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렌트, 수용소와 전체주의에서 탈출할 방법을 찾다

 

아렌트라면 어땠을까? 아렌트가 지금 한국에 산다면 정치를 어떻게 볼까? 이명박 정부 시절부터 독재나 전체주의라는 단어가 다시 공론장에 등장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되었을 때 어떤 작가는 이를 나치의 등장에 비유하기도 했다. 이 비유가 적절한가 아닌가의 여부는 선거를 통해 집권했고 51%의 국민이 박근혜씨를 지지했다는 사실로만 판단될 수 없다. 왜냐하면 히틀러가 권력을 잡았던 독일 총선에서도 나치의 지지율은 44%였기 때문이다. 이 지지율을 등에 업고 합법적으로권력을 잡은 히틀러는 나치를 제외한 다른 정당들을 해산시키고 여론의 입을 틀어막으며 전체주의를 실현했다.

그리고 아렌트는 선거를 무시하지 않았지만 선거가 곧 정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외려 근대 정당과 선거가 정치의 가능성을 차단할 것이라 우려했다. 아렌트에게 정치란 시민들이 공개된 장소에서 공적인 의견을 서로 나누며 자신의 독특함을 드러내는 것이고, 정치는 진리의 영역이 아니기에 옳고 그름에 대한 정답을 쫓지 않는다. 선거에서의 지지율보다는 공론장을 파괴하는 정치’, ‘말과 행동을 부정하는 정치’, ‘사유하지 않고 정답만을 강요하는 정치’, ‘차이를 부정하고 효율성만을 강요하는 정치의 등장이 정치를 가늠하는 잣대이다.

이 책에서 우리가 아렌트를 읽고자 하는 이유도 단순한 지적 호기심보다 우리가 사는 시대와 사회를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논의하려는 바람일 것이다.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그 체제 너머의 정치를 보려는 사람에게, 정치와 민주주의가 어떻게 실현되는지 궁금한 사람에게, 개인주의의 냉소나 전체주의의 열광에 휘말리지 않으려는 사람에게 아렌트는 좋은 길잡이이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는 국내외의 이런저런 자리에서 많이 인용되는 사상가이다. 하지만 그 사상을 직접 접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아렌트의 언어와 사상이 낯설기도 하거니와 국내에 소개된 번역서들이 낯설음과 어려움을 더한다. 그리고 사상이란 현실과의 치열한 대면에서 나오는 것인데, 아렌트의 사상이 나오게 된 맥락은 책으로 이해하기 어려다. 마찬가지로 아렌트의 개념들을 한국 현실과 어떻게 맞닥뜨리게 해야 할지 막막한 면도 있다. 어려운 책을 읽다보면 아렌트를 공부하는 게 지금 우리 현실을 이해하는데 얼마나 도움이 될까, 이런 생각도 들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이런 관심과 의문에 답하려는 시도이다. 아렌트가 궁금한 사람과 아렌트를 활용하고픈 사람 모두에게 말을 걸어보고 싶었고 아렌트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래서 제 I부와 제 II부로 나눴고 관심에 따라 제 I부와 제 II부를 읽는 순서를 바꿔도 좋다. 아렌트의 사상을 조곤조곤 보고 싶은 사람은 제 I부부터, 아렌트의 관점으로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궁금한 사람은 제 II부부터 읽어도 된다. 따로 읽어도 될 만큼 아렌트에 관한 기본적인 내용들을 설명하면서 글을 쓰려 노력했으니 두 가지 맛 파스타 또는 짬짜면 정도로 생각하시면 되겠다. 한 쪽의 깊은 맛을 느끼려고 하는 사람에겐 미흡할지 모르겠으나 어느 걸 선택할지 망설이는 사람에겐 여러 고민을 덜어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I부는 수용소와 공론장이라는 아렌트 사상의 고갱이를 다루고, II부는 아렌트가 평생을 걸고 맞섰던 전체주의라는 화두에 주목하고 그 문제의식을 한국사회에 투영시켜 본다. 아렌트에게 수용소와 전체주의는 평생을 따라다닌 악몽이었다. 그 악몽을 끄집어내는 것은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의 악몽이 이와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은 무슬림이라 불렸다. 아랍 사람이나 이슬람 교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삶의 의지를 잃어버리고 엎드려 기도하는 듯 사는 사람들을 가리키던 수용소의 은어였다. 수치심마저 잃어버린 채 마치 물건처럼 취급되는 사람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보면 측은함과 동정을 느끼겠지만 우리는 그런 삶과 정말 다른 삶을 살고 있을까? 정치로부터 도피해서 개인적인 생활에만 관심을 가지고, 바로 그 때문에 주어진 질서에 수동적으로 복종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가? 권력을 구성할 용기나 의견이 없으면서도 내가 주권자라며 공허한 호기만 부리는 건 아닐까? 사람들도 자주 만나고 다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같은 편끼리 똘똘 뭉쳐서 비슷한 각도로 세상을 재단하고 어긋난 부분에 대한 불만만 쏟아내는 건 아닐까? 나도 당당한 주체라며 자신을 내세우지만 우리가 공통의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서로 공유하는 감각을 잃어버린 채 혼자 우두커니 서 있는 건 아닐까? 고립되어 있으면서 고독한 척 위선을 부리는 건 아닐까? 수용소는 물리적인 공간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타자와 만나고 헤어지는 방식을 규정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I부는 이런 물음들에 대한 답을 고민할 수 있도록 아렌트의 사상을 재구성했다.

그리고 전체주의는 단순히 독재자가 지배하는 상황을 뜻하지 않는다. 전체주의는 비공식 조직이 공식기관의 힘을 대체하고 누가 권력을 행사하는지, 어떤 일에 대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도통 알 수 없게 만드는 지배구조이다. 시민들의 일상생활을 감시하면서 내부의 적을 만들어내고 불안을 자극하며 결국에는 서로가 서로를 고발하도록 만드는 비밀경찰이 암약하는 체제이다. 실제 현실이 아니라 조작된 이데올로기로 세상을 바라보도록 만들고 우리 자신도 이미 규정된 지위로만 이해하도록 강요하는 것이 바로 전체주의이다.

이 책을 쓰는 동안 한국사회에서 큰 비극이 발생했다. 바로 세월호 참사이다. 295명의 승객이 사망했고 9명이 아직도 바다 속에 잠겨 있다.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난 안산시 단원고의 학생들과 먹고살기 위해 배에 올랐던 사람들이 이 참사로 떼죽음을 당했다. 놀라운 사실은 이 참사에 책임을 진 정치인이 아무도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무엇이 원인인지, 왜 사고가 참사로 이어졌는지, 진상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다. 정부는 자신을 믿고 맡겨달라고 하지만 사실을 은폐하고 유가족들의 요구를 무시할 뿐 공정하고 투명한 절차를 마련하고 있지 않다. 이런 정부 앞에서 유가족과 시민들은 다시 한번 극심한 무기력을 경험하고 있다. 이런저런 소문만 무성할 뿐 정확한 정보가 없는 상황에서 시민들은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자식과 가족, 이웃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절규와 몸부림에 가만히 있으라고, 교통사고일 뿐이라고, 정치적인 선전이라고 비난하는 이들과 우리는 정말 같은 세계에 살고 있는 걸까? 시민들이 선출한 정부가 시민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시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할 때, 시민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끔찍한 세계전쟁과 정부의 거짓말, 폭력이 난무했던 20세기를 겪었던 아렌트는 이런 경우에 어떤 이야기를 할까? II부는 이런 물음들에 대한 답을 고민할 수 있도록 한국의 현대사를 되짚어본다.

아렌트를 읽으며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1987년 민주화나 1993년 문민정부의 수립, 1997년 국민의 정부, 2003년 참여정부의 수립은 시민이 새로이 정치를 시작할 수 있는 세계를 부활시켰을까? 만일 그러하다면 왜 아직도 우리에게 정치는 부정하고 타락한 것이거나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어떤 무기력한 것으로만 느껴질까? 어디서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한국의 정치는 이렇게 지지부진할까?

글쓴이들은 이런 물음들에 조금이라도 실마리를 주고자 노력했다. 글쓴이들은 길잡이로서 정치의 부활을 모색하는 이 흥미로운 여행에 앞장선다. 혹시 몰라 두 명이 지도를 함께 그렸고, 그래도 글쓴이들의 지도가 완벽한 것이라 장담할 수는 없기에 최대한 돌다리를 두들겨보며 가려 했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아렌트의 원문에 바탕을 두고 논의를 이끌어가려 했다. 가능하면 위태롭고 험난한 길을 피하려고 했지만 그 길을 지나지 않으면 다음 길로 이어지지 않는 곳도 있으니 힘들어도 같이 손을 잡고 지나갈 수밖에 없다. 각 장의 마지막에 함께 읽기와 해설을 둔 것은 우리와 손을 잡고 함께 가고 있다는 사실을 독자들이 확인하기 위한 장치이다. 물론 때로는 길잡이를 따르지 않고 내키는대로 무작정 걸어보는 것도 여행을 즐기는 묘미일 수 있다. 그러니 길잡이에게서 여행의 모든 재미를 찾으려고 하지는 말기를... 다만 글쓴이들이 길잡이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는지를 헤아리는 일은 독자들의 몫이다.

이 책은 아렌트에 관한 하나의 해석이고, 아렌트가 강조했듯이 다양한 소리들이 모여 하나의 화음을 이뤄가는 합주(action-in-concert)’, 두 사람의 합주이다. 이 합주가 얼마나 성공적일지는 합주를 듣는 독자들의 몫이다. 그리고 합주를 들으며 또 다른 합주를 만들어가는 것 역시 독자들의 몫이다. 깊은 바다에 홀로 들어가는 건 두려운 일이기에 이 책은 작은 불빛만 밝혀 놓았고 직접 들어가 텍스트를 건지는 작업은 독자들의 몫이다. 이렇게 독자들에게 많은 몫을 밀어놓는 무책임한 저자들이 있을까 싶겠지만 그렇게 아렌트를 접근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모쪼록 즐거운 여행이 되길 빈다.

글을 쓰는 두 사람은 학교에서 같이 아렌트 세미나를 했던 사람이기도 하고 땡땡책협동조합에서 아렌트에 관한 독서회를 함께 진행하기도 했다. 이 책은 두 사람이 처음 호흡을 맞춰본 결과물이자 충청북도 옥천군으로 함께 이사와 간간이 고민도 나누고 밥도 나누며 만든 성과이다. 지역출판의 불씨를 지피고 있는 한티재에서 이 책을 내게 되어 또 기쁘다. 모두 고마운 일이다.

 

지금 근원적으로 되풀이되는 물음, 국가란 무엇인가
한 세기 전의 한 아나키스트가 일깨우는 통렬한 비전

아나키즘 정치 이론에 중대한 공헌을 한 역사적 문헌
격동의 시대를 관통하며 23년에 걸쳐 씌어진 대화

아나키스트 조르조가 어느 모퉁이 카페에서
열일곱 밤에 걸쳐 다양한 인물들과 어울려 나누는
국가와 사회에 관한 거침없는 논쟁

“자본주의와 중앙집권화된 국가가 미치는 폭력의 정점에 사는 우리에게
이 책은 무엇이 사회의 근본인지를 잘 보여준다”


【 2014년 4월, 세월호 사건 이후 많은 사람들이 정부와 국가의 역할에 의문을 던지고 있다. 시민들의 촛불집회 현장에서 “국가가 책임져라”, “누구의 정부인가”,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글귀를 종종 접한다. 어떻게 보면 이 책은 이 질문을 먼저 풀어야 했던 과거 한 아나키스트 선배의 이야기이다. 외국의 이야기로만 들을 수 없다. 봉건제도와 외세에 맞서 농민들이 무기를 들었던 갑오년이 120년을 돌아 지금 우리의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당시 무장봉기했던 동학 농민군의 고민을 어떻게 이어가고 있을까? 우리는 당시의 농민들보다 더 나은 삶, 더 좋은 삶을 살고 있을까? 그렇지 못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 책은 여기서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만을 헛되이 되풀이하지 않는다. 인민의 삶을, 우리가 원하는 사회의 모습을, 그것을 구성하고 운영할 방법을 근원적으로 고민하게 한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자신이 좋아하는 삶을 만들 수단을 가진 사회’을 만들어나가기 위한 비전이라고 할 수 있다. 】

『국가 없는 사회』(영어판 『At the Cafe: Conversation on Anarchism』, 2005)는 지금처럼 국가 혹은 정부 시스템에 대한 문제제기가 가득한 때에, 우리가 바라고 만들어나갈 수 있는 새로운 사회 시스템에 대한 실천적인 비전을 담고 있다. 이 책은 1897년부터 1920년까지, 23년에 걸쳐 이탈리아 아나키스트인 에리코 말라테스타가 수배와 구속을 거듭 겪으며 집필한 원고들로, 카페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씌어졌으며, 국가폭력의 본질을 고발하며 국가 없는 사회 구상의 비전을 그려낸다.
이 책의 집필 목적은 분명하다. 인민이 스스로 힘을 기르고, 생활의 수단을 가지고, 사회를 구성하자는 점을 설득하고 그러한 운동을 선전하기 위해서다. 이 목적을 위해 읽기 쉬운 대화 형식으로 글을 썼고, 다양한 입장을 대변하면서 아나키스트의 입장을 명확히 밝히고자 치안판사, 부르주아지, 노동자, 자영업자, 공화주의자, 대학생, 군인 등을 대화 상대로 등장시켜 말을 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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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코 말라테스타라는 이름은 우리에게 생소하다. 그는 일찍이 학교를 떠나 혁명가의 길을 걸었고 여러 차례 감옥살이를 했으며, 무장봉기를 이끈 지도자, 총파업을 꿈꾸며 인민을 조직한 활동가이면서 평생 일을 멈추지 않은 노동자였다. 바쿠닌, 크로포트킨, 엠마 골드만과 함께 아나키즘 운동을 이끌었고, 사상과 행동, 설교와 실천이 일치하는 혁명가이자 상냥하고 따뜻한 심성의 인간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창 아나키즘 선전과 조직화가 왕성할 당시에는 ‘이탈리아의 레닌’(말라테스타는 자신은 결코 지배자, 폭군이 아니라며 그러한 표현을 거부했다)으로 추앙받기도 했다.
이 짧은 책에는 그의 뜨겁고 치열하던 생애가 잘 녹아들어 있다. 말라테스타는 숱한 구속과 수배 생활에도 불구하고 삶의 노선이 굳건했다. 다름 아니라 국가 혹은 정부 권력을 바꾸는 혁명이 아니라 아래에서부터 치받는 욕구들이 자기 힘으로 사회를 구성하고 운영해야 한다는 원리가 그의 노선이었다. 그리고 그 노선을 평생 일관된 목소리로 선전하고 조직 활동에서 실천했다. 그러한 하나의 사례가 바로 이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은 1897년에 쓰기 시작해, 구속과 수배 및 역사적인 사건들 때문에 중간중간 단절을 겪으며 1920년에야 현재의 구성으로 마무리되었으니 무려 23년 간 집필된 셈이다(그러던 사이 틈틈히 토막 원고들을 자신이 편집하는 잡지나 신문에 싣곤 했다). 앞서 적었듯, 말라테스타는 일생을 쉬지 않는 노동자로 일하면서 동시에 혁명가로 살았다. 크로포트킨과 만났을 때도 말라테스타는 어느 가게 벽에 구멍을 뚫는 작업을 하러 망치를 들고 사다리 위에 올라가 있었다고 한다. 그의 이러한 생애는 그의 글과 활동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던 것이 분명하다. 말라테스타는 공허하고 추상적인 단어, 배운 척하는 어려운 단어나 인용구는 피하고 언제나 명확한 표현만을 사용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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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없는 사회’라는 비전을 두고 우리가 논쟁을 시작한다면 어떤 대화들이 가능할까. 말라테스타는 이 책에서 우리를 그러한 논쟁으로 한껏 끌어당긴다. 이 책 속에서는 치안판사, 부르주아지, 노동자, 자영업자, 공화주의자, 대학생, 군인 등이 등장해 거침없이 자신의 생각을 웅변하고 서로 논쟁한다. 여기서 치고받는 ‘질문’들이 지금의 우리에게 새로운 상상과 행동을 기획할 지점들을 비춰준다. 최근 경찰과 국가에 대한 비판이 많지만, 이 문제가 어디서 비롯되는가에 대한 설명은 부족한 데 오히려 한 세기 전의 인물들이 나눈 대화와 통찰들에서 우리는 지금의 문제의 핵심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원고는 ‘가상 대담’ 형식으로 씌어졌는데, 사실 당시 카페 등에서 실제 벌인 토론의 기록이리라 짐작할 수 있다. 말라테스타는 원고를 집필하던 시기에 사람들과 격렬한 토론을 벌이다 다리에 총상을 입기도 한다. 그리고 실제 대화로 짐작하는 또다른 이유는, 말라테스타가 언제나 감시를 받던 신분임에도 자주 카페에 나와 토론을 이끌었다는 점이다. 그는 바라는 사회를 만들어나가는 방법은 끊임없이 사람들 속으로 파고들어 그들과 대화하고 설득하여 뜻을 모으는 방법뿐이라고 굳게 믿은 혁명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옮긴이의 표현대로 말라테스타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인민 속으로 파고든 선동가’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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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아나키즘 사회, 그리고 ‘자유로운 공산주의’라고도 표현하는 사회 구상을 목표로 삼는다. 책에서도 등장하지만, 이러한 주장에 대한 가장 일차적인 반발은 무정부 사회의 무질서 상태를 어떻게 통제하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말라테스타가 말하는 비전은 ‘자유로부터 질서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와 중앙집권화된 국가로 인한 사회 폭력의 정점에 사는 우리에게 이 책은 무엇이 사회의 근본인지를 잘 보여준다. 그렇기에 근본적인 전환에 대해 고민하는 이들에게 좋은 참고점들을 제시하는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로 이 책은 새롭게 시작하는 사회 구상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도록, 그것이 옳고도 가능하다는 점을 믿을 수 있게 해준다. 아나키즘에 궁금증을 가지거나 아나키즘에 회의를 품은 사람들에게 자신 있게 권할 수 있는 문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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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未知)의 만남은 흥미롭다

 

항상 그런 마음이 있었다. 익숙한 것을 지지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우리가 제대로 가고 있는지 점검하면 좋겠다는. 내가 믿고 지지하는 것이 몇몇 사람들의 대안이 아니라 정말 사회의 대안을 만들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다는. 마을모임을 기획한 것도 이런 생각 때문이었다.

마을이라는 말이 여기저기 등장하는 것을 볼 때마다 반갑기도 했지만 마음이 불편했다. 전국이 마을로 힐링을 하려는 건가. 마을로 풀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을 텐데, 왜 마을만 얘기할까. 어느 순간 마을은 정부의 정책에도 등장하고 기업의 광고에도 등장하는 무채색의 개념이 되어 버렸다.

물론 마을은 자치와 자급을 가능케 하는 삶의 중요한 기반이다. 하지만 한국처럼 기본적인 인권이 존중받지 못하고 노동자와 농민의 권리가 짓밟히며 성소수자와 청소년의 정체성이 부정당하는 사회에서 마을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 정도의 능력을 마을이 정말 가지고 있나? 그리고 마을의 이름으로 진행되는 다양한 활동들이 그 마을에 걸맞게 주민들과 함께 진행되며 한국사회를 바꾸고 있나? 마을만들기, 마을공동체라는 말이 사업으로 변해 얘기되는 것을 볼 때마다 이런 물음이 생겼다.

그리고 마을의 활동이 더 작고 구체화되는 건 좋지만 그 자체로 자족적인 모임이 되어버리면 내부의 관계는 돈독해지나 점점 외부로부터 고립된다. 사실 마을이라는 말이 이런 고립감을 상쇄시켜주기 때문에 마을에만 있으면 사회에 대한 감각이 점점 둔해진다. 완전히 마비되지 않으면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된다. 내 주변엔 온통 착한 사람 뿐인데, 왜 세상은 개판인가? 내 직장은 개판인데, 마을은 왜 이리 아름답나? 이러면 사람이 정신분열증에 걸리는 거다. 세상의 모든 일이 일관될 필요는 없지만 이렇게 극단적으로 나뉘면 삶이 온전해지기 어렵다.

또한 마을의 자급능력은 점점 줄어들고 필요한 기능을 외부에서 끌어다 쓴다. 예를 들어 아파트 단지를 유지하려면 다양한 노동이 필요하다. 경비를 서고 계단을 청소하고 쓰레기를 수거하고 택배로 물건을 나르고, 주민들에게 필요한 많은 일들을 대신해주는 분들이 계시다. 그런데 이 분들은 마을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나? 대부분이 저임금 불안정 노동을 하는 약자들이다. 아름다운 마을에서 이 분들의 자리는 어디일까?

이 모임을 기획한 건 이런 고민을 함께 풀면서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어서였다. 매번 만나는 익숙한 사람들이 아니라 좀 낯선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면 딱히 답은 안 나와도 여러 가지 질문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다행히도 마을운동에 관해 이야기를 나눠보자는 갑작스런 연락에 모두들 순순히(?) 응해주셨다.

이 분들을 모신 이유를 설명하다보면 이 책을 기획한 이유가 좀 드러날 것 같다. 대담에 참여하신 분들을 하파타 순으로(가나다 순의 반대로) 한분씩 소개하자면, 한채윤씨는 인권운동을 하는 우리 각시 덕분에 알게 된 분이다. 한국 최초의 동성애전문지 <버디>의 편집장을 오랫동안 맡았고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퀴어문화축제, 마포민중의 집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한채윤씨는 이성애 중산층 가족 중심으로 흘러가는 마을운동에 관해 날카로운 지적을 해주실 것 같았다. 마을주민이라는 무채색의 개념은 보고 싶지 않은 사람, 보이지 않길 바라는 사람을 지워버리는 말이기도 하다. 특히 2013년에는 마포구가 “LGBT(성소수자), 우리가 지금 여기에 살고 있다라는 현수막의 게시를 허가하지 않은 사건이 있었다. 알다시피 마포구는 성미산 마을이 있는 유명한 곳이다. 그곳에서 벌어졌던 사건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박영길씨는 청주에서 오랫동안 지역사회운동에 몸을 담았다. 지역사회운동이 그러하듯 안 해본 일이 거의 없을 정도로 여러 일을 했고(운동 외의 일도) 마을만들기 운동에도 관여했다. 공부방 운동을 하던 중 생활교육공동체의 필요성을 느꼈고, 공부해서 용되자는 공룡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공룡의 활동가들은 농사짓고 카페와 도서관을 운영하고 영상기록물을 만들고 지역노동운동에 개입하며 활기찬 삶을 살고 있다. 공룡의 활동은 정형화되지 않는다. 어느 때는 농사를 지어 옥수수와 고구마를 팔더니, 어느 순간에는 밀양송전탑 싸움현장이나 유성노조 농성장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201312월에는 지역코뮌학교 동동(動同)을 세우고 노동과 인권, 경제와 노동, 글쓰기, 대안금융운동, 도시 연구 등 하나같이 쉽지 않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정형화된 틀에 갇히지 않는 공룡의 활동은 마찬가지로 정형화될 수 없는 지역사회의 다양한 고민들을 담고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김정찬씨는 종로를 중심으로 모인 여러 단체들의 네트워크인 품애라는 단체에서 활동한다. 이번에 모인 사람들 중 나와 가장 짧은 인연을 가진 분이다. 내가 품애를 처음 접한 건 카페 토크콘서트 마빠기(마을에서 빠진 이야기)’라는 곳에 이야기손님으로 초대되면서였다. 인터넷으로 품애를 검색해서 카페를 찾아갔지만 정체(?)를 분명히 알 수 없었다. 품애는 결혼식이나 돌잔치같은 마을잔치를 착하게 준비하고 장애인과 함께 걷기도 하고 사진도 찍고 음악회도 연다. 운동처럼 보이지 않지만 마을에 필요한 일이고 그 속에 운동의 의미가 스며드는 활동들이었다. 이런저런 사업들을 많이 하는데, 새로운 사람들을 계속 만나가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익숙하지 않은 영역이기에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김신범씨는 죽음을 부르는 직업병으로 유명했던 원진레이온 사건으로 만들어진 원진재단이 세운 녹색병원의 노동환경건강연구소에서 일한다. 노동환경건강연구소는 노동자의 건강권 확보와 작업환경 개선, 직업병 문제 해결, 환경문제 조사 등을 하는 곳이다. 경북 구미시에서 불산이 유출되었을 때도 노동환경건강연구소가 현장을 측정해 안전하다는 정부발표를 뒤집었다. 김신범씨가 2010년 제주인권회의에서 청소노동자들의 건강권을 발표하실 때 그를 처음 만났다. 부끄럽지만 그때서야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했고 마을 내 노동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김신범 씨는 공장 노동자들이 유해물질을 다룰 때 소비자의 건강도 안전할 수 없다며 공장 안과 밖을 연결하는데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런 관심이 마을운동과 노동운동의 결합이라는 새로운 화두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김상철씨는 오랫동안 진보정당운동에 몸을 담아왔다. 처음 만났을 때는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처지였는데 그 뒤에 정당인으로 만났다.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서울시당에서 활동했고, 지금은 노동당 서울시당의 사무처장으로 일하고 있다. 도시계획이나 주택정책, 문화예술정책에 관심이 많고, 자료를 꾸준히 검토하고 공부하는 성실한(?) 정치가로 불린다. 그가 속한 노동당 서울시당의 논평은 날카로운 논리와 깔끔한 글솜씨로 꽤 명성을 날리고 있다. 몇 년 전부터 마을운동이 탈정치화되었거나 되고있다는 비판이 심심찮게 들리는데, 이 부분을 속 시원하게 짚어줄 것이라 기대했다. 그리고 지역사회운동이 정당정치와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듣고 싶었다.

권단씨는 2002년에 옥천신문 기자로 입사한 뒤 옥천에 살며 옥천농민회, 옥천살림, 옥천순환경제공동체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의 가장 큰 관심사는 자치와 자급이고, 이를 가능케 할 방법으로 주민들의 다양한 목소리가 섞이는 공론장을 꼽는다. 충청북도 옥천군은 안티조선운동으로 유명했던 곳인데, 1989년에 주민들이 직접 옥천신문사라는 지역언론사를 만들었다. <옥천신문>을 통해 지방정부 감시부터 사회적 경제 함께 만들기까지 다양한 활동들이 엮인다. 농민과 지역의 먹을거리, 주민자치에 관심이 많은 권단씨가 아침마다 페이스북에 올리는 글은 많은 사람들의 좋아요를 받으며 공감대를 확산시키고 있다. 권단씨를 통해 비수도권 농촌에서 마을을 바라보는 이야기를 좀 듣고 싶었다.

좋은 분들을 모셨지만 이 논의에 여성활동가가 함께 하지 못했음은 참 아쉬운 일이었다. 주변에 여러 여성활동가들이 있음에도 같이 얘기를 나누자고 제안하지 못했다. 한 차례 사루비아 다방의 김인민씨가 참여했지만 그 뒤 일정이 맞지 않아 참여하지 못했다. 이 부분은 계속 아쉬움으로 남는다.

엄청나게 바쁜 사람들이 달마다 한번 토요일에 모여 이야기 한마당을 펼쳤다. 사실 이 원고에는 그 뜨겁고 즐거운 열기를 모두 담지 못했다. 그리고 가끔 “(웃음)”이라는 단어가 들어가지만 분위기를 전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4시간씩 웃고 떠들며 수다를 떨었던 몇 차례의 모임은 끝났지만 단지 얘기만이 아니라 함께 할 실천들을 찾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조금씩 실현되고 있다.

이 책은 많은 고민을 나눴던 모임의 결과물이다. 독자들도 이 책에서 어떤 해답보다 새로이 고민해야 할 질문들을 많이 찾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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