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을 처음 접한 건 창간 이후 몇 달 지나지 않아서였다. 당시 프리조프 카프라의 신과학운동이나 한살림선언을 먼저 접했기에 <녹색평론>의 문제의식은 낯설지 않았다. 1989년 현실 사회주의권의 붕괴, 1991년의 소위 분신정국을 거치며 나는 뭔가 다른, 조금 더 근본적인 대안을 찾고 싶었다. 그러면서 <녹색평론>을 찾아 읽게 되었고, 1993년도엔 실리지 않았지만 당시 학생운동 내의 반(反)생명 분위기를 성토(?)하는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대학원을 가고, 군대를 다녀오면서 <녹색평론>을 볼 기회는 줄어들었지만 생태계의 위기와 진보역사관의 한계를 인식해야 한다는 고민은 이어졌다.

그 뒤로도 가끔 <녹색평론>을 뒤적이긴 했지만 독자로서만이 아니라 필자로 참여하게 된 건 2007년 이후였다. 당시 오창은, 이명원씨와 함께 <지행네트워크>라는 단체를 만들 때 김종철 선생을 처음 만났다. 교보문고 근처에서 밥을 먹으며 막걸리를 마셨고, 선생은 다른 지원 없이 각자의 돈을 모아 단체를 만드는 걸 무척 반기셨다. 하고 싶은 거 맘껏 해봐라, 내가 가끔 밥은 사줄게. 그렇게 본격적인 인연이 시작되었다. 그것이 김밥모임(김종철 선생과 밥을 먹는 모임)의 시작이었고, 각자가 초대한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밥도 먹고 막걸리를 마셨다.

 

밥을 먹는다()는 것의 의미

 

한국에서 식구(食口)의 의미는 이중적이다. 끼리끼리 모여 이해관계를 나누며 먹는 밥이 짬짜미라면, 사람들과 어울려 토론하고 대안을 모색하며 나누는 밥은 대동미이다. 자신감은 홀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서로 북돋우는 것이고, 밥을 나누는 건 그 자신감에 든든함을 더한다. 혼밥이 일상화된 사회에서 밥모임은 어지러운 세상을 함께 견디게 한다.

매일의 일상이지만 먹는다는 행위만큼 이 세계의 질서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일은 없다. 김종철 선생은 녹색평론에 실린 마지막 글에서도 먹음에 관해 이야기했다. 평소에도 선생은 해월 최시형 선생에 관해 자주 이야기를 했고, 이번 글에서도 이천식천(以天食天)’을 언급했다. “이 세상의 뭇 생명체들이 모두 자신을 희생하여 다른 생물들의 먹이가 되고 자기도 다른 생물들이 공여하는 먹이를 먹고 생을 누림으로써, 그런 순환적 증여의 질서 속에서 삼라만상이 존재하고 있는 근본이치를 말씀하셨다. 여기에도 밥은 결코 누구 혼자의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생명들의 공희(供犧)의 산물이라는 것, 그러기에 밥을 먹는 행위야말로 가장 뜻깊은 공생공락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어 있다.”(김종철, <코로나 시즌, 12개의 단상>, 녹색평론20207~9월호, 178.) 순환적 증여의 질서, 이것이야말로 밥의 질서이다.

좀비처럼 자기 식욕만 남은 존재가 아니라면, 뭇 생명들은 다른 생명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고 또 그러면서 자신을 돌보기 위해 밥을 먹는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의 위기는 이런 순환적 증여의 고리가 끊어지고 일방적인 먹이사슬이 만들어진 것과 무관하지 않다.

<녹색평론>에 실린 글들이 강조하던 소농을 농업에 대한 강조로 받아들여진다면, 그건 의미를 단편적으로 만드는 해석이다. 농업은 단순히 먹거리를 생산하는 산업이 아니라 순환질서를 유지시키는 토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소농 중심의 사회는 순환이 기본질서인 사회이자 그 질서를 무너뜨리려는 힘에 맞설 수 있는 사회이다. 따로 떨어진 개별 농가의 질서가 아니라 자급력을 갖춘 소농들이 사회의 기반을 이루고 자치를 행사하는 사회이다. 김종철 선생은 이런 자치와 자급의 힘이 만들어져야 순환적 증여의 질서도 회복, 유지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순환의 질서가 농업에만 적용되는 것도 아니다. 내가 가진 건 순간이고 자연으로 돌아가고 순환될 거라 생각하면 부의 독점이나 상속도 덧없는 일이 된다. 반면에 순환이 아니라 축적과 독점이 상식을 차지하면 부패는 자연스럽고, 약자의 처지는 갈수록 나빠진다. 선생에게 기본소득은 순환의 질서를 다시 세우기 위한 방편이었다.

성장 중심의 산업사회에서 소농에 관한 이야기는 비현실적으로 들렸지만 지금 우리는 더 이상 경제성장이 불가능한 시대를 살고 있다. 그레타 툰베리가 경고하는 기후위기는 가장 구체적으로는 식량위기로, 그로 인한 갈등(전쟁)으로 경험될 것이다. 지금이야 버튼만 누르고 클릭만 하면 먹거리를 배송시키거나 음식을 사먹을 수 있지만 가뭄, 홍수 등 자연재해가 늘어나고 작물 재배지가 줄어들면 식량난이 심각해질 것이다. 그리고 이미 소득 상위층과 하위층의 장바구니는 유기농과 패스트푸드로 양분되고 있고, 이런 먹거리불평등은 건강불평등으로 이어진다. 성장이 아니라 생존이 화두인 사회에서 소농은 순환의 고리를 다시 이으려는 노력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의 만남을 막고 밥을 나눠 먹는 걸 금지하는 코비드19는 각자 알아서 살아남으라는 신자유주의를 대변하는 바이러스이다. 그런데 우리가 흩어지면 흩어질수록 약육강식, 각자도생의 질서는 강화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시대에 밥을 같이 먹는 모임이야말로 가장 급진적인 모임이다. 그 급진적인 시간을 함께 보냈기에 든든했고, 이제 그 기반을 나누는 것이 산자의 과제라고 생각한다.

 

()를 생각하며

 

김종철 선생이 끝까지 놓치지 않았던 화두는 근대의 본질이라 생각한다. 앞서 언급한 마지막 글에서도 선생은 슬픈 미나마타를 쓴 일본 작가 이시무레 미치코를 언급하며 근대를 돌아본다. 그리고 단상의 마무리는 장일순 선생에 대한 이야기로 끝난다. 잘남을 겨누며 이름을 날리려는 것이 근대의 허명이라면, 장일순 선생은 바닥을 기어라고 했고 세상 사람들 앞에 감히 나서지 않는다(不散爲天下先)”라는 노자의 구절을 즐겨 인용했다. 김종철 선생은 이를 비폭력주의 행동의 원칙으로 해석하며 이 세상의 모든 목숨붙이들이 평화롭게 공존하고 저마다의 타고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하려면, 무엇보다 우리 각자가 자기중심적 배타적 권력욕망에서 벗어나서 스스로 가난해지기를 자발적으로 선택해야 한다는 얘기라고 풀이했다(김종철. <나락 한알 속의 우주>, 무위당을 기리는 모임 엮음,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녹색평론사, 2004), 71.). 성장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과잉이 아니라 검소이다.

개화기의 최시형 선생이 동학을 통해 비근대의 길을 열려 했다면, 장일순 선생은 소위 원주캠프를 통해 비중심, 비국가의 사유를 설파했다. 김종철 선생은 이 사상계보를 이은 사람이고 근대의 문제를 치유하기 위한 비근대적 삶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마지막 책인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녹색평론사, 2019)는 그런 주장을 빼곡히 담고 있다.

그런데 그런 전환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까? 19891028일 한살림모임 창립기념식에서 장일순 선생은 ()에 관하여란 강연을 했다. “시는 무위이화(無爲而化)라는 최시형 선생의 말을 인용하여 살아 있는 것에 대한 존경의 문화로 돌아가야, 생명을 모시는 경제로 돌아가야 본원적인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말했다(한살림이 그런 모심의 생활태도와 관계를 키워가는 틀이 되기를 원했다)(장일순 지음, 나락 한 알 속의 우주(녹색평론사, 1997), 70.).

이 시의 세계관은 자기 밖의 객체를 이용의 대상으로 보는 근대적 세계관을 거부한다. 그리고 동일한 이원론에 기초한 객체를 변화시켜야 나를 바꿀 수 있다는 생각 역시 거부한다. <녹색평론>에 실렸던 다양한 글들은 이런 세계관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었고, 김종철 선생은 복지국가가 아니라 복지사회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가의 힘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그런 방식만으론 시의 태도와 관계를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시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외려 성장을 반대하고 개발을 막으려면 그것을 따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힘을 하지 않는 것에 써야 한다. 권력을 잡아 한방에 세상을 바꾸려는 게 아니라면 일상에서 전환의 기반을 닦는 일에 더 많은 힘을 써야 한다. 어떻게 보면 시는 존중과 기다림을 통해 더 많은 힘을 끌어내는 방법, 특별한 능력이 아니라 이미 가진 힘을 끌어내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요즘은 환대라는 말이 주로 쓰이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말은 모심이라 생각한다. 시천주(侍天主)라는 말처럼 모심은 하늘과 땅, 돌이나 풀, 벌레까지 모두가 한울님을 모시지 않은 것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게 모시려면 먼저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그건 인간의 근본 한계를 자각하고, 자신의 욕망을 조절할 줄 아는 정신적 능력”(126)을 기르는 것이기도 하고 나아가 남들과 더불어서 소박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겠다는소국사상(小國思想)이기도 하다(김종철,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녹색평론사, 2019년), 126, 143쪽.). 김종철 선생은 물질적 빈곤보다 사상적 빈곤을 채우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더 필요한 과제라고 주장했다.

지금 우리는 이 과제를 잘 풀고 있을까? ‘녹색’, ‘그린’, ‘인권마저도 더욱더 성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야기하는 사회라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그런 점에서 김종철 선생이 채우던 자리의 공백도 더 크게 느껴진다. 그렇지만 가던 길을 계속 가는 것 외엔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다. “죽은 것처럼 보이는 나무일망정 우리가 인내심을 가지고 일념으로 물을 길어 붓기를 계속한다면 언젠가는 그 마른 나뭇가지에 푸른 싹이 돋아나는 기적을 보는 행운이 우리에게도 찾아올지 누가 알겠는가.”(앞의 책, 9.) 밥을 먹던 식객이자 다른 세상을 함께 꿈꿨던 동지로서 선생의 명복을 빈다.

2009년 2월에 금속노조에서 나온 정책연구보고서 「산별노조시대: 금속노조의 지역사회 개입전략」이 만들어질 때, 연구진과 2008년도에 지역운동을 설명하러 공식적으로 한번 만났고, 보고서가 나온 뒤 금속노조 간부들이 모인 발표회를 할 때 비공식적으로 한번 참여했다. 그날 발표회 자리는 내게 오랜 시간 동안 당혹스러운 자리로 기억되었다. 그 자리에 참석한 간부들 대부분이 보고서 내용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개입할 현장, 현안이 많은데 생뚱맞게 웬 지역사회? 지금 한가해요?, 이런 분위기였다. 2015년이면 7년째인데, 이 보고서가 나온 뒤 금속노조는 어떤 구체적인 개입전략을 만들었을까? 그리고 그때보다 더 발전된 전략을 고민하고 있을까? 실사구시(實事求是)라고 사실을 분명하게 밝혀야 그 다음 과정이 보일 거라고 생각한다.



1. 풀뿌리운동이란?


보통 풀뿌리운동은 특정 지역을 근거로 삼는 운동으로 이해되지만 그건 절반의 진실이다. 풀뿌리운동은 수동적인 주민을 능동적인 주체로 성장시키려는 목적을 가진다. 그래서 특정 지역을 근거지로 삼더라도 주민이 직접 의제를 만들고 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을 주도하지 못한다면 풀뿌리운동이라 보기 어렵다. 풀뿌리운동은 운동과정에서 발전된 주민들의 리더십이 지역을 재구성하는 정치적인 힘이 되고, 주민들의 민중권력이 지방권력과 대등해지는 삶을 지향한다. 군사독재 시기와 비교하면 운동의 뿌리가 제법 넓어졌고 언론의 주목을 받는 지역들도 생겼지만 얼마나 깊이 뿌리를 내렸는지는 따져봐야 한다.

왜냐하면 지역도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끊임없이 변하고 풀뿌리운동의 주체들도 인간이기에 다양한 경로를 걷기 때문이다. 뉴타운, 산업단지와 같은 개발사업들이 지역에 큰 영향을 미치고, 각종 사건이나 죽음이 주체들의 힘을 뺐다 늘렸다 한다. 그래서 풀뿌리운동은 어떤 하나의 모델을 따라가기 어렵다. 사람이 중심인 운동인지라 사람들의 다양한 관점과 삶이 반영되어야 하고, 지역이 중심인 운동이라 중앙집중성보다 다양성을 반영해야 한다.

그렇기에 풀뿌리운동은 주체의 성장과 다양성이라는 강점을 제대로 살리고 있는지를 계속 점검하고 있다. 주민구성이 특정 아파트나 마을을 넘어 다양해지고 넓어지고 있다면, 생활과 노동의 장이 조금씩 통합되고 있다면, 그러면서 지역과 사람의 독특성을 드러내며 단단한 관계망을 만들고 있다면 그 힘은 강하다. 사실 풀뿌리운동의 정치적인 힘은 관계망을 통해 구성된 신뢰이고 생활로 단련된 지혜이다. 신뢰는 일방적인 믿음보다 자신의 힘에 대한 자각과 서로에 대한 약속을 뜻하고, 지혜는 표준화된 지식보다 가슴과 몸으로 느끼는 경험과 함께 나누는 삶을 뜻한다.

서로를 믿고 돌보고 물건을 나누고 같이 밥 먹고 수다를 떨며 공부하는 과정은 생활정치의 동력이고 자치(自治)를 가능케 하는 토대이다. 주민 스스로가 이 과정을 기획할 수 있기에 운동은 즐겁기도 하다. 함께 즐겁게 할 수 있다는 점이 풀뿌리운동의 강점이다. 이런 삶이 단단해지면 기성 권력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삶이, 그리고 지역이 지속될 수 있다.

그렇지만 풀뿌리운동이 현실의 역동성을 반영하려면 지속적인 ‘공부’와 ‘수련’이 필요하다. 공부를 해야 그동안 보이지 않던 사람과 공간이 눈에 들어오고 수련을 해야 사람과 지역에 대한 감각과 의식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 더구나 한국처럼 제왕의 권력을 가진 대통령과 단체장이 있는 중앙집권형 사회에서 풀뿌리의 힘이 강해지려면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더구나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갈수록 다양해지는데, 기득권은 개발, 발전이라는 말 하나로 자기 전략을 설득할 수 있지만, 풀뿌리운동은 통일되지 않은, 통일될 수 없는 언어로 주민들을 만나야 한다. 운동에서는 그나마 만남이 가능할 수 있지만 선거에서는 그것이 어렵다(선거과정조차 불리하다). 따라서 개발에 대한 비판도 중요하지만 지역의 언어로 만들어진 비전이 사회 전체의 변화와 연계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해관계와 변화의 비전을 연계시켜야 한다. 정치에 관한 정보를 나누는 통로도 다양해져야 한다. 생활정치의 힘이 강해져도 그 힘이 체제를 압박하지 못한다면, 두 사회가 분리된다면 삶은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특히 행정 주도의 마을만들기나 사회적 경제가 늘어나면서 사람들은 자원배분에 더 많은 이해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누가 자원을 더 많이 끌어올 수 있는가를 따지는 이해관계와 영악해진 주민은 풀뿌리를 쉽게 흔들 수 있다. 그리고 정부와 연관된 일자리들이 늘어날수록 그것은 주변의 질시를 받고 주민을 분열시킨다. 풀뿌리가 지역을 강화시켜야 하는데 외려 체제를 강화시킨다. 내적인 힘을 다지면서 외부와 적극적으로 연계될 때에 풀뿌리민주주의는 더 넓게, 더 깊이 뿌리를 내릴 것 같다.



2. 풀뿌리운동의 현재


우리의 민주화운동 역사에서도 풀뿌리민주주의의 싹을 찾을 수 있다. 1960년대 이후의 주민운동, 빈민운동 등이 지역운동의 뿌리가 되었고, 1995년도에 지방자치제도가 전면적으로 실시된 후에는 풀뿌리민주주의가 제도정치와도 접목되고 있다.

물론 풀뿌리민주주의가 자연스럽게 실현되지는 않는다. 그것을 위해 노력하는 다양한 단체들이 있다. 예를 들자면, 한국에서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되는 단체들이 있다. <시민의신문>과 <한국청년연합회(KYC)>가 엮은 『도시 속 희망공동체 11곳 - 풀뿌리가 희망이다』(시금치, 2005년)는 <광명YMCA>를 비롯한 11곳을 대표적인 풀뿌리운동의 사례로 소개한다. 그리고 김기현의 『우리 시대의 커뮤빌더』(이매진, 2007)는 <부천YMCA>의 녹색가게, <광명YMCA>의 등대생협, 부산의 <희망세상>, 안성의 <안성의료생협>, 네 곳을 풀뿌리운동의 사례로 소개한다. 그리고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의 『달팽이가 달리기를 시작한 까닭은?』(이음, 2008년)은 <광명YMCA>의 등대생협, 서울 강북구의 <녹색삶을 위한 여성들의 모임>, <대전여민회>의 중촌마을어린이도서관 짜장, 천안의 <복지세상을 열어가는 시민모임>, 충청북도 옥천군의 <안남 어머니학교>, <안성의료생활협동조합>, 강원의 원주의 <협동조합운동협의회>, 강원도 철암의 <철암어린이도서관>, 부산의 <희망세상> 등 9곳을 풀뿌리운동의 대표적인 사례로 소개한다.

운동의제의 측면에서 보면, 도서관운동, 보육운동, 학교급식운동 등 다양한 생활상의 이슈들이 풀뿌리민주주의의 의제로 등장하고 있다. 도서관이나 보육, 학교급식과 관련된 운동은 그 사안을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안을 해결하는 과정에 주민/시민이 참여하며 의식을 확장하고 정치주체로 성장하도록 디딤돌을 마련한다는 점에서 풀뿌리민주주의와 맞닿아 있다. 도서관이나 놀이터, 공부방, 방과후학교 등이 일정한 물리적인 공간을 중심으로 민주주의의 관계망을 구성한다면, 보육이나 학교급식 등은 지역사회 내의 다양한 사람들을 조직화하면서 민주주의를 실험하는 장이 되고 있다.

그리고 행정이 주도하는 주민자치센터나 주민자치위원회를 민주적인 공간으로 바꾸려는 노력들도 점점 많이 등장하고 있다. 최근에는 도시계획이나 재개발, 주거권에 개입하려는 운동도 조금씩 활성화되고 ‘미래의 시민’인 청소년들을 지역사회의 주체로 구성하는 운동도 활발해지고 있다. 또한 천안의 <풀뿌리희망재단>처럼 지역재단을 설립하는 운동도 추진되고 있다.

이런 다양한 흐름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은 이런 운동이 주민들의 성장에 필요한 여유를 마련하고 과정을 제공했다는 점이다.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기 때문에 주민들이 곧바로 능동적인 정치주체로 변신하기는 어렵다. 그런 점에서 풀뿌리운동은 주체들이 성장할 ‘과정’과 ‘여유’를 마련한다. 이런 과정과 여유는 소외된 주민이 자신의 ‘시민됨’을 자각하고 능동적인 정치적 의지를 회복하도록 돕는다. 그리고 이런 과정은 직접 참여하고 실천하며 몸과 마음으로 느끼고 배우게 한다. 성공적인 사례로 거론되는 지역들은 바로 이런 과정을 만드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삶의 터전을 실제로 변화시키는 것은 활동가가 아니라 주민이고 활동가는 주민이 세계를 이해하고 변화시킬 수 있도록 지원하는 역할을 맡을 뿐이다.

허나 아직은 그 뿌리가 튼튼하지 않기에 한국의 풀뿌리민주주의를 낙관적으로만 바라볼 수는 없다. 중앙정부로 집중된 권력, 중앙에서 지역으로 끈끈하게 연결된 부패의 고리, 학연/지연/혈연으로 대변되는 연고주의, 심각한 사회적 양극화와 청년실업 등은 민주주의의 기반을 갉아먹고 있다. 비민주적인 학교와 공장, 사무실, 군대 등이 민주주의를 가로막고 있다. 역설적이지만 풀뿌리민주주의가 지역을 넘어 한국사회로 확장되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가정과 공장의 벽을 넘어, 정치와 경제의 벽을 넘어 우리 삶을 총체적으로 바꿔야 민주적으로 살 수 있다.

그리고 재활용가게, 나눔장터, 동네카페, 도서관,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 등 풀뿌리운동의 영역은 계속 넓어지고 있고 단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수도 늘어나고 있지만, 규모와 활동가의 수가 운동의 목적을 증명하지는 못한다. 외려 규모와 수가 늘어날수록 단체 내부에서조차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자기 담당사업 외에는 관심이 없다는 자기반성의 목소리가 솔솔 흘러나온다. 외부로 알려진 만큼 내실이 없다는 비판, 사업담당자만 있지 활동가는 없다는 성찰도 있다. 지역/시민단체 내부의 열악한 노동 문제도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소위 사회적 경제라 불리는 영역은 노동의 영역이기도 하기 때문에 풀뿌리운동은 노동에 대한 고민을 깊게 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3. 지역과 노동운동의 만남은 가능한가?


노동환경건강연구소 김신범 실장은 “노동권을 지키는 마을 어때요?”라는 발제문(<인천 제 2기 주민자치인문대학 2014년 10월 17일)에서 청소노동자의 씻을 권리운동을 평가하며 “우리는 이번 캠페인을 진행하면서, 대다수의 시민들이 가진 허위의식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언론에 있었다. TV에서는 환경미화원 채용시험에 수백대 일의 경쟁률을 보였으며, 대학졸업자도 다수 지원했다고 떠들면서 환경미화원의 일자리가 고임금에 좋은 것으로 보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로 인해 대다수의 시민들은 청소업무의 민간위탁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던 수준이 아니라, 오히려 환경미화원은 고임금에 좋은 대우를 받는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환경미화원의 해고저지투쟁이나 민간위탁 반대투쟁의 절박함과 정당성이 얼마나 지역주민들에게 전달되었을지는 너무도 명백한 것이었다.…아직, 시민과 노동자들이 만나서 청소업무 민간위탁으로 인한 예산절감효과를 분석하는 수준까지는 나아가지 못하였다. 그러나 공공부문 사유화의 폐해가 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무조건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지역사회와 호흡하면서, 우리는 본격적으로 질문을 지역사회 시민들과 함께 던져보고 싶었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케이블방송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운동 C&M투쟁을 평가하며 “희망연대노동조합은 단체교섭을 통해 사회공헌기금을 확보하였고 지역의 시민사회단체가 하는 사업의 지원비로 내놓는다. 시민사회단체에서는 기획안을 마련하여 노동조합에 제출하고 심의를 통해 사업지원을 받게 된다. 송파시민연대는 희망연대노동조합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PVC 플라스틱으로부터 어린이를 지키는 캠페인을 지역에서 추진하기도 하였다. 이러던 이들이 노동조합 존폐위기에 놓이자 시민사회는 적극 이들과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송파 강동 지역에서는 석촌호수에서 이들을 위한 문화제를 시민단체들이 주도하여 개최하였다. 지역사회에서 이들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알리는 캠페인이 전개되고 있다. C&M 노동조합은 적어도 외롭지는 않다. 지역에서 이러한 연대가 이루어지자 인터넷 기사들의 노동조합이 만들어지면 시민사회단체가 함께 하여 회사에게 압박을 하는 등 최근에는 관계가 더 돈독해지고 더 구체적인 힘을 실어주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이런 흐름을 보며 김신범 실장은 “정리해고, 명예퇴직, 간접고용의 문제를 마을이 파괴되는 문제로 인식하는 태도가 자리하기 시작했다. 정리해고나 명예퇴직을 당하는 노동자들이 늘어나면서 자영업으로 뛰어들지만, 이 들 중 대다수는 망하고 만다. 망하는 과정에서 아르바이트 노동자들에 대해 제대로 된 처우를 해 줄 리 만무하다. 고용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 사회의 최종 피해자는 나의 이웃이며 나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청주 생활교육공동체 공룡의 박영길 사무국장은 “마을과 노동, 마을에서 노동이 분리될 수 없는 이유”(2014년 11월)라는 팜플릿에서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에 노동조합활동을 하는 이웃 사람이 있다고 해도, 결국 마을에서 보면 그냥 똑같은 마을주민이다. 이는 노동조합이라는 것이 결국 그 사람의 직장 안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이다 보니 직접적으로 마을과 관계되지 않기 때문이며, 그래서 노동조합 활동을 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단순하게 직업적 차원에서의 노동자로 받아들여질 뿐인 것이다. 그래서 마을이 하나의 공장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맺어지지 않는 한은 노동자체가 이슈화되기 힘든 구조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과연 마을에서 노동조합 간부들을 만나는 게 진정 마을에서 노동을 만나는 것일까? 지역의 어느 사업장에서 파업이 있을 때 지지방문 가고 연대하는 것만이 내가 사는 마을에서 노동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일까?”라고 묻는다. 우리 사회가 마을공동체나 지역의 의미를 강조하는 듯 하지만 지역 내의 필요노동이나 노동의 가치를 여전히 낮게 평가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박영길 사무국장은 “경비아저씨라는 노동자를 아파트 마을에서 받아들이는 것은 단순히 경비아저씨에게 친철하게 말 한마디 건네라는 게 아니라 직접 면접보고 직접 고용하라는 것이다. 관리사무소라는 일부 관리업체에게 맡겨놓고 방관할 것이 아니라 적어도 우리 아파트에서 필요한 노동을 하는 사람들을 직접 주민대표자들이 고용하고 그들의 삶과 업무들을 살펴보라는 것이다. 마을에 필요한 공적 서비스를 진행하는 노동자들을 직접 만나고 직접 고용하는 방식, 학교에서 급식조리종사자들을 학교 행정실에 맡기는 게 아니라 면접보고 그들의 하는 일들을 자세히 살피는 것들을 학부모의 의무이자 권리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새벽에 동네 쓰레기를 치우는 공공근로 노동자들을 직접 만나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직접 제공하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적어도 필요 노동자들에 한해서라도 아파트 관리업체에게 맡기지 말고, 급식업체나 학교 행정실에 맡기지 말고, 주민자치센터에 맡기지 말고, 수많은 필요노동을 대행업체에 맡기지 말고 직접 대면하라는 이야길 하고 싶은 거다. 이게 우리가 이야기하는 자립과 자치의 첫 출발점이 아닐까.”라고 주장한다.

공공부문의 사유화가 노동운동과 지역운동 모두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두 운동의 주체가 지역사회에 기반을 두고 운동을 펼치는 건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운동 이전에 필요한 건 지역을 파악하는 것이다. 투명인간처럼 존재하는 노동자, 주민들이 지역사회에 존재한다. 특히 청소노동자나 학교급식조리노동자, 경비노동자, 택배노동자, 사회복지사,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 청(소)년들의 알바노동은 잘 드러나지 않거나 노동자와 주민간의 이해관계가 상충하기도 한다. 가격이나 비용이 아닌 다른 언어로 지역사회의 생산자와 소비자가 만날 수 있는 장이 필요하다. 그 장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박영길 사무국장이 지적하듯이, 지역의 필요노동이라면 그 노동을 지역주민들이 직접 고용하도록 강요하거나 최소한 그 노동을 직접 대면해야 한다. 우리가 공통의 세계 위에 서 있다는 자각이 매우 중요한데, 그런 자각은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는 만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보더라도 그 존재를 인지하지 않으면 자각되지 않는다. 노동운동은 주민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

또한 한국사회의 특성상 자영업의 비중이 높고, 자영업 내에서 고용되는 일용직 노동이 아주 열악하다. 이것은 개별 업주의 문제도 있지만 자영업의 구조적인 문제도 있다. 2012년 12월에 발간된 고용노동부의 「생계형 자영업 실태 및 사회안전망 강화방안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도소매업과 숙박 및 음식점업 전체 151만 1,154개 사업체 중 무려 139만 6,743개 사업체가 자영업자이고, 이중 5인 미만의 노동자를 고용하거나 연간 매출액이 4,800만원 이하인 영세 자영업자가 전체 자영업자의 44.6%이다. 2014년 5월을 기준으로 자영업자는 569만8천명이고, 그중 415만2천명이 '고용원이 없는 자영업자'로 추산된다. 그리고 자영업이라 불리지만 사실상 프랜차이즈화되어 ‘갑질’에 시달리는 이들 업자들에게 노동운동은 어떤 의미일까? 자영업자들이 알바노동을 무시하고 착취하는 것은 인간성이 나빠서일까?

더불어 소위 사회적 경제라 불리는 영역이 점점 커지고 있다. 정부의 지원을 받는 이 영역이 기존의 시장을 변형시킬 때 노동운동은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가령 직영되던 노동이 사회적기업이나 협동조합으로 바뀔 경우 노동운동은 반대 이외의 어떤 입장을 택할 것인가? 기업이 폐업할 경우 노동자들이 인수하는 자주관리기업에 대해 노동운동은 어떤 고민을 하고 있을까? 노동운동은 어느 정도의 기업운영능력을 기르고 있을까?



4. 같이 고민하고픈 내용들


- 공장과 사무실을 나오면 대부분이 비정규직 노동이다. 노동운동에서 지역의 지역화는 지역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이 아니라 비정규직 노동자의 조직화이다. 공장과 사무실을 벗어난 노동운동이자 공장과 사무실을 포위하는 노동운동이다. 성공한 지역노조의 싸움은 지역단체들을 조직화한 싸움, 생산과 소비를 연계시키고 조직화하는 싸움이었다. 이런 싸움의 경험들은 어떻게 정리되고 어떻게 공유되고 있나? 사업의 공유말고 경험의 공유와 그 경험을 실제로 적용하는 실험은 이루어지고 있나?

그런데 지역사회를 기반으로 하는 연대는 강력한 연대보다 느슨한 연대이다. 조직화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노동운동의 지역사회전략은 대부분 산별을 강화시키는 방편으로 신속하고 강한 연대를 전제하고 있다. 서로 만나는 방식과 목적이 다른데, 어떤 연대가 가능할까?

그리고 각 지역에 따라 현안과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노동조합이 어떤 의제를 가지고 어떤 방식으로 그것을 달성해야 한다고 ‘미리’ 정하기는 어렵다. 어떤 의제를 얘기하기 전에 그 지역에 관한 구체적인 욕구조사가 실시되어야 하고, 지역사회 내의 다양한 주체들(조직화되지 않은 주민/노동자 포함)을 파악해야 한다. 이렇게 욕구조사를 하고 주민지도력을 파악하는 과정 자체가 지역과 연계를 맺고 지역운동을 시작하는 과정이다. 이런 부분에 공무원 노조나 전교조가 적극적으로 결합하면 좋은데, 그 역사에 비추어 볼 때 이런 시도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더 관청과 학교 내로 숨어버린 느낌이다. 주민들을 만나고 함께 하지 않으면서 연대전략을 모색한다는 건 사업 중심으로 활동가를 배치하겠다는 발상인데, 주민들이 사업을 원할까? 그리고 주민들에게 금속노조의 사업을 주민의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 활동가는 얼마나 있을까?

또한 지역의 의제를 선정하고 논의하는 과정에 지역주민들의 참여를 이끌어내야 하고, 그 주민들을 볼 때 기존의 진보/보수틀로 바라보지 말아야 한다. 지역사회는 권력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진공의 장이 아니라 아주 촘촘한 권력관계의 영향을 받고 있다. 지역적인 의제를 달성하려면 기존에 보수적이라 평가되는 사람들과도 연계를 맺어야 하고 그들의 공감을 이끌어내야 한다. 이념적인 잣대로 접근하면 반드시 실패한다. 이념은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야 한다. 그런 자연스러운 과정을 노동운동은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 앞서 말했듯이 풀뿌리운동은 단순히 지역에 기반한 운동이 아니라 주체와 더불어  성장하는 운동이다. 이것은 운동의 방법론으로서 노동운동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한다.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통해 성장한다는 건 노동운동의 기본입장이기도 하지만 방법론의 면에서 공장/사무실/일터에서만이 아니라 지역/삶터에서도 그런 성장의 방법이 필요하다. 지역주민들을 대상화시켜서 주민들을 위해 펼치는 사업이 아니라 노동자와 주민이 뒤섞여서 서로의 삶을 고민하는 장이 필요하다. 이미 어떤 사건이 터진 후 만나는 게 아니라 어떤 사건을 함께 일으키는 공동의 주체가 되기 위해 서로의 일상적인 관계를 강화시키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가장 먼저 필요한 건 서로의 존재에 대한 깨달음이고, 그런 깨달음이 가능하려면 서로에 대한 편견을 깨고 자신을 드러내야 한다. 우리는 서로 솔직하게 만나고 있나?

그리고 연대전략이 지역적인 의제를 해결했을 때 그 성과를 반드시 그 지역사회에 남겨야 한다. 보통 어떤 성과가 있으면 주요한 단체가 그것을 독점해 버리는데, 그러면 그 다음에 더 큰 연대의 틀이 보통 만들어지지 않는다. 성과를 남기고 지역사회를 성장시키는 만큼 같은 편이 늘어나기 때문에 성과를 지역에 남기는 것이 장기적으로 보면 노조에게도 유리하다. ‘거점’이라 부르려면 정말 중요한 지점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럴 준비는 되어 있나?

- 민중의 집이 주요한 지역화 전략으로 이야기되는데, 한국사회에서 정말 효과적일지 따져봐야 한다. 거점을 공간으로만 인식하는 경향이 있고, 이것은 지역사회를 장악의 대상으로 보는 편견과 무관하지 않다. 민중의 집을 만들면 정말 그 일대가 해방구가 될까? 차라리 괜찮은 자영업 가게들의 단골이 되는 게 훨씬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민중의 집은 노동자들이 식사하고 토론하고 오락을 즐기며 사회적인 연대를 형성하는 공간, 노동자들의 고립감을 극복시켰던 공간인데, 한국의 민중의 집이 그런 공간이 되고 있는지는 따져봐야 한다. 아울러 유럽의 민중의 집은 노동자들이 협동조합을 경험하는 공간이기도 했는데, 우리의 모습은 어떨까? 실패했다는 게 아니라 민중의 집에 들어가는 에너지만큼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 냉정하게 따져보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이다. 공간을 만드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공간을 다양한 관계들로 채워야 하는데, 그런 관계망을 만들고 확장시키는 활동에는 많은 사람과 에너지가 필요하다. 새로운 교육과 활동보다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삶에서 할 수 있는 부분들을 가지고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예를 들어, 금속노조가 알바청(소)년들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면 어떨까?

이제 좀 진진하게 마인드프리즘 이야기를 해야겠다.

왜냐하면 오늘 2명 중 계약직 노동자  중 1명이 해고, 사측은 계약 종료, 되기 때문이다.

이 한 명은 와락에서 정혜신씨와 함께 치유활동가로 일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오늘부터 마인드프리즘 노동조합은 본사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인다.


마인드프리즘의 상황을 보면, 그동안 내세웠던 해고노동자의 치유나 사회적인 가치와 무관한 민낯이 드러난다.


몇 가지 궁금증을 밝히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정혜신 전 대표는 이번 일에 아무런 책임이 없을까?

회사의 부채가 30억원 정도인데, 이 부채는 정혜신 전 대표가 사임의사를 밝힌 올해 5월부터 누적된 게 아니라 회사 설립 이후부터 누적된 부채이다.

정혜신 전 대표는 얼마 전(2014년 12월 26일), 타이밍이 참 공교로운데, 한겨레신문 인터뷰에서 마인드프리즘과 관계를 끊었다고 이야기했다. 아니 정확하게 얘기하면 기사를 인터뷰한 기자가 서두를 이렇게 시작한다. “정혜신 이명수 부부는 심리치유 전문기업 ‘마인드프리즘’으로 유명합니다. 당연히 아직도 겸직하는 줄 알았습니다. 아니었습니다. 세월호 사건 이후 완전히 접었다고 합니다. 이제 안산에서의 치유활동에 모든 것을 걸었다고 합니다.”

세월호 가족의 치유에 모든 걸 거는 건 좋다. 하지만 자신과 함께 몇 년 동안 마인드프리즘을 이끌어온 노동자들은? 왜 노동자들이 그 부채를 짊어지며 해고되어야 하나?

정혜신 전 대표가 사임한 뒤, 노조의 성명서에 따르면, “지난 해 7월에는 직원의 1/3을 권고사직으로 감원하겠다는 통보가 있기도 했으며, 결국은  희망퇴직 형식으로 직원 28명 중 8명이 마인드프리즘을 떠나는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희망퇴직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경영진들은 그동안 마인드프리즘이 지켜왔던 ‘사람에겐 마음이 있다’는 가치를 훼손하며 일방적인 부서개편을 단행하고 소통을 거부했습니다. 급기야는 성과가 증명되어 계약갱신이 예상되던 심리치유 활동가에 대해서 계약종료 통보에 이르렀습니다.”라고 한다. 6월 사임 이후 이렇게 일이 진행된 것을 정혜신 전대표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을까? 보통 이렇게 일이 진행되려면 이미 안이 나와 있는 것 아닌가?

와락으로 사회적인 명사가 된 정혜신 전 대표는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는 TV찬조연설을 했다. 그 연설에서 정혜신 전대표는 “해고를 당했다고 다 죽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많이 죽어가는 거냐, 사람들이 많이 묻더라구요. 사람의 고통이 여러가지가 있지만요. 사람이 진짜 억울하면요. 정말로 살아남기가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또 그 억울함과 함께 세상 누구도 우리 고통에, 내 고통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그런 극도의 절망감이 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 삶의 끈을 놓게 만드는 거죠.” 마인드프리즘 노동자들의 억울함은 어떻게 할 건가?

지금도 마인드프리즘 홈페이지에는 마인드프리즘 설립자인 정혜신 씨의 이야기가 걸려있다.

만일 이 문제를 피한다면 정혜신 전 대표도 억울함을 치유받아야 하는 노동자를 만든 당사자가 될 것이다.


둘째, 마인드프리즘에 투자를 했던 김범수씨와 그 투자를 통해 공동대표가 되었던 김화영 전대표는 이 문제에 왜 침묵하나?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보통 투자라고 하면 투자에 따른 손실도 함께 부담하는 게 맞는 거 아닌가. <오마이뉴스> 기사에 따르면, 카카오톡의 김범수 씨는 회사 지분 70.5%를 인수하며 친동생을 공동대표 자리에 앉히며 투자를 했다. 카카오톡의 투자를 받으며 마인드프리즘은 적자에도 사업을 계속 넓혔으니 이 적자분은 카카오톡에도 책임이 있다. 그래서인지 동생인 김화영 전대표는 사임을 하면서 카카오톡 부채인 26억 5천만원을 책임지기로 하고 현 공동대표에게 지분을 양도하기로 했다고 한다.

그러면 회사 부채는 4억 정도인데, 그 정도 규모의 회사에서 이 부채가 직원들을 대거 해고해야 할 만큼 심각한 것일까? 김범수 씨와 김화영 전대표가 우리는 손을 뗐으니 상관없다고 얘기할 수 있겠지만 새로운 공동대표는 김화영 전대표와 무관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지분을 넘겨준 사람들이 지분을 넘겨받은 사람들에게 아무런 영향력이 없을까? 더구나 현 공동대표인 김창성 씨는 김화영 전대표가 대표를 맡을 때 함께 들어온 사람인데?

심지어 김범수 씨는 2013년 정혜신 전대표와 ‘1000만 힐링 프로젝트’에 나선다며 기자회견을 열고 “돈이 아닌 사회공헌을 위해 시작한 일이다. 국민에게 자기 자신을 만나게 해주고 싶어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 발언에 대한 책임은 없나? 결국 자기 기업 이미지만 좋게 만들었다는 것인데....


셋째, 현 공동대표는 사안을 해결할 의지가 있나?

<오마이뉴스> 기사에 따르면, 현 공동대표는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회사 경영상 적자가 계속되던 중 사업 규모 대비 높은 인력 숫자 등 구조적 문제를 해소하려고 지난해 희망퇴직을 실시한 건 사실’이라면서도 ‘그 과정에서 팀장이나 직원 대표단과 협의했지 일방적으로 진행한 건 아니다’라고 밝혔다.” 따져보면, 희망퇴직은 현 공동대표가 취임하기 전에 벌어진 일이기에, 본인들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말할 사안은 아니다. 그리고 ‘협의’하며 진행한 일이었다고 하면서 지난 1월 6일 “ '계약직 고용 지속' 등을 요구한 직원들에게 서면 경고장을 발부하며 맞대응했다.”(<라포르시안> 기사) “마인드프리즘 사측은 지난 6일 직원들에게 "회사 직원들 간의 불신을 선동하고, 회사의 신인도를 훼손하는 등 복무규율을 위반했다"는 내용의 서면 경고장을 발부했다.”(<프레시안> 기사) 이건 사측이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의사가 없음을 뜻한다.

현 공동대표는 마인드프리즘 창립 멤버인 박인정 씨와 김화영 전 대표와 함께 입사한 김창성 전 마케팅팀장이다. 언론과 인터뷰를 한 것은 김화영 전대표와 함께 입사한 김창성 대표이니, 이 사람은 기본적으로 경영마인드만 가진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혜신 전대표와 함께 마인드프리즘을 만든 박인정 대표는 어떤 입장일까? 기본적인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면, 정말 공동대표라면 이 문제에 관해 박인정 대표가 입장을 밝혀야 한다.

그리고 “김 대표는 ‘이제 김범수 의장, 정혜신 박사, 김화영 전 대표 세 사람 모두 마인드프리즘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고 하는데, 그게 더 의심스럽다. 왜 이렇게 꼬리 자르기를 시도할까?


노동자들이 억울하게 희망퇴직을 선택하고 일방적인 구조개편을 받아들이면서도 회사를 지키려 하는데, 사측은 경영적자이니 어쩔 수 없다며 해고를 밀어붙인다. 노동조합에게 회사의 명예를 실추시켰다고 하는데, 누가 정말 마인드프리즘이라는 회사의 명예를 실추시킨 걸까? 현 공동대표야말로 마인드프리즘의 명예를 실추시킨 사람들이고, 정혜신, 김범수, 김화영 씨는 이런 사태에 책임을 통감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사안이 어떻게 되는지 끝까지 지켜 볼테다.

1. 들어가며


박근혜 대통령이 대국민담화를 발표했던 5월 19일, 그 날로 예정된 토론회가 취소되었다. 사실 그 토론회는 우리 권력의 속살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토론회였다. “수상재난 상황에서의 안전확보를 위한 수영교육 활성화 방안 토론회”, 이 얼마나 솔직한 주제인가. 배가 침몰하면 각자 갈고 닦은 수영실력으로 알아서 살아남아야 한다, 이게 우리 현실 아닌가.

 

흥미로운 점은 이 토론회를 주최한 국회의원들이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 의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같은 배를 탄 사람들인데도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비치는 것은 아마도 실제 차이보다 우리의 바람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바람으로 한국사회가 바뀐 적이 있었나?

 

통치성에 관한 사토 요시유키의 분석에 공감하지만 노골적인 한국현실을 분석하는 이론틀이 되려면 보완되어야 할 부분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런 고민들을 함께 나누려 한다.



2. 공고해지는 기득권과 사업으로 변한 안전


(1) 유체이탈화법과 좀비정치


세월호 참사에 대한 정부의 공식발표라고 할 박근혜 대통령의 5.19 대국민담화는 참사의 원인은 없고 대책만 나열되는 이상한 담화였다. 참사가 일어난 지 한 달 이상 지났건만 참사의 원인은 “선박 심사와 안전운항 지침 등 안전관련 규정들이 원칙대로 지켜지고 감독이 이루어졌다면 이번 참사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라는 원론에 머물렀다. 반면에 대책은 아주 구체적인데 박근혜 정부는 해경을 해체하고 국가안전처를 신설하고, “우리 사회의 비정상적인 관행과 제도를 바꿔서 정상화하기 위한 개혁작업”을 진행하며, “우리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끼리끼리 문화와 민관유착이라는 비정상의 관행”을 없애고,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끼리끼리 서로 봐주고, 눈감아주는 민간유착의 고리”를 끊고,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관피아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밝혔다. 이 대책은 규제를 쳐부술 암이자 원수라고 밝혔던 기존 입장과 큰 차이가 없다.

 

아울러 대국민담화는 “폐쇄적인 조직문화와 무사안일이라는 문제”를 바꾸기 위해 민간전문가들을 대거 발탁하겠다고 밝혔다. 짧은 담화 중에 전문성, 전문가라는 말이 15회 반복된다. 그런데 안전을 점점 더 전문화시켜서 특정한 민간전문가를 참여시키고 대다수 민간의 참여를 배제하는 것은, ‘민간 전문가’를 과장급 이상의 직위에 배치하겠다는 것은 과거 김영삼 정부 때부터 반복되어온 관료제도의 경쟁 논리를 강화시킨다. 더구나 이는 나오미 클라인(N. Klein)이 정의했던 ‘재난 자본주의(disaster capitalism)’, 즉 “비정상적 상황에서 급박하게 추진되는 영리 추구 정부 모델을 국가의 일상적 기능에도 도입하는 것”, “한마디로 정부를 민영화하겠다”는 생각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는 것이라 볼 수도 있다.[각주:1]

 

이 대국민담화는 안전을 더욱더 전문화시키고 제도화시켜 정부가 참사를 빌미로 시민의 삶을 더욱더 관리하겠다는 발상이고 국가안전처라는 신설부서 역시 그런 의심을 받고 있다(지금 선임된 처장 역시 군 출신이다). 사고를 참사로 만든 주범이면서도 책임의 인정 없이 관리대책만 나열한 이 담화는 ‘유체이탈화법’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래서인지 문재인 국회의원도 그 다음날 이를 비판하는 특별성명을 발표했다. 특별성명은 한국사회가 박정희 시대로 회귀한 것 같다고 질타한 뒤 “돈이 먼저인 나라에서 사람이 먼저인 나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별성명은 규제완화를 비롯한 경제민주화의 후퇴에서 참사의 원인을 찾으며 “가장 안전한 사회는 ‘민주주의’입니다”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대책도 부처의 신설이나 전문가 활용보다 “여야는 물론 시민사회까지 함께 참여”해야 하고, 수명이 다한 노후 원전의 가동을 중단시키는 등 가시적인 노력을 먼저 보이라고 주장했다.

 

이 특별성명은 정당해 보인다. 그렇지만 이 특별성명 역시 묘한 유체이탈화법의 경향을 띤다. 왜냐하면 이명박 정부나 박근혜 정부에서 민주당은 다수당이 아니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군소정당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창 신자유주의와 규제완화가 시행될 때 민주당은 무엇을 했었나?[각주:2] 그리고 문재인 국회의원은 노무현 정부 시절의 제주해군기지나 부안/경주방폐장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러니 민주주의를 문제삼을 자격은 문재인 의원에게도 부족하다.

 

박근혜 대통령과 문재인 국회의원의 연설은 다른 듯 보이지만 묘한 공생관계를 감추고 있다. 문민정부라 불렸던 김영삼 정부의 세계화 노선, IMF사태를 빌미삼아 금융/공공부분을 민영화시켰던 김대중 정부, 자유무역지대(FTA) 전략을 세웠던 노무현 정부, 그런 기반을 딛고 이명박, 박근혜 정부가 등장하고 강화되고 있다는 공생관계 말이다. 그러니 누구도 이 정부 이후를 자신할 수 없다.


(2) 안전과 건설의 지방선거


세월호 참사 이후 6.4 지방선거가 실시되었다. 지방선거임에도 초미의 관심사는 서울시장 선거였는데, 이명박 이후 한국 자본가를 대표하는 정몽준 국회의원이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했기 때문이다. 정몽준 후보는 세월호 참사를 거론하는 것보다 “현재의 생활이 힘들고 장래가 불안한 시민에게 일자리는 최고의 복지”라고 주장하며 “서울로부터 3시간 비행거리에는 15억 명이 살고 있습니다. 15억 명이 찾아오고 싶은 서울, 장사가 잘 되는 서울, 청년들의 일자리가 늘어나는 서울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안전을 경제로 전환시키는 프레임, 한국 선거에서 잘 먹히는 프레임을 만들고서도 정몽준 후보는 선거운동과정에서 박원순 시장의 문제점을 드러낸다며 ‘불안한 서울’을 주로 언급했다. 농약급식, 지하철 공기질 등을 문제삼고 협동조합/마을공동체사업 폐지 등을 얘기하다 정몽준 후보는 네가티브 선거라는 역풍을 맞았다.

 

반면에 박원순 후보는 서울시정의 기조를 ‘안전·복지·창조경제’라고 정의하며 “가장 중요한 것은 사고가 일어난 이후 피해를 최소화하는 ‘재난 골든타임 목표제’”라며 세월호 참사를 활용했다. 12대 핵심공약에서는 ‘1. 안전특별시 서울, 2. 어린이 안전도시 서울, 3. 주택안심 서울’처럼 안전과 안심이 전면에 등장했고, 60대 정책공약에서도 “사람중심의 안전패러다임 전환”, “시민의 안전이 보장되는 안전마을 50곳 만들기” 등 안전이 강조되었다. 박원순 후보는 안전을 중요한 화두로 내세우고 활용하며 선거를 이끌었는데, 이 때의 안전은 정부가 시민의 삶을 안전하게 ‘관리해주겠다’는 언술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특정한 가치나 삶을 좋은 삶으로 전제하고 그 삶을 확산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고, 특히 이 안전담론은 여전히 노동을 배제한다. 예를 들자면, “시민을 위한 안전지하철! 노후차량‘노후시설 전면 교체”는 있어도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개선시키겠다는 내용은 없다. “차량 노후화-인력감축-비용절감 위주 경영”이 전형적인 사영화의 과정인데, 박원순 후보의 공약에서는 시설 문제만 부각된다. 그리고 박 후보는 향후 가장 불안요인이 될 핵발전소정책에 대한 반대의지도 밝히지 않았고, 적자와 사고를 부르는 경전철 사업을 포기하지도 않았다.

 

외려 “창조 전문인력 10만명 양성, 공공형 사회․복지서비스 좋은 일자리 5만개 창출, 맞춤형 여성일자리 10만개 창출”같은 모호한 노동정책이 함께 등장한다. 창조 전문인력, 좋은 일자리, 맞춤형 여성일자리가 어떤 것인지를 지난 서울시정을 통해 유추한다면, 이 일자리들은 최저임금에 가까운 시급과 단기고용(11개월 이내) 일자리인데, 정말 건강하고 안전한 노동이 가능할까?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와 박원순 시정의 창조경제는 얼마나 다를까?

 

또한 선거를 통해 드러난 안전담론은 안전을 내세워 시민의 삶을 관리할 뿐 아니라 이를 자본축적의 기회로 삼으려 한다. 그런 점에서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은 서로 공생관계에 있다. 예를 들어, 세월호 참사를 당한 안산시와 경기도가 총 900억원의 국비지원사업 추진을 밝히면서 안전체험테마파크 조성, 글로벌 안전시범도시 구축, 수도권 규제완화특별지구 지정 등을 내세운 것은 안전이 건설자본에겐 기회가 될 수도 있음을 뜻한다.

 

안전을 내세운 여러 이야기들이 떠돌고 있지만, 기득권들은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결탁되고 있다. 한국사회의 안전담론은 경쟁과 배제라는 신자유주의 권력 또는 환경개입권력, 즉 “개개인에게 직접 개입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환경에 개입해 그 게임의 규칙을 설계함으로써 환경의 최적화를 꾀하고자 하는 권력”[각주:3]의 성격과 무관하진 않지만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물론 현실에서는 규율권력과 환경개입권력이 복합적으로 작동하지만 한국의 통치는 노골적인 이해관계를 감추지 않고 그것을 정책으로 관철시키려고 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특히 한국에서 여당/야당은 서로를 뜯어먹으려고만 하지 아무런 대안도 제시하지 않는, 생존에의 욕망만 있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동일한 ‘좀비정치’이다.



3. 한국사회의 특수성은 무엇인가?


(1) 보이지 않는 강한 국가와 고착권력


국가가 자본과 결탁해 노골적으로 이해관계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은 어렵게 증명하지 않아도 신문기사만 몇 개만 검색해도 나온다. 핵발전소 납품과 관련된 비리, 4대강 사업과 관련된 비리 등 많은 사건들이 이미 드러났다. 그리고 철도나 의료 등 한창 논쟁이 되고 있는 민영화 문제는 중요한 공기업이나 비영리법인들이 민간자본에게 매각되고 흡수되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을 ‘국가나 공공성의 민영화’로 볼 것인가? 물론 민영화가 맞다. 그런데 민영화가 되었다고 해서 국가의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병참이나 전쟁까지 민간기업이 담당하는 시대이지만,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알리바이이기도 하다. 민간이 철도나 의료, 병참을 관리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운용하는 법적, 제도적 장치는 여전히 국가의 권한이다. 나오미 클라인의 '재난자본주의'도 국가와 자본의 혼성, 뒤섞임을 뜻하지 한 방향으로의 이전을 뜻하지 않는다. 사실 재난자본주의는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 자유주의나 신자유주의가 ‘작은 정부’를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강한 정부’를 요구하는 것도 바로 그런 현실적인 필요 때문이다.

 

2014년 5월 29일 발표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과 법률지원 특별위원회’의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17대 과제 중간검토 보고서」는 진상규명과 관련된 많은 질문들을 담고 있다. 이 「보고서」를 보면 참사 이전과 사고 당시, 사고 이후 과정에서 정부의 역할이 잘 드러난다. 여객선 안전검사기준이나 차량적재기준, 선박연령기준, 안전점검기준, 선박운행기준 등은 정부의 소관이고, 부실한 관리감독의 원인인 해피아(해양수산부+마피아)나 해양경찰의 안전관리, 해양사고에 대한 정부의 대응능력, 재난관리시스템 역시 정부의 소관이다. 더구나 세월호 참사 이후 정부의 언론통제 및 사건은폐, 유가족에 대한 감시와 시위를 벌인 시민들에 대한 과도한 탄압, 전문가들의 개입 차단, 수사과정에서의 의혹 등은 정부가 생각보다 훨씬 넓은 영역에 개입하고 있음을 반증한다. 즉 민간영역이지만 여전히 그 운영과 관련된 규칙은 정부의 권한에 속한다. 따라서 국가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7개국의 민영화 과정을 추적한 다큐멘터리 <블랙딜>을 보면, 민영화 과정 뒤에는 언제나 정부와 기업의 검은 뒷거래가 있었다. 자연스러운 민영화란 환상이고, 민영화의 다른 이름은 부패이다. 한국이 식민지, 군사독재를 거치면서 ‘과대성장국가’(overdeveloped state, 함자 알라비H. Alavi의 개념)가 되었다는 점을 무시하면 안 된다. 복지국가와 국가의 강화를 외치는 목소리들이 있지만 자본과 결탁한 부패한 관료제도가 그런 역할을 맡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국가나 통치에 관한 분석이 간과하는 것은 그 시스템을 작동하는 관료제도이다.

 

또한 한국사회에서는 안전성의 기준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사실상 안전성을 논할 수 있는 기본정보와 기회 자체를 얻기 어렵다. 예를 들어, 핵발전소 내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민간의 접근이 차단되고 진상에 접근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아직도 전혀 밝혀지지 않는 의혹과 진상규명 요구는 세월호만의 특수한 상황이 아니다. 사건/사고가 터질 때마다 정부는 은폐와 여론통제, 폭력대응이라는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세월호 유가족이 면담을 청했을 때 드러났듯이, 정부는 ‘순수한 시민’이라는 자의적인 잣대를 활용해 시민/비시민으로 구분하고 비시민들을 고착시키고 있다. 가만히 있으라는데 가만히 있지 않으면 과거처럼 빨갱이로 몰려 잡혀가진 않지만 종북(從北)으로 몰려서 고립된다.

 

정보를 공개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진행되는 정부사업은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폭력과 다를 바 없다. 밀양송전탑이 그 전형이다. 정부는 송전탑 건설에 반대하는 4개 면의 농성장을 감시하고 철거하기 위해 투입된 경찰은 총 38만1000여명, 숙식비는 99억600만원에 달했다. 경찰이 직접 폭력을 행사해 농성장을 철거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을 강제로 끌어냈다. 2011년 1월의 용산참사에서 그러했듯이, 경찰과 용역의 경계가 점점 흐릿해지고 있다. 이런 현상은 “국가와 경찰이 일체가 된 근대의 경찰제도에서 경찰이란 단순히 법[법률]을 적용하는 법 보존적 폭력일 뿐만 아니라, 정부에 의한 행정명령의 공포와 일체를 이루는 방식으로 ‘법을 발명하며’ 그것에 의해서 안전을 확보하고자 하는 기관”[각주:4]으로 이해될 수 있다.

 

여전히 강력한 국가가 민영화라는 가면 뒤에 숨어 자본과 거래하며 이익을 취하고 이에 관한 정보와 개입을 통제하며 노골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한국사회의 특징을 뭐라 부를 수 있을까? 최근 집회/시위현장에 자주 등장하는 “고착시켜”라는 경찰의 용어를 본 따 ‘고착권력(固着勸力)’라 부를 수 있다. 정부나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일시적으로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로 감금당하고 고립된다. 집회는 금지되지 않지만 집회장 주변은 경찰버스로 꼼꼼히 차단되어 선전과 항의라는 집회의 목적은 금지된다. 감금이지만 감금이 아니기에 불법이 아니라고 주장되는 고착, 폭력으로 고립시킴으로써 의지를 꺾고 능동성을 가로막는 고착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따지고 보면 어떤 참사에도 가만히 있으라는 정부의 지시 역시 고착 아닌가.


(2) 노동을 배제하는 자본의 노골적인 폭력


4월 16일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날이자 원자력안전위원회가 고리원전 1호기의 재가동을 승인한 날이다. 세월호 참사의 원인이 아직 분명하게 밝혀지진 않았지만 노후한 선박, 인건비 절감을 위한 비정규직 고용, 감시감독의 부재 등이 기본적인 원인이고[각주:5], 핵발전소들은 이런 문제를 똑같이 안고 있다. 핵발전소의 수명을 넘긴 노후시설, 납품비리와 수많은 사고, 감독기관의 이해관계집단화(핵마피아), 원전노동의 하청구조 등은 임박한 참사를, 엄청난 파국을 예고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의 원인은 여러 곳에서 반복적으로 지적되었고, 그와 비슷한 원인들이 철도, 지하철, 병원, 에너지, 공항, 건설 등 곳곳에 존재하고 있음도 지적되었다.[각주:6] 그리고 실제로 서울시장 후보였던 정몽준이 최대주주인 현대중공업에서는 지난 3월부터 한달 반 남짓 동안 7명의 사내하청노동자가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적절한 안전장치가 없고 현장에 관한 정보를 제대로 알지 못한 탓이었다. 하청노동자는 현장의 안전성에 관해 묻거나 안전장비를 요구할 권리를 전혀 누리지 못한다. 사회에서 수많은 안전대책이 논의되고 있지만 위험한 공장과 사무실에서 노동자의 안전은 논의테이블에도 오르지 못하고 있다. 위험에 가장 노출된 노동자들은 정작 안전에 대한 권리에서 완전히 배제되고 있다.

 

노동자 개개인이 요구를 하지 못하면 조직된 노동조합이 노동자의 노동조건과 관련된 목소리를 내야 하는데, 외려 현실에서는 노동조합이 체계적으로 파괴되고 있다.[각주:7] 대표적인 회사가 돈을 받고 노조를 파괴하는 전략을 짜는 노무법인 <창조컨설팅>이다. 이들이 노조를 파괴하는 전략은 다음 순서를 따랐다. ‘회사의 갑작스런 교섭거부와 단협해지 ― 파업유도 ― 사측의 직장폐쇄 ― 용역깡패 투입 ― 노조에 대한 대량해고와 대량징계, 막대한 손해배상 요구 ― 조합원탈퇴 종용 ― 탈퇴 조합원 중심으로 기업노조 창립, 배타적 교섭권 부여’. 이런 전략은 효과적이었고, 많은 노동조합들이 이런 전략에 무너졌다. 그 성과를 인정받아 <창조컨설팅>은 2011년 1월부터 2012년 8월까지 총 23개 기업에게 무려 82억 4,500만원을 받았다.

 

이처럼 한국의 통치에서는 규칙을 설계하는 것보다 여전히 개개인과 개별 사안에 직접 개입해서 폭력을 행사하고 배제하는 방식이 여전히 활개치고 있다. 이 통치를 뭐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 법으로는 분명히 불법이지만 검찰, 노동위, 기업주가 힘을 합쳐 규칙을 무력화시키는 사회에서 통치는 폭력과 얼마나 다를까(만도노조와 SJM노조를 습격했던 <컨택터스>의 유니폼과 장비는 공권력과 다를 바 없다).

 

직접적인 폭력을 경험하지 않더라도 노동조합의 노동자들은 끊임없는 손해배상과 민사소송에 시달린다. 2003년 타워크레인 위에서 쓸쓸히 죽음을 택했던 김주익위원장은 유서에 “그래 당신들이 나의 목숨을 원한다면 기꺼이 제물로 바치겠다. 하지만 이 투쟁은 반드시 승리해야만 한다. 잘못은 자신들이 저질러놓고 적반하장으로 우리들에게 손해배상 가압류에 고소고발에 구속에 해고까지 노동조합을 식물노조로 노동자를 식물인간으로 만들려는 노무정책을 이 투쟁을 통해서 바꿔내지 못하면 우리 모두는 벼랑 아래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승리할 때까지 이번 투쟁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적었다. 같은 해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씨도 “두산이 해도 너무한다. 해고자 18명, 징계자 90명 정도. 재산가압류, 급여가압류, 노동조합 말살 악랄한 정책에 우리가 여기서 밀려난다면 전사원의 고용은 보장받지 못할 것이다. 두산은 피도 눈물도 없는 악랄한 인간들”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분신했다. 하지만 그 뒤로도 손해배상과 가압류는 계속 이어져 2014년 2월까지 각 노조가 청구받은 금액을 합하면 1,600억원이 넘는다. 물리적인 폭력과 돈의 폭력이 뒤섞여 노동자들의 삶을 고공농성과 죽음으로 몰아간다.

 

노동자가 돈과 고립에 눌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회에서는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 핵사고의 전례없는 죽음이 두렵긴 하지만 일상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것도 두렵다. ‘배제’라는 단어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못하는 이 죽음은 우리 삶의 뿌리로 파고든다. 안전을 비용으로만 계산하는 기업이[각주:8], 노동자의 발언 자체를 금지하고 농민의 삶을 고착시키는 권력이 안전을 내세우는 상황이다. 깔끔한 안전권력을 논하기엔 우리 사회에는 피비린내가 짙게 배어 있다.

 

노동자나 주민의 활동은 불법이 아니건만 막대한 손해배상과 용역깡패의 폭력은 노동자와 주민을 꼼짝 못하게 고착시킨다. 노동자와 주민의 관계마저 단절시키고 단속한다.[각주:9] 기업이나 송전탑, 핵발전소에 관한 정보는 접근 자체가 어렵고 사고가 발생하더라도 그 진상에 접근하기 어렵다. 여전히 권력은 은폐하고 규율하며 폭력을 행사한다.

 

이런 상황이니 민중의 권력이 다시 그 힘을 제자리로 찾아와야 하고, 그럴려면 국가와 자본의 연합전선에 맞설 힘이 필요하고, 그런 점에서 국가를 활용하지만 국가권력을 강화시키지 않는, 제도정치를 활용하지만 그것에만 의존하지 않는, 집권의지를 갖지만 분권을 실현하려는 비(非)국가 전략이 중요하다고 본다.


(3) 안전담론과 안보담론


특히 한국사회에서는 안전과 치안이 안보(安保)담론과 결합된다. 남북한이 대치하고 있는 냉전상황은 위기의 내용이나 과정과 상관없이 정치, 경제, 사회적 위기를 극복하는 수단이 된다. 실제로 국정원의 선거개입이나 간첩조작과 같은 치명적인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박근혜 정부는 안보담론을 활용했고 세월호 참사도 그런 사건을 은폐하는 도구로 활용되었다. 그리고 안전이 화두로 떠오른 6.4 지방선거에서도 안전과 함께 활용된 말이 안보였다.

 

종북이라는 낙인은 한국사회에서 안보담론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을 뜻한다. 이 종북담론은 기존의 빨갱이담론과는 다르다. 빨갱이가 불온한 주체를 호명하는 단어라면, 종북은 그 주체만이 아니라 북을 추종하는 세력(從北)을 뜻한다. 종북은 빨갱이보다 훨씬 넓은 범위에서 사용된다. 말 많으면 빨갱이라는 말도 있었지만 정부를 조금이라도 비판하면 종북이라는 딱지가 붙을 뿐 아니라 비판하지 않더라도 다른 삶의 태도를 보이면 바로 꼬리표가 붙는다. 심지어 밀양송전탑이나 지리산댐, 핵발전소를 반대해도, 세월호 참사를 문제 삼아도 종북이라는 딱지가 붙는다. 보수파들은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개새끼”라고 말하면 종북이 아니라는데, 바로 면전에서 그렇게 얘기하더라도 ‘진심(眞心)’을 문제삼을 수 있는 낙인이 바로 종북이다.

 

안보와 결합된 안전담론은 어떤 주장을 가로막는 게 아니라 현실에 대한 느낌의 발산 자체를 막는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침묵시위에서 드러났듯이 주장 이전에 흐느낌이나 침묵조차도, 노란 리본이라는 소품조차도 이미 불손하고 불온한 것으로 규정되어 감시와 탄압의 대상이 된다. 열심히 일하지만 가난하고 열심히 참여하면 고착되는데도, 이 답답함을 표현할 방법이 없다. 안보와 결합된 안전담론은 다른 나라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형태의 통치이다. 내부의 적만이 아니라 외부의 적으로 몰아 그 존재 자체를 고착시키려는 이 흐름을 뭐라고 정의해야 할지 고민이다.

 

물론 이런 고착을 뛰어넘으려는 운동도 존재한다. 존재 자체를 고립시키는 고착사회에 맞서 희망버스를 타고 직접 현장으로 떠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지만 국가와 자본의 폭력은 희망버스를 타고 먼저 손을 잡으려는 사람들조차 고립시키고 경계를 지운다. 나서는 것 자체가 금지되지는 않지만 어느 선을 넘는 순간 고착된다. 누구의 명령에서 비롯되는지도 파악되기 어려운 고착명령은 예외상태의 규칙화라는 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지만 뭔가 고민의 꼬리는 계속 남는다.

 

또한 이런 고착의 흐름에 맞서기 위해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국민대책회의가 구성되고 “존엄으로부터 안전을 세우기 위하여”라고 외치는 존엄과안전위원회가 출범했다. 존엄과안전위원회는 안전한 사회를 위해 당장 실천해야 할 일로 일곱 가지 과제를 요구했다.

 

1. 기업살인법을 제정해야 합니다.

2. 원전사고를 막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 수명이 끝난 노후원전을 폐쇄해야 합니다.

3. 위험작업 중지권을 보장해야 합니다.

4. 생명과 안전에 관한 업무는 외주화를 금지하고 즉각 정규직화해야 합니다.

5. 기업활동규제완화에 대한 특별조치법을 폐기하고 규제완화를 중단해야 합니다.

6. 화학물질로부터 안전하기 위해 주민 알권리가 보장되어야 합니다.

7. 지역안전관리 시스템과 공공다중이용시설 안전에 시민 참여를 보장해야 합니다.

 

과제는 다 나온 듯하다. 문제는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이다. 지금 정부가 이 일곱가제 과제를 순순히 받아들일 가능성은 전혀 없다. 일곱 과제의 ‘합니다’가 안보담론과 안전담론을 분열시키고 누구를 어떻게 설득하며 조직할 것인가에 관한 방법을 찾아야 현재의 안전담론에 균열을 만들 수 있다. 누구에게 말을 거는가에 따라 호명의 방식이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4. 기민(棄民)과 자립인


사토 요시유키는 발제문에서 히로시마 자유농장의 발언을 인용하며 기민을 얘기한다. 사이토 준이치도 『민주적 공공성』에서 “약자의 기민화”를 우려한다.[각주:10] 그런데 버려진 민중이란 표현은 공공성 강화를 위한 국가의 책임을 자극하긴 하지만 민중의 가진 힘을 제한하는 것이기도 하다. 2014년 1월, 일본 후쿠시마현 이와키시의 활동가들을 초청했을 때[각주:11], 그들은 핵발전소에서 30km 떨어진 곳에 다시 마을을 세우고 있었다. 모든 문제를 후쿠시마로 몰아붙여 배제하려는 정부에 맞서 자립(自立)의 기반을 다지고자 했다. 그러면서 일본 활동가들은 한국의 상황에 굉장히 놀라워했다. 방사능에 그토록 민감한 사람들이 어떻게 저런 핵발전소를 그대로 둘 수 있냐고. 어떻게 시민들이 사는 도심에 핵연료 공장을 세우냐고. 어떻게 마을 한 가운데에 송전탑을 세우냐고.

 

물론 이런 물음이 안전에 대한 갈망을 더욱더 증폭시킬 수 있다. 하지만 그 갈망은 누군가가 채워줄 수 있는 욕망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준비해야 할 생활이자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토론회에서 현재의 상황에 대한 이런저런 진단이 나오지만 정부에 대한 무기력한 요구나 의지만 드러나는 결의 이상을 말하지 못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라 생각한다.

 

두려움만으로는 현실의 벽을 뛰어넘을 수 없다. 연대는 가장 절실한 사람들과 손을 잡는 것이라 배웠고 그렇게 생각한다. 앞서 가는 사람들과 손을 잡는 것은 연대가 아니다. 넘어지는 사람을 받치는 것(人)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의식적인 연대이다. 그렇게 의식적으로 손을 잡고 또 잡아야 국가와 자본에 맞서, 외려 그들을 버리면서 우리의 삶을 재구성할 수 있다.

  1. 나오미 클라인, 김소희 옮김, 『쇼크 독트린』, 살림Biz, 2008, 23쪽. [본문으로]
  2. 이병천 등은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1997년 위기와 구조개편을 통해 만들어진 신자유주의 수동혁명”이라 평가한다. 이들 정부는 영미식 스탠더드를 추종하는 시장개혁론을 내세우며 개방=선(善)의 등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투기자본인지 생산적 투자자본인지를 묻지 않고 무분별하게 외국자본을 유입시켰다(이병천 등 『세계화 시대 한국 자본주의: 진단과 대안』, 한울, 2007, 23~25쪽) [본문으로]
  3. 사토 요시유키, 김상운 옮김. 『신자유주의와 권력』, 후마니타스, 2014, 71쪽. [본문으로]
  4. 사토 요시유키, 앞의 책, 98쪽. [본문으로]
  5. 김성희, “세월호 대참사와 한국사회, 그리고 노동”, 김철, “박근혜정부의 안전규제완화 및 민영화 정책, 그 쟁점과 대안”, ‘민영화와 위험사회: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말한다.’ 자료집(2014.05.22) [본문으로]
  6. 민주노총 주최 ‘현장에서 바라본 세월호: 진단과 대안’ 토론회(2014.05.29) [본문으로]
  7. 땡땡책협동조합, 『우리, 노동자로 살아가다』, 땡땡책협동조합, 2014 참조. [본문으로]
  8. 김혜진, “사고는 어떻게 참사로 이어지는가?”, 세월호참사국민대책회의 존엄안전위원회 ‘참사를 막기 위한 출발선에 서다’ 토론회 토론문(2014.06.11) [본문으로]
  9. “손해배상에 따라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들은 자신이 가족과 친구에게서 존재감을 상실한 채 ‘쓸모없는 존재’로, 나아가 ‘민폐를 끼치는 존재’로 되어감을 실감하게 된다.”(엄기호, 『단속사회』(창비, 2014), 216쪽) [본문으로]
  10. 사이토 준이치, 윤대석 외 옮김, 『민주적 공공성』, 이음, 2009, 101쪽. [본문으로]
  11. 땡땡책협동조합, 『후쿠시마에서 살아간다』, 땡땡책협동조합, 2014 참조. [본문으로]

몇 년 전부터 사회의 공공성을 강화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여러 단체들에서 갈등이 터져나오고 있습니다.
지향하는 가치가 아름답고 올바르다고 해도 가치를 실현하는 방법이 올바르지 않거나 가치를 사업으로 만드는 의사결정과정이 민주적이지 않다면, 그 단체의 활동이 시민사회를 성장시키기 어렵습니다.

 

갈등한다는 사실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비온뒤에 땅이 굳듯이, 갈등이 잘 조절되고 해결방향을 잡으면 발전에 필요한 거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갈등이 생기고 난 뒤의 과정이 중요할 텐데요, 안타깝게도 지금까지는 그런 과정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로 문제를 제기한 활동가 개인이 단체를 나오거나 문제를 참으며 단체를 다니다보니 정작 문제를 낳은 단체들은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함께일하는재단>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시민의 성금으로 세워진 공익재단인데도 활동가들이 주요한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할 수 없고 비정규직으로 채용되고 있으며 재단의 공금이나 자원이 분명한 증빙자료도 없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문제를 바로잡기는커녕 내부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활동가들을 대량 징계하거나 계약만료를 이유로 해고하는 등 노조에 대한 사측의 탄압으로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재단을 떠났습니다. 소위 시민사회계의 원로나 명망가로 불리는 사람들이 재단의 이사장과 상임이사 등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데도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이런 재단이 10월에 사회적기업월드포럼(SEWF)이라는 행사를 개최한다니 국제적인 망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사태에 책임을 져야 할 상임이사는 재단 내부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민사회운동에 바친 공로를 인정받아 만해실천대상을 받았습니다. 이제 박근혜정부의 불통만을 답답해할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의 불통을 생각해야 합니다. 취약한 모래탑을 쌓으면서 시민사회의 미래를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다행히 <함께일하는재단>의 노동조합이 근 30개월 동안 힘겹게 싸우고 있고, 여러 시민사회단체들에서도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그 기세를 이어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홀로 내버려두지 말고 따뜻한 연대의 손길을 보내면 좋겠습니다.


9월 12일(금요일) 저녁 7시 그동안 공익단체들에서 어떤 문제들이 제기되었는지를 함께 알아보고 대책을 세우는 공익단체를 바로 세우기 위한 대책위원회를 제안합니다. 개인도 좋고 단체도 좋습니다. 같은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얘기를 나누고 사이를 돈독히 한다면 뾰족한 해답은 나오지 않더라고 공감을 확산시킬 수 있습니다. 명망가가 아니라 평범한 시민의 힘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점을 시민사회 내부에서부터 증명하면 좋겠습니다.


한국의 공익단체는 건강한가? & '바로' 출범식
일시 2014년 9월 12일(금) 저녁 7시
장소 인권중심 사람


19:00 개회 함께일하는재단 노동조합 김창주 위원장
19:15~20:00 사례소개 -함께일하는재단 사례 및 노조투쟁 경과보고
-평화박물관 등 사례 3개
20:00~21:00 토론 고질적인 병폐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토론 진행: 하승우(땡땡책협동조합)
21:00~21:30 바로선언 '바로'의 문제의식과 활동방향에 관한 논의

영화 <블랙딜>을 봤다.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간단했다. 민영화(民營化)는 시민에게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고, 기업과 그 시설과 서비스를 기업에 넘기는 권력층에게만 유리하다. 공중의 이익을 해치는 민영화는 사실상 사영화(私營化), 기득권을 가진 몇몇 개인들에게만 이득이 되는 검은 거래이다. <블랙딜>을 보면 그 점이 분명해진다.

 

영화에 공감하든 아니든 많은 사람들은 ‘그래서 어쩌라는 것인가’라는 물음 앞에 무기력함을 느낀다. 뭔가 세상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건 알겠는데 ‘그래서 우리가 뭘 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은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든다. 하물며 공공성(公共性)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앞에 두니 지금 당장은 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 같고 이 일이 내 일처럼 여겨지지 않으니 관심이 잘 가지도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신경을 쓰든 안 쓰든, 참여를 하든 하지 않든 어떤 결정은 내려지고 그 결정은 우리 삶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

 

민영화를 코앞에 둔 의료만 봐도 그렇다. 복지부가 입법예고한 의료법 시행규칙 개정안은 의료법인이 자회사를 만들어 영리사업을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 개정안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는 ‘의료민영화, 불편한 진실’이라는 동영상을 보면 잘 드러난다(http://www.youtube.com/watch?v=yTs5An6iUas). 그런데 이 결과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의 일이기 때문에 실감이 잘 나지 않는다. 설마 정부가 그런 일을 하겠어, 그래도 사람이 하는 일인데 그리 할까, 이런 생각은 두려움을 감소시키려는 우리의 바람이다. 하지만 세월호 사건에서 드러났듯이 정부는 그런 일을 하고 기업에게는 사람보다 이윤이 우선이다.

 

이런 파국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정부에 호소한들 지금의 정부는 시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병원에 호소한들 그들은 돈을 버는 사업에 열중할 것이다. 국가-시장-시민사회라는 구도로 현실을 이해한다면, 국가와 시장은 이미 한편이 되어 공공성을 무너뜨리려 하고 있다. 결국 시민사회가 함께 힘을 모아 국가와 시장을 압박해야 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

 

정부와 기업의 검은 거래를 막으려면, 일단 정부를 제대로 감시하지 않을까? 민영화가 검은 거래라면 돈을 주는 자와 돈을 받는 자가 분명히 있다. 법안을 추진하는 공무원이 누구인지, 뒤를 봐주는 정치인이 누구인지, 개정안을 근거로 사업을 준비하는 기업이 어디인지, 그 당사자들을 끈질기게 추적하고 이들에게 죄를 물어야 한다. 그래야 앞으로 일어날 민영화를 막을 수 있다. 이런 역할을 언론사가 마땅히 맡아야 하는데, 한국의 언론은 정부와 기업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고 있으니 그 역할을 가만히 앉아서 기대할 순 없다. 그러니 시민이나 시민사회단체가 자기 분야에서 진행되는 정책결정과정에 관심을 가지는 수밖에 없다. 공공성이라는 추상적인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구체적인 인물이니 그 인물들을 드러내어 검은 거래를 막아야 한다.

 

그리고 중앙정부만이 아니라 지방정부의 담당자들도 추적해서 책임을 지도록 만들어야 한다. 정책실명제를 확대하고 잘못된 정책의 효과에 대해서는 담당자들이 반드시 책임을 지도록 만들어야 하고, 공무원들이 퇴직 후 업무와 관련된 기업에 취직하는 ‘회전문 인사’를 막는 제도를 입법화시켜야 한다. 제도가 중요하지만 사람이 하는 일이니 관료들의 부패를 막는 장치를 강화시켜야 검은 거래를 줄일 수 있지 않을까?

 

또한 공공서비스라면 그 결정권한이 응당 주민과 시민에게 있어야 하는데, 이들이 부당하게 권한을 남용하는 것이니 관련된 정보를 공개하고 주민과 시민의 의견을 반드시 묻도록 제도화시켜야 한다. 진주의료원 폐원처럼 주민들이 반대하는데 도지사가 일방적으로 결정하지 못하도록 공공성과 관련된 주요사안은 반드시 ‘주민투표’를 거치도록 제도화시켜야 한다. 주민들에게 정보를 알리지 않고 밀실에서 결정된 정책들은 효력을 발휘할 수 없도록 법으로 규정해야 하지 않을까? 민주적인 공공성이란 함께 논의하고 결정할 때에만 실현될 수 있는 가치이기 때문에 그런 가치를 실현하도록 제도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아울러 민간기업의 부조리를 내부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장치는 노동조합이다. 정부기관에는 정보공개를 청구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있지만 민간기업의 내부정보에는 접근하기가 어렵다. 그런 내부정보를 다루고 공론화시킬 수 있는 기구는 현실적으로 노동조합이다. 그러니 노동조합이 기업 내에서 힘을 갖고 경영에도 참여할 수 있도록 제도화를 시키고 노동조합이 활성화될 수 있도록 시민사회의 힘을 모아야 하지 않을까? 독일의 노사 공동결정제도(Mitbestimmung)는 직장평의회(Betriebsrat)와 감독이사회(Aufsichtsrat)를 통해 노동자가 기업의 주요한 정책결정에 참여하도록 보장하고 있다. 한국에도 이런 제도가 실현되어야 경제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있다.

 

그리고 민간기업이라 하더라도 시민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업을 하고 있다면 관련 정보를 공개하도록 해야 한다. 내년부터 시행되는 화학물질 등록 및 평가에 대한 법률이나 유해화학물질 관리법은 기업이 지역주민에게 관련된 정보를 고지할 의무를 지우고 있다. 마찬가지로 이런 정보들을 시민이 확인하고 감시할 수 있도록 법적인 장치를 마련하도록 시민사회가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가장 중요한 것은 정부가 이런 법과 제도들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설령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여러 가지 단서 조항을 만들어 시민들의 활용을 막을 것이므로 정부나 기업에 맞서 싸우고 공통의 합의를 만들어가려는 시민들의 연대와 노력이 중요하다. 전국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싸우고 있다. 청도와 밀양의 송전탑, 제주도 강정마을의 주민들, 세월호 유가족, 쌍용자동차, 유성기업, 스타케미칼, 함께일하는재단의 노동자들, 식량주권을 지키려는 농민들, 손을 잡아야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일단은 이들과 적극적으로 손을 잡으려는 노력 속에서 공공성이 조금씩 실현되리라 믿는다.

 

이 사회의 기득권층이 아니라면 누구도 민영화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러니 우리 자신을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과 손을 잡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의 선거제도는 대의민주주의라 불린다. 그런데 정말 그러한가? 우리의 뜻은 대의(代議)되고 있는가? 지방의원, 단체장, 국회의원, 대통령은 우리를 대신해서 주요한 현안을 해결하고 대안을 마련하고 있는가? 권력은 적절히 나눠져서 서로 견제하며 균형을 잡고 있는가? 선출되는 공무원들은 우리를 대신해서 선출되지 않는 공무원들을 잘 관리하고 있는가? 이런 질문에 긍정적으로 답할 수 있어야 대의제 민주주의라 불릴 수 있다. 한국은 진정 대의민주주의 국가인가?

 

배가 침몰해서 많은 청소년과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정치인과 공무원들은 시민을 대신하기는커녕 책임을 떠넘기느라 바쁘다. 대의민주주의 국가라면 시민이 그런 무능과 실패의 책임을 물을 수 있어야 한다. 흔히 선거를 통해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얘기하는데, 정말 그러한가? 시민들의 분노가 권력을 바꿀 수 있는가?

 

비극은 우리가 그런 국가에 살지 않는데 그런 국가에 살고 있다는 착각에서, 그런 착각으로 현실의 폭력을 무기력하게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힘을 가진 자들은 이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우리 정치가 “못살겠다 갈아보자”, “갈아봤자 소용없다”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건 이 수준이 힘을 가진 자들에게 가장 유리하기 때문이다.


선거, 매번 똑같다.


선거(選擧)는 가려서 올린다는 뜻이다. 바꿔 말하면 선거를 통해 대표를 가릴 수 있어야 한다. 어떤 후보자가 다른 후보자보다 더 똑똑하고 능력 있는지를 가리는 게 아니라 정치무대에 올라가서 내 의견을 제대로 대리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지를 잘 살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매번 우리를 배신한다. 한참을 욕하다가 선거 당일이 되면 울며 겨자먹기로 투표한다. 최악이 안 되면 다행이고, 최악이면 술을 들이킨다. 정치하는 인간들도 이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시민의 가슴이 뛰길 원치 않는다. 그냥 표만 찍어주길 원한다. 니들이 찍지 별 수 있겠냐, 그런 똥배짱이다. 이런 구렁텅이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방법이 없다.

 

세월호 사건으로 지방선거 국면이 주춤하고 있다. 사실 정당공천을 하네, 마네로 많은 시간이 흘렀고, 한국의 특성상 지방선거는 중앙권력에 대한 심판론이 지배한다. 정책선거, 지역후보, 이런 건 그냥 말 뿐이다. 사실 지역당(local party)이 불가능하고, 지역언론도 제대로 없는 한국 현실에서 지방선거는 중심에 설 수 없는 변방의 선거이다. 당연히 지역의 중요한 현안도 논의되지 못하고 온갖 개발공약만 난무한다. 선거가 개발을 부르짖는 공약들을 부추기고, 삶이 나아질 것이라는 착각은 선거가 끝나면 주민들을 몰아내는 폭력으로 변한다.

 

그러니 선거를 민주주의의 꽃이라 부르는 건 아주 나쁜 일이다. 만약 선거에 참여하지 않으면 정치적으로 무관심한 사람일까? 아니, 한국에는 정치에 관심이 아주 많기 때문에 무관심해지는 사람들도 있다. 후보자들 중에서 가려서 뽑을 사람이 없는 건 유권자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하나가 아니다. 무수히 많은 민주주의‘들’이 있다. 당연히 선거제도도 여러 가지이다. 어느 하나가 잘 안 되면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 하는데, 그게 민주주의인데 새로운 투표방법이나 대표자 선출방식을 도입하는 건 한국사회에서 불가능에 가깝다. 심지어 우리는 투표를 하자는 투표독려행위까지 법으로 금지하려는 나라에 살고 있다.

 

정치판이 변하지 않는 데에는 우리의 ‘이율배반’도 한 몫을 한다. 우리는 후보들이 우리 의견을 대변해주기를 ‘내심’ 기대한다. 그런데 표가 보이면 어디든 달려갈 것 같은 사람들이 우리 편에는 거의 오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가 자신들을 찍지 않을 것이라 믿는 합리적인 행위자이다. 당연히 오지 않을 사람들을 바라보며 화를 내는 우리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선거 이후를 바라보자!


선거도 중요하지만 선거 이후가 더 중요하다. 정책이 중요한 것도 그 때문이다. 정책을 보자는 것은 후보자나 선거캠프가 얼마나 똑똑한지를 확인하려는 것이 아니다. 선거 이후에 뭘 하려 하는지를, 그것을 통해 좋은 삶이 가능한지를 따져보자는 거다. 이 편, 저 편을 나누는 목소리에서 사라지는 건 정책이고 선거 이후이다. 여야 할 것 없이 말들의 잔치이고 이후를 얘기하지 않는다.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이 되지 않으려면 그 공약을 뜻으로 밀고 나가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사람 한 명 달랑 당선된다고 정책결정이 내려지는 구조는 바뀌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언제나 선거‘까지’만 얘기한다. 사실 선거를 통해 어떤 새로운 관계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끝나는 순간 선거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기성 정치인들이 선거를 통해 진심이든 뻥이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면, 새로운 정치를 바란다는 우리는 늘 익숙한 사람들 사이를 헤맨다. 당연히 구조는 바뀌지 않는다.

 

한진중공업이나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복직을 하더라도 기업의 주인으로 복귀하지 않는 이상 비극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제 손으로는 아무 것도 생산하지 못하는 자들이 노동하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자신들이 ‘주인’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이 굴욕을 감수하고 공장에서 일을 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외국이 자신들의 천국일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기에 그들은 국내에서 세게 나가고 공권력을 포섭한다. 그리고 어떻게든 노동자들이 단결할 수 있는 노조를 깨려고 한다.

 

마찬가지이다. 이제 당신들의 대한민국이 아니라 우리들의 대한민국을 살겠다고 결의할 수는 없을까? 노동자가 기업의 주인일 수는 없을까? 다른 나라, 다른 기업을 만들어 우리끼리 재밌게 살면, 그들도 좀 머리를 숙이지 않을까? 맨 날 제왕적 대통령제라 욕하면서 대통령 제도를 바꿀 생각을 하지 않는 태도를 버리고 헌법 자체를 뜯어고칠 수는 없을까? 검사나 판사, 공무원들을 또라이라고 욕하면서 그 또라이들에 의지하려 하지 말고 그들의 역할을 축소시킬 수는 없을까? 우리가 정당을 만들 수는 없을까? 경찰이 깡패라고 욕하지 말고 경찰서장을 우리 손으로 뽑을 생각을 할 수는 없을까? 선거 이후를 보며 칼을 벼리는 정치는 불가능할까?

 

민주주의는 민중이 좋은 정치인이나 정당을 뽑거나 민중의 목소리가 반영되는 것이 아니다. 민중이 권력을 가져야 민주주의이다. 민주주의는 민중을 위하는 정치인이 아니라 민중과 함께 할 정치인을 필요로 한다. 그렇게 하려면 정당이 아니라 우리가 조직화되어야 하고, 그런 관계맺음에서 민주주의가 살아날 수 있다. 선거판을 보며 던지는 질문이 바뀌지 않는 이상 우리의 삶도 바뀌지 않을 것 같다. 우리의 질문을 바꾸고 우리의 행동을, 우리의 삶을 바꾸자.

 

2011년 3월 일본 후쿠시마현의 원자력발전소가 폭발했다. 3년이 지난 지금도 사고현장에는 사람의 접근이 금지되고, 내부상황에 대한 보도는 통제되고 있다. 원자력발전소 사고로 엄청난 양의 방사능이 대기에 노출되었고, 국내의 버섯과 녹차에서 세슘이 검출되고 있다. 그리고 원자로를 식힌 바닷물이 다시 바다로 매일 수백 톤씩 쏟아지면서 수산물에서도 방사능이 검출되고 있다.

 

옥천은 일본 원자력발전소 사고에서 비교적 안전한 곳이다. 그리고 한국의 원자력발전소들이 대부분 바닷가에 있기 때문에 한국의 사고에서도 비교적 안전하다. 그래서 옥천 주민들은 이런 문제에 비교적 관심을 쏟지 않았다.

 

그런데 실상을 따지면 그렇게 안심하기 어렵다. 원자력발전소는 아니지만 대전에는 우라늄을 가공해서 핵연료로 만드는 한국원자로연구소가 있다. 원자력발전소에서 사용하는 연료들 대부분을 이곳에서 가공한다. 그리고 대전의 한국원자력연구원 안에는 정부나 병원 산업체에서 사용되고 남은 폐기물을 보관하는 방사능폐기물관리공단이 있고, 연구를 위한 원자로도 가동되고 있다. 한국원자력연구원과 옥천읍까지의 거리는 20km를 조금 넘는다. 보통 발전소 사고가 일어나면 원전 반경 20km 내의 주민들은 긴급대피된다. 그리고 후쿠시마 사고 이후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원전 반경 30km로 긴급보호조치계획을 확대할 것을 권하고 있다. 그러니 대전에서 사고가 나면 옥천도 긴급대피구역에 포함된다. 그런 일이 없어야 하겠지만 만일 사고가 터진다면 옥천도 이 끔찍한 재앙에서 자유롭지 않다.

 

더구나 충청남도 금산에는 우라늄 매장지역이 있다. 작년에 이 광산을 개발하려다 주민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는데, 우라늄 가격과 사용량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개발시도는 계속 있을 예정이다. 우라늄 광산이 개발되면 방사선이 유출되고 광물찌꺼기가 주위를 오염시키기 때문에, 보통 주거단지와 멀리 떨어지게 한다. 다른 나라의 경우 광산과 주거지가 가장 가까운 거리는 65km인데, 금산과 옥천의 거리는 그보다 훨씬 가깝다. 그러니 광산개발 문제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 볼 수 없다.

 

원자력과 방사능만이 아니다. 2013년 국립환경과학원이 발표한 「2011년 전국 화학물질 배출량 조사결과」에 따르면, 전국 발암물질 배출량 총 7921톤 중 충청북도가 3109톤(전체의 39.3%)으로 전국 1위를 차지했다. 청주의 오창공단에는 발암물질을 배출하는 공장들이 주택가에 버젓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청주 지역의 유해물질을 다루는 공장에서는 끊임없이 화재가 폭발사고가 벌어지고 있다. 또한 충북발전연구원이 2013년에 발표한 「충청북도 유해화학물질 위험성 완화방안」보고서에 따르면, 옥천에도 유독물질과 발암물질을 다루는 기업이 있다.

 

이런 상황이기에 옥천군민이 안전하다고 믿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방사능이나 화학물질은 공기 중으로 빠르게 퍼진다는 점에서 관리하기 매우 어려운 물질이고 또 위험한 물질이다. 이런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2013년 중앙정부도 화학물질관리법을 전면 개정하고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다. 그리고 충북도청은 청주권역에서 실시하고 있는 화학물질 배출을 줄이는 SMART 프로그램을 충북 전체로 확대할 계획이다. 옥천군은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을까? 현재까지의 논의과정을 살펴보면 그런 계획을 찾기 어렵다.

 

옥천은 수질보전을 위해 개발이 제한되고 관리되는 청정지역이지만 주위에는 많은 위험요인들이 있다. 그러니 나와 가족, 지역의 안전을 마냥 다른 사람의 손에 맡겨놓을 수는 없는 상황이다. 따라서 중앙정부나 지방정부가 운영하는 계획에만 의존하지 말고 주민들이 관심을 가져야 하고, 행정구역상 우리 지역은 아니더라도 주의를 기울이며 다른 지역 주민과 연대해야 한다. 그래야 안심하며 살 수 있다.

옥천군의 재정상황을 보자. 2013년 8월말 옥천군의 재정공시에 따르면, 2012년 세금수입은 3천 777억원, 세금지출은 2천 979억원이다. 지방정부 자체수입을 기준으로 삼는 재정자립도는 18.1%로 2012년 전국의 군 단위 재정자립도가 16.4%이니 나쁘지 않다. 더구나 지방정부가 사용처를 정할 수 있는 예산을 기준으로 삼는 재정자주도는 71.7%로 높은 편이다. 옥천군의 자체 수입은 적지만 국비나 도비로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있다.

 

문제는 국비나 도비를 받으려면 중앙정부나 충청북도의 사업계획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이다. 즉 지역의 기획과 힘이 아니라 외부의 계획과 재원에 따라 옥천군의 주요 사업이 결정된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국비나 도비를 받는 사업들은 언제나 지방정부가 그에 상응하는 돈(매칭 펀드)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즉 국비나 도비를 받으려면 지방정부도 그만큼 투자를 해야 한다. 이 점을 고려하지 않으면, 일방적으로 돈을 지원받는다고 착각하게 된다. 그러다 중앙정부나 광역자치단체가 중간에 사업을 변경하면 기초자치단체가 말 그대로 ‘독박’을 쓰기도 한다. 실제로 강원도의 어느 기초자치단체는 사업의 실패를 알면서도 지원받은 국비를 다 쓰기 위해 불필요한 예산을 집행하는 기이한 일을 벌이고 있다.

 

악순환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데, 자기 돈이 부족한 지방정부가 재원을 조달하기 위해 지방채를 발행하기도 한다. 주민과 법인이 내는 지방세가 지방정부의 재정인데, 지방채는 지방세를 담보로 발행하는 채권, 즉 빚이다. 안전행정부의 ‘2012년말 지방채무 현황’에 따르면 옥천의 채무는 200억원으로 예산대비 채무비율이 6.0%이다. 인근의 영동군은 0.9%이고, 옥천군은 충청북도 기초자치단체 중에서 청주시(12.0%)를 제외하면 가장 높은 수준이다. 이 높은 비율은 옥천군이 2011년까지 산업단지와 농공단지를 조성하기 위해 약 200억원의 지방채를 발행한 것과 연관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2018년 완공을 목표로 488억원을 투자하는 제2의료기기 산업단지 조성사업이 곧 시작된다. 이 사업은 옥천군과 주민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한흥구 부군수는 2013년 11월 《충북일보》에 제 1단지가 100% 분양되고 959억원의 투자를 유치하고 940명의 고용을 창출했다고 썼는데, 실제로 그런지 꼼꼼하게 따져봐야 한다. 사실 기업이 투자한들 그건 기업의 자산이고 그 과정에서 많은 세금이 공제된다. 의료단지에 입주하는 기업들은 법인세와 소득세, 취득세, 재산세를 감면받고 물류비와 오폐수처리비용 등 온갖 지원을 받는다. 실제로 옥천군은 지난 5년 동안 기업들에게 133억원의 지방세를 감면했다. 투자가 유치되는 만큼 걷지 못하는 세금이나 세금지출도 늘어나는 셈이다. 그리고 실제로 940개의 일자리가 새로 만들어졌는지도 따져봐야 하겠지만 그 중 옥천주민이 일하는 곳은 얼마나 될까? 옥천의 물류창고업이 옥천군민의 일자리가 되지 못하는 점을 감안하면, 이조차도 미지수이다.

 

사실 의료기기 산업단지는 옥천군만이 아니라 충청북도가 함께 추진하는 사업이다. 제 2의료단지 사업을 충북개발공사가 맡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지방선거로 충청북도의 사업방향이 바뀌면 자연스럽게 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왜 산업단지를 지어야 할까?

 

이런 상태에서 지역주민들의 여론도 반영되지 않고 관련된 정보도 공개되지 않는다. 작년 5월에 완료되었다는 단지조성 타당성 용역보고서도 비공개 상태이다. 그리고 1단지에 새로 들어왔다는 기업들이 어떤 화학물질을 사용하고 지역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도 알 수 없다. 옥천군의 많은 토지는 환경정책기본법에 따라 수질보전지역으로 묶여 있어 유해물질의 영향을 적게 받는 편이지만, 정보가 공개되지 않으니 알 수 없다. 그러니 주민들은 불안해할 수밖에 없고, 군민들은 그 효과도 분명하지 않은 의료단지를 더 큰 규모로 짓겠다고 하니 걱정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대규모 단지를 만들고 외부기업을 유치해서 지역경제를 살리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2011년 3월 11일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는 끔찍했다. 머리로는 핵발전소의 무서움을 알고 있었지만 눈앞에서 재앙이 펼쳐지니 머리가 멍해졌다. 1986년 소련의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는 이미지로만 다가와 느낌이 없었는데 후쿠시마의 사고는 달랐다. 내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곳에서 벌어진 사고는 팔짱 끼고 관전할 일이 아니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 사고를 계기로 ‘탈핵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늘어난 만큼 핵발전소나 방사능에 대한 정보의 양도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후쿠시마에서 날아오는 방사능 물질, 해류를 타고 퍼지는 방사능 물질, 버섯이나 생선에서 검출되기 시작한 세슘, 아스팔트에서 검출된 방사능 등 여기저기의 정보들은 탈핵운동에 대한 관심을 확산시켰지만 다른 한편으론 시민들의 공포심을 계속 자극하기도 했다. 나도 그랬다. 오뎅을 즐겨 먹는지라 이 오뎅의 재료는 어디서 왔을까, 수산물은 괜찮나, 이런 걱정만 계속 늘었다. 사실 먹는 것만이 아니라 삶 자체가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데, 어찌할 수 없는 큰 것보단 작은 것에 대한 걱정들만 자꾸 늘어났다.

나만 그런 건 아니었다. 핵과 방사능을 걱정하는 사람들은 늘어나고 있지만 우리 사회는 한치도 변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에도 이명박 정부나 박근혜 정부는 핵발전소를 계속 짓겠다는 계획을 밝히며 송전탑으로 전국을 도배하고 있다. 국토 면적 대비 핵발전소 밀집도가 세계 1위인 한국, 핵발전소 보유 개수가 세계 5위인 한국, 끊임없이 핵발전소 사고가 일어나고 있는 한국에서 우리는 대체 어떤 삶을 기획하고 있는 걸까?

많은 시민들이 관심을 쏟아도 공사는 중단되지 않는다. 공권력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포악하고 염치없는 상황들이 이어져도 딱히 대안은 없다. 그들은 너무나 잘 안다. 자신들에게 힘이 있다는 것을. 뭐, 국정원이 대통령선거에 개입하고 증거를 조작해 간첩사건을 만들어도 ‘아, 그런 일이 있었구나’라며 넘기는 쿨한 국민들이 사는 나라. 너무 많은 사건들이 터져서일까? 이제 어지간한 사건이 아니면 관심조차 못 받고 사라진다. 이러니 힘을 가진 자들은 언제나 시간을 질질 끄며 망각의 순간을 기다린다.

그렇지만 핵은 삶과 직결된 문제이다. 사고가 터지면 4년이나 5년 뒤에 보자고 말할 새도 없이 한 지역이 폐허로 변하고 수많은 생명들이 그 영향을 받는다. ‘뒤’가 없다는 점에서 핵은 인류가 직면한 완전히 새로운 공포인데, 문제는 경험이 없기에 그 결과를 예감할 수 없다는 점이다. 핵발전소 사고가 나거나 핵폭탄을 실험했던 수많은 곳에서 벌어졌던 일들은 지금도 공유되지 않고 과학의 장벽에 막혀 있다. 그러다보니 생각은 있지만 느낌은 없어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렇다, 절실함이 없다.

불량부품들로 삐거덕거리며 움직이는 핵발전소들과 버릴 곳 없이 계속 쌓이는 핵폐기물, 여기저기서 들리는 사고 소식들. 방사능 유출이나 일본산 수산물에 대한 공포는 확산되고 있지만 정작 우리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무관심한 사람들이 많다. 사실 솔직하게 얘기하면 핵사고는 이미 진행 중이지 않은가. 불량부품들로 작동되는 원자로와 그 위험한 곳에서 방사능에 노출된 노동자들, 핵발전소 근처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는 주민들, 그들에게 핵사고는 다가올 사건이 아니라 ‘이미 벌어진 사건’이다. 하지만 우리 눈에는 그들이 보이지 않는다. 영화 《변호인》을 본 사람이 천 만명을 넘어도 눈 앞의 간첩조작사건에 분노하며 정권을 무너뜨리지 못하는 건 생각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우리는 아직 절실하지 않다.

후쿠시마 이후 한국사회가 변하고 있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여러 노력들은 보이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하다고 답하련다. 인간의 노동을 통하지 않고서 어떻게 핵발전이 가능하며, 지금의 산업구조를 볼 때 핵발전을 통하지 않고 어떻게 경제성장이 가능한가? ‘전력=산업화’라는 등식에서 우리는 핵발전과 자본주의의 밀접한 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 경제가 계속 성장하길 기대하는 사회, 그러기 위해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를 눈 감아 주는 사회에서 탈핵은 불가능하다. 노동자들이 계속 죽어나가는 삼성전자, 노동자의 노동을 분단위로 쪼개어 착취하는 삼성전자서비스사가 성장하는 사회, 온갖 화학약품에 노출된 노동자들이 고통을 겪는데도 친환경 상품을 수입하는 소비자들의 사회는 비정상이다. 이런 사회를 유지시키는 대통령이 비정상성의 정상화를 떠드는 사회야말로 정말 비정상이다. 그렇지만 이런 비정상성을 끝내려는 용기를 낼 만큼 우리는 절실하지 않다.

어느 순간 우리는 ‘나는 괜찮을 거야’라고 속삭이는 내부의 망명객이 되었다. 이 사회에 살고 있지만 우리는 이 사회를 등지고 있다. 허나 내가 ‘잠시’ 사회를 등졌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외려 사회가 우리를 등지고 있다. 자기 노선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추방하고 배제시킨다. 그러니 대안은 우리도 국민이라고 외치는 게 아니라 이 뻔뻔한 사회를 갈아엎는 것이다. 고전적인 혁명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혁명이 불가능하다거나 의미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한치 앞도 모르는데 미래를 어떻게 다 구상하고 시작하나. 뭔가 분명하지 않지만 일단 용기를 내어 일어서 보자는 것이다. 이 사회에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일들 중 하나 이상을 그만두며 저항을 해보자는 거다.

그리고 탈핵은 우리만 잘 한다고 되는 일도 아니다. 일본은 핵발전 중단 상태이나 언제 다시 가동할지 모르고,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는 중국은 엄청난 수의 핵발전소를 세울 계획이다. 그렇게 되면 한반도는 빽빽한 핵발전 단지의 중심에 놓인다. 방사능만이 아니라 황사와 미세먼지가 알려주듯, 우리는 이미 연결된 삶을 살고 있다. ‘한중일 시민사회가 연대해야 한다’는 당위적인 주장을 넘어 사람들이 직접 손을 잡고 이야기를 나누는 기회가 늘어나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대안일 수 없다. 그런데 한국은 그럴 준비가 되어 있나? 일본, 중국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민족주의의 불길에 휩싸이는 한국은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기억과 연대를 혼동하는 순간 대안의 힘은 사그라진다. 손을 내밀길 기다리지 말고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 그래야 미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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