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고기를 넘어 삶의 변화로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관련한 촛불행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놀라운 광경이지요. 단지 거리로 나온 사람들의 수가 많기 때문에 놀라운 건 아닙니다. 더 이상 부당한 대우를 참지 않겠다라는 분노와 권력에 대한 조롱이 거리를 메우고 있기 때문에, 내가 권력의 주인이라고 자각하며 정치가 그들의 독점물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에 놀라운 것이지요.

돌이켜 생각해보면 권력이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한국의 시민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왕에 맞서 일어난 수많은 민란들, 일제 식민지 권력에 맞섰던 평범한 민초들의 3․1운동, 부패하고 정당성을 잃은 권력에 맞섰던 4․19, 부마항쟁, 광주항쟁, 87년 6월 항쟁, 91년 5월, 2002년 촛불집회 등 수많이 사례들이 우리 역사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번 촛불행진을 새롭고 특별한 일로만, 그리고 준비되지 못한 우발적인 사건으로만 기록하는 건 그런 저항의 역사를 망각하길 바라는 강자들의 바람에 말려드는 겁니다. 맨 손으로 권력에 저항하는 우리 민족의 의지는 매우 강하고 그렇기에 우리에게 미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다지 진심을 담은 것 같지는 않지만 대통령이 사과하고 미국과 추가협상도 진행되며 조금씩 촛불의 힘을 빼려는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습니다. 그와 함께 앞으로 촛불행진이 어디로 가야 하는가에 관한 고민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촛불은 어디로 가야 할까요?

한편에서는 이제 정당과 대의민주주의로 저항의 초점을 옮겨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언제까지 거리로 나와 요구를 주장할 수는 없지 않냐고 묻습니다. 하지만 정당과 대의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했다면, 그리고 앞으로 그것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면 사람들은 거리로 나오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시민의 뜻과 바람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고 시민을 소외시키는 정당 내부의 잘못된 구조와 대의민주주의의 문제점을 바로잡지 않은 채, 제도정치로 돌아가야 한다고 외치는 건 문제의 본질을 놓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들이 그렇게 외칠 수밖에 없는 건 대중을 신뢰하지 않아서일 겁니다. 권력이 시민의 것이라는 주장은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이고, 실제로는 자신들이 권력과 민주주의에 관한 논의를 독점해야 한다고 믿는 엘리트주의자들이라 대중의 정치를, 거리의 정치를 믿을 수 없는 겁니다.

또 다른 편에서는 국민소환제나 국민투표, 정권퇴진을 주장합니다. 문제는 그런 방식으로 지금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을 몰아낸다고 해도 그 뒤를 이을 사람들이 없다는 겁니다. 사실상 그런 제도들이 한 번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듯 하지만 그런 바람은 환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난 저항의 역사를 살펴보면 제도에 의지하는 것이야말로 죽 쒀서 개 준다는 속담을 실현하는 방법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제도는 언제나 이미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을 돕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이 가능할까요? 요즘 ‘생활정치’라는 말이 많이 등장하는데, 가만히 보면 좀 이상하게 사용되는 듯합니다. 단순히 먹거리의 문제, 생명을 위협하는 사안이기 때문에, 그리고 생명과 건강에 관한 고민을 담고 있기 때문에 이를 생활정치라고 불러야 할까요?

생활정치는 기존 정치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정치의 주체로 등장할 뿐 아니라 일상 속에서 삶의 변화를 추구하는 과정을 강조합니다. 이번 촛불행진에서 청소년과 여성들이 새로운 운동의 주체로 등장했다고 하지만, 사실 청소년과 여성들은 그 전부터 정치의 주체가 되려고 꾸준히 노력해 왔습니다. 기존의 성인 남성 중심의 정치제도가 이들을 정치주체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 뿐이지요.

그런데 ‘새로운 등장’을 강조하는 세력들은 기존의 정치구조를 전혀 바꾸지 않은 채 그 성과를 자신들의 것으로 가져가려 합니다. 이런 세력들은 청소년과 여성의 참여를 놀라워 하지만 정작 그들이 살고 있는 일상의 문제에 대해 여전히 무관심합니다. 참여를 찬양하지만 실제로는 무한경쟁이 지배하는 학교와 가부장제가 지배하는 가정으로 청소년과 여성을 다시 돌려보내려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자신의 기득권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려는 기존 정치구조의 교묘한 방식이고, 소위 진보세력이라는 사람들조차 그런 구조와 은밀히 타협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 촛불은 일상의 삶 속으로 뿌리를 내려야 우리 사회를 바꿀 수 있습니다. 일상의 장을 참여의 장으로 만들며 성인 남성 중심의 대의정치제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힘을 축적해야 합니다. 민주주의를 실험하고 경험하는 장으로 가정과 학교를 바로 세우고 더 많은 청소년과 여성들이 정치의 주체로 설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수동성과 냉소를 심는 일상의 생활과정을 능동적인 정치참여의 과정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럴 때에만 진정한 생활정치가 실현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뜻을 바로 세우고 그 뜻을 지키고 키우려 노력해야 합니다. 반드시 거리에 나와 촛불을 켜야 하는 건 아닙니다. 내 맘 속의 촛불이 꺼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제든 다시 거리로 나설 수 있습니다(아마 이명박 정부 5년 동안 거리로 뛰쳐나올 일은 수없이 많을 겁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거리로 나온 사람들의 수를 두려워하는 듯하지만, 그들이 정말 두려워하는 건 복종하지 않겠다는 시민들의 뜻, 자발적으로 검열을 하지 않으려는 뜻입니다. 냉소하며 물러서려는 마음이야말로 권력을 쥔 자들이 가장 기뻐할 상황입니다.

그렇게 뜻을 키우면서 우리 사회에서 더 소외되고 배제된 사람들의 손을 잡고 그들도 함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연대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장애인, 이주노동자, 성소수자 등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과 손을 잡을 수 있다면 촛불은 더욱 밝아질 겁니다. 오래 타오를 뿐 아니라 더 크게 타오르면 촛불은 세상을 바꾸는 횃불이 될 수 있습니다.



마을과 코뮨을 논하다

 

하승우

 

조한혜정 지음 《다시, 마을이다》(또하나의문화, 2007년)

조한혜정 외 지음 《가족에서 학교로 학교에서 마을로》(또하나의문화, 2006년)

고병권․이진경 외 지음 《코뮨주의 선언》(교양인, 2007년)

 

풀뿌리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난 뒤 공간을 보는 법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시선이 높이 올라가야 전방 15도 정도였고 땅바닥을 보며 걷거나 가야할 목적지로 빨리 걸음을 옮기느라 바빴다. 하지만 요즘은 주변을 휘휘 둘러보며 주민자치센터나 마을도서관, 놀이터, 공원, 학교, 복지관 등이 어디에 있는지를 살핀다. 그리고 아파트나 다세대주택, 단독주택이 어느 정도 있는지,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연령대는 어떻게 되는지, 사람들의 표정은 밝은지 살피느라 걸음이 늦다. 가끔 지방에 내려가야 할 때도 한 시간 정도 미리 내려가 마을 분위기를 파악하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예전에는 이런 시선의 변화가 많은 얘깃거리를 줬기에 좋았지만 요즘은 버거울 때도 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마을 풍경이 불편해서다. 어디를 가든 비슷한 모습과 내용의 시설물들, 차도가 넓어지는 만큼 줄어드는 인도와 그만큼 위험해지는 보행자들, 하루가 다르게 올라가는 아파트와 삶에 지친 사람들의 한숨, 문을 닫는 구멍가게들...

얼마 전 전셋집을 구하러 서울 바닥을 헤매며 든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가급적이면 아파트가 시야를 가리지 않는 집에 살고 싶어 여기저기를 돌아다녔고, 그런 동네들을 찾기도 했지만 좁은 골목엔 어김없이 재건축조합 공고나 조합장 선거 공고가 붙어 있었다. 재개발 예정이 되어 있지 않은 곳은 거의 없었다. 이대로라면 ‘토박이’라는 말은 곧 사전 속의 단어가 될 듯하다.

물론 남쪽의 농촌과 어촌으로 내려가면 아직 시골도시의 분위기가 많이 남아 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곳의 고즈넉함에는 북적거리는 생명의 기운이 없다. 젊은이들은 대부분 일자리를 찾아 인근의 대도시로 떠나고, 주름진 사람들과 거리만이 사라질 날을 예감하며 그곳을 지키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마을은 비전(요즘 귀가 따갑게 듣는 단어이다)을 가지고 있을까?

 

 

‘다시 마을’에서 ‘어떤 마을’로

 

《다시, 마을이다》는 조한혜정씨가 신문이나 잡지에 썼던 칼럼과 대안교육 현장에서 나눈 이야기를 모은 책이다. 짧은 글들을 모았고 글재주 있는 사람의 글이라 읽기에 부담이 없다(반면 사건에 관한 통찰은 있지만 ‘깊이’ 얘기하지 못한다). 하자센터라는 대안교육의 브랜드를 만들었고 성미산학교의 교장을 맡는 등 도시형 대안학교운동을 벌이며 느꼈던 고민들이 책 속에 담겨 있다.

그런데 제목은 마을을 강조하지만 실제로 책의 많은 부분은 교육을 다루고 있다. 물론 대안교육은 대안적인 삶과 연결되어 있기에 대안교육의 문제는 마을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아이들이 미래의 시민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그 연관성은 더 깊어진다(아이들이 ‘미래의 마을주민’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대안교육으로 만난 사람들이 서로 공간을 나누고 돌보며 살아가는 사례들도 늘어나고 있으니 이 책의 제목은 절반의 진실을 담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조한혜정씨는 위험사회에서 살아남고 삶의 안정성을 확보할 방안으로 마을에 주목한다. 책을 살펴보면 조한혜정씨는 성미산 공동체에서 많은 영감을 받은 듯하다(성미산 주민들이 만든 생활협동조합과 학교, 아이스크림 가게, 반찬 가게, 차병원, 마을방송, 마을축제 등은 지역운동에서도 모범적인 사례로 알려져 있다). “노인들이 골목길 이곳저곳에 모여 아이들이 뛰노는 것을 보고 있고, 수시로 물물교환이 이루어지고, 서로가 잘 알기에 함께 있음으로 안전한 마을, 사람들이 자주 이사를 가지 않고 가게도 자주 망하지 않아 단골이 되는 그런 마을이 후기 근대적 주거의 핵심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나는 100% 동의한다.

하지만 나는 그 마을로 가는 방법에 동의하기 어려웠다. 저자는 대안교육이든 마을만들기든 ‘국가의 지원’을 요구하고 활용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저자의 논리에 따르면, 한국사회를 파헤치고 무한경쟁을 가속화시키는 세력은 시장과 자본이다. 저자는 “국가와 시민이 힘을 합쳐 자본이 독점해 가는 학습 영역을 탈환해 와야 할 때”이고 “대안교육계는 정부와의 긴밀한 협조아래 그간의 교육적 실험을 체계화하여 널리 공유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더구나 저자는 도로가꾸기와 건물세우기로 변질되고 있는 정부의 마을만들기 사업을 “놀라운 일”이라 평가한다.

이 무슨 해괴한 소리인가? 한국의 국가권력이 시장과 손을 맞잡고 땅덩어리를 파헤치고 교육을 망가뜨려 왔다는 건 상식이라 믿었던 터라 저자의 논리를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언론매체에 실린 글이고 연설문처럼 대상을 염두에 둔 글이 많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책에 실린 글만으로 조한혜정씨의 생각을 섣불리 판단하긴 어려웠다.

그런 점에서 《가족에서 학교로 학교에서 마을로》는 나의 궁금증을 많이 풀어줬다. 이 책의 1부는 2005년 봄의 「돌봄과 소통이 있는 가족문화와 지역사회를 위한 심포지움」을, 2부, 3부는 현장의 목소리를 다뤘다. 그래서 2, 3부도 《다시, 마을이다》와 연관성을 갖지만 가장 연관된 내용은 1부이다.

1부는 ‘돌봄사회’를 핵심주제로 내세우고 “집중적 권력과 배제의 논리로 움직이는 경쟁사회에서 포용과 소통의 원리가 주도하는 ‘따뜻한 근대’”로 이행할 방법을 가족과 대안학교, 마을에서 찾고 있다. 조한혜정씨만이 아니라 발제자들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해체가 한창 진행 중인 후기 근대적 위기 상황을 타개할 새로운 국가 패러다임”을 돌봄이라는 개념에서 찾고 있다. 특히 “남성 이익을 대변하는 억압적인 지배기구”로 국가를 파악하던 기존의 페미니스트 관점에서 벗어나 국가를 “여러 행위 주체들의 네트워크로 보면서 돌봄을 바탕으로 한 국가형성에 참여를 할 준비”(조한혜정)를, “여성운동을 통한 여성결사체의 정책 참여”, “성별적인 돌봄 규범과 실행이 일상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우리 사회의 질서를 바꾸는데는 보편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정책적 접근”(허라금)을 강조한다.

사적인 영역이 다시 정치화되고 있고, ‘돌봄’에 대한 강조는 그 경향을 대표한다. 과거에 페미니스트들은 “개인적인 것이야말로 정치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며 전통적인 공사영역의 경계를 허물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허무는 방향이 과거와 다르다. 과거의 방식이 사에서 공으로 뚫고 나가는 것, 즉 공적인 영역으로 진출하는 것을 방해하던 장벽을 허무는 것이었다면, 현재의 방식은 사적인 영역 자체를 정치화하는 방향으로, 돌봄을 국가의 재구성원리로 내세우는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이런 방향전환은 국제결혼, 이주의 여성화라는 변화된 현실을 반영하기도 한다).

나는 돌봄의 가치가 중요하고 돌봄의 사회화가 필요하다는 얘기, 키테이(Kittay)가 제안한 ‘돌봄의 사회적 책임의 원리’에도 공감한다. 하지만 그것이 국가나 제도화를 통해 실현될 수 있다는 생각에는 여전히 공감할 수가 없다. “돌봄을 바탕으로 한 국가”가 현실에서 가당키나 한 걸까?

그러면서 ‘돌봄’이라는 탈근대적 사유가 근대적인 복지국가에 갇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가가 자발적인 결사체들의 역할에 개입할 경우 기존의 자율적인 활동이 제한을 받는다. 이 점은 돌봄의 일종인 지역아동센터가 제도화되면서 ‘공부방’의 역할이 애매해졌다는 점으로 이미 증명된 바 있다. 국가는 시설중심의 과시하는 사업, 목적을 효율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사업을 지원하기 때문에,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활동은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고 운동의 의미도 퇴색되기 쉽다.

그리고 근대이든 후기 근대이든 국가의 폭력성, 특히 한국 국가의 폭력성은 여전하다. 국익을 빌미로 농민의 삶과 농촌공동체를 무참히 짓밟고 경쟁력을 핑계로 시장의 손을 일방적으로 들어주고 있는 한국의 국가권력에 왜 참여하고 어떻게 바꾸겠다는 건지 나의 상식으론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책이 주장하는 돌봄의 가치가 단순히 어느 한 편이 다른 편을 일방적으로 가르치거나 돕는 게 아니고 “돌보고 돌봄을 받는 관계를 구축함으로써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엄성에 근거한 행복한 삶과 사회”(사토 마나부)를 추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국가와 어울릴 수 없다. 통치이건, 요즘 유행하는 거버넌스(governance)이건 국가권력의 속성은 내부를 동질화하고 획일화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돌봄의 가치와 국가의 속성은 일치될 수 없다.

국가는 결코 마을을 만들 수 없다. 국가는 마을의 구역을 정하고 공무원을 임명하며 마을 안에 건물을 세울 수 있지만 그 마을의 자율성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을의 자율성과 자치를 인정하는 순간 국가는 자기 내부에 자신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공간을 허용하는 셈이다. 그런데 자율성과 자치의 권리를 가지지 못한 마을은 마을일 수 없기 때문에 마을과 국가는 공존하기 어렵다.

《다시, 마을이다》와 《가족에서 학교로 학교에서 마을로》는 마을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그 마을이 어떤 것인가를 얘기하지 못한다. 마을이 필요하고 마을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 주장은 옳지만 그 주장을 실현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코뮨주의 선언》이 도움을 줄 수 있을 듯하다.

 

 

코뮨주의, 우정과 기쁨의 공동체?

 

《코뮨주의 선언》은 여러 지식인들이 힘을 모아 만든 <수유+너머>에서 펴낸 책이다. <수유+너머>는 국내에 스피노자, 들뢰즈, 가타리의 철학을 알리고 노마디즘, 유목민 등의 개념을 유행시킨 바 있다. 이 책은 <수유+너머>가 10년 동안 준비한 이론적 노력의 결실이자 맑스,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 발표 160주년을 맞이하는 선언이다.

10년의 연구성과가 축적된 탓인지 낯선 개념들이 예전보다 많이 줄었고 자신의 언어로 얘기하려는 노력이 곳곳에서 드러난다(여전히 기계나 감응, 지층화같은 낯설고 어려운 개념들이 보이지만). 모두 9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6장부터는 코뮨주의 선언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철학적 정리이다(이진경, 고병권이 예전에 했던 작업들처럼 다른 사상가들의 입장을 근거로 자신의 입장을 세우는 글들이다).

《코뮨주의 선언》은 여러 가지 흥미로운 주장들을 코뮨주의라는 하나의 줄기에 꿰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작업이 “완성에 저항하는 사유이고 실천”으로서의 코뮨주의라고 주장한다. 코뮨주의는 완성된 목표가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변형시키는 유연한 틀로 제시되고, 그 내부는 적대의 정치를 넘어선 우정의 정치학, 사적 소유로부터의 ‘떠남’과 ‘탈주’, 타자성을 추방하거나 배제하지 않고 우정의 관계를 맺는 구성의 정치학 등으로 채워진다. <수유+너머>의 코뮨주의는 과감하게 국가에서 떠나 “자본과 국가에 의해 추방당한 광범위한 지대에서 코뮨적 삶의 방식을 구성”하려 한다.

코뮨을 건설하기 위해 망설일 필요가 없다. 고병권씨와 이진경씨는 “중요한 것은 당신의 삶을 바꾸는 것”이고 “코뮨주의는 언젠가는 도달해야 할 세상의 이름이 아니라, 언제든 도달할 수 있고 언제든 실현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이라고 선언한다. 이제 우리 삶의 곳곳이 코뮨의 가능성을 가진다.

이 코뮨은 개체와 집합체의 대립,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넘어서고 분리와 경쟁이 아니라 공생과 공-조(共-調), 협조에 바탕을 둔 공동체이다. 적을 없애기 위해 내부의 차이를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친구를 사귀기 위해 이질성과 타자에 문을 연 우정과 환대의 관계, 코뮨의 활동에 참여하는 한에서 구성되는 공동체, 리더나 중심을 제거하지 않고 각각의 영역이 모두 중심이고 능력을 가진 공동체, “인간과 비인간을 가르는 그 경계를 근본에서부터 변환하는” 공동체이다.

책을 읽고 있으면 참 많은 고민을 하고 상상력을 발휘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렇기에 저자들이 들으면 어리석다 나무라겠지만 이런 코뮨을 현실에 세우기가 참 힘들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많은 내용을 몸과 마음으로 소화하려면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 같고, 그래서 좋은 내용임을 인정하지만 멀게 느껴진다.

사실 코뮨을 얘기하기 위해 어려운 철학적 개념을 쓸 필요가 있을까? 어려운 얘기는 하나도 없지만 《우리들의 하느님》에서 권정생 선생은 우리 시대의 문제가 무엇이고 우리가 어떤 마음(능력이 아니다)을 가져야 하는지를 이미 얘기한 바 있다. 우리시대의 “제국주의와 전쟁과 핵무기와 분단과 독재와 폭력”이, 우리의 이기적인 욕망이 사회와 삶을 파괴하고 있다. 중요한 건 우리의 마음을 회복하고 하느님을 찾는 길이다. “가장 사람다운 삶과 모습이 바로 하느님의 모습”이고 “인간을 사랑함이 곧 하느님을 사랑함이며 인간을 사랑하는 길은 이웃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살도록 하는 길”임을 자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렵게 우정과 환대를 얘기하지 않아도 “가족 중에 누군가 먼길을 떠나면 그날부터 끼니마다 밥을 한그릇씩 떠놓”고 “우연히 집에 찾아오는 나그네가 있으면 기꺼이 대접”하는 마음, “좀 여유가 있는 집에서는 아예 사랑채를 비워놓고 나그네를 받아들”이고 “들판에서 점심을 먹다가도 지나가는 나그네가 있으면 큰 소리로 불러 함께 점심을 먹는” 마음, 고수레와 까치밥, 까마귀밥을 남기는 마음은 자연의 생명체와도 우정과 사랑을 나누었다. 코뮨을 얘기하지 않아도 “산에 사는 노루나 토끼가 마을에 내려오면 절대 잡지 않는다. 그들이 마을에 내려온 이상, 우리 마을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집안에 살고 있는 능구렁이도 우리집을 지켜주는 집지키미가 된다”는 마음은 이미 코뮨을 내포하고 있다. 문제는 우리가 코뮨을 몰라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그런 마음을 이미 잃었고 생존경쟁과 독식의 욕망만이 호소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을의 희망은 살아있나?

 

국가는 신자유주의 현실에서도 잘 살아남았고 오히려 자기 기능의 확대를 꾀하고 있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이런 ‘국가약화의 신화’는 국가를 근본적으로 사유하는 사상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비판을 감소시킨다. 《제국이라는 유령》(이매진, 2007)에서 엘린 메익신즈 우드는 “지구화의 본질은 민족국가가 가진 능력의 쇠퇴가 아니라 지구적 자본을 위해 세계를 조직화하는 민족국가의 독특한 기량”이라고 주장한다. 자본이 세계화에서 이득을 보는 건 사실이지만 그들이 세계를 조직할 능력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드는 “참으로 효과적인 반대투쟁을 하려면 자본의 힘이 모든 곳에 있지만 어디에도 없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국가 안의 중심점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얘기한다. 마을은 국가 없는 곳이 아니라 국가가 지배하는 곳에 자리잡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마을이나 코뮨에 관한 논의들은 이런 현실을 자꾸 비켜가려고만 한다.

그리고 마을의 자치는 스스로 물자를 공급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자급할 수 없는 사회는 자치할 수 없다. 제 아무리 마을을 세우고 특이성이 서로 리듬을 이루는 사회를 만든다 하더라도 그것이 국가 외부에서 존재하려면 자급이 가능해야 한다. 가장 기본적인 먹거리조차 자급하지 못하는 마을이 어떻게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을까? 앞서 살핀 논의들 어디에도 이런 고민을 찾을 수 없다. 농민공동체가 해체되어 가고 있는 상황에서 마을은 어떻게 자치를 할 것인가? 나라의 자치만이 아니라 마을의 자치를 위해서도 자급의 문제는 반드시 고민되어야 한다.

대안은 더 밑바닥에서 나올 수 있고 이미 현실에 잠재되어 있다고 믿는다. 현실에 대한 대안이 어느 순간 대안 없음으로 바뀐 건 대안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대안이 현실과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 속에서, 현실 속에서 대안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자기들만의, 우리들만의 대안으로 자라버렸기 때문이다.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퍽퍽하기 이를 데 없는데 대안을 외치는 사람들은 어느 순간 ‘잘 난 사람들’이 되어버렸다. 진보에 대한 냉소를 넘어 진보에 대한 분노가 폭발한 건 그런 분리 때문이 아닐까? 이제 우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먼저 다독이고 사로잡아야 한다.

탈선하고 탈주한 사람들이 만든 마을이 이 세상에 소금처럼 귀한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마을이 주류가 되려 하거나 벗어남으로 그친다면 그 소금은 소금일 뿐 세상을 이롭게 하는 물질이 되지 못한다.



삶으로서의 민주주의: 자급과 공생의 정치

 

하승우

 

요즘 들어 민주주의의 핵심원리가 대의민주주의라는 주장을 자주 접한다(로버트 달R. Dahl이나 최장집같은 학자가 대표적이다). 대의민주주의를 해석하는 방식이 여러 가지일 수 있지만 민주주의를 대의민주주의로 환원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기원을 망각한 무지의 소치이다. 단순히 서구 민주주의의 뿌리가 아테네의 직접민주주의에 있음을 말하려는 건 아니다. 그런 주장은 민주주의가 민중의 치열한 투쟁을 통해 등장했고 그 투쟁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는 역사성을 잊고 있기 때문이다.

서구에서 민주주의는 지배층이 민중에게 준 선물이 아니다.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왕과 귀족들이 정치를 독점하고 일반 민중을 배제하고 지배하는 현상, 그래서 민중이 공동체의 정치주체로 성장하지 못하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등장했다. 이 민주주의는 집회에 참여한 모든 참여자가 투표권과 발언권을 가지고 몇 시간 동안 논쟁을 벌이는 집회민주주의(assembly democracy)였고, 전문가를 배격하고 시민이 아마추어(idiotai)로 참여하는 평민 민주주의였으며, 모든 시민이 돌아가며 한번씩 공직을 맡는 교체(rotation)의 민주주의였다. 민주주의는 특정 계층이나 전문가가 정치를 독점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순환시켜야 하고 그런 순환을 거치며 민중이 정치주체로 성장하고 자기결정권을 행사하도록 했다.

동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동양에는 민주주의란 말이 없는 대신 민본주의(民本主義)란 말이 있었다. 맹자(孟子)는 “지배받는 백성이야말로 가장 존귀한 것이요, 국가를 떠받치고 있는 신들은 다음으로 존귀한 것이다. 그리고 지배하는 군주는 가장 가벼운 것”이라 “한 나라의 군주(제후)가 그 나라의 사직을 위태롭게 하면, 그 군주는 곧 변혁하여 새롭게 갈아치워야 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어느 날 갑자기 왕이 민중을 위하겠다고 마음을 먹어서 이런 말이 나왔을까?

이렇게 보면 동양이든 서양이든 민주주의는 특정 계층이 정치권력을 독점하고 공동체의 미래를 위협하는 현상을 비판하고 민중의 뜻을 정치에 반영하기 위해 등장했다. 민주주의는 현실의 부조리한 정치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대안이었고, 자신의 삶을 좌우하는 중요한 결정에서 배제되고 않고 주체로 서려는 꿈틀거림이었다. 이런 꿈틀거림을 무시한 채 민주주의를 얘기하는 게 지금의 현실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까?

그래도 대의민주주의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아테네의 직접민주주의가 소수의 민주주의였을 뿐이라며 대의민주주의만이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주장한다. 허나 현대의 대의민주주의에서 정치는 고대보다 훨씬 더 적은 수의 전유물이고 시민의 자격은 제한되며(외국인, 빈민, 이주노동자의 시민권을 생각해 보라!) 정치권력은 민중을 통제대상으로 삼으려 한다. 대의민주주의가 고대의 민주주의보다 더욱더 민주적이라는 점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

더구나 대의민주주의를 발전시켰다던 서구 선진국들이 제국주의 전쟁을 일삼고 식민지를 늘렸다는 점은 그 민주주의가 타인의 땀과 피를 딛고 개화했음을 증명한다. 제 아무리 멋들어진다 한들 그것이 타자의 땀을 착취하고 피로 억누른 것이라면 그것이 어떻게 보편적인 가치를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역사적 맥락을 무시하고 그런 민주주의를 찬양하는 건 무지보다 더 심한 문제이다.

그리고 서구의 대의민주주의가 도입되지 않았던 때에 우리에게는 고유한 정치나 민주주의의 경험이 없었다는 말인가? 만일 그렇다면 우리에게 민주주의나 정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그것은 외부의 것을 무조건 배우고 수용해야만 가능한 것이 된다. 하지만 정말 그러한가?

서구가 근대로 접어들던 시기에 많은 사상가들은 ‘고대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앉은 근대라는 난쟁이’라는 은유를 자주 썼다. 근대의 사람들에게는 고대라는 유산의 크기가 너무 컸다. 스스로 움츠려 들지 않기 위해 그들이 썼던 은유가 바로 고대인들보다 더 높은 곳에서 태어나 더 많이, 더 멀리 볼 수 있는 난쟁이였다. 비록 은유를 썼지만 근대인들은 결코 고대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거인이 남겨놓은 정치의 원리는 무엇일까?

이 글은 대의민주주의를 고집하는 사람들이 우리의 경험에 스며있는 민중의 정치적인 잠재력을 깨닫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나아가 반정치적 또는 비정치적이라 여겨지는 농민의 삶과 농촌공동체에서 실현되었던 중요한 정치원리를 발견하려 한다.

 

 

자연상태의 발명과 국가에 갇힌 정치

 

최근 서구 학계에서 유행하는 정치이론들은 모두 자연상태를 발명했던 홉스(T. Hobbes)에서 논의를 시작한다. 제국과 다중을 주장하는 네그리(A. Negri)나 호모 사케르(homo sacer)라는 존재에 주목하는 아감벤(G. Agamben) 모두 홉스를 비판하면서 자신의 논의를 시작한다.

네그리는 『다중』(세종서적, 2008)에서 홉스가 “부르주아지에게 적합했던 사회체의 성격과 시민권의 형태”를 정의하면서 “국민국가의 형태로 유럽에서 발전할 주권의 형태”(22쪽)를 규정했다고 주장한다. 홉스는 자연상태가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상황이라고 전제하고 질서를 잡을 강력한 주권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런 질서에서 합리적인 시민은 무질서로 이끌 주권을 국가에 양도하고 규율 잡힌 질서 속에서 자신의 소유에만 신경을 쓰면 된다. 지배를 받는 사람들이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지키며 살아야 할지는 국가주권이 결정한다. 홉스는 그런 자연상태가 실제로 존재했는가보다 주권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에 논의를 집중시켰다. 이 과정에서 정치의 물음, 즉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사라졌고 무엇이 각자의 이득을 더 많이 보장할 것인가라는 계산만이 남았다.

그런 점에서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새물결, 2008)에서 “홉스의 자연상태란 국가의 법률과는 무관한, 법 이전의 상태가 아니라, 그러한 법을 구축하고 그러한 법 속에 정주하는 예외이자 경계선”(216쪽)이라고 말한다. 홉스에게 인간은 서로에게 늑대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국가가 사라지면 언제든지 사회는 자연상태로 복귀한다. 주권이 없는 곳에는 오로지 폭력과 죽음뿐이다. 바로 이런 끔찍한 예외상태를 빌미로 국가는 언제든지 민중에게 자신의 의지를 강요할 수 있었다. 자연상태를 전제하는 이상 국가를 제외한 정치는 불가능했다.

네그리와 아감벤의 논의는 홉스가 자연상태를 발명하고 그것을 전쟁과 동일시함으로써 근대의 국가주권을 정당화시켰다고 본다. 홉스는 주권자와 계약을 맺는 인간의 동의가 이성과 언어, 이득과 손해의 계산에 따른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기 때문에, 주권은 개인의 자발적인 동의라는 ‘착각’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런데 이 자연상태는 국가와 무질서의 경계를 규정하는 국가주권을 정당화시켰을 뿐 아니라 민중이 정치의 주체로 ‘성장’하는 것을 가로막았다. 홉스는 시민들의 정치적인 성장을 돕던 사회적 관계를 지워버리고 그들을 이기적인 개인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래서 국가권력에 도전하는 순간, 언제나 무질서라는 최악의 상태가 떠오른다. 국가를 넘어선 대안, 국가를 배제한 대안은 자연상태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날 수 없다. 민중의 대안적인 상상력은 국가라는 틀 속에 갇혔다. 민주주의를 주권으로 생각하는 순간 우리의 정치적 상상력은 국가라는 틀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진정 그런 자연상태가 존재했는가? 크로포트킨(P. Kropotkin)은 『만물은 서로 돕는다』(르네상스, 2005)에서 그런 상태란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원시사회의 씨족공동체에는 서로 돕고 사는 풍조가 만연했고, 독립된 가족과 사유재산의 출현에도 공동체의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지나치게 집중된 부를 재분배하는 제도들(예를 들어, 포틀래취)이 만들어졌다. “인간의 삶에서 어떤 시기에도 전쟁이 정상적인 상태인 적은 없었”고, “형평성, 상호부조, 상호지지 등의 개념은 대중들이 자신의 사회조직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작용해왔고, 이는 포악한 신정제나 독재정치에 복종하고 있을 때조차 발휘”되었다(149~150쪽).

시간이 흘러 과거의 씨족 공동체가 사라지고 촌락공동체가 만들어진 뒤에도 상호부조의 생활양식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특히 촌락공동체는 “공동경작이나 여러 가지 형태로 가능한 상호지지, 폭력으로부터의 보호, 지식이나 인종 간의 결속 그리고 도덕 개념을 발전시키기 위한 연합”(163쪽)이었고, 민회라는 고유한 정치질서를 마련했다. 농민들의 민회는 인공적인 정치질서가 아니라 협동노동과 공동소유에 기반한 자연적인 정치질서였다. 민회는 촌락 공동체에서 가장 강력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고, 민회를 통해 민주적인 의사소통과 공동의 의사결정이 이루어졌다.

근대국가가 등장해 촌락공동체들을 억압하고 해산시킨 뒤에도 촌락 공동체를 재건하려는 시도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촌락공동체 제도는 땅을 경작하는 사람들의 요구와 생각에 매우 잘 맞아 떨어”졌기에 “공동체 생활을 하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관습과 습속”이 농민의 삶 속에 녹아들어 있었기 때문이다(281쪽). 그래서 크로포트킨은 근대국가의 주권을 넘어설 대안이 공유제와 농민에게 있고 “현재 만연되고 있는 무모한 개인주의 체제하에서도 농민 대중들은 상호지원이라는 유산을 충실하게 유지하고 있음”(294쪽)을 주목했다.

위에서 살펴봤듯이, 홉스의 자연상태는 옛날부터 내려온 전통적인 질서를 무너뜨리고 근대국가의 주권을 정당화하며 민중의 정치적 성장을 가로막기 위해 ‘발명된 개념’이다. 근대국가는 개인의 소유관계를 제한하고 땅의 공유와 공동작업을 통해 공동체 전체의 성장을 추구했던 공동체의 역사를 은폐하고 전통을 끊으려 했다. 그리고 사회계약에 따른 대의민주주의 역시 민중의 관심을 개인적인 소유로 전환시키고 정치를 특정 계급이 독점하면서도 지지를 받기 위한 장치였다. 거대하게 세워진 의사당이나 행정부는 민중의 일상생활과 완전히 분리된 공간이었다.

하지만 촌락공동체의 정치질서는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분리되지 않았다. 민회라는 정치공간은 의회처럼 민중의 일상생활과 분리된 인공적인 공간이 아니었다.

 

 

소농의 삶과 자급․공생의 정치

 

모든 존재는 그 존재를 실현하기 위한 윤리적인 힘을 가지고 있고 그 힘이 바로 정치의 생명력이다. 자연히 농민의 삶, 특히 소농의 삶은 그 삶에 맞는 정치원리를 가지고 있었다. 농민은 땅을 일구며 땅과 함께 성장하기 때문에 자연의 지혜를 알고 있었고 홉스처럼 자연을 일방적인 소유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고 자연상태를 전쟁으로 몰고 가지도 않았다.

오히려 농민은 인위적인 변화를 거부하며 자연적인 평화로움에 자신의 삶을 맞추려 했다. 자연에 순응하면서 농민은 “폭력에 대해서는 비폭력으로, 권력에 대해서는 무저항의 자세로” 맞서고 “인간의 속성으로서 보편적으로 내재하는 폭력이나 지배욕을 제어하는 기능”을 자연스레 배웠다(유킨도, 130쪽). 스스로 땅을 일구어 먹고 살 수 있다면 폭력이 필요치 않았다. 그리고 물을 대고 김을 매는 농사일은 농민들이 서로 돕고 함께 모여서 중요한 결정을 내리도록 했다.

그래서 소농의 삶에서는 ‘자급(自給)’과 ‘공생(共生)’이 중요한 정치원리로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자급을 뜻하는 아우타르케이아(autarkeia) 또는 아우타루키(autarky)는 공동체의 가장 기본적인 질서를 뜻했다. 그런데 이 자급은 경제적인 자립성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의미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한 사람의 시민이 된다는 것은 납세의 의무를 지니고 투표권을 갖는 것 외에도 공공생활이나 군사활동 등 모든 기능에서 직접적이고 적극적으로 상호협력한다는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민이 중요한 공동체의 결정에 반드시 참여해야 했기 때문에 공동체의 규모는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그 규모를 유지한다고 해서 농민의 삶이 어떠한 변화도 거부하는 폐쇄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농민은 여러 가지 다양한 생명 종이 함께 공존하는 것이 “결코 토양에 부담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토양을 비옥하게 한다”(유킨도, 85쪽)는 점도 생활을 하며 자연스레 깨달았다. 여러 다양한 생명체들이 공존하는 삶이 땅을 비옥하게 만들듯이, 여러 사람들의 서로 보살피는 삶이 공동체를 튼튼하게 한다는 점도 분명했다.

개인적인 소유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생산수단이나 생산물을 독점하고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이 결국에는 자신의 삶도 망가뜨린다는 점은 삶에 깃든 지혜였다. 그래서 농민의 삶에서는 발명보다 그런 삶의 지혜를 ‘발견’하는 과정이 더욱더 중요했다. 그 발견은 얼마나 놀라운가? “제4의 눈은 그곳의 풍경 속에 조상의 영혼이 참여함을 확실히 파악하고, 타관 사람의 눈이 미치지 못하는 신비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다. 또한 일상생활에서 흙 위에 아름다움을 새기고, 무심히 그것을 감상하는 행위를 반복하고 있다. 농심(農心)이란 이러한 것이 아닐까.”(유킨도, 151쪽)

이런 깨달음이 있었기에 고대 그리스의 농민공동체는 지중해 세계의 확대와 상업의 발전을 거부했다. 울프 선드호슨(Ulf Sundhaussen)이 지적했듯이, 당시 농민들은 상공업에 종사하는 중간계층의 미덕이 민주주의와 어울리지 않고 오히려 불평등을 만들어서 정치의 정상적인 작동을 위협한다고 봤다. 상업상의 경쟁은 외부 공동체와의 전쟁을 불러왔고, 공동체 내부에서도 빈곤을 심화시켰기 때문이다.

한국의 농민공동체도 마찬가지였다. 주강현은 한국 농민공동체의 핵심을 조선 후기에 발전했던 ‘두레’에서 찾는다. 보통 30~50호 정도의 가구가 모인 두레는 단순히 서로 일을 도와주는 모임이 아니라 “사유적 요소를 극복하고 공유적 계기와 밀접하게 결합”된 정치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왜냐하면 두레는 단순히 서로 일을 돕는 것에 그치지 않았고 마을의 공유재산을 확대시켰기 때문이다. 두레의 구성원들은 함께 일하며 생긴 수익금을 모아 자산을 늘리고 일정한 액수를 반드시 적립했다. “두레가 분화된 이후에는 각자 노동의 대가를 찾아가는 방식으로 바뀌었지만, 조선 후기의 두레에서는 공동체적 강제가 강했기 때문에 반드시 일정 부분을 공동 적립시켜야 했다.”(99쪽) 그리고 18, 19세기에 지배층이 동계를 하나의 납세단위로 묶어 공동납(共同納)을 강화하자, 이런 세금부담은 주민들을 단합시켰고 동중답(洞中沓)과 같은 마을의 공동재산을 확대시키기도 했다. 이 공유재산은 두레와 많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공유재산은 농민들의 자급과 공생을 위한 토대를 만들었다.

그리고 두레는 촌회와도 연관되었다. 두레는 “마을의 정신적 상징인 마을굿을 모시며, 두레를 조직․운영하고, 동산(洞山) 등 공유재산을 거느리고 있으며, 촌회(村會)를 열어 공동의 일을 토의 결정”했다(84쪽) 두레는 마을굿과 공동노동의 조직과 운영, 공유재산의 관리를 위해 촌회라는 정치기구를 뒀고, 그 속에서 농민들은 정치를 경험했다(호남지방의 경우에 두레는 모정(茅亭)이라는 공간을 만들기도 했다). 때때로 이 두레는 양반층의 향촌지배를 거부하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따라서 한국의 농민공동체를 양반들이 지배하던 봉건적인 공동체로 보는 편향된 시각은 그 내부의 정치적인 움직임을 파악하지 못한다. 양반들이 마을을 지배했다고 해도 그것이 고대부터 내려온 농민공동체 자체를 대체하지는 못했다. 양반이 주도하던 향회도 단순히 농민들을 지배하는 조직이 아니었다. 때때로 향회는 “대소민을 막론하고 빈부 모두 곤궁해지는 위기적 상황에서, 끝없는 관의 가렴에 대항하는 데 있어서 생존을 위하여 상하가 연대”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철종 때 괴산에서는 수령의 자의적 결가책정에 대하여 반대하는 향회가 29차례나 열렸으며 각처에서 관의 부조리한 조처에 굴종하지 않고 통문을 돌려 향회를 소집, 단합된 여론을 배경으로 수령에게 시정을 요구하는 ‘읍소(泣訴)’를 감행하고 여의치 않으면 다시 감영에 진정하는 ‘의송(議送)’에 나서는 등 향회는 점차 반관적 저항을 위한 모임의 장소가 되었고 드디어 민란의 온상 구실을 하게 되었다.”(김용덕, 40쪽) 이처럼 마을 내에는 봉건적인 지배원리와 농민의 자치적인 정치원리가 대립하고 있었다.

이처럼 동서양 어느 곳에서나 농민공동체는 자기 나름의 공동체적 정치질서를 유지하고 있었고, 그런 질서는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생활의 자연스런 조건으로 만들어졌다. 농민의 삶은 자급과 공생에 바탕을 둔 정치가 자율적인 삶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임을 말해준다. 국가가 없는 곳에서 농민들은 공동체를 꾸리고 자급하며 평화로운 삶을 누리고 있었고 삶과 일치하는 정치원리를 실현했다. 농민의 삶으로 다져진 거인의 정치는 그렇게 오랜 세월을 지탱해 왔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근대국가의 성립은 이런 소농의 정치질서를 파괴하고 대체하기 시작했다.

 

 

식민지와 농민공동체의 파괴

 

농민의 삶은 통제할 수 없는 범위의 확장을 거부했다. 화폐경제에 편입되기 전에는 “가족 한 사람당 농지가 얼마나 확보되는가 하는 것이 절실한 문제”였고 “자급자족 단계에 있는 농업에서는, 항상 가족을 부양하기에 충분한 농지가 얼마나 확보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농민의 최대 관심사”(유킨도, 108쪽)였다. 하지만 화폐경제는 이런 농민의 삶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었고, 서구 제국주의 국가에 의한 식민지화는 농민공동체를 체계적으로 파괴시켰다.

『농민의 도덕경제: 동남아시아의 반란과 생계』(아카넷, 2004)에서 제임스 스콧(James C. Scott)은 지주와 국가에게 얼마나 빼앗겼나보다 자신에게 ‘얼마가 남는가’를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 농민의 생계윤리가 전통적인 농민공동체를 지배해 왔다고 본다.

이런 농민의 윤리는 호혜적인 제도들을 통해 실현되었다(스콧은 이런 호혜적인 제도들이 평등주의적이거나 이상적인 제도보다 노동력이 부족한 곳에서 노동력을 붙들어두려는 수단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어쨌거나 그런 생계의 도덕윤리는 “빈민에게는 생계의 사회적 권리가 있다는 것”과 “엘리트는 가난한 자들의 생계를 위한 예비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최대한 공식화는, 엘리트는 결핍의 시기에 종속자들의 생계유지 요구를 들어주어야 할 적극적인 도덕적 의무가 있다는 것”(54쪽)을 분명히 했다. 마을의 공유재산은 과부나 고아들이 살아가도록 지원했고 “정상적인 시기에 ‘가장 약한 자의 생존’을 보장”(67~68쪽)했다.

하지만 서구 제국의 식민지화는 이런 도덕경제의 기초를 근본적으로 흔들기 시작했다. 식민권력은 공유지를 박탈했고, 세계시장 편입에 따른 곡물가격의 불안정은 생계를 위협했다. 이런 변화는 농민공동체에도 영향을 미쳤다. 마을의 임야나 공유지가 사라져 마을 공동체의 보호틀이 사라졌고, 마을의 부유층은 빈곤층의 요구를 무시하며 사법기관이나 경찰을 동원해 자신의 지위를 유지했으며, 시장가격의 변동과 인구증가로 마을의 재분배 압력은 효력을 잃었다(89~90쪽). 농민의 자급적이고 서로 보살피며 살아갈 토대 자체가 붕괴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도덕경제를 무너뜨리면서 식민권력은 세금으로 농민을 착취했다. 인두세와 토지세에 대한 농민의 저항이 거셌지만, 식민권력은 자신들의 재정을 유지하기 위해 세금의 범위를 더 넓혔다. 과거의 지배자들과 달리 “왕권에 저항할 수 있었던 지역 수장들과 타협할 필요가 없었”(132쪽)던 식민권력은 근대적인 무기와 상비군을 도움을 받아 저항을 잠재웠다. 그리고 식민권력은 “분산된 지역적 관습과 절차를 좀더 동질적인 전체로 통일”시키기 위해 중앙집중화된 강력한 관료제도를 만들었다. 식민권력은 농민들의 경제적인 삶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삶도 짓밟았다.

식민지 국가의 등장과 농민공동체의 붕괴는 스콧이 관찰했던 동남 아시아의 특수한 상황이 아니었다. 한국에서도 상황은 동일하게 진행되었다. 일제 식민권력은 한국 사회에 배타적 소유권을 확립했고 공유지를 박탈했다. 1919년대에 시행된 토지조사사업은 배타적인 토지소유권을 확립했고, 많은 농민들이 소유권을 잃었다. 두레와 촌회의 전통 역시 식민권력의 침투로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일제 식민권력은 전쟁 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세금을 걷고 이를 위해 강력한 관료제도를 도입했다.

동남아시아와 한국의 사례는 농민의 삶과 농민공동체의 정치원리가 어떻게 짓밟혔는지를 잘 보여준다. 식민권력은 최소한의 동의과정조차 거치지 않은 채 농민들을 수탈하고 공동체를 붕괴시켰다. 그러니 식민지를 경험한 곳에서 근대정치로의 전환과정은 매우 폭력적이었다. 그리고 이런 국가와 자본의 폭력은 식민지에서 해방된 이후에도 이어졌고 민중의 정치적 잠재력은 끊임없이 그 폭력에 시달렸다.

 

 

민주주의의 혁신이 필요하다!

 

민주주의의 비극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권력이 공유지를 박탈하고 공동체를 붕괴시키면서 시작되었다. 세금을 걷기 위한 관료체계와 내부의 반란을 막기 위한 공권력이 강화되면서 국가는 넘어설 수 없는 장벽이 되었다. 전통적인 공동체나 농민공동체의 정치원리는 낙후되거나 봉건적인 유산으로 매도당하고 선거를 통한 대의민주주의만이 유일한 대안이 되었다. 민중의 몸 속에 각인된 정치적인 잠재력을 두려워하기에 권력을 가진 자들은 민중의 삶과 정치를 분리하려 한다.

그런 분리의 수단이 바로 제도화이다. 그들은 언제나 민주주의를 제도로 가두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인가? 세계 역사를 통틀어 근대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제도로 구현된 적이 있었나? 민주주의를 특정한 제도로 환원하려는 시도가 계속 있는 것은 민주주의라는 정치현상을 고정된 것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함석헌이 얘기했던 바는 귀담아 들을 만하다. 함석헌은 민중을 지배하는 기풍과 제도의 영향을 이렇게 설명했다. “육신이 사는데 집 옷이 있듯이 제도란 사회생활을 하기 위한 울타리다. 집은 닫기운 것이요, 닫겼기 때문에 집이지만 집 안에 오래 있으면 공기가 흐리고 독소가 생겨 사람이 죽게 되듯이 제도는 고정한 것이요, 고정한 것이기 때문에 사회생활을 가능하게 하지만 제도가 오래면 사회는 반드시 해를 입는다. 그것은 생명은 쉴 새 없이 자라는 것인데 제도는 자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사회를 언제나 건전하게 발전시키려면 제도를 끊임없이 고쳐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사회에 강건한 기풍을 세울 필요가 있다 할 때는 실질적으로는 사회제도의 혁신을 말하는 것이다. 제도를 그냥 두고 개선을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다.” 제도로 복귀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의 성장에 맞는 제도의 혁신이 필요하지 않을까?

따라서 이제 민주주의의 과제는 단순히 대의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 사이의 선택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제도가 아니라 우리의 삶이 어디에 뿌리를 내려야 하는가이고 제도는 그런 성장을 반영하는 근본적인 혁신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디서 우리의 성장을 위한 디딤돌을 찾을 것인가? 선드호슨은 “서구식 처방은 무시하고, 자신들의 과거의 결함으로부터, 또 산마리노 같은 나라의 역사로부터 배워서, 다수 인민 즉 농민계급을 민주적 정치 속으로 참여시키는 길을 선택”(169쪽)하자고 얘기한다. 그렇다, 1만년 이상을 이어온 자급자족과 지속의 공동체로 다시 돌아갈 방법은 결코 과거를 낭만적으로 회상하는 반동사상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오랜 전통을 복원하고 주권의 논리로 민중을 억압하는 국가를 넘어설 대안일지 모른다. 따라서 무기력하게 대의민주주의의 필요성을 주장할 게 아니라 민중의 역동적인 삶 속으로 들어가 그 속에 녹아있는 정치적 잠재력에 주목해야 한다.

농민의 정치원리를 따르는 정치질서는 인공적이거나 가공의 정치상황을 발명하거나 상상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그것은 1만년 이상 우리 유전자 속에 각인되어온 정치원리를 회복하는 것을 뜻한다. 자연상태에 대한 학습된 두려움이나 국가주권에 대한 의존을 버리고 스스로 자급과 공생의 길을 개척하면 그것은 결코 불가능한 상상이 아니다. 촛불저항이 그 길을 가리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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