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일보에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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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냐’라는 냉소적인 말이 유행했다. 뼈 빠지게 일해 모은 재산을 한순간에 날려버린 사람들은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다른 무엇을 바쳐도 좋다고 믿었다. 경제만 살아난다면 독재자가 출현하건, 생태계가 파괴되건, 기본적인 노동권이 무시되건 상관없다고 믿었다. 그러면서 정작 우리는 경제를 살려야 하는 이유에 대해 묻지 않게 되었다. 왜 경제를 살려야 할까? 정말 경제만 살아난다면 정말 우리는 행복하고 좋은 삶을 살 수 있을까?

어쨌거나 그렇게 모든 걸 바쳤건만 전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는 경제 살리기에 대한 믿음을 산산조각내고 있다. 그런 실패는 특정한 정책의 실패나 외부환경의 변화만이 아니라 경제를 잘못 이해한 것에서도 비롯되었다. 원래 경제란 말은 오이코스(oikos), 즉 가계(家計)라는 말에서 나왔다. 쉽게 얘기해 경제는 집안 살림을 꾸려나가는 ‘살림살이’를 뜻했다. 가족들이 다른 일을 하는데 지나치거나 궁핍하지 않도록 적절한 규모를 유지하는 것이 가정살림의 지혜이듯, 공동체의 경제는 적절한 규모를 지키며 시민들이 정치나 문화에 관심을 쏟게 하는 지혜를 갖춰야 했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의 경제 살리기는 살림의 규모를 키우는 것에만 관심을 쏟았다. 살림살이가 나아지려면 삶이 튼튼하게 세계에 뿌리를 내려야 하는데 그동안 우리 삶은 주가와 부동산 거품에 실려 둥둥 떠다녔다. 살림살이는 내실을 다지는 것을 포기하고 거대한 권력이나 자본에 살림을 팔거나 맡기는 식으로 흘러갔다. 그러다보니 우리 삶은 외부환경의 변화에 휘둘리는 근본적인 위기를 벗어날 수 없다.

사실 삶이 세계에 뿌리를 내리게 하는 좋은 방법은 바로 정치이다. 어느 정도의 규모가 적절한 살림인지, 특히 가족이 아니라 공동체의 살림살이를 결정하는 건 경제가 아니라 정치의 몫이고 민주주의의 몫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힘과 부, 기질이나 문화가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하나의 공동체 내에서 어울려 살기 위해 필요한 합의요, 공동체를 튼튼하게 하는 기본조건이다.

우리의 경제 살리기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건 그런 기본조건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경제 살리기가 공동체를 튼튼하게 만들기는커녕 빈부의 격차를 더욱 늘리고 있고 서로간의 합의를 무시하게 만들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타인의 위기가 나의 기회라고 믿는 잘못된 경제적 계산이 함께 하는 정치적 자유를 대체했다. 윤리와 합의를 지키는 것이 어리석은 짓으로 여겨지는 세상, 이런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들의 삶이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제 아무리 혼자 많은 부를 챙기더라도 이런 세상에서는 온전히 삶을 유지하기 어렵다.

따라서 경제를 살리는 과정은 정치나 민주주의와 분리될 수 없다. 시민이 굶주림에 시달리며 삶을 마음껏 누릴 수 없을 때 그 공동체는 온전할 수 없기 때문에 민주주의는 공동체 차원에서 그런 어려움을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민주주의는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들과 동등하게 살아가며 밥을 먹을 수 있는 공동체의 수단이다. 민주주의는 시민이 똑같이 교육을 받고 건강한 몸과 마음을 유지하며 경쟁할 수 있는 기본 바탕을 만든다. 그러니 삶이 위기에 처할수록 정치에 무관심할 게 아니라 오히려 정치에 더욱더 관심을 쏟아야 자신의 삶을 지킬 수 있다.

그동안 우리는 스스로 밥숟갈을 놓으며 끼니를 걱정해 왔던 셈이다. 정치는 정치인에게, 경제는 기업가에게 맡겨두고 자기 앞가림이나 잘하자는 잘못된 생각을 해왔기 때문에 우리 삶이 지금 이 모양이다. 그러니 아직도 청와대 비서관이 성매매를 하다 잡혔는데 경찰청장이 이를 두둔하고, 부패청산을 내세웠던 정부가 뒷구녕으로 구린 돈을 받는다. 에이, 더러운 잡놈들 하며 정치를 더욱더 멀리 할수록 세상은 더욱더 나빠질 수밖에 없다.

지난 경기도 교육감 선거는 12.3%의 투표율을 기록했다. 투표율의 하락이 곧 민주주의의 위기는 아니지만 그런 무관심은 치명적이다. 공적인 것에 대한 관심만이 우리 삶을 온전히 지킬 수 있게 한다. 당장 지금부터 관심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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