 러미스가 『에콜로지와 평화의 교차점』(녹색평론사, 2010년)에서 말하듯, 근대사회에 대한 비판은 중요하지만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의 노고와 노력을 이해하고, 그 위엄을 인정하면서 논의할 수 있는 형태로 어떻게 비판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인식하고 “그 사람들의 생활과 노력 자체를 부정하는 태도”를 취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어떤 면에서는 우리에게 그렇지 못한 면이 많았다. 생산자와 소비자를, 생산과 소비를 순환의 관계로 파악하는 인식은 자본주의의 기둥을 무너뜨리는 인식인데, 그 혁명성은 어느 순간 사라졌고 그냥 직거래만 남았다. 그러면서 자본주의도 서서히 협동조합의 특성에 눈을 뜨고 그것을 길들이거나 활용하려는 전략을 펼쳐 왔다.

 

협동조합운동은 이에 일공동체나 워커즈 콜렉티브라는 대안을 내놓고 있지만 이것은 가족임금체계를 뛰어넘지 못했다(비슷하게 사회적기업의 여성고용 비중이 높지만 이 역시 임금이 낮고 불안정한 일자리들이고 가족임금을 해체하는 장치가 아니라 가족임금을 보완하는 장치이다). 이런 대안들은 원래 목표한 대로 자본주의 화폐경제를 대체하지 못하고 이를 보완하는 형태로 운영되었고, 조합원의 자발성이 강조되지만 조합원이 협동조합 내에서만 생활하는 게 아닌 이상 사회의 강요나 억압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진정 자율적인 선택이려면 그것을 가능케 할 조직적인 방법을 찾았어야 했는데, 그런 부분은 개인의 몫으로 남겨졌다. 따라서 가정을 넘어 사회로라는 구호는 여전히 유효하지만 가정과 사회를 분리시키는 벽은 더 높아졌고, 가족임금제도와 여성의 가정주부화라는 도식이 깨어지지 않는 이상 이 벽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대부분의 소비자생협운동은 지금도 ‘우리 아이, 우리 가족의 먹을거리’라는 틀을 여성들, 더 정확히는 주부들에게 선전하고 있다. 밥상에 담긴 그 많은 의미를 부정하고픈 생각은 없다. 다만 이 틀은 ‘우리 아이, 우리 가족’이 가진 문제점을, 가부장주의를 해체시키지 않고 강화시킨다. 그리고 한국사회에서 여성이 자녀교육의 책임자가 되고 이로 인해 자식의 교육과 삶에 지나치게 개입하는 문제를 낳는다.

 

그런 점에서 가부장주의를 남녀만이 아니라 어른과 아이 사이에서도 찾는 벨 훅스의 말에 귀를 기울여봄직 하다. “백인 우월주의적 자본주의 가부장제의 지배 문화 속에서 어린이들은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페미니즘 운동은 우리의 문화가 어린이를 사랑하지 않고 어린이를 어른이 자기 마음대로 취급할 수 있는 소유물로 여기는 문화라는 사실에 주목하도록 만든 이 나라 최초의 사회 정의 운동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여성주의는 “남녀를 막론하고 자기 아이에 대하여 가부장적으로 지배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가정을 어린이들이 안전하게 자랄 수 있고 자유롭게 자랄 수 있고 사랑을 배울 수 있는 장소로 만드는 유일한 방법”임을 인식한 운동이다.

 

협동조합이 누구의 운동인가라는 물음은 사실 중요한 질문이 아니다. 누구라도 협동조합을 통해 다른 삶을 꿈꿀 수 있다. 협동조합운동은 약자나 소수자들이 사회적 주체로 성장하고 자립할 수 있는 배경인데, 이런 역할은 아직 과제이다.



2. 협동조합 7원칙을 다시 생각한다


일본의 <그린코프연합>이 발족하며 선언한 내용은 약간 충격이었다. <모심과살림연구소>가 펴낸 『모심 侍』(2002년)에 실린 다케다 케지로의 「그린코프선언 외」에는 “①생협은 어머니들의 연합체이다, ②생협운동은 어머니 연합이 담당하는 여성 자립운동이다, ③그린코프는 자립한 어머니연합과 여성운동 간의 공통의 본질을 모색한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한다는 선언이 담겨 있다. <그린코프생협>은 ‘사업 근대화’를 내세우고 반 중심의 공동활동을 해체하며 생협노동을 임노동으로 규정했던 생협인데, 이 선언은 어머니와 여성자립을 강조하지 않는가. 더구나 이 선언은 임신과 출산을 할 수 있는 모든 사람, 어머니에 관한 생각에 찬성하는 남성까지 포함하는 “가능성으로서의 어머니”를 조합원으로 받아들이고 “존재로서의 어머니로부터, 의식하는 어머니로, 더 나아가 연대하는 어머니로 진화해 나간다는 생각”을 밝혔다. 경제가 생활을, 직장이 지역을 지배하는 시대에 맞서 인간의 자립, 어머니의 자립, 아이의 자립을 추구하고 “어디까지나 연대와 협동에 의한 자주적인 지역주민의 활동에 기초”한 지역활동을 하겠다는 구상은 나름 감동적이다. 하지만 이 선언과 협동조합의 구체적인 활동을 조화시킬 방법에 관한 의문은 계속 남는다.

 

이런 관심은 우리 사회에도 이미 존재했다. 2000년 7월 4일 민우회생협 조합원선언은 조화․협동․평등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환경, 여성, 지역사회 등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여성적 관점에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선언했다. 이 조합원선언은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남성과 여성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대안적 생활양식을 개발하고 실천”하며 “더불어 사는 삶의 방식을 지향하는 공동체 문화를 형성”하고 “지역사회가 조화롭고 정의롭고 평등한 생활의 장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을 다짐했다. 조합원선언은 여성들이 이끄는 ‘여성생협’을 목표로, 남녀를 비롯한 조합원들이 ‘여성적 관점’으로 대안적인 생활양식과 공동체문화를 만들어가는 것을 지향했다.

 

그리고 2012년 6월 20일 <살림의료생협>의 어라 사무국장은 「여성주의자가 만난 사회운동방법으로서의 ‘협동조합’」이라는 주제발표에서 협동조합만큼 여성주의와 잘 어울리는 조직이 없다고 말했다. 협동조합 7원칙이 여성주의와 얼마나 가까운지를, 왜 협동조합을 이해하는 과정이 여성주의를 이해하는 과정인지를 설명하는 발표를 들으며 협동조합원칙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협동조합에서 여성이 다수임에도 여성주의와 협동조합의 원칙을 같이 생각해 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살림의료생협>의 공간에 오면 자신의 정체성을 솔직히 드러낼 수 있어 지역의 숨겨진 여성주의자들이 드러나고 다른 정체성을 추구할 수 있다는 발표자의 말은 협동조합운동의 핵심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성별만이 아니라 계급, 인종, 이성애 중심의 차별에 저항하는 의료, 탈의료화를 추구한다는 목표가 궁극적으로 여성운동이라는 말도 가슴에 와 닿았다. 많은 조합원들이 모여서 같이 병원을 보러 다니고 병원에 들어올 기계를 선택한다는 말에서도 협동조합운동의 정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여성의 역량을, 생명의 살림살이를 강화시키는 조직으로서 협동조합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면 좋을까? 그리고 협동조합을 하기에 그리 좋지 않은 환경인 한국에서 협동조합 7원칙은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까? 앞에서 지적했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틀로서 협동조합 7원칙을 성찰해 보자.

 

협동조합 7원칙 중에서 제 1원칙이 ‘자발적이고 개방적인 조합원 제도’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얘기이다. 그 가장 중요한 원칙이 ‘누구나 가입하실 수 있습니다’라는 소극적인 의미로만 해석될 수는 없다. 이미 사회적인 차별이 폭넓게 존재하고 있기에 문턱이 있을 수밖에 없는 한국사회에서 ‘누구나’는 참으로 무력한 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조합원을 어떻게 ‘환대’할 것인가라는 물음을 던져야 한다.

 

그리고 현재의 사회구조를 고려할 때 기혼자나 전통가족만을 중심에 둘 수도 없다. 비혼자나 아이 없는 가족, 성소수자 가족도 협동조합에 다가설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하고, 약자들이 일하는 자활공동체나 사회적 기업들에도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 단순히 약자를 보호하고 지원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기 원칙이 실현될 수 있는 사회 환경을 만든다는 차원에서 이미 만들어진 협동조합이 적극성을 가져야 한다.

 

제 2원칙 ‘민주적 관리’나 제 3원칙 ‘조합원의 경제적 참여’도 기계적으로 해석되면 안 된다. 민주란 말 그대로 주인이라는 얘기이고 참여란 단지 통로를 열어주는 게 아니라 다양성이 드러나도록 판을 깔아주는 것이다. 협동조합은 사회적인 차별을 내부에서 바로잡고 그 정의를 사회화하는 결사체이다. 그러하기에 각 조합원들의 의견과 의지, 다양한 색깔이 드러날 수 있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관계망을 확대시켜야 한다. 이 과정을 조합이 아니라 조합원이 이끌어야 하기에 내부민주주의야말로 외부로의 확장을 위한 전제이다. 조합이 조합원 개인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 아니라 조합원들이 서로 관계를 맺고 잠재적인 조합원들을 조합으로 끌어들이려면 민주주의와 참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런데 한국사회에서는 민주와 참여가 너무 정형화되어 있다. 협동조합에서도 민주보다 관리에 방점이 찍히고 참여보다 경제에 강조점이 찍힌다. 단지 조합원의 수가 많다고 해서 조합의 민주적인 운영구조가 무력해지는 건 아니다. 그리고 사람의 수가 적다고해서 반드시 민주적인 의사결정이 이루어진다고 보기도 어렵다. 외려 ‘자신의 것’, ‘우리의 것’이라고 여기고 있고 필요하다면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쏟겠다고 여기는 조합원들이 많다면 지금 당장 참여하는 사람의 수가 적어도 민주주의는 실현되고 있다. 그리고 억압된 주체일수록 민주주의를 회피하거나 타인을 억압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그래서 나의 억압된 주체가 타자와 무관하지 않고 같은 지반위에 서 있음을 깨닫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런 이해는 남성적인 결정의 화법보다 상황을 충분히 알아듣게 설명하는 ‘수다’로 더 잘 이루어질 수 있다. 공식적인 대화보다 비공식 대화가 중요하다는 게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어야, 서로간의 공감이 생겨야 이해가 가능하다. 이해(理解)는 단순히 듣는 게 아니라 내용을 따지는 과정이고 입장(standing)이 아니라 그 밑(under-standing)을 보는 것이다.

 

그런데 가부장주의와 자본주의는 권력을 집중시키고 다양성을 배제하며 소통을 차단하려 든다. 가부장주의와 자본주의가 끊임없이 우리의 의식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서만 그 틀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제 4원칙 ‘자율과 독립의 원칙’과 제 5원칙 ‘교육, 훈련, 정보제공의 원칙’이 중요하다. 농협이나 신협의 사례에서 보이듯 국가가 협동조합을 관리하려 드는 사회, 재벌들이 공장과 사무실을 군대로 만들고 골목상권을 위협하는 사회에서 협동조합은 자신의 생존과 조합원들의 변화를 도모하기 힘들다.

 

아울러 자발성, 평등, 참여와 같은 협동조합의 가치들도 계속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국가나 시장과 관계를 끊을 수는 없다. 자율적이라는 것은 단순히 국가나 시장과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점을 뜻하지 않는다. 현실과 분리된 공동체를 꾸리고 자기들끼리만 잘 살려는 게 아니라면 외부와의 접촉은 필수적이다. 그런 점에서 자율성은 나를 지킬 힘이, 국가나 시장과 약속을 맺을 힘이 내게 있음을 뜻한다. 이 힘을 찾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기성찰’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주체적인 시민으로 성장하고 임금노동이나 화폐경제에 종속된 노동에서 벗어날 수 있는 디딤돌로 협동조합이 자리를 잡아야 한다. 그리고 조합원들의 생활이나 노동을 대체할 수 있는 다양한 협동조합들이 새로이 만들어지도록 지원해야 한다.

 

그런 힘을 기르기 위해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다. 협동조합의 사업을 확장시킬 수 있는 힘은 조합의 물류나 시스템이 아니라 조합원들이다(자본주의 사회에서 협동조합의 물류나 시스템이 이익을 좇는 자본주의 시스템을 따라잡기는 어렵다). 생산과 소비를 하나의 순환체계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조합원이 늘어날수록 협동조합운동의 힘도 강해질 수 있다. 따라서 즐기는 것만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어야 하고, 조합원이 뭔가를 새로 시작하고자 할 때 조합이 든든한 뒷심이 되어야 한다.

 

조합원들에게 필요한 교육은 단지 식생활교육이나 교양교육만이 아니라 세계를 바라고 해석할 수 있는 눈이다. 앞서 말했듯이 일터와 삶터의 변화를 스스로 해석하고 이를 통합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조합원, 그들이 협동조합운동의 희망이다. 그런 조합원을 많이 기르고 그들이 서로 협동하고 연대할 틀을 제공하는 것이 협동조합의 과제이다.

 

마지막으로 6원칙 ‘협동조합간의 연대’나 7원칙 ‘지역사회에의 기여’는 협동조합의 그런 시야를 뜻한다. 적대적인 경쟁, 인수합병(M&A)이 원칙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한경쟁과 복불복을 강요하는 한국사회에서 협동의 원칙은 다른 세상을 뜻한다. 그리고 그런 세상을 실제로 만들어가려면 몇몇 조합이 아니라 전체의 힘이 모여야 하고 ‘공생(共生)’과 ‘공생(公生)’이 필요하다. 협동조합간의 공생(共生)은 서로간의 경쟁을 막거나 최소한 적대적인 경쟁을 최소화시키는 창구이고 사회적 시장을 만들 가능성을 뜻한다. 이런 시장이 형성되면 협동조합은 다양한 영역에서 자신의 가치를 실험할 수 있다.

 

그리고 협동조합과 지역사회의 공생(公生)은 협동과 지역사회가 분리될 수 없다는 인식을 뜻한다. 강력한 중앙집권형 국가가 만들어진 한국사회에서 지역사회의 의미는 단순히 작은 규모의 공동체를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지역 자체가 가진 동력에 주목한다는 의미이며, 그 힘과 기술, 전통에 기반해서 사업이 진행된다는 것이다. 이런 관계를 강화시키지 않고서 세계화의 시대에 협동조합이 생존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런데 이런 공생의 관계를 인식하려면 전일(全一)적인 시각이 필요하다. 나와 타자의 관계, 나와 세상의 관계를 통합적으로 바라보는 시각 없이 공생과 공생이 강화되지는 못한다. 내 살을 베어 타인을 먹이려는 자세가 있어야 이런 공생이 강화될 수 있다. 이런 관점은 기존의 강화된 남성성으로는 길러질 수 없고 여성적인 자급 관점이 필요하다.

 

마리아 미즈(M. Mies)와 베로니카 벤홀트 톰젠이 쓴 『자급관점(Subsistence Perspective)』(곧 한글번역판이 출판될 예정이다)의 서문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지금 미국의 국무장관인 힐러리 클린턴(당시에는 대통령의 부인)이 방글라데시의 작은 마을을 방문했던 이야기이다. 힐러리는 그라민 은행의 소액대출을 받아 자립을 시작한 마을 여성들과 대화를 나누는데, 마을 여성들이 이렇게 묻는다.

 

“아파(자매님), 당신은 암소가 있나요?”

“아뇨, 나는 암소가 없어요.”

“아파, 당신은 소득이 있나요?”

“네, 전에는 내 소득이 있었지요. 하지만 남편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백악관으로 온 뒤에는 일을 관뒀어요.”

“아이는 몇인가요?”

“딸 한 명요.”

“아이를 더 갖고 싶은가요?”

“네, 한두 명 정도 더 갖고 싶지만, 지금의 딸 첼시와도 충분히 행복하답니다.”

이 짧은 대화를 나눈 뒤 방글라데시의 여성들은 이렇게 입을 모았다고 한다. “불쌍한 힐러리! 그녀는 소도 없고 소득도 없고 딸도 하나밖에 없다네.”

 

미즈와 톰젠은 이 이야기에서 다섯 가지의 교훈을 얻었다고 한다.

 

첫째는 우리가 현실을 보는 관점에 대한 반성이다. 보통 우리는 서유럽이나 미대륙을 보며 삶을 생각하지만 이 이야기는 남반구의 찢어지게 가난한 여성농민과 도시여성의 일상생활에서 삶을 구상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허나 좋은 삶이 자연과 타자, 여성, 아이들을 희생시키고서야 가능하다면 그것이 어찌 좋은 삶일 수 있겠는가? 우리의 삶이 전쟁 속에 사는 타자들의 삶을 딛고 평화를 누린다면 그것이 어찌 평화일 수 있겠는가? 그래서 미즈와 톰젠은 가장 낮은 곳, 밑바닥의 관점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둘째, 외부의 힘이나 지원이 아니라 스스로 자급해서 살아가는 공동체의 역량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점이다. 엄청난 자원이 아니라 암소 한 마리와 닭 몇 마리, 아이들, 약간의 땅 만으로도 자립은 가능하고 그것이야말로 좋은 삶을 지탱하는 힘이다.

 

셋째, 가난한 여성이 미국의 영부인을 대하는 그 자세이다. 권력자를 ‘자매’라고 부를 수 있는 자신감과 위엄, 존엄함, 이들은 더 이상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이 아니라 스스로 설 수 있는 사람들이다.

 

넷째, 마을 여성에게 좋은 것이 전체 사회에도 좋은 것이고, 유토피아는 모든 사람이 자립적인 삶을 누리고 유지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이다. 미즈와 톰젠은 이를 “사회주의적이고 성차별적이지 않고 비식민주의적이고 생태적인 유토피아”라고 부른다.

 

다섯째, 세계를 ‘제1세계’와 ‘제3세계’로 나누는 정신분열증을 버려야 한다는 점이다. 방글라데시 여성들은 힐러리를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그런 차별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과 같은 여성으로 위치짓고 있다. 자신들의 삶의 지향이 힐러리에게도 좋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들의 물음은 근본적으로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다. 미즈와 톰젠의 논의는 가사노동과 비정규직노동이 같은 지반 위에 서 있음을 드러낸다. 비정규직 노동을 없애고 변화를 꾀하는 건 여성의 가정주부화를 빼놓고 진행될 수 없고, 노동의 성격 자체를 바꾸지 않고서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설 수 없다. 따라서 명목적인 7원칙이 아니라 현실의 변화를 이끌 수 있는 7원칙으로 원칙을 재해석해야 한다.



3. 여성이 협동조합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나?


이탈리아의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A. Gramsci)는 헤게모니(hegemony)라는 개념으로 사회를 설명했다. 지적, 도덕적, 정치적 동의를 뜻하는 헤게모니는 지배계급의 지배가 억압이라는 수단만이 아니라 동의라는 기제를 통해서도 행사된다는 점을 설명했다. 가부장제 역시 헤게모니를 통해 작동한다. 그것이 일정한 동의체계를 갖추고 있고 때로는 헤게모니의 유지를 위해 스스로를 변화시킬 줄도 안다는 얘기이다. 이를 적용하면 여성들이 많이 일하는 것만으로는 협동조합의 헤게모니를 설명할 수 없다.

 

협동조합운동의 실제 현실은 어떨까? 2004년 이화여대 여성학과에서 나온 「여성주의 정치학으로서 생협운동의 가능성에 관한 연구: 한살림과 민우회 생협의 활동여성들을 중심으로」는 그런 가능성을 타진한다. 이 논문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한편에서는 생협운동의 의미에 치중해 여성들의 활동상의 어려움 및 갈등부분에 대해 민감하지 못한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여성의 생협활동을 성역할 강화라고만 간주하여, 제대로 평가하지 않거나 아예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하려는 경향”을 모두 문제삼고 있기 때문이다. 한살림과 민우회생협 활동가와 실무자 등을 인터뷰해서 작성된 이 논문에 따르면, 협동조합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일상은 부주일(집안일)의 연장선상에 있다. “남편은 생계책임자이고 여성은 집안살림을 맡는 성별 구도 하에서 남편의 눈에 아내의 생협활동은 주부가 여가활동으로 선택한 하나의 자원활동 쯤으로 비춰지고, 결국 남편과의 가사분담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제가 좋아서 하는 일’로 치부된다.” 그리고 조직 내에서도 여성의 활동이 본부와 지부, 사업과 운동의 관계에서 보조적인 역할을 맡거나 의사결정이나 의견수렴과정에서 드러나는 위계성 등도 지적한다. 그리고 민우회생협의 활동은 여성운동과 생협운동을 조화시키지 못함으로써 생협운동이 여성들의 대중적인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한 도구로 머무르는 한계를 보였다.

 

실제로 지금 현재를 봐도 단위생협의 이사장과 이사들이 대부분 여성이지만 생협운동을 대표하거나 정책이나 비전을 짜거나 생협운동에 관해 얘기하는 사람들 중에는 남성들이 많다. 협동조합과 그것의 지향을 논의하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남성이다. 생산자나 공급업체로 가도 비슷한 상황이다. 가장 잘 알고 오래된 사람들이 맡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그걸 인정하면 그 구조가 지속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직위가 남성들 중심으로 대물림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여성만이 아니라 남성들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면 이 논문은 어떤 가능성에 주목할까? “생협운동이 단지 가사량을 늘리고 참여 여성들이 가사활동에 충실하려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생협운동을 통해 자신의 삶을 다시 인식하고 대안사회를 구상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고 또 사회적 활동에 참여하는 과정을 통해 여성의 임파워먼트를 얻게 되는 등 여성과 생협운동 간의 다양한 측면들을 주시함으로써 여성운동으로서 커나갈 수 있는 가능성”에 주목한다. 그리고 생협활동이 “가정 내 성별분업을 해체시키고 대안적 지역문화를 생성할 뿐 아니라, 소비와 파괴의 악순환을 매개하는 생산영역에도 변화”를 준다면 살림의 가치를 중심으로 한 대안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다. 그리고 생협활동을 통해 주부들이 자아를 발견하고 자기 정체성을 구성하며 역량을 강화시키는 과정도 매우 중요하다고 평가한다.

 

여성들이 협동조합운동의 헤게모니를 쥔다는 것은 운동의 정체성과 방향이 여성성에 뿌리를 내린다 의미이다. 훅스의 입을 빌려 얘기하자면 운동이 상호성과 사랑, 상호자유를 지향한다는 것이고, 여성이 협동조합을 통해 자립하고 생산과 재생산 영역 모두를 바꾸는 것이다. 협동조합이 여성활동가의 삶을 바꿨지만 여성활동가가 협동조합을 바꾸지 못했다는 건 현재까지의 모습이고, 앞으로의 변화는 과제로 남아 있다. 그리고 이 과제를 풀어가는 과정에는 여성과 남성의 공동노력이 필요하다. 그것이 모두에게 좋은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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