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지식연구회]의 정치사회비평에 쓴 글입니다.
충분히 얘기를 다루지는 못했지만 지금 현실에 대한 답답함을 좀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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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재보궐 선거가 끝났다. 결과는 예상대로 한나라당의 패배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1명, 진보신당 1명, 무소속 후보 3명이 당선되었고, 경기도 시흥시장도 민주당 후보가 차지했다. 시도의원 선거에서도 서울시 광진구에서 한나라당 후보 1명이 시의원으로 당선된 것을 제외하면 강원도에서 무소속 후보가, 전라남도에서는 민주노동당 후보가 당선되었다. 구시군의원 선거에서도 한나라당은 1석도 얻지 못했고 민주당이 2석, 민주노동당이 1석, 무소속이 2석을 차지했다.

그 전에 치러진 경기도 교육감 선거까지 고려한다면 집권 여당의 완전한 패배라 얘기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이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약 1년이 지난 뒤에 치러졌다는 점에서, 이번 선거는 그동안의 정부정책에 대한 평가이기도 하다. 따라서 선거 결과만 보면 민심은 이명박 정부에게서 서서히 멀어지고 있다. 그 점은 계속 떨어지던 투표율이 올라갔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왜 투표에 환멸을 느끼던 유권자들이 의식적으로 투표소를 찾았을까? 투표에 참가하지 않으면 이미 조직화된 표를 가진 여당 후보가 당선될 터이니, 이를 막기 위해 유권자들이 의식적으로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을까?

어쨌거나 정치에 대한 환멸이 참여의 관심으로 변한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된 걸까? 한나라당이 참패를 했으니 정치의 희망이 생긴 걸까?

작년 초 서울시 교육감 선거가 한나라당의 승리로 끝난 뒤 많은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이 ‘촛불의 실패 또는 패배’를 얘기했다. 제도정치로 이어지지 못하는 촛불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도 심심찮게 나왔다. 그렇다면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판과 촛불의 목소리가 선거로 이어졌으니 이제 진보의 승리가 눈앞에 다가온 걸까?

오히려 선거 이후 이명박 정부는 지난 노동절 집회와 촛불 1주년 기념집회를 무참히 짓밟았다. 4월 30일부터 5월 2일까지 221명이 연행되었고, 용산철거민대책회의가 용산에 설치했던 천막도 기습 철거되었다. 선거결과로 드러난 민심에도 이명박 정부는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더욱더 철저히 탄압하겠다는 의도를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다.

지난 5월 2일 법무부와 문화체육관광부, 행정안전부 장관이 발표한 대국민담화문은 그런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한 푼의 관광수입도 아쉬운 때입니다. 그리고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실날같으나마 도처에서 경제의 회복의 기미가 보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때 폭력시위로 국력을 낭비할 시간이 어디에 있습니까?…우리는 지난해 무분별한 시위로 많은 국력을 낭비했습니다. 값비싼 교훈을 얻은 것입니다. 올해에도 이러한 상황이 재발된다면 정부는 부득이 법에 따라 단호히 조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푼의 관광수입도 아쉬우니 시위를 벌이지 말라는 논리가 참으로 터무니없지만, 실제로 연행된 사람들은 48시간을 꼬박 갇혀 있다 석방되었으니 단호한 법의 집행이라 하겠다. 앞으로 정부는 자신을 반대하는 모든 목소리를, 자신을 반대하는 모든 민심을 폭력이라 규정하고 탄압하려 들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부는 지역토호의 중심세력인 새마을운동중앙회와 한국자유총연맹과 손을 잡고 ‘3대 신국민운동’을 추진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이제 정부는 민심을 따르기는커녕 자신이 민심을 만들고 조작하겠다는 강한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이 점은 과거와 달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대국민담화문에 동참했다는 점에서도 그러난다. 왜냐하면 개정될 통신비밀보호법이나 저작권법에 따르면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사이버 법치주의’를 실현하고 ‘사이버 민심’을 조작할 중요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명박 정부와 기득권층은 아예 민심이 형성될 수 있는 장을 없애고 과거처럼 순종하는 국민을 만들려고 노력할 것이다. 이미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결사의 자유, 집회 및 시위의 자유 등 시민의 온갖 기본권이 위협을 받고 있으니, 이런 흐름은 단지 가능성으로만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비극은 민심을 거역하는 정부가 이명박 정부만의 특징이 아니라는데 있다. 그동안 한국사회에서 권력을 장악한 정부는 언제나 민심을 거역하고 민심을 억누르고 조작해 왔다. 그리고 좌/우를 떠나 많은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은 그런 과정에 동참하며 이득을 누려왔다. 언제나 민심은 민중의 가슴이 아니라 전문가들의 통계수치나 지식인들의 전문용어, 정치인들의 공약(空約)으로만 드러나야 했다. 그런 점에서 이명박 정부는 과거의 정부보다 조금 더 노골적일 뿐이다.

더구나 이명박 정부에서 권력을 쥔 자들은 이런 흐름을 계속 지킬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왜냐하면 재보궐 선거에서 몇 번을 패배해도 3년 반 뒤의 대통령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명박 정부에 대한 불만이 새로운 정치세력의 출현보다 박근혜라는 보수정치인에 대한 지지로 전환되리라 예상하고 있다. 즉 한국의 기득권층은 대표선수만 바꾸면 이권을 지킬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러니 민심 따위가 어찌 무섭겠는가?

그렇다면 한국의 진보는 이런 분위기를 바꾸고 자신이 그토록 강조하는 민중의 가슴에서 민심을 끌어낼 어떤 대안을 가지고 있을까? 촛불 1주년을 기념하는 많은 자리에서도 나는 그런 대안들을 잘 찾을 수 없었다. 진보의 위기는 바로 그 점에 있고, 그런 점에서 위기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며칠 전 경기도 시흥시에 사는 분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무소속 시민후보로 출마한 후보 사무실에서 자원봉사를 하는데, 어처구니 없는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다.

진보신당, 민주노동당, 창조한국당이 시민후보를 지지한다고 공식 선언했는데, 선관위에서 그런 내용을 선거홍보물에 넣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당 대표들이 지지연설하는 것도 금지하겠다는 방침이라고 한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법이다. 

정당이 자체적으로 결의를 해서 자기 후보를 내지 않고 무소속 후보를 지지하기로 했는데, 그 사실을 유권자들에게 알리는 것이 불법이라니? 이런 한심한 일이 생기고 있는 게, 우리나라의 선거법이고 선거관리의 실상이다.

공직선거법 84조는 전가의 보도

  
민주노동당, 창조한국당, 진보신당이 시흥시장에 출마한 무소속 최준열 후보를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 민정례
시흥시

선관위에서 근거로 들고 있는 법조항은 공직선거법 제84조이다. 이 조항은 "무소속후보자는 특정 정당으로부터의 지지 또는 추천받음을 표방할 수 없다"라고 되어 있다. 선관위는 이 조항을 근거로 야3당이 시민후보를 지지한다는 사실을 표방하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조항은 무소속으로 출마한 사람이 특정한 정당으로부터 암묵적으로 지지를 받고 있다고 표방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 취지이다. 예를 들면 선거를 앞두고 정당을 탈당한 후보가 선거운동을 하면서 "사실은 00당은 나를 지지하고 있고, 나는 당선되면 복당하겠다"고 이야기하고 다니는 것을 문제삼는 조항인 것이다.

따라서 여러 정당이 공식결의를 해서 한 후보를 지지하기로 한 경우를 염두에 둔 조항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번 시흥시장 선거처럼, 정당의 공식 조직에서 결의하여 선거공조 차원에서 무소속 후보를 지지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것은 공직선거법 84조의 입법취지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선관위의 해석을 납득할 수 없다.

더구나 2007년에 국민중심당에서 선관위에 질의했을 때에, 중앙선관위는 '대통령선거에서 - 정당과 무소속 후보자간에 선거공조를 위하여 후보자를 단일화하는 경우 사퇴한 후보자나 그 정당의 대표자 또는 간부 등이 단일화된 후보자나 그 정당의 선거대책기구의 간부나 구성원 또는 연설원이 되는 것은 공직선거법 제84조에 위반되지 아니할 것임'이라고 해석했다. 그런데 이번 시흥시장 선거에서는 야3당이 무소속후보를 지지한다는 사실을 선거홍보물에 넣지도 못하고 하고, 진보정당 당대표가 지지연설을 하는 것도 금지하겠다고 한다.

선관위는 지지를 허락해야 한다

이미 시간적으로 선거홍보물에 야3당의 지지사실을 넣기는 어렵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선관위는 야3당 당대표자들의 지지연설이라도 허용해야 한다. 정치활동을 하는 정당이 지지를 한다는데, 그것을 표현조차 못하게 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자의적인 잣대로 선거법을 해석한다면 선거 자체를 불공정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일을 보면서 다시 한 번 느낀 것은, 우리나라 선거판에서 신진세력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이다. 기득권 정당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선거법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시흥에서 시도하고 있는 노력들이 더욱 가치가 있다.

한가지 덧붙인다면, 이번 4·29 보궐선거를 보면서, 기초지방선거 정당공천제는 폐지되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이론적으로야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지만 기초지방선거 정당공천제는 너무 폐해가 크다. 이번에 시흥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도 한나라당, 민주당의 예비후보자들은 공천에 목을 맸다. 민주당의 경우에는 정세균 대표가 참석해서 사무실 개소식을 해 놓고, 그 다음날 후보가 사퇴하고 새로운 후보가 공천을 받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정당공천=당선이라는 등식이 깨지지 않는 이상 우리나라 지방자치는 '주민자치'가 아니라 '기득권 정당들의 잔치판'을 벗어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하승수 (제주대학교 법대 교수)

경인일보에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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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냐’라는 냉소적인 말이 유행했다. 뼈 빠지게 일해 모은 재산을 한순간에 날려버린 사람들은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다른 무엇을 바쳐도 좋다고 믿었다. 경제만 살아난다면 독재자가 출현하건, 생태계가 파괴되건, 기본적인 노동권이 무시되건 상관없다고 믿었다. 그러면서 정작 우리는 경제를 살려야 하는 이유에 대해 묻지 않게 되었다. 왜 경제를 살려야 할까? 정말 경제만 살아난다면 정말 우리는 행복하고 좋은 삶을 살 수 있을까?

어쨌거나 그렇게 모든 걸 바쳤건만 전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는 경제 살리기에 대한 믿음을 산산조각내고 있다. 그런 실패는 특정한 정책의 실패나 외부환경의 변화만이 아니라 경제를 잘못 이해한 것에서도 비롯되었다. 원래 경제란 말은 오이코스(oikos), 즉 가계(家計)라는 말에서 나왔다. 쉽게 얘기해 경제는 집안 살림을 꾸려나가는 ‘살림살이’를 뜻했다. 가족들이 다른 일을 하는데 지나치거나 궁핍하지 않도록 적절한 규모를 유지하는 것이 가정살림의 지혜이듯, 공동체의 경제는 적절한 규모를 지키며 시민들이 정치나 문화에 관심을 쏟게 하는 지혜를 갖춰야 했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의 경제 살리기는 살림의 규모를 키우는 것에만 관심을 쏟았다. 살림살이가 나아지려면 삶이 튼튼하게 세계에 뿌리를 내려야 하는데 그동안 우리 삶은 주가와 부동산 거품에 실려 둥둥 떠다녔다. 살림살이는 내실을 다지는 것을 포기하고 거대한 권력이나 자본에 살림을 팔거나 맡기는 식으로 흘러갔다. 그러다보니 우리 삶은 외부환경의 변화에 휘둘리는 근본적인 위기를 벗어날 수 없다.

사실 삶이 세계에 뿌리를 내리게 하는 좋은 방법은 바로 정치이다. 어느 정도의 규모가 적절한 살림인지, 특히 가족이 아니라 공동체의 살림살이를 결정하는 건 경제가 아니라 정치의 몫이고 민주주의의 몫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힘과 부, 기질이나 문화가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하나의 공동체 내에서 어울려 살기 위해 필요한 합의요, 공동체를 튼튼하게 하는 기본조건이다.

우리의 경제 살리기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건 그런 기본조건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경제 살리기가 공동체를 튼튼하게 만들기는커녕 빈부의 격차를 더욱 늘리고 있고 서로간의 합의를 무시하게 만들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타인의 위기가 나의 기회라고 믿는 잘못된 경제적 계산이 함께 하는 정치적 자유를 대체했다. 윤리와 합의를 지키는 것이 어리석은 짓으로 여겨지는 세상, 이런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들의 삶이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제 아무리 혼자 많은 부를 챙기더라도 이런 세상에서는 온전히 삶을 유지하기 어렵다.

따라서 경제를 살리는 과정은 정치나 민주주의와 분리될 수 없다. 시민이 굶주림에 시달리며 삶을 마음껏 누릴 수 없을 때 그 공동체는 온전할 수 없기 때문에 민주주의는 공동체 차원에서 그런 어려움을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민주주의는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들과 동등하게 살아가며 밥을 먹을 수 있는 공동체의 수단이다. 민주주의는 시민이 똑같이 교육을 받고 건강한 몸과 마음을 유지하며 경쟁할 수 있는 기본 바탕을 만든다. 그러니 삶이 위기에 처할수록 정치에 무관심할 게 아니라 오히려 정치에 더욱더 관심을 쏟아야 자신의 삶을 지킬 수 있다.

그동안 우리는 스스로 밥숟갈을 놓으며 끼니를 걱정해 왔던 셈이다. 정치는 정치인에게, 경제는 기업가에게 맡겨두고 자기 앞가림이나 잘하자는 잘못된 생각을 해왔기 때문에 우리 삶이 지금 이 모양이다. 그러니 아직도 청와대 비서관이 성매매를 하다 잡혔는데 경찰청장이 이를 두둔하고, 부패청산을 내세웠던 정부가 뒷구녕으로 구린 돈을 받는다. 에이, 더러운 잡놈들 하며 정치를 더욱더 멀리 할수록 세상은 더욱더 나빠질 수밖에 없다.

지난 경기도 교육감 선거는 12.3%의 투표율을 기록했다. 투표율의 하락이 곧 민주주의의 위기는 아니지만 그런 무관심은 치명적이다. 공적인 것에 대한 관심만이 우리 삶을 온전히 지킬 수 있게 한다. 당장 지금부터 관심을 가져야 한다.

[작가세계]에 쓴 글입니다.
요즘 분위기 돌아가는 걸 보면 심상치 않네요.
인터넷에서도 망명객과 난민들이 늘어날 듯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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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고라라는 저잣거리

옛날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Socrates)는 저잣거리에서 청년들에게 앎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사는 게 올바른가를 가르쳤다. 왜 그는 학교가 아니라 시장 저잣거리에서 청년들을 가르쳤을까? 당시 소피스트들이 돈 많고 힘있는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가 생활하던 것과 비교하면 소크라테스의 삶은 아주 엉뚱했다.

하지만 그에겐 그렇게 해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앎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삶 속에서 깨달음을 얻어가는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구두공은 구두를 만드는 삶에서, 목수는 나무를 깎고 다듬는 삶을 통해 자신의 지혜와 탁월함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지혜와 탁월함을 서로 견주는 과정에서 시민들은 공동체의 앎과 공공성을 구성했다. 이렇게 앎이 삶과 분리되지 않았을 때에만 좋은 삶을 살 수 있고 좋은 시민이 될 수 있기에 청년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되물어야 했고, 소크라테스는 이런 청년들이 스스로 해답을 찾도록 도왔다.


소크라테스의 무대였던 그리스의 저잣거리 아고라(agora)는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이 아니라 다양한 삶의 질문들이 오고가는 정치적인 장이기도 했다. 서로 가진 것을 나눠야 하는 삶의 필요가 만든 아고라는 앎과 삶이 함께 숨을 쉬는 만남의 장이었다. 새로운 사람들이 만나 물건의 가치를 흥정하고 따지는 과정에서 앎의 폭은 더욱더 넓어졌다. 그리고 아고라에서 열리는 민회는 개인의 고민을 넘어 전체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며 앎의 깊이를 더하는 소통의 장이었다.

고대 그리스만이 아니라 이 땅에서도 장이 서는 곳은 만남과 소통의 장이었다. 먹거리가 있고 축제가 있고 사람 사는 냄새가 풍기는 곳이 장이었고, 많은 수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여 정보와 지혜를 나누고 공동체의 미래를 걱정할 수 있는 공간도 바로 장이었다. 이런 장은 일제 식민지와 군사독재의 탄압을 받으며 사라지거나 물건만 사고 파는 시장으로 변질되었지만 만남과 소통의 필요성은 그런 장의 부활을 기다려 왔다.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공간의 출현은 이런 장을 부활시켰다. 인터넷은 새로운 만남과 소통을 가능하게 했는데, 데이터로 구성된 이 세계에서는 서로 만나고 소통하는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졌고 그 범위도 확장되었다. 더구나 디지털 카메라나 캠코더의 등장, 자유자재로 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있는 유비쿼터스(ubiquitous) 환경 등은 만남과 소통의 방식 자체를 변화시키고 있다. 인터넷은 이전 사회의 시․공간 개념을 뛰어넘은 새로운 현실을 만들고 있다.

이런 속도와 새로움에 힘입어 인터넷은 아고라로 대표되던 고대의 직접민주주의를 부활시키려 한다. 현대의 아고라에서는 내가 굳이 광장으로 나가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네트워크를 통한 전자민주주의(teledemocracy)는 단순한 투표를 넘어 시민들이 많은 양의 문자와 영상정보를 서로 교환하며 의견을 나눌 수 있게 한다. 그런 점에서 [텔레데모크라시](거름, 1994)를 쓴 아터튼(Christopher Arterton)은 인터넷이 커뮤니케이션과 대화, 정보교류에 바탕을 둔 새로운 정치체제를 만들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리고 한국처럼 가부장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정치문화가 뿌리를 내린 곳에서 사회적 약자들은 소통과 만남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인터넷은 그런 제약을 극복하도록 돕는다. 인터넷 세계에서는 나이나 성별, 장애를 감추고 자신이 원하는 인물로 탈바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포스터(Mark Poster)는 컴퓨터 글쓰기가 고정된 역할을 없애고 기존의 위계질서를 혼란에 빠뜨려서 의사소통을 새롭게 배치하고 주체가 속한 시공간을 변화시켜서 주체를 분산시킨다고 본다.[각주:1] 이런 재배치와 분산을 통해 사람들은 자신이 바라는 상상된 정체성을 구성할 수 있다. 그리고 권력과 돈, 지식이 지배하는 현실세계에서는 그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던 사람들도 인터넷에서는 빛을 발하는 고수가 될 수 있다.

실제로 인터넷 세계에서는 청소년들이 어른들과 동등하게 맞짱을 뜨며 논쟁을 벌일 수 있다(이명박 대통령 탄핵서명운동을 발의한 고교생 안단테를 보라!). 몇 살이냐를 따지고 초딩, 고딩이라 비난하기도 하지만 현실세계만큼 나이가 폭력적으로 상대방의 입을 막지는 못한다. 이렇게 누리꾼들은 현실의 제약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자신의 욕망을 표출하고 현실에서는 만들기 어려운 자신들의 공동체를 형성하기도 한다.

그리고 인터넷에서는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경계도 사라진다. 미네르바같은 이가 정부의 경제정책을 비판할 수도 있고, 일반 대중이 진중권을 공격하기도 한다. 비전문가가 전문가를 공격하는 방식을 문제삼을 수는 있지만 뒤집어 보면 그것은 전문가가 대중에게 개입하는 방식이기도 하기 때문에 부작용만을 강조할 수는 없다. 더구나 의견을 말하는 순서도 먼저 로그인한 순서를 따르니 각각의 의견이 똑같이 관심을 받을 수 있다. 이런 인터넷에서의 만남은 이미 만들어진 위계질서를 뛰어넘을 수 있다.

또한 인터넷은 소통의 방식도 새로이 재구성한다. 옛날에는 직접 참여한 사람들만 그 내용을 공유할 수 있었지만 인터넷은 여러 의견과 실천을 저장해서 참여하지 못한 사람들도 그 내용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정보가 필요한 사람들은 정보를 직접 검색할 수 있고 자신의 견해를 보태어 위키피디아(http://www.wikipedia.org/)처럼 집단지성을 구현하거나 UCC로 재창조할 수도 있다. 인터넷은 아무리 하찮은 개인이라도 모든 지식에 접할 수 있다는 계몽주의의 꿈을 기술적으로 실현했다.[각주:2] 또한 동시에 여러 곳에서 벌어지는 토론에 동시에 참여하며 토론을 이끌어 갈 수도 있기 때문에 이런 소통은 기존의 시․공간 개념을 뛰어넘는다.

이렇게 다른 점도 그 장의 성격은 옛날 아고라와 비슷하다. 옛날 아고라처럼 인터넷에서도 물건을 사고 팔고 정보와 의견을 나눌 뿐 아니라 비슷한 취미와 정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뭉치기도 한다. 내가 관심을 두는 취미생활이나 상품 구매에 대한 품평과 정치적인 사안이 맞물릴 수 있다는 점은 그런 세계의 총체성을 증명하는 일이기도 하다.[각주:3] 삶의 공간이기에 인터넷은 여러 가지 다양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고 사람들의 참여를 자극하고 독려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인터넷의 발달로 권위적인 사회, 권력과 자본, 언론이 지배하는 한국사회에서 시민들이 직접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 2008년을 뜨겁게 달군 촛불집회이고, 미디어다음의 아고라(http://agora.media.daum.net/)는 그 변화의 중심에 섰다. 실제 현실에서는 불가능해 보이던 대통령의 탄핵이 인터넷에서는 백  만명을 넘기는 서명을 받았다. 그리고 촛불집회에 나가면 아고라라고 적힌 깃발이 나부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정치, 사회, 문화를 토론하는 공간이 마치 정당이나 시민단체처럼 깃발아래 뭉쳤으니 다른 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현상이다.

촛불집회만이 아니라 그 뒤를 이은 촛불산책이나 명동 무한도전×2도 그런 변화를 반영한다. 아고라와 블로그, 카페 등의 인터넷 공간에서, 그리고 길거리와 광장, 학교와 동네같은 현실 공간에서도 변화의 싹은 조금씩 계속 자라고 있다. 이제 시민들은 영웅이나 지도자가 자신을 대신해주길 바라지 않고 스스로 주권(主權)을 행사하려 한다. 그동안 정치에 무관심한 자기 모습을 반성하면서 책이나 교과서에서 외우기만 했던 민주주의나 민주공화국을 구체적인 삶의 물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각주:4]. 단지 목소리를 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인터넷은 현실세계에까지 영향력을 미치는 가상‘현실’로 성장하고 있다.


인터넷 권력이동

2008년 미국 선거에서 오바마는 흑인으로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흑인이 미국 대통령이 되는 일은 불가능하거나 아주 먼 미래에나 가능하리라 믿었는데 오바마는 그런 예상을 완전히 뒤집었다. 오바마의 정치적인 성공을 보며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의 영향력을 강조했다.


오바마는 블로그 형태의 홈페이지를 운영하며 유권자들과의 적극적으로 소통을 시도했고, 1천만 명이 인터넷 공간에서 오바마를 지지했다. 이 유권자들이 자발적으로 오바마의 전략과 정책을 복사해서 다른 곳으로 퍼날랐고, 그 중 3백만 명은 홈페이지를 통해 선거자금을 내기도 했다. 오바마는 인터넷 네트워크를 만드는 사이트(Social Network Site)인 페이스북(http://www.facebook.com/)과 마이스페이스(http://www.myspace.com/), 트위터(http://www.twitter.com/)와 동영상 제공 사이트인 유투브(https://www.youtube.com/) 등에 자신의 정보를 올리고 사람들이 이것을 자유로이 활용하게 했다.

물론 오바마가 선거에 인터넷을 활용한 최초의 정치인은 아니다. 그런데 오바마는 인터넷을 단순한 홍보의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고 그 세계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활용했다. 선거정보와 정책이 가공되고 복제되어 무수히 퍼져나감으로써 오바마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선거운동을 펼칠 수 있었다.[각주:5] 오바마만이 아니다. 유투트에서 진행되었던 정책토론회 역시 많은 시민들의 관심을 받았다. 2007년 미국 대선을 다룬 유투브 정책토론회에서는 전문가가 아니라 시민들이 직접 후보자에게 질문을 던졌는데, 각 후보당 평균 조회수는 민주당이 약 8만 건, 공화당이 약 1만 6천 건이나 되었다.[각주:6] 그리고 이런 관심은 후보자들의 사이트나 블로그 방문으로 이어졌다.

그동안 사람들은 정당이나 사회단체가 다루는 이슈들, 국회나 청와대같은 곳에서 벌어지는 일만이 정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고라의 저잣거리는 그동안 우리가 정치의 장이라고 믿어온 공간이 아주 좁은 것이었음을 증명한다. 시시껄렁한 동영상이나 드라마 등을 공유한다고 여겼던 유투브가 정책토론회를 진행하고, 블로거나 UCC가 독립언론을 외치며 블로거 저널리즘을 만들고 있다.

심지어 인터넷에서 파워블로그들의 영향력은 정치인이나 기자와 맞먹거나 그것을 능가하고 있다. 그리고 블로그와 블로그를 이어주는 메타블로그의 등장으로 블로그 전문사이트도 엄청나게 성장하고 있다. 올블로그(http://www.allblog.com/)와 같은 메타블로그는 개별 블로그를 서로 묶어주면서 이용자들이 의견을 공유하고 덧붙어 더욱더 풍성한 콘텐츠를 만들게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각주:7]

이런 환경에서 스스로 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가공하여 판단을 내리고 그런 판단을 다른 이들과 공유하려는 시민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 더욱이 인터넷은 정보를 전달하고 공유하는 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췄기 때문에 굳이 내가 정보를 만들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의 정보를 자유로이 복사, 활용할 수 있게 했다(인터넷에서는 내가 직접 글을 쓰지 않아도 내 생각과 비슷한 사람들의 글을 퍼오는 것만으로 내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다).

이런 새로운 흐름은 ‘웹 2.0’이라는 개념으로 정리되고 있다. 기존의 인터넷이 정보를 제공하는 일차적인 역할만을 담당했다면, “웹2.0에서의 웹은 콘텐츠와 서비스 플랫폼 역할을 하게 됨으로써 이용자 스스로가 정보를 생산하고 소비하고, 정보는 양방향으로 소통하게 된다. 플랫폼으로써의 웹! 이것이 곧 웹2.0이다.”[각주:8] 그러니 ‘웹 2.0세대’라는 말은 인터넷에 능한 세대만이 아니라 현실의 부조리에 항의하고 참여하는 능동적인 시민세대를 뜻하기도 한다. 그래서 아고라의 논객 권태로운 창은 이를 “21세기의 시민 민주주의”라 부르기도 했다.[각주:9]

웹2.0의 정신인 개방과 공유, 참여는 능동적인 시민의 가치와 어울린다. 웹2.0의 정신은 자신을 드러내며 개방하고 자신이 가진 지식과 정보를 타인과 나누며 그것을 바탕으로 대중의 자발적인 참여를 끌어내고 있다. 이 정신은 정보와 가치를 독점하며 대중을 계몽하고 이끌려 했던 기존의 사회운동이 가지지 못한 개방과 공유의 정신을 가지고 있다. 한 블로거는 여기에 연결과 협업을 덧붙여 웹 2.0의 정신을 주장하기도 한다. “연결 = 경계를 넘어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자. 협업 = 신뢰를 바탕으로 함께 시작하고 함께 완성하자. 나는 운동의 기본 중의 기본이 소통과 조직화라고 생각한다. 소통과 조직화를 위한 필수조건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위와 같은 개방, 공유, 참여, 연결, 협업의 정신이다.”[각주:10] 물론 이 정신이 누리꾼들의 삶에 지금 온전히 반영되고 있다고 믿기는 어렵다. 많은 점에서 아직 인터넷은 가능성의 장으로 남아있고 이 정신은 그 가치를 구현하기 위한 실천을 필요로 한다.

어쨌거나 인터넷은 현실의 장애물이 소통과 만남을 방해하는 한국사회에서도 새로운 장으로 떠올랐다. 과학수사대(CSI)를 능가하는 누리수사대, 공무원이나 학자를 능가하는 집단지성, 종이신문의 폭과 속도를 앞지른 블로그 저널리즘, 시사잡지를 능가하는 메타블로그 등은 대중의 참여문화를 퍼뜨리고 발전시키는 힘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인터넷의 힘이 강해지는 만큼 현실의 권력과 자본은 그 힘을 길들이려 한다.


인터넷 디아스포라의 출현과 식민화

인터넷의 힘이 가상을 넘어 현실로 침투할수록 현실을 지배하는 권력과 자본의 반격도 거세진다. 아고라에서 활동하던 권태로운 창이나 미네르바와 같은 누리꾼들을 수사하거나 체포, 구속하는 것은 그 반격의 신호탄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인터넷의 힘을 통제하려는 시도는 그 이전부터 있어 왔다. 이미 2007년에 정부는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을 추진한 바 있고, 지금도 4월 국회 통과를 목표로 개정안을 추진하고 있다. 한나라당이 제안한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은 수사기관의 감청대상을 확대하고 통신사업자가 의무적으로 감청설비를 설치하도록 하고 있다. 만일 이 개정안이 통과되면 수사기관은 법원의 영장 없이도 용의자로 지목한 사람의 휴대전화기록이나 IP, 로그기록 등을 통신사에 요구할 수 있다. 그리고 지난 4월 1일 통과된 저작권법 개정안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불법 복제물을 올리는 인터넷 게시판에 대해 3회 이상 삭제 명령을 내린 뒤에 게시판을 최대 6개월동안 폐쇄시킬 수 있게 했다. 또한 정보통신망법안 개정안은 불법정보의 유통을 막는다는 취지로 불특정다수에게 제공되는 정보를 통신사가 모니터링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정치적인 면에서 상황은 더욱 심각한데, 현행 공직선거법은 선거 180일 전부터 후보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글 또는 사진을 인터넷에 올리는 것을 금지한다. 이것은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범하는 것이다. 후보들간의 상호비방을 막는다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이 조항은 시민들의 정치적인 표현을 근본적으로 제한한다(실제로 선관위는 이 조항에 따라 UCC활용을 막았다). 더구나 이 법은 19세 미만의 청소년들의 선거운동도 금지해서 미래시민의 정치참여를 원천봉쇄한다.

이런 법안들이 다소 어지러운 인터넷 세계를 정화시키리라 기대하는 순진한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현실을 보면 그 힘은 언제나 강자보다 약자를 향해 행사되어 왔다(용산참사는 그 점을 비극적으로 증명했다). 그러니 이런 법안들이 인터넷 세계를 공평하게 만들 것이라 기대하는 건 헛된 생각이다. 지금 당장은 문제가 없는 듯하지만 권력을 가진 자의 판단에 따라 이런 조항들은 악법으로 활용될 수밖에 없다.


아렌트(H. Arendt)는 전체주의 국가의 특징을 설명하면서 국가가 그 범죄를 정하고 모든 시민을 잠재적인 범죄자로 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경고한 바 있다.[각주:11] 독일 나치즘이 수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했을 뿐 아니라 그들을 난민으로 만들었듯이, 이런 법안들은 수많은 누리꾼들을 인터넷 디아스포라[각주:12]로 만들 수 있다. 만일 현실세계라면 이런 법안들은 시민에게 정치적인 추방령을 내려 그들을 디아스포라로 만드는 법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법에 따라 경찰과 검찰은 촛불집회에 참석했던 사람들을 구속하고 카페를 운영하는 운영진들을 위협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자기 글을 지우거나 서버를 외국 사이트로 옮기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권력이 인터넷의 자유로움을 억압한다면, 자본은 그 자유로움을 변질시킨다. 자본은 자유로운 인터넷 공간을 사유화된 공간으로 바꾸려고 시도하고 있다. 인터넷 공간을 기업의 마케팅 공간으로 변질시키거나 저작권을 내세워 디지털의 속성인 자유로운 복제를 사유화로 대체하려는 시도가 대표적이다. 이런 현상은 18세기의 인클로저 운동처럼 공유지인 인터넷을 사유화된 공간으로 바꾸고 있다. 권력이나 자본과 결탁해 독점적인 위치를 누려온 언론사들 역시 여론형성과 전파에 미치는 자신들의 영향력을 잃을까 걱정하며 인터넷의 부정적인 면만을 부각시키려 애쓴다.

그리고 대형 포털회사들이 인터넷 세계를 관장하면서 여러 문제점들을 낳고 있다. 일단 누리꾼들이 네이버와 같은 대형 포털을 이용하다보니 그곳의 환경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각주:13] 김헌식은 ‘포털 매트릭스’에 포획된 포털 네티즌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그들이 활동하는 공간은 다른 곳이 아니라 포탈 공간이기 때문이다. 포털은 미디어의 블랙홀이다. 결국 포털은 대중을 다중으로 해체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포털 대중을 만들어 냈다. 기존의 대중문화는 해체되고 포털 대중문화가 만들어진 것이다. 각 매체로 분산되었던 것이 포털 안에 집적되어 하나의 현상을 만들어 낸다.”[각주:14] 실제로 누리꾼들은 포털 사이트에서 토론이나 포털기자단에 참여하기보다 주로 실시간 검색어를 클릭하거나 커뮤니티 게시판의 글을 읽는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블로그를 활용하는 방식도 자료저장(41.6%)이나 개인적인 기록공간(36.4%)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고, 그러다보니 블로그의 일부 콘텐츠를 비공개를 설정하는 경우도 많다. 즉 누리꾼들 스스로가 블로그를 사적인 공간으로 인식하고 블로그를 아는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 네트워크(SNS)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환경에서는 능동적인 시민이 출현하기 어렵다.[각주:15]

이렇게 권력과 자본이 자유로운 생활공간를 장악하는 현상을 하버마스(J. Habermas)는 ‘생활세계의 식민화(colonization of life world)’라 불렀다. 하버마스는 생활세계의 공론장이 위계질서를 무시하고 이제까지 의문시되지 않았던 주제를 다루며 공개적인 토론으로 비판적 공개성을 확립했다고 본다. 즉 공론장에서는 지위가 없는 사람들도 토론을 통해 의견을 제시할 수 있고 여론으로 정부나 기업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런데 하버마스는 수용성이 높고 침투성이 강한 대중매체(라디오, 영화, 텔레비전 등)의 발달과 문화산업(cultural industry)의 성장이 이런 공론장을 점점 변질시켰다고 본다.[각주:16] 대중매체와 문화산업의 발달은 공중에게서 발언권과 공권력에 대한 비판적인 관심을 제거할 뿐 아니라 사생활에도 개입하고 그 삶을 조작한다. 하버마스의 견해를 빌린다면,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공론장의 출현은 생활세계의 식민화 현상을 극복하고 새로운 비판적 공개성을 확립하는 듯했지만 체계의 힘이 이를 다시 식민지로 만들고 있다. 이런 식민화는 개방과 공유, 참여, 연결, 협업이라는 웹2.0의 정신을 파괴한다.

아직 결말이 나진 않았지만 권력이 누리꾼들을 디아스포라로 내몰고 자본이 인터넷 공간을 사유화하고 식민화하려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열심히 즐긴 당신, 떠나라는 그들의 요구에 어떻게 답해야 할까?


망명을 떠나지 말고 그들을 망명보내기

문화는 순간적인 변동보다 오랜 시간 동안 누적된 경험과 삶으로 구성된다. 인터넷 공간에서 새로이 불붙은 능동적인 시민참여의 문화 역시 그런 경험과 삶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현실의 권력과 자본은 그런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만일 그것이 갑갑하고 두려워 짐을 싸 떠날 생각을 한다면, 능동적인 시민의 문화는 구성될 수 없다. 권리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고 쟁취하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떠남은 새로운 가능성을 찾지 못하고 우리가 사는 세계 자체를 파괴시킬 수 있다. 내가 서 있는 이 세계를 포기하지 않을 때에만 우리는 변화의 가능성을 기대할 수 있다.

권태로운 창은 아고라를 “모든 것의 근원이자 부활의 노래”인 바다라고 불렀다. 그의 말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인터넷이 새로운 아고라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 옛날 아고라가 반역과 반란의 장이기도 했듯이, 누리꾼들은 인터넷을 식민화하려는 자들에 맞서 싸워야 한다. 그런 개입은 인터넷만의 저잣거리만이 아니라 실제 세계의 저잣거리에서도 등장해야 한다.

물론 2008년에 촛불집회가 몇 달 동안 이어졌지만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막지 못한 걸 보면 실제 세계의 개입은 분명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짐을 싸 떠나야 할 사람은 시민이 아니라 부패한 권력자와 자본가들이다. 설령 디아스포라로 떠돌지라도 언젠가는 그들을 몰아내고 다른 시민들과 함께 자유롭고 억압이 없는 공동체를 만들고 말리라는 신념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전두환이 아직도 발을 붙이고 사는 이 사회에서 그들이 망명을 떠나는 선례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 아이들이 미래를 꿈꿀 수 있다.

  1. 마크 포스터. 『뉴미디어의 철학』(민음사, 1994), 219~222쪽. [본문으로]
  2. 마크 포스터. 같은 책, 140쪽. [본문으로]
  3. 촛불집회의 한 축을 담당했던 인터넷 동호회 82cook의 김수진은 이렇게 얘기한다. “요리라는 주제에 관심이 있어 모이기 시작한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나면서, 회원들의 관심사는 자연스럽게 요리에서 삶의 지혜, 주부들의 너무나 큰 관심사인 시댁 문제, 패션, 자식교육 등으로 옮겨갔고, 급기야는 그 관심사가 확대되면서 삶의 거의 모든 분야를 접할 수 있는 커다란 커뮤니티가 되었다.”(김수진. 「여성들이 뿔났다」. 『창작과 비평』 2008년 가을호. 102쪽). [본문으로]
  4. “그동안 나라 돌아가는 것에 무관심했던 점에 대해서 속죄하는 마음으로, 지극히 개인주의자였던 내가 ‘우리’라는 개념을 마음속에 품게 됐으며, ‘우리’나라에서 살아갈 후손들에게 제대로 된 나라를 물려줘야 한다는 생각이 뚜렷하게 박혔다.”(김수진. 앞의 글. 107쪽) [본문으로]
  5. “웹에서 오바마 강세현상에 대해 미국 네티즌들은 오바마와 마니아(mania)의 합성어인‘오바마니아’, 버락(Barack) 오바마와 민주주의(democracy)를 합친 Barackacy 등의 신조어를 만들어 지지할 정도였다.”(송경재․민희. 「미국 유튜브 정치(YouTube Politics)의 시민참여: 한국적 함의를 중심으로」. 『정보화정책』 2008년 여름호. 51쪽). [본문으로]
  6. 송경재․민희. 앞의 논문. 50쪽. [본문으로]
  7. 이호영․정은희. 「블로그를 중심으로 본 디지털 콘텐츠의 사회적 확산」. 『KISDI 이슈리포트』. 17쪽. [본문으로]
  8. http://actionbasecamp.net/ [본문으로]
  9. 나명수. “이것이 아고라다”. 『창작과 비평』 2008년 가을호. 94쪽. [본문으로]
  10. 앞의 웹사이트. [본문으로]
  11. 한나 아렌트 지음. 이진우․박미애 옮김. 『전체주의의 기원1』(한길사, 2006), 192~201쪽. [본문으로]
  12. “대문자의 디아스포라Diaspora라는 말은 본래 ‘이산’離散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이자 ‘팔레스타인 땅을 떠나 세계 각지에 거주하는 이산 유대인과 그 공동체를 가리킨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물론 사전상의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날 ‘디아스포라’라는 말은 유대인뿐 아니라 아르메니아인, 팔레스타인인 등 다양한 ‘이산의 백성’을 좀더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소문자 보통명사diaspora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졌다.“(서경식 지음. 김혜신 옮김. 『디아스포라 기행: 추방당한 자의 시선』(돌베개, 2006), 13쪽). [본문으로]
  13. 양적인 측면에서는 네이버가 전체 57.6%의 블로그를 유치하고 있으며 게시물(포스트)의 경우도 59.4%를 차지함으로써 전체 블로그 시장에서 압도적인 지위를 차지한다(이호영․정은희, 앞의 논문, 15쪽) [본문으로]
  14. 김헌식. 『포털 매트릭스: 포털 제국과 문화의 위기』(로크미디어, 2008). 27쪽. [본문으로]
  15. 이호영․정은희. 앞의 논문, 20~24쪽 [본문으로]
  16. “그것들은 공중을 시청자로서 자신의 궤도로 끌어당기는 동시에 공중으로부터 ‘성숙’의 거리, 즉 말하고 반론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한다.…대중매체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는 표면상으로만 공론장이다. 게다가 대중매체가 그 소비자에게 보증하는 사적 영역의 고결함도 역시 환상이다.…공중은 비공공적으로 논의하는 소수 전문가들과 공공적으로 수용하는 소비대중으로 분열된다.”(하버마스. 한승완 옮김. 공론장의 구조변동](나남출판, 2001), 280~285쪽) [본문으로]

경희대에 강의를 하러 갈 때마다 느끼는 건데, 캠퍼스를 걷다 보면 가끔 착각에 빠질 때가 있다.
저 말은 분명 한국어가 아닌 듯한데... 중국어나 일본어 같은데... 모여서 길을 걷는 학생들 중 많은 수가 그런 언어를 쓰고 있다.
그리고 수업 때 출석부를 봐도 중국 학생이 꼭 1명 이상은 속해 있다.

어찌된 일일까 생각하다 얼마전 한겨레 기사를 하나 봤다.
"대학가마다 차이나타운 왜?"라는 기사다(http://www.hani.co.kr/arti/specialsection/newspickup_section/347676.html).
기사를 보니 한국에 유학온 중국학생이 5만명을 넘는다고 한다.
자료를 보니, 경희대가 3,267명으로 대학들 중 최고이다.
기사에 따르면, 중국 학생들이 한국으로 유학을 오는 이유는 지리적으로 가깝고 물가가 싸며 한국 기업이 중국에 많이 진출해 한국어 수요가 늘어나고 한국 드라마로 호감도가 높아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지방대에 유학생이 급증하는 것은 정원을 채울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게 탈도 많고 비리도 많은 지방대들이 유학생을 정원외로 받아 대학재정에 보탠다고 하니 눈물이 날 지경이다(그런데 유학생 등록금 수준은 국내 학생의 절반 수준이라고 한다).

그런데 기사만 봐서는 왜 중국학생들이 한국으로 오는지 알 수가 없다.
더구나 중국 유학생이 가장 많다는 경희대에서 중국 학생들이 수업에 참여하는 걸 보면 한국어로 아주 기본적인 의사소통을 하는 수준이다.
수업시간에 내 말을 알아듣는 학생이 있을지 의문스럽고, 수업에 참여하는 비중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다.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학생도 아주 간혹 눈에 띄지만 대부분은 자기들끼리 중국말로 대화하느라 바쁘다.

한국의 대학은 이미 그 기능을 상실했는데, 이들은 무엇하러 이곳에 왔을까?
기사에 난 것처럼 가깝고 물가가 싸고 한류 열풍 탓에 호감도가 높아졌고 돌아가서 한국기업에 취직하려고?
한국 학생들이 이런 조건 때문에 다른 유학을 떠나려 할까?

하여간 내겐 미스터리이고 한국에서 그네들이 보내는 삶도 참 궁금하다.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어떤 미래를 꿈꾸고 있을까?
요즘 보면 우리 사회가 개념을 잃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속된 말로 무개념의 사회가 되고 있는 거죠.

소위 권력의 핵심이라는 청와대의 행정관이 관련 업체의 접대를 받고 성매매까지 나서고.
그걸 조사해야 할 경찰청장이 자신도 예전에 접대를 해봤다며 재수없으면 성매매에 걸린다고 얘기하고.
이런 얘기가 드러났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은 조금도 반성하지 않고 접대를 받고 성매매를 하며 자신의 힘을 마음껏 누리고 있을 겁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난 뒤에 여러 가지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지만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는 무개념의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이게 이명박 정부만의 잘못은 아닌 듯합니다.
노무현 정부가 '상식이 통하는 정부'를 만들겠다고 했지만 정작 자신들은 부안과 대추리의 주민들을 짓밟는 '몰상식'을 증명했지요.
그런 몰상식을 딛고 이명박 정부가 무개념의 정부를 만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따지면 한국에서는 아직까지 한 번도 상식적인 정부가 들어선 적이 없는 게지요.

그리고 이런 몰상식과 무개념은 비단 정부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권력이 그렇게 타락하는 동안 사회도 그 힘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동문이라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최근 고려대의 모습에서도 그런 무개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옛날 고대 출교생 사태를 기억하시는지 모르겠네요.
교수들을 감금했다며 학생들에게 '출교'라는 제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 사건인데요.
법원이 과한 처벌이라며 출교를 무효로 만들었는데도, 이제는 대학에도 '무기정학'이라는 제도가 있다는 점을 상기시켜주고 있다네요.
http://www.dailyseop.com/section/article_view.aspx?at_id=99428&gb=da
이미 졸업한 학생들까지 불러서 문제를 삼는다니 코미디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한번 스승은 영원한 스승임을 깨닫게 해주려는 걸까요?
김연아를 낳은 고대이니 그 자존심을 끝까지 세워보겠다는 걸까요?

제가 보기엔 이 역시 고대 총장이나 교수들만의 문제는 아닌 듯 싶습니다.
이미 대학은 권력이나 자본의 힘에 끌려다니고 있으니까요.
아마도 삼성 이건희 회장이 명예박사학위를 받는 걸 반대하지 않았다면 사태가 그렇게 가지 않았을 테니까요.
스승이 될 생각은 별로 없으면서 알량한 권위나 내세우고 있는 게 지금 대학의 모습이니까요.

브루스 커밍스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이 지은 [대학과 제국]이란 책을 보면
정부와 기업이 대학을 어떻게 길들여왔는지가 잘 드러납니다. 카멜롯 프로젝트, 트로이 프로젝트 등 미국이 남미나 다른 제3세계를 지배하기 위한 전략들이 대학의 프로젝트로 발주되고, 사회과학자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이 그 프로젝트에 참여하지요. 그래서 커밍스는 "미국의 유수한 지역학․국제학 연구소들은 정확하게 국가․정보기관․재단의 결탁의 산물"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로렌스 솔리는 정부만이 아니라 기업이 대학을 어떻게 지배하게 되었는지를 분석합니다. "교육을 목적으로 기업이나 기업재단에서 대학으로 흘러 들어가는 돈은 냉전시대에 정부보조금이 학문분야에 영향력을 행사한 것과 거의 같은 방식으로 학문분야의 방향에 영향을 끼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가령 보수적인 군수제조업체가 설립하고 재정지원을 하는 존 M. 올린 재단은 시카고대학, 예일, 스탠포드, 하버드, 콜롬비아, 조지 메이슨, 조지타운, 듀크 대학을 포함하여 일류 법과대학을 가지고 있는 몇몇 대학들에서 진행되는 ‘법률과 경제학’이라는 연구 프로그램을 후원해 주고 있다. 이 ‘법률과 경제학’은 이 재단의 극우이데올로기와 일치하는 법철학으로서, 공화당의 분석가 K. 필립스는 자신의 저서 『부자와 빈자의 정치학』에서 ‘법률과 경제학’은 H. 스펜서와 W.G. 서머의 시각을 상기시키는 신다윈주의 ‘이론’이라고 쓰고 있다. “시장에서의 상품선택 과정은 정부의 의사결정을 대체할 수 있다”고 전도하고 있는 ‘법률과 경제학’같은 강좌가 나날이 인기가 높아지고 있는 현실을 개탄한다." 이처럼 기업들은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대학의 강좌를 만들거나 그 강좌를 지원하면서 학문의 흐름을 주도합니다.

뿐만 아니라 기업은 소위 산학협동과정을 통해 막대한 이득을 보기도 합니다. 솔리에 따르면, "외국기업을 포함하여 기업들이 대학에 연구기금을 제공한 또 한 가지 이유는 경제학 측면에서 설명될 수 있는데, 납세자와 수업료에 의해서 세워진 대학연구소에서 연구를 수행하는 것이 그에 상당하는 건물과 장비를 갖춘 기업실험실에서 하는 것보다 더 저렴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학은 낮은 비용으로 대학원생들을 연구보조원으로 고용하여 민간부문의 연구원들보다 훨씬 더 적은 숫자로 동일한 연구를 수행할 수 있다." 기업이 갖춰야 할 실험장비를 대학이 마련하게 하고(그러면서 생색도 내고), 값싼 노동력인 대학원생들을 착취하는 거죠. 꿩 먹고 알 먹고란 이런 걸 얘기하는 게 아닐까요?

또한 솔리는 한국정부가 미국 내의 한국학 연구를 어떻게 만들었는지도 얘기합니다. 박정희와 전두환은 미국 지식인들의 호의를 얻기 위해 미국대학에 돈을 풀었다고 합니다. “한국연구에 대한 지원이라는 이름으로 미국의 대학들에 보조금을 지급하거나 장려하는 것은 한국이 미국의 학계의견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시도한 가장 두드러지고 값비싼 조치였다.” 돈을 받는 대신 한국의 독재정권을 비판하는 연구를 삼가하고 아름다운 것만 드러내 달라는 거였죠. 그러니 우리는 미국에 한국학이 확산되어가고 있다며 기뻐하지만 사실 그 확산은 은밀한 거래일 뿐입니다.

이런 게 미국 대학만의 문제점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는 한국대학에서 사회주의나 기타 비판적인 강좌들이 모두 사라진 현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대학의 커리큘럼들을 두루 살펴보면 이런 영향을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학 곳곳에 자리잡은 산학협동단지나 벤처단지 등등을 보면 이미 대학은 기업의 영향력에 완전히 압도당했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대학이 상식적으로 움직이길 바라는 게 어쩌면 몰상식한 건지도 모릅겠네요. 대학이 비판적 지식인들의 온실이라는 얘기는 이미 옛날 얘기가 되어버렸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함석헌 선생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도의 성벽을 깨뜨려야 새 바람이 들어오지. 새 바람이 들어와야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지. 무엇으로 그 성벽을 깨뜨리느냐? 못할 것이 없는 정신의 포탄으로야 하지. 정신이 어디 있느냐? 사람에 있지. 사람이 누구냐 나지. 나밖에 사람은 없다. 막막한 우주에 사람은 단 하나이다. 그것이 나다. 「다른 사람」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알 수도 없고 임의로 부릴 수도 없다. 내가 아는 건 나요, 내가 맘대로 할 수 있는건 나요, 내가 죽여도 좋은건 나다. 나 뿐이다. 그럼 이것 밖에 길이 없지 않나? 불은 불로야 일어나는 것이요, 바람은 바람으로야 일으킨다. 내가 폭발을 해야만 사회의 썩은 티끌을 불어 날리는 폭풍을 일으킬 수 있다.…이렇게 말하면 너는 개인으로는 아니 된다더니 다시 개인에 돌아왔구나, 순환론이로구나 할지 모른다. 모르는 말이다. 나는 개인 아니다. 나는 아버지(全體)와 같이 있는 나지, 개인이 아니다. 개인이란 건 거짓 것이다. 천지간엔 없는 「다른 사람」이란 것을 보고할 때 개인이란 것이 있지 참 삶에 개인은 없다. 내가 살려고 짐을 다른 사람에게 떠 넘기는 것이 개인주의지, 전체를 섬기려고 짐을 내 등에 지는 것은 하나님의 성전에 향기를 채우려고 나를 제단 위에 불사르는 것은 개인주의가 아니다. 이 날까지 역사는 언제나 개인 아닌 개인의 바치는 자기희생의 피에서만 수혈을 얻어 멸망을 면해 왔다. 모든 참 생명적인 혁명은 따져 들어가면 다 어느 가슴에서 나왔다. 삶 자체의 가슴에서 나왔다."

뜨거운 가슴이 필요한 시대인 듯합니다. 오늘도 저는 가슴 덮히러 갑니다.^^


덕성여대 신문의 청탁을 받고 쓴 글입니다.
어제 학교에 갔더니 서울지역 대학생들이 반독재투쟁을 벌이자며 쓴 대자보가 붙어있더군요.
대자보 내용은 http://www.20eye.net/35?srchid=BR1http%3A%2F%2Fwww.20eye.net%2F35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청년들의 행동이 필요한 시기인 듯합니다.
물론 이명박이 문제의 본질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몸짓은 반갑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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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집회 또는 촛불시위는 한국을 대표하는 저항문화로 자리를 잡았다. 해가 진 저녁을 밝히는 촛불은 시민들이 중요한 사회적 결정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려는 신념의 불꽃을 뜻했다. 이런 촛불의 흐름이 한국사회에서 문화로 자리를 잡았다는 사실은 그동안 정부가 일방적으로 정책을 결정해 왔고 시민들이 그 과정에서 배제되어왔다는 점을 증명한다. 촛불의 구호나 참여하는 시민들의 수는 사안에 따라 달라지겠으나, 저항문화는 그 원인인 권력구조의 잘못이 고쳐지지 않는 이상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한다

그런데도 정부는 자신의 잘못을 반성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촛불시민의 저항을 힘으로 억누르려 하고 있다. 경찰은 상습 시위꾼을 검거한다며 촛불시민을 조사하고 인터넷 IP를 추적하고 있다(거리에 나와 중무장한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는 것을 상습적으로 즐길 사람이 과연 있을까?). 그리고 대법관이 재판과정에 개입해 촛불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을 범죄자로 몰아가고 있다(법관이 생각할 필요가 없다면, 컴퓨터로 재판을 하는 게 옳다). 또한 국회에서는 한나라당이 시민들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할 집시법, 방송법, 정보통신법 등을 다수당의 힘으로 밀어붙이고 있다(힘이 장땡이라면 국회의원을 쌈박질 순으로 뽑는 게 옳다). 민주주의 국가라면 당연히 지켜야 할 입법, 행정, 사법체계의 삼권분립조차 무시되는 게 한국의 현실이다.

이처럼 저항의 이유가 사라지기는커녕 더 많은 이유들을 만드는 현실에서 과연 시민들이 촛불을 꺼야 할까? 아니 과연 촛불이 꺼질 수 있을까? 물론 정부의 강한 탄압이 일시적으로 촛불의 흐름을 주춤하게 만들 수는 있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는 결코 권력의 억압이 자유를 가둘 수 없고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음을 증명해 왔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수많은 독재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이 영원한 왕국을 건설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우리 역사만 봐도 힘없고 가난한 농민들이 탐관오리나 왕에게 반기를 들며 수많은 반란을 일으킨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한국의 88만원 세대는?

더구나 지금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경제위기는 시민들이 저항의 촛불을 내려놓을 수 없게 한다. 유럽에서는 700유로세대가 그리스와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등 곳곳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옆 나라 일본에서도 2천여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도쿄의 히비야공원에 모여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하고 있다.

일자리를 달라고 구걸하는 게 아니다. 경제위기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고통을 주지 않는다. 위기는 힘을 가진 자에겐 기회였고 모든 이가 고르게 누려야 할 공동의 재산은 그동안 소수의 사람들에게 독점되어 왔다. 상위 10%의 사람들이 전 세계 부의 85%를 독점하고 있다는 보고가 나올 정도이고, 불행히도 그런 불공정함은 지금 상태라면 더욱더 강화될 전망이다. 전 세계적인 분노는 부를 독점해 온 사람들에게 그 부를 공정하게 나눌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저항의 흐름이 뭉쳐져 촛불이 횃불로 변한다면, 어떠한 권력도 그것을 무시할 수 없다. 바로 그렇기에 권력은 촛불이 횃불로 타오르지 못하도록 갖가지 방해를 하고 있다. 권력은 우리 88만원 세대가 거리보다 도서관에서 스펙쌓기에 열중하기를 원한다. 88만원 세대가 함께 모여 공동의 미래를 고민하지 않고 따로 떨어져 서로 경쟁을 벌이기를 원한다.

적극적인 문제제기가 바로 대안이다

따라서 그런 방해를 뛰어넘어 횃불이 되려면 우리에게는 더 많은 대화와 만남이 필요하다. 자본주의가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할 수 없다면 우리는 다른 세상을 실현하기 위해 나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실천해야 한다.

문제제기와 대안은 분리되지 않는다. 문제를 제기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나와 같은 신념을 품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그와 우정을 쌓을 수 있다. 내가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수많은 사람들과 대화하고 만나는 과정에서, 특히 국가나 학교, 기업이 꺼리는 사람이나 모임을 만나는 과정에서 우리는 배우지 않은 지식을 경험하게 된다.

그런 만남의 과정에서 새로운 운동이 자연스레 출현할지 모른다. 그런 운동이 가능할까라고 미리 물을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도 운동의 흐름을 미리 예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치는 다양한 사람들이 자기 뜻을 드러내고 토의하는 과정이기에 운동의 방향을 예측하는 건 인간의 몫이 아니다.

그리고 예측할 수 없기에 운동은 다양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문화가 운동으로 확장되고 단단해질 수 있다면, 대안사회는 꿈이 아닌 현실로 우리를 맞이할 것이다.

  1. 이창림 2009.03.27 12:11 신고

    덕성여대에 오셨다는 이야기(?)는 아니죠? 오셨으면 연락하셨겠지요? ㅋㅋ

    • 몽똘 2009.03.27 13:11

      ㅎㅎ 그냥 신문사에 글을 쓴거죠. 도봉 근처에 가면 전화드릴께용.^^

봄이 오니 좋은 소식이 하나씩 들리나 봅니다. 지난해 잠시 인사만 드리고 올라와서 계속 궁금했습니다. 생활정치서산시민모임(생서모)이 어렵게 뗀 첫걸음을 어떻게 이어갈까, 멀리서나마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겨울의 움츠림을 끝내고 새 봄의 도약을 시작하신다니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사람의 마음도 조금 설레이게 됩니다.

한국에도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실현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입은 닫혀 있고 마음은 무겁습니다. 봄보다 먼저 찾아온 황사가 우리 시야를 뿌옇게 흐리듯이, 경제위기와 생태계 위기를 비롯한 온갖 위기들이 마음을 더욱더 무겁게 합니다. 그런 무거움을 덜어줘야 할 정치가 오히려 더 위태로우니, 이제 사람들은 희망이라는 단어를 들어도 냉소를 하게 됩니다. 아마 지방에서 생활정치운동을 펼치는 것은 더욱더 힘든 일이 겁니다. 직접 현장에서 함께 활동하지 않으면서 객쩍은 소리나 하는 게 좋지 않지만 같은 길을 가는 동무라 생각하고 몇 마디만 드리려 합니다.

생활정치의 힘은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하지만 사람만큼 참 변하기 어려운 존재도 없습니다. 그래서 생활정치를 하는 건 참 어렵기도 합니다. 이미 편견과 선입견을 가진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고 그 사람들과 어울러 함께 변화해야 하니까요. 운동은 여러 사람들 중에서 우리 편만 골라내는 과정이 아니라 남이었던 사람들을 우리로 만드는 과정이니 그동안 만나지 않았던 사람들을 열심히 만나야 합니다.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말할 기회를 주면서 모임의 틀을 넓혀가야 합니다. 그렇게 어울리면서 삶을 나누고 공감하게 될 때 생서모의 힘은 몰라보게 성장할 겁니다.

그리고 사람의 일인지라 생활정치운동은 의도대로 풀리는 경우가 아주 드뭅니다. 더구나 이미 권력을 나눠가진 자들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생활정치를 펼치는 사람들은 많은 실패와 아주 가끔의 성공을 경험합니다. 하지만 작은 성공을 통해서만 큰 성공의 기반을 닦을 수 있기 때문에 운동의 속도를 조절하며 주민들과 함께 여러 번의 작은 성공을 만드는 경험이 중요합니다. 그런 성공을 통해 주민들은 자신을 정치의 주체로 바라보고 지역의 일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됩니다. 주민들이 그런 경험을 많이 가질 수 있도록 생서모가 지역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으면 합니다(프로그램은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http://blog.grasslog.net을 비롯한 여러 단체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모든 일이 그렇듯이 상대방의 행동을 미리 예측할 수 있으면 방법을 짜기가 쉽습니다. 중앙정부의 일은 여러 언론들이 열심히 다루지만, 지방정부의 일은 특별한 사건이 없으면 자연스레 알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의식적으로 지방정부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자료를 찾고, 부족하거나 의심스런 내용은 정보공개청구를 해서 받아내야 합니다(정보공개센터 http://www.opengirok.or.kr/의 도움을 받아도 좋습니다). 서산시청 홈페이지에 잠깐 들려보니 제법 많은 자료들을 다운받을 수 있습니다. 서산시의 2009년 사업계획서와 예산서를 보면 서산시가 그리는 큰 그림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잠깐 살펴봐도 서산시가 지역개발을 빌미로 민간자본을 많이 끌어들이려 하고 있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특별회계에서 도시개발특별회계가 226억원이나 됩니다). 무엇을 위해 어떤 과정을 밟아 사업을 계획하고 집행하는지 꼼꼼히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회단체보조금 현황을 보니 2009년도에 서산시는 시내 84개 단체에 6억 4천만원 가량의 보조금을 지급합니다. 어떤 단체들이 무슨 사업으로 얼마의 보조금을 받는지 확인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렇게 사업비를 받은 단체들은 지방자치단체의 각종 사업을 지지하고 지원하는 역할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로림만에 조력발전소를 건설한다는 소식을 듣고 생서모의 시작이 참으로 소중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특히 내년에는 지방선거가 있기 때문에 대규모 개발사업이나 각종 보조금이 지역에 많이 풀릴 겁니다. 생서모의 번뜩이는 눈과 우직한 실천이 지역사회의 대안을 만들어가길 기대합니다. 곧 찾아뵙겠습니다.

'인권연구소 창'이 주관하는 철학과 인권 세미나(http://www.khrrc.org/index.php)에 참여하며 미국의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글을 다시 읽고 있다. 아렌트는 유대인이라는 신분으로 1, 2차 세계대전을 몸소 겪었고, 미국에서 흑인민권운동과 베트남전쟁 반대운동이 한창이던 60년대말, 70년대 초의 정치상황을 관찰하기도 했다. 아렌트가 말한 '권리를 가질 권리(the right to have rights)'라는 개념이 현대적인 인권 개념의 재구성과 관련해 주목을 받고 있다.


아렌트가 인권을 자기 철학의 핵심주제로 다루지는 않았지만(아렌트는 인권보다 시민권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이탈리아의 철학자 지오르지오 아감벤이 아렌트의 인권 개념을 비판하며 자기 얘기를 꺼내면서 아렌트의 사상이 자연스레 인권의 주제로 옮겨진 듯하다. 그런데 아렌트의 인권개념을 논의하는 방식이 아렌트의 사상 전체를 살피고 그 속에서 인권개념을 논의하는 자연스런 과정을 따르고 있지는 않은 듯하다. 그래서 인권활동가나 인권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아렌트의 여러 책을 함께 읽으며 그 개념의 흔적을 찾아보는 세미나를 하고 있다.

그와 관련해 아렌트가 쓴 [공화국의 위기]를 읽고 있다. 이 책은 60, 70년대 미국사회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글인데, 현재 우리사회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과도 맞닿아 있는 듯하다. '시민불복종'이라는 글에서 아렌트는 당시 베트남전쟁을 반대하던 양심적 병역거부운동과 흑인민권운동을 벌이던 시민불복종운동을 다룬다. 아렌트는 어떤 정치적 의견이 공동체 내에서 소통되며 사람들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것을 정치라 보고 그런 소통과 관계의 장을 보장하는 것을 권력의 역할이라 봤다.

아렌트는 어떤 사안을 개인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것을 경계하는데, 가령 양심적 병역거부는 법을 어기는 행위의 정당성을 개인의 양심에서 찾기 때문에 정치적인 사안을 비정치적인 문제로 환원시킨다. 그러다보니 어떤 개인의 양심과 다른 개인의 양심이 충돌할 때(아렌트의 표현을 빌리면 흑인의 권리를 주장하는 킹 목사의 양심과 미시시피의 인종주의자의 양심이 충돌할 때), 그 주장은 타당성을 가지기 어렵다. 더구나 그런 양심이 정당화되려면 그 사람이 선과 악을 근본적으로 구별하는 능력을 가져야 하는데, 그런 능력은 자연적으로 타고날 수 없다. 이런 점 때문에 아렌트는 양심적 병역거부가 사회적인 인정을 받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고 봤고 그 근거를 양심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에서 찾기를 바랬다.

양심적인 거부자와는 달리 불복종 시민은 한 집단의 성원이며 싫든 좋든 이 집단은 자발적 결사를 이루는 것과 같은 정신에 따라 형성된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 논의에서 가장 큰 오류는 우리가 개인들―그들은 자신을 주관적이며 양심에 따라 사회의 습관과 법에 도전한다―을 다루고 있다는 가정이다.


아렌트는 양심적 병역거부와 시민불복종을 구분하면서 시민불복종을 중요한 정치행위로 바라본다. 왜냐하면

불복종 시민의 실상은 조직된 소수집단이며, 공동이익이라기보다는 공동의견에 의하여 결합되어 있고, 정부의 정책이 다수에 의해 지지받을 것을 알 경우라도 그 정책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에 서리라는 결의를 갖는다. 그들의 일치된 행동은 그들의 일치된 의견에서 나온다.
시민불복종은 자신의 행위가 현재의 법질서를 해치거나 다수의 상식과 반대될 것이라는 점을 알면서도 여러 시민들이 힘을 모으는 정치행위이다. 특히 정상적인 방식으로는 법질서의 변화를 기대할 수 없거나 정부가 적법하고 올바르게 행동하지 않고 음모를 꾸밀 때에, 시민불복종은 변화를 이룰 유일한 수단이다. 아렌트는 당시 미국사회가 이런 상태(정부가 통킹만 사건을 조작해 베트남전쟁을 벌이고 정보기관이 은밀히 활약하는)였다고 보고 시민불복종 행위를 미국의 건국행위만큼 중요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미국의 건국행위란 따져보면 식민지 질서를 뒤엎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기 위한 시민불복종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시민불복종은 공개적으로 법에 도전하기 때문에 일종의 딜레마를 가진다. 사회가 유지되고 정치가 이루어지려면 그 경계를 짓는 법이 필요한데, 시민불복종은 그 법의 경계를 넘어서려 하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아렌트는 법조문보다 법의 정신이 중요하고 준법정신이 입법자의 태도를 가질 때, 즉 내가 곧 법을 제정하는 사람이자 스스로 그 법에 복종하는 사람(인민주권이라고 해야 할까)일 때 가능하기 때문에 시민불복종이 정당하다고 본다. 특히 새롭게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들은 자신이 합의하지 않은 그 사회의 질서에 도전하고 문제를 제기할 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불복종은 피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아렌트는 그런 불복종이 약속과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사람의 행동이란 예측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서로 간의 합의와 약속이 필요하다. 따라서 시민은 불복종을 하는 만큼 자신이 시민으로서 따를 수 있고 따라야 하는 것을 약속하고 그 약속을 지켜야 한다. 

이 글에서 흥미로운 내용은 시민불복종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판단을 법률가들에게 맡기면 안된다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법률가들은 이런 시민공동체의 중요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집단적인 행동을 개인의 범죄행위로 다루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불복종 시민을 한 집단의 성원으로 인정하기보다는 법정에서 피고가 될 개인적 범법자로 간주하기가 훨씬 쉽기 때문이다. 개인에 대한 정의의 할당에는 관심을 가지면서 다른 모든 것―피고는 다른 자들과 함께 뜻을 하며 법정에서 그를 진술하려 한다는 여론이나 시대정신(Zeitgeist)―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이 재판절차의 위풍이다.
법은 법에 대한 불복종을 정당화시키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아렌트는 시민불복종의 권리가 자유로이 단체를 만들 권리(결사의 권리)와 맞닿아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정치제도는 불복종하는 시민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자유로이 단체를 만들도록 보장해야 한다. 아렌트는 로비스트들이 정부에 영향력을 미치는 만큼 시민불복종하는 단체들이 압력단체를 만들어 정부를 압박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미국 헌법 제 1조가 보장하는 결사의 권리가 현실에서 제대로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미국이 위기에 빠졌다고 아렌트는 분석한다.



이런 분석은 지금 한국 현실과도 맞닿아 있다. 이 사회가 정상적인 방식으로는(요즘은 이런 방식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럽지만) 자신의 주장을 더이상 받아주지 않는다고 여긴 시민들이 곳곳에서 촛불을 들고 저항하고 있다. 정부는 이 저항을 법으로 가로막으려 하지만 아렌트가 얘기하듯 촛불시민들의 불복종 행위에 대한 판단은 법원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정치행위는 기존의 정치질서가 가진 문제점 때문에 비롯된 것이고 시민들은 불복종의 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과제들이 비정치적인 방식으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의 정치위기는 아주 심각하다.

국회의원이나 관료들이 중요한 사회적 의제들을 자꾸 법원으로 가져가서 해결하려 하는데, 그것 역시 심각한 문제이다. 기본적으로 법원은 그 의제를 사회와 소통하지 않고 스스로 판단을 내리려 하기 때문에 공동체의 문제를 다루기에 적절하지 않은 기관이다. 그리고 그 사법적인 판단의 잣대는 이미 낡은 것으로 새로이 나타나는 것을 규정하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또한 한국의 사법계는 민주적인 방식으로 충원되지도 않고 그 작동과정 역시 민주적이지 않다(최근에는 아예 대놓고 판결에 개입하기도 하니).

아마도 이명박 정부는 이런 정치의 위기를 더욱 심화시킬 게 뻔하다. 시민불복종의 권리는 짓밟히고 그와 함께 결사의 권리, 공동체의 시민으로서 자신의 주장을 펼칠 단체를 자유로이 만들 권리도 무기력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어쩌면 이제 저항은 아주 근본적인 수준으로 진행되어야 할지 모른다. 권력이 정치를 포기하고 시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때, 저항은 건국행위 수준의 정치행위를 지향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단순히 법에 복종하지 않고 정부에 저항하는 것만이 아니라 이 사회의 사람들이 맺을 새로운 약속, 새로운 결사들을 만들며, 그들의 국가를 버리고 우리들의 공동체를 조금씩 만드는 노력이 필요하다. 비폭력 불복종의 정신이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려는 노력으로 터져나와야 한다.

공동체가 무기력하고 정치가 왜곡되었으니 그것을 버릴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정치를 구성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제 개인으로 흩어지지 말고 새로운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권리를 만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그런 정치행위는 국가가 보장하는 시민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응당 누려야 할 근본적인 조건이다.
군것질의 추억
음식으로 맺는 인간관계 점점 단절… 함께사는 행복세상만들기 고민할때
2009년 03월 20일 (금) 하승우webmaster@kyeongin.com
   
 
   
 
찬바람이 부는 초봄, 지하철역을 나서다 김을 모락모락 피우는 오뎅이나 떡볶이를 보면 잠시 망설이게 된다. 잘 구워진 풀빵이나 호떡을 봐도 꿀꺽 침을 삼키게 되는 걸 보면, 어릴 적이나 지금이나 군것질의 잔재미는 강력한 유혹이다.

그런데 그 강한 유혹을 견디며 망실이게 되는 건 저 오뎅이나 호떡의 재료가 무엇일까라는 궁금증 때문이다. 중국산 재료나 미국산 쇠고기가 식탁을 차지해버린 시절에 거리에서 파는 군것질 재료들이 국산이기를 기대하는 건 지나친 욕심일 것이다. 사람이 먹어서는 안 되는 물질들이 중국산이나 수입 재료들에 섞여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출처를 모르는 음식을 꺼리며 불안함에 빠져든다. 그러다보니 정겹고 유혹적인 군것질거리들은 점점 추억으로 밀려나고 있다.

그렇게 밀려나는 게 단지 추억만일까? 예전에는 먹거리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이어주는 중요한 소재였다. 새로운 곳에 이사를 가면 이사떡을 돌리고, 맛난 음식을 장만하면 동네 사람들과 나눠 먹는 풍습은 먹거리에 담긴 관계성을 잘 알려준다. 그리고 음식을 먹기 전에 한 점 떼어 고수레 외치며 버리는 행위는 사람만이 아니라 자연의 뭇 생명들과도 먹거리를 나누고 관계를 맺는 방식이었다.

어떤 생명도 먹어야 살 수 있다는 보편성은 음식이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고 이미 맺어진 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역할을 맡게 했다. 어릴 적 군것질을 즐긴 것도 단지 그것이 먹을 것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군것질을 하며 사람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오뎅이나 떡볶이를 사가면 뜻밖의 먹을 것에 즐거워할 친구나 가족 등이 떠오르곤 한다. 이렇게 보면 나눠 먹을 음식이 사라진다는 것은 불안을 넘어 고립과 고독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경제논리나 통계수치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은 이런 고립과 고독을 합리적인 것으로 여길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미 세상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그런 관계가 거짓일 뿐이라며 자기 살길이나 잘 닦으라고 충고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지만 우리는 언제나 외롭다. 주말이면 모든 텔레비전 채널이 가족적인 느낌으로 가득 채워지는 건 우리가 외롭기 때문이다. 전혀 다른 사람들이 '가족처럼' 행동하는 걸 보며, 서로가 서로를 돌봐주는 패밀리의 이야기를 보며 우리는 자신의 고독함을 달랜다. 그리고 집에 앉아 자신과 비슷한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로 웹서핑을 하며 우리는 고립감을 달랜다.

그러나 그런 일시적인 달램이 일상적인 관계를 대체할 수는 없다. 현실의 고립을 그런 가상의 관계로 달래고 있는 우리 모습이야말로 참으로 어리석다. 대문 밖만 나서면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된 현실, 타인에 대한 사소한 친절이나 관심이 범죄의 소재로 변해버린 현실에서 우리는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옆자리에 앉은 누군가가 친절하게 먹을 것을 나눠도 그것을 선뜻 받지 못할 뿐 아니라 그 사람의 선의(善意)조차 의심하는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기 때문이다. 홀로 살아갈 능력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그런 사회가 천국이겠으나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야 하는 다수의 사람들에게 그런 사회는 지옥이다.

이런 사회에 살면서도 과연 우리가 삶의 안정과 행복을 논할 수 있을까? 더구나 이런 고독과 고립이 파괴하는 것은 우리의 행복만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미래를 다룰 정치마저 파괴한다. 서로 반가이 만나며 전체 공동체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토론하는 과정인 정치는 이런 현실에 뿌리를 내릴 수 없다. 마치 쇼핑하듯 자신의 고립된 욕망을 채워줄 정치인에게 투표할수록 관계가 만드는 공유의 영역이 파괴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아마도 우리 아이들은 이제 군것질과 같은 사소한 삶의 재미들을 더 이상 즐길 수 없게 될 것이다. 스스로의 선택이 아니라 우리가 만든 이 고독한 세계 때문에.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1. 여름_녀름 2009.04.04 01:55 신고

    아이들의 사소한 재미라는 말이 재미있네요. *^^*

    • 몽똘 2009.04.05 00: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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