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을 뒤적이기가 무서울 정도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서 점점 배제되어 버려지고 있고, 그 속도마저 계속 빨라지고 있다. 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철거민들은 자신들이 살아온 동네에서 버려지고 있고, 구조조정이라는 이름 아래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일해 온 공장에서 버려지고 있다. 농업선진화라는 이름 아래 농민들은 평생 일궈온 땅에서 내몰리고 있고, 가난한 사람들은 그동안 쥐꼬리만큼 받아오던 복지혜택에서조차 내몰리고 있다. 한국사회의 필요라는 이름 아래 이주노동자나 결혼이주여성들은 인간이 아니라 도구처럼 쓰였다 버려지고 있다. 학력 신장이라는 이름 아래 학생들은 무한경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고, 얼마 전 신문기사에 따르면 생활비 마련을 위해 청소년들이 성매매에 내몰리고 있다.

사진: 뷰앤뉴스

그런데도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은 이런 사람들에게 ‘테러리스트’, ‘불법 점거’, ‘폭력시위단체’, ‘떼잡이들’, ‘무능한 인간’, ‘좌익’, ‘패륜’, ‘매국노’같은 딱지를 붙이며 그런 버림을 정당화하고 있다. 심지어 21세기에 ‘빨갱이’나 ‘간첩’이라는 말마저도 다시 등장하고 있다. 기득권층과 그들을 보호하는 공권력은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거나 그 기준에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모두 이 사회 밖으로 거칠게 내몰고 있다(경찰청은 철거민들을 테러리스트로 보고 대응하는 훈련을 하는가 하면,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용산참사가 공권력 발동을 주저하게 만들어 한탄스럽다며 쌍용차 평택공장에 즉각 공권력을 투입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단지 버려지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서 더욱더 두려운 건 아니다. 두려운 건 이런 배제가 중단되지 않고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과 이를 바꿀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희망이 있다면 버티며 미래를 준비해 보겠지만, 희망조차 꿈꿀 수 없다면 미래는 불가능하다. 앞으로의 일이 이미 결정된 세계에서는 더 이상 희망(希望)이나 미래(未來)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 상황에서는 우리가 지향해야 할 희망의 목표나 기준을 도무지 찾아볼 수 없다.

그런 목표나 기준을 찾을 수 없는 이유는 한국사회에서 정치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의 시야가 정치를 청와대나 국회, 몇몇 정당들, 몇몇 시민사회운동단체들로 제한되어 정치의 부정적인 면밖에 볼 수 없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정치의 긍정적인 면을 보고자 시야를 아래로 낮춰 풀뿌리나 지역공동체 차원의 긍정적인 정치를 보려 하면 그런 점은 한국 사회 전체의 대안이 될 수 없다는 비판을 듣기 십상이다. 무능하고 부패한 국가 차원의 정치나 제한된 대안이라 여기는 지역 차원의 정치 모두에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정치의식은 갈증을 호소하며 무작정 사막을 헤매고 있다. 하지만 방향을 알려주는 좌표가 없기에 헤맨다고 한들 오아시스를 찾을 가능성은 낮고 까마귀의 먹잇감이 되기 쉽다.

그래서 새로운 좌표를 알려줄 새로운 정치전략이 필요하다. 하지만 새로운 프레임은 무조건 새로운 말을 끌어다 쓴다고 갖출 수 있는 게 아니다. 보수정치가 생활밀착형 정치라는 표현을 쓴다고 해서 새로운 프레임을 갖추는 게 아니다. 생태나 평화, 자치같은 말을 정당의 구호로 끌어들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마치 한국 검찰이 ‘공안’이라는 말 대신 ‘민생’이라는 말을 써서 ‘공안정국’, ‘공안부’ 등의 이미지를 바꾸려 해도 그 속성을 바꿀 수 없는 점과 같다. 프레임은 단어가 아니라 관점을 가리킨다. 보는 방법에 따라 세상이 달리 보이듯이 새로운 관점을 갖춰야 새로운 정치를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새로운 관점은 새로운 상황, 즉 버려지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현실에 주목해야 한다. 과거 기득권층의 정치전략이 ‘한 가족’, ‘하나의 공동체’라는 말을 쓰며 사람들을 한데 뭉치려 했다면, 이제 그들은 사람들을 배제하고 내버리고 있다. 철거민이 테러리스트로 불리는 순간, 노동조합이 폭력시위단체로 불리는 순간 그들과는 어떠한 타협이나 협상도 불가능할 뿐 아니라 이들은 다시 공동체로 들어올 수도 없다.

따라서 새로운 정치전략은 ‘버림받음’이라는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관점을 갖춰야 한다. 새로운 관점이라 해서 인터넷과 같은 과학기술에만 의존하거나 과거의 모든 것을 낡은 것으로 몰아붙일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시선이다. 내가 익숙한 높이와 방향에서, 그리고 내가 속한 정파(이념이 아니다!)의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그 다양한 소리를 들을 수 있다(그렇지 않으면 자기 귀에 익숙한 단어만을 조합해 풀뿌리 민중의 소리를 들었다고 착각하게 된다). 익숙한 오해와 착각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백날 소통을 떠들어 봐도 자신의 오만함과 확신만 더할 뿐이다.

그렇게 다양한 목소리를 더욱더 많이 듣기 위해 아래로 내려가고, 정치의 구조 자체를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오는 방식으로 바꿔나갈 때 그 관점은 새로운 이념으로 구성될 수 있다. 어려운 말이나 새로운 말을 쓰며 폼 잡을 게 아니라 낡은 언어라도 그것의 진정성을 보여줄 때 우리는 민중의 가슴과 소통할 수 있다. 민중‘을 위해서’가 아니라 민중‘과 함께’ 민주주의를 실현할 방법을 차근차근 준비하지 않는다면 무너질 사랑탑만 쌓는 격이다.

그리고 그 관점과 이념은 기존과는 다른 정치전략을 가져야 현실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 시국선언이나 대변형 운동은 기본적으로 기득권층이 사회적 포섭전략을 쓸 때에나 힘을 가질 수 있다. 사람들을 버리려 하는 지금의 기득권층은 그런 소리를 들을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 기자회견을 열고 보도자료를 뿌려도 방송이나 신문에서 보도하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게 그들의 생각이다. 사람들이 모일 수 없도록 광장만 잘 틀어막고 있으면 된다는 게 그들의 상식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단결투쟁’, ‘결사항전’같은 구호도 잘 먹히지 않는다. 그 투쟁의 치열함이나 처절함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버려지는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버둥거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두가 언제 버려질지 모르는 사회에서 버려지는 사람들의 단결은 그 뒤에 버려지게 될 사람들의 연대가 아니라 그들의 외면이나 냉소를 낳기 쉽기 때문이다.

현실의 다양한 이해관계 속에서 사람들이 하나의 방향으로만 움직일 것이라 기대하는 건 큰 착각이다. 관계가 우리의 희망이기는 하지만 그 희망은 그 관계망이 어느 정도 다져진 뒤에야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그리고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시대에는 서로의 관계가 반드시 좋은 쪽으로만 드러날 수 있다고 미리 예측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새로운 정치전략은 버려지는 사람들이 스스로 삶을 모색할 수 있는 터전을 찾을 수 있도록 지원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 터전이 국가인가, 지역인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이 우리를 언제쯤 버릴까 가슴 졸이며 그 날을 기다리지 말고 우리가 과감히 그들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모색할 양산박을 하나씩 만들어야 희망과 미래를 꿈꿀 수 있다. 그래서 무한경쟁에서 밀려났기에 버려져야 할 무능한 존재라는 딱지를 스스로 떼어내고 자신을 중요한 정치주체라 여기도록 만들 과정을 만들어 줄, 디딤돌을 놓아 줄 정치전략이 필요하다. 그렇게 되면 또 다시 민중은 아우성을 치며 자리를 털고 일어설 것이다.



신동엽 시인은 노래했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漢拏)에서 백두(白頭)까지/ 향그러운 흙 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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