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주씨의 [행동하는 양심]을 읽다 문득 든 생각이다.


브라질 열대우림에서 천연고무를 채취하는 세링게이루들은 열대우림을 파괴하는 지주와 기업가들에 맞서 싸우고 있다. 그 운동을 이끌다 암살범의 총탄에 목숨을 잃은 치코 멘데스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역대 정부들은 아크리 주에 값싼 땅이 넘쳐난다고 말했을 뿐, 그 땅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은 빠뜨렸습니다. 여러 시도를 해봤지만 숲은 계속해서 사라져갔고, 우리는 매일 땅을 잃어갔습니다. 그래서 투쟁에 나서게 된 것입니다. 늘 비난받으며 선동가라는 딱지나 붙여지는 게 우리가 원했던 것이겠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투쟁은 권리를 지키고자 했던 우리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길이었고, 생존 자체였습니다.”

그곳이나 이곳이나, 그때나 지금이나 실제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권리를 잃고 사막처럼 생명이 말라버린 땅으로 내몰리고 있다. 이미 사람들과 생명이 살고 있는 땅이 공터로 불리고, 사람들의 보금자리가 재개발 대상지로 불린다. 

이렇게 내몰리다 자기 땅과 보금자리를 지키려 입을 열고 주먹을 불끈 쥔 사람들은 그곳이나 이곳이나, 그 때나 지금이나 비난받고 선동가, 빨갱이, 떼잡이라 욕을 먹고 테러리스트라 불리며 버림받는다. 살기 위해 부딪치는 사람들이 법치주의라는 그물에 갇혀 메마른 땅으로 끌려간다.

푸근한 인상을 가진 우리 이웃들이, 이웃집 사람들이 하루하루 어딘가로 사라진다. 나는 결코 사라지지 않으리라 자신할 수 있을까?

세링게이루들의 힘든 싸움에서 또 하나 발견한 점. 세링게이루들은 경제적 자립을 위해 천연고무를 스스로 팔고 수익금을 공동체를 위해 사용하기 위해 협동조합을 세웠다. 치코 멘데스는 암살될 때까지 샤푸리 농업노동조합의 의장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그곳이나 이곳이나, 그때나 지금이나 대안은 이미 분명하지 않을까? 왜 그들은 치코 멘데스를 암살해야 했을까? 무엇이 무서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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