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서 풀뿌리민주주의grassroots democracy에 관한 관심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풀뿌리 보수주의라는 말이 나오고 있지만, 실감없이 겉도는 민주주의를 내실 있게 만들려면 삶의 현장에 민주주의를 뿌리내릴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상식적으로 말하면 민주주의의 원리는 ‘민중의,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정치’다. 그런데 현대의 대의 민주주의는 민중이 권력의 주체임을 자각하고 자처하는 ‘민중의 정치’라는 의미를 제거하고, ‘민중에 의한 정치’를 선거로 제한했으며, ‘민중을 위한 정치’를 민중을 대상화하는 정치적 수사로 만들었다. 특히 한국처럼 매우 중앙 집중화된 대의 민주주의에서 정치는 권력과 화폐, 언론을 소유한 기득권층이 선거를 통해 권력을 정당화하고 민중의 이름을 팔아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으로 변질됐다. 기득권층에 맞서 민주 정부를 수립하려는 열망은 있었지만, 그 열정이 정작 자신이 일하고 생활하는 지역사회의 변화로 이어지지 않아 민주주의는 겉도는 말이 돼버렸다. 풀뿌리민주주의에 관한 관심의 증대는 이른바 민주주의의 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이제 민주주의는 다시금 자신의 본래 의미인 ‘민중성’을 확보하고 실현할 것을 요구받고 있고, 풀뿌리민주주의는 이런 요구에 보내는 시대적인 응답이라 얘기할 수 있다. 풀뿌리민주주의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만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민주화’를 요구한다.


그리고 민주주의의 주체에 관련해서 보면 풀뿌리민주주의는 ‘시민없는 시민운동’의 한계를 지적하며 시민들을 삶의 주체로 세우려는 이론이다. 과거의 사회운동이 ‘민주 대 반민주’나 ‘국가 대 시민사회’, ‘합리성 대 비합리성’이라는 대립 축을 중심으로 전개됐다면, 이제는 사회의 변화에 발맞춰 새로운 내용과 형식을 갖춰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시민운동 단체들이 양적인 면에서 성장을 거듭하지만, 여기에 발맞춰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증가하거나 시민사회의 구조가 내부적으로 탄탄해지는 모습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한국의 시민사회가 내부 구조 면에서 아주 취약하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되고, 시민운동 단체들의 내부 의사 결정 과정이나 의사소통 구조가 비민주적이라는 지적도 계속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시민사회가 성장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그리고 단순히 제도나 정책을 바꾸는 게 아니라 시민 주체를 부각하고 성장하게 하는 ‘과정’으로 풀뿌리민주주의는 주목받고 있다.


또한 수도권 집중도가 매우 심각한 한국의 현실을 고려할 때, 풀뿌리민주주의에 관한 관심은 지역과 지방을 향한 관심이기도 하다. 수도권 문제는 단지 인구 집중의 문제가 아니라 지역 간 불균등 발전과 지역 격차를 가져온 구조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내부 식민지’라는 개념이 주장될 정도로 한국의 상황은 심각하다. 식민지 시대에 만들어진 강력한 중앙집권형 국가 체계는 거의 변화 없이 지금까지 유지돼왔다. 해방 이후 실시된 지방자치 제도가 박정희 정부 때 중단된 뒤 1991년에 부활하기는 했지만 중앙이 기획하고 지방/지역이 실행하는 구조는 지금도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풀뿌리민주주의에 관한 관심은 지방자치와 주민자치, 자치와 자급을 향한 관심에도 맞닿아 있다. 지역사회의 역량을 강화하고 대안적인 지역사회 비전을 만드는 중요한 방법으로서 풀뿌리민주주의가 강조된다.


그런데 이렇게 높아지는 관심에 견줘 풀뿌리민주주의에 관한 논의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그동안 한국에서 진행된 연구들을 살펴보면, 풀뿌리민주주의라는 말은 주로 진행 중인 지방자치 운동이나 지방정부의 성과를 설명하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을 뿐 독자적인 이론으로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진지한 이론적 고찰보다는 지역운동 사례를 다루기 위한 방법으로 풀뿌리민주주의가 거론되는 정도였다. 상향식 민주주의라는 관점이나 시민사회 이론으로 풀뿌리민주주의를 설명하려 했지만, 개별 사례를 부각시키거나 부분적인 설명을 시도할 뿐 풀뿌리민주주의의 이론적인 지향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또한 시기 측면에서도 기존 연구들은 한국 사회의 풀뿌리민주주의의 역사를 주로 1987년 민주화 이후 시기에서만 찾고 한국 현대사와 풀뿌리민주주의의 관계를 설명하지는 못했다.


풀뿌리민주주의에 관한 논의가 부족하고 논의 방식이 협소한 현실은 한국뿐 아니라 해외 연구에서도 드러난다. 영미권에서 진행된 논의들도 주로 지역 거버넌스local governance나 지역 정치local politics, 공동체 권력community power 차원에서 풀뿌리민주주의를 다룬다. 풀뿌리민주주의가 작은 지역사회나 소규모 지역 공동체에만 적용될 수 있다는 생각은 이 개념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이론가들 사이에서도 드러난다. 그러다 보니 개념의 타당성을 주로 공동체운동 같은 실증적인 사례 연구를 통해서만 증명하려 하고, 하나의 이념과 지향으로서 풀뿌리민주주의의 의미는 잘 드러나지 않았다.


이렇게 이론적인 기반이 부족한 상황에서도 풀뿌리민주주의를 실현하려는 운동은 1968년 이후 전세계에서, 그리고 한국의 경우 1970년대 이후 지역사회를 기반으로 삼은 풀뿌리 주민운동 단체나 협동조합운동을 통해 경험을 축적하고 역사를 만들어왔다. 국가권력과 재벌의 억압과 간섭을 받으면서도 풀뿌리운동은 지역사회에 서서히 뿌리를 내려왔고, 1991년에 지방자치제가 부활된 뒤에는 다양한 영역으로 활동을 넓히고 있다. 참여예산운동, 학교급식이나 보육, 주민 참여에 관련된 조례제정 또는 개정 운동, 마을 만들기, 협동조합운동, 정보 공개와 주민참여운동 등 한국 사회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풀뿌리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이렇게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운동의 경험을 비교하고 분석할 수 있는 이론적 틀이 필요해졌지만 관련된 연구는 매우 부족하다. 풀뿌리민주주의에서 이론과 경험의 불균형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이 책은 이런 불균형을 바로잡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이 책은 아나키즘의 관점에서 풀뿌리민주주의의 이론적 기반을 다지려 한다. 아나키즘의 관점에서 풀뿌리민주주의를 접근하는 것은 크게 네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이 책은 아나키즘을 통해 한국 사회에서 풀뿌리민주주의의 전통을 복원하려 한다. 보통 풀뿌리민주주의에 관련된 연구들은 1987년 이후 시기만 다루거나 1991년 지방자치 제도가 부활된 이후의 시기만을 다룬다. 그 전까지는 강력한 중앙집권형 국가에 군사독재가 지배하던 시기라 사실 민주주의를 얘기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어떤 제도가 뿌리를 내리려면 오랜 세월 동안 누적된 전통이 필요하다. 특히 시민 참여의 경우에는 그런 전통이 더더욱 절실하고 또 필요하다. 그런데 풀뿌리민주주의에 관련된 논의들은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그런 전통을 파악하지 못했다.


이 책은 한국 사회가 풀뿌리민주주의의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조선 후기에 생겨난 두레 같은 공동 노동 조직이나 계 같은 자조 모임들은 내부에 민주주의의 맹아를 품고 있었다. 민주주의의 기본이라 할 ‘회의하는 전통’이 두레나 동계, 촌회 같은 마을 단위 모임에 전해지고 있었고, 일터와 삶터에서 모두 협동이 기운이 싹트고 있었다. 그런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일제 강점기에 수용된 아나키즘은 대종교 계통의 민족주의자들이 주장하던 대동사상이나 공자나 맹자의 원시 유교나 노자의 무치주의無治主義 등 한국의 전통사상하고 어울리면서 발전할 수 있었다. 1930년대까지 주요한 사회사상으로 자리 잡은 아나키즘은 해방 이후에도 이어졌으며, 이런 흐름은 직간접으로 풀뿌리민주주의에 연관된다. 예를 들어 1945년 9월 해방 직후 만들어진 아나키스트 단체인 ‘자유사회건설자연맹’은 “우리는 독재정치를 배격하고 완전한 자유의 조선건설을 기한다. 우리는 집산주의 경제제도를 거부하고 지방 분산주의의 실현을 기한다. 우리는 상호부조에 의한 인류일가이상人類一家理想의 구현을 기한다”는 강령을 선포했는데, 이런 주장은 풀뿌리민주주의하고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아나키즘의 전통과 그 맥을 살리는 일은 풀뿌리민주주의를 우리 전통 속에서 파악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한편 이론 연구하고 다르게 현실의 실천 운동은 풀뿌리민주주의에 관련된 논의들을 민초민주주의民草民主主義라는 형태로 발전시키기도 했다(민초라는 표현은 동학의 뜻을 이어받아 근대 문명의 한계를 극복하려한 생명운동에서 주로 사용됐다). 1970년대 이후 원주에서 무위당 장일순 등이 시작한 생명운동은 그 뒤 한살림모임이나 생명민회운동으로 발전했는데, 이런 시도들은 “낭비와 파괴를 구조적으로 강요하는 자본주의적 시장기구로부터 가능한 한의 독립성을 유지하여, 자치적 ‘해방구’를 만들어보려는 노력”(장일순 2005)인 동시에 “민초들은 스스로 그 무의의 탁월한 자연 생명의 질서를 깨달아 스스로 변화하고, 스스로 다스리고, 스스로 운명을 결정하여 나아간다”(김지하 2003)는 점을 강조했다. 아나키즘이 내포한 사회혁명의 문제의식 역시 이런 지향을 공유하고 있다. 따라서 아나키즘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 사회 풀뿌리민주주의의 전통은 훨씬 넓게 파악될 수 있다. 그리고 아나키즘의 전통과 그 맥을 살리는 것은 풀뿌리민주주의를 우리 전통 속에서 파악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이런 내용을 2부에서 다루려 한다.


둘째, 아나키즘의 이론적 특징, 특히 분권과 연방주의는 풀뿌리민주주의에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보통 아나키즘은 모든 형태의 권력을 거부한다는 오해에 시달리고 무정부주의라는 비판을 받아왔지만 프루동P. Proudhon이나 크로폿킨P. Kropotkin 같은 아나키스트들은 자유로운 코뮌에서 권력의 존재를 인정했다. 프루동은 자치라는 민주주의의 가장 위대한 원리가 연방주의에서 자연스레 구현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각 지방의 자치를 보장하고 권력이 상향식으로 구성되는 연방주의만이 시민의 참된 주권을 보장하고 시민이 대표/대리인들을 해임하거나 소환하면서 자신들의 일반의지를 실행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크로폿킨 역시 캐나다와 미국의 연방주의에 관심을 가졌고 러시아로 돌아간 뒤에는 소비에트의 연방화를 주장했다. 크로폿킨의 아나키즘은 권력 자체를 전면 거부하는 방식을 뜻하는 게 아니라, 하향식으로 강요당하는 국가,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는 민중의 의지를 거부하는 국가를 반대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크로폿킨은 국가를 부정했지만 권력이 분산된 연방 공화국을 지지했고 실제로 자치가 보장되는 연방 정부를 구상했다.


아나키즘의 이런 권력관과 정치 이론은 시민 참여의 활성화와 자치를 주장하는 풀뿌리민주주의하고 잘 어울린다. 그리고 풀뿌리민주주의를 민주주의의 한 지류가 아니라 ‘민주주의 이론’으로 다루려면 작은 지역 공동체뿐 아니라 국가 단위에도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 강력한 중앙집권형 국가에서는 개별 정치 공동체의 자율성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국가 안의 국가’를 지향하는 연방주의야말로 풀뿌리민주주의가 지향할 사회 모델로 이야기될 수 있다. 그렇지만 현재까지 풀뿌리민주주의와 연방주의를 함께 다루는 논의는 거의 없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따라서 3부에서는 아나키즘의 권력관과 연방주의의 관점에서 풀뿌리민주주의의 이론적 기반을 다지려 한다.


셋째, 아나키즘의 원리를 따르는 협동조합운동이나 대안 공동체, 대안 학교 등은 한국 사회에서 풀뿌리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중요한 흐름이다. 아나키즘은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다양한 사회적 실천을 장려해왔다. 예를 들어 공동육아나 대안 학교를 만드는 실천, 생산협동조합이나 소비협동조합을 만들어 농촌과 도시의 ‘서로 살림相生’을 앞당기려는 실천, 농촌과 도시에 대안적인 마을 공동체를 세우려는 실천, 대안적인 의료 체계를 만들려는 실천 등 다양한 실천이 있었고, 아나키즘은 이런 삶의 변화를 통해서만 국가를 대신할 힘이, 국가 없이 살 수 있는 힘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크로폿킨은 협동조합의 ‘보편적인 복지와 생산자들의 복지’라는 특성이 사회적이고 건전한 정신을 기르는 중요한 기구라고 봤다. 이런 협동조합들이 사회의 계급 구조를 직접 해체하지는 못하지만, 작은 마을에서는 사회적인 차별을 실질적으로 완화하며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을 돕고 향상시킬 뿐 아니라 공통의 필요를 구성함으로써 생활을 조직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이런 활동이 국가의 경계를 뛰어넘어 국제적인 활동으로 발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활동으로 다져진 경험은 시민의 자존감을 높인다.


또한 아나키즘이 주장하는 임금 제도의 폐지 또는 개인이나 코뮌 간의 자유로운 협약을 통한 공산주의 사회의 실현은 경제를 이해관계나 수익이나 화폐가치의 관점이 아니라 필요와 호혜와 상생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자본주의는 위기를 반복하고 있는데 마땅한 대안은 보이지 않는다.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 등이 대안으로 얘기되지만 전체 사회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에 관한 고민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자치가 자급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살림살이는 풀뿌리민주주의의 중요한 과제다. 아나키즘은 이런 과제를 푸는 데 여러 시사점을 준다. 이런 내용을 4부에서 다루려 한다.


넷째, 풀뿌리민주주의는 단순히 아래에서 시작해 변화의 씨앗을 만들자는 ‘운동의 전략’이 아니다. 오히려 풀뿌리민주주의는 우리의 삶이 단단하게 이 땅에 뿌리를 내려서 권력이 우리를 밀어내고 갈아엎으려 해도 잡초처럼 끈질기게 버텨보자는, 그리고 서로 뿌리를 단단히 얽어서 함께 살아보자는 ‘생활의 전략’이다. 운동의 가치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야 하지만, 그 가치가 생활로 단단히 묶이지 않으면, 따라서 운동의 가치와 삶이 단단히 서로 부둥켜안고 받쳐주지 않으면 변화는 지속되기 어렵다. 풀뿌리민주주의는 변화의 과정이면서 그것 자체가 변화의 목표다.


마찬가지로 아나키즘은 특정한 역사 법칙을 따르거나 특정한 세력이 사회를 이끌어야 한다고 보지 않았다. 아나키스트들은 역사가 역사적 유물론이나 과학적 사회주의 같은 특정한 발전 법칙에 따라 실현된다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이론을 거부했다. 새로운 사회의 구체적인 청사진이 미리 그려질 수 없다고 본 아나키스트들은 새로운 사회란 그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운동에 참여하는 대중의 집단적 활력을 통해 구성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소외되고 배제된 사람들이 정치 주체로 성장하는 ‘과정 중심의 민주주의’를 중시하는 풀뿌리민주주의의 특징도 이런 특성에 무관하지 않다. 최근 ‘오큐파이occupy 운동’을 비롯해 새롭게 등장하는 아나키즘 운동도 이런 점을 강조한다.


풀뿌리민주주의가 지향하는 가치 또한 자기의식을 되찾은 시민이 스스로 세상을 바꾸는 데 있다. 정치적으로 소외된 시민이 정치의 주체로 성장해 공동체를 이끈다는 생각은 각각의 시민이 정치적 가능성과 잠재성을 품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시민운동이 일방적인 선동보다 지속적인 대화와 상호 이해를 지향할 때만 가능하다. 풀뿌리민주주의에 관련된 여러 논의들이 이 점을 늘 강조했지만, 당위적인 수준이었을 뿐 이론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리지는 못했다. 아나키즘은 이런 점을 보완할 수 있다. 5부에서 이런 내용을 다루려 한다.


마지막 6부에서는 아나키즘의 이념을 통해 한국 풀뿌리민주주의의 발전 방향을 모색하려 한다. 아나키즘의 연방주의는 한국의 풀뿌리운동이 지방자치라는 다분히 형식화된 틀을 넘어 새로운 국가 구조를 고민하게 한다. 국가 안의 국가를 만들고 연합의 논리를 실현하는 연방주의는 다양한 풀뿌리들이 상생의 길을 모색할 수 있는 틀을 제시할 것이다. 그리고 아나키즘의 호혜와 자급의 경제는 풀뿌리운동이 협동조합과 다양한 형태의 공동 노동 형식을 통해 살림살이의 사회성을 다시 실현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윤을 넘어서는 관계의 형성과 확장을 목적으로 하고, 상품이 아니라 생활재를 생산하면서 살림살이를 지키는 실천과 자급의 운동이 풀뿌리민주주의를 강화하는 바탕이다. 또한 아나키즘이 제기하는 사회적 개인과 주체성은 풀뿌리민주주의를 실현할 다양한 주체들을 구성할 것이다. 이런 주체의 활성화에 도움을 주는 기본소득과 지역화폐의 활성화는 다른 경제를 구현할 힘을 마련할 밑바

탕이 된다.


사실 모순되지만 이 책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았다. 이 책을 쓰는 동안 나는 대학을 떠날 준비를 했고, 이를 위한 대비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런 대비 덕분인지 2012년부터는 대학 강의도 관둘 수 있었다(그 시점부터 지원이 끝났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누군가의 표현을 빌면 ‘상근저자’를 모색할 정도로 글을 파는 처지라 이 책에 담긴 고민들은 내가 써온 여러 글들에서 조금씩 드러난 바 있다. 그리고 긴 호흡으로 썼지만 지금 시점으로 끊어보면 내가 봐도 여전히 부족한 부분들이 보인다. 그 부분은 더 치열한 고민과 삶으로 채워야 할 것 같다. 부족한 면이 많지만 하고 싶은 일을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지금껏 살고 있다. 아나키즘은 그런 마음을 지켜주고 삶을 살아가게 한다.


또 모순되지만 이 책을 쓰는 동안에 아이도 한 명 태어났다. 결혼도 하고 아이도 있고 아나키즘을 얘기하는 사람으로선 분명하지 않은 삶이다. 어느 순간부터 흐릿한 경계인으로 사는 게 약간 몸에 익었다. 경계에 있기에 만날 수 있는 여러 사람들이 내게 생기를 불어넣어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계속 흐릿하게 살 것 같다. 그 삶의 과정에서 만난 각시, 솔랑군,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사람들, 땡땡책협동조합 사람들, 협동조합을 비롯한 많은 곳에서 대안을 일구는 사람들, 독서회를 통해 만난 사람들, 함께 하지 못함에 가슴 졸이게 만드는 사람들, 여전히 지키며 싸우고 있는 사람들과 계속 만남을 이어가고 싶다.

 

우리의 선거제도는 대의민주주의라 불린다. 그런데 정말 그러한가? 우리의 뜻은 대의(代議)되고 있는가? 지방의원, 단체장, 국회의원, 대통령은 우리를 대신해서 주요한 현안을 해결하고 대안을 마련하고 있는가? 권력은 적절히 나눠져서 서로 견제하며 균형을 잡고 있는가? 선출되는 공무원들은 우리를 대신해서 선출되지 않는 공무원들을 잘 관리하고 있는가? 이런 질문에 긍정적으로 답할 수 있어야 대의제 민주주의라 불릴 수 있다. 한국은 진정 대의민주주의 국가인가?

 

배가 침몰해서 많은 청소년과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정치인과 공무원들은 시민을 대신하기는커녕 책임을 떠넘기느라 바쁘다. 대의민주주의 국가라면 시민이 그런 무능과 실패의 책임을 물을 수 있어야 한다. 흔히 선거를 통해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얘기하는데, 정말 그러한가? 시민들의 분노가 권력을 바꿀 수 있는가?

 

비극은 우리가 그런 국가에 살지 않는데 그런 국가에 살고 있다는 착각에서, 그런 착각으로 현실의 폭력을 무기력하게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힘을 가진 자들은 이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우리 정치가 “못살겠다 갈아보자”, “갈아봤자 소용없다”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건 이 수준이 힘을 가진 자들에게 가장 유리하기 때문이다.


선거, 매번 똑같다.


선거(選擧)는 가려서 올린다는 뜻이다. 바꿔 말하면 선거를 통해 대표를 가릴 수 있어야 한다. 어떤 후보자가 다른 후보자보다 더 똑똑하고 능력 있는지를 가리는 게 아니라 정치무대에 올라가서 내 의견을 제대로 대리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지를 잘 살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매번 우리를 배신한다. 한참을 욕하다가 선거 당일이 되면 울며 겨자먹기로 투표한다. 최악이 안 되면 다행이고, 최악이면 술을 들이킨다. 정치하는 인간들도 이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시민의 가슴이 뛰길 원치 않는다. 그냥 표만 찍어주길 원한다. 니들이 찍지 별 수 있겠냐, 그런 똥배짱이다. 이런 구렁텅이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방법이 없다.

 

세월호 사건으로 지방선거 국면이 주춤하고 있다. 사실 정당공천을 하네, 마네로 많은 시간이 흘렀고, 한국의 특성상 지방선거는 중앙권력에 대한 심판론이 지배한다. 정책선거, 지역후보, 이런 건 그냥 말 뿐이다. 사실 지역당(local party)이 불가능하고, 지역언론도 제대로 없는 한국 현실에서 지방선거는 중심에 설 수 없는 변방의 선거이다. 당연히 지역의 중요한 현안도 논의되지 못하고 온갖 개발공약만 난무한다. 선거가 개발을 부르짖는 공약들을 부추기고, 삶이 나아질 것이라는 착각은 선거가 끝나면 주민들을 몰아내는 폭력으로 변한다.

 

그러니 선거를 민주주의의 꽃이라 부르는 건 아주 나쁜 일이다. 만약 선거에 참여하지 않으면 정치적으로 무관심한 사람일까? 아니, 한국에는 정치에 관심이 아주 많기 때문에 무관심해지는 사람들도 있다. 후보자들 중에서 가려서 뽑을 사람이 없는 건 유권자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하나가 아니다. 무수히 많은 민주주의‘들’이 있다. 당연히 선거제도도 여러 가지이다. 어느 하나가 잘 안 되면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 하는데, 그게 민주주의인데 새로운 투표방법이나 대표자 선출방식을 도입하는 건 한국사회에서 불가능에 가깝다. 심지어 우리는 투표를 하자는 투표독려행위까지 법으로 금지하려는 나라에 살고 있다.

 

정치판이 변하지 않는 데에는 우리의 ‘이율배반’도 한 몫을 한다. 우리는 후보들이 우리 의견을 대변해주기를 ‘내심’ 기대한다. 그런데 표가 보이면 어디든 달려갈 것 같은 사람들이 우리 편에는 거의 오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가 자신들을 찍지 않을 것이라 믿는 합리적인 행위자이다. 당연히 오지 않을 사람들을 바라보며 화를 내는 우리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선거 이후를 바라보자!


선거도 중요하지만 선거 이후가 더 중요하다. 정책이 중요한 것도 그 때문이다. 정책을 보자는 것은 후보자나 선거캠프가 얼마나 똑똑한지를 확인하려는 것이 아니다. 선거 이후에 뭘 하려 하는지를, 그것을 통해 좋은 삶이 가능한지를 따져보자는 거다. 이 편, 저 편을 나누는 목소리에서 사라지는 건 정책이고 선거 이후이다. 여야 할 것 없이 말들의 잔치이고 이후를 얘기하지 않는다.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이 되지 않으려면 그 공약을 뜻으로 밀고 나가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사람 한 명 달랑 당선된다고 정책결정이 내려지는 구조는 바뀌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언제나 선거‘까지’만 얘기한다. 사실 선거를 통해 어떤 새로운 관계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끝나는 순간 선거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기성 정치인들이 선거를 통해 진심이든 뻥이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면, 새로운 정치를 바란다는 우리는 늘 익숙한 사람들 사이를 헤맨다. 당연히 구조는 바뀌지 않는다.

 

한진중공업이나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복직을 하더라도 기업의 주인으로 복귀하지 않는 이상 비극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제 손으로는 아무 것도 생산하지 못하는 자들이 노동하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자신들이 ‘주인’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이 굴욕을 감수하고 공장에서 일을 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외국이 자신들의 천국일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기에 그들은 국내에서 세게 나가고 공권력을 포섭한다. 그리고 어떻게든 노동자들이 단결할 수 있는 노조를 깨려고 한다.

 

마찬가지이다. 이제 당신들의 대한민국이 아니라 우리들의 대한민국을 살겠다고 결의할 수는 없을까? 노동자가 기업의 주인일 수는 없을까? 다른 나라, 다른 기업을 만들어 우리끼리 재밌게 살면, 그들도 좀 머리를 숙이지 않을까? 맨 날 제왕적 대통령제라 욕하면서 대통령 제도를 바꿀 생각을 하지 않는 태도를 버리고 헌법 자체를 뜯어고칠 수는 없을까? 검사나 판사, 공무원들을 또라이라고 욕하면서 그 또라이들에 의지하려 하지 말고 그들의 역할을 축소시킬 수는 없을까? 우리가 정당을 만들 수는 없을까? 경찰이 깡패라고 욕하지 말고 경찰서장을 우리 손으로 뽑을 생각을 할 수는 없을까? 선거 이후를 보며 칼을 벼리는 정치는 불가능할까?

 

민주주의는 민중이 좋은 정치인이나 정당을 뽑거나 민중의 목소리가 반영되는 것이 아니다. 민중이 권력을 가져야 민주주의이다. 민주주의는 민중을 위하는 정치인이 아니라 민중과 함께 할 정치인을 필요로 한다. 그렇게 하려면 정당이 아니라 우리가 조직화되어야 하고, 그런 관계맺음에서 민주주의가 살아날 수 있다. 선거판을 보며 던지는 질문이 바뀌지 않는 이상 우리의 삶도 바뀌지 않을 것 같다. 우리의 질문을 바꾸고 우리의 행동을, 우리의 삶을 바꾸자.

 

곧 '도서출판 삶창'에서 나올 <모두를 위한 마을은 없다>(가제)에 실린 모임 후기이다.

대화모임에 참여한 사람들이 각자 후기를 쓰기로 했는데, 이건 내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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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을 마치고 난 뒤 가장 큰 변화는 가족과 함께 옥천으로 이주를 했다는 점이다. 꼭 이 모임 때문에 이사를 한 것은 아니다. 2006년부터 수도권을 떠나야 제대로 지역을 고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수도권을 제외하면 곳곳에서 마을이 무너지고 있는데, 살만한 곳을 끼고 마을 운운하긴 싫었기 때문이다. 삶이 앎을 받쳐주지 못하면 언젠가는 폭삭 내려앉을 것 같았다.

 

이 모임을 진행하는 중에도 어디로 내려갈까 계속 돌아다니던 중이었다. 그러다 애초에 계획에 없던 옥천으로 이사를 한 건 우연한 선택이었다. 옥천이 가장 이상적이어서 옥천을 택한 건 아니었다. <옥천신문>이 있다는 점, 주민들의 다양한 시도가 있다는 점, 농촌과 소도시라는 점이 옥천의 가장 큰 매력이었다. 하지만 아무런 연고도 없고 일을 찾기도 어려운 옥천을 선택한 건 역설적이지만 당장 일을 벌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옥천으로 내려오기까지 몸도 힘들었고 맘고생도 심했지만 오고난 뒤엔 마음이 좀 차분해졌다. 짐정리가 대충 끝나고 난 뒤에는 옥천 시내를 천천히 걸어다닌다. 주로 아이의 손을 잡고, 때로는 혼자서. ‘거리가 왜 이리 한산하지’라고 생각했다가 ‘내가 참 붐비는 곳에 살았구나’로 생각을 고쳐먹고, 지방에 강연을 가기 위해 여러 번 차를 바꿔 타며 ‘왜 이리 불편하지’라고 생각했다가 ‘그동안 참 편리한 곳에 살았구나’라고 생각을 고쳐먹는다. 아파트에서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오니 직접 손을 대야 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거참, 번거롭네’라고 생각했다가 ‘그동안 참 많은 사람들의 손을 빌리며 살았구나’라며 반성한다.

 

옥천에 와서도 계속 느끼는 건 안전한(?) 지역이 없다는 거다. 한국 어디건 지역발전이라는 이름으로 온갖 개발사업이 들어온다. 열심히 마을을 만들어도 이런 노력을 한 번에 밀어버리는 것이 바로 개발사업이다. 이 사업은 우리가 발전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이미 발전의 극단을 달리는 수도권에 살고 있지 않는 이상 피할 수 없다. 그리고 지방에 내려가면 어디서나 접할 수 있는 건 외지인의 땅이다. 농사를 짓지도, 살지도 않는 사람들이 땅을 소유하고 있다. 살지 않으니 이런저런 계획만 잡히면 냅다 땅을 판다. 토지문서만 있고 주인이 없는 땅은 지역을 힘들게 만든다.

 

그리고 마을에 아무리 좋은 말을 갖다 붙여도 지금의 마을은 불안하다. 이웃끼리 얼굴 알고 수다떨며 잔치도 열고, 참 좋은 일이다. 그런데 그건 서로의 관계가 좋을 때이다. 서로 생각이 다르고 이해관계가 충돌한다고 느끼는 순간 그 얼굴과 수다와 잔치는 고통으로 변한다. 나는 천국이 지옥으로 변하는 걸 경험했다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편이다. 비단 마을만 그럴까? 시민사회단체나 마을과 공동체를 얘기하는 기업, 협동조합에서 그런 경험을 한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환상은 자꾸 깨진다. 다행이다.

 

또한 마을에서 아는 사람들이 늘어나 행복하다는 사람들을 만날 때면 대체 누구를 만나는 것일까 궁금해진다. 왜냐하면 자급하는 삶이 아니라면 아는 사람들이 늘어날 때마다 마음도 무거워지기 때문이다. 아파트 경비 아저씨를 알면 눈이 올 때마다 마음이 무겁고, 계단을 청소하시는 아주머니를 알면 왠지 조심스러워진다. 그리고 같은 마을에 살지 않아도 박영길 샘을 알고 난 뒤 청소노동자가 보이기 시작하고, 김신범 샘을 알고 난 뒤 마을에 있는 기업들이 보이기 시작해 고민이 많아진다. 모든 관계는 친밀하고 가깝다고 하나 모든 관계를 그렇게 만들어야 할까, 그리고 그걸 내가 다 감당할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이 든다.

 

사실 나는 마을과 관계를 강조하지만 그것을 통해 모든 걸 해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아름답고 친밀한 관계 속엔 나름의 독도 있다. 그 아름다움과 친밀함을 유지하기 위해 불편한 것들은 모두 감춰진다. 서로 합의할 수 있는 것들만 이야기하고, 나눌 수 있는 것들만 나눈다. 누군가가 불편함을 드러내는 순간 그 사람은 왕따가 되고 마을에서 밀려난다. 왕따를 만들어 단합되는 마을은 마을운동이 아니다. 불편한 타자와도 공존할 수 있을 때에만 마을은 마을운동이 될 수 있다. 사실 그 불편함이란 것의 속내는 결국 이기적인 것이 아니던가. 더 이상 불편해지기 싫다는, 때때로 고통을 통해 맞보는 기쁨이 싫어지고 그냥 편해지고 싶다는. 이기적인 것이 모든 문제의 근원은 아니지만 그것을 이기적이라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여러 문제들의 원인이 될 수 있다. 나와 다른 것에 대한 이기적인 불편함을 보편타당함으로 포장하려 할 때 무리한 논리가 만들어지고 편견과 강압이 생긴다.

 

이 모든 문제가 개인의 탓은 아니다. 한국 사회의 구조적인 장벽들이 개인의 편견을 재생산하고 확대시킨다. 마을이 이런 편견과 구조적인 문제 밖에 존재한다고 믿는 건 큰 잘못이다. 이 모임에서 확인한 건 개인의 잘못이나 실수가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들이 그렇게 마을을 몰아가기도 한다는 점이다. 개인과 구조, 이렇게 이분법으로 나눌 수는 없지만 지금의 사회분위기는 개인을 지나치게 몰아세운다. 개인의 가능성이 구조를 뛰어넘을 수도 있지만 그건 가능성일 뿐이다. 마치 그 가능성이 보편적인 것처럼,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처럼 만드는 것은 다양성을 파괴한다. 마을이 만능의 법칙처럼 논의되면서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진다.

 

이 모임에서 많이 논의된 바는 바로 이 다양성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색깔을 가지고 함께 사는데, 우리는 그 속에서 자신에게 익숙한 색깔만을 골라낸다. 아이 하나가 자라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듯이, 마을이 제대로 서려면 다양한 운동이 필요하다. 그런데 지역 내에선 복지 따로, 노동 따로, 교육 따로, 모두가 따로따로이다. 이러니 체계를 갖추고 밀어붙이는 정부와 기업의 힘을 당해낼 재간이 없다. 뭉쳐도 시원찮을 판에 쪼개지고, 마을만들기사업은 이해관계까지 만들어 단체들이 비슷한 사업을, 선정될 만한 사업을 경쟁적으로 벌이기도 한다. 서로가 서로의 성장을 지원해줘야 정부와 기업에 맞설 힘을 만들 텐데, 서로가 서로의 발목을 잡기도 한다. 말로만 떠드는 연대로는 지역의 작은 개발사업조차 감당하기 어렵다. 이렇게 힘이 약해진 상태에서 무슨 마을의 힘을 논하나.

 

그리고 우리는 아직 제대로 싸워본 적이 없다. 강정마을이나 밀양, 청도의 마을을 지키기 위한 싸움에 참여한 적은 있으나 그 싸움이 우리의 싸움은 아니다. 뭔가를 지키기 위한 방어적인 싸움이지 우리의 뜻과 의견을 실현할 공격적인 싸움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을은 이런 싸움을 벌일 수 있는 좋은 진지여야 하는데, 모임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종합하면 마을은 마치 행정이 지역 속에 투입한 ‘트로이의 목마’같다. 행정의 언어가 마을의 언어를 대체하고 행정의 관점이 마을의 경계를 정한다. 행정과 기업의 자원이 마을을 움직일 동력을 만들고, 행정의 지표로 마을의 활동이 평가를 받는다. 놀라운 건 마을이 스스로 이런 순응을 내면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니 이제 마을 쪽에선 비판이나 감시, 투쟁이라는 말을 듣기가 어렵다. 현실은 개판인데 주옥같은 말만 들린다. 제대로 싸우지도 못했는데 벌써 무기를 내려놓았다.

 

나는 이 모임 때문에 마을에 대한 생각과 걱정이 더욱더 많아졌다. 그러니 마을운동과 공동체운동을 지지하는 내게 이 모임은 별로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 셈이다. 그럴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떠들어보니 생각보다 더 심각한 단면이 드러났다. 내가 앞으로 마을운동과 공동체운동을 등진다면 그건 이 모임의 탓이다.

 

그래도 나는 마을을 중심으로 다양한 활동들을 연계하고 공유지를 늘려가는 일에 계속 관심을 두며 활동할 것이다. 비어 있는 곳이기에 누군가는 채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옥천으로의 이주는 그런 활동을 더 정색하며 하겠다는 결의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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