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연구소 창'이 주관하는 철학과 인권 세미나(http://www.khrrc.org/index.php)에 참여하며 미국의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글을 다시 읽고 있다. 아렌트는 유대인이라는 신분으로 1, 2차 세계대전을 몸소 겪었고, 미국에서 흑인민권운동과 베트남전쟁 반대운동이 한창이던 60년대말, 70년대 초의 정치상황을 관찰하기도 했다. 아렌트가 말한 '권리를 가질 권리(the right to have rights)'라는 개념이 현대적인 인권 개념의 재구성과 관련해 주목을 받고 있다.


아렌트가 인권을 자기 철학의 핵심주제로 다루지는 않았지만(아렌트는 인권보다 시민권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이탈리아의 철학자 지오르지오 아감벤이 아렌트의 인권 개념을 비판하며 자기 얘기를 꺼내면서 아렌트의 사상이 자연스레 인권의 주제로 옮겨진 듯하다. 그런데 아렌트의 인권개념을 논의하는 방식이 아렌트의 사상 전체를 살피고 그 속에서 인권개념을 논의하는 자연스런 과정을 따르고 있지는 않은 듯하다. 그래서 인권활동가나 인권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아렌트의 여러 책을 함께 읽으며 그 개념의 흔적을 찾아보는 세미나를 하고 있다.

그와 관련해 아렌트가 쓴 [공화국의 위기]를 읽고 있다. 이 책은 60, 70년대 미국사회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글인데, 현재 우리사회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과도 맞닿아 있는 듯하다. '시민불복종'이라는 글에서 아렌트는 당시 베트남전쟁을 반대하던 양심적 병역거부운동과 흑인민권운동을 벌이던 시민불복종운동을 다룬다. 아렌트는 어떤 정치적 의견이 공동체 내에서 소통되며 사람들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것을 정치라 보고 그런 소통과 관계의 장을 보장하는 것을 권력의 역할이라 봤다.

아렌트는 어떤 사안을 개인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것을 경계하는데, 가령 양심적 병역거부는 법을 어기는 행위의 정당성을 개인의 양심에서 찾기 때문에 정치적인 사안을 비정치적인 문제로 환원시킨다. 그러다보니 어떤 개인의 양심과 다른 개인의 양심이 충돌할 때(아렌트의 표현을 빌리면 흑인의 권리를 주장하는 킹 목사의 양심과 미시시피의 인종주의자의 양심이 충돌할 때), 그 주장은 타당성을 가지기 어렵다. 더구나 그런 양심이 정당화되려면 그 사람이 선과 악을 근본적으로 구별하는 능력을 가져야 하는데, 그런 능력은 자연적으로 타고날 수 없다. 이런 점 때문에 아렌트는 양심적 병역거부가 사회적인 인정을 받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고 봤고 그 근거를 양심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에서 찾기를 바랬다.

양심적인 거부자와는 달리 불복종 시민은 한 집단의 성원이며 싫든 좋든 이 집단은 자발적 결사를 이루는 것과 같은 정신에 따라 형성된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 논의에서 가장 큰 오류는 우리가 개인들―그들은 자신을 주관적이며 양심에 따라 사회의 습관과 법에 도전한다―을 다루고 있다는 가정이다.


아렌트는 양심적 병역거부와 시민불복종을 구분하면서 시민불복종을 중요한 정치행위로 바라본다. 왜냐하면

불복종 시민의 실상은 조직된 소수집단이며, 공동이익이라기보다는 공동의견에 의하여 결합되어 있고, 정부의 정책이 다수에 의해 지지받을 것을 알 경우라도 그 정책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에 서리라는 결의를 갖는다. 그들의 일치된 행동은 그들의 일치된 의견에서 나온다.
시민불복종은 자신의 행위가 현재의 법질서를 해치거나 다수의 상식과 반대될 것이라는 점을 알면서도 여러 시민들이 힘을 모으는 정치행위이다. 특히 정상적인 방식으로는 법질서의 변화를 기대할 수 없거나 정부가 적법하고 올바르게 행동하지 않고 음모를 꾸밀 때에, 시민불복종은 변화를 이룰 유일한 수단이다. 아렌트는 당시 미국사회가 이런 상태(정부가 통킹만 사건을 조작해 베트남전쟁을 벌이고 정보기관이 은밀히 활약하는)였다고 보고 시민불복종 행위를 미국의 건국행위만큼 중요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미국의 건국행위란 따져보면 식민지 질서를 뒤엎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기 위한 시민불복종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시민불복종은 공개적으로 법에 도전하기 때문에 일종의 딜레마를 가진다. 사회가 유지되고 정치가 이루어지려면 그 경계를 짓는 법이 필요한데, 시민불복종은 그 법의 경계를 넘어서려 하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아렌트는 법조문보다 법의 정신이 중요하고 준법정신이 입법자의 태도를 가질 때, 즉 내가 곧 법을 제정하는 사람이자 스스로 그 법에 복종하는 사람(인민주권이라고 해야 할까)일 때 가능하기 때문에 시민불복종이 정당하다고 본다. 특히 새롭게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들은 자신이 합의하지 않은 그 사회의 질서에 도전하고 문제를 제기할 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불복종은 피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아렌트는 그런 불복종이 약속과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사람의 행동이란 예측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서로 간의 합의와 약속이 필요하다. 따라서 시민은 불복종을 하는 만큼 자신이 시민으로서 따를 수 있고 따라야 하는 것을 약속하고 그 약속을 지켜야 한다. 

이 글에서 흥미로운 내용은 시민불복종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판단을 법률가들에게 맡기면 안된다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법률가들은 이런 시민공동체의 중요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집단적인 행동을 개인의 범죄행위로 다루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불복종 시민을 한 집단의 성원으로 인정하기보다는 법정에서 피고가 될 개인적 범법자로 간주하기가 훨씬 쉽기 때문이다. 개인에 대한 정의의 할당에는 관심을 가지면서 다른 모든 것―피고는 다른 자들과 함께 뜻을 하며 법정에서 그를 진술하려 한다는 여론이나 시대정신(Zeitgeist)―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이 재판절차의 위풍이다.
법은 법에 대한 불복종을 정당화시키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아렌트는 시민불복종의 권리가 자유로이 단체를 만들 권리(결사의 권리)와 맞닿아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정치제도는 불복종하는 시민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자유로이 단체를 만들도록 보장해야 한다. 아렌트는 로비스트들이 정부에 영향력을 미치는 만큼 시민불복종하는 단체들이 압력단체를 만들어 정부를 압박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미국 헌법 제 1조가 보장하는 결사의 권리가 현실에서 제대로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미국이 위기에 빠졌다고 아렌트는 분석한다.



이런 분석은 지금 한국 현실과도 맞닿아 있다. 이 사회가 정상적인 방식으로는(요즘은 이런 방식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럽지만) 자신의 주장을 더이상 받아주지 않는다고 여긴 시민들이 곳곳에서 촛불을 들고 저항하고 있다. 정부는 이 저항을 법으로 가로막으려 하지만 아렌트가 얘기하듯 촛불시민들의 불복종 행위에 대한 판단은 법원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정치행위는 기존의 정치질서가 가진 문제점 때문에 비롯된 것이고 시민들은 불복종의 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과제들이 비정치적인 방식으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의 정치위기는 아주 심각하다.

국회의원이나 관료들이 중요한 사회적 의제들을 자꾸 법원으로 가져가서 해결하려 하는데, 그것 역시 심각한 문제이다. 기본적으로 법원은 그 의제를 사회와 소통하지 않고 스스로 판단을 내리려 하기 때문에 공동체의 문제를 다루기에 적절하지 않은 기관이다. 그리고 그 사법적인 판단의 잣대는 이미 낡은 것으로 새로이 나타나는 것을 규정하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또한 한국의 사법계는 민주적인 방식으로 충원되지도 않고 그 작동과정 역시 민주적이지 않다(최근에는 아예 대놓고 판결에 개입하기도 하니).

아마도 이명박 정부는 이런 정치의 위기를 더욱 심화시킬 게 뻔하다. 시민불복종의 권리는 짓밟히고 그와 함께 결사의 권리, 공동체의 시민으로서 자신의 주장을 펼칠 단체를 자유로이 만들 권리도 무기력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어쩌면 이제 저항은 아주 근본적인 수준으로 진행되어야 할지 모른다. 권력이 정치를 포기하고 시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때, 저항은 건국행위 수준의 정치행위를 지향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단순히 법에 복종하지 않고 정부에 저항하는 것만이 아니라 이 사회의 사람들이 맺을 새로운 약속, 새로운 결사들을 만들며, 그들의 국가를 버리고 우리들의 공동체를 조금씩 만드는 노력이 필요하다. 비폭력 불복종의 정신이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려는 노력으로 터져나와야 한다.

공동체가 무기력하고 정치가 왜곡되었으니 그것을 버릴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정치를 구성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제 개인으로 흩어지지 말고 새로운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권리를 만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그런 정치행위는 국가가 보장하는 시민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응당 누려야 할 근본적인 조건이다.
군것질의 추억
음식으로 맺는 인간관계 점점 단절… 함께사는 행복세상만들기 고민할때
2009년 03월 20일 (금) 하승우webmaster@kyeongin.com
   
 
   
 
찬바람이 부는 초봄, 지하철역을 나서다 김을 모락모락 피우는 오뎅이나 떡볶이를 보면 잠시 망설이게 된다. 잘 구워진 풀빵이나 호떡을 봐도 꿀꺽 침을 삼키게 되는 걸 보면, 어릴 적이나 지금이나 군것질의 잔재미는 강력한 유혹이다.

그런데 그 강한 유혹을 견디며 망실이게 되는 건 저 오뎅이나 호떡의 재료가 무엇일까라는 궁금증 때문이다. 중국산 재료나 미국산 쇠고기가 식탁을 차지해버린 시절에 거리에서 파는 군것질 재료들이 국산이기를 기대하는 건 지나친 욕심일 것이다. 사람이 먹어서는 안 되는 물질들이 중국산이나 수입 재료들에 섞여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출처를 모르는 음식을 꺼리며 불안함에 빠져든다. 그러다보니 정겹고 유혹적인 군것질거리들은 점점 추억으로 밀려나고 있다.

그렇게 밀려나는 게 단지 추억만일까? 예전에는 먹거리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이어주는 중요한 소재였다. 새로운 곳에 이사를 가면 이사떡을 돌리고, 맛난 음식을 장만하면 동네 사람들과 나눠 먹는 풍습은 먹거리에 담긴 관계성을 잘 알려준다. 그리고 음식을 먹기 전에 한 점 떼어 고수레 외치며 버리는 행위는 사람만이 아니라 자연의 뭇 생명들과도 먹거리를 나누고 관계를 맺는 방식이었다.

어떤 생명도 먹어야 살 수 있다는 보편성은 음식이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고 이미 맺어진 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역할을 맡게 했다. 어릴 적 군것질을 즐긴 것도 단지 그것이 먹을 것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군것질을 하며 사람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오뎅이나 떡볶이를 사가면 뜻밖의 먹을 것에 즐거워할 친구나 가족 등이 떠오르곤 한다. 이렇게 보면 나눠 먹을 음식이 사라진다는 것은 불안을 넘어 고립과 고독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경제논리나 통계수치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은 이런 고립과 고독을 합리적인 것으로 여길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미 세상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그런 관계가 거짓일 뿐이라며 자기 살길이나 잘 닦으라고 충고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지만 우리는 언제나 외롭다. 주말이면 모든 텔레비전 채널이 가족적인 느낌으로 가득 채워지는 건 우리가 외롭기 때문이다. 전혀 다른 사람들이 '가족처럼' 행동하는 걸 보며, 서로가 서로를 돌봐주는 패밀리의 이야기를 보며 우리는 자신의 고독함을 달랜다. 그리고 집에 앉아 자신과 비슷한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로 웹서핑을 하며 우리는 고립감을 달랜다.

그러나 그런 일시적인 달램이 일상적인 관계를 대체할 수는 없다. 현실의 고립을 그런 가상의 관계로 달래고 있는 우리 모습이야말로 참으로 어리석다. 대문 밖만 나서면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된 현실, 타인에 대한 사소한 친절이나 관심이 범죄의 소재로 변해버린 현실에서 우리는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옆자리에 앉은 누군가가 친절하게 먹을 것을 나눠도 그것을 선뜻 받지 못할 뿐 아니라 그 사람의 선의(善意)조차 의심하는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기 때문이다. 홀로 살아갈 능력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그런 사회가 천국이겠으나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야 하는 다수의 사람들에게 그런 사회는 지옥이다.

이런 사회에 살면서도 과연 우리가 삶의 안정과 행복을 논할 수 있을까? 더구나 이런 고독과 고립이 파괴하는 것은 우리의 행복만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미래를 다룰 정치마저 파괴한다. 서로 반가이 만나며 전체 공동체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토론하는 과정인 정치는 이런 현실에 뿌리를 내릴 수 없다. 마치 쇼핑하듯 자신의 고립된 욕망을 채워줄 정치인에게 투표할수록 관계가 만드는 공유의 영역이 파괴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아마도 우리 아이들은 이제 군것질과 같은 사소한 삶의 재미들을 더 이상 즐길 수 없게 될 것이다. 스스로의 선택이 아니라 우리가 만든 이 고독한 세계 때문에.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얼마 전 캐나다의 언론인 나오미 클라인이 쓴 『쇼킹 독트린』이라는 책을 읽었다. 전 세계의 재난 현장을 돌아보고 주민들을 인터뷰하면서 이 학자는 위기가 권력을 독점시킨다는 다소 충격적인 결론을 내린다. 가난하고 약한 대다수 사람들이 쓰나미나 전쟁같은 재난으로 고통을 겪는다면, 소수의 기업과 정치인들은 그런 재난으로 이득을 취하며 더욱더 배를 불리고 있다. 저자는 정치와 경제, 공과 사의 경계를 뛰어넘어 권력을 독점하는 이 세력을 ‘재난 자본주의 복합체’라고 부른다.

이 책은 한국도 사례로 다룬다. 1997년 IMF로 쇼크를 경험한 한국정부는 경제규칙을 바꿔 다국적 기업이 한국을 마음껏 유린하게 했다. 그 결과 실업률은 2년 동안 세 배나 늘었고 많은 산업시설과 노동력, 자원이 외국회사로 넘어갔으며 자살률은 두 배나 증가했다. 저자는 이 모든 불행이 우연한 사고보다 의도적인 공격과 약탈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그런 상황에서 진행된 금모으기 운동은 ‘저질게임쇼’였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만약 나오미 클라인이 지금 한국을 방문한다면 어떻게 분석할까? IMF를 거치며 위기에 대비하기는커녕 우리 사회는 더욱더 위기에 취약해졌다. 식량자급률이 24%에 지나지 않고 에너지의 97%를 수입해야 하는 사회, 환율과 주가가 널뛰기를 하는 사회, 좋은 일은커녕 제발 더 나쁜 일만 생기지 않기를 기대하는 게 지금 우리 모습이다. 그런데도 정부가 얘기하듯이 모두가 어렵고 힘드니 조금만 더 버티면 우리 삶이 나아질까?

일단 모두가 고통스러운 것 같지는 않다. 보도에 따르면, 삼성, 현대차, LG, SK, 국내 4대그룹의 2008년 매출이 사상 처음으로 500조원을 넘어섰다고 한다(매출 1위 삼성은 220조원으로 2위 현대차의 110조원을 2배나 앞섰다). 그것도 2007년의 473조원에 비해 약 62조원이 늘어났으니 엄청난 성장이라고 얘기할 수 있다. 이 어려운 시기에 기업매출이 늘어났으니 축하할 일일까?

하지만 4대 기업이 전체 매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건 결코 한국에 긍정적이지 않다. 경제의 규모와 영향력이 몇몇 재벌들에게 집중되는 건 소수가 지나친 권력을 가짐을 뜻하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의 재벌들은 그런 권력을 이용해 경영권을 세습하고 부정과 비리를 저질러 왔기에 그런 집중은 매우 위험하다.

지금껏 알려진 것만으로도 삼성의 이건희 회장은 조세포탈 혐의로, 현대차의 정몽구 회장은 회사돈을 횡령하고 계열사에 피해를 입힌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LG그룹의 구본호는 주가를 거짓 공시해 부당이득을 취한 혐의로 구속되었고, SK그룹의 최태원 회장은 분식회계와 부당내부거래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렇게 비리와 부정의 온상인 기업들이 엄청난 권력을 가지고 있으니 우리는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셈이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재벌들은 일자리 창출을 거부하며 금산법이나 방송법 등 더 많은 이윤을 볼 투자기회만을 기다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감히 고통분담을 얘기하려 하는가? 고통은 결코 분담되지 않고, 사회의 약자들에게 집중된다.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위기는 일종의 기회인 셈이다.

더구나 정부가 앞장서서 전 국민을 쇼크 상태에 몰아넣을 이런 변화를 추진하고 있다. 정부는 이런 권력독점을 막으려는 시민의 저항을 억누르고 있다.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의 구속은 정부나 기업 외엔 그 누구도 경제에 관해 얘기하지 말라는 시민에 대한 경고이니 단지 표현의 자유라는 차원을 넘어선 문제이다. 그리고 용산참사는 정부나 기업이 이윤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시민을 철거민으로, 도시게릴라로 내몰아 그 삶을 송두리째 뽑을 수 있음을 증명했다. 그런 억압에 시민이 지치면 북한과 충돌하고 애국심을 자극하며 반전을 꾀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쇼킹 코리아가 너무 싫어 모두가 짐을 싸서 떠나거나 더 이상 순종하는 시민이기를 거부한다면 그들은 어떻게 살까?


쇠고기를 넘어 삶의 변화로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관련한 촛불행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놀라운 광경이지요. 단지 거리로 나온 사람들의 수가 많기 때문에 놀라운 건 아닙니다. 더 이상 부당한 대우를 참지 않겠다라는 분노와 권력에 대한 조롱이 거리를 메우고 있기 때문에, 내가 권력의 주인이라고 자각하며 정치가 그들의 독점물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에 놀라운 것이지요.

돌이켜 생각해보면 권력이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한국의 시민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왕에 맞서 일어난 수많은 민란들, 일제 식민지 권력에 맞섰던 평범한 민초들의 3․1운동, 부패하고 정당성을 잃은 권력에 맞섰던 4․19, 부마항쟁, 광주항쟁, 87년 6월 항쟁, 91년 5월, 2002년 촛불집회 등 수많이 사례들이 우리 역사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번 촛불행진을 새롭고 특별한 일로만, 그리고 준비되지 못한 우발적인 사건으로만 기록하는 건 그런 저항의 역사를 망각하길 바라는 강자들의 바람에 말려드는 겁니다. 맨 손으로 권력에 저항하는 우리 민족의 의지는 매우 강하고 그렇기에 우리에게 미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다지 진심을 담은 것 같지는 않지만 대통령이 사과하고 미국과 추가협상도 진행되며 조금씩 촛불의 힘을 빼려는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습니다. 그와 함께 앞으로 촛불행진이 어디로 가야 하는가에 관한 고민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촛불은 어디로 가야 할까요?

한편에서는 이제 정당과 대의민주주의로 저항의 초점을 옮겨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언제까지 거리로 나와 요구를 주장할 수는 없지 않냐고 묻습니다. 하지만 정당과 대의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했다면, 그리고 앞으로 그것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면 사람들은 거리로 나오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시민의 뜻과 바람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고 시민을 소외시키는 정당 내부의 잘못된 구조와 대의민주주의의 문제점을 바로잡지 않은 채, 제도정치로 돌아가야 한다고 외치는 건 문제의 본질을 놓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들이 그렇게 외칠 수밖에 없는 건 대중을 신뢰하지 않아서일 겁니다. 권력이 시민의 것이라는 주장은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이고, 실제로는 자신들이 권력과 민주주의에 관한 논의를 독점해야 한다고 믿는 엘리트주의자들이라 대중의 정치를, 거리의 정치를 믿을 수 없는 겁니다.

또 다른 편에서는 국민소환제나 국민투표, 정권퇴진을 주장합니다. 문제는 그런 방식으로 지금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을 몰아낸다고 해도 그 뒤를 이을 사람들이 없다는 겁니다. 사실상 그런 제도들이 한 번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듯 하지만 그런 바람은 환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난 저항의 역사를 살펴보면 제도에 의지하는 것이야말로 죽 쒀서 개 준다는 속담을 실현하는 방법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제도는 언제나 이미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을 돕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이 가능할까요? 요즘 ‘생활정치’라는 말이 많이 등장하는데, 가만히 보면 좀 이상하게 사용되는 듯합니다. 단순히 먹거리의 문제, 생명을 위협하는 사안이기 때문에, 그리고 생명과 건강에 관한 고민을 담고 있기 때문에 이를 생활정치라고 불러야 할까요?

생활정치는 기존 정치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정치의 주체로 등장할 뿐 아니라 일상 속에서 삶의 변화를 추구하는 과정을 강조합니다. 이번 촛불행진에서 청소년과 여성들이 새로운 운동의 주체로 등장했다고 하지만, 사실 청소년과 여성들은 그 전부터 정치의 주체가 되려고 꾸준히 노력해 왔습니다. 기존의 성인 남성 중심의 정치제도가 이들을 정치주체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 뿐이지요.

그런데 ‘새로운 등장’을 강조하는 세력들은 기존의 정치구조를 전혀 바꾸지 않은 채 그 성과를 자신들의 것으로 가져가려 합니다. 이런 세력들은 청소년과 여성의 참여를 놀라워 하지만 정작 그들이 살고 있는 일상의 문제에 대해 여전히 무관심합니다. 참여를 찬양하지만 실제로는 무한경쟁이 지배하는 학교와 가부장제가 지배하는 가정으로 청소년과 여성을 다시 돌려보내려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자신의 기득권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려는 기존 정치구조의 교묘한 방식이고, 소위 진보세력이라는 사람들조차 그런 구조와 은밀히 타협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 촛불은 일상의 삶 속으로 뿌리를 내려야 우리 사회를 바꿀 수 있습니다. 일상의 장을 참여의 장으로 만들며 성인 남성 중심의 대의정치제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힘을 축적해야 합니다. 민주주의를 실험하고 경험하는 장으로 가정과 학교를 바로 세우고 더 많은 청소년과 여성들이 정치의 주체로 설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수동성과 냉소를 심는 일상의 생활과정을 능동적인 정치참여의 과정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럴 때에만 진정한 생활정치가 실현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뜻을 바로 세우고 그 뜻을 지키고 키우려 노력해야 합니다. 반드시 거리에 나와 촛불을 켜야 하는 건 아닙니다. 내 맘 속의 촛불이 꺼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제든 다시 거리로 나설 수 있습니다(아마 이명박 정부 5년 동안 거리로 뛰쳐나올 일은 수없이 많을 겁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거리로 나온 사람들의 수를 두려워하는 듯하지만, 그들이 정말 두려워하는 건 복종하지 않겠다는 시민들의 뜻, 자발적으로 검열을 하지 않으려는 뜻입니다. 냉소하며 물러서려는 마음이야말로 권력을 쥔 자들이 가장 기뻐할 상황입니다.

그렇게 뜻을 키우면서 우리 사회에서 더 소외되고 배제된 사람들의 손을 잡고 그들도 함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연대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장애인, 이주노동자, 성소수자 등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과 손을 잡을 수 있다면 촛불은 더욱 밝아질 겁니다. 오래 타오를 뿐 아니라 더 크게 타오르면 촛불은 세상을 바꾸는 횃불이 될 수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이랑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말문이 막힐 때가 간혹 있다. 똑같은 단어를 쓰긴 하는데, 서로 생각하는 바가 조금씩 달라서 얘기를 나누지만 정작 서로 아무런 얘기도 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얼마 전 우연히 뉴라이트쪽 사람을 만나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한때 논란이 되었던 ‘건국절’과 관련된 토론회였다. 그 사람은 어두운 기억을 버리고 밝고 건강한 기억을 가지자는, 식민지의 아픈 과거를 되새기지 말고 헌법을 만들고 산업화를 이룬 ‘한강의 기적’을 기억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나는 그 얘기에 공감할 수가 없었다. 우리에게 식민지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경험이고 산업화의 기적은 수많은 사람들의 인권을 철저하게 짓밟은 성과이기 때문이다.

나를 더 놀라게 한 것은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온 ‘반공주의’였다. 그 사람은 공산주의를 막기 위한 이승만, 박정희의 노력이 국가보안법으로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의 인권보다 더 중요하다고 얘기했다.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고문당하고 희생된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나의 물음에, 그는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은 공산주의를 막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고 답했다.

그 답을 들으며 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 사람의 생각이 케케묵은 반공주의에서 나왔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념이라고 하는 그 덧없는 것을 위해 사람의 생명이 이토록 허무하게 여겨질 수 있구나, 이들에겐 목적만이 있을 뿐 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이란 참으로 덧없는 것이구나. 이들에게 역사란 자신의 편견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기록일 뿐 자기를 되돌아보고 반성하기 위한 계기일 수는 없겠구나. 과거를 되돌아보지 못한다는 점에서 이런 사람들에게 미래는 없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같은 얘기를 하고 있지만 공감할 수 없는 사람들은 뉴라이트만이 아니다.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촛불집회에 관한 얘기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 물론 어떤 사건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서로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다른 편의 논의를 지나치게 축소시키는 건 단지 시선의 차이로 설명될 수 없다.

촛불집회에 관한 토론회에서 만난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은 촛불시위에 나오지 않았고 비정규직이라는 중요한 사회경제적 의제를 배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얘기했다. 가난의 기준이 무엇이고 어떤 점에서 비정규직을 배제했다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다양한 형태로 진화하고 있는 한 사건에 대해 그렇게 한정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어떤 의도를 담고 있을 것이다.

물론 한 사건에 지나치게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경계하고 차분하게 현실을 바라보자는 의도가 그 말에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차분하게 보는 것과 현실을 자신의 관점에서 재단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거리의 정치에 대한 열광이 제도정치에 대한 냉소로 이어지고 보수세력이 중요한 사회적 의제를 독점하리라는 우려는 귀담아 들을 얘기이다. 하지만 그런 정치적 결과에 대한 우려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건의 의미를 규정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참세상>의 집계에 따르면, 촛불집회와 관련되어 구속된 사람이 33명이고 29명이 수배중이며 1,530명이 체포되었다(9월 3일 기준). 경찰의 과잉진압과 인권유린, 과거로 돌아간 듯한 검찰의 수사 등 엄청난 공권력의 탄압을 받으면서도 촛불의 움직임을 이어가려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도 시민이고 한국이 민주공화국이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람을 가진 사람들에게 우리는 ‘어떤 민주주의’를 얘기해야 할까. 아직도 분에 못 이겨 촛불을 든다는 사람에게 우리는 현실정치에서의 패배와 냉소를 얘기해야 할까.

나를 더 놀라게 한 건 대의민주주의에서 비롯된 민주주의의 실패를 다시 대의민주주의로 환원시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한국에서 정당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진보정당을 세우는 노력이 거리에서 머리가 깨지고 경찰에 짓밟힌 사람들보다 더 중요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제도권의 정치가 자신을 얼마나 철저히 배제하는지를 절실히 깨달은 사람들에게 투표로 심판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올바른지도 잘 모르겠다. 내가 알고 믿는 건 촛불을 든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 목소리를 내고 싶어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런 목소리가 사회를 움직이는 힘이 되어야 한다고 바란다는 점이다.

아마 앞으로도 계속 우리는 선거와 관련된 얘기를 듣고 할 것이다. 내년의 보궐선거, 2010의 지방선거, 2012년의 총선... 그러면서 우리는 그 선거 결과를 가지고 촛불의 의미를 다시 해석하고 변화에 관해 얘기할 것이다. 때로는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한 반이명박, 반한나라당 전선을 얘기하고 그것에 촛불의 힘을 동원해야 한다고 얘기할지 모른다.

그러면서 우리가 잊어버리는 건 무엇일까? 정치와 민주주의에 관한 기존의 편견을 깨려는 노력과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의지일 것이다. 작지만 소중하고 소박한 꿈일 것이다. 언제나 우리가 불가능의 영역으로만 밀어놓고 고민하려 하지 않았던 꿈들. 하지만 그렇게 망각된 것들은 그냥 사라지지 않고 풀지 않은 숙제처럼 다시 등장해서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언제나 편견은 시선을 고정시키고 그 시선에 잡히지 않는 것들을 배제하고 망각한다. 그러나 배제되고 잊혀진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다. 그리고 무언가를 잊게 하려는 정치가 있다면 그것을 기억해내고 받아들이려는 기억의 정치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내야 할까? 그것은 짓밟히고 무시된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그 사람들의 인권이 보장되는 정치구조와 민주주의일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한국의 현대사를 장식했던 수많은 비극적인 사건들에서 사람들이 요구했던 바일 것이다.



나는 <GO>라는 일본 영화를 좋아한다. 어느 한 편에 소속되어 그 집단으로 자신을 정의하고 보호받는 삶을 거부하는 삐딱한 주인공들은 언제나 매력적이다. 그 영화에 매력을 더하는 한 장면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권투를 통해 세상을 가르쳐주는 장면이다. 다소 폭력적이지만 아버지는 주먹을 뻗어 그리는 원 안의 세상에 머문다면 안정적이지만 그 원을 벗어나면 어려움에 부딪치고 그런 어려움을 이기려면 강해져야 한다고 아들에게 얘기한다.

하지만 강해져야 한다는 게 일방적인 폭력이어서는 안 된다. 강해져야 한다는 이름으로 자신과 타인에게 희생과 인내를 강요한다면, 그것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어떤 방법이라도 쓰려는 폭력적인 합리성일 뿐이다. 그런데 <GO>는 그런 폭력을 극복해가는 과정을, 우정과 사랑이 타인과 더불어 살고 즐거움을 누리는 방법을 알려주기에 매력적인 영화이다.

사실 강해지는 방법은 몸을 단련하거나 집단을 만드는 것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런 방법 중 하나로 나는 사상(思想)을 꼽고 싶다. 조금 엉성하고 세련되지 않더라도 내가 살고 싶은 사회를, 돈이나 권력에 휘둘리지 않고 모두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사회를 사상은 꿈꿀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사상은 그 뜻 그대로 마음과 눈으로 나와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다. 세상을 돌아보고 내다보며 삶을 꾸리고 세계를 구성하는 힘, 그것이 바로 사상이다.

그래서 사상은 단순한 언어를 모아놓은 관념일 수 없다. “여러분은 꿈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꿈을 현실로 만들려는 열망을 가졌다는 것은 아주 훌륭한 일입니다. 마음 속에 꿈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유익한 것입니다”라는 마틴 루터 킹의 말이나 “인간은 꿈의 세계에서 내려온다”는 체게바라의 말은 사상이 세계를 바꾸는 힘이라는 점을 말해 준다. 그러니 사상의 자유는 삶과 세상의 변화를 꿈꿀 자유인 셈이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그런 소중한 자유를 무참히 짓밟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케케묵은 국가보안법이라는 잣대를 다시 들이대고 있고 사이버모욕죄라는 새로운 검열제도를 만들고 있다. 심지어 ‘국가경쟁력’을 내세워 집회나 시위를 금지하며 약자들의 저항수단까지 빼앗으려 하고 있다. 저들의 논리는 철저하게 힘에만 의존하기에 폭력적이고 그렇기에 그것에는 사상이 없다. 저들은 단지 폭력을 사용해서 우리에게서 변화와 꿈을 빼앗으려 한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비민주적인 권력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도 그동안 사상의 숨통을 조여 왔다. 우리에게 사상은 언제나 어떤 ‘~주의(~ism)’만을 뜻했고 그것을 위해 다른 모든 생각이 힘을 모아야 한다고 얘기해 왔다. 규범적으로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얘기하지만, 그런 다양성은 언제나 ‘~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만 인정되었다. 즉 우리는 모두가 꿈을 꾸고 사상을 누릴 자유를 얘기하지 않고 모두가 같은 꿈을 꾸거나 같은 사상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더 분명하게 얘기하면 우리는 현실 사회주의권의 붕괴 이후에도 사회주의나 사회민주주의를 되뇌는 것 외에 자기 사상을 만들지 못했다. 언제나 당면과제만을 생각했지 꿈을 꾸지 못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누군가에게 아주 명쾌한 설명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추상적이고 부정적으로만 느껴지지 않는 말이다. 그러니 사상의 자유가 지금 위기를 맞이한 듯하지만 사실상 우리 사회에서 사상은 계속 위기를 경험해 왔다.

저들의 국가보안법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처럼 사상의 자유를 탄압한다고 비판해 왔지만, 그것을 넘어설 다른 틀을 만들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그 낡은 틀을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꿈꿀 희망의 원리를 우리는 구성하지 못했다. 자기가 내밀 수 있는 주먹의 경계 안에서만 세상을 보고 그 경계를 넘어서려 하지 않았고, 그 경계는 사상간의 넘나듦과 꿈의 공유를 방해했다.

폭력적이지 않으면서 그 경계를 넘어설 좋은 방법 중 하나는 비폭력이다. 비폭력의 의미는 경찰의 공권력같은 직접적인 폭력에 맞선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쇠고기 수입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가해지는 구조적인 폭력, 눈에 보이지 않게 천천히 우리 삶을 파괴하는 폭력에 맞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다른 생명체에게 가하는 폭력이, 그리고 그런 폭력을 ‘산업’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강대국’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나라에 강요하는 직접적인 폭력의 구조는 비정규직의 양산이나 민영화라는 간접적인 폭력의 구조와 같은 것이다. 자기 동료를 먹으며 살을 찌우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신세란 끝없는 경쟁 속에 서로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우리의 신세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이런 폭력의 순환구조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꿈꿀 수 있다. 직접적인 물리적 폭력만이 아니라 간접적인 구조적 폭력에도 적극적으로 맞서는 비폭력이야말로 새로운 사상을 구현할 희망의 언어인 셈이다.

그리고 그 비폭력의 언어는 단지 인간의 것으로 제한되지도 않는다. 오체투지순례단의 눈물겨운 발걸음이 절망만 주지 않고 희망도 주는 건 주위의 다른 사물과 생명을 서로 보살피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삼보일배와 오체투지는 단지 어떤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나 방식만이 아니고 그것 자체가 많은 희망의 언어들을 담고 있다(뉴라이트를 비롯한 케케묵은 집단들이나 정치인들이 80년대 운동권의 방식을 열심히 배워 써먹더라도 결코 베낄 수 없는 건 이런 행동 속에 담긴 마음과 사상이다). 이제 사상은 여러 가지 뜻 깊은 실천 속에 담긴 의미들로 새로이 구성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사상의 자유는 단지 국가보안법 폐지로 완성될 수 없다. 왜냐하면 사상은 검열이나 탄압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실현하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그것은 원래 자유로운 것이다). 사상은 국가보안이나 질서와 같은 기존의 논리를 넘어서 다른 새로운 무엇으로 나가려는 것이자 나와 세계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상의 자유는 개인의 것으로 머물지 않는다. 사람들은 사상을 통해 서로 이해하고 공감하며 연대할 수 있다. 사상이 없는 감정적인 연대는 사회적인 조건이나 분위기의 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언제나 약하다. 하지만 사상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연대는 다른 그 무엇보다도 강하고 우리를 세상에 내려앉힌다.

그런 점에서 나는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사상의 자유라 믿는다. 그것은 절망의 시대에도 희망을 꿈꿀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지난 11월 이명박 대통령은 빡빡한 미국방문 일정에도 캘리포니아 주지사 아놀드 슈워제네거를 만나 한미FTA 등 현안을 논의했다 한다. 연방국가인 미국에서 상원의원도 아닌 주지사를 만나 왜 한미FTA와 같은 국가간 협정을 논의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미국경제가 먼저 살아나야 다른 나라에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으므로 미국경제, 그 안에서 비중이 큰 캘리포니아 경제가 살아나는 것이 중요하다”며 미국경제를 걱정하는 발언은 그 깊은 뜻을 헤아리기 어렵다. 요즘처럼 심각한 경제위기를 겪으면서도 한국의 대통령이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경제까지 걱정해주니 그 따뜻한 연대감에 캘리포니아 주민들이 눈물을 흘렸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방문과 대화내용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아마도 이런 깜짝 이벤트는 이명박 대통령의 개인적인 취향인 듯하다. 영화 <터미네이터>를 보고 감동을 받았던 것일까?

어쨌거나 아놀드를 만나서인지 이명박 대통령은 국내로 돌아오자마자 결연한 각오를 밝혔다. 지난 27일 “일시적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목숨을 던질 그런 자세로 국가 백년대계를 생각”하겠다고 말하지 않나 견위수명(見危授命)이라는 공자님 말씀을 인용하며 “위기를 만나면 목숨을 던져라”는 자세로 열심히 일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28일에는 “먼 훗날 몸을 던져 일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싶다”는 소신을 밝히기도 했다. 한층 더 터프한 모습으로 돌아온 우리의 대통령, 우리는 박수치며 환영해야 할까?

무엇을 결심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터미네이터의 장비는 곧 장만할 태세이다. 정부가 이번 국회에 제출한 예산안에 따르면, 경찰청은 집회대응 예산으로 48억 5,400만원을 신청했다고 한다. 그 내용을 자세히 보면 만만치 않다. 야간 조명차 2대, 물대포 3대, 물보급차 4대, 차벽트럭 17대, 신형보호복 2,106벌, 무선망 수신기 3,606개, 중형소화기 255개, 소형소화기 2,106개, 첨단채증장치 3세트 등이다. 예산안이 그대로 통과되면 업그레이드된 터미네이터 군단을 곧 거리에서 만날 수 있을 듯하다.

그런데 문제는 정치가 터미네이터식의 전쟁일 수 없다는 점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한 사회에서 함께 생활하기 때문에 정치가 필요하고, 그래서 정치의 세계는 다양한 의견을 억압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의견을 보장해야 한다. 이상적인 정치를 생각하지 않더라도 현실 정치는 여러 협상과 타협으로 진행된다. 따라서 ‘난 너만 구하면 된다’는 터미네이터식 발상은 정치의 세계가 구성되는 원리인 견제와 균형, 타협과 협상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린다(영화를 보면 로봇조차도 자신이 잘못 생각했다는 점을 깨닫는다. 그런데 우리의 대통령은?).

목숨을 바쳐 일을 하겠다는 우리 대통령의 자세는 이번에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오바마가 화해와 통합을 강조한 것과 사뭇 대조를 이룬다. 대체 어떤 목표를 세웠길래 정치의 기본을 무시하고 온갖 첨단 장비로 무장하며 목숨을 바쳐 그것을 추진하겠다는 걸까? 아직 모든 게 분명하지 않고 이리저리 분주하게 입장을 바꾸는 정부인지라 뭘 하겠다는 건지 확실하게 알 수가 없다.

그래도 우리 대통령은 친절하게 라디오로 자신의 입장을 직접 밝히는 편이니 얘기를 들어보자. 귀국한 뒤의 첫 라디오연설 주제는 청년실업이었다. 그러면 청년실업을 해소하기 위해 한 목숨 바쳐 일하겠다는 걸까?

불행히도 그렇지는 않은 듯하다. 자신의 경험담까지 들며 많은 얘기를 했지만 건질 만한 얘기는 이 정도인 듯하다. 세상에 경험만큼 소중한 스승은 없으니 비정규직이든, 임시직이든 무조건 취직해서 노조가 있건 없건 찍 소리 하지 말고 시키는 대라 일하라(월급은 제때 받으려나?). 이율곡 선생을 본받아 청년리더 10만 명을 양성하기 위해 7,500억원의 예산을 특별히 편성하겠으니 불만을 가지지 말라(1인당 750만원씩 나누나?). 그래도 국내에 일자리가 없으면 해외로 10만 명을 파견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4대 보험은 되려나?)는 얘기이다.

허나 어떡하나? 실업자통계에 잡히지 않는 취업준비생까지 합치면 청년실업자는 수는 대략 15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그러니 10만을 양성하고 10만을 파견해도 청년실업율을 낮추기엔 턱없이 부족한 셈이다.

그래서인지 우리 대통령은 정말 목숨을 바칠 만한 필생의 역작을 슬며시 다시 꺼내고 있다. “4대 강 정비사업이면 어떻고, 운하면 어떠냐”라는 말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짐작케 한다. 4대강을 정비하면 그것이 곧 대운하가 아니겠는가.

터미네이터를 좋아하는 명바기네이터가 돌아왔다. 그것도 예전보다 한층 더 업그레이드되어서 촛불시위 정도는 쉽게 막을 수 있는 무장을 갖추고. 한반도의 생태계는 다시 한번 멸망의 날을 맞이하고 있다.



잘못된 권력에 시민들이 맞서 싸우지 않았다면 지금 세상은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는 권력을 가진 자들이 우리의 신념과 자유를 짓밟을까 두려워하지만, 시민들의 저항이 거세지면 그들 역시 두 다리 뻗고 잠을 청할 수 없다. 그것은 아주 간단한 정치의 법칙 때문이다. 즉 제 아무리 강한 권력자라도 형식적으로는 국민의 ‘동의’를 구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도 어느 순간이 되면 ‘국민’ 또는 ‘시민’을 내세워 자신을 정당화시켜야 한다.

그러니 우리는 질문을 던지는 방식을 바꿔야 한다. “시민들은 왜 저항하는가?”라는 물음은 정치의 본질을 건드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시민들이 언제나 권력의 부조리에 맞서 자유나 평등, 정의와 같은 큰 뜻을 실현하기 위해 저항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민들은 어떻게 저항하는가?”라는 물음 역시 핵심을 건드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시민들은 자신이 취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엄청난 권력에 저항해 왔기 때문이다. 지나친 권력이 있는 곳엔 언제나 시민의 저항이 있었다.

실제로 우리 역사를 살펴봐도 시민들은 언제나 저항해 왔다. 우리 헌법이 지목하는 대표적인 저항인 3․1운동과 4․19민주이념은 누가 어떻게 시작한 사건인가? 가장 억압적인 제국주의 지배나 잔혹한 독재를 경험하면서도 시민들은 각자 자기 삶의 터전에서 자발적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저항했다. 동학농민운동이나 각종 민란, 제주도와 광주, 마산, 부산 등 지역사회의 크고 작은 저항들도 시민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끊임없이 권력에 맞섰다는 점을 증명한다. 권력의 비리와 억압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시민들은 저항했다.

따라서 우리는 “권력이 어떻게 시민의 저항을 가로막고 그 의미를 왜곡시켜 왔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그렇게 물어야 저항의 실마리를 놓치지 않고 이어갈 수 있다.

 

시민 없는 시민참여제도

 

한때 ‘시민 없는 시민운동’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그동안 한국의 시민사회운동에서 전문가나 활동가가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이들 역시 시민이라는 점에서 이 말은 ‘절반의 진실’만을 담고 있다. 그런데 권력을 가진 자들은 이런 말을 열심히 퍼트려서 시민들이 시민사회운동을 자신과 ‘무관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들의 말에 동의하지 않기를 원했다.

그러면서 힘을 가진 자들은 자신들이 독점하고 있는 권력의 크기를 계속 키웠다. 국회의원이나 대통령, 공무원, 법관들은, 그리고 그들과 결탁한 재벌과 중앙언론들은 평범한 시민들이 접근할 수 없는 정보와 힘을 가진 채 시민들을 지배해 왔다. 관존민비(官尊民卑)라는 거짓된 상식을 널리 퍼트리면서 그들은 자신의 권력에 도전하거나 그 힘을 줄이려는 시도들을 억눌러 왔다.

시민의 불만을 억누르기 위해 그들은 그런 시도를 잠재울 ‘시민 없는 시민참여제도’를 만들었다. 동(洞)에서 구(區), 시(市), 도(道)까지 설치된 각종 자문위원회들은 권력의 일방적인 정책결정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담당해 왔다. 그래서 소위 민의(民意)를 수렴한다는 절차들은 언제나 그들을 무조건 지지하는 배후세력이 되어 왔다. 힘을 가진 자들은 자신들의 말에 복종하는 자들만을 시민으로 인정하고 저항하는 자들을 시민이 아닌 폭도나 무지한 군중으로 내몰았다.

그리고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橘化爲枳)는 말처럼, 좋은 제도들도 한국으로 건너오면 하나같이 시민참여를 가로막는 제도로 악용되고 있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도 ‘소리 소문 없이’ 대의민주주의의 문제점을 보완한다는 직접민주주의제도들이 도입되었다. 중앙정부 차원에서는 여전히 직접민주주의가 ‘불가능한 신화’로만 얘기되고 있지만 지방정부 차원에서는 서서히 직접민주주의 제도가 도입되었다. 주민발의, 주민소환, 주민투표처럼 널리 알려진 제도만이 아니라 주민참여예산제도나 시민감사옴부즈만같은 제도들도 이미 한국에 도입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제도들은 거의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함께하는시민행동>의 조사에 따르면, 2002년 7월부터 2006년 6월까지 5년 동안 시민 138만 명이 총 123건의 조례를 발의했지만 그 중 원안대로 의결된 것은 12건 뿐이고, 54건은 수정된 채 의결되었다. 주민투표제도는 법 제정 이후 단 3건만 실시되었고, 3건 모두 지방정부나 중앙정부가 추진한 관주도 주민투표였다. 주민소환제도는 여러 지역에서 추진했지만 실제로 소환한 곳은 경기도 하남시 뿐이다. 새로운 민주주의의 희망이라던 참여예산제도 역시 토호들의 민원청탁용 창구로 전락해 버렸다.

사실상 한국에서는 평범한 시민들이 정책결정에 참여하거나 힘을 가진 자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런 제도를 활용하는데 엄청난 노력이 들 뿐 아니라 설령 활용하더라도 그 효과를 거두기 어렵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서울시의 경우 주민발의를 하려면 약 14만 명의 서명이 필요하고, 서울시장을 소환하려면 약 80만 명의 서명이, 주민투표를 신청하려면 약 40만 명의 서명을 받아야 한다. 그냥 서명을 받으면 되는 게 아니라 서울시의 경우 선관위에 미리 신고한 사람들이 주민발의나 주민투표의 경우 90일, 주민소환은 120일 이내에 서명을 받아야 한다. 시보다 작은 구로 내려가도 용산참사를 빚었던 용산구의 경우, 주민발의는 90일 동안 약 4천 6백 명, 주민투표는 약 1만 7천 명, 주민소환은 약 2만 8천 명의 서명을 받아야 한다. 돈을 주고 사람들을 사서 서명을 받지 않는다면 엄두를 내기 힘든 일이다.

더구나 중앙정부는 주민발의나 주민투표, 주민소환의 내용을 정해서 시민의 참여를 차단한다. 국가의 권한이나 사무에 속하는 사항, 법률에 위반되거나 행정기구에 관한 사항, 자치단체의 예산과 관련된 내용들은 아예 투표나 발의의 대상조차 할 수 없다.

그러니 한국의 시민참여제도는 하나같이 토호들을 위한 참여제도이거나 허수아비/꼭두각시 참여제도인 셈이다. 이렇게 힘을 가진 자들은 이런 허울뿐인 제도로 시민들의 참여의지를 꺾고 아무리 노력해도 세상이 변하지 않으니 자기 몸이나 잘 간수하라는 생각을 심어 왔다. 그리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재갈을 물리고 입을 막으며 언제나 자신들을 통해서만 얘기하라고 강요했다.

흥미로운 점은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이미 자신의 발언권을 확보하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직접민주주의를 싫어하며 자신을 통해서만 말할 것을 강요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2008년을 밝혔던 촛불집회는 바로 이런 잘못된 상식에 도전했다.

 

촛불이 밝힌 시민저항의 가능성

 

보통 온라인에서의 다양한 소통이 오프라인의 활동으로 직접 연결되기는 쉽지 않다. 근본적인 면을 따지면 그것은 ‘속도의 차이’ 때문이다. 온라인에서의 정보와 논의는 망을 타고 빠른 속도로 퍼지지만 현실에서의 삶은 삶의 다양한 조건들과 맞물려 있기 때문에 그렇게 빨리 움직일 수 없다. 마우스를 클릭하기만 하면 되는 온라인과 달리 오프라인의 실천은 항상 참여에 필요한 시간과 노력을 요구한다.

오히려 시민들의 저항은 끊이지 않고 조금씩 퍼지고 있다. 경제가 나빠지면 시민들의 마음이 온통 4대강 정비사업이나 대운하로 몰릴 것이라는 비관적인 예상과 달리, 시민들의 관심은 다양한 방면으로 퍼지고 있다(사실 이명박 정부가 등장하고 난 뒤 그런 암울한 예상을 뒤엎은 것도 촛불문화제였다). 진보적이든 보수적이든 발언권을 가진 엘리트들은 시민들의 저항을 낮게 평가하지만, 시민들의 움직임은 그런 평가를 비웃듯이 활발해지고 있다.

촛불집회 이후 시민저항이 다양한 형태로 이미 퍼지고 있다. 비리나 부조리가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 사람들이 촛불을 손에 들고 나온다. 그러면서 촛불이 일종의 저항의 상징으로 규정되었고, 촛불을 드는 행위 자체가 저항의 정체성을 드러내게 되었다(대표적인 예가 촛불산책이다). 그리고 이런 저항은 한동안 한국사회에서 자취를 감췄던 ‘참여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작년 연말을 달궜던 명동 무한도전×2 ‘널 기다릴께’ 역시 시민들의 뛰어난 아이디어가 빛을 발했던 저항이다. 매일 2배의 사람들이 모여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는 생각은 경찰의 방해를 받으면서도 추운 거리를 밝히는 횃불이 되었다. 그리고 ‘반쥐원정대’나 ‘보신각 촛불타종’ 역시 시민들의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드러낸 사건들이다. 기륭전자와 KBS, YTN, 여의도 등을 누비는 촛불의 발걸음은 새로운 정치문화의 출현을 예고한다.

왜 시민들은 이런 어려움을 몸소 겪으려 할까? 자신이 거리로 나서도 세상을 전혀 바꿀 수 없으리라 믿었다면 시민들은 거리로 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시민들은 권력을 쥔 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진리, 시민의 동의를 구하지 못한 정부가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에 열심히 거리로 나오고 있다. 그리고 자신들을 대변한다는 세력들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 거리에 나서야 한다는 점도 깨달았다.

더구나 시민들은 저항을 통해 권력의 억압성을 몸으로 느끼며 그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던질 즐거움과 여유도 만들어가고 있다. 권력을 조롱하고 비웃는 시민들의 저항은 기성 권위와 질서를 파괴하며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확산되기에 지상의 그 어떤 권위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말이 터져 나온 순간 그것은 막을 수 없는 진실이 되어 인터넷에서 무수히 복제되어 전파된다. 그렇게 시민의 웃음으로 폭발한 촛불의 힘은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되고 있다.

인터넷에서 만들어진 수많은 저항카페와 커뮤니티들이 만들어지고 있고, 자신의 취미가 이 정부와 쉽게 어울릴 수 없음을 여러 동호회들도 자각하고 있다. 이들은 더 이상 화면이나 텔레비전 앞에 머물지 않고 자신이 거리로 나가야 할 이유를 찾으며 시민으로 변하고 있다. 이미 진실이라는 바이러스는 온/오프를 넘나들며 사람들을 감염시키며 새로운 정치문화의 출현을 알리고 있다.

다만 자신의 목소리를 직접 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을, 그리고 경찰이나 검찰의 탄압을 받더라도 자신의 삶을 심하게 해치지 않는 수준에서 저항을 펼칠 방법을 시민들은 고민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저항이 단지 권력의 나쁜 면을 폭로하거나 다그칠 뿐 아니라 우리의 공적인 이익을 실현할 수 있는 방법 역시 고민한다. 그렇게 고민하고 스스로를 의식화하고 조직화하며 시민들은 다음 저항을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저항을 북돋우며 손을 맞잡을 사람들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전 세계의 시민들이 저항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세계를 보수적으로 만들었다고 하지만 저항의 흐름은 끊이지 않았다. 더 이상 노예로 살지 않으려는 새로운 스파르타쿠스, 새로운 만적과 망이, 망소이들이 반란을 모색하고 있다. 그리스에서 시작해 지금 유럽 전역을 달구고 있는 시민들의 저항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 군부에 맞섰던 70년대의 역사를 딛고 ‘700유로 세대’라 불리는 그리스 청년들과 시민들은 경찰과 정부에 맞서 저항을 벌이고 있다. 높은 실업률과 열악한 교육환경,경제정책의 실패, 경찰의 만행 등을 비판하는 시위가 매일 이어지고 있고,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하고 농민들이 국경을 봉쇄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시위는 경제위기를 맞이해 전 유럽으로 퍼지고 있다. 누가 이 저항의 불길을 다스릴 수 있을까?

미국의 역사학자 하워드 진(Howard Zinn)의 『권력을 이긴 사람들』(난장, 2008)이나 에이프릴 카터(April Carter)의 『직접행동』(교양인, 2007)을 보면 인류가 억압적인 권력에 맞서 얼마나 치열하게 싸워왔고 지금도 싸우고 있는지가 잘 묘사되어 있다. 굳이 두 사람의 말을 인용하자면, 진은 “시민들이 복종하지 않을 때, 노동자들이 일하기를 거부할 때, 군인들이 총을 들지 않을 때, 기존 권력은 힘을 잃고 항복할 수밖에 없습니다”라며 확신을 가지고 얘기한다. 초강대국 미국 내에서 미국에 저항하는 다양한 운동들이, 즉 백인-남성-부자에 맞서는 노동계급, 빈민, 흑인, 여성, 원주민들의 불복종과 저항들이 이런 힘을 만들고 있다.

카터 역시 대의정치에서 소외된 원주민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려는 운동, 석유회사와 같은 다국적기업을 반대하는 불매운동이나 저항운동, 세계은행과 같은 국제기구의 지원을 받는 댐건설을 반대하는 비폭력 저항운동, 최빈국을 위해 외채탕감을 주장하는 직접행동, 다자간투자협정을 반대하는 운동, 세계무역기구(WTO)를 반대하는 운동, 토지를 요구하는 농민들의 직접행동, 전 지구적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원주민 공동체, 농민, 학생, 노동자, 실업자의 운동 등 다양한 형태로 민주주의를 실천하려는 운동들을 얘기한다. 이런 운동을 통해 시민들은 역량을 강화하는 효과(empowering effect), 즉 “공개적으로 자기 목소리를 당당하게 냄으로써 자부심과 존엄함을 얻을 수 있고,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있으며, 타인과 연대감을 고양”시키는 경험을 얻게 된다. 이렇게 담금질을 경험하며 시민은 타인의 고통에도 귀를 기울이는 세계시민으로 거듭난다.

물론 자연발생적인 시민들의 운동은 흐름을 형성할 뿐 그 힘을 집중시키지 못한다. 이미 조직화된 정당이나 단체들이 스스로를 의식화하고 조직화하는 시민들의 힘을 증가시키고 그 힘에 일정한 방향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세력들이 시민들을 소외시키지 않고 변화의 성과를 시민들의 것으로 돌릴 때에만 그런 어울림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권력은 결코 진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권력은 시민을 이길 수 없고 속일 뿐이다. 그렇게 우리를 속이기에 거짓을 줄이려면 정당이나 단체의 내부구조나 성격 자체가 분권화되고 투명해야 한다. 그런 자기변화 없이 시민과 어울리는 것은 불가능하다(그런 점에서 반이명박 연대는 또 다른 거짓말을 낳을 수밖에 없다).

그런 과정에서 시민들은 이미 존재하는 방식들을 사용할 수도 있다. 이미 만들어진 참여제도를 활용하는 법도 그 중 하나이다. 4월에 있을 재보선이나 2010년의 지방선거를 활용하거나 기득권층의 독점물로 전락한 참여제도들을 시민의 것으로 만드는 것도 방법이다.

하지만 제도는 참여를 감싸는 껍데기일 뿐이다. 제 아무리 훌륭한 제도가 있다 하더라도 그 제도를 활용하려는 능동적인 참여의지와 그런 의지를 자극하는 정치문화가 없다면 그 제도는 쓸모 없는 것이다. 스위스의 직접민주주의를 다룬 『직접민주주의로의 초대』(리북, 2009)에서 우리는 중앙으로 집중된 권력을 나누고 시민들의 통제를 받는 제도, 시민권을 실현하려는 시민들의 의지, 민회를 통한 참여의 전통과 문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확인할 수 있다.

먼 길일수록 돌아가라고 했다. 역사의 경험은 저항의 불꽃이 뿌리를 내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외부의 조건에 흔들리지 않으려면 이 땅에 든든히 뿌리를 내리고 스스로 필요한 것을 마련하고 서로 나누며 함께 결정해야 한다. 시민저항의 싹은 자급(自給)과 자치(自治), 자결(自決)의 기반을 마련할 때 활짝 피어날 수 있다. 첫 질문으로 돌아가자면, 그런 기반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시민저항은 언제나 권력의 거짓말에 포섭될 수밖에 없다. 조급하지 말고 기반을 튼튼히 다질 때이다.



한국의 현대사에 여러 비극이 있었지만 제주도 4․3만한 비극은 없다. 1947년 3월 1일 경찰이 기념행사를 치르던 주민에게 발포해 6명이 사망하면서 비극은 시작되었다. 그 뒤 1년 동안 2,500여명의 주민이 감금되거나 고문을 당했고, 48년 4월 3일 무장대가 경찰지서와 우익단체를 공격했다. 1954년 한라산 금족지역이 개방될 때까지 7여년 동안, 4․3사건 위원회 보고서를 따르면 제주도민의 약 10%인 2만 5천명에서 3만명이 희생당했다(그 중 86.1%가 군대나 경찰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한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저질러진 이 학살은 제주도민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한 증언자는 누이를 산에 묻고 돌아오니 온가족이 죽어 있더라며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2003년 10월 노무현 정부는 4․3에 대해 공식적으로 과거 권력의 잘못을 사과하며 상처를 달래는 듯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 국방부는 교과서에서 4․3을 “남로당의 폭동지시에 의해 발생한 좌익세력의 반란”이라 규정할 것을 요구하고, 심지어 소설가 현기영의 『지상의 숟가락 하나』라는 작품을 ‘불온서적’으로 규정했다. 최근 벌어지는 많은 다른 일들처럼 역사의 시계바늘도 거꾸로 돌아가고 있는 셈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역사는 더 이상 역사이기를 포기하고 바늘을 멈춘 채 권력을 가진 자들의 노리개가 되고 있다.

역사만 노리개감이 되는 건 아니다. 제주도민들의 삶은 또다시 육지를 지배하는 사람들의 노리개가 되고 있다. 2007년 국방부는 제주도 강정마을에 주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규모 해군기지를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밝혔고 그 계획을 은밀히 추진하고 있다.

얼마 전 강정마을을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 서귀포에서 제주도 올레길을 따라 걸으며 찾아간 그곳은 아름답고 고즈넉한 포구였다. 해군기지추진단이라 이름붙인 콘테이너 박스만 없다면 아주 평화로울 곳이었다.

그런 곳에, 소위 세계평화의 섬이라 불리는 제주도에 해군기지를 만들겠다는 해괴한 발상은 누구의 머리에서 나왔을까? 주민들의 반대를 줄이기 위해 사용하는 ‘민군복합형 관광미항’이라는 해괴한 말은 핵을 사용하지 않는 대규모 재래식 폭탄을 뜻하는 ‘친환경 폭탄’처럼 기괴한 우리 현실을 드러낼 뿐이다. 하지만 더 이상 아름다움과 더러움을 뒤섞어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그런 말들이 우리를 속일 수는 없다.

일제 식민지 시기에는 일본 본토 상륙을 막는 최후의 전쟁기지로 사용되었고, 해방 이후에는 미군정과 육지에서 건너온 우익단체의 발에 짓밟혔던 제주도는 지금 시험대에 서 있다. 한반도 최남단에 만들어지는 해군기지가 우리의 목적을 위해 사용되리라 생각하는 무뇌아들은 그리 많지 않다. 해군기지의 건설은 외부의 정치상황, 정확히는 동북아나 국제정세가 또 다시 제주도민과 한반도 주민의 삶과 생명을 좌우하리라는 것을 뜻한다.

물론 평택에서 그랬듯이 정부는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려 할 것이다. 그리고 어느 것에도 호소할 길 없는 힘없는 주민들은 또다시 돈 몇 푼 쥐어든 채 쫓겨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언제나 모든 사건이 그렇게 끝날까? 그 무엇도 자신들을 돕거나 보호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언제나 순순히 물러나기만 할까?

최근 어느 정치인은 무더기 법안통과를 시도하며 ‘전쟁’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에게는 이 표현이 하나의 정치적 수사에 지나지 않았을 수 있다. 하지만 그동안 끔찍한 고통에 시달려온 사람들에게 그 표현은 단지 수사가 아니라 순간적으로 드러난 일그러진 현실의 진실인 셈이다. 정치가 극단으로 치닫을수록 비극은 우리 앞으로 성큼 다가선다.

방치된 세상은 흘러가지 않고 오히려 그 끝으로 향한다. 그래서 우리는 호소할 곳 없는 사람들의 호소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전쟁을 막을 정치에 관심을 쏟아야 한다. 잠들지 못하는 남도는 우리의 미래이다.


요즘 한국사회에서는 ‘법치주의’(法治主義)가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한편은 법치주의의 원칙에 따라 불법 행위가 드러나면 엄하게 처벌하겠다는 입장을 강하게 밝혀 왔다. 그리고 다른 편에서는 법의 잣대에 현실을 끼워 맞추는 형식적인 법적용이고 국민을 법의 적용대상으로만 보는 오만한 발상이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한 편이 법에 따른 집행만을 강조한다면, 다른 편은 누가 법을 정하고 해석하는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악법도 법이다’라는 군사독재 시절의 터무니없는 말은 교과서에서 사라졌지만, 현실은 이런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작년 12월, 한미FTA와 관련된 문건을 유출했다는 혐의를 받던 정창수 씨가 공무상 비밀누설죄로 징역 9개월을 선고받고 법정에서 구속되었다. 그리고 올 1월에는 삼성그룹의 ‘X파일’ 사건을 폭로했던 노회찬 씨가 통신비밀보호법 위반과 명예훼손 혐의로 징역 1년과 자격정지 1년을 구형받았다.

응당 국민도 그 내용을 알아야 할 FTA관련 문건을, 그것도 공청회나 토론회에서 이미 드러난 내용의 문건을 유출한 것이 구속의 이유일 수 있을까? 그리고 언론사와 대기업 간부가 정치인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하고 전․현직 검찰간부에게 떡값을 준 엄청난 비리를 폭로한 것이 처벌의 대상일까?

공공의 이익을 심하게 해치는 사건들을 폭로해서 사회적인 쟁점을 만들었던 사람들이 잇달아 징역형을 선고받고 있다. 물론 법이 정한 과정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들이 없었다면 그런 중요한 사안들이 논의조차 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그 행동은 사회에 이로웠다. 더구나 정치과정이 그 내용을 감추며 국민을 속이려 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사법부가 더러운 거래와 연관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지금의 문제는 법치가 아니라 ‘법의 권위’인 셈이다.

그런데 반성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검찰과 법원은 평범한 시민들에게도 법을 앞세운 칼날을 겨누고 있다. 검찰은 미네르바라는 필명으로 인터넷에 글을 올린 사람을 무리하게 구속해서 수사하고 있다. 그리고 지난 20일 검찰은 조선․중앙․동아일보에 광고를 싣지 말자는 운동을 이끈 혐의로 기소된 누리꾼 16명에게 업무방해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에서 3년형을 구형했다. 시민이나 소비자로서 자기 의견을 드러내고 운동을 펼친 것이 처벌의 대상이라니, ‘소비자운동이 민주주의의 핵심’이라고 외친 랄프 네이더는 미국에 태어난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할 일이다.

더욱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판결들이 권력의 영향을 받아왔다는 점이다. 한국의 사법부는 항상 ‘소신’을 강조해 왔지만, 그 소신은 시민이 아니라 권력이나 자본으로 기울어졌다. 힘없고 약한 시민들이 냉혹한 법의 심판을 받았다면, 정치인이나 기업가들은 국가나 경제에 기여해 왔다는 핑계로 후한 면죄부를 받아 왔다(영화 <공공의 적>의 강철중 검사처럼 권력에 맞서는 법관은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가상일 뿐이다).

법은 강자와 약자가 같은 울타리 내에서 살 수 있게 하는 기본적인 합의이다. 그런 법이 제 역할을 못하니 힘을 가진 자들은 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힘없는 사람들은 법이 무서워 자꾸 피하려 한다. 강자는 약자를 착취하고 조롱해서 그들의 인간성을 파괴하고, 이에 약자들은 강자에게 분노와 복수심을 품으며 법을 무시한다. 각자가 능력껏 자기 삶을 알아서 지켜야 하는 곳에서 법은 더 이상 필요치 않다.

이런 상황에서 법치주의만을 강조하는 것은 법의 권위를 더 빨리 파괴할 뿐이다. 법을 무너뜨리는 것은 시민들이 아니라 바로 검찰과 법원이니, 자기 집의 기둥을 무너뜨리고 있는 셈이다. 외부의 혼란이 아니라 내부의 부조리가 법과 법치주의를 무너뜨리고 있다.

법치주의의 가장 중요한 전제는 바로 정의와 평등이다. 헌법이 보장하듯이 법의 권위가 시민으로부터 나오고 법이 사람을 가리지 않고 평등하게 대할 때,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법을 지킬 것이다. 법의 뿌리를 지키려는 법관들의 소신이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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