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 11일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는 끔찍했다. 머리로는 핵발전소의 무서움을 알고 있었지만 눈앞에서 재앙이 펼쳐지니 머리가 멍해졌다. 1986년 소련의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는 이미지로만 다가와 느낌이 없었는데 후쿠시마의 사고는 달랐다. 내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곳에서 벌어진 사고는 팔짱 끼고 관전할 일이 아니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 사고를 계기로 ‘탈핵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늘어난 만큼 핵발전소나 방사능에 대한 정보의 양도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후쿠시마에서 날아오는 방사능 물질, 해류를 타고 퍼지는 방사능 물질, 버섯이나 생선에서 검출되기 시작한 세슘, 아스팔트에서 검출된 방사능 등 여기저기의 정보들은 탈핵운동에 대한 관심을 확산시켰지만 다른 한편으론 시민들의 공포심을 계속 자극하기도 했다. 나도 그랬다. 오뎅을 즐겨 먹는지라 이 오뎅의 재료는 어디서 왔을까, 수산물은 괜찮나, 이런 걱정만 계속 늘었다. 사실 먹는 것만이 아니라 삶 자체가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데, 어찌할 수 없는 큰 것보단 작은 것에 대한 걱정들만 자꾸 늘어났다.

나만 그런 건 아니었다. 핵과 방사능을 걱정하는 사람들은 늘어나고 있지만 우리 사회는 한치도 변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에도 이명박 정부나 박근혜 정부는 핵발전소를 계속 짓겠다는 계획을 밝히며 송전탑으로 전국을 도배하고 있다. 국토 면적 대비 핵발전소 밀집도가 세계 1위인 한국, 핵발전소 보유 개수가 세계 5위인 한국, 끊임없이 핵발전소 사고가 일어나고 있는 한국에서 우리는 대체 어떤 삶을 기획하고 있는 걸까?

많은 시민들이 관심을 쏟아도 공사는 중단되지 않는다. 공권력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포악하고 염치없는 상황들이 이어져도 딱히 대안은 없다. 그들은 너무나 잘 안다. 자신들에게 힘이 있다는 것을. 뭐, 국정원이 대통령선거에 개입하고 증거를 조작해 간첩사건을 만들어도 ‘아, 그런 일이 있었구나’라며 넘기는 쿨한 국민들이 사는 나라. 너무 많은 사건들이 터져서일까? 이제 어지간한 사건이 아니면 관심조차 못 받고 사라진다. 이러니 힘을 가진 자들은 언제나 시간을 질질 끄며 망각의 순간을 기다린다.

그렇지만 핵은 삶과 직결된 문제이다. 사고가 터지면 4년이나 5년 뒤에 보자고 말할 새도 없이 한 지역이 폐허로 변하고 수많은 생명들이 그 영향을 받는다. ‘뒤’가 없다는 점에서 핵은 인류가 직면한 완전히 새로운 공포인데, 문제는 경험이 없기에 그 결과를 예감할 수 없다는 점이다. 핵발전소 사고가 나거나 핵폭탄을 실험했던 수많은 곳에서 벌어졌던 일들은 지금도 공유되지 않고 과학의 장벽에 막혀 있다. 그러다보니 생각은 있지만 느낌은 없어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렇다, 절실함이 없다.

불량부품들로 삐거덕거리며 움직이는 핵발전소들과 버릴 곳 없이 계속 쌓이는 핵폐기물, 여기저기서 들리는 사고 소식들. 방사능 유출이나 일본산 수산물에 대한 공포는 확산되고 있지만 정작 우리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무관심한 사람들이 많다. 사실 솔직하게 얘기하면 핵사고는 이미 진행 중이지 않은가. 불량부품들로 작동되는 원자로와 그 위험한 곳에서 방사능에 노출된 노동자들, 핵발전소 근처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는 주민들, 그들에게 핵사고는 다가올 사건이 아니라 ‘이미 벌어진 사건’이다. 하지만 우리 눈에는 그들이 보이지 않는다. 영화 《변호인》을 본 사람이 천 만명을 넘어도 눈 앞의 간첩조작사건에 분노하며 정권을 무너뜨리지 못하는 건 생각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우리는 아직 절실하지 않다.

후쿠시마 이후 한국사회가 변하고 있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여러 노력들은 보이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하다고 답하련다. 인간의 노동을 통하지 않고서 어떻게 핵발전이 가능하며, 지금의 산업구조를 볼 때 핵발전을 통하지 않고 어떻게 경제성장이 가능한가? ‘전력=산업화’라는 등식에서 우리는 핵발전과 자본주의의 밀접한 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 경제가 계속 성장하길 기대하는 사회, 그러기 위해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를 눈 감아 주는 사회에서 탈핵은 불가능하다. 노동자들이 계속 죽어나가는 삼성전자, 노동자의 노동을 분단위로 쪼개어 착취하는 삼성전자서비스사가 성장하는 사회, 온갖 화학약품에 노출된 노동자들이 고통을 겪는데도 친환경 상품을 수입하는 소비자들의 사회는 비정상이다. 이런 사회를 유지시키는 대통령이 비정상성의 정상화를 떠드는 사회야말로 정말 비정상이다. 그렇지만 이런 비정상성을 끝내려는 용기를 낼 만큼 우리는 절실하지 않다.

어느 순간 우리는 ‘나는 괜찮을 거야’라고 속삭이는 내부의 망명객이 되었다. 이 사회에 살고 있지만 우리는 이 사회를 등지고 있다. 허나 내가 ‘잠시’ 사회를 등졌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외려 사회가 우리를 등지고 있다. 자기 노선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추방하고 배제시킨다. 그러니 대안은 우리도 국민이라고 외치는 게 아니라 이 뻔뻔한 사회를 갈아엎는 것이다. 고전적인 혁명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혁명이 불가능하다거나 의미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한치 앞도 모르는데 미래를 어떻게 다 구상하고 시작하나. 뭔가 분명하지 않지만 일단 용기를 내어 일어서 보자는 것이다. 이 사회에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일들 중 하나 이상을 그만두며 저항을 해보자는 거다.

그리고 탈핵은 우리만 잘 한다고 되는 일도 아니다. 일본은 핵발전 중단 상태이나 언제 다시 가동할지 모르고,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는 중국은 엄청난 수의 핵발전소를 세울 계획이다. 그렇게 되면 한반도는 빽빽한 핵발전 단지의 중심에 놓인다. 방사능만이 아니라 황사와 미세먼지가 알려주듯, 우리는 이미 연결된 삶을 살고 있다. ‘한중일 시민사회가 연대해야 한다’는 당위적인 주장을 넘어 사람들이 직접 손을 잡고 이야기를 나누는 기회가 늘어나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대안일 수 없다. 그런데 한국은 그럴 준비가 되어 있나? 일본, 중국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민족주의의 불길에 휩싸이는 한국은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기억과 연대를 혼동하는 순간 대안의 힘은 사그라진다. 손을 내밀길 기다리지 말고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 그래야 미래가 있다.
  1. 보카 2014.03.13 09:02

    안녕하세요~ '약자의 무기~' 링크를 타고 들렀네요. 좋은 생각 많이 접할수있기바래요~

    • 몽똘 2014.03.13 10:05

      네, 반갑습니다.^^

안녕들 하세요? 저는 얼마 전 충청북도 옥천군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부산에서 태어나 20년을 보냈고, 수도권에서 그 이상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곳 옥천은 태어난 곳도, 지금까지 살아온 곳과도 다른 전혀 새로운 곳입니다. 어떤 이는 귀촌, 귀농한 것이냐 묻지만 옥천에서 구한 집은 읍내에 있고 농촌보다는 작은 도시 풍경에 가깝습니다. 농사를 못 짓는 백수이구요. 그러니 귀촌도 귀농도 아닌 거지요.

그러면 왜 옥천으로 갔느냐? 수도권에 사는 것이 어느 순간부터 힘들어졌어요. 대부분의 자원을 외부에서 지원받으면서도 고마움을 잊어버리게 만드는 곳, 그러면서도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자원을 독식하고 있는 곳이 부담스러웠죠. 풀뿌리운동과 민주주의를 외치면서 수도권에 사는 것이 왠지 모순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가족과 수도권을 떠나자는 이야기를 나눴고 일단 가보자는 합의가 되어 옥천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우리 귀엔 낯설지만 옥천군은 1989년 주민들이 직접 만든 옥천신문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옥천신문은 25년 동안 지역의 중요한 공론장이 되어 왔습니다. 2008년에는 친환경농업인들을 중심으로 옥천살림 영농조합법인이 만들어져 어린이집과 학교에 지역의 먹거리를 공급하고 있습니다. 2013년에는 지역 내의 자활센터,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 등이 힘을 모아 옥천순환경제공동체를 만들고 지역대안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안남면은 주민들이 운영하는 지역발전위원회와 어머니학교, 배바우도서관, 배바우장터, 작은음악회로 유명한 곳입니다. 인구 5만 3천명의 작은 군에서 이런 다양한 일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희망만 있는 건 아닙니다. 옥천에는 5일장이 섭니다. 외지 사람들에게는 낭만적으로 들리겠지만 현지 주민들의 느낌은 다릅니다. 북적이는 5일장에 물건을 팔러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외지인이고, 그에 비하면 옥천주민들이 주로 있는 상설시장은 썰렁합니다. 선거가 다가오니 군수는 이당 저당을 떠돌고, 학생 수가 줄어 폐교되는 학교도 계속 나옵니다. 산업단지, 농공단지, 이런 사업들도 지역경제를 내세워 계속 시도됩니다. 한국 어느 곳에나 불안은 존재합니다.

그래도 30분이면 걸어서 돌 수 있는 읍내라 길에서 사람들도 자주 만나고 이야기도 자주 나눕니다. 시민에서 군민이 되니 여러 가지 생각이 듭니다. 어쨌거나 중요한 건 함께 사는 거겠죠. 다른 지역에서도 꼬물꼬물 희망이 싹트고 있다는 소식 전합니다. 따뜻한 봄 맞으세요.

공동체(共同體)는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다. 영어 community는 라틴어 communis에서 유래되었는데, 『옥스퍼드영어사전』에 따르면 이는 ‘함께’를 뜻하는 com과 ‘의무나 책임, 선물을 준다’는 뜻의 munis의 조합어이다. 즉 공동체는 함께 어떤 책임을 지거나 서로 선물을 주고받는 사람들이다. 공동체는 그 나름의 관습에 따라 같이 일하고 가진 것을 나누며 공동의 목적을 추구한다. 따라서 그런 관계가 맺어진 곳은 어디나 공동체가 될 수 있다.

 

공동체는 서로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가난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혼자서도 잘 살아갈 사람들에게는 공동체가 그리 절실하지 않고, 반면에 같이 아파하고 기뻐하며 힘을 모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공동체는 참으로 절실하고 소중한 것이다. 어느 한 편이 다른 편을 일방적으로 도와주는 관계를 뜻하지 않기에 공동체의 힘은 관계를 통해 서로의 힘을 북돋운다.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이런 점을 자각할수록 그 힘은 강해진다.

 

구성원들이 서로 책임을 지거나 살림살이를 나누는 곳이기에 공동체는 어느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규정한 목적을 실현하거나 이미 규정된 목적만을 실현하지 않는다. 그곳은 구성원들이 관계를 만들어가는 장이고, 그래서 공동체의 경계는 필요하지만 그것이 문턱은 아니어야 한다. 타자를 배제하는 유명한 공동체보다 공동체라 불리지 않아도 우정을 맺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이 훨씬 더 공동체적인 이유는 그 때문이다. 동서양 어디서나 인류 역사에서 이런 공동체들을 수없이 많이 찾아볼 수 있고,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기에 예전에는 공동체가 절실히 요구되지 않았다.

 

공동체가 사회의 중요한 대안으로 불리기 시작한 시기는 자본주의의 등장 이후이다. 칼 폴라니(K. Polanyi)가 블레이크(W. Blake)의 싯구를 인용해 표현했듯이 자본주의는 ‘악마의 맷돌’이었다. 자본주의는 이전의 관계를 완전히 해체시키고 인간과 자연을 화폐로 측정되고 거래할 수 있는 상품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생산과 소비의 관계를 끊고, 우리 삶에 필요한 다양한 재화와 서비스를 공급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들, 나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방인들을 계속 만들었다. 이렇게 맷돌에 갈려나간 사람들은 서로의 삶을 지지해줄 관계를 다시 찾게 되었다. 지금도 신자유주의라 통칭해서 불리는 여러 사회변화들은 공동체의 필요성을 도드라지게 만들고 있다.

 

협동조합은 이렇게 가난해진 사람들이 다시 서로를 마주보고 서로에 의지하며 사회의 주체로 서려는 곳이다. 그래서 협동조합은 타자를 만나는 공간이자 자신을 만나는 공간이다. 자신을 인정하거나 존중하지 못하는 사람이 타자를 인정하거나 존중할 수 없듯이, 나와 약속할 수 없는 사람은 타자와 약속할 수 없다. 내가 남에게 기댈 수 있어야 남도 나에게 기댈 수 있고, 내가 스스로 일어서야 타자도 일어설 수 있다. 협동조합은 타자와 더불어 좋은 삶을 누리기 위한 나의 조건을 만드는 곳이고, 협동조합은 그 목적을 공통의 것으로 조직하고 실천하는 곳이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서로 마주 보고 투명인간과 이방인들이 그 재화와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과 마주볼 방법을 찾을 때 다시 공동체의 관계가 시작된다. 그런 점에서 협동조합은 이미 존재하는 공동체를 활용하려는 곳이 아니다. 협동조합은 관계망을 찢는 자본주의에 맞서 싸워야 하고, 때로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자신의 것을 내놓아야 한다. 왜냐하면 협동조합은 공통의 필요를 조직하고 공통의 열망을 실현하려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협동조합과 공동체는 매우 비슷한 관계를 형성하려는 곳이다.

 

그렇지만 생활수준이 비슷한 사람들만의 공동체, 폐쇄적인 공동체가 공동체란 말의 의미를 왜곡하듯이, 자본주의 영리기업과 비슷해지는 협동조합이 협동조합의 공동체성을 파괴할 수도 있다. 협동조합도 협동보다 경쟁을, 관계보다 소유를, 연대보다 시기를, 사랑보다 무관심을 퍼뜨리는 곳이 될 수 있다. 그 옛날 예수의 공동체가 기독교로 제도화되었듯이 협동조합도 공동체성을 포기할 경우 비슷한 길을 걸을 수 있다. 그래서 공동체가 중요하다.

  1. 땡글아빠 2014.03.01 14:02

    이보다 더 전문적인 글은 없을듯. 지식이 삶과 어우러진 글

  2. 몽똘 2014.03.02 00:58

    와, 오랜만이여요. 전주에 곧 한번 갈께요.^^

작년 10월 정도부터 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조직 내 비정규직 문제를 제기했던 활동가를 한홍구 씨가 해고시키라고 지시했고, 함께 일하던 활동가들이 이를 거부하자 권고사직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동안의 정황이 집단사직을 결의한 평화박물관 6명의 활동가들이 발표한 성명서에 담겨 있다.

http://blog.jinbo.net/peacemuseum_activists/3

굉장히 차분하게 서술되어 있는데, 이 글만 읽어도 한홍구 씨의 주장은 어처구니가 없다.

이게 역사와 진보를 얘기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올 이야기들인가.

당시 한홍구 씨는 활동가에게 눈빛이 마음에 안 든다고 했다고 한다.

이 무슨 빌어먹을 소리인가.

활동가가 상임이사를 존경하는 사장님, 딸랑딸랑 이렇게 바라봐야 한다는 건가.

그러면서도 밖에서는 엄청 평등한 사람 코스프레를 하겠지.

더 황당한 건 이 대목이다.

"권고사직을 수용해 자필사직서를 제출할 때까지 임급을 지급하지 말라는 한홍구 상임이사의 지시로 작년 10월부터 최근 사직처리시까지 임금이 지급되지 않은 바"

최근 한홍구 씨는 손배가압류 없는 세상을 만들자며 '손잡고'라는 모임을 제안했다.

내가 보기엔 내부의 손길도 거부한 사람이 이런 모임을 제안하고 주도하는 건 부당하다 못해 운동에 누를 끼치는 일이다.

운동이 이런 식으로 가다간 함께 망하는 거다.

평화박물관 활동가들이 "‘조직 내 민주주의’와 ‘시민단체의 사유화’"의 문제를 제기한 만큼 시민사회운동단체들은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한홍구 씨는 모든 직책에서 물러나야 한다. 당장 생계를 해결해야 하는 활동가들과 달리 그는 대학교수라는 밥벌이수단까지 가지고 있으니 당장 물러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집요하게 이 문제를 계속 물고 늘어질 꺼다.

내 눈빛도 만만치 않게 불온하니...

  1. 노우 2015.07.22 23:53

    실타.

지난 127(201211/12월호)에서 나는 한국에서도 연방주의가 사회변화를 위한 전략으로 진지하게 고민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앙집권형 국가를 연방헌법에 기초한 연방국가로 바꿔야 아래로부터의 힘으로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입법, 행정, 사법의 삼권분립을 무시하고 언론과 표현, 결사의 자유같은 시민의 기본적인 권리마저 짓밟는 권력에 맞설 힘은 몇몇 정치인이나 정당이 권력을 장악하거나 몇몇 제도를 개선하는 것으로 만들어질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을 연방국가라는 정치제도를 만들려는 것으로만 이해한다면, 이는 연방주의라는 이념을 좁게 해석하는 것이다. 연방주의는 정치만이 아니라 경제, 문화 등을 자유와 협동의 원리에 따라 재구성하려는 이념이고, 연합의 원리에 따라 지속적으로 사회를 재구성하려는 전략이었다.

 

역사를 따지면 연방주의는 고대부터 있었던 체제나 자연적인 필요에 따라 구성된 체제가 아니었다. 연방주의는 중세 자유도시들의 동맹에서 생겨났고, 신분에 따른 차별을 거부하는 자유로운 시민들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새로운 사회를 지향했다. 하지만 상비군과 행정조직을 갖춘 중앙집권형 근대국가가 등장하고 그것이 강화되면서 연방주의는 이에 맞서는 저항의 전략이자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창조의 전략으로 재구성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연방주의는 새롭고 자유로운 사회구조를 만들려는 이들이 합심해서 만들어낸 이념이자 전략이었다. 정치 면에서 연방주의란 정부 안에 정부를 만들어 일종의 이중권력을 만들고 주권이 작동되는 방식을 바꿀 뿐 아니라 주권 자체를 시민들이 직접 정의하게끔 하는 새로운 이념이었다. 경제 면에서 연방주의는 협동과 우애의 원리에 바탕을 둔 경제질서, 생산과 소비, 농업과 산업을 분리시키지 않고 지역과 지역이 동등하게 자원을 나누고자 하는 전략이었다. 문화 면에서 연방주의는 표준어와 표준지식, 통일된 기준을 거부하고 지역적인 지식과 문화를 강화시키려는 방법이었다.

 

각 시민과 지역이 자유를 확보하고 서로를 지원하며 그 자유를 지속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연방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해야 할 점은 서구 자유주의의 연방주의 논리가 연방주의의 모든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자유주의의 전제와 달리 연방주의에서 개인은 고립된 단자가 아니다. 그 개인은 사회적 개인으로 자신 속에 사회성과 전체성을 품고 있다. 그러하기에 개인의 자유는 타인의 자유와 맞물릴 수밖에 없다. 연방은 이런 개별자들이 직접 맺는 관계를 지지하고 그들간의 평등을 유지시키는 틀이다.

 

그렇다고 연방이 사회변화의 전망을 지역 속에서만 찾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지역에서만 전망을 찾을 거라면 굳이 연방을 만들 이유가 없다. 지역이 자립의 기반이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자급이 가능하려면 안팎의 다양한 연계가 필요하다. 필요한 인력과 자원, 더 중요하게는 경험과 지혜를 공유할 관계망이 필요하다. 연합의 연합(association of association)은 서로를 구속하려는 전략이 아니라 서로의 자유를 보장하려는 전략이다. 연방주의 하에서의 한 시민은 지역이나 연방정부와 분리되지 않고, 자신이 속한 다양한 공간에서 연방의 원리를 실현해야 한다.

 

1871년의 파리꼬뮌은 이런 관련성을 분명한 선언으로 만들었다. “꼬뮨의 절대적인 자치는 각 꼬뮨의 완전한 권리를 보장하고 모든 프랑스인이 인간이자 시민, 노동자로서 자신의 소질을 완전히 발휘하도록 보장함으로써 프랑스의 모든 지방으로 확대된다. 꼬뮨의 자치는 약속에 따라 다른 모든 꼬뮨의 자치를 똑같이 제한할 것이다. 즉 꼬뮨들의 연합은 프랑스의 해방을 보장해야 한다.” 파리꼬뮌이 살아남기 위해 다른 지역과 연대해야 했다는 현실적인 요인도 있었지만 연합과 연방의 사상은 당시의 분명한 지향이기도 했다.

 

파리꼬뮌에 앞서 연방주의 이론의 기초를 닦았던 프루동은 민족주의와 중앙집권화가 지배하던 당시 유럽의 민주주의에 반대하며 연방주의를 제안했다. 아래로부터, 가장 단순한 단위에서 시작되어 시민의 직접 통제를 받는 연방은 행정기관이 아니라 다양한 지역들 사이의 협력기관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프루동은 가장 작은 지역의 이해관계가 가장 큰 지역의 이해관계와 동등해질 수 있는 곳이 바로 연방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사상이 파리코뮌의 이념으로 이어졌고 연방주의 제도를 만들었다.

 

그런데 제도는 어떠한 환경에서건 똑같은 효과를 만들지 않는다. 인간사회의 제도는 통제된 실험실의 가설이 아니다. 예측 불가능한 수많은 요소들의 영향을 받는 제도가 자기 목적을 실현하도록 만드는 건 사회의 힘이다. 그리고 때로는 제도가 아직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도 사회의 힘이 제도의 효과를 발휘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동안의 시민사회운동의 전략들은 제도를 만드는 것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정작 제도를 만들고 난 뒤에 그 제도를 올바르게 작동시킬 힘을 만들지 못했다.

 

연방주의 역시 비슷한 과정을 밟을 수 있고, 그런 점에서 연방주의 제도의 설계도 중요하지만 그와 관련된 사회의 힘을 만들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연횡을 넘어선 합종의 전략이 필요하다

 

연방주의는 지역에 기반한 다양한 실험들이 가능하도록 지지하는 제도이자 이념, 전략이다. 한 개인, 다양한 개인들이 모여 하나의 관계망을 형성하듯이 여러 지역들이 모여 하나의 연방을 구성하는데, 그 목적은 구속이 아니라 자유이다. 자신의 이해관계와 자유가 서로 연계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 우리는 그것을 실현하고 보장받기 위해 만나야 하고, 연방주의는 그 만남을 지속시킬 수 있는 틀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식민지와 군사독재를 거치면서 강력한 기득권층이 만들어졌고 이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중앙집권적인 전략을 주도해 왔기 때문에, 자유를 위한 연방주의 전략이 쉽게 실현되기는 어렵다. 따라서 기득권에 맞서 연방을 구성하려는 저항의 방법과 자유를 실현하려는 창조의 방법이 동시에 필요하다. 기득권에 맞서 연방주의를 실현하려는 노력은 어떤 전략을 가져야 할까?

 

사마천의 사기열전을 보면, 소진(蘇秦)은 강력한 진나라에 맞서 남북의 여섯 나라가 연합하는 합종(合縱)의 전략을 외쳤고, 장의(張儀)는 각 나라가 진나라와 불가침조약을 맺는 연횡(連橫)의 전략을 외쳤다. 소진이 합종을 성사시킨 전략은 각 나라의 강점과 약점이 무엇인지를 드러내고 그 부족한 부분을 다른 나라를 통해 보완하는 것이었다. 소진은 각 나라가 힘을 모은다면 지금 가진 힘으로도강대국인 진나라를 능히 상대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진나라가 만약 초나라를 공격한다면 제나라와 위나라는 정예병을 보내 지원하고, 한나라는 진나라의 식량 수송로를 끊고, 조나라는 장수를 건너고, 연나라는 상산 북쪽을 고수한다. 진나라가 만약 한나라와 위나라를 치면 초나라는 진나라의 배후를 끊고, 제나라는 정예병을 보내 도우며, 조나라는 장수를 건너고, 연나라는 운중을 지킨다. 진나라가 만약 제나라를 치면 초나라는 진나라의 배후를 끊고, 한나라는 성고를 지키며, 위나라는 하내로 통하는 길을 막고, 조나라는 장수와 박관을 건너고, 연나라는 정예병을 보내 돕는다. 진나라가 만약 연나라를 치면 조나라는 상산을 지키고, 초나라는 무관에 진을 치며, 제나라는 발해를 건너고, 한나라와 위나라는 모두 정예병을 보내 돕는다. 만약 진나라가 조나라를 치면 한나라는 의양에, 초나라는 무관에, 위나라는 황하 남서쪽에 진을 치고, 제나라는 청하를 건너며, 연나라는 정예병을 보내 돕는다. 제후들 가운데 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나라가 있으면 다섯 나라의 군대가 함께 그 나라를 친다.”

 

강자에게 맞서는 방법은 약자들의 연합이다. 나의 자유가 너의 자유와 얽혀 있음을 깨닫고 힘을 공유한다면 패권을 가진 강자에게 맞서 자신의 질서를 실현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이런 신뢰를 쌓기 위해 소진이 한 일은 그 나라의 존재를 충분히 받들어주는 것이었다. 그 나라의 약함을 부각시키지 않고 그 강점을 존중하는 것, 그리고 폐하의 현명하심과 제나라의 강대함은 능히 당할 자가 없습니다와 같은 수사를 활용하는 것이었다. 중요한 건 합종을 가능케 할 서로간의 관계와 신뢰인데, 그것은 자연스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각 나라를 설득할 방법이 있어야 그런 관계가 형성될 수 있다.

 

그리고 합종의 전략을 실현했다고 해서 그것이 영원히 지속되는 건 아니다. 합종을 반대하고 연횡을 주장했던 장의가 각 제후들을 설득한 방식은 각 나라의 이해관계만을 드러내고 합종을 하는 것은 양떼를 끌고 맹호를 치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설득하는 것, 여섯 나라의 신뢰를 무너뜨리고 이간질하는 것이었다. 이런 꼬드김을 억누를 만한 신뢰가 있어야 합종이 가능한데 그런 신뢰를 만드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합종의 전략이 한 국가 내에서 실현되지 못할 법은 없다. 우리 시대에 국가의 경계는 이미 무너지기 시작했고 자연재해나 사고의 규모는 국경을 넘나든다. 그리고 한 지역만의 자급이나 자립은 점점 더 불가능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능력을 자각한 지역들이 서로 뭉친다면, 그 힘은 불어날 수 있고 때로는 중앙정부나 외부의 힘을 거스를 수 있다. 지금 당장은 지방의 시민이나 지역사회의 힘이 약하게 보이지만 서로의 단점을 보완하고 강점을 강화시킨다면 합종의 힘을 만들어질 수도 있다.

 

혼란은 약자들이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이고, 혼돈은 사물이 스스로 자신의 질서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 새로운 관계와 신뢰의 기반을 만들며 합종을 가능케 할 집단과 전략이 필요하고, 그런 집단은 정당이나 시민사회단체, 어떤 형태를 취할 수 있다. 각 지역의 상황과 조건을 차분히 분석하고 서로의 장단점을 보완해줄 방법을 고민하는 사람이나 집단이 절실히 필요한데, 다른 지역은 고사하고 자기 지역의 강점과 약점마저도 제대로 분석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소진처럼 지역을 돌며 깨달음을 주고받을 사람이나 집단을 만나기 어렵다.

 

오랜 세월 중앙집권형 국가의 지배를 받아온 한국에서 지역간의 연대는 없거나 명목상일 뿐이고 중앙정부가 권한을 독점하며 나라를 쥐락펴락 하고 있다. 지난 20133월에는 사회연대경제를 위한 지방정부협의회가 구성되기도 했지만 명목상의 연대를 넘어 실질적인 연대가 가능할지는 의문이다. 자신이 가진 장점을 내놓고 서로의 단점을 보완해야 합종의 전략이 가능할 텐데, 지역의 경계를 뛰어넘는 연대의 전략은 구호로만 존재하지 구체적인 관계로 구현되지 못하고 있다.

 

그동안의 시민사회운동을 보면 서울의 큰 단체들이 주요한 의제를 독점하며 운동을 주도해 왔고, 노동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에서도 상급단체들이 운동의 방향을 결정하고 협상을 주도한다(노동운동이나 시민사회운동에서 상급은 어디일까? 현장에 있는 단체들이 가장 상급이고 이들의 연합체는 현장단체들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여야 하지 않을까?). 이런 단체들은 합종의 전략을 모색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기 단체의 이해관계나 의제를 위해 중앙정부와 협상하고 서로간의 관계나 신뢰에 큰 관심을 두지 않으니 합종보다는 연횡의 전략에 가깝다.

 

그러니 지금 우리에겐 합종과 연방의 전략이, 그 전략을 현실에 펼치려는 사람이나 집단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20126월에 만들어져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와 비정규직 문제,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반대, 용산참사 진상규명 등의 사회문제를 직접행동으로 해결하는 시민들의 공동연대인 <SKY 공동행동>은 이런 합종과 연방의 전략을 실현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쫓겨나는 사람이 하늘이다라는 구호를 내세우고 <SKY 공동행동>은 서울을 출발해 지역문화제를 열고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전국순회투쟁을 벌였다. 강력한 국가폭력에 상처를 입고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서로 의지하며 힘을 북돋우는 과정은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었다.

 

자유를 위한 연방의 전략

 

2012년 제 18대 대통령선거에서 박근혜 후보는 51.6%, 1,500만 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박근혜씨는 천오백만 명의 사람에게 어떤 책임을 지고, 천오백만의 사람들은 박근혜씨에게 무엇을, 어떻게 요구할 수 있을까? 국가정보원이 선거에 조직적으로 개입했다는 정황이 계속 드러나고 있지만, 만일 다른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면 정말 세상이 바뀌었을까? 지금 겪고 있는 당혹감이 사라졌을까? 분명히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사회질서가 근본적으로 변화되었으리라 기대하긴 어렵다(이 점은 선거 이후 민주당의 모습을 보면 잘 드러나기에 굳이 부연설명을 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한 번의 선거로 세상이 바뀌면 좋겠지만 그렇게 세상이 바뀐 경우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 거의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어쩌면 한 번의 선거에 지나친 기대를 거는 것이야말로 실패를 반복했던 이유일지 모른다. 선거를 무시하자는 것이 아니라 선거를 우리의 정치로 끌어들이고 그것을 활용할 전략을 세워야 했는데, 지금까지의 운동전략은, 적어도 한국의 시민사회운동 전략들은 선거에 많은 기대를 걸면서도 수동적으로대응해 왔다고 평가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선거에 참여하는 방식은 주로 최악을 피하기 위해 차악을 선택하거나 특정 의제를 관철시키기 위해 기성정당과 연합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시민사회운동은 자신의 정치전략을 만들지 못했다.

 

진보정당의 등장 이후에도 이런 상황은 별로 바뀌지 않았다. 진보정당이 지역에서 무상급식이나 의료, 참여예산같은 의제를 쟁점으로 만든 적은 있으나 지역사회의 질서를 바꾸었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심지어 민주노동당 출신 구청장이 선출되고 민주노동당이 구의회의 다수의석을 차지했던 울산에서도 지역사회의 구체적인 변화를 감지하기는 어렵다. 주로 진보정당은 전국적인 사안에 적극적으로 개입했고 지역사회에 밀착해서 아래로부터 변화의 동력을 만드는 일에는 소홀했다. 몇몇 사례를 제외하면 지역당/지구당이 적극적으로 의제를 만들지도 못했다. 정치에 관한 이야기는 늘어나고 관심도 적지 않지만 그것을 실질적인 사회변화로 이어가고 그 변화를 체감할 수 있는 과정이 마련되지 없다보니 냉소만 심해졌다.

 

그러면서 시민들은 더욱더 수동적으로 변하고 있고, 자신과 지역의 삶을 적극적으로 기획하고 중요한 갈등에 개입하려는 능동성 또한 사라지고 있다. 정치는 점점 우리 삶과 무관한 것으로, 정치인들이 전유하는 부정적인 것으로 변하고 있다. 경제는 재벌들에게 점점 더 독점되고, 생산과 소비의 단절, 농촌의 몰락, 심각한 양극화로 시민의 살림살이는 몰락하고 있다. 문화 역시 점점 산업으로 변해가면서 독점/집중되고 있고, 한 국가 차원을 넘어 전 세계적인 획일화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 특히 지역사회는 스스로 자신의 미래를 구상하고 다른 지역과 연대하려는 전략과 의지 자체를 상실해 버렸다. 나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타자와 어떻게 연대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의식은 거의 사라졌다.

 

그럼에도 연방주의를 적극적으로 고민해야 하는 건 싸우는 지역들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장소를 보존하고 자기 지역을 지키려는 끈질긴 시도들이 주목을 받고 있다. 그리고 희망버스나 탈핵희망버스처럼 수도권의 사람들이 역으로 지방으로 내려가서 그 장소를 느끼고 함께 고민하고자 한다는 것은 분명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기존의 사회운동전략이 중앙으로 치고 올라가는 것이었다면, 이 저항은 그냥 그 자리에서 장소를 고집한다. 청도나 밀양 주민들의 저항을 단순히 핵발전이나 송전탑에 대한 반대로만 해석할 수 없는 건 자신의 장소를 지키며 저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대안이 주어지면 포기될 수 있는 것이 아닌, 어떤 절대적인 것으로서 장소와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관계가 부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역성이란 단순히 지역의 특성이나 지역주민들의 의견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아니다. 그것은 그 장소가 지켜지고 그 공간에 담긴 감수성과 사람들의 관계와 역사가 지속되며, 그것이 다른 지역과 동등한 가치로 인정됨을 뜻한다. 이런 저항 속에 지역의 의미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지역사회 내의 역량만으로 사안을 해결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중앙일간지나 언론사들이 여론을 주도하고 지방의 언론들도 제 역할을 하지 않는 상황이라 지역의 사안이지만 실제로는 전국에 영향을 미치는 일들을 제대로 알리기도 어렵다. 그리고 수도권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지역간의 연계나 관계망을 만들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서로의 존재를 확인해야 손을 잡을 수 있을 터인데, 지금은 그조차도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연방주의 전략을 적극적으로 고민하는 사람들이나 집단이 매우 중요하다. 연방주의 전략이 가능하려면 중앙에서 지역으로 의제가 내려오는 방식이 아니라 각 지역들이 만나 서로 얘기를 나누며 전국적인 의제를 만들고, 또 전국적인 단위의 기구가 지역들을 지도하거나 지배하지 않고 지역의 자유를 고민하고 활성화시킬 수 있는 다양한 정보와 행동방식을 제안해야 한다. 아울러 한 지역의 자유를 위해 다른 지역들이 무엇을 할 것인지, 지역 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전국적인 노력이 필요한지, 이런 고민들을 나누는 과정이 필요하다(예를 들어 새마을운동이나 자유총연맹처럼 오랫동안 지역에 뿌리내려 있지만 전국적인 규모를 갖춘 단체들을 통제하려면 전국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다).

 

다행히 밀양 송전탑 반대투쟁과 관련해서는 민주노총 영남권 5개 지역본부(부산, 울산, 경남, 대구, 경북)와 전국건설노동조합 영남권 2개 지역본부(부산울산경남, 대구경북)가 공사 강행을 규탄하는 합동 기자회견을 가지기도 했고, 전국금속노동조합 경남지부 마창지역금속지회와 대림자동차 해고자 복직투쟁위는 오리털 점퍼를 구입해 전달하기도 했다. 밀양의 친구들이라는 모임이 만들어져 송전탑 반대와 관련된 다양한 활동들을 펼치고 있다. 이런 자발적인 노력들이야말로 연방주의를 실현할 주요한 전략이고, 이런 전략들을 통해 참여자들은 자신이 자유로운 사람임을 증명하고 있다.

 

운동차원에서만 이런 고민이 필요한 건 아니다. 가령 내년의 지방선거를 미리 대비해서 자기 지역의 미래구상을 세우고 이런 구상들을 모아 연방국가의 상을 만들어야 한다. 지금까지 중앙정치의 바람이 지방선거를 좌지우지했다면, 이제는 지역정치의 사안이 중앙정치에 영향을 미치도록 준비해야 한다. 연방국가의 상이 필요한 이유는 대통령 선거가 아니라 지방선거에서 우리가 원하는 나라의 모습을 정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모든 자원이 집중되는 대통령선거가 아니라 그것이 분산되는 지방선거에서 연방국가의 비전이 만들어지는 게 원칙에서도 올바르다.

 

이를 위해서는 정치를 사유하고 문제해결방법을 찾는 우리의 관점 자체가 변해야 한다. 연방주의의 원리를 따른다는 것은 시민과 지역, 연방이 서로 연계되어 자신의 뿌리를 내리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연방국가가 만들어질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지금 연방의 전략을 실천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연방주의의 원리

 

그렇다면 연방을 고민하는 우리는 어떻게 만나야 할까? 사실 우리에게는 이렇게 서로를 만나본 경험이 없다. 같은 무리에서 다름을 참지 못해 쪼개질지언정 다른 무리가 서로 섞여본 경험이 거의 없는 한국에서는 이것이 꽤 어려운 숙제이다. 그런 점에서 추상적이지만 연방주의를 고민하며 만날 때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할지를 생각해보자.

 

첫째, 연방주의는 정부 속에 정부를 만들고 자율적이면서도 협동의 삶을 살려는 전략이다. 그런 점에서 연방주의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각 시민, 지역의 자율성이다. 연방은 자유를 위해 존재하기에 먼저 각 단위가 자신의 자유를 상상하고 그 자유를 실현할 방법을 찾도록 보장해야 한다. 다만 자율성은 절대고독이 아니라 타자를 대면함으로써 드러난다. 원칙적으로 각 지역이나 정당, 시민사회운동은 자신이 구상하는 기획을 스스로 실현해야 하지만 지역의 운명이 다른 지역의 운명과 연관되어 있으므로 자신의 능력을 솔직하게 드러내야 한다. 합종의 전략을 구상한 세력이나 집단이 현실적으로 없다면 합종의 전단계로서 각자의 강함과 약함이 솔직하게 드러나야 한다. 자율적인 관계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만 움직이거나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 보여주는 게 아니다. 내가 남을 채워주고 남이 나를 채워주려면 서로의 모습이 솔직하게 드러나야 한다.

 

그리고 내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타자의 자유를 희생시키지 않고 기득권에 맞서 서로가 서로의 자유를 지지할 때에만 자유가 실현될 수 있다는 점은 무시되지 말아야 한다. 사실 진정 자율적인 존재라면 스스로의 선택으로 타자의 뒤에 서서 그 뒤를 받쳐줄 수 있다. 이런 자율적인 존재들이 만나야 연방의 원리가 실현될 수 있다. 우리는 자유롭기 위해 서로 연대한다, 는 마음가짐이 만남에서 가장 중요하다.

 

한국사회에서 대부분의 연대전략이 성공하지 못한 건 이런 마음가짐이 없어서였다. 연대를 내세운 회의가 많고 연대라는 이름을 붙인 단체들도 많지만 연방을 구상하진 못했다. 각자가 서로에게 바라는 마음만 컸지, 상대의 자유를 생각하고 지지하는 마음이 부족했다. 선거 때도 이해관계를 따지는 연합은 했지만 서로의 몫을 챙겨주는 합종은 구성하지 못했다. 사람의 본성에 맞는 사회를 지향하는 일본의 <에즈원 커뮤니티>“‘다른 사람과 함께 즐겁게 하고 싶다고 생각해도, ‘다른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인지 어떤지, ‘자유롭게 쭉쭉 자랄 수 있는 직장에서 하고 싶다고 생각해도, ‘자유롭게 쭉쭉 자랄 수 있는 직장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인지 어떤지,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위해서는 자기를 검토하는 기회를 통해 자기를 아는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한다. 우리에게도 나를 드러내는 과정을 통해 서로 만나고, 만남을 통해 서로의 자유를 확장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

 

둘째, 일제 식민지 이후 지역사회의 공공성은 파괴되거나 관에 독점 당했다. 일제 식민권력과 군사독재는 시민들의 함께함을 금지하고 탄압해서 사회적 관계가 형성될 수 있는 장을 붕괴시켰다. 공설(公設), 공안(公安), 공권(公權), 공직자(公職者)같은 말들은 공공성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우리 것이 아닌 것을 지칭하는 말들로 만들었다. 그러면서 자유는 개인의 사생활이 되었고 행정은 자신과 대립하는 시민의 자발적 관계들을 사적인 것으로 만들면서 사회의 관계에 개입했다. 각종 참여제도들이 도입되었지만 민주주의가 힘을 갖지 못하는 건 공공성이 파괴되거나 약탈당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공()이 적극적으로 공()을 확보하려는 전략 속에서만 공공성이 확장될 수 있다. 그런데 이 공공성은 고립된 개인으로 변한 시민들이 자신의 공공성을 회복하고 공유지를 비롯한 공적인 장을 되찾고 그것을 지키려는 노력 속에서만 확장될 수 있다. 그러려면 개인이 공공성의 주체로 등장하고, 서로의 삶을 섞고(共有) 함께 가진 것을 확장해야 한다(公有). 치열하게 토론하고 합의를 보는 과정만이 아니라 함께 먹고 즐기며 삶을 공유하는 과정, 지금 없는 결핍을 채우려는 과정만이 아니라 이미 가진 것을 나누는 과정이 중요하다. 아울러 자신에게 익숙한 방식만을 고집하지 않고 새로움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함께 공적 영역을 확장시킬 수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지역사회에서 운동의 주체가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그 주체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한 정치행동이, 그리고 그것을 지속시킬 수 있는 살림살이가 서로 연계되고 확장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는 표준화된 지식이나 관행보다 자신이 누구임을 드러내는 고유하면서도 다양한 문화 관행과 관습이 더 중요해질 것이다. 만남이 자유를 가능하게 한다.

 

예를 들자면, 미국의 <블랙팬더당>은 과격한 테러단체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다양한 공동체 활동을 벌였던 단체이다. 빈곤과 질병, 범죄, 각종 중독으로 신음하던 공동체를 살리기 위해 <블랙팬더당>은 적혈구 이상을 확인하는 무료테스트와 아이들의 무료 아침식사, 무료진료, 무료 구급차, 호신술 강의, 알콜중독이나 마약중독 치료프로그램 등을 열었다. 그리고 수감자들이 많은 동네에서는 가족들이 면회를 갈 수 있도록 무료버스를 제공했다. 이런 공동체 활동을 펼치는 한편 <블랙팬더당>은 경찰을 침략군으로 규정하고 그들을 감시하는 무장순찰대를 조직했다. 심지어 1969년에는 미국이 정치범을 석방하면 북베트남이 미국인 포로를 석방하는 포로교환 전략을 세웠고, <베트남인민해방전선>측이 이에 합의했다고 한다. <블랙팬더당>은 지역을 가로지르고 국가를 가로지르며 다양한 만남을 실현시켰다. 우리에게도 이런 만남이 필요하지 않을까?

 

셋째, 서로가 서로를 대할 때 평등이 중요하지만, 그 평등은 기계적인 평등이 아니다. 평등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필요하고, 스스로를 드러내고자 할 때 나를 동등하게 대우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평등은 모든 이의 권리라는 추상적인 선언보다 참여를 제한하지 않고 누구나 의제를 제안하고 발언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리고 그런 발언과 제안을 책임지게 하는 과정이다.

 

그런 점에서 평등은 모든 것이 동일함을 뜻하지 않고 모든 것이 같은 가치를 가짐을 뜻한다. 매우 다른 조건을 가진 도시와 농촌이 같은 가치를 가지고 노동과 자연이 동등하게 대우를 받으며 생산과 소비가 비슷한 무게로 다루어질 때 평등은 실현될 수 있다. ‘중심성이라는 말을 내려놓으면 중심만을 통해 볼 때와는 다른 세상이 보이기도 한다. 자신에게 정말 중요한 원칙은 포기할 수 없겠지만 혼자에게만 중요한 고립된 원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평등은 그 원칙이 존중받고 공적으로 논의될 수 있는 장을 마련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

 

나는 연방주의란 미래를 살아가는 정치(prefigurative politics)라고 본다. 보통 prefigurative예시적’, ‘()형성적’, '구성적이라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나는 미래를 살아가는이라고 옮기고 싶다. 이것은 미래의 유토피아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지금 유토피아가 온 것처럼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 미래를 살아가는 정치는 현재의 행복을 미래로 미루지 않는다. 미래의 연방주의를 위해 활동하는 게 아니라 지금 현실 속에 연방의 원리에 따르는 장소를 하나씩 마련해가는 활동이다. 이미 실천하고 실현되고 있기에, 그것에 감염되고 전염되는 사람들이 늘어날 때 연방주의의 힘은 강해질 수 있다.

 

그리고 연방주의 국가는 반()국가나 반()국가가 아니라 비()국가의 원리에 기초한 국가이다. 연방주의는 연방에 속한 정치단위들이 새로운 정치연합을 구성할 권리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연방은 제도로 완성될 수 없고 지속적인 노력으로만 가능하다. 연방주의는 연방을 실현하려는 힘과 전략이 있을 때에만 제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연방주의는 완성될 수 없는 이념이다. 불확실한 미래를 사는 지금은 그런 이념을 실천하기에 좋은 시간이다.

한국 대학들의 속내를 들여다보는 건 한 편의 코미디를 감상하는 것과 비슷하다.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교육’의 이름으로 정당화되고 ‘학문’의 권위로 포장되는 곳이 바로 대학이기 때문이다. 더 재밌는 건 대학의 실상을 모르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는 사람들도 별다른 대안이 없다며 자식들을 코미디의 주인공으로 만든다는 점이다. 우리는 대학에서 무엇을 배우는 것보다 어느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더 중요한 사회에 살고 있으니까.

 

교육기관이 아니라 취업기관, 학벌유지기관으로 전락한 대학이 유지되는 건 일그러진 사회구조를 지탱시키는 다양한 욕망들 때문이다. 4년이라는 시간과 수천만 원의 돈을 낭비해도 졸업장만 따면 학벌을 유지할 수 있다는 욕망, 수도권에만 있으면 어찌 되었건 학생들을 충원할 수 있으니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욕망, 남들도 다 하는데 나만 쳐질 수 없다는 욕망, 어렵게 꿰찬 교수자리이니 자리를 지키며 누릴 걸 다 누려야 한다는 욕망 등이 모여 지금의 뒤틀린 대학을 유지한다. 하지만 비극적이게도 이런 욕망은 다가오는 여러 사회적 위기들을 대비하지 못한다. 대학에서는 농사를 짓는 법도, 에너지를 만드는 법도, 스스로 삶을 개척하는 법도 배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욕망들은 현재의 위기를 더욱더 심화시킬 뿐이다.

 

이 글은 대학 현실에 대한 간략한 스케치이다. 나는 2002년부터 여러 대학을 돌며 강의를 했고, 직함도 시간강사, 겸임교수, 연구교수, 객원교수를 거치며 다양한 이야기를 들고 경험을 했다. 그동안 보고 들은 바들을 자세하게 적는 건 무언가를 목적해서라기보다는 현실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누군가는 드러내야 또 다른 누군가가 그 다음 단계를 밟을 게 아닌가.

 

 

1. 대학 강의실의 풍경

 

한때 대학을 가리켜 진리의 장, 상아탑이라 불렀지만 과연 그럴까? 대학의 교육이 자아를 발견하고 전공과 교양을 강화시킬 수 있을까? 그러려면 영화 <어셉티드>에 나오듯 학생들이 무엇을 배우고 싶은지에 관한 욕구조사를 먼저 하거나 학생들과 논의를 한 뒤 그에 맞게 교육과정이 구성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과정은 대학에 없다.

 

사실상 대학의 교과과정에는 학생들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는다. 한때 총학생회의 힘이 강했을 때는 학생회가 요구하는 강좌가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교양학부나 각 전공학과들이 그때그때 자의적인 기준에 따라 강좌를 개설했다 없앴다 한다. 각 전공/학과/학부의 내규에는 개설할 수 있는 기본과목목록이 있는데, 과목을 없애거나 새로 만드는 건 교수들의 전공이나 강의와 연관되어 있어 논의가 쉽지 않다. 그러다보니 옛날의 과목들이 기계적으로 강의되고 있다. 강의평가제도가 있지만 그건 사후적인 평가이고 강좌의 개설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한다.

 

가끔 교과과정을 바꾸기도 하지만 그 과정에 학생이 참여하지는 못한다. 그건 자율과 인문학을 내세운 과정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대학들이 따라잡기에 열중인 서울대에 다니는 한 대학원생의 말을 들어보자. “2009년에 신설된 자유전공학부는 다양한 전공의 학습을 통해 폭넓고 깊이 있는 사고를 지닌 인재를 양성하겠다던 본래 취지와 달리, 경제․경영학과의 정원을 간접적으로 늘리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됐다. 2009년 이후 의무화된 제2전공도 학생들이 좀더 다양한 교양수업을 수강할 수 있는 권리를 제한하면서 많은 학생이 ‘스펙에 도움이 되는 전공’을 복수 전공하도록 권고하는 조치가 되었다.”[각주:1] 대학들은 사지선다도 선택과 자율이라 생각하는지 선택의 기회를 제한하고서는 그걸 자율이라 우긴다.

 

그러면서 인문학이 트랜드이니 여기저기서 인문학을 들먹인다. 하지만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떤 상태인가, 이곳은 대학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스스로 던지지 못하는 교육이 무슨 인문학인가? 인문학을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고전이라 불려야 할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는 고전들을 기계적으로 배우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그리고 취업을 빌미로 기업이 교육과정에 미치는 영향도 적지 않다. 현재 대학에서 진행되는 인문학이란 기업이 활용할 창의력을 기르면서도 자본주의에 순응하는 인간형을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는 비판도 있다. 예를 들어, “기업 인문학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이윤 목적에 인문학을 종속시킨다. 지식생산의 측면에서 기업 연구소들은 주로 경제, 경영적 주제에 집중해 왔지만 점점 기업 연구소들의 연구는 사회 전략, 정치, 정책 등 인문적 영역으로 확대된다. 이러한 기업문화 조성을 목적으로 하는 기업 인문학은 이미 대학 생활 깊숙이 파고들어 와 있다. 기업들은 이미 주요 대학들을 장악했고 적어도 대학을 통제할 수 있는 위치에 놓임으로써 학생들의 의식은 상당한 정도로 친기업적이고 친자본주의적 방향으로 기울어져 왔다.”[각주:2]

 

또한 교과과정에서 학문의 다양성도 충족되지 않는다. 교육과학기술부의 ‘2012년 교육기본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4년제 대학 교수들 중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10명 중 7명이 미국박사이다. 이러니 학문이 미국의 식민지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영어수업이다, 국제화다 해서 교수채용과정에서도 영어 인터뷰가 필수이다. 유럽이나 동남아시아, 남미를 이해하고 그 언어를 쓸 수 있는 능력은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한다. 한국 대학들이 주장하는 세계화는 미국화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설령 교수들이 신경을 써서 강좌를 개설해도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지금 대학의 시스템에서는 강좌개설과 수강신청이 별개의 문제이다. 수강과 학점취득과정이 전산화되면서 학기 초마다 ‘수강신청대란’이 벌어진다. 홈페이지에 접속해서 수강신청을 해야 하는데, 제법 인기가 있는 과목들은 순식간에 정원이 초과된다. 그래서 컴퓨터 앞에서 대기하며 수강할 과목들을 재빨리 체크하지 않으면 한 학기가 실패이다(새벽에 일어나 명절 기차표를 예매하려 했던 사람들은 이 기분을 알 것이다). 때문에 수강신청한 과목을 서로 거래하거나 심지어 사고파는 웃지 못할 일까지 벌어진다. 그리고 알바 시간에 맞춰 강의를 신청해야 하니 강의주제보다 강의시간이 먼저이다. 내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과목을 듣는 가장 기본적인 욕구조차 제대로 만족시키기 어려운 곳이 바로 대학이다. 그곳에서는 수강이라는 형식이 교육이라는 내용을 압도한다.

 

이런 대란에 대학이 대처하는 방법은 있다. 그것은 수강인원을 마구 늘리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고등학교 한 반보다 학생 수가 늘어난다. 심지어 시간강사 월급을 아끼겠다며 20, 30명이 차지 않으면 과목을 폐강시키는 학교들도 제법 많다.[각주:3] 대형강의실엔 100명 가까운 학생들이 수업을 듣는다. 이런 식으로 어떻게 고등교육이 가능한가?

 

이 과정에서 죽어나는 건 시간강사들이다. 전체 대학 강좌의 절반 정도를 시간강사들이 담당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시간강사는 강의시간이나 강의실 배정, 수강생 수에 관한 아무런 권한도 가지지 못한다(강의를 하지 않을 자유는 있다). 많은 시간강사들이 애매한 시간대의, 학생수가 많은 강좌를 담당한다.

 

그럼에도 강좌의 내용이나 질이 아니라 교수가 아니라는 신분 때문에 시간강사의 보수는 전임교수의 1/5에 지나지 않는다. 방학이 긴 대학인지라 1년에 4개월을 실업으로 지내야하고 그 시간을 버티기 위해 온갖 아르바이트에 손을 대야 한다. 그런데 강의평가는 시간강사들이 많이 맡는 교양강좌에 집중된다.

 

사실 시간강사가 한 학기 강좌를 맡고 맡지 못하는 방식 또한 비상식적이다. 모든 건 학연과 인연으로 연결된 교수들의 손에 달려 있다. 대학에는 기본 규칙이 없고, 휴대전화로 해고 문자를 보내는 야만적인 규칙조차 없다. 다음 학기에도 강의를 맡는다는 연락이 없으면 그걸로 끝이다. 2012년에 통과된 고등교육법 개정안은 학기마다 맺던 고용계약을 최소 1년으로 연장한다고 하지만 눈 가리고 아웅하는 짓이다. 정식으로 계약서를 작성해본 적이 없는데, 어떤 조건으로 강의를 맡는지 확인한 바 없는데, 기한만 연장하는 게 무슨 소용일까? 결국에는 강의를 주겠다며 전화를 하는 교수에게, 대학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다.

 

이런 악조건에서도 시간강사들의 강의내용이 교수들보다 훨씬 낫다는 얘기는 상식이다. 교수들은 몇 년을 우려먹은 강의노트, 이미 지나간 이론들로 강의를 대충 때우는 경우도 많다. 시간강사들에 비하면 천국의 삶이지만 어떤 면에서 교수들에게는 학생들과 상담하거나 진득하게 자신의 사상적, 사회적 과제를 고민할 시간이 없기도 하다. 대학평가제도에서 교원평가의 기준은 논문발표실적과 연구비 수주실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의 대학 제도 안에선 표면적인 성과가 너무 중요해서, 채 배움이 무르익기도 전에 결과를 내놓아야 하고, 또 내놓은 것을 곱씹을 여유도 없이 다음 실적을 위해 경쟁해야 한다. 신자유주의적 대학 평가가 우리를 끝없이 채찍질하는 가운데 교수도 학생도 자신들이 어제보다 더 ‘학문하고 있는가’를 성찰할 수 없게 되어 가고 있다.”[각주:4]

 

이런 처지의 선생과 학생들이 만나 강의실에서 공부를 한다. 요즘 대학들은 강사들에게 파워포인트와 동영상을 활용해서 수업을 하라고 권유(거의 강요)한다. 맞다, 그래야 학생들의 시선이 조금이라도 더 맞춰지기는 한다. 하지만 쉬는 시간이 되면 학생들은 책상에 얼굴을 파묻는다. 고등학교의 쉬는 시간 풍경과 다를 바 없다. 그럴 수밖에 없다. 한 대학생의 기록을 보자.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집에 돌아오면 어느새 밤 11시. 주섬주섬 늦은 저녁을 먹거나 씻고 나면 이미 자정이다. 온몸이 피곤에 찌들어서 그냥 쓰러져 잠들고 싶지만 아직 하루는 끝나지 않았다. 내일이 과제 제출일이기 때문이다.…과제를 하고 난 뒤엔 완전히 탈진 상태로 잠이 들어 버리고, 어쩔 땐 학교에 늦어서 밤새 한 과제를 제출하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교에 다니는 동안 나는 하루에 세끼를 제대로 먹은 기억이 없다. 아침에 달려 나오느라 빈속으로 학교에 도착하고 공복을 달래느라 수업 시간에 간단한 과자나 커피를 마시고 나면 점심시간은 자연스레 어중간해지고 헛배가 불러서 밥 생각이 없다."[각주:5]

이런 상황이니 강의시간에 소통은 불가능하다. 더구나 수업의 평가방식이 세분화되고 상대평가가 강화되다보니 과제와 시험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교수와 학생이 서로 토론하며 학풍을 만들어가는 원래 대학의 취지는 이미 완전히 사라졌다. 팀별 발표를 하고 조별 토론을 해도 그 목적이 평가이고 평가의 권한이 온전히 강사의 몫이기 때문에 큰 변화는 없다(슈퍼스타K니 각종 오디션 프로그램이 협동을 얘기해도 최종 과정에서는 승자가 결정되듯이 말이다). 대학 밖의 혁명은 있었지만 대학 내의 혁명은 아직 없었기에 강의실 풍경은 중고등학교와 다를 바 없다.

 

강의실 풍경은 그대로이지만 연구실의 풍경은 많이 바뀌었다. 한국연구재단이나 기업들이 발주하는 외부의 연구프로젝트가 늘어나면서 교수들이 학부생이나 대학원생들을 조교로 쓰는데, 그 업무의 경계가 없다. 조교는 각종 자료조사로부터 자료정리, 요약까지 상당한 내용을 맡는데 노동의 대가는 형편이 없다(대학원생들의 부담은 더욱더 크다). 열정이 노동으로 변하는 곳은 기업만이 아니다. 기업들은 시설비 들지 않고 인건비가 값싼 대학에 프로젝트를 발주하고, 교수와 학생들은 학생들의 열정을 착취해서 이득을 취한다.

 

이공계의 상황은 더욱더 심각하다. 특히 이공계 대학원생들은 교수들이 받은 기업 프로젝트에 이용당해 왔다. 이공계 출신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털어놓는 이공계 대나무숲(@bamboo12347)에 올라온 내용들을 보자. “나보고 학회가서 무료봉사 하라고 해서 교통비 왕복 3만원은 연구실 비로 처리해 달랬더니, 니 돈으로 가라며 나한테 엄청 욕했지? 근데 당신은 얼마 전에 룸싸롱가서 여자 가슴 만지느라 백 만원 썼다며?” “석사과정은 공노비, 박사과정은 사노비.” 일부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는 곳이 대학이다.

 

때로는 지치고 힘들어 대학을 쉬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다. 학벌사회이다보니 지방대의 학생들은 대학입시만큼 편입시험에 매달리고, 서울에 있는 학교들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대학에 합격하고 나면 휴학을 하고 다시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반수’를 한다. 이런 반수를 막기 위해 대학들이 고안한 방법은 ‘1학년 휴학 금지’이다. 많은 대학들에서 남학생들이 군대를 가는 경우를 제외하면 1학년이 휴학원을 내지 못한다. 가정형편이 어려워도 휴학이 안 되니 돈을 빌려서라도 학교를 다녀야 하고 빌린 돈을 갚아야 하니 아르바이트에 목을 맬 수밖에 없다. 그러니 학교를 다니나 공부를 하지 못하는 학생들도 제법 있다.

 

이처럼 21세기 대학 강의실의 풍경은 아주 황량하다. 신분이 매우 불안정하고 노동조합도 만들지 못하는(또는 않는) 선생들이 알바와 과제, 시험에 찌들은 학생들과 메마른 대화를 나누는 곳이 강의실이다. 파랗게 질려 쓰러질 것 같은 학생들이 삶에 그다지 도움을 주지 못하는 지식을 기계적으로 학습하는 곳이 강의실이다. 이 황폐한 강의실이 존재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래도 대학교가 자식들에게 학벌을 주고 자본주의의 첨병으로 만들어 줄 거라 부모들이 기대한다면, 그것은 엄청난 착각이다. 왜냐하면 학교는 학생들을 자본주의의 총아로 만들어주는 곳이 아니라 그 자체가 자본주의의 총아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학생들은 이윤을 벌어들일 대상일 뿐이다. 강의실을 나와 대학캠퍼스를 둘러보면 현실은 더 황량하다.



2. 대학 캠퍼스의 풍경


지금의 대학 캠퍼스를 표현할 말은 다른 듯하지만 같은 의미의 두 단어이다. 하나는 세계화와 발전을 내세운 ‘공사판’이고, 다른 하나는 온갖 프랜차이즈의 ‘장터’이다. 대부분의 대학들이 미래․글로벌․전문인력 양성이라는 목적을 내세워 대학의 운영체계를 바꾸고 있고 캠퍼스 곳곳을 팔아 기금을 모으느라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학교발전비전이 강조되면서 대학본부 중앙의 기획단위에 지나치게 많은 권한이 집중되고 학생이나 평교수, 직원들이 학교운영에 참여하는 건 더욱더 어려워졌다. 이런 과정은 대학의 폐쇄적인 의사결정구조를 더욱더 심화시키고, 글로벌 스탠다드를 내세운 각 전공별, 학과(학부)별 경쟁을 더 심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대학들은 발전기금 모금과 재정 확보/확충을 내세워 산학협력․협동 강화, 재정수입의 다양화, 수익사업 추진 등을 추진하고 있다. 그런데 산학협력은 대학연구의 사유화․독점화를 불러올 가능성이 높고, 대학의 연구들이 외부프로젝트에 의존하게 된다. 그리고 재정수입의 다양화나 수익사업 추진은 시장논리에 맞춰 대학운영이나 학사행정을 재구성할 가능성을 높인다. 결국 한국사회의 비상식적인 시장논리나 발전논리가 대학의 교과과정과 운영을 지배하고 있다.

 

설마 대학이 그럴까 의심할 수도 있지만 실제 진행과정을 보면 그런 의심이 사라진다. 왜냐하면 대학들의 비전은 하나같이 인프라 혁신․첨단화를 내세운 캠퍼스 공간의 물리적인 재편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연구복합단지, 제2캠퍼스, 유비쿼터스 캠퍼스 등을 내세운 공간의 물리적인 재편은 용역회사와 세콤 등의 기업체들이 대학의 주요공간을 점유하고 ‘관리의 효율성’에 맞춰 생활공간을 재편성하고 있는 상황에서 캠퍼스의 ‘사유화’를 부추길 것이다. 더구나 이런 캠퍼스의 재편성은 대학들이 ‘일방적으로’ 축적하고 있는 적립금을 정당화시켜준다.

 

실제로 전국 사립대의 적립금 규모는 2007년에 약 8조원이었으나 2011년에는 11조 1,500억 원으로 3조 이상 늘어났다. 그리고 대학당국은 적립금을 보유해야 하는 주요 논리로 캠퍼스 건립이나 물리적인 공간의 재편성 등을 내세우고 있다(대부분의 대학 적립금이 건축 적립금인데, 장학금을 위한 장학적립금은 건축 적립금의 1/10 수준이다). 예를 들어, 2012년 홍익대는 건축 적립금으로 5,221억을 보유하고 있는데, 전체 적립금의 89% 수준이다. 이에 비해 홍익대의 장학적립금은 557억원으로 10분의 1수준에 그친다. 그리고 한국대학교육연구소에 따르면, 2009년 1년 동안 전국 사립대가 땅을 사고 건물을 올리느라 쓴 돈이 무려 1조 2,668억 원이다. 그런데 그중 사립대 법인이 부담한 돈은 겨우 1,366억 원(10.8%)이다. 결국 1조원 넘는 학생 등록금이 공사판에 들어갔다. 학생들을 위해 그랬다는 건 궁색한 변명이다. 학생은 졸업해도 건물은 남으니까.

 

더구나 그런 돈도 없으면 기업들의 후원을 받고 학교 건물에 기업명을 붙여준다. 그래서 대학에 ‘포스코관’, ‘삼성관’, ‘현대차 경영관’ 등의 건물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 대학캠퍼스는 학문의 전당이기는커녕 기업의 홍보관 또는 전시장으로 변해간다.

 

더구나 2009년에만 사립대학들이 기업들에 학내 공간을 임대해서 얻은 수익이 총 1,225억 원이다. 이렇게 번 돈을 주식에 투자했다가 2010년에만 약 150억 원의 손해를 봤고 2011년에도 중앙대, 고려대 등 42곳의 대학들이 적립금을 수익증권 등 금융상품에 5,000억 원을 넘게 투자했다가 약 144억의 손해를 봤다. 이런 상황에서도 사립대학들은 수익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않는다. 한국의 사립대학들은 교육기관이 아니라 영리를 추구하는 학원이니까.

 

사학재단들의 적립금은 이미 10조원을 넘어 섰는데 반해, 학자금 대출을 받았다가 원금을 상환하지 못한 학생들의 수는 2010년에는 2만 5천 366명으로, 2006년 670명에 비해 5년 사이에 약 38배나 증가했다. 학부모와 학생들이 비싼 등록금을 마련하느라 허리가 휘었던 지난 10년 동안 대학적립금은 2배 이상 증가했다. 2012년 조사에 따르면 정부의 학자금 대출을 받고 6개월 이상 대출금을 갚지 못해 신용불량자가 된 대학생이 5년 전보다 약 10배나 늘어난 3만 7,400여명에 달한다. 돈을 빌려 학교를 다니는데 졸업해도 취업이 되지 않으니 학교를 떠난 사회의 첫발을 빚쟁이로 시작하게 된다.

 

현재의 사립학교법에 따르면, 지금의 현실과 정반대로 학교법인은 수익용 재산을 보유해서 등록금 비중을 낮추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2011년 전국 사립대학 법인들 중 15곳은 수익금 중 단 한 푼도 학교로 내놓지 않았고 수익의 80% 이상을 학교의 운영경비로 내놓아야 한다는 규정을 위반한 법인이 1/3에 달했다. 경제사정이 어려우니 법인의 상황도 어려워 그렇지 않겠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울산대, 동국대, 서강대, 숙명여대 등 제법 알려진 대학법인들이 규정을 어겼다. 더구나 사립대 법인 166곳이 수익용 기본재산으로 보유한 땅이 200㎢가 넘고 시가로 4조 5000억 원대에 달한다고 한다. 그런데 대학이 이 땅을 통해 실제로 창출한 수익은 자산가치의 0.6%에 불과하니 부동산 투기라는 의혹을 피하기 어렵다. 대충 조건을 갖춰 학교를 만들기만 하면 학생들의 등록금으로 학교를 운영하며 각종 사업에 뛰어들 수 있으니 대학설립은 손해 볼 게 없는 ‘장사’이다.

 

캠퍼스의 일상생활로 들어가면 그 장사속이 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보편적 복지를 얘기하는 교수들이 정작 자기 학생들의 복지에는 관심이 없다는 아이러니!). 일단 가장 기본적인 먹거리를 보자. 외식업체들이 대학식당을 위탁운영하는 경우가 많고 대부분이 학생들의 건강보다 가격을 먼저 고려한다. 대학식당에서 저렴한 가격에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건 옛날 이야기이다. 심지어 세종대에서는 학생들에게 싼 가격에 질 좋은 먹거리를 제공하는 <대학생활협동조합>을 학교에서 강제로 몰아내려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대학생협>이 운영하는 매점이나 식당은 기업체가 운영하는 곳보다 훨씬 싼데도 학교에 기금을 내놓지 않는다며 위협했고 <대학생협>을 상대로 학교식당 및 복지시설의 운영권을 위임하라는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예전에는 학교 내의 자판기를 학생회가 관리해서 장학금을 만들기도 했지만 요즘은 그것도 학교가 파는 사업권일 뿐이다.

 

그리고 대학 기숙사들은 민간투자(BTL) 방식으로 세워진다. 즉 기업은 일정 기간 기숙사를 운영해 자금을 회수하고 15~20년 뒤에 기숙사를 대학에 기증하는 방식이다. 대학은 공짜로 건물을 받으니 이득이고, 기업은 안정적인 수익을 보장받을 수 있어서 좋다. 그런데 기업의 요구에 따라 대학이 신입생의 기숙사 입실을 권유하거나 의무화하는 곳도 있다고 한다. 결국 피해를 보는 건 일반 기숙사보다 2~3배 비싼 입주비를 내야 하는 학생들이다. 심지어 학생들에게 강제로 기숙사 식권을 사도록 하고 사지 않는 학생들을 강제퇴사시키는 일까지 있었다. 학교가 ‘끼워팔기’까지 시도하는 상황이다.

 

심지어 학교운동장 운영권을 학교가 외부에 팔아먹기도 한다. 민간업자가 운동장에 각종 시설을 설치하고 대여료를 받는 대신 20년 뒤에 대학에 시설을 넘겨준다는 조건이다. 앞서 얘기한 민간투자방식이 운동장에도 적용되는 셈이다. 그러다보니 체육동아리들이 운동장조차 제대로 쓰지 못하는 희한한 풍경이 연출된다. 이 과정에서 학교측은 학생들에게 아무런 의견도 구하지 않았다.

 

강의실도 마찬가지이다. 예전에는 학생들이 자유로이 강의실을 이용하고 심지어 강의실에서 밤을 지새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런 일이 불가능하다. 첨단강의실을 만든다는 명목으로 강의실마다 컴퓨터와 빔프로젝터를 갖추다보니, 이를 관리한다는 명목으로 대학들은 민간경비업체들에게 건물의 관리권을 넘겼다. 그러니 값비싼 공간이 될수록 학생들이 자치할 영역은 줄어드는 셈이다.

 

그 뿐이 아니다. 대다수의 대학들은 학생증을 은행의 체크카드로 만들어서 학생들의 개인정보가 학교의 주거래은행으로 넘어가게 했다. 학생증 맡겨 놓고 외상술을 먹었다는 얘기는 이제 불가능하다. 누가 자신의 카드를 술집에 맡기겠는가? 그리고 학생증을 비롯한 각종 서류를 발급하는 비용도 외주화되다보니 계속 가격이 높아진다. 이 역시 행정시스템 효율화라는 명목으로 정당화된다.

 

캠퍼스에서 소외되는 사람들은 학생들만이 아니다. 대학에서 일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외부의 용역업체에서 파견된 사람들이다. 강의실 청소나 주차관리 등 서비스가 필요한 곳에서 여러 사람들이 일한다. 그런데 홍익대 청소노동자들의 사례로 증명되었듯이 파견노동자라 노동조건이 아주 열악할 뿐만 아니라 사고를 당해도 학교는 전혀 책임을 지지 않는다. 학교에서 일하는 행정직원들도 비정규직이라 기본적인 노동권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인권과 평화의 대학이라 알려진 성공회대에서도 비정규직들이 비슷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아이러니!).

 

교수들의 상황은 다른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1976년에 도입된 교수재임용제도에 따라 교수들도 재임용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재단이나 정부의 입맛에 맞지 않는 교수들이 탈락하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영화 <부러진 화살>로 유명해진 성균관대 김명호 교수도 재임용 과정에서 탈락했다). 정년을 보장받고 있지만 교수들이 재단 측과 나쁜 관계를 맺지 않으려는 건 이 때문이다. 학교 외부에서 진보적이라고 알려진 교수들이 학교에서 보수적인 행태를 보이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대학은 캠퍼스 내의 언로마저 막고 있다. 강제로 대학생협을 내쫓아내려던 세종대는 학생들의 대자보를 막고 있고, 심지어 진보적으로 알려진 대학조차 ‘취업률 상승’을 빌미로 대자보판을 철거한다거나 동아리를 통폐합하는 일까지 벌이고 있다. 대자보조차 마음대로 붙일 수 없으니 대학이 사회운동의 보루나 해방구 역할을 하던 시기는 이미 지나가 버린 셈이다.

 

대학의 공공성을 강화시켜야 할 정부는 그동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대학이 교육기관이라는 정체성을 버리고 사업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2005년 정부가 ‘대학설립운영규정’을 개정해 기업이나 개인이 기숙사나 식당 같은 시설을 운영할 수 있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부는 2012년에도 ‘대학자율화 추진계획’이라는 명목으로 대학에 많은 권한을 이양하고 정부지원금의 용도제한도 완화시켰으며 사립대들이 교육용 기본재산을 수익용 재산으로 손쉽게 용도변경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캠퍼스 내 건물 신ㆍ증축 관련 규제도 대폭 완화시켰고, 교원인사에서도 대학총장이나 이사회의 권한을 강화시키고 교원을 임면할 때 교과부에 제출할 서류를 간략하게 하고 보고의무를 없앴다. 정부는 교육공공성을 보장하거나 강화시키기는커녕 자율화․특성화라는 명목 하에 사립재단의 운영권한과 대학의 상업성을 강화시키고 있다.



3. 사립대학의 이사회 풍경,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전체 대학 중 사립대가 차지하는 비중은 학교 수로 74.9%이고 학생 수는 87%에 달한다. 그런데 사립대학이라해서 설립자가 마음대로 학교를 운영하지는 못한다. 고등교육법에 따르면, 대학 법인은 공공기관이기 때문이다(그래서 정보공개법에 따라 사립대학도 공공기관으로서 정보를 공개할 의무를 갖는다). 개인이 마음대로 운영하지 못하고 법인을 설립해서 운영하도록 정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리고 사립학교의 교원이라 하더라도 사립학교법에 의해 그 지위와 신분을 보장받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이다. 그러니 대학은 사유화된 소유물이 아니라 공공의 자산이어야 여겨져야 한다.

 

그리고 사립학교법은 “사립학교의 특수성에 비추어 그 자주성을 확보하고 공공성을 앙양함으로써 사립학교의 건전한 발달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목적을 규정한다. 즉 사립학교의 목적은 공공성을 기르는 것이고, 이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창업자가 마음대로 학교를 운영하지 못하도록 법인 내에 이사회를 두고 이사회가 중요한 사항에 공동책임을 지도록 만들었다. 아울러 이사회의 기능과 소집, 의결정족수 등을 법으로 규정하고 그 회의록도 공개하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의 사학재단들은 왜 이 모양일까? 짐작하다시피 대학 법인들은 철저하게 사유화되어 있다. 2011년 9월에 열린 한 사립대학교의 이사회 회의록을 살펴보자. 총 12명의 이사 중 10명이 참석하고 감사 2명, 직원 5명이 참석해 회의가 진행된다. 교원 인사와 교원인력운영계획, 행정직원 징계의결요구 승인, 기본재산 취득, 기숙사 신축 등 학교 내의 세세한 문제까지 이사회 의결을 거쳐 결정된다.

 

흥미로운 건 이사장 선임에 관한 내용이다. 임기가 만료된 이사장이 후임 이사와 후임 이사장을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선임해 달라는 덕담을 남기고 회의장을 떠난다. 그리고 이사 한 명이 이사장 권한을 위임받아 회의를 진행하면서, 앞서 떠난 이사장의 이사 임기가 오늘로 끝나니 지금 새로운 이사를 선임하자고 이사회의 의견을 묻는다. 이에 신중하게 이사를 선임해야 한다며 한 이사가 반대하자 현 총장이 이사장의 연임을 제안한다. 이에 반대하던 이사는 “회의 진행이 밖에서 들었던 소문 그대로 진행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부분들이 그렇습니다.”라는 의견을 낸다. 그러자 이사장 권한대행은 이 말이 이사 선임과 관련 없는 얘기라며 무기명 투표로 결정을 내리자고 결정한다. 그러자 반대하던 이사는 투표를 거부하고 회의장을 떠난다. 남은 이사 중 8명(전원)의 찬성으로 이사장이 연임되고, 연이어 다시 이사장으로 추천된다.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자 이사장은 연임되고 회의는 계속 진행된다.

 

큰 문제 없이 회의가 끝났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사회의 결정에 반대하며 회의장을 떠난 이사와 현 총장이 모두 학교 설립자의 아들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생각거리가 많아진다. 특히 반대하며 떠난 이사는 현 총장 이전의 총장이었다. 그리고 이사장이 능력부족을 인정하며 사임했는데 이를 다시 추대해 이사장으로 임명하는 과정도 뭔가 석연치 않고, 이 이사장을 현 총장이 추대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더 그렇다. 다른 원인들도 있겠지만 이 모습은 설립자의 아들, 딸이 이사회의 이사직을 차지하고 있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서울대와 더불어 소위 하늘(SKY) 대학이라 불리는 연세대와 고려대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연세대 재단의 이사장은 방우영 조선일보 상임고문으로 1997년부터 이사장 자리를 꿰차고 장기집권하고 있다. 학교 설립자인 기독교 교단의 반대에도 자기 뜻대로 재단 정관까지 뜯어고치며 권력을 휘두른다. 고려대 재단의 이사장 역시 설립자인 김성수 가문의 혈족이다. 그러니 김성수 일가의 소유인 동아일보가 고려대의 운영에 개입한다는 소문도 무조건 부정하기 어렵다. 유명 사립재단들의 사정조차 이러니 여론의 눈길이 닿지 않는 다른 대학들의 상황이 나을 리 없다. 학내비리가 적발된 대부분의 대학에서 많은 문제들은 설립자의 가족들이 학교일에 개입하는 것에서부터 비롯된다.

 

이런 사정 때문에 이사장이나 이사의 배우자나 직계존비속의 학교장이나 회계직원 임명을 제한해야 한다는 얘기가 있지만 사학재단들의 저항이 워낙 거세다. 2007년도에 사립학교법이 개정될 때에도 사학재단들의 저항이 거셌다. 그리고 개정된 법에 따라 대학평의원회가 만들어져 대학의 발전계획이나 학칙, 대학헌장, 교육과정의 운영 등을 심의하도록 했지만 대학평의회가 제대로 활동한다는 얘기를 듣기 어렵다.

 

이 와중에 재단과 가까운 대학 총장들이 학교를 좌지우지한다. 지금은 많은 대학에서 총장이 직선제로 선출되고 있다. 재단이 총장을 선임했던 시절보다 지금이 나쁘다고 얘기할 수는 없지만 곳곳에서 대학직선제의 폐해도 드러나고 있다. 학교 내에서 자기 세력을 키우기 위해 연구나 교육보다 학내정치에 몰두하는 사람들이 많고, 그런 사람들이 총장으로 임명되면서 실제로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왜 교수들은 총장이 되고 싶어할까? 대학체계에 손댈 권한도 가지지만 개인적인 이득이 더 크다. 얼마 전 사표를 낸 건국대 김진규총장은 과도한 연구업적 요구와 무리한 학과구조조정, 4억이 넘는 연봉, 수 억의 업무추진비를 썼다는 문제로 사퇴했다. 카이스트에서는 학생과 교수가 연이어 자살할 만큼의 보여주기식, 업적 쌓기식 개혁 때문에 총장이 사퇴했다. 수원여자대학교에서는 총장이 납품업체에게 뇌물을 받고 회계서류를 조작했다는 이유로, 백석대에서도 공사대금 중 수십 억원이 리베이트비용으로 총장 처남의 계좌에 입금되었다는 이유로, 부산대에서도 민간투자사업을 둘러싼 비리 정황이 포착되어 총장이 사퇴했다. 교육기관이라고 하지만 실제 모습을 보면 이권을 둘러싼 아사리판에 가깝다.

 

진보적인 목소리를 내는 지식인들이 대학에 제법 많은데 왜 이런 문제가 바로잡히지 않을까? 앞서 말했듯 이는 재단의 권한이 강해지면서 교수직이 위태로워진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렇지만 신분과 관련된 문제 외에 인식론적인 문제도 있다. 미국의 지식인 마셜 버만(Marshall Berman)은 『맑스주의의 향연』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나는 많은 지식인들이 각자의 정치적 견해와 상관없이 일상생활의 문제와 흐름에서 단절돼 있는 것이 지식인들의 직업적 위기라고 본다. 그러나 이것은 좌파 지식인들에게는 특별한 문제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다른 어떤 정치운동보다도 민중에 주목하고, 민중을 존중하며, 민중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민중의 요구에 관심을 기울이며, 민중을 뭉치게 해, 자신들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 싸우게 한다는 사실에 특별한 자부심을 느끼기 때문이다.…우리가 민중의 구체적 삶과 연결지점을 잃어버린다면, 장차 민중의 삶을 한데 묶을 사상을 만들어 낼 수 없다. 민중이 세계를 바라보고 느끼고 경험하는 것처럼 민중들을 인식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민중이 자기 자신들을 인식하거나 세계를 변화하는 데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을 것이다. 거리의 신호들을 읽지 못하는 한, 그 잘난 『자본론』을 읽어봤자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밖으로 아무리 비정규직과 사회적 약자, 소수자를 떠들어도 결국은 자신의 일상이 그 사람들과 단절되어 있다면, 자신의 생활근거지에서 그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욕구에 주목하고 그들과 더불어 함께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제아무리 똑똑하고 좌파이론에 박식한 사람들일지라도 그들은 진보적일 수 없다. 진보적이라는 딱지가 그 삶의 진보성을 보증하지는 못한다.



4. 교수와 학생, 직원의 폴리스?


이것이 한국만의 특수한 상황은 아니다. 한국전쟁 전문가로 알려진 브루스 커밍스(B. Cumings)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이 지은 『대학과 제국』이란 책을 보면 정부와 기업이 대학을 어떻게 길들여왔는지가 잘 드러난다. 카멜롯 프로젝트, 트로이 프로젝트 등 미국이 남미나 다른 제3세계를 지배하기 위한 전략들이 대학의 프로젝트로 발주되고, 사회과학자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이 그 프로젝트에 참여한다. 이 책에서 로렌스 솔리(Lawrence Soley)는 정부만이 아니라 기업이 대학을 어떻게 지배하게 되었는지를 분석한다. “교육을 목적으로 기업이나 기업재단에서 대학으로 흘러 들어가는 돈은 냉전시대에 정부보조금이 학문분야에 영향력을 행사한 것과 거의 같은 방식으로 학문분야의 방향에 영향을 끼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가령 보수적인 군수제조업체가 설립하고 재정지원을 하는 존 M. 올린 재단은 시카고대학, 예일, 스탠포드, 하버드, 콜롬비아, 조지 메이슨, 조지타운, 듀크 대학을 포함하여 일류 법과대학을 가지고 있는 몇몇 대학들에서 진행되는 ‘법률과 경제학’이라는 연구 프로그램을 후원해 주고 있다. 이 ‘법률과 경제학’은 이 재단의 극우이데올로기와 일치하는 법철학으로서, 공화당의 분석가 K. 필립스는 자신의 저서 『부자와 빈자의 정치학』에서 ‘법률과 경제학’은 H. 스펜서와 W.G. 서머의 시각을 상기시키는 신다윈주의 ‘이론’이라고 쓰고 있다. “시장에서의 상품선택 과정은 정부의 의사결정을 대체할 수 있다”고 전도하고 있는 ‘법률과 경제학’같은 강좌가 나날이 인기가 높아지고 있는 현실을 개탄한다.” 이처럼 기업들은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대학의 강좌를 만들거나 그 강좌를 지원하면서 학문의 흐름을 주도한다.1)

뿐만 아니라 기업은 소위 산학협동과정을 통해 막대한 이득을 보기도 한다. 솔리에 따르면, “외국기업을 포함하여 기업들이 대학에 연구기금을 제공한 또 한 가지 이유는 경제학 측면에서 설명될 수 있는데, 납세자와 수업료에 의해서 세워진 대학연구소에서 연구를 수행하는 것이 그에 상당하는 건물과 장비를 갖춘 기업실험실에서 하는 것보다 더 저렴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학은 낮은 비용으로 대학원생들을 연구보조원으로 고용하여 민간부문의 연구원들보다 훨씬 더 적은 숫자로 동일한 연구를 수행할 수 있다.”2) 기업이 갖춰야 할 실험 장비를 대학이 마련하게 하고(그러면서 생색도 내고), 값싼 노동력인 대학원생들을 착취하는 거다. 꿩 먹고 알 먹고란 이런 걸 얘기하는 게 아닐까?

이런 게 미국 대학만의 문제점은 아니다. 오히려 이는 한국대학에서 사회주의나 기타 비판적인 강좌들이 모두 사라진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대학의 커리큘럼들을 두루 살펴보면 이런 영향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대학 곳곳에 자리잡은 산학협동단지나 벤처단지 등등을 보면 이미 대학은 기업의 영향력에 완전히 압도당했다고 얘기할 수 있다. 그러니 대학이 상식적으로 움직이길 바라는 게 어쩌면 몰상식한 건지도 모른다. 대학이 비판적 지식인들의 온실이라는 얘기는 이미 옛날 얘기가 되어버렸다. “대학이 기업화되었다는 것은 또한 생산의 과정을 사기업의 방식으로 관리한다는 의미를 포함하기도 한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대학을 포함한 학교에서 ‘평가’라는 용어가 시대적 화두로 등장했는데, 이러한 변화의 이면에는 교육과 배움의 과정을 과학적인 차원에서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철저하게 관리하겠다는 발상의 전환이 깔려 있다. 이제 더 이상 대학의 주체는 교수와 학생이 아니며 기업형 행정관리체제가 대학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3)

중앙대에서는 급기야 학교 구조조정을 반대하는 대학생들이 공사장의 타워크레인에 오르고 한강대교 아치에도 오르는 일까지 생겼다. 학생들의 입장에선 할 만큼 한 셈이다. 그러나 이런 행동도 구조조정을 막지는 못했다. 그뿐이 아니다. “타워크레인에서 내려오자마자 연행되면서 나는 두산건설로부터 고소를 당했다. 그리고 4일 뒤인 4월 12일, 학교로부터 2,500여만 원의 손해배상 청구를 받았고 그로부터 한 달 뒤 퇴학당했다.”4) 고려대에서는 학교결정에 반대하는 학생들을 ‘출교’시키기도 했다.

이런 대학에서 어떤 대학을 꿈꿀 수 있을까? 엄기호는 “학교를 사적인 일상과 공적인 정치가 만나는 공간으로 만들고자 했던 그 꿈”을 얘기한다. “이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다시 공적으로 입을 여는 것이다. 비록 힘들고 외롭고 지치더라도 아렌트가 말한 것처럼 우리가 누구인지를 “리얼하고도 교환 불가능한 방법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이것은 학교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자존감이 달린 문제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공적인 것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물론 우리가 드러내는 것이 진리가 아닌 의견이며 의견이 때로는 이견이 되는 한 불화는 피할 수 없다. 두 번째로 이 불화를 자신의 능력으로 혼자서 뚝딱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바우만이 지적한 것처럼 “함께 결정”할 때 불화는 폭력이 아니라 정치가 될 수 있다. 불화가 폭력이 아니라 정치가 될 수 있도록 조정하는 곳, 그것이 폴리스가 아니겠는가?”5)

사실 대학을 바꾼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고, 대학생협을 학교에서 내쫓으려는 세종대 재단의 시도를 ‘갑’이라며 인정하는 법원의 태도에서 드러나듯 정부 또한 사학재단 앞에서 무기력할 때가 많다. 그래도 찍 소리 못하고 당하는 것보다는 꿈틀이라도 하는 게 올바르다. 지금 대학에는 불화가 필요하다.

일단 정보를 가지면 구체적인 대응을 하며 불화를 일으킬 수 있다. 2011년 9월에 개정된 ‘고등교육법’은 학생위원이 등록금심의위원회의 3/10 이상을 차지해야 하고 회의록을 학교 홈페이지에 공개해야 하며 위원회가 학교측에 자료를 요청할 권리가 있다고 규정한다. 즉 대학생위원이 등록금의 산출근거나 대학의 회계운영현황 등을 학교 측에 요구할 수 있다는 얘기이다. 그리고 기본적인 자료나 다른 학교의 자료, 기본적인 통계가 궁금하면 한국대학교육연구소(http://www.khei.re.kr/)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렇게 자료를 모으면 학교의 논리를 구체적으로 반박할 수 있다.

물론 학교 측이 순순히 이런 자료를 주지 않을 수 있고, 그럴 경우에 법적으로 처벌할 방법도 마땅치 않다. 그럴 경우 국․공립대학만이 아니라 사립대학도 공공기관이라 정보공개청구의 대상이라는 점을 활용해야 한다. 실제로 2011년 11월 중앙행정심판위원회는 교육과학기술부 산하의 한국사학진흥재단이 보유하고 있는 사학재단의 결산서를 공개하라고 결정했다. 이런 사례가 있으니 학교가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다면 직접 청구할 수 있다. 정보공개센터(http://www.opengirok.or.kr/)를 통하면 정보공개청구에 관한 노하우를 배울 수 있다.

이렇게 해도 대학의 입장이 바뀌지 본격적인 정치가 필요하다. 국민권익위원회가 운영하는 국민신문고(www.epeople.go.kr)에 가면 민원을 넣을 수 있다. 내용과 상관없이 민원을 넣으면 위원회가 관련부서를 알아서 찾아 통보하고 처리결과를 알려주니 효과적이다. 다만 요구사항을 분명히 해야 구체적인 답변을 들을 수 있다. 아니면 국가인권위원회의 인권상담포털(http://consult.humanrights.go.kr/)에 진정이나 민원을 접수하면 된다. 1학년 휴학을 교칙으로 금지한다거나 상대평가제도를 강화하고 수강신청을 제한하는 것 등 생각해보면 제기할 내용이 많다.

그래도 안 되면 지난 총선을 통해 국회의원이 된 청년대표들에게 자료를 받아달라고 부탁하면 된다. 국회의원이 교육과학기술부를 통해 자료를 요청하면 대학들은 반드시 관련 자료를 제출해야 한다. 그리고 국회 홈페이지(http://www.assembly.go.kr/)에 가면 지금 국회가 다루는 법률이나 국회의원들에 대한 정보들을 얻을 수 있다. ‘정보광장’코너에서 회의관련정보와 법률관련정보 등을 검색할 수 있고, ‘의원광장’코너에서는 국회의원 현황과 국회의원들을 검색해서 볼 수 있고 그들의 홈페이지에도 찾아갈 수 있다.

물론 열심히 노력해도 자료를 거의 구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도 실망은 하지 말자. 이런 시도를 하는 것만으로도 학교는 긴장한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 학교가 꼼수를 부리기 어렵다. 학교가 상대평가방식을 선호하는 것은 그것이 학생을 통제하는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 대학들은 많은 돈을 홍보비로 쓰고 있기 때문에 언론이나 외부에 학교 일이 퍼지는 것을 부담스러워 한다. 그리고 신문이나 TV같은 언론사에 제보하거나 트위터, 페이스북 등의 소셜네트워크를 활용해 압박을 가하면 학교 측의 태도가 달라진다.

그리고 등록금을 낮추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내가 낸 등록금이 제대로 쓰이고 있는지, 그리고 등록금을 내는 사람으로서 나의 권리를 제대로 누리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학교의 공간을 이용하고 도서관에 책을 신청하고 실험실습비를 쓰는 그 모든 과정에 학생의 권리가 있다. 그리고 빼곡한 강의실에 흥미도 없는 주제의 강의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강의를 개설하도록 요구하는 것도 학생의 권리이다. 교육내용은 교수의 몫이지만 교육과정은 공동의 몫이니까, 그리고 재단이 아니라 우리가 교수들의 월급을 주니까.

그리고 대학 공간이 외부 기업에게 팔리면 팔릴수록 그만큼 생활비가 많이 든다. 반면에 대학생활협동조합이 있으면 낮은 가격에 질 좋은 상품을 구매할 수 있다. 그러니 대학생협을 만들도록 학교에 요구하거나 대학생들이 직접 만드는 것도 생활비를 줄이는 방법이다. 2012년 협동조합기본법이 제정되어 출자금 규모에 상관없이 5인 이상이 모여 신고하면 협동조합을 만들 수 있고 여러 가지 지원도 받을 수 있다.

혼자서 학교의 문제를 지적하기 어려우면 학내의 비정규직, 일용직 노동자들과 연대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백짓장도 맞들면 났다고 청소노동자나 주차관리원, 시간강사 등과 연대하여 학내를 점거하고 그곳에서 새로운 사건을 만드는 것도 좋다. 실제로 성공회대의 노숙모임인 ‘꿈꾸는 슬리퍼’는 2009년부터 학교 내에 텐트를 치고 살고 있다.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H. Arendt)는 이런 말을 남겼다. 고대 아테네의 “폴리스는 지리적으로 자리잡은 도시국가가 아니다. 폴리스는 사람들이 함께 행위하고 말함으로써 발생하는 사람들의 조직체이다. 그리고 폴리스의 참된 공간은, 그들이 어디에 있든지 간에, 이 목적을 위해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한다. “네가 어디로 가든지 간에 너는 폴리스가 될 것이다.” 이 유명한 말은 단순히 그리스의 식민지화의 모토가 아니다.”6)

지금 대학을 폴리스로 만들 수 있는 것도 교육과정이나 캠퍼스가 아니다. 진정한 대학에 관해 말하고 행위하며 폴리스를 꿈꾸는 사람들의 연대이다. 그것만이 희망이다.

  1. 문수현, “학문하지 않는 대학”, 《오늘의 교육》2011년 5․6월호, 55쪽. [본문으로]
  2. 정용주, “기업화된 대학: 잔인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야만”, 《오늘의 교육》2011년 5․6월, 121쪽. [본문으로]
  3. 학기가 개강하고 난 뒤에 수강인원이 결정되기 때문에 시간강사들은 하루 아침에 아무런 대책도 없이 일자리를 잃기도 한다. 보통 수강신청 정정기간이 개강 후 2주차에 있기 때문에 1주 강의를 하고 난 뒤에 일방적으로 강좌폐지 통보를 받는 경우도 많다. 이렇게 불안한 삶을 사는 일용직 노동자들이 시간강사이다. [본문으로]
  4. 문수현, 앞의 글, 59쪽. [본문으로]
  5. 서유정, “공부할수록 가난해지는, 가난할수록 공부할 수 없는”, 《오늘의 교육》2011년 5․6월호, 89쪽. [본문으로]
  1. 시간강사 2013.11.27 07:34

    모두가 시간 강사를 하지 않으면 어떤일이 벌어질까요? 한 시가에 천만원을 준다고 해도 거절 한다면. . .
    그러면 그 제도가 바뀌지 않을까요?

  2. 몽똘 2013.11.27 12:27

    그렇게 단결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면 제도가 바뀔 것이라 봅니다. 시간강사들의 다양한 욕망을 조율해서 그 힘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가 관건이겠지요. 너무 뻔한 정답이네요. 죄송...^^

  3. 보스코프스키 2014.01.02 23:21

    뒤늦게 하는 지적이지만 주석 6) 이 안 보이네요.... 정정을...

협동조합 강의를 나갈 때마다 빠지지 않고 나오는 질문은 정부에게 어떤 지원을 받을 수 있냐는 것이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속이 좀 쓰리다. 오죽 했으면 저런 기대를 할까 안타깝기도 하지만, 지원을 못 받으면 협동조합을 하지 않을 것 같아 힘이 빠진다. 허공에 헛된 단어들을 뱉으려고 나는 이 자리에 섰던가, 뭐 이런 우울한 생각이 든다.

어쨌거나 답은 해야 하니 협동조합은 정부에게 직접 지원을 받지 못한다고, 협동조합의 정체성은 정부로부터 독립되고 자율적이어야 한다고 답한다. 너무 실망하는 듯 하면 직접지원은 어려우나 공공기관에 납품할 때 우선순위를 얻거나 공간을 지원받을 수는 있다고 답한다. 그럴 거면 왜 협동조합을 하라고 이런 강좌를 여느냐 묻는 경우도 있다. 나 역시 그렇게 묻고 싶다. 대체 왜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경제와 관련된 강의들이 지역에 넘쳐 날까? 여기에 뭔가 해답이 있다고 믿는 걸까?

협동조합기본법이 만들어져 협동조합을 만드는 건 쉬워졌다고 한다. 하지만 직접 설립준비를 해본 사람은 안다. 하나도 안 쉽다. 정관 하나 마음대로 못 하고 표준정관에 맞추라는 잔소리를 들어야 하고, 사업 시작도 안 했는데 사업계획서에, 예산서에, 임원 명부, 설립동의자 명부, 창립총회 공고문, 창립총회 의사록 등 귀찮은 일이 한 가득이다. 이런 과정을 지원한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행정 입장에서 잔소리를 하지 자기 마음으로 일을 돕는 경우는 흔치 않다.

지원도 없고 설립할 때도 품이 많이 들고, 그렇게 만들고 나면 협동조합이 알아서 잘 굴러가나? 그렇지도 않다. 우리가 5명 이상 모여서 중요한 결정을 내려 본 게 언제였던가? 심지어 사업과 관련된 결정을, 이해관계가 얽힌 결정을 내려야 하니 쉽지 않을 수밖에 없다. 삶터에서나 일터에서나 그런 현장경험을 쌓을 기회가 거의 없지 않은가. 그리고 사업을 하려면 자본금이 필요한데, 조합원의 출자금만으로 자본금을 충당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딜레마이다. 사업을 본격적인 궤도 위에 올려놓아야 돈이 생길 텐데, 거기까지 가기가 쉽지 않다. 경험도 부족, 자본금도 부족, 지원도 부족, 3부족인 협동조합이 어떤 대안이라는 건가?

그런데도 올 9월까지 설립신고가 된 협동조합이 2,600여개를 넘는다. 10개월 동안 이 숫자가 만들어졌으니 하루 평균 9개 정도의 협동조합이 만들어진 셈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협동조합들은 우리 사회에서 어떤 공통의 필요와 열망을 조직하려는 걸까? 당장 눈에 보이는 건 익숙한 공동구매나 공동판매, 일자리이다(서울시를 기준으로 보면 문구나 식료품을 공동구매하거나 판매하겠다는 협동조합이 가장 많고, 강사 양성이나 창업교육 등 교육 및 서비스업, 출판․영상․통신 등 정보서비스업이 많다고 한다).

그런데 공동구매나 공동판매가 협동조합의 전유물도 아니고 이미 온/오프라인에서 그런 역할을 하는 곳이 많다. 그리고 다른 전문기관들이 협동조합의 교육이나 서비스보다 질이 떨어진다고 얘기할 수도 없다. 없는 시장을 새로이 개척하는 경우라면 모르겠으나 이미 있는 시장에서 영리기업들과 경쟁해서 살아남는 건 지금의 경제상황에서 매우 어려운 일이다.

어렵게 만들어도 성공을 자신할 수 없는 이런 상황에서도 협동조합의 숫자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어려우니 협동조합을 만들지 말라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협동조합의 힘을 깨달으며 활동을 시작하면 좋겠다. 혼자서는 하지 못할 일을 하기 위해 협동조합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나와 우리에게 필요한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그런 필요와 열망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만나야 협동조합의 힘이 생길 수 있다. 강좌를 듣는 게 아니라 강좌를 듣는 사람들을 만나야 하고, 몇몇이 모여 뚝딱 설립신고를 하는 게 아니라 비슷한 필요와 열망을 가진 사람들을 찾고 만나야 한다. 함께 공부하고 밥을 먹으며 관계를 다져야 협동의 힘이 살아날 수 있다.

지금 하고 있는 일도 어려운데 새로운 일을 더 할 수 있을까 주저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왜 잘 안 풀리고 어려울까 생각해보면 그 일로는 풀리지 않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내 일이 어려운 건 내가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아서일지도 모른다. 옆의 사람을 믿고 자리를 내어주는 것도 협동이다.

피에르 신부와 함께 가난한 사람들에게 집을 지어주는 엠마우스 운동을 시작한 사람은 감옥에서 여러 번 자살을 시도했던 사람이었다. 어느 날 그를 찾아온 피에르 신부는 그에게 도움을 주겠다고 말하지 않고 어차피 죽을 것 죽기 전에 집 한 채만 짓자고 말했다. 피에르 신부의 손을 잡고 그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신부님께서 제게 돈이든 집이든 일이든 그저 베푸셨더라면 아마도 저는 다시 자살을 시도했을 겁니다. 제게 필요한 것은 살아갈 방편이 아니라 살아야 할 이유였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협동이다.

 

 

후카사쿠 긴지 감독의 영화 <배틀로얄 1, 2>은 실업자 1천만 명, 등교거부학생 80만 명이라는 일본의 가까운 미래를 다룬다. 일본정부는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학교의 한 반의 학생들을 무작위로 뽑아서 무인도에 가두고 3일 동안 한 명이 살아남을 때까지 서로 죽이게 하는 ‘배틀로얄법’을 선포한다. 이 법의 목적은 한 가지! 승자와 패자를 나누는 ‘경쟁’에 복종하도록 청소년들을 가르쳐서 ‘가치 있는 어른’을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무인도에서 탈출한 청소년들은 <와일드 세븐>이라는 조직을 결성하고 쌍둥이 빌딩을 폭파하며 모든 ‘어른’들에게 전쟁을 선포한다.

 

 

무라카미 류의 소설 《희망의 나라로 엑소더스》는 총이 아니라 미디어와 화폐를 들고 저항하는 일본의 청소년들을 다룬다. 더 이상 어른들에게 미래를 맡기길 거부하는 중학생들이 자신들에게 익숙한 인터넷과 미디어를 기반으로 기업을 만들고 호텔을 인수해 자신들의 직업훈련소를 만들고 어른들을 고용한다. 어른들의 세상엔 희망이 없다고 판단한 청소년들이 스스로 세계를 만들어간다.

 

이 두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바는 미래란 근본적으로 불확실하다는 점과 기성세대가 자신의 무지를 인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하기 어렵고, 과거의 지식이 쓸모없어지는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에 의지해 살아가야 할까? 분명한 건 혼자 살아남는다는 게 이미 불가능해졌다는 점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같이 살아남을 기반으로 공동체를 꿈꾼다. 영화와 소설에서도 삶을 살아가려는 이들이 선택한 방법은 조직화와 공동체이다.

 

그런데 이 공동체는 뭔가 과거의 공동체와 다른 느낌을 준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는 이들에게 공동체는 어떤 의미일까? 그리고 이 공동체는 과거의 공동체와 무엇이 다를까?


공동체는 비슷한 사람들의 모임일까?

 

 

프랑스의 사상가 장 뤽 낭시는 《무위의 공동체》에서 “공동체에 대한 사유나 욕망은 근대적 경험에 나타난 가혹한 현실에 응답하기 위해 뒤늦게 창조된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근대로 접어들며 공동체가 사라졌다는 기독교나 휴머니즘의 안타까움은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던 공동체에 대한 환상일 뿐, 우리가 공동체라고 믿는 것은 부족이나 제국의 다른 형태였을 뿐이라는 주장이다.

 

낭시에 따르면, 공동체의 이상이라 불리는 ‘하나는 전체를 위해, 전체는 하나를 위해(one for all, all for one)’는 불가능한 이상이다. 공동체는 근본적으로 “타인들의 공동체”이고, 일시적으로 서로 일체감을 느끼는 상태를 만들 수는 있지만 그런 상태를 영원히 지속시킬 수 있는 사회는 없다.

 

공동체는 이미 규정된 것을 실현하는 관계가 아니라 구성원들이 만들어가는 관계이고, 사회 바깥에서 일방적으로 규정될 수 없는 무위(無爲)의 장소이다. 그리고 어떤 점에서는 공동체라 불리지 않아도 사랑하고 우정을 맺으며 그런 공동의 관계를 사는 삶이 훨씬 더 중요한 장이다. 낭시의 논리를 따르면, 무엇을 공동체라 부를 것인가라는 물음은 무의미할 뿐 아니라 때로는 위험한 질문이다. 왜냐하면 무엇을 위한 공동체, 어떤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공동체라 말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공동체가 아닐 뿐 아니라 공동체에 포함되지 않는 타자들을 위협하거나 지배하려는 위험한 도구로 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철학자 알폰소 링기스는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은 자들의 공동체》에서 “흔히 공통언어나 공통개념형식 같은 공통적인 것을 공유하고 국가나 도시나 제도같은 공통적인 것을 공립하는 다수의 개인들로 구성되는 것”이라 여겨지는 ‘합리적 공동체’가 타자를 배격한다고 비판한다. 타자의 얼굴을 마주보길 거부하며 “세계의 잡음을 제거하는 과정은 합리주의자가 되는 과정”이다. 주변의 무수한 웅성거림이야말로 우리에게 소통이 필요한 이유이고, 우리와 다르다며 배척한 사람들이야말로 공동체가 필요한 이유인데, 우리는 그 무거운 이유를 대면하지 않고 피하려 한다.

 

우리 삶에 필요한 다양한 재화와 서비스를 공급하지만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들, 나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방인들, 그들과 우리가 마주볼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과정에서만 공동체가 출현할 수 있다. 타자를 마주할 때에만 우리는 공동체를 향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링기스는 우리에게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 그들과 함께 있어야 하며 그들과 동반해야 하는 근본적인 의무”가 있다고 얘기한다. “병원들에서든 빈민촌들에서든 외롭게 홀로 죽어가는 사람을 방치하는 사회는 급속히 자멸하는 사회이다. ‘죽어가는 사람과 우리가 함께 하는 공동체’는 ‘공통적인 것을 공유하고 공립하는 사람들과 우리가 함께 하는 공동체’와 어떤 관계를 맺을까?”라고 링기스는 묻는다. 직장에서 쫓겨난 노동자, 고향에서 내쫓긴 농민, 경쟁에 시달리는 청소년들이 죽어가는 한국사회에서 공동체를 꿈꾸는 이들은 무엇을 고민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이 두 서양 사상가의 철학은 우리에게 아주 낯설다. 우리에게는 공동체가 집단적이고 비슷한 느낌을 주는 집단인데, 이들은 그것을 단호하게 부정한다. 그건 공동체의 가면을 쓴 다른 무엇이라는 거다. 이런 해석을 동양과 서양의 차이라고 봐야 할까? 농업사회와 산업사회의 차이라고 볼 수는 있으나 동서양의 차이로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나와 우주의 전일성(全一性)은 이런 사상과 연결되기도 한다.

 

문제는 공동체에 대한 생각과 우리의 실제 삶이 매우 이질적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TV드라마 <전원일기>나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를 그리워 할 때도 있지만 실제 삶은 CCTV와 출입증으로 도배된 아파트촌에서 이루어진다. 마을공동체, 마을기업이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사업으로 홍보되는 세상이지만, 바로 그 점이야말로 우리 시대에 공동체가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하다는 점을 반증한다.

 

자연스러운 공동체가 불가능해진 시대에 우리는 여전히 공동체를 상상하고 있다. 공동체의 진위(眞僞) 여부보다는 ‘우리가 원하는 공동체란 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필요하다. 우리는 정말 함께 살려는 준비를, 타자들을 환대할 준비를 하고 있나?

 

 


문턱있는 공동체의 번성, 환대하는 공동체의 소멸

 

 

안락하고 비슷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는 주로 그 공동체에 살지 못하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유지된다는 역설! 공동체에 사는 사람과 공동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철저히 구분된다. 폴란드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액체근대》에서 현대의 공동체란 “그 내부의 모습보다는 울타리가 빈틈없이 경계된다는 사실로 특징지어진다”고 주장한다. 문턱이 만들어지고 울타리가 세워진 곳에서 공동체의 모습이 드러난다. 이 공동체들은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높은 울타리를 세우고 경비원들을 고용한다.

 

“끊임없이 예측을 불허하며 혼란을 가중시키는 사나운 바다에서 길을 잃은 선원들에게 안전한 항구, 꿈의 종착지를 약속”하는 공동체는 분명 매력적이다. 하지만 그림을 아름답게 그릴수록 그 상상은 공동체를 이상적인 것으로, 어떠한 잡음이나 혼란도 있을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 “위험에 처한 몸 주변에 있는 분명한 위험들을 거부하고 밀쳐내고 싶은 욕구는 ‘외부’가 비슷한 것이 되도록, 외부를 거의 ‘비슷’하거나 일치하는 것으로 만들고 싶은 욕구, ‘저 바깥’을 ‘이 안’과 비슷한 형태로 다시 만들고 싶은 욕구로” 번진다. 이 욕구가 강렬해질수록 공동체의 문턱은 높아진다.

 

그리고 바우만이 지적하는 또 하나의 문제! 매일매일 즐거운 축제가 열리는 공동체는 매력적으로 보이지만 공적인 공간으로서의 성격을 잃고 살만하지 않은 세상을 살만한 것으로 위안하는, 그래서 실제로 세상을 바꾸려 하지 않는 수동적인 삶을 정당화시킨다. 외부에 관심을 두지 않고 내부의 즐거움만 추구하는 공동체는 세계의 고통을 덜어주기는커녕 외려 그것을 심화시킨다.

 

 

이렇게 외부와 담을 쌓고 지내려는 공동체들이 있는 반면, 외부인들을 적극적으로 환대하는 공동체도 있었다. 도로시 데이는 노숙자들이 맘 편히 먹고 쉴 수 있는 ‘환대의 집’을 미국 곳곳에 세웠다. 도로시 데이에 관한 평전 《환대하는 삶》을 쓴 로버트 콜스는 환대의 집을 “복지국가라는 익명의 관료적 체계와는 정반대의 방식으로, 즉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방식으로 자선행위가 이루어지고 인정되는 곳”이라 설명한다. 환대의 집은 “창고 하나와 아파트 하나를 빌리고, 빵과 버터를 사고 커피를 만들고 수프를 준비하고 노숙자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옷가지를 구해 주고, 가능하다면 잠잘 곳을 마련해 주고, 가장 중요하게는 어떻게든 그들에게 우정과 애정을 줄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들과 함께 앉아 대화를 나눔으로써 그 비전을 현실화시키는 일을 함께 시작했다.” 이런 환대의 집이야말로 낭시나 링기스가 말하는 공동체에 가까울지 모르겠다. 그곳에는 같이 무언가를 시도할 수 있는 동등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도로시 데이가 환대의 집에만 관심을 쏟은 것은 아니었다. 가톨릭노동자신문을 만들었고 전쟁을 반대하는 일에도 앞장을 섰다. 도로시 데이는 “누군가는 거대 기업과 싸우러 나서야 하고, 누군가는 정부를 압박해 가난한 사람들을 돕도록 만들어야 하고, 또 누군가는 일하는 사람을 옹호해 주장을 펼쳐야 합니다. 워싱턴에는, 미국의 경제적 정치적 권력에는 등 돌린 채 공동체주의에 대해서만 끊임없이 이야기한다는 건 바보같은 일입니다.”라고 주장했다. 서로 동등하게 마주보려면 우리는 그런 마주침을 방해하는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에서 눈을 돌리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마주보며 함께 살려고 결심할 때 우리는 공동체를 ‘경험’한다.

 

문제는 폐쇄적인 공동체가 늘어나는 반면 환대하는 공동체는 계속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홀로 고립되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없듯이 고립된 공동체는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공동체가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이 아니라면, 안에만 신경을 쏟지 말고 밖을 주시해야 한다. 그렇게 낯설고 이질적인 것과 섞이면서 공동체는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위축되기도 하고 확장되기도 하며 존재를 이어간다.

 

 


공동체는 가족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는 바는 공동체를 가족과 일치시키는 것이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처럼 국가와 학교, 가정을 하나의 덩어리로 보는 건 속성이 다른 모임을 하나의 질서 속에 통합하려는 시도이고, 우리가 지향할 공동체의 모습은 아니다.

 

 

그런데 현재 한국에서 공동체를 표방하는 곳들은 지나칠 정도로 가족 중심이다. 공동체를 만들 필요가 주로 보육이나 교육에서 생긴다는 점이 그런 특성을 만들었다. 그러나 가족 중심의 공동체가 한국의 전통 공동체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권정생의 《우리들의 하느님》에서 묘사되듯이 공동체는 세상 만물을 품는 장소였다. 그리고 권정생의 작품에서 묘사되는 공동체는 가족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가족이 해체된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가족을 그리워하긴 하지만 그 가족들로만 공동체를 구성하자는 얘기는 어디에도 없고, 낯설고 찢어진 관계의 사람들이 서로 기대어 생활하는 곳이 바로 공동체이다. 가족의 사랑을 강요할 수도, 친구와의 우정을 조작할 수도 없는 곳이 공동체이다.

 

물론 가족이라 불리지 않던 사람들을 관계망 속으로 끌어들이고 더불어 산다면, 송해성 감독의 영화 <고령화 가족>처럼 ‘새로운 가족’이 구성되고 인정받을 수 있다면 그곳은 공동체라 불릴 수 있을 것이다. 가족이라서가 아니라 가족처럼 얽혀 살 수도 있다는 의미에서.

 

공동체는 미래에 대한 불안을 없애줄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동체 자체가 대안이라기보다는 공동체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하려 하는가, 어떤 삶을 꿈꾸는가, 어떻게 세상을 바꾸려 하는가, 이런 질문들이 훨씬 더 중요하다.

정책의 효과는 짧은 시간에 드러날 수 없다. 불과 2년밖에 안된 정책을 가지고 그 실제 효과를 따지는 건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효과가 분명하게 드러날 수 없는 상황에서 효과를 예측해서 비판하는 것만큼 잘못된 비판은 없다. 기존의 정책이 보완되고 수정된 것이라면 그 방향이라도 예측할 수 있겠지만 새로 시작된 정책이 어디로 어떻게 갈지를 미리 예측하는 건 예언의 영역이지 분석의 대상이 아니다.

 

그럼에도 약간이나마 의지할 수 있는 틀은 ‘경로의존성’이다. 과거에 어떤 정책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는지를 보면 비슷한 정책이 어디로 갈지를 알 수 있다. 행정조직의 경우, 특히 그 관행이 잘 바뀌지 않는 한국의 행정조직 경우에는 그 방향이 잘 보인다. 민관협력, 거버넌스를 아무리 얘기해도 잘 바뀌지 않는 것은 행정구조와 관행, 문화이다.

 

그런 점에서 혁신정책의 방향은 민이 아니라 관이어야 한다. 그런데 서울시의 혁신정책은 대부분 관이 아니라 민을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런 점에서 솔직히 혁신정책이라 부르기 어렵고 시민운동의 다양한 아이디어를 관의 영역으로 흡수하려는 정책이라 평가할 수 있다. 시민사회와 행정이 함께 변해야 하겠지만 ‘취약한 시민사회와 과도한 행정’이라는 현실을 고려하면 행정의 혁신이 두드러져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 발제문은 크게 두 가지 질문을 던지려 한다. 첫째, 혁신이 어느 한 편의 과제인가? 함께 변해야 하는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변해야 한다는 걸까? 둘째, 변화의 구체적인 힘은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져야 할까? 개인의 자율성과 함께 사회의 공공성(公共性)을 강화시킬 전략은 어떻게 마련될 수 있을까?



1. 서울시 마을공동체 정책: 의도는 좋다고 하나 방법이...


<서울특별시마을공동체종합지원센터>의 유창복 씨는 《마을공동체 1년 시민토론회 자료집》에 실은 “서울시 마을만들기 사업과 거버넌스의 과제”라는 글에서 이런 입장을 밝혔다. 서울시 사업을 하며 가장 염두에 둔 문제가 “칸막이행정, 형식적 거버넌스, 조급한 성과주의”라고 지적했다. 타당한 지적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업은 실국이 담당하며, 마을공동체 담당관실과 마을지원센터가 정책조율 기능을 담당한다. 공동체위원회가 실질적인 심의기구로서 실국에 대한 지배력을 가진다”는 거버넌스 원칙을 세웠고 ‘맞춤형 지원’과 ‘당사자주의와 보충성 원리’를 사업의 원칙으로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민과 관의 소통이 어렵다”는 것을 전제로 “상호협업의 경험과 소통의 경험”을 쌓으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아울러 “마을 차원의 사회적 자본을 강화”시킬 수 있도록 “마을 공공성, 주민들의 관계망, 사업의 주민주도성과 자립성, 장소성 등 다양한 요소들에 대한 합리적인 측정과 평가기준을 조속히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이런 노력이 실제로 어떤 변화를 가져왔을까? 발제문에 따르면 그럼에도 서울시의 칸막이 행정을 넘어서기에는 “구조적인 한계”가 있었다고 평가한다. 마을사업이나 주민이 시의 재정지원을 받는 “보조사업”이나 “보조사업자”가 아니라 “시의 주인으로서 시정에 참여하는 주체”임을 인정하라는 주장은 증명의 주장보다 그렇지 못한 현실을 반영하는 주장처럼 들린다. 민관협력을 담당하는 기관으로서 지난 1년 동안 쌓은 경험을 논하는데 사업에 관한 부분이 매우 구체적이나 ‘구조’를 논하는 부분은 매우 추상적이다. 사업의 기획과 평가 과정에서 민간의 주도성이 살아나고 행정의 권력이 이양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는 구체적인 근거는 제시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이 발제문은 서울시 마을공동체 사업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좋은 물음을 만들고 그 질문을 공유하는 과정에서만 좋은 고민과 해답들이 나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질문은 아니고 앞서 《마을공동체 1년 시민토론회 자료집》에 실린 구자인 연구소장의 “마을현장 거버넌스와 중간지원체계”, 최순옥 위원의 “마을공동체 사업 1년 성과와 발전방향”, 박현찬 연구원의 “마을공동체 사업, 성과와 비판, 그리고 발전과제”, 신원철 의원의 “마을사업 예산지원과 주민 자생력 제고”를 참고했고, 조정래 입법담당관의 “서울 마을공동체 만들기 사업 추진방향 연구”(《입법담당관 정책보고서 제 3호》), 김은희 <도시연대> 사무처장의 “서울특별시의 마을공동체 사업에 대한 질문들”(2012년 4월 6일 간담회 발제문), 양재섭, 김인희 연구원의 “서울의 마을단위계획 운영실태와 자치구 역할 개선방향연구”(《서울연구원 보고서》)를 참고했다. 서울시의 마을공동체 정책과 관련해 이런 질문들을 던지고 싶다.

 

첫째, 서울시의 행정은 마을공동체 정책을 통해 어떤 변화를 경험했나? 이 부분은 측정할 구체적인 자료가 없다. 다만 구조적인 면을 한번 점검할 수 있다. 서울시의 조직도를 보자. 혁신을 담당하기 위해 서울시장 밑에 서울혁신기획관이 만들어졌다.

 

구조적으로 서울혁신기획관이 시장 직속으로 서울시의 행정을 관장하는 지위에 있다. 이런 구조가 혁신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직속의 행정조직이 신설된 것일 뿐 이 자체가 조직의 혁신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 구조가 시민사회로 행정의 권한이 이전되었음을 증명하지도 못하고, 이렇게 별도의 조직을 만드는 것이 칸막이행정을 무너뜨릴 계기가 되지도 못한다. 다른 나라의 행정혁신모델은 대부분 시민사회로 상당한 권한과 예산을 넘겨주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행정구조의 개편만으로는 그 혁신성을 증명하기 어렵다.


둘째, 광역자치단체와 기초자치단체의 역할분담은 잘 되고 있나? 여러 자료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바는 광역자치단체가 실제 사업을 하지 말고 기초자치단체의 시스템 개선을 정책적으로 유도해야 한다는 점이다. 즉 광역자치단체가 신규사업을 만드는 걸 자제하고 기존 사업의 연계를 중시하며 업무의 질을 높여야 한다. 예를 들어 양재섭, 김인희 연구원은 서울시 추진과 자치구 추진의 장단점을 다음과 같은 표로 정리한다.

구분

서울시 주도형

자치구 주도형

장단점

▶충분한 계획 수립 역량으로 안정화된 사업추진 가능

▶충분한 예산의 운용 가능

▶객관적인 기준으로 공정한 평가와 모니터링 가능

▷기본계획과 실시설계의 주체 변경으로 인한 단절 발생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는 여러 사업을 실질적으로 관리하기에는 한계

▶지역 이해를 통한 장소중심의 통합적 정책시행 가능

▶창구의 단일화를 통해 주민과 밀착되고 피드백이 가능한 소통 가능

▶지역과 밀착하여 주민과 지속적 소통으로 사후관리 용이

▷전문부서 마련의 어려움과 절대적인 담당 인력의 부족

▷자치구 자체적 예산 마련에 한계

그런데 현재의 서울시 정책에서 이런 역할분담을 확인하기 어렵다. 역할분담이 없지는 않지만 광역자치단체가 기획하고 자치구가 실행하는 식의 역할분담이 사라지지 않았다.


셋째, 행정의 조급성은 정말 사라졌나? 사업의 수를 늘리는 것보다 질을 강화시키려는 노력이 있었나? 유창복 센터장은 마을공동체사업이 ‘마을지향행정’을 만들려 했다고 주장한다. 그 주장처럼 분명 일정한 변화는 있었다. 마을거버넌스를 만들려 했다고 한다.

 

그런데 거버넌스의 마지막 단계는 평가가 아니다. 평가가 다시 기획으로 환류(feedback)되어야 거버넌스이고, 그 환류과정에서 민간의 주도성이 살아나야 거버넌스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런데 정말 그런 거버넌스가 구현되고 있을까? 예를 들어, “마을의 역사와 경험을 공유하는 마을, 마음껏 상상하고 함께 꿈꾸는 마을, 서로가 서로에게 들려주고 듣는” 자리라는 00마을이야기의 2012년 지원사업 보고서 양식을 보자. 참여회원수, 축제참여자수가 전체적인 사업개요이다. 양식이 간소화된 건 분명 긍정적인 면이지만 양적 평가가 아닌 질적 평가가 어떻게 반영되는지 알 수 없다. 민간의 주도성이 살아나고 있는 걸까?

 

진정 주민주도성이 살아나고 있을까? 신원철 의원의 지적처럼, 일방적인 지침과 선정, 평가 등은 시민사회를 규율하는 장치가 되고 있는 것 아닌가? ‘기획→계획→예산편성→제안접수→심의․선정→지원→평가’라는 집행과정은 철저한 관주도 방식이라는 문제제기에 대해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넷째, 서울에 마을이 만들어지지 않는 건 사람들이 친하지 않아서일까? 통계청에 따르면, 2012년 기준 서울시의 인구밀도는 16,483명으로 전국 평균 499명보다 약 33배 높고, 전국 최저인 강원도의 90명보다 약 183배 높다. 인구밀도만으로 서울시민보다 강원도민의 삶이 더 행복할 것이라 예상할 방법은 없지만 생명체가 좁은 공간에 몰려 살 때 불행해지고 밀집하면 도시문제가 반드시 생긴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마을공동체가 형성되려면 사실 서울시는 인구를 분산시킬 방법을 고민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통계청에 따르면, 2010년 기준 서울시 전체 가구 약 350만 가구 중 집을 소유한 가구는 약 143만 가구이다. 전월세 가구가 약 199만 가구이다. 결국 약 57%의 가구는 정주하지 못하고 전월세 시세에 따라 이동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마을공동체는 어떤 의미일까? 아파트소유자 중심으로 움직이는 아파트입주자대표회의가 주도하는 아파트공동체는 세입자들에게 어떤 느낌일까?

 

<도시연대> 김은희 사무처장의 지적처럼, 우수사례지역이 보편적인 삶의 질 향상의 계기가 되기보다는 고립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리고 성공사례보다는 마을이 무너지는 이유를 먼저 파악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구자인 연구소장의 말처럼 “서울시는 지나친 과밀에서 나타나는 폐해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전국적 동향을 보면서 ‘지역이 살아야 서울이 산다’는 관점에서 국토 균형발전에도 기여해야” 하는 것 아닐까?


다섯째, 이미 모임들이 많이 만들어진 지역이나 단체활동이 활발한 곳으로 자원이 집중되는 것은 아닌가? 일반 시민들의 인식이나 정보부족으로 혜택이 편중된다는 우려가 실제로 제기되고 있다. 새누리당 남재경 서울시의원이 제기한 사업편중에 대한 지적이 정말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인지 자기반성이 필요하다.

 

(사)마을이 제작한 《마을공동체기업 육성프로세스》(2012. 08)의 평가지표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마을의 필요를 파악할 정도의 안목과 조합원을 모을 자립도, 마을 내 취약계층을 파악하고 조직의 이익을 마을의 이익으로 연결지을 능력은 이미 드러난 조직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 특히 서류를 준비하고 보고서를 작성하는 과정이나 주민들과 사업을 진행했던 경험은 기성단체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익숙하지 않은 주민들을 위해 멘토단이나 인큐베이터, 컨설턴트가 지원을 한다고 하지만 정작 이 과정에서는 이들의 통일되지 않은 관점이 주민들의 혼란을 늘리기도 하고, 불필요한 사업을 만들기도 한다.

 

사실 마을의 일이라고 해서 그것이 공적인 지원을 받아야 할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시민참여의 효율성이 시민참여의 민주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스카치폴(T. Skocpol)과 피오리나(M. P. Fiorina)가 지적하듯이 시민참여는 ‘대표되지 않은 참여자’(unrepresentative participators)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어떤 사업이 다른 사업보다 더 절실하다는 기준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고 그것의 민주성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나? 특히 마을공동체사업을 위탁받은 조직의 민주성을 어떻게 측정할 수 있나?


여섯째, 모든 마을활동이 마을공동체사업이어야 하나? 마을공동체사업들이 진행되면서 정말 마을이 만들어지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이런저런 사업들은 많지만 그 사업들을 통해 주민들은 어떤 경험을 하고 있나? 외려 지원사업 때문에, 지원을 받은 쪽과 지원을 받지 못한 쪽으로 나눠지고, 되는 사업일수록 그와 관련된 기획이 공유되지 않는 것을 보면 마을이 더 분열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마을공동체사업을 통해 통반장, 지역단위 직능 사회단체, 자원봉사센터, 주민자치위원회가 민주화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야 사업의 의미가 살아날 것인데, 그런 소식을 듣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마을활동이라는 것이 매우 정형화되고 그것에 대한 다른 목소리를 배제하는 것은 아닌가? 갈등이 없는 아름다운 마을을 지향하는 게 정치없는 마을을 지향하는 건 아닌가? 스카치폴과 피오리나는 질서와 안정이 아니라 갈등이 시민의 민주적인 능력을 강화시킨다고 주장한다. 즉 갈등하는 이해관계에 바탕을 둔 시민들의 적극적인 행동과 시민단체들의 확산이 민주주의를 강화시킨다. 갈등을 회피하는 마을공동체, 정치를 배제하는 마을공동체는 어떤 방법으로 민주주의를 확산시키고 강화시키려는 것일까?

 

이 와중에 서울시는 특정 정당을 지지하거나 종교를 전파하려는 목적을 가진 마을공동체에는 행정, 재정적 지원을 하지 않겠다며 조례를 개정했다. 새누리당이나 민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이미 마을의 관변단체들을 주도하는 상황에서 정치성을 배제하는 건 어떤 의미일까? 그리고 상식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우리는 어느 정당을 지지하겠다며 마을사업을 하는 곳이 어디 있겠나? 이런 판단은 특정 정당의 당원들이 마을에서 배제되는 효과를 가져올 것이고 이 효과는 소수당에게 집중될 것이다. 이것이 마을의 민주주의를 살리는 결과를 가져올까?


일곱째, 마을공동체 사업과 무관하게 한 가지를 더 지적한다면, 박원순 시장은 SNS행정을 자신의 치적으로 평가했다. “지난 6개월간 1만 4,000여건의 의견을 받아 98%의 민원을 해결했다”며 “SNS 행정이 세계 최초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자평했다. 민원을 해결했다니 좋은 듯하지만 시장을 통한 민원해결은 새로운 형태의 후견주의(clientalism), 주민들의 뒤를 봐주고 지지를 확보하는 방식이지 혁신정책이나 민주주의는 아니다. 사안을 공식적인 과정을 통해 해결하고 개인이 아니라 구조를 바꾸려는 노력이 한국의 지방자치제도에서 절실히 필요한데, SNS 행정은 이런 노력을 뒷받침하지 못한다.



2. 서울시 사회적경제 사업: 할 수 있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의 구별이...


<서울사회적기업개발센터>가 2013년 2월에 발표한 “2013년 서울특별시 사회적 경제 현황과 정책흐름”이라는 PPT자료를 보면, 서울시의 사회적 경제 정책은 다음과 같은 전략을 세우고 있다.

 

개발 중심의 하드웨어 전략을 추진했던 기존 서울시정에 비하면 긍정적인 전략이라 얘기할 수 있다. 제시하는 목적처럼 시민의 관점에서 생활문제를 해결하고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을 통해 지역경제를 강화시키며 경제민주주의를 확장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다만 관건은 지방정부가 경제 영역에 어느 정도로, 어떤 방식으로 개입해야 하는가이다. 정치와 경제가 분리되는 것이나 일치되는 것 모두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서울특별시사회적경제지원센터>의 이은애 센터장은 센터장이 되기 전인 2012년 1월에 발표한 “서울시 사회적 기업 육성정책의 평가 및 개선과제”(《서울경제》)에서 서울시가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 여섯 가지를 제안했다.

 

①서울형 사회적 기업의 개념 및 정책목표 재설정. 한시적 재정지원에 의존한 ‘일자리 창출’을 너머, 지역사회 특유의 인적․물적 자원을 활용함으로써 내발적 발전을 이끄는 사회적 기업의 지역화와 이를 가능케할 생태계 조성이 핵심과정으로 제기되게 된다. ‘서울시민의 주도적이고 민주적인 참여와 사회․경제․문화적 수요에 기반하여 지역 활성화를 위한 혁신적 해법을 제시하는 가운데 다양한 지역자원을 연계하므로써 사회적 목적 수행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해 나가는 예비 및 인증 사회적 기업’으로 재정의. 마을기업이나 자활공동체, 협동조합을 포괄하는 접근.

②창업단계 인건비 지원 중심에서 기업의 생애주기별 맞춤지원 전략으로 이행. 창업, 인증, 성장, 폐업이라는 주기. 인건비, 시설설비비, 무료 사회서비스 파일럿 사업비 등을 지원기관이 선택하도록. 우호적 시장 확보(공공기관 및 대기업 연계를 통한 조달시장 확대, 사회적 기업간의 내부시장 구축을 활성화, 서울 특유의 공공의 적극성과 정책역량을 활용하고 시민의 지지기반 형성. 칸막이 행정 제거하고 연계.

③서울시의 수요 및 자원조사를 통한 전략분야 및 전략지역 시범사업 필요. 서울시의 우선사업분야로 대학생 및 청년 주거문제 해결, 낙후지역 대안개발형 쇼셜 하우징, 도시농업, 로컬푸드 연계형 친환경 공공급식시스템 구축, 전통시장 및 소상인 지원, 지역공동체형 보육시설 확충, 자치구 특화산업 연계형 사회적 기업 창업.

④시민사회 역량 제고 및 네트워크 강화. 인력양성 지원사업.

⑤민관 거버넌스에 기반한 시너지 확보. (가칭)서울 사회적경제위원회 구성.

⑥사회적 기업의 개별 생존을 너머 생태계 조성을 돕는 풀뿌리 중간지원조직 확충.

 

이런 제안이 거의 반영되어 <서울특별시사회적경제지원센터>는 2013년 9월 12일 미래복지포럼에서 발표한 “서울시 사회적 경제 현황 및 활성화 전략”이라는 PPT 자료에서 아래와 같은 지원계획을 밝혔다.


좋은 내용이고 동의할 만한 내용인데, 여러 가지 다양한 사업들을 다루는 것 말고 이런 사업들을 어떤 관점에서 진행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이렇게 만들어진 협동조합과 사회적기업, 마을기업이 서울시민의 살림살이를 대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서울시의 사회적 경제는 기존의 경제를 보완하려는 것인가? 하지만 그 목적을 보면 보완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해석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서울시의 사회적 경제정책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런 물음에서 시작해 다른 물음으로 넘어가려 한다.


첫째, 한국사회의 경제 집중도는 점점 더 심화되고 있다. 1997년 IMF 이후에는 국제금융자본과 재벌, 자유주의 정부의 삼각동맹체제(이병천)가 한국사회를 지배하며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모토로 삼는 ‘기업사회’를 만들고 있다. 이 와중에 고용없는 성장과 비정규직 양상은 바꿀 수 없는 흐름이 되고 있고,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하도급거래’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재벌의 사회적인 지배력은 더욱더 강해지고 있다.

 

자, 이런 현실을 두고 판단할 때 서울시의 사회적 경제정책은 무엇을 지향하고 있나? 기존의 영리경제와 사회적 경제를 ‘공존’하게 만들겠다는 서울시의 구상은 정말 실현가능한 것인가? 예를 들어, 서울시가 선포한 ‘협동조합도시 서울’은 ▲공공서비스 영역에 시민 주도의 협동조합 참여 보장과 서비스 질 개선,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이 참여하는 협동조합 설립 촉진과 경쟁력 강화, ▲근로자 협동조합의 원활한 설립을 위한 지원, ▲다양한 생활협동조합 설립으로 지역 공동체성 회복, ▲시민 교육 체계 마련과 지도자·전문가 육성, ▲협동조합 활성화 조례 제정과 기금 조성을 통한 자립·성장지원 등을 내세웠다. 만일 이런 협동조합정책이 기존의 경제정책을 보완하는 수준이 아니라 대체하려 한다면 재벌과의 대결이 필수적인데, 그런 전략이 있는가? 특히 한국사회의 모순이 집약된 서울시가 그런 대결을 주도할 수 있을까?

 

서울시가 보완전략을 대체전략인 것처럼 홍보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물음을 떨칠 수가 없다. 더구나 민주화 이후 독자적인 이해관계를 가지고 시장에 개입하는 신자유주의 관료집단을 견제할 힘이 구성되고 있는가? 민주화 이후 더욱더 적극적으로 국가를 포섭하는 재벌들의 지배전략에 대항할 힘이 마련되고 있는가? 사회경제적 시민권과 정치적 시민권이 상호 연관을 맺으며 향상될 수 있는 전략이 세워지고 있는가? 사회적 경제는 노동자이자 동시에 투자자인 노동자들을 조직할 전략을 가지고 있나? 자본파업에 대항할 힘이 형성되고 있나? 재벌의 지배구조를 변화시킬 전략이 마련되고 있나? 사회적 경제는 한국 자본주의의 특징인 하도급거래구조를 변화시킬 힘이 있나? 재벌들의 골목 상권 침해를 막을 힘을 가지고 있나? 이런 물음들이 뒤따라 나온다.


둘째, 노동시장의 유연화와 계급불평등의 심화라는 상황에서 사회적 경제는 노동과 복지를 연계시키는 전략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실제로 사회적 경제가 교육, 주거, 고용에서 격화되는 경쟁과 불평등을 바로잡을 힘을 기르고 있나? IMF 이후 등장한 노동복지(workfare)라는 개념이 실제로는 복지의 축소를 동반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물론 사회적 경제의 의미를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해석할 이유는 없다. 다만 제도가 사회에 실제로 미쳤던 영향을 잘 따져봐야 한다. 사회적 경제의 경로는 사회적 기업의 경로와 무관하지 않다. 한국정부는 2007년 사회적기업육성법을 만들면서 사회적기업 인증제도라는 것을 도입했다. ‘사회적 기업’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려면 반드시 노동부 장관의 인증을 받아야 하고, 인증을 받지 않으면 과태료를 내도록 했다.

 

이렇게 인증을 내세웠지만 정부의 인증기준이 명확하지 않고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이 계속 제기되었다. 그리고 정부의 인증이 신규사업보다 기존에 이미 진행되어오던 사업들, 즉 이미 인력과 자원을 가진 곳으로 집중되었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또한 사회적 기업이 사회성보다 일자리를 만드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는 비판, 정부가 최저임금만을 보조하고 나머지 부족분을 사업을 통해 보충하도록 해서 저임금 일자리가 확산된다는 비판, 정부가 노동복지(workfare)를 강조하면서 기본적인 복지를 축소시키고 있다는 비판 등이 계속 제기되었다.

 

협동조합은 사회적 기업의 경로와 다를 것이라 자신할 수 있을까? 사실 협동조합기본법도 이런 경로에서 자유롭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협동조합기본법에서 협동조합은 (일반)협동조합과 사회적 협동조합으로 구분된다. (일반)협동조합은 5인 이상의 결의로 설립되고 신고만 하면 등록절차를 거쳐 활동할 수 있다. 반면에 지역사회에 공헌하거나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월평균 소득의 60% 이하, 고령자, 장애인, 결혼이민자, 경력단절여성, 갱생보호 대상자 등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이들을 고용하는 비중이 전체의 40% 이상을 차지하는 사회적 협동조합은 5인 이상의 결의로 가능한데, 기획재정부 장관의 인가를 받아야 설립될 수 있다. 사회적 협동조합은 (일반)협동조합과 달리 정부의 재정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사회적 기업과 비슷하게 ‘인가’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사회적기업육성법의 경험을 통해 협동조합기본법을 해석한다면 그 결과는 사회적 기업과 비슷할 것으로 보인다. 단기간의 지원을 통해 협동조합의 수가 늘어날 수 있지만 사회성이나 협동의 강화보다 고용 창출에 초점이 맞춰질 것이고, 시장경쟁에 내몰린 협동조합들이 실패를 경험할 것이고, 협동조합이 공공서비스 민영화의 명분(사회적 협동조합은 국가와 지자체의 사무 중 일부를 위탁받을 수 있다)으로 악용될 수 있다. 이런 흐름은 협동조합운동의 강화가 아니라 왜곡이나 약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사실 사회적 경제라는 것은 무엇을 생산할 것인가 뿐만 아니라,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생산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도 관심을 가진다. 현재의 사회적 경제 정책은 이런 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을까?


셋째, 사회적 경제가 확장되고 비가시적인 경제 영역을 가시적인 경제활동으로 만드는 것은 반드시 좋은 일일까? 즉 화폐경제에 포함되지 않았던 살림살이의 영역을 임금노동의 영역으로 만드는 것이 반드시 올바른 일일까? 서울시의 사회적 경제 정책이 주력하는 7대 분야는 공동육아, 돌봄, 보건의료, 임대주택, 전통상인 및 소상공인, 베이비 부머, 비정규직 노동자이다. 그중 공동육아, 돌봄, 보건의료는 비가시적인 영역으로 볼 수도 있는데, 그것이 영리영역으로 가시화되는 것이 반드시 좋은 일일까?

 

청년이나 경력단절여성, 이주민들이 직업을 갖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런데 한국사회에서 노동을 경험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가부장적이고 비민주적인 기업문화가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한국사회에서 노동은 어떤 의미이고 노동을 통해 자존감을 얻는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이런 부분을 고민하지 않으면서 정책을 구상하는 것이 과연 사회성이나 호혜성을 강화시킬 수 있을까?

 

그리고 사회적 경제가 지속되려면 다른 경제활동이 지속될 수 있는 다른 시장이 필요할 텐데 그것이 공공조달과 내부거래의 확대, 기업의 협조로 가능할까? 신경희 연구원의 “서울형 마을기업을 통한 지역공동체 활성화”(서울시정개발연구원 보고서, 2012년)에 따르면, 2010~2012년 65개 마을기업의 담당자들은 마을기업의 가장 큰 애로사항으로 “마을기업 유지를 위한 수익창출”(26.2%)과 “마을기업 운영자금 부족”(13.8%)을 들었다. 사실 수익이라는 말이 등장하는 순간 다른 가치는 쉽게 무기력해진다. 사회적 기업에 민주주의가 부족한 이유는 그것이 협동조합이라는 이름으로 바꾸더라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박원순 시장은 이를 ‘유통’이라는 말로 정리하려는 듯하다.

 

그리고 경제나 빈곤에 관한 새로운 고민이 필요하다. 현대의 빈곤은 단순히 실업이나 저소득으로만 발생하지 않는다. 한국사회에서 사회적 배제의 차원은 매우 다양하고 우리의 상식과 달리 배제의 중요한 원인이 경제적인 변수보다 사회적 관계망과 교육에서 비롯된다. 물론 경제적인 빈곤이나 실업이 중요한 변수이기는 하지만 그것 자체가 사회적 배제의 현상을 모두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소외는 경제적인 상황만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실존적인 상황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사회적 경제정책은 이런 소외에 대해 어떤 해법을 가지고 있을까?

 

더글러스 러미스는 쓰지 신이치와의 대담(『에콜로지와 평화의 교차점』)에서 가난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다. “가난이 왜 고통스러운가 하면, 가난하기 때문에 싫은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고, 가난하기 때문에 관리나 억압에 저항하지 못하고 착취당하기 때문입니다. 상사가 아무리 보기 싫어도 이를 악물고 일해야 하고, 경멸당하고 무시당해야 하니까 그것이 고통스러운 거죠. 물질이 풍요롭지 않다는 것, 즉 가난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관계의 문젭니다. 관리되는 인간관계에서 자신의 위험이 상처받는 것이 고통스러운 게 아닐까요?” 우리는 가난을 빈곤의 문제로 생각하는데 러미스는 관계의 문제로 본다. 가난이 가졌던 관계는 현대 사회에서는 계속 파괴되고 있다. 특히 세계화의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이제는 가난이 아니라 ‘잉여’가 되는 사회이니까. 잉여사회에서는 가난한 사회가 가졌던 관계망이 유지될 수 없다.


넷째, 서울시의 사회적 경제정책은 경제의 사회성을 확장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나? 과거와 달리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것이 아니다. 도시농업이 의도치 않게 농민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듯이, 사회적 경제의 활성화가 도시의 소상공인에게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2년 기준 서울시 전체 취업자 약 503만명 중에서 자영업주가 97만명, 무급 가족종사자가 약 16만명에 달한다. 합하면 약 113만명으로 22.4%이다. 그리고 임금근로자 중에서 임시직이 113만 6천명, 일용직이 39만 6천명이다. 사회적 경제는 이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이들이 아니라 새로운 사람들을 지원해야 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앞선 신경희의 연구를 보면, 마을기업의 설립목적 중 가장 높은 비율이 “지역기반 주민 일자리 창출”(81.5%)이고 두 번째가 “주민교류와 지역공동체 활성화”(64.6%), “취약계층 주민 일자리 창출”((60.0%) 등이고 “전통상가, 지역경제 활성화”는 (18.5%)이다. 새로이 만들어지는 사회적 경제 영역들이 기존의 지역경제 영역과 잘 접목되지 않는 징조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아름다운재단>의 월간지 《콩반쪽》2005년 5월호에 따르면, 1970년부터 2005년 4월까지 언론에 보도된 김밥할머니의 기부금을 모으면 95건, 약 1,149억원이라고 한다. 사회적 경제가 없었을 때에도 그런 경제를 실현한 사람들이 있었고, 지금도 그럴 것이다. 사회적 경제는 그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으려 하는가?



3. 서울시 정책에 대한 총평


중간지원조직을 위한 중간지원조직이라는 탄성이 여기저기서 들을 수 있다. 컨설턴트나 상담원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지역의 입장을 대변하기는커녕 행정의 방침을 강요한다는 항의도 여기저기서 들을 수 있다. 내 귀에만 들리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는 사람들이 더 무섭다는 얘기도 들린다.

 

사회적 경제라는 것이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의 수를 늘리는 것은 아니다. 살림살이의 사회성이 실현되는 것이 사회적 경제이다. 그렇다면 살림살이를 바라보는 관점이 근본적으로 전환되고,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사고방식을 벗어나 때로는 대결을 통해 새로운 건설을 하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착한 경제’를 외칠 뿐 현실의 악과 싸우려는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혁신은 자기성찰을 동반할 때에만 지속가능하다. 서울시의 자기성찰이 무엇보다 요구되는 시기이다. 원전 1기 줄이기 캠페인으로 밀양 송전탑에 맞서 싸우는 할머니들의 고통과 신음을 감출 수는 없다. 한편에서는 마을공동체사업이 다른 한편에서는 이미 있던 마을이 처절하게 짓밟히는 이 모순을 둔 채 아름다움을 논할 수는 없다.

1. 고수와 선수, 우리는 무엇이 되려 할까?


고수와 선수는 다른 존재입니다. 보통 고수는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자신의 깊이를 알고 있기에 낄 곳과 끼지 말아야 할 곳을 잘 가리지요. 그냥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일합니다. 그래서 고수가 드러나는 계기는 아주 우연적입니다. 반면 선수는 잘 드러납니다. 드러나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처럼 선수는 스스로를 드러내고 드러낼 만큼의 자기 역량을 잘 포장합니다(그런 역량조차 없으면 사기꾼이겠지요). 고수와 선수들이 같은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고수와 선수 중 누구의 힘이 더 셀까요? 때로는 선수의 힘이 더 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고수는 자신의 힘만을 운용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고수는 주위의 힘을 모을 줄 알고 그러기 위해 때로는 자신의 힘을 누그러뜨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잘 드러나지 않죠. 한 사람의 힘만 보고 판단할 문제는 아니고 결과적으로 보면 고수의 힘이 더 센 거고, 고수는 세계와 사회를 조직합니다. 고수는 이해관계에 따른 사회가 아니라 공적인 장을, 협동의 관계망을 조직합니다.

 

현재의 협동조합운동판을 보면 선수들만 보이고 고수들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일단 저부터가 만나서 직접 가르침을 받고 싶다고 생각하는 분이 별로 없습니다(전혀 없지는 않아 다행일까요?). 고수이기 때문에 그런 분들이 더 잘 드러나지 않아서 그럴 거라 생각하기도 합니다.

 

<베스트 키즈>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성룡 주연의 영화로 리메이크 되었는데요, 저는 원작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원작에서는 사부가 제자를 그냥 엄하게 훈련시키는 게 아니라 정말 생활에 필요한 모든 부분에 써먹거든요. 밥하고 걸레질하고 빨래하고. 그런 일상의 동작 하나하나가 쿵푸의 초식이 됩니다. 이를 ‘도제(徒弟)’라고 부르기도 하는데요, 어려서부터 시작하면 좋다고 합니다. 어려서부터 하면 몸에 익숙해지기(體化) 쉽다는 거죠.

 

이런 과정을 거친 사람들은 ‘또 다른’ 고수가 됩니다. 물론 이런 과정을 거친 사람들이 모두 고수가 되는 건 아닙니다. 중간에 힘들어서 떨어져 나가기도 하지요. 고수가 되는 과정에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자각’과 ‘성찰’입니다. 깨달음만이 아니라 돌아보는 과정이 필요하지요. 처음에는 자기만 있다가 나중에는 ‘싸부’도 마음에 들어오고 다른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함께 있음을 깨닫는 사람이 고수가 됩니다.

 

반면에 선수는 훈련을 받은 사람입니다. 똑같은 훈련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이 훈련은 생활에서 단련된 훈련이 아닙니다. 교사라 불리는 사람에게 학습된 것입니다. 영화에도 보면 싸움의 기술을 배우는 겁니다. 생활과 잘 맞지 않고, 생활에 반하기도 하는 전문기술입니다. 나와 상대에 대한 고려 없이 근육과 힘을 강화시키는 기술입니다. 더구나 그 기술을 어떻게 써먹을지에 대해 교사는 관여하지 않습니다. ‘자각’이나 ‘성찰’의 과정이 없는 거지요. 당연히 누구누구 라인은 있겠지만 ‘싸부’도 없지요. 다른 사람은 대상일 뿐 자기 속의 관계가 될 수 없습니다.

 

저는 때때로 선수도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선수가 여기저기서 마구 등장하는 상황은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선수가 판을 주도하는 상황은 분명 어떤 큰 문제를 불러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특히 선수는 자신을 대단히 높이 평가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활동과 영역을 부정하기 때문에 지극히 위험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고수는 자신이 고수인지 알면서도 끊임없이 그것을 반성합니다. 자신이 고수임을 모르지 않지만 그것을 ‘과시’하려 하지 않습니다. 자기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걸 부정하지도 않고 그 사람과 자신의 영역을 굳이 나누려 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생활 속에서 ‘은밀히’ 활동하는 그런 고수들을 찾고 만나야 합니다. 영화 <아라한 장풍 대작전>에 나오는 것처럼 말이죠.


이 대목에서 우리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고수가 되려는 걸까요, 선수가 되려는 걸까요? 그리고 어떤 존재가 되고자 한다면, 정말 그렇게 될 수 있는 걸까요? 그런 가르침을 받을 자세, 고수를 찾아 접하려는 태도는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이런 고민 없이 협동조합을 시작합니다. 정부가 홍보하듯이 협동조합이 기업체보다 나쁜 틀은 아닙니다. 하지만 좋은 것이기에 무조건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하리라 보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준비 없이 시작된 협동조합은 한국 현실에서 좋지 않은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실패의 경험이 누적되면 또 냉소로 바뀔 겁니다.

 

물론 협동이라는 것이 내 몸에 충분히 녹아들어 있기에 사업만 펼치면 그 능력이 발휘되는 것이라면 문제는 다릅니다. 하지만 한국사회의 문화를 설명하는 단어는 협동이 아니라 무한경쟁, 승자독식입니다. 협동도 상대방을 이기기 위해서 하고, 이기기 위해 내부의 갈등을 억지로 무마하는 것이 협동문화의 현실입니다. 이런 현실의 악조건을 극복하려면 좋은 길잡이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직접 얼굴을 대면하지는 못하더라도 그 고수들에게 가르침을 얻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일상 속에 숨겨진 고수를 찾아내기 위해 안목을 기르고 그 사람들을 인정하며 내 일상을 강화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공부모임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세 명이 길을 가면 그 중에 반드시 스승이 있다고 했습니다. 모임을 만드는 순간 이미 스승이 우리 옆에 자리잡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최근에는 이런저런 책이나 자료로 들은 이야기를 가지고 고수를 자처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내가 거기에 갔다 왔다는 이유로, 내가 뭘 한다는 이유로 자신이 전문가라 자처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이야기를 해볼까요? 내가 원주에 다녀왔다고 해서 내가 장일순 선생님이나 지학순 주교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원주의 다양한 협동조합들을 보고 왔다고 해서 그것에 대해 알 수는 없습니다. 그 역사와 사업, 조합원수를 따질 수는 있겠으나 그 속엔 ‘체화’의 과정이 없고, 자연히 ‘자각’과 ‘성찰’의 과정도 없습니다. 정말 깊이 활동을 하고 있다면 자기 속의 고민을 충분히 드러내고 사람들에게 지식이 아니라 일상 속의 깨달음을 전해야 할 텐데 그렇지도 않습니다. 도제를 악용해 청년들을 부려먹는 사람이나 제도들도 생깁니다. 고수인체 하지만 선수일 뿐입니다.

 

저는 그런 활동들이 의미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우리를 살릴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속엔 내가 없기 때문입니다. 나의 질문이 분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주변 사람들과 그 질문을 공유할 수 있습니다. 모호한 상태로 지식만 교류하는 것이 우리를 강하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2. 나 없는 협동이 가능한가?


한국의 협동조합 활동가들이 지금은 유럽이나 아메리카 대륙에 많이 가지만 예전에는 일본엘 많이 갔습니다. 일본 생활클럽 생협은 ‘타자 속의 나’, ‘I among others’라는 개념을 쓰더군요. 저는 이 말을 처음 봤을 때 약간 충격을 받았습니다. 여기는 이미 타자라는 말을 익숙하게 쓰고 있구나. 섬나라의 특성일 수 있겠지요. 제주도에 가면 육지 것이라는 말을 쓰듯이요. 섬에는 외부에서 새로운 사람들이 끊임없이 들어왔다 나갑니다.

 

그런데 단지 새로운 사람을 타자라 부르지는 않습니다.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존재는 타자도 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그 존재를 인식하는 순간 우리와 그 존재 사이에 관계가 생기는 거지요. 옛날에 유럽인들은 식민지 사람들을 타자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같은 인간으로 여기지 않았죠. 그러니 그 사이에는 타자라는 관계가 들어설 자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타자로 부르려면 그 사람을 타자로 만드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하는 거지요. 그리고 그 타자에는 사실 나의 무엇도 포함됩니다. 꽃이라고 부르는 순간 우리는 서로 다른 존재가 되는 거지요. 그렇게 만나 다른 존재가 되고, 나와 그 사이에 무언가가 있음을 인식하고 인정하지 못한다면 관계는 성립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생활클럽 생협의 I among others는 좀 감동적이었습니다. 많은 타자들 사이에 내가 있다는 걸 인정하는 거죠. 나는 무수한 타자들 속에 있다. 그리고 그 타자 역시 나를 타자로 여기는 나이다. 그걸 인정하자는 거죠. 그걸 인정할 때 협동의 힘이 생긴다고 보는 겁니다.

 

한국의 집단주의에는 일본이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멸사봉공(滅私奉公)처럼 원래 유교에는 없는 개념들이 일본과 한국에는 강하게 뿌리내려 있습니다. 그렇지만 식민지가 아닌 모국이었던 일본은 한국보다 개인주의가 강합니다. 어떤 점에서는 극단적이기도 한데요, 어떤 때는 사무라이처럼 공을 위해 자신의 배를 가르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아주 개인주의적인 거지요. 일본 만화책들을 보면 이런 경향을 느낄 수도 있는데요.

 

그렇다면 한국은 어떨까요? 우리는 무수한 타자 속의 나를 바라보고 있을까요? 그 관계망 속의 자신을 인식하고 있을까요? 관계의 주고받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있을까요? 혹시 우리는 협동이라는 말로 다른 관계를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혹시 협동이라는 이름으로 희생을 강요하거나 강요당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나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 협동인 것처럼, 고만고만한 형식적인 관계를 협동이라 여기는 건 아닐까요?

 

한국사회에서 많이 오해되는 말 중에 하나가 상호부조입니다. 상부상조, 상호부조의 삶이란 게 어떤 일방적인 이타성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혼자 감당하기 힘든 내 속에 있는 에너지를 분출하며 우리가 되는 과정이고, 우리 속에서 내 에너지를 충전하는 과정입니다.

 

협동조합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무수한 타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 타자 속에는 내가 있습니다. 내 속에도 타자가 있지요. 때로는 인정하기 싫은 자신의 모습을 봐야 하고, 때로는 정말 싫은 타자를 만나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억지로 참고 목적의식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이 협동일까?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를 분명히 드러낼수록 협동은 더욱더 깊어질 수 있습니다 다만 그런 드러냄의 방식이 문제인 거죠.

 

요즘 보면 울림, 공명(共鳴), 이런 말을 많이 씁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건 이 말의 의미를 잘못 해석하는 겁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사실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게 가장 자연스러운 삶입니다. 울림, 공명이라는 말이 등장하는 건 어떤 영향의 문제가 아니라 공감(共感)의 문제입니다. 예전 드라마 대사처럼 “아프냐? 나도 아프다”가 공감의 시작인 거죠(물론 말로만 그러는, 타자를 지배하기 위해 그런 말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경계해야죠). 타자의 감정을 내 속에서 형성하게 될 때 우리는 제대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협동조합을 통해 어떤 영향을 주고 받으려 하는 걸까요? 1980년대 초반 일본의 제4회 전국 유기농업대회에서 발표된 '생산자와 소비자의 제휴방법'이라는 글의 발췌번역문입니다. 한번 읽어볼까요?


1. 생산자와 소비자의 제휴의 본질은 물건을 팔고 사는 관계가 아니고 사람과의 우호적인 만남과 사귐의 관계이다. 즉 양자는 대등한 입장에서 서로 상대를 이해하고 서로 돕는 관계이다. 그것은 생산자, 소비자로서의 생활을 새롭게 보는 데에 기초해야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생산자와 소비자의 제휴는 소비자 측에서 사용되는 산지와 직거래라든가 생산자 측에서 사용되는 소비자에게 직접판매라고 하는 것은 “될 수 있는 대로 싸게 사고 싶다.” 또는 “될 수 있는 대로 비싸게 팔고 싶다.”는 생각에서 중간단계를 배제하고자 하는 것이고 목적을 위한 방편에 불과하다. 우리들이 제창하는 것은 신뢰를 토대로 하여 상호부조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제휴(서로 손을 잡음)이다.

생산물이 생산자로부터 소비자에게 제공되는데 대해서 소비자는 서로 어떠한 형식으로라도 대가와 사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통상 금전을 가지고 하는 외에는 방법이 없다. 따라서 물건과 금전이 교환되는 형식으로 본다면 팔고 사는 것이며 법률적으로는 거래에 불과하다. 그러나 본래의 성격은 상호증여적인 성질의 행위이다. 즉 물건을 교환가치로서 평가하지 않고 사용가치로서 평가한다. 금전을 주고받는 형식으로서는 물건의 대금이지만 실질은 대상(代償)과 사례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액면도 시장에서 형성되고 항상 변동할 필요가 없고 당사자끼리 자유롭게 결정할 수가 있고 고정시킬 수도 있다.

이와 같은 상호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쌍방이 상대의 입장을 십분 이해하고 어디까지나 대등의 자세를 흐트려서는 안 된다. 또한 전제로서 필요한 것은 오늘날 사회에서 삶으로 해서 우리들이 일상생활에 있어서 부지불식간에 형성되어온 습성에 대한 반성이다. 우리는 언제나 모든 것에 있어서 경쟁심리에 쫒기고 있으며 남의 일에 대해서는 모른 체 하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사는 목적과 수단이 뒤바뀌거나 목적을 잃어버리고 있는 상태에 있다. 즉 금전보다 생명이 중하다든가, 행복은 꼭 금전으로 살 수가 없다는 아주 분명한 사실을 잊기 쉬우며, 편리한 것보다 안전한 것이 중요하다든가, 물건에는 상품보다도 상품이 아닌 것에 치중한 물건이 많다는 것을 너무나 모르고 있는 것이다.

 

2. 생산자는 소비자와 상담하여 그 토지에서 가능한 한 소비자가 희망하는 것만큼 생산하는 계획을 수립한다. 생산자는 수확한 것을 확실하게 모두 소비자가 인수하게 하고, 소비자는 원하는 것을 될 수 있는 대로 생산자가 생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생산계획을 양자가 협의해서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

매년 소비자는 원하는 작물의 품목과 수량을 생산자에게 제시하고 이것에 따라 생산자는 그 토지에서 생산 가능한 작물을 받아들여서 각각의 희망수량을 생산목표로 하는 농사를 계획한다. 이렇게 작성한 영농계획을 생산자는 충실하게 이행하고 수확을 볼 때까지 사이에 비배관리네 만전을 기한다. 그리고 그간에 소비자가 작황의 관찰이나 농사 일손을 돕기 위해 생산자를 찾는 것은 농민들에 의해 크게 환영을 받는다. 그러나 수확량은 여간해서 목표대로 실현되지 않고 언제나 다소의 상이는 면할 수가 없다. 때로는 대풍작이거나 대흉작이 있다는 것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생산자가 계획대로 작물을 실수 없이 재배관리 하는 한은 소비자로서는 어떠한 불평불만을 가질 수가 없다.

 

3. 소비자는 그의 희망에 따라서 생산된 것은 그 전량을 인수하고 식생활을 될 수 있는 대로 전면적으로 이것에 의존한다. 일찌기 공동으로 세운 생산계획에 의해 수확된 농산물이 그 때에 그 양만큼 제공되기 때문에 소비자로서는 새삼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지만 항상 신선하고 가장 맛이 있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에 만족한다. 제공되는 가지 수와 양은 날짜에 따라, 계절에 따라 일정하지 않다. 그날그날에 원하는 가지 수와 양에는 과부족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 조리나 보존에 연구를 거듭함으로써 잘 조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4. 가격결정을 하는데 있어서는 생산자는 생산물의 전량이 인수될 것, 선별이나 묶음, 포장의 노력과 경비절약이 되는 것 등을, 소비자는 신선하고 안전하며 맛이 있는 물품이 되게끔 하는 등의 것을 충분히 생각해야 한다. 가격이라고는 하지만 물품대금이라고 하기보다는 행위에 대한 사례라고 할 수 있는 성질이므로 그것을 결정하는 데는 가격이론을 생각할 필요가 없고 양자가 납득이 되는 것이면 어떠한 방법이라도 상관없다. 상품의 질을 소비자가 생각할 때에는 마치 손으로 그린 그림과 복사한 그림과 같은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5. 생산자와 소비자가 제휴를 지속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상호의 이해를 깊이하며 우정을 두텁게 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쌍방의 구성원들이 서로 접촉하는 기회를 많이 해야 한다. 생산자와 소비자의 접촉이 원만히 지속되기 위해서는 서로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과 신뢰하는 것이 절대 필요하며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말하는 기회를 갖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특히 대도시의 주부들이 농촌을 방문하고 농가의 생활과 농사일에 대해서 작은 부분이라도 접하는 것은 생산자의 환경과 입장을 이해하는데 매우 좋은 것 같으며 그것은 생산자에게 있어서는 적지 않은 격려가 되는 것 같다.

 

6. 운반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제3자에게 의뢰하지 않고 생산자집단 또는 소비자집단의 손에 의해서 소비자 집단의 거점까지 운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7. 생산자, 소비자 집단 내에 있어서 소수의 지도자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을 삼가해야 할 것이며, 될 수 있는 대로 전원이 책임을 분담해서 민주적으로 운영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구성원 개개인의 가정사정을 잘 파악하고 상호부조적인 배려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8. 생산자 및 소비자의 각 집단은 소집단 내의 학습활동을 중시하고 단지 안전 식량을 제공, 획득하는 것만으로 그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중요하다. 건강의 문제, 식생활전반에 관해서 눈을 떠야 할 문제가 많고, 자체의 운동이나 농약 등 환경오염 문제 등 학습하고 눈을 떠야 할 것이 많다. 오늘날 우리들은 자주적인 학습에 의해서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될 무수한 위험 가운데에 매몰되고 있다. 모두가 참가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학습회를, 정기적으로 갖는 것이 바람직하다.


어떤가요? 타자 속의 나가 어떤 말인지 좀 느껴지시나요?

 

저는 서로를 살리는 경험을 하는 것이, 서로가 서로의 디딤돌이 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경험을 하고 디딤돌이 되려면 일단 만나야 하겠지요. 그런데 문제는, 모든 만남이란 낯선 것이라는 점입니다. 낯설기에 익숙하지 않고 두렵지요. 그래서 우리는 보통 익숙한 것들만 접하는 것을 만남이라 부릅니다. 물론 익숙한 것들과의 관계도 필요하지만 진정한 만남은 낯선 것을 접하고 그것을 그대로 두는 것에서, 억지로 나 속으로 끌어들이려 하지 않는 것에서, 그러면서도 손을 잡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관계가 영글면 굳이 우리라고 칭하지 않아도 서로에게 공감하고 손을 잡게 될 겁니다.

 

그런 관계가 성공을 통해서만 형성되는 건 아닙니다. 협동조합의 성공을 어떻게 측정할 수 있을까요? 실패를 통해 더 단단해지는 관계가 있는 반면, 성공하면서 무너지는 관계도 있습니다. 협동조합은 무엇을 지향하려는 걸까요? 우리는 왜 성공하려는 걸까요? 이런 물음을 던지며 강의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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