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리 동네 급진주의자의 탄생'이라는 과격한 제목을 달았는데, <시사인>에 실릴 때는 '우리 동네 두 아이'라는 부드러운 제목으로 실렸다. 내가 참 좋아하는 아이들이라 좀 조심스럽기도 하지만, 아이들의 웃음이 계속되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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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가 끝났다. 해도 뒤숭숭, 안 해도 뒤숭숭, 언제나 선거의 끝은 찝찝하다. 이번 선거는 특히 그랬다. 절박한 일과 너무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아 선거에 거는 기대가 남달랐던 것 같다. 그 기대만큼 선거 후유증도 크다. 괜히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탓하기도 하지만 그런다고 허전한 마음이 달래지진 않는다.

 

아직 대통령선거가 남아 있으니 이 후유증은 계속 갈 듯 싶다. 그리고 이 후유증 때문에 쓸데없이 치고받는 일도 더 많아질 것 같다. ‘비판적 지지’라는 말이 언제쯤이면 한국정치에서 사라질지 모르겠지만 이번 대선도 비슷하지 않을까?

 

그래도 흥미로운 점은 제도정치의 장에서 보수와 진보의 경계가 거의 사라졌다면, 생활정치의 장에서는 그 경계가 뚜렷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정치인들의 정책은 두리뭉실하게 될 것이다. 자본주의/반(反)자본주의라는 대립각이 사라진 제도정치에서는 보수와 진보를 나눌 근거가 사라진다.

 

하지만 생활의 영역에서는 반대다. 똑같은 현상을 보고도 한편은 희망을 보고 다른 편은 말세를 본다. 선거로는 도저히 드러날 수 없는(대표할 자가 없으니!) 선호가 생활의 영역에서 첨예하게 대립한다. 그래서 제도정치와 생활정치의 고리를 잇거나 아예 새로운 판을 짜는 역할이 필요할 것 같은데, 그 역할을 맡을 새로운 주체가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논평하기 좋아하는 지식인들의 역할이 끝나간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지식인들이 관전평만 했는데 이제는 감정이입과 실제개입까지 뒤섞여 그 말이 똥인지 된장인지를 구분하기 어렵다. 더구나 상대의 마음을 읽는 관심법이라도 익힌 듯 자신만이 전체 판을 읽는다는 논평을 쏟아내는데, 듣고 있으면 참 불편하다. 마치 정치는 전문가들의 몫으로 맡겨두고 훈수를 두는 대로 움직이라는 무언의 압박이 깔려 있는 듯하다.

 

하지만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보면 자기가 직접 보고 경험한 것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그것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다. 한걸음 떨어져 하나마나한 얘기를 논리적으로 쏟아내는 사람보다 현장에서 올라오는 오타 섞인 글들에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인다. 아직까지는 명망가들의 영향력이 세지만 계속 그럴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나는 세상이 왜 이 모양이냐는 좌절감을 별로 느끼지 않는다. 그리고 이미 동네에서 흥미로운 변화를 목격하고 있다.

 

우리 동네 여섯 살 선이와 여덟 살 안이는 이번 총선에서 진보신당과 녹색당을 지지했다. 어떤 정당에서 어떤 사람들이 출마했는지를 엄마에게 묻고 내린 결론이라고 한다. 아이들은 청소부 할머니가, 핵을 반대하고 자연을 지키는 사람들이 국회로 가야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상식이니까. “왜 어른들은 우리한테 반말하고 예의 없이 해도 되는 거야?”라고 묻는 급진주의자들이 자라고 있다.

 

그리고 얼마 전에 이 아이들은 송전탑 싸움 중인 밀양과 4대강 사업으로 위기에 몰린 두물머리에도 다녀왔다. 두 아이의 머리 속에는 송전탑을 세울 자리에 심은 나무가, 두물머리에 심은 감자와 땅콩이 계속 자라고 있다. 그러니 이 아이들의 판단기준은 논리가 아니라 생명이 될 것이다.

 

물론 이 급진주의자들이 학교를 다니면서 총명함을 잃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한다. 하지만 적어도 이 아이들은 노동자들의 넋을 기리는 분향소를 짓밟는 폭력을, 해군기지와 핵발전소, 송전탑, 골프장을 반대하는 주민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그걸 상식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 같다.

 

우리 동네만이 아니라 다른 동네에서도 안이와 선이들이 자라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 아이들의 운명이 곧 우리 사회의 운명이다.

총선이 끝나고 ‘멘붕’ 상태에 빠졌다는 사람들이 많다. 헛된 기대를 품게 했던 SNS 세계를 잠시 떠났다가 복귀하는 사람들도 있고, 자신이 보고 싶은 현실만 봤다는 뒤늦은 후회(?)가 나오기도 한다. 예전에는 정보가 부족해서 판단이 어려웠다면 이제는 정보가 너무 많아 판단하기 어렵다고도 한다.

 

이런 이야기들은 우리가 세상을 해석하고 소통하는 방식에서의 문제점을 드러낸다. 그래서 때로는 세상에 널린 텍스트들의 의미를 파헤치고 숨은 뜻을 드러내 주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문화평론가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내가 문강형준이라는 문화평론가에 주목하는 이유는 세 가지이다.

 

하나는 엄청난 성실성이다. 한때 그는 자신의 블로그에 한 달 동안 읽고 듣고 본 텍스트들을 정리해서 올리곤 했다. 그 리스트만을 보고 자괴감에 빠지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그는 많은 책과 드라마, 영화, 다큐멘터리, 쇼 프로그램 등을 보고 음악을 들으며 문화의 사정을 읽는다. 그 리스트만 보고 있어도 일정한 흐름을 느낄 정도였다.

 

그리고 그가 주목하고 있는 키워드이다. 이념이 사라졌다며 방황하고 울부짖는 사람들은 많지만 그 토대를 다시 다지려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그냥 ‘말빨’만 난무하거나 너무 무겁고 진지하다는 푸념만 있다. 그 속에서 문강형준은 그 이념을 세우기 위해 현재의 무덤을 파는 사건인 ‘파국’에 주목하고 이 흥미로운 키워드로 세상을 해부한다.

 

더구나 문강형준은 외국에서 학위를 받고 혜성처럼 등장한 신인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꾸준히 인터넷 카페와 블로그에 글을 올리며 사람들과 소통해 왔다. 차근차근 기본적인 초식부터 깊은 내공까지 다져 온 지식인이라 더 반갑다. ‘내가 진실을 알려 주마’, ‘내가 제일 잘났어’ 식의 수사는 이제 너무 지겨우니까.

 

 

 

 


파국은 TV에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문강형준의 책이 마냥 쉽지는 않다. 우리에게 낯선 개념이나 이론가들의 이름이 수시로 튀어나온다. 호흡도 좀 빠르고 여러 가지 텍스트들이 엉키기도 한다. 하지만 여유를 가지고 속을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그림이 보인다. “기대하고 있던 서사가 갑자기 뒤집히는 순간”을 뜻하는 파국이라는 그림이다.

 

우리는 세상이 바뀌길 바란다. 진보든 보수든 지금에 만족하는 사람은 없다. 바뀐 세상이 자신에게 조금 더 나은 것이길 바라며, 서로 다른 꿈을 꾸며 우리는 변화를 요구한다. 문제는 그런 변화를 강요할 힘이다. 우리에겐 그런 변화를 강요할 힘이 없기에 변화는 언제나 우리를 배신하고, 변화의 빠른 속도는 우리를 우울하게 만들고 좌절시킨다.

 

그런데 그보다 더 심한 우울과 좌절은 변화를 바라지만 정작 어떤 변화를 바라는지 모른다는 사실에서 온다. 내가 바라는 세상을 그리려면 나 자신이 드러나야 할 텐데, 나는 누구인가? 가장 기본에서부터 막히니,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은 사람들에게는 대세를 따르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삶이 생존이 되어 버린 사회에서는 귀차니즘이 대세이다.

 

문강형준은 이 무기력한 주체를 ‘좀비’라 부른다. 오, 좀비라니. 서늘함이 가슴을 슥 가른다. 설명은 더 서늘하다. “파국 상황에서도 ‘묵묵히’ 걸어 다니며 자신의 식욕을 채우는 ‘일차원적’ 존재”이자 “완벽하게 자유롭지만 완벽하게 속박된, 인간의 형상을 했지만 인간이 아닌, 포식하면서 소진하는, 살아 있으면서 죽어 있는, 존재이면서 비존재인, 주체이면서 반주체인, 노예이면서 소비자인, 결핍이면서 과잉”인, “바로 오늘 우리가 처한 상황의 온갖 모순을 체화”한 존재, 그가 바로 좀비이다.

 

우리는 아직 인간이라고 말하고 싶은가? 모순을 체화한 존재이기에 우리는 핵발전소가 터지는 광경을 두려워하면서도 원자력 르네상스를 꿈꾸고, 착한 초콜릿과 착한 커피를 먹고 마시며 제3세계의 기아가 사라지길 기대한다. 모든 게 다 신자유주의 때문이라 욕하면서도 TV에 나오는 각종 오디션‘쇼’를 즐긴다. 그래도 아직은 인간이라고? 좀비 영화들에 항상 나오는 장면. 좀비에 물린 사람들은 꼭 그 사실을 감추고 나중에 좀비로 변해 사람들을 공격한다. 좀비로 변하는 건 시간 문제이다.

 

물론 TV만 보고 있으면 아직도 여유는 있는 듯하다. 뭐든 한 가지만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신화들이 사라지지 않고 그런 신화를 부추기는 멘토들이 등장하니 말이다. 내게는 아직 기회가 오지 않았을 뿐이라며, 내 자신에게 얼마나 충분한 기회를 줘 봤냐며, 언젠가는 치료제를 찾을 수 있을 거라며 기대를 갖지만 모든 기대는 헛되다. ‘아직 인간’은 곧 좀비로 변신해 동료들을 공격할 예정이다.

 

문강형준은 〈나는 가수다〉(이하 나가수)와 포르노그래피에서도 같은 그림을 본다. “‘야동 폐인’과 ‘나가수 폐인’은 공히 중독자”로서 “포르노그래피와 엔터테인먼트는 창조 대신 중독을 통해 관람객을 확보하”고 “탈락자의 자리를 새로운 가수로 보충”하지만 결코 새로운 창조는 없다. 온가족이 모여 앉아 〈나가수〉를 보며 나누는 품평회는 화목함이 아니라 파국의 전주곡이다. 서로에게 자신의 노래를 들려주는 장은 사라지고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의 생존을 놓고 경쟁적으로 점수를 매기며 만족하는 장만 남았다. 그것은 치료제가 아니라 좀비에게 물린 상처를 감추는 위장막이다.

 

아마도 사람들은 〈무한도전〉에 대한 문강형준의 비평을 가장 거북해할 것 같다. 나랑 같이 사는 사람이나 내 주변 사람들 대부분이 〈무한도전〉을 좋아하고 MBC 파업의 가장 큰 아쉬움으로 〈무한도전〉의 결방을 꼽는다. 하지만 문강형준은 이 프로그램에도 칼날을 들이댄다. “연예인들의 몸과 일상을 쥐락펴락하며 ‘판을 깔아 준’ PD들은 방송 자막을 통해 이들을 진정한 ‘평균 이하’로 묘사하”고 “죽도록 일하라고 해서 죽도록 했더니 죽도록 했다고 비아냥”댄다. “열심히 뛰어다니는 〈무한도전〉 멤버들에게 점심을 주지 않아 바나나 하나 가지고 서로 싸우게 만들고 이런 모습을 한 발짝 물러서서 조롱하는 제작진의 태도”는 신자유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무책임함이다.

 

소위 ‘개념 프로그램’으로 꼽히는 〈무한도전〉에 이런 혹평을 하다니.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있다. 〈무한도전〉이 아무리 사회의식을 담아도, 다양한 삶의 단편들을 담아도, 그것이 계속 TV에 방송될 수 있는 건 말랑말랑한 감동 때문이라는 점이다. 스쳐 지나가는 에피소드 이상으로 사회의식 같은 것을 전면에 내세우면 〈무한도전〉은 더 이상 TV에 방송될 수 없다. 혁명은 TV에 나올 수 없으니까. 많은 사람들이 김진숙과 쌍차, 문정현 신부님을 찾아 SNS를 헤매는 건 TV에는 ‘인간’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희극적이고 말랑말랑한 즐거움만이 파국을 감추는 건 아니다. 때로는 강력 사건도 그것을 은폐한다. 문강형준의 ‘강단剛斷’이 가장 드러나는 비평은 우리 사회가 한 명의 ‘악인’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 대한 비판이다. 좀 길지만 곱씹을 만한 내용이다. “‘나영이 사건’에 관해 들끓는 분노의 여론과 그것을 받아서 증폭시키는 언론들, 그리고 ‘이때다’ 하면서 범죄자의 엄정 처벌을 주장하는 대통령의 모습에서 참으로 구역질 나는 냄새가 진동한다. 소녀들을 성적 대상으로 만들면서 즐기는 대중과 그 소녀들을 데리고 돈을 버는 연예 기획사들, 구조적인 모순보다 사건의 선정성을 부각시켜 여론화하는 언론들, 사회를 생존 경쟁의 전쟁터로 만들고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죽음들을 빚어내면서도 성폭력이나 연쇄살인만을 ‘강력 범죄’라고 부르며 사뭇 비장한 척하는 정치인들. 이들이 ‘공모’해 ‘술 취해 여자아이를 성폭행한 50대 남자’ 한 명을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면서 돌팔매질을 해 댄다. 가장 취약한 사람을 성폭행한 가장 취약한 남자. 이 둘이 가해자와 피해자 고리 속에 들어가 논쟁의 중심이 되어 있는 사이에, 우리는 모두 자신이 가진 알량한 편안함을 ‘축복’으로 알면서 또다시 더 큰 폭력의 질서 속에서 남을 짓밟고 이용하고 합법적으로 희롱하면서 ‘밥 먹고’ 살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진짜 심각한 ‘사건’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일상의 악은 악인 뒤에 숨고, 우리는 악인에게만 돌팔매질을 해 댄다. 좀비가 등장한 이유에 대해서는 묻지 않고 무조건 좀비들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 이 자에게 돌을 던지라는 예수님 말씀은 일단 저놈부터 조져 놓고 보자는, 나부터 살고 보자는 우선순위 뒤로 사라진다.

 

이렇게 세상이 끝으로 치달아도 파국은 TV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그래도 우리는 멀쩡할 거라는 환상이, 우리는 안전할 거라는 근거 없는 기대가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세상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은 많지만 그 불만이 파국으로 터져 나오길 바라는 사람은 없다. 좌우를 막론하고 파국의 원인인 자들이 어떻게든 파국을 피하려 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들은 파국을 준비하지 않는다.

 

이번 총선 때 소위 김용민 파동을 보며 문강형준이 트위터에 남긴 말이다. “김용민을 공천할 때부터 이런 사단이 날 줄 알았다. 한국에서 정치가 ‘인기투표’가 되고, 이명박 개인에 대한 복수의 엔터테인먼트가 되는 순간이었다. 이런 후보를 감싸는 세력이 ‘진보’라는 말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김용민 막말보다 더 추악하다.” 이래서 나는 그를 사랑한다.

 

 


시대는 개판인데 멘토들은 다 착하다!

 

그렇다면 어떤 출구가 있는가? 좀비를 인간으로 바꿀 치료제는 어디에 있는가? 많은 좀비 영화들에서 이미 확인되었듯이 출구나 치료제는 없다. 우리는 그런 것이 사라진 시대를 살고 있다. 그리고 조금 맘을 편히 먹는다면 좀비에게 물린다고 죽지는 않는다. 그냥 좀비가 될 뿐이다. 대다수가 좀비인 세상에서는 인간들이 사냥을 당하니 좀비가 되는 것도 하나의 생존(?) 전략이다.

 

한때 팟캐스트 1위를 차지했던 〈나는 꼼수다〉도 그런 전략이다. 열광적으로 치료제를 찾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른 누군가가 나를 구원해 주길, 내 목을 물어 주길 기다리는 전략이다. 닥치고 투표하고 닥치고 기다리라! “언뜻 신선해 보이는 〈나는 꼼수다〉의 새로운 미디어 실험과 직설적 언사들이 도달하는 ‘정치’적 비전의 장소란 결국 다시 ‘국회’이고, ‘시청’이고, ‘청와대’다. 바뀌는 것은 장소가 아니라 인물이다.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이 아니면, 오세훈이나 나경원이 아니라 박원순이면, 이명박이 아니라 문재인이나 안철수면 ‘희망’이 있다는 식의 생각이 이 프로그램 전반에 흐르고 있다. (……) 언제나 우리를 들뜨게 하는 이 즐거움의 정언명령은 더욱 가혹해져 가는 자본주의와 더욱 공고해져 가는 대의제 정치라는 이 시대의 진짜 핵심을 세련되게 감춘다. ‘즐겨라’라는 명령이 잦아질수록 삶은 더욱 공허해지며, 그 공허에서 벗어나려고 우리는 다시 즐거움을 찾는다.” 모순은 결코 해결되지 않고 그냥 미뤄질 뿐이다.

 

문강형준은 소위 ‘안철수 현상’에서도 비슷한 모순을 본다. “이명박에게 ‘당한’ 대중은 이제 안철수에게 이명박이 가지지 못한 정직, 신뢰, 부드러움, 소통 등의 이미지를 갈구하지만, 그러면서도 동시에 이명박과 안철수가 동시에 구현하는 ‘행정, 관리, 성공, 경제’의 이미지 역시 함께 안고 가는 것이다. 대중은 여전히 ‘생존’의 법칙이 거의 유일한 삶의 법칙이 된 사회에 살고 있고, 그 속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투쟁하고 싸우는 정치인’보다는 ‘스스로 계발하고, 자기 관리를 하고, 즐거움을 좇으면서도, 동시에 기업을 성공시킨, 그러나 정직하고 인간적이며 부드러운 사업가’를 대표로 삼고 싶은 것이다.” 살아남고자 하는 대중의 욕구 외에 안철수는 어떤 욕구를 대변할 수 있을까?

 

더구나 “이 착한 멘토들은 사실 ‘개판’이 되어 버린 시대와 정면 대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처럼 부드럽고 조용하게, 착실하고 성실하게, 쉽게 말하면 ‘착하게’ 이 고통을 견뎌 내고 승리하라고 조언”한다. 참고 견뎌서 세상이 바뀔 거면 이미 세상은 바뀌었어야 옳다. 그러나 아직도 이 모양인데 언제까지 착하게 살아야 할까?

 

이런 깨달음이 생겨도 파국을 준비하기는 쉽지 않다. 혼자 인간으로 살며 공포에 떠느니 좀비가 되는 게 안전한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착한 멘토들은 그냥 좀비가 아니라 ‘착한 좀비’가 될 수 있다고 역설한다. 멘토들은 좀비가 되지 않으려는 처절한 싸움만 그만두면, 다시 인간이 되려는 욕망만 내려놓으면 계속 인간을 쫓는 자로 살 수 있다며 안심시킨다. 좀비가 되면 마음껏 인간을 사냥할 수 있으니 이 또한 쾌락이 아닌가. 좀비들의 세상에서 인간은 동경의 대상이 아니고 사냥감일 뿐이다. 그런데도 왜 인간이 되려 하는가?

 

그리고 착하건 안 착하건 좀비의 가장 강한 본능은 생존 본능이다. 배가 고파지면 먹잇감을 찾아 헤매는 건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좀비에겐 공통된 현상이다. 그리고 때로는 적절한 먹잇감이 없으면 좀비들끼리도 서로 뜯어먹는다. 이 세상에는 도덕이나 윤리가 필요 없다. 먼저 공격해서 살아남는 자가 왕이고,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오래 살아남는 자가 강자이다. 어떻게든 살아남는 자가 있기에, 비틀거리며 돌아다니는 좀비도 생명체이기에, 개판이 되어도 세상은 지속된다.

 

 


혁명의 지형학

 

우리가 단지 생존만을 바라지 않는다면 다른 돌파구가 필요하다. 문강형준이 얘기하는 파국은 현실을 조롱하거나 절망하기 위한 키워드가 아니다. 외려 파국은 “위기와 절멸을 상상함으로써 현재의 질서를 역전시키고 절멸시키려는 근본적인 접근”이고 지금 우리가 빠져들고 있는 푹신한 안락의 의자에서 일어나 “모순적인 현재에 개입하는 입구”이다.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희소성과 폭력, 쾌락에 맞서 저자는 유토피아라는 카드를 꺼낸다.

 

허나 신자유주의는 유토피아마저도 가만두지 않는다. 끊임없이 개입하고 현실을 강요한다. 그래서 문강형준은 신자유주의 체제의 무게를 딛고 꾸역꾸역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에게 박수를 보내지 않고 미친놈과 또라이에게 박수를 보낸다. 앞뒤 재지 않고 무대포로 살아가는 사람이야말로 좀비이길 거부하는 인간다움의 상징이다. 그런 미친 열광 속에서 우리는 형제자매가 되고 “사랑도 쿨하게, 정치도 ‘간지’나게. ‘핫’한 것은 오직 섹스에서나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시대를 벗어날 수 있다.

 

사실 미치지 않고서 어떻게 신자유주의에 맞설 수 있을까? 체제를 지탱하는 사람이나 체제를 반대하는 사람이나 모두가 체제에 ‘갇혀 있는’ 사회에 사는 우리는 미쳐야만 한다. “‘자기 신분도 모르고’ 반란에 나선 농노의 장인들을 가리켰던 또 하나의 말”이 “광신자”였듯이, 어느 시대에나 주류에 도전하며 파국을 불러오는 자들은 또라이일 수밖에 없다. 거리로 나서는 청소년들을 보며, 사랑을 나누는 성소수자들을 보며, 행진하는 슬럿 워크를 보며 민주주의나 사랑, 해방보다 ‘말세’를 외치는 사람들이 많듯이, 이런 광적인 반란이야말로 파국과 맞닿아 있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세상을 불태울 수 있을까.

 

‘21세기에 어떻게 이런 짓을’이라며 욕을 먹는 비동시성, ‘굳이 저렇게까지’라며 욕먹는 과잉된 행동이야말로 “최악의 상황에서도 최선의 모습을 상상하고 실천해 내는, 그럼으로써 가장 현재적이고 동시적인 사건을 만들어 내는 토양”이다. 그래서 미치도록 사랑하고 가슴속 분노를 토해 내는 또라이들은 파국을 피하지 않고 파국을 준비한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또라이는 누구인가? 문강형준은 그 모습을 봉준호 감독의 영화들에서 찾는다. 자신의 가족도 아닌 이를 품어 줄 수 있는 이들, “이 서글픈 한국의 현실에서도, 오직 이 하층 계급의 가족만이 유일하게 피가 섞이지 않은 이들, 그러니까 또 하나의 ‘모자란 아들’을 자신의 품으로 받아들일” 이들인 ‘아직 인간’이다. 언제 변해서 주변 사람들을 뜯어먹을지 모르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가진 게 없기에 파국을 두려워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러니 이 체제의 붕괴에서 잃어버릴 게 아무 것도 없는 사람들이야말로 파국을 준비하는 혁명가이다. 그러니 임금 노예의 사슬에조차 묶이지 못했던 인류의 가장 희망 없는 쓰레기들에서 혁명의 기운을 엿본 바쿠닌이, 토착적인 진보를 위해 산업 문명을 재구성할 것을 요구했던 일리치나 마르쿠제가 다시 부활한다. 문강형준이 외치는 최신 이론에서 나는 잊혀진 이론의 흔적들을 보기도 한다.

 

사실 나는 문강형준의 글보다 문강형준이라는 사람을 훨씬 더 좋아한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그가 더 그리워지는 건 글을 읽다 보면 밖에서 들여다보고 있다는 느낌, 단지 그가 외국에 있어서가 아니라 현실을 관객으로서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계속 받기 때문이다. 매체 비평은 매체로 드러나지 않는 현실에 둔감해서 글은 날카롭지만 깊이 감춰진 현실을 길어 올리지는 못한다. 자고로 문화란 게 같이 모여 앉아 쑥덕거리는 것이라면 그 해석 또한 쑥덕거리면서 더 깊어질 것이다. 그런 자리를 좋아하는 사람이기에 나는 그가 한국으로 돌아올 날을 기다린다.

 

그래서 나는 그의 다음 책보다 그의 귀국을 기다린다. 같이 먹고 마시고 여러 현장을 돌아다니며 부대끼고 싶다.

조금 낯설지만 탈협동화(demutualization)협동조합의 법적 형식이 합자회사나 주식회사 등으로 사유화되는 과정을 뜻한다. 협동도 제대로 되지 않는 우리 사회에서 무슨 탈협동화냐고 되물을 수 있다. 닥쳐올 것(아니, 이미 닥쳐왔을 수도 있는 것)을 미리 조망한다는 의미로 이 글을 읽으면 좋겠다.

 

 

1. 해외 협동조합의 탈협동화

 

유럽의 협동조합들은 생산과 소비, 신용, 문화 등의 영역에 폭넓게 퍼져 있다. 세계가 몇 차례의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곳은 신용조합이나 협동조합은행이다. 유럽의 조합원 수나 매출고는 한국과 비교가 안 될 수준이다. 한국에서 유명한 몬드라곤 협동조합 복합체의 자산은 약 53조에 달한다. 금융, 제조업, 유통, 지식 등을 포괄하는 자산규모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재벌인 현대중공업보다 조금 적다. 그리고 몬드라곤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수는 8만 4천명으로, SK나 롯데보다도 많은 수의 노동자를 고용한다. 그리고 전 국민의 60%가 조합원인 스위스에서는 협동조합이 카르푸의 매장을 인수했고, 이탈리아의 볼로냐는 한국 협동조합 관계자들의 순례코스가 되었다.

 

이런 소식만 들으면 호황기에 무슨 탈협동화를 논할까 싶다. 하지만 협동조합을 연구하는 갈러(Z. Galor)가 홈페이지(www.coopgalor.com)에 올려놓은 자료들을 읽다보면 협동조합의 부흥기 뒤에 협동조합 정체성의 변화가 숨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갈러는 전 세계 다양한 협동조합들에서 탈협동화 경향이 나타나고 그것이 소비자협동조합과 에너지협동조합에서 두드러진다고 지적한다. 갈러가 지적하는 주된 원인은 조합원의 관심과 참여 부족이다. 협동조합이 탈협동화되어도 조합원들은 관심이 없거나 외려 주식회사로의 전환을 지지한다.

 

물론 모든 문제가 조합원들 탓은 아니다. 조합원의 삶을 지지하거나 조합원과 함께 성장하지 않는 협동조합의 구조도 문제이고, 세계화에 따른 경제구조 변화나 초국적기업들과의 경쟁, 협동조합이 낡은 것이라는 편견같은 외부요인들도 탈협동화를 부추긴다.

 

한 사례를 구체적으로 따져 보자. 이스라엘의 트누바(Tnuva)는 연계형 협동조합(secondary cooperative)으로 농업공동체인 모샤브(Moshavim)와 키부츠(Kibbutzim)가 생산한 농산물을 가공해서 판다. 지난 몇 십년 동안 트누바는 빠르게 성장했고, 각 조합의 지분과 가치도 높아졌다. 그런데 조합원들이 아니라 위원회가 트누바를 운영했고, 조합원들은 트누바의 성장에서 몫을 공유하지 못했다.

 

1990년대부터 낙농업을 하는 조합원들이 문제를 꾸준히 제기했고, 트누바를 변화시키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그런데 이 움직임에는 이스라엘의 대기업이 트누바를 인수하려는 움직임도 있었고, 에이팩스(APAX)사가 10억 달러(트누바의 실제 자산가치는 8억 달러 정도)를 제안하자 총회는 압도적인 비율로 지분의 매각을 결정했다(에이팩스사가 51%의 지분을 차지!).

 

갈러는 조합에 관심을 가진 조합원 그룹이 존재했다면 그들이 탈협동화에 맞섰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한다. 어쨌거나 이런 전환의 결과 2011년 7월에는 트누바의 비싼 치즈가격 때문에 이스라엘 시민들이 불매운동을 조직하는 일까지 생겼다. 이 일이 이스라엘의 협동조합운동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협동조합간의 연대도 좋지만 연계형 협동조합이 조합원들의 관심과 참여구조를 마련하지 못할 경우 언제 어디서든 발생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리고 앞서 얘기했던 몬드라곤 협동조합복합체는 1990년대부터 주식회사 형태의 자회사들을 만들어 확장전략을 펼쳐왔다. 그 결과 유통이나 금융부문의 자회사들 중 상당수가 협동조합이 아니고 해외의 현지기업에 고용된 노동자들도 조합원이 아니다. 이 역시 협동조합이 시장에서의 생존과 확장전략을 최우선으로 내세울 때 언제 어디서든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다.

 

그런데 나는 이런 변화가 온전히 협동조합만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앞서 갈러가 탈협동화의 외부요인이라 얘기한 것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결정권의 집중’이다. 세계가 ‘1 대 99의 사회’로 전락한 것은 99%의 사람들에게 결정권이 없기 때문이다. 전 세계적으로 국가와 시장의 경계가 점점 사라지는 상황에서 협동조합이 계속 성공하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분노하라’의 열풍을 생각하면, 지금까지의 위기는 시작에 불과할 뿐이다.

 

 

2. 왜 협동조합은 번성했을까?

 

그럼에도 우리가 앞선 경험에서 받아들여야 할 시사점은 분명히 있다. 유럽 협동조합의 기본은 농민과 소상공인, 도시노동자들을 지원하는 구조였다. 그리고 그런 역할을 위해 협동조합은 분권화를 추구했고 지역과 지방은행을 강화시켰다. 중앙에서 조직되어 지방으로 퍼지는 방식이 아니었다. 자급이 기본이고, 불가피할 경우에만 중앙이 개입했다. 중앙이 가서 판 깔아주고 컨설팅해주고 하는 구조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유럽연합(EU)으로 통합된 이후에도 협동조합들은 자급의 원칙을 지키고 있고, 분권화되어 있어 유연하고 조합원이나 외부의 변화에 민감하다. 그리고 중소기업들이 협동조합과 긴밀한 연계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사회나 협동조합이 조직되는 방식은 어떤가? 수도권과 중앙 중심이고 그 구조가 집중화되어 있다. 우리는 이에 관한 물음을 던지거나 비판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협동조합이 번성한 곳들, 즉 독일, 이탈리아, 스위스, 네덜란드, 스페인과 같은 나라들이 연방국가라는 점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중소기업의 고용구조가 협동조합의 성장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점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물음을 던지지 않고 협동조합이 어떤 곳에서나 성공한다거나 외국의 모범사례를 따라 열심히 규모를 키우자고 주장하는 건 무책임하다.

 

사실 ‘뭉치고 힘을 키우면 이긴다’는 논리는 정신승리법에 가깝다. 과연 우리는 세계경제의 변화를 올바로 이해하고 있을까? 데이비드 맥낼리는 『글로벌 슬럼프』에서 세계경제 전체를 보면서 새로운 형태로 변이되는 경제위기의 속성을 파악하지 않으면 현재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위기를 주도하는 탈정치화의 경향에 맞서 정치를 되살리고 희망의 기운을 만들 다양한 고리들을 조직하는 것, 그것이 대안이라고 맥낼리는 얘기한다. 그러니 협동조합은 지역의 관점에서 세계경제의 변화를 읽고 지역적인 행동으로 변화에 개입하고 그 사건들을 조직해야 한다.

 

그리고 유럽이 이러니 따라가자, 복지국가도 따라가자, 이런 식의 발상이야말로 낡은 편견이다. 이미 협동조합의 주류는 유럽에서 아시아와 남아메리카 대륙으로 이동하고 있다. 그리고 구리모토 아키라 이사가 “아시아 협동조합의 과제와 전망”이라는 기사에서 지적했듯이, 아시아의 협동조합은 소비자운동과 결합되어 시작되었다. 생협운동이 사회운동과 무관하지 않았다는 얘기이다. 일본의 생협운동이나 인도의 낙농협동조합 ‘아물’, 그라민 은행 등이 그 예이다. 이 기사는 정부의존에서 벗어나 조합원의 요구에 따르고 조합원이 지지하는 사업과 활동을 펼칠 뿐 아니라 사회의 공익과제를 담아내 협동조합의 존재 의의를 높여야 한다고 결론을 맺는다. 그렇다면 한국의 협동조합은 조합원들의 삶에, 먹거리만이 아니라 그들의 가족구성, 노동조건, 생활하며 겪는 다양한 문제들에, 다양한 사회운동에 어떻게 개입하고 있나?

 

따지고 보면 이런 고민은 새로운 게 아니라 이미 있었던 것인데 잊혀진 것이다. 협동조합운동은 살림운동이다. 내 손 때가 묻어있는 물건은 낡아도 쉽게 버리지 못하고 새것에 현혹되지도 않는다. 협동조합운동은 그런 기억과 관계를 만드는 운동인데, 그걸 얼마나 실현하고 있는지 스스로 점검해야 한다. 국가나 시장이 ‘향수’를 만들거나 그것을 소비하도록 강요할 수는 있지만 진정한 풍취를 만들지 못하는 게 바로 이것이다. 이 가장 강력한 무기를 협동조합운동이 그동안 얼마나 갈고 닦아 왔는지 스스로 점검해야 한다.

예전에 한 간담회에서 우연히 황주석 선생님을 만난 적이 있다. 그때는 그 분이 누구인지 잘 몰랐다. 만남 뒤에서야 황주석 선생님을 알게 되었다. 그 앞에서 뭐가 뭐라 떠든 것을 한참을 후회했다. 지금은 이 세상을 떠나셔서 주워담지도 못한다. 지금 다시 황주석 선생님을 봬면 나는 여러 가지를 묻고 싶다. 그러지 못함을 안타까워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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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회에서 생활하려면 다양한 서비스가 필요하다. 보통은 정부가 보육, 교통, 환경, 복지 등 다양한 서비스를 맡지만 관료주의가 생기면서 많은 예산에 비해 실제 주민의 필요를 반영하지 못하는 문제를 낳았다. 그래서 이런 서비스를 시장의 몫으로 넘기는 경우도 있었는데, 모두가 골고루 누려야 하는 서비스가 지불능력에 따라 차별화되는 문제점을 낳았다. 그래서 정부나 시장이 아닌 다른 영역이 사회서비스를 맡기자는 발상이 제3섹터의 출현을 불러왔다. 국가마다 그 정의가 조금씩 다르지만 제 3섹터는 민간기관이 비영리 활동을 펼치고, 공공부문이 영리활동을 지원하는 일종의 ‘중간지대’를 뜻한다.

 

발상은 그랬지만 그 이전부터 국가와 시장의 규칙에 지배당하지 않는 시민들의 자발적이고 다양한 활동들이 있었기에 이런 구상이 실현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제3섹터는 새로운 조직을 만드는 게 아니라 기존에 존재하던 자치/자급조직의 입지를 강화시키자는 구상이기도 했다(이탈리아의 사회적 협동조합이 대표적이다).

 

독점재벌들이 시장을 좌지우지하고 복지체계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한국이다보니 1990년대부터 제 3섹터 개념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초기에는 외국사례를 소개하고 구상하는 수준에 머물다 자활사업과 사회적 기업 등으로 구체화되었다. 2008년에는 한국노동연구원이 한국의 제3섹터를 경험적으로 파악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앞서 말했듯이 제3섹터는 중간지대를 만드는 사회전략이고, 그런 의미에서 협동조합이야말로 사(私)와 공(公)의 중간에 있는 조직이다.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필요를 충족시키는 조직이지만 사회적인 공공성을 실현하는 조직이 바로 협동조합이기 때문이다. 물론 원칙적으로는 협동조합이 조합원들에게 이윤을 배분하기 때문에 비영리인 제3섹터에 속하기 어렵다는 문제제기도 있다. 하지만 외국과 달리 한국협동조합의 현실상 그런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에 제3섹터의 성격과 충돌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협동조합운동과 제3섹터 논의가 다양하게 접목될 수 있다.

 

하지만 접점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겹쳐지며 그 영역으로 확장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짧은 글이니만큼 많은 논의를 하기는 어렵고 몇 가지 쟁점만 얘기해 보자.

 

첫째, 제3섹터는 권력과 화폐가 지배할 수 없는 영역이기에 참여자들의 다양한 아이디어와 창의성, 자발성이 꽃을 피울 수 있는 영역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그 영역에서 힘을 얻고 자존감을 회복한다. 이는 YMCA를 비롯한 다양한 생협운동, 협동조합운동이 목표로 삼고 있는 바이다.

 

하지만 그런 제 3섹터가 정말 존재하는가라는 비판은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 특히 한국처럼 정부와 시장의 영향력이 강할 뿐 아니라 그 둘이 결탁(정경유착)해서 사회를 지배하는 곳에서는 중간지대가 형성되기 어렵다. 영향력 있는 몇몇 명망가나 단체들은 그런 영역을 개척할 수 있지만 일반 시민들 사이로 그 영역이 확장될 수는 없다는 회의적인 비판도 있다. 그렇다면 협동조합운동은 제3섹터로의 확장에 앞서 이런 영역을 만들고 그 영역을 넓혀왔는가라는 물음을 스스로 던져봐야 한다. 정부와 시장의 부조리하고 불공정한 규칙에 저항하며 그 영향력을 제 1섹터와 제 2섹터로 제한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는가? 강정마을이나 삼성전자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협동조합운동이 그동안 얼마나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는가?

 

둘째, 협동조합운동이 제3섹터에서 활동하려면 자율적이어야 하는데, 정말 자율적인가? 물론 대부분의 협동조합이나 제3섹터가 그런 자율성을 유지한다고 자부한다. 그런데 정부와 국가는 좀 다른 개념이고 협동조합운동이 정부로부터 자율적일지는 모르나 국가로부터는 자율적이지 않다. 정부와 달리 국가는 사회를 지배하는 힘이다. 특히 한국의 국가는 수도권으로 모든 자원을 집중시키고 국가보안법을 비롯한 통제체계를 만들며 사람들이 관계를 맺고 생활하는 방식을 관리해 왔다. 협동조합운동은 이런 국가로부터 자율적이고 국가에 얽매이지 않는 다른 관계와 삶들을 만들어 오고 있는가?

 

흔히 협동조합이 운동과 사업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다고 얘기하는데, 수도권 문제, 국가규칙을 따르는 순응적인 삶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협동조합이 제 2섹터를 강화시키는 경제조직 이상의 역할을 하기 어렵다. 거시적인 과제를 빼놓고 지역활동만 강조하다보니, 그보다 더 거시적인 ‘경제학’의 관점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한국사회에서 제3섹터가 ‘소비되는 방식’을 보면 여전히 관주도이다. 사회적기업 인증제도에서 드러나듯, 한국의 국가는 대안적인 개념도 자신의 것으로 포획한다. 제3섹터의 활동을 ‘지원’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지배’하려 든다. 그러니 대안에 대한 논의는 많지만 실제로 대안이라고 할 만한 사례가 없다. 협동조합운동은 그동안 어떤 사례를 만들어 왔는가?

 

그런 점에서 <YMCA>의 협동조합운동이라면 좀 달라야 한다. 故황주석 선생이 이미 그런 틀을 닦아 놓았다. 『마을이 보인다, 사람이 보인다』에서 황주석 선생은 ‘시민생활나라’라는 개념을 제안했다. “시민생활나라는 참여와 자치, 자결과 협동을 중히 여기고 이로써 운영됩니다. 또한 시민생활나라는 연대를 중히 여깁니다. 나라 안의 연대, 나라 간의 연방을 형성하며 나라가 뻗어갑니다.” 중요한 말들이 이 속에 모두 담겨 있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나름의 방법과 전략을 황주석 선생은 실천하셨다.

 

YMCA의 협동조합운동은 이 고민과 실천을 이어받아 지금 현실에 맞게 고치고 생명력을 불어넣어야 할 것이다. 그런 고민 없이는 확장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선거 때마다 ‘민주주의 꽃은 선거입니다’라는 현수막을 곳곳에 내건다. 중앙선관위가 그동안 보여왔고 또 지금 보이는 행태를 보면 이 기관이 선거를 맡는 게 과연 민주적일까 의문이 들지만, 일단 그건 넘어가자.

 

투표와 선거가 민주주의에 중요하다는 점을 받아들여도, 찍을 만한 사람이 없어도 정당투표라도 하러 투표장에 가야 한다는 현실을 울며 겨자먹기로 받아들여도, 이건 좀 심하다 싶은 일이 내가 사는 동네에서 벌어지고 있다. 내가 사는 상현 2동은 행정구역으로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에 속하는데, 이번 총선 때 기흥구의 후보자에게 투표를 해야 한다. 2012년 2월 27일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가 선거구의 인구상한선을 맞춘다는 명목으로 선거구를 이렇게 만든 탓이다.

 

그래서 우리 동네에는 용인을 선거구 후보자와 용인병 선거구 후보자 현수막이 동시에 붙어 있다.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누가 이 동네 후보자인지를 알 수 없다. 길 하나를 두고 동네 사람들이 서로 다른 후보자에게 투표한다. 3만 2천명의 상현 2동 주민이 다른 구와 합쳐지는 게 정치개혁일까? 옆 동네에 사람이 부족하니 옆 동네에 가서 대표를 뽑으라는 얘기에 우리는 어떤 민주주의를 생각해야 할까?

 

물론 지도상으로 보면 수지구가 기흥구와 붙어 있다. 하지만 생활권으로 보면 두 구의 사이를 경부고속도로가 가로질러 두 지역간의 연계는 거의 없다. 그리고 지방자치제의 실시로 주요한 문제들이 시 단위에서 결정된다지만 이건 아니다. 어쨌거나 지금의 소선거구제 하에서는 국회의원이 지역주민들의 대표 아닌가?

 

그런데 이 문제는 내가 사는 동네만의 것이 아니다. 용인시 기흥구의 동백동과 마북동 주민들은 처인구로 선거구가 묶였고, 수원시의 서둔동 주민들도 팔달구로 묶였다. 늘어난 기흥구와 권선구의 인구수를 조절하기 위해 동을 빼고 집어넣는 과정에서 이런 해괴한 사건이 터졌다. 주민들에게 한 마디 의견을 물어보지도 않은 채 정치인들이 자기 마음대로 선거구를 쪼개고 붙였다.

 

선거구의 인구편차가 3 대 1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헌법재판소 결정에 따라 이런 ‘선거구 짜깁기’는 앞으로도 계속 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인구가 계속 늘어나는 경기도권의 신도시들은 계속 이런 일을 겪을 수밖에 없다. 용인시와 수원시, 경기도가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냈지만 얼마나 효과를 볼지는 알 수 없다.

 

그동안 이 문제를 다룬 언론기사가 많지 않지만 문제를 다룬 언론사들도 정치인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선거구를 개편한다는 ‘개리맨더링’의 관점에서만 이 문제를 다뤘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선거구 획정이 아니라 선거제도이다. 현행 소선거구제 하에서는 ‘선거구 짜깁기’가 반복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동안의 한국정치에서 목격했듯이 당리당략 앞에 원칙이나 논리는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대의과정 자체가 왜곡되어 있는데, 대의민주주의가 무슨 소용인가? 비단 선거구를 정하는 일만이 아니다. 후보자를 정하거나 후보를 단일화하기 위한 각종 여론조사결과가 결코 정확하지 않고 조직적인 개입이 가능하며 소위 ‘셋팅선거’가 일반적이라는 사실은 이미 한참 전부터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매번 정책선거를 떠들어대지만 각 정당이 발간하는 두꺼운 자료집을 제외하면 선거에서 정책을 구경하기 어렵다.

 

그러니 이런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면 전국적으로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도를 도입하는 것이 올바르다. 그런데 선거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은 지금과 같은 ‘이익연대’ 구도에서는 불가능하다. 이런 변화가 가능하려면 녹색당이나 진보신당같은 소수당이 국회로 진출해야 한다. 그들에게 힘을 실어주자.

 

그제는 출판사와, 어제는 각시랑 조촐한 출판기념회를 했다.

몇 부가 나갈 것 같냐는 물음에 그냥 웃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많은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고 살이 붙어 다양하고 새로운 사건이 벌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내 개인적으로는 한국사회에서 중요한 사건들, 잊혀져서는 안 되는 중요한 사건들을 다시 호명할 수 있어 좋았다. 이 책은 내가 드러나는 책이 아니라 바로 그런 사건들이 드러나는 책이다.

"멀리 외국의 혁명을 동경하지 않아도 될 만큼 엄청난 저항과 투쟁의 역사가 바로 우리의 것이"라는 점, 안성과 수원의 3-1운동과 소안도, 안면도 핵폐기장 반대투쟁, 부안 핵폐기장 반대투쟁, 백석동 주민투표, 매향리 국적포기 선언, 수원촛불, 장애인이동권 투쟁, 이라크전 인간방패, 지율스님 천성산 반대 농성, 남원주민 도로건설 반대, 대추리 주민 국적 포기선언, 세종대 생협, 달구벌 버스, 병역거부선언, 녹색당 창당 등 우리 역사의 사건들로 시민불복종과 직접행동, 정치를 설명할 수 있어 좋았다. 책 표지에 깨알같이 적힌 사건들은 이 책이 단지 '내 책'이 아님을 말해준다.

그리고 “우리가 이겼다!”라고 외치면 좋겠지만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결코 너희 마음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외치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내 나름의 근거로 설명했다.

이제 책은 손을 떠났고, 총선 직접과 직후라는 상황이 선거를 중심에 두지 않는 정치를, 직접행동하는 정치를 얼마나 주목할지 걱정되긴 한다. 그래도 나는 마음이 편하다. 내 할 몫은 했으니까...ㅎㅎ 이제 남은 건 친구들의 몫?ㅋㅋ

제 책을 증정받으신 분들은 '행복의 책'이라 생각하시면 되겠다. '행운의 편지' 아시죠? 책을 받고 난 뒤 10명의 사람들에게 책을 사서 나눠주고 리뷰를 써서 올리지 않으면 평생 저주가 따라다닌다는...ㅎㅎ 제게서 이미 책을 받으신 녹색당 관계자분들, 세종대 생협 분들, 앞으로 제 책을 받으실 분들 긴장하시길...^^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9646766

요즘 삼성불매운동이 한창이다. 트위터나 페이스북에서는 삼성카드를 폐기하거나 삼성가맹점을 탈퇴하였음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삼성물산이 제주도 해군기지사업에 참여해 구럼비를 폭파하자 이에 대한 분노가 불매운동으로 시민들을 이끌고 있다.

 

허나 삼성물산이 폭파를 중단하면 불매운동이 중단되어야 할까? 그렇지는 않다. ‘토건국가’라는 말처럼, 이미 전국 곳곳이 제주도 강정마을과 비슷한 처지이고, 공사현장에는 어김없이 재벌들의 로고가 박혀 있다. 재벌들의 문제는 한 가지 사업이 아니라 사업을 하는 방식 자체가 문제이다.

 

 

그런 점에서 《재벌들의 밥그릇》(홍익출판사, 2012년)은 우리의 인식을 넓혀주는 좋은 책이다. 그동안 재벌들의 문제점을 다루거나 폭로한 책들은 간혹 있었지만 그것을 중소기업과의 관계에서 다룬 책은 없었다. 더구나 이 책은 일선현장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기자의 시각이라 구체적인 관계를 엿보게 한다. 수치와 논리를 강조하는 시대이니만큼 이 책에는 재벌비판의 필요성을 증명하는 수치가 가득하다.

 

 

중소기업을 위한 한국은 없다!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되고 난 후 여기저기 ‘기업하기 좋은’ 나라, 지방을 떠든다. 하지만 과연 중소기업에게도 한국이 기업하기 좋은 나라일까? 《재벌들의 밥그릇》에서 가장 먼저 지적되는 문제는 재벌들이 중소기업의 기술을 가로채는 문제이다. 한국의 재벌들은 독자적으로 기술을 개발하지 않고 중소기업이 개발한 기술을 ‘제휴’나 ‘협력’의 명목으로 가로채고 있다.

 

중소기업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재벌들이 그만한 기술투자를 하지 않을까 의심할 수 있다. 하지만 책에 따르면, 한국의 10대 재벌이 시설 투자와 연구개발 투자에 쓴 돈을 합쳐도 이 돈이 매출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07년의 7.57%에서 2010년에는 6.57%로 하락했다.”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3년 동안 지속적으로 투자비중이 떨어졌다.

 

정말 재벌들이 기술을 가로챈다면 왜 중소기업이 법에 호소하지 않았을까? 이에 대한 현실적인 설명도 책에 담겨 있다. 중소기업이 부품을 생산해서 재벌에 납품하는 하도급 구조 때문에 납품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법적인 문제제기가 불가능하다. 그리고 법에 호소해도 사실관계를 증명하기가 어렵고 재판 비용도 많이 들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 그리고 설령 이긴다 해도 현행법에 따르면 보상을 제대로 받기 어렵다. 그러니 기업활동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중소기업이 재벌들에게 책임을 묻기 어렵다.

 

비단 기술 가로채기만이 아니다. 이 책이 지적하는 중요한 문제는 중소기업들을 후려치는 납품단가 인하이다. 책에 따르면, 재벌들은 매년 최소 20%이상의 단가 인하를 목표로 삼는다. 원자재 시장의 가격변동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회사의 연간 이익 목표가 정해지면 그것에 맞춰 원가절감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단가 인하 목표가 설정된다.” 그리고 납품 중소기업이 이익을 보면 무조건 단가를 깎는다. 구체적으로 보면 “납품 중소기업의 이익률이 10% 이상이면 인하율은 5%, 이익률이 5%면 인하율은 2%, 이익률이 3%면 인하율은 1%로 정하는 식이다. 그러니 대기업의 사냥감이 안 되려면 이익률이 1% 이하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대기업들은 더 이상 납품단가 인하 여력이 없는 중소기업은 거래대상에서 쫓아낸다.” 이런 상황에서 어찌 중소기업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리고 가장 심하게 협력업체들을 쪼는 곳이 재벌 서열 1, 2위인 삼성과 현대차이다. 특히 “삼성전자 무선사업부가 이런 방법으로 2002년에서 2005년까지 4년간 국내 부품업체들을 상대로 단가 인하를 한 규모는 모두 3조 28억 원에 달하는데, 이는 같은 기간 중 영업이익 10조 7,925억 원의 28%를 차지한다.”

 

그럼에도 중소기업이 울며 겨자먹기로 재벌들에게 납품하는 이유는 그렇게 부품을 공급하다보면 일본이나 유럽의 회사들도 거래를 하자고 요청하고 납품규모가 커지기를 바라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니 글로벌 경영의 선두주자는 재벌이 아니라 중소기업인 셈이다. 이들이야말로 온갖 어려움과 희생을 감수하고 세계경영에 나서고 있으니.

 

재벌들이 좋은 일자리를 빼앗는다!

뒤처지는 중소기업 대신 잘 나가는 재벌들 중심으로 경제구조를 다시 짜자고 얘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주장은 우리 삶을 포기하자는 얘기와 다를 바 없다. 왜냐하면 재벌들이 아니라 중소기업이 한국의 노동시장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중소기업 종사자 수는 1,114만 9,134명으로, 전체 종사자 1,261만 2,692명의 88.4%를 차지한다.” 그리고 1997년부터 2007년 10년 동안 중소기업 종사자 수는 287만 6,846명이 늘어났지만, “같은 기간 동안 대기업의 종사자 수는 오히려 10만 6,598명이 감소했다.”

 

IMF외환위기 이후 엄청난 공적자금을 받았던 재벌들은 정작 그 세금을 내온 노동자들을 해고해 왔다. 그러니 ‘고용없는 성장’이라는 비난이 정부나 새누리당에서조차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선진국의 상황은 반대이다. “선진국의 경우 중소기업이 전체 고용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77.8~50.2%로, 우리나라에 비해 10~40%나 낮다.” 재벌들이 가장 많은 이익을 독점하면서 노동시장에는 해를 입히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그리고 이런 구조는 중소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상황도 열악하게 만든다. “종업원 300명 이상 대기업 노동자의 평균임금을 100으로 볼 때, 종업원 5~9명 규모의 중소기업 노동자 임금은 2010년 1~3분기에 60.2로 2008년 62.3, 2009년 63.4에 비해 더 낮아졌다.”

 

이처럼 열심히 일해도 가난한 ‘노동빈곤’의 원인은 재벌중심의 경제구조와 무관하지 않다. 이런 재벌들이 경제규모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계속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심각한 문제이다. 삼성과 현대차 두 재벌의 “매출 합계액 121조 7,000억 원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11.45%에 달”하는 현상은 매우 위험하다.

 

한국사회에서 회사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많이 택하는 생계가 각종 ‘자영업’이다. 그런데 재벌들은 이조차 내버려두지 않는다. 기업형 슈퍼마켓(SSM)만이 문제는 아니다. 책에 나온 것만 정리해도, 재벌들이 운영하는 카페 브랜드가 8개, 외식업이 11개, 와인판매 7개, 골판지 6개, 온라인 교육 4개, 막걸리 4개 등이고 차량정비와 사진관, 소금 생산, 농산물 생산유통가공, 웨딩사업, 장례업, 콜택시 사업, 학원사업 등 그 영역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그러니 계열사 수도 계속 늘어난다. 상위 20대 재벌의 계열사 수는 2002년 말 514개였는데, 2010년 말 859개로 무려 67%나 늘어났다. 얼마 전 재벌들의 문어발식 확장이 비판을 받자 잠시 주춤하는 듯 했지만 금방 입장을 바꿔 최근 신세계그룹은 베이커리 사업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정부가 방울을 달 수 있을까?

이런 ‘불공정한 하도급거래’의 고리를 끊고 문어발식 확장을 막지 않는 이상 정상경제는 불가능하다. 재벌총수들은 말끝마다 자본주의를 내세우고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고 외치는데, 그들이 기본적인 규칙을 파괴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대책을 내놓겠다며 호들갑을 떨고 있지만 재벌과 중소기업의 하도급 구조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으면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어렵다. 저자는 “납품단가 연동제(원자재 가격이 오르면 납품단가에 반영하는 제도)를 도입하거나 최소한 업종별 협동조합에 조정신청권이 아니라 협의권을 부여해서 집단 교섭을 보장”하는 대책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리고 중소기업과 재벌이 함께 살 수 있는 방안으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동반성장과 같은 개념들을 제시한다.

 

 

하지만 저자 스스로 8장에서 ‘피죤’의 막장경영을 다루며 법과 원칙이 통하지 않는 세상을 얘기하듯이, 그런 일은 현재의 정치상황에서 일어나기 어렵다. 왜냐하면 그런 막장이 피죤만의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를 보면, 삼성그룹 또한 막장이다. 그리고 재벌회장들이 구속되었다 보석으로 풀려나는 걸 보면 한국사회 또한 이미 막장이다.

 

아마도 각종 경제 수치를 찾아 인터넷을 뒤져본 경험을 가진 사람은 이 책의 가치를 인정할 것이다. 재벌개혁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필요한 많은 수치들이 이 책에 담겨 있다. 반면 비슷한 논의가 반복되는 점은 이 책의 단점이다.

어제 편집자분이 집으로 찾아와 최종교정을 봤다. 솔랑군 덕분에 이래저래 호사를 누리며 산다. 어쨌거나 긴 시간의 작업이 끝났다.
편집자 분이 물었다. "얼마나 만족스러우세요?"
"글쎄요, 교정지를 들여다보고 있으니 또 새로이 들어오는 부분도 있고, 이걸 이렇게밖에 못 다뤘나 싶은 부분도 있고. 하지만 만족스럽다는...ㅎㅎ"
그동안 쓴 책들은 일종의 개념에 관한 책이라 내가 생각하는 세상을 내 방식대로 보여주진 못했다. 이번

민주주의표지최종.pdf

책은 온전히 나의 생각과 시선으로 밀고 나갔으니 만족스럽다. 내게 본인의 책을 쓰라고 강요(?)했던 이들 보고있나?ㅎㅎ
이제 남은 건 판매전략입니다.ㅎㅎ 아시죠? 이 책이 저의 상반기 수입원일지 모릅니다. 많이 팔아주셔야 제가 앵벌이 하지 않고 맘 편히 이런저런 활동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전략을 짜실 때 도움되라고 아주 따끈따끈한 책의 표지도 올립니다.^^
다음주면 책이 나옵니다. 페이지수는 대략 350페이지, 가격은 14,000원.
저도 이제 본격적인 판촉모드로 들어가겠습니다.
아, 녹색당 깔때기는 어떻게 되냐구요? 이 책의 한 장이 녹색당입니다. 책 표지를 잘 보시면 이 책에서 다뤄지는 사건들이 쭉 나열됩니다. 사건들을 찾아보는 깨알같은 재미도?^^

 

이런저런 정당들이 모두 청년에게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가장 보수적인 새누리당마저도 27세의 이준석 씨를 비상대책위원으로 선정하고, 27세의 손수조 씨를 국회의원 후보로 공천했다. 민주통합당은 청년비례대표를 공개모집하고 경선을 통해 4명을 후보로 뽑았다. 통합진보당 역시 2030 국회의원 만들기 ‘위대한 진출’이라는 경선오디션을 통해 31세의 김재연 씨를 후보자로 선출했다. 녹색당에서는 ‘녹록하당’이라는 청년모임이 활동 중이고, 진보신당은 “3포 세대에 연애를 허(許)하라”라는 슬로건으로 청년정책을 제안했다. 그리고 안철수 교수 등이 강연했던 희망콘서트에서 자원활동했던 청년층을 중심으로 청년당이 만들어졌다.


청년정치의 등장이라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뜨거운 열기가 정치현장에서 뿜어지고 있다. 제 18대 국회의원의 평균연령이 53.5세라는 점을 고려하면, 20, 30대의 정치진출은 정치란 연륜을 필요로 한다는 잘못된 상식을 깨는 긍정적인 현상으로 평가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열기가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올지는 의문이다. 제 19대 국회의원 공천결과를 보면, 새누리당의 평균연령은 55.3세, 민주통합당의 평균연령은 53세이다. 두 당만 놓고 보면, 청년대표들은 낙동강 오리알이 될 수밖에 없다. 과연 이런 열기가 청년의 세력화나 새로운 정치의제의 등장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청년은 실재하는가?


청년의 삶이 주요한 사회이슈로 부각된 것은 처음이 아니다. 이미 1990년대에 ‘신세대’나 ‘X세대’라는 세대담론이 있었고, 2000년대 후반에는 ‘88만원 세대’가 화두로 떠올랐다. 세대담론의 속성상, 그 담론은 담론에서 배제된 사람들(非대학생)을 만들고 세대로 호명된 사람들 내부의 차이(계급이나 계층의 차이)를 감춘다. 그리고 계속되는 새로운 호명은 언제나 기존 담론의 쇠퇴를 불러왔다. 지금의 청년담론은 이런 관행에서 벗어났을까?


청년이 하나의 존재로 실재하려면 그들을 묶을 공통의 문제나 집합정체성이 필요하다. 즉 기존의 계급이나 계층논의에 포섭되지 않는 독특성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 지금 한국사회에 그런 독특성이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을 먼저 던져야 한다.


이번 총선에서 20, 30대 후보들은 하나같이 청년실업과 20대의 정치적 발언권을 얘기한다. 정당들도 청년정책으로 대학생 주거지원, 대학구조 개혁, 청년 고용 및 노동정책 등을 얘기한다. 청년을 전면에 내세운 청년당의 정책 역시 국공립대 무상교육 및 사립대 반값등록금, 청년 창업․창직 기금 100조 조성 및 해외 일자리 100만개 창출을 주요 의제로 내세웠다.


그런 공약과 정책이 청년들의 삶을 개선시킬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그들만의’ 문제일 수는 없다. 한국사회에서 주거와 노동시장에서의 배제가 청년만의 문제일까? 그리고 20대의 대학생 비중이 80%를 넘는 사회라 청년정책이 대학생을 배제할 수 없지만 정책의 수혜층이 너무 빤하다. 대학생의 삶도 고되지만 실업계 고등학교나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청년들의 삶은 더욱 심각한 위기에 노출되어 있다(사회는 이들을 시민이나 주민의 범주에 잘 포함시키지도 않는다).


한국사회에서 20대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해결책이 특정 세대로 한정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청년정치 논의는 일종의 해프닝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청년정치가 제 길을 가고 있나?


그런 점에서 지금의 청년정치는 ‘그들만의 리그’로 제한될 가능성이 높다. 더구나 오디션이라는 기이한 방식으로 정치신인들을 뽑는 과정이 과연 민주적일까? 그런 과정에서 청년의 의제화와 정치세력화가 정말 가능할까?


청년당이 공직피선거권을 19세로 낮추자는 정책을 내세우고, 녹색당과 진보신당도 이를 정책으로 만들려고 한다. 피선거권이 낮아지고 20, 30대의 세대별 집단투표가 실현된다면 젊은 정치인들이 많이 배출될 수도 있다.


하지만 정치세력화만으로 청년정치가 활성화되기는 어렵다. 인물정치에서 정책정치로의 전환을 모색하려면, ‘청탁․시혜담론’에서 ‘요구․권리담론’으로의 근본적인 전환이 필요하다. 대표에게 이것저것을 청탁하고 고마워하는 대의정치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청년을 비롯한 그 어떤 존재의 정치세력화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적어도 대학생이 대학에서조차 기본적인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학생인권조례를 비롯해 시민의 시민권, 사회권을 강화시키려는 시도들이 하나같이 심각한 도전을 받는 이 한국사회에서는 말이다. 각자가 자신의 몫을 요구해야 그 공통의 몫의 실체가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다.


그리고 경제민주화 없이 정치민주화는 불가능하다. 청년에 대한 시혜적인 조치가 아니라 일하고 노는 문화와 노동조건 자체가 변해야 한다. 많은 일자리가 아니라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야 하고, 많이 일하는 게 아니라 적게 일해도 정당한 대우를 받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해고는 살인이다’는 명제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국사회에서 그런 변화를 이루려면 노동현장에 깊숙이 관심을 가지고 개입해야 한다. 이타적인 연대가 아니라 ‘예비노동자’로서의 요구가 필요하다. 지금의 청년정치는 어떤 가능성을 일구고 있을까?



청년에게 정말 미래가 있을까?


단지 세대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인 위기에 맞서야 청년정치가 가능하다. 고장과 사고가 자주 일어나도 그 소식조차 제대로 알 수 없는 핵발전소가 이 땅에 이미 21개나 있다. 청년의 미래를 백날 얘기해 봐도 핵발전소 사고 하나면 모든 기반이 사라진다. 이런 근본적인 위기 상황에서 어떤 미래를 얘기할 수 있을까?


20대의 활발한 정치참여가 새로운 정치문화를 만들고 있다고 얘기하지만 아직까지 그 변화를 실감하지 못하겠다. 그냥 과거의 담론들이 유령처럼 되살아와 정치권 언저리를 배회하는 모습만 보일 뿐이다. 20대가 정치주체로서 현실을 살려면 ‘현장’이 필요하다. 정치에서는 빠른 속도의 소통도 중요하지만 악착같이 달려드는 활동도 필요하다. 그런 활동이 펼쳐지는 곳이 바로 현장이다.


멀리 볼 필요 없다. 대학부터 시작하자. 정치는 이곳에서도 이루어진다.

<시사인>에는 '죽음의 송전탑'이라는 다소 무시무시한 제목으로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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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말 난생 처음으로 정당의 발기인이 되었다. 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머리를 쿵 때렸다. 불가능한 미래를 ‘실감’하면서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동안 정당과 선을 긋고 살아왔지만 핵발전소와 핵폐기장을 아이에게 넘겨줄 수 없다는 절박함이 그 선을 넘어 녹색당에 주목하게 했다.


하지만 생각의 변화가 생활의 변화를 이끌지는 못했다. 5년 만에 바꾼 핸드폰이 전기를 잡아먹는 괴물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편리함을 포기하지 못했다. 손만 뻗으면 충전할 컴퓨터와 콘센트를 찾을 수 있는 수도권에 사는지라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시간은 줄어들지 않았다. 녹색이념은 불편한 녹색삶으로 잘 스며들지 못했다.


단지 삶의 문제만은 아니다. 전기가 만들어지는 곳이나 그 전기를 수도권으로 끌어오려고 전국에 세워지는 송전탑에 관해 언론은 거의 보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언론매체는 수도권에서 멀리 떨어진, 해안가에 밀집된 핵발전소들에서 끊임없이 터지는 사고들을, 농사도 지을 수 없고 사람도 살 수 없는 끔찍한 송전탑이 마을을 통과한다는 사실을 보도하지 않는다.


그래서 바로 옆 동네에 사는 사람도 그런 사실을 잘 모른다. 나 역시 태어나서 자란 부산에 핵발전소가 있고 그곳에서 만들어진 전기가 본적지인 밀양을 지나 지금 살고 있는 수도권으로 오는데, 그 과정을 단 한 번도 연결지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명절 때마다 밀양을 들락거리면서도 그곳에만 69개의 철탑을 세우려한다는 사실, 그 싸움이 지난 7년 동안 계속되었다는 사실도 뒤늦게 알았다. 공정무역 커피를 마시고 초콜릿을 먹으며 나의 착함을 노출시키면서도 정작 일상의 연관고리에는 무심했다.


그렇게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지난 1월 16일 밀양에서 이치우 어르신이 돌아가셨다. 신고리핵발전소에서 수도권으로 전기를 끌어오기 위해 새로이 만들어지는 765송전탑이 어르신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송전탑 건설을 위한 벌목을 막으려 산을 기어오르는 할머니들에게 용역들이 ‘워리워리’하며 조롱하는 장면을 보던 74세의 어르신은 “오늘 내가 죽어야 문제가 해결되겠다”며 분신자결하셨다. 마을회관에서 휘발유를 몸에 끼얹고 마을 입구 다리로 걸어 나오던 어르신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 소식을 전해 듣는 우리는 그 절박한 마음을 얼마나 공감할 수 있을까.


탈핵 없이는 미래세대의 삶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알면서도 지금 당장의 편안함을 포기하기는 어렵다. 허나 정부와 한전, 용역들을 욕한들 우리의 삶이 바뀌지 않는다면 핵발전소와 송전탑은 계속 세워질 것이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우리의 삶이 불편해져야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


이제 한진중공업의 CT85가 아니라 밀양의 765송전탑을 향해 탈핵희망버스가 3월 17일에 출발한다. 희망버스가 일종의 ‘연대의식’을 드러낸 사건이라면, 탈핵희망버스는 연대와 더불어 속죄를 뜻한다. 먹거리나 에너지를 거의 생산하지 않는 수도권에 산다는 것 자체가 이미 죄를 짓는 시대가 왔다. 화려한 서울의 전기불빛에 양심의 눈이 멀지 않았다면 송전탑이라는 가시를 뽑아내야 한다.


탈핵희망버스만이 아니다. 5개 시도에서 천 명 이상의 당원을 모아야 한다는 그 어려운 정당법을 충족시키며 녹색당이 지난 3월 4일에 창당되었다. 조직을 동원하지 않은 창당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비웃듯, 탈핵을 염원하는 시민들의 마음이 녹색당을 출범시켰다.


송전탑 하나 없앤다고, 몇몇 사람 바뀐다고 세상이 바뀔까 냉소하기 전에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미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사실에 눈을 떠야 한다. 지금 움직이지 않으면 희망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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