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경기도민이다. 팍팍한 서울 생활에 질려서 2년 전에 서울을 탈출했다. 그래서 지난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심심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내게 투표권이 없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박원순 변호사가 당선될 것이라고 나는 확신했다. 치열한 경합이라는 언론 기사는 긴장을 늦추지 말라는 얘기로 들릴 뿐 결과가 바뀔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내 관심은 박원순 변호사의 당선 이후에 있었다. 적대적인 중앙정부 아래에서 가장 큰 지방자치단체를 박 시장이 잘 이끌 수 있을까? 선거 공약이야 참여연대부터 희망제작소까지 시민단체를 이끌어온 실력으로 충분히 채우겠지만 정치가 종합선물세트는 아니지 않은가? 타협이 정치의 미덕이지만 갈등과 충돌 없이 정치가 이뤄질 수는 없는데 ‘친절한 원순씨’가 잘할 수 있을까 염려도 되었다.

예상대로 박 시장은 취임하자마자 좋은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초등학교 무상급식이 실시되고, 서울시립대의 등록금이 반값으로 떨어졌으며, 서울시의 비정규직이 정규직으로 전환될 예정이다. 대규모 토건사업이 재검토되고 어린이집이 확충될 예정이다. 심지어 한·미 FTA에 대한 의견서를 정부에 제출하기도 했다.

흥미롭게도 박 시장의 행보는 ‘신자유주의의 마녀’ 마거릿 대처 정부 아래에서 런던 시를 이끌었던 켄 리빙스턴 시장과 비슷하다. 영국 노동당의 후보였고 ‘레드 켄’(우리 식으로는 ‘빨갱이 켄’)이라 불리던 이 사람은 대중교통 요금을 인하하고 탁아시설을 늘렸으며 공공부문의 일자리를 지켰다. 공공 서비스를 확충하며 시민참여를 활성화시켰다.


   
보수 언론이 그의 사생활을 헐뜯기도 했지만 켄의 인기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결국 대처 정부는 런던을 비롯한 광역시의 자치권을 폐지해서 강제로 켄의 반란을 진압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한국의 상황도 비슷하다. 보수 언론은 박 시장을 흠집 내느라 바쁘다. 박 시장이 한·미 FTA에 관한 의견서를 내자 정부 5개 부처가 합동 브리핑을 열어 이를 비판하는 등 중앙정부도 박 시장을 경계하고 있다.

그런데 두 사람에게는 근본적인 차이점도 있다. 리빙스턴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뒤엔 영국 노동당을 바꾸고 영국을 바꾸려는 동지들이 있었다. 영국과 세계를 근본적으로 바꾸겠다는 신좌파의 이상이 있었다. 그렇다면 박 시장의 뒤에는 누가 있을까? 민주당? 새롭게 탄생하는 어떤 정당? 그들이 과연 근본 변화를 꿈꾸고 있을까?


노동조합 힘 강화한 리빙스턴 시장


리빙스턴은 대처 정부에 맞설 뿐 아니라 대기업의 부당한 노동조건을 바로잡고 노동조합의 힘도 강화하려 했다. 이것이 그에게 큰 힘이 되었다. 서울의 ‘협찬 시장’에게도 이것을 기대할 수 있을까. 사회구조의 문제에서 개인의 창의와 선택으로, 재벌 개혁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으로 관점을 바꿔온 박 시장이 시민운동 시절 들었던 ‘노동 없는 시민운동’이라는 비판을 극복할 수 있을까. 이주노동자나 여성을 차별하는 기업, 부당한 노동조건을 강요하는 기업, 백혈병 환자를 양산하는 삼성전자의 물건을 더 이상 구매하지 않겠다는 서울시의 선언을 기대할 수 있을까.

리빙스턴은 주민이 직접 지역사회를 바꾸는 다양한 자치 프로그램을 추진했다. 박 시장도 서울 곳곳에 마을 공동체를 만들겠다고 한다. 하지만 마을 공동체는 외부의 공조직이 줄 수 있는 선물이 아니다. 오히려 시장의 몫은 그런 공동체 구성을 방해하는 기성 관변단체들의 힘을 빼고 해체시키는 일이다.

내 기억에 역대 서울시장 선거에서 가장 본질적인 구호는 2002년 사회당의 서울시장 후보가 내걸었던 ‘해체 서울’이었다. 식량과 에너지를 거의 생산하지 않으면서 가장 많은 양을 소비하는 서울시민의 행복은 뭔가 문제라고 생각한다. 한국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려면 서울시장은 서울을 넘어서 생각해야 한다.
[오늘의 문예비평]에 쓴 글이다.
글 중간중간이 엉성한데 그냥 내버려 뒀다.
그 공백을 채우는 건 읽는 독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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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소개[각주:1]

1. 고공크레인으로 들려진 사람들


크레인으로 올라간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들은 건 대학에 입학한지 얼마 되지 않은 1990년이었다. 노동조합을 주도하던 수십 명의 노동자를 식칼로 난자했던 끔직한 테러사건과 육해공에서 병력을 동원한 경찰의 미포만 작전으로 벼랑 끝에 내몰린 현대중공업의 노동자들이 82미터 높이의 크레인에 올랐다. ‘골리앗 투쟁’이라 불리는 이 싸움에서 노동자들은 “새벽과 한밤중에 헬기까지 동원한 정부의 무력진압에 우리는 노동자들에 대한 사회적 천대와 우리의 비애에 울분을 느끼고 급기야 투신하려는 동지들을 서로가 감싸안으며 자제시키고 있습니다. 저희도 저 밑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회사측에 의해 일방적으로 노조가 유린되고 정부에 의해 천대받는 현실에서 골리앗 위에 있는 우리 전원은 죽을 수는 있어도 물러서지 않기로 결의하였습니다”라고 부르짖었다. 전국의 노동자와 학생들이 동조파업을 하고 울산으로 내려와 연대투쟁을 벌였고, 크레인에 오른 이들은 5일동안 단식투쟁까지 벌였다. 그야말로 목숨을 건 벼랑끝 투쟁이었고, 노동자들의 자존심을 건 싸움이었다.


당시에 나는 대학 선배들과 함께 서울지하철 선전전을 나갔다. 선배는 즐거운 어린이날에 크레인 위의 아빠를 맘 조리며 지켜봐야 하는 아이들에 관해 이야기했다. 이 드라마같은 비극에 귀를 기울이는 승객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승객들은 무관심했다. 승객들이 일어난 자리엔 우리가 뿌린 유인물이 놓여 있었다.


크레인 위로 올라가야만 했던 사람들의 절박함은 저녁 시간 지하철로 퇴근하는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스며들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불법으로 금지되던 시기라 진실을 알리는 목소리가 위험했을 수도 있지만 외면하는 시민들의 모습은 불편에 가까웠다. 사실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의 넥타이부대가, 권력층과의 협상에 바빠진 운동의 지도부가 현장노동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닫았다는 점은 같은 해 7월부터 9월까지의 노동자대투쟁에 대한 반응에서 이미 증명되었다. ‘보통 사람들’로 포장된, 반공과 중산층을 내세운 지배 이데올로기는 묘한 조화를 이루며 사람들을 분리시켰다. “나는 너희와 달라 또는 달라야 해”라는 구분이 “우리도 당신이다”라는 선언을 가로막았다. 힘겨운 싸움은 13일 만에 막을 내렸다.


당시 골리앗 투쟁을 이끌었던 이갑용씨는 자서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 “골리앗(고공농성)에 오를 거라면 계획을 잘 잡아야 한다. 절대 혼자 올라가선 안 되고, 여럿일 경우 고공에서 어떤 일을 할지 프로그램을 준비해야 한다. 책을 읽을 수도 있고, 글을 쓸 수도 있다. 투쟁일기 같은 것을 적어도 좋다. 어떤 경로로 침탈할 수 있는지 면밀히 살펴 대비해야 하고, 건강에 유의해야 한다. 투쟁이 때를 가려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겨울의 고공농성은 되도록 피했으면 한다. 초여름에도 견디기 어려운 하늘 위의 날씨인데 겨울에는 상상 이상이다. 그리고 고공단식은 절대 해서는 안 된다. 단식은 지상에서도 하기 어려운 일이다. 배변 문제 때문에 최소한으로 음식을 조절하다 단식으로 가기도 하고, 음식을 다 아래로 집어던지고 결사항전을 각오하기도 하는데, 고공 단식만은 말리고 싶다.”


하지만 그 뒤에도 많은 사람들이 크레인에 올라야 했다. 살 곳을 강제로 빼앗긴 철거민들은 망루를 세우고 그 위에 올랐다. 지상에서 살 곳을 빼앗기고 내몰린 사람들은 하늘 가까운 망루와 크레인에서 안식처를 찾아야만 했다.


20세기의 소설같은 비극은 21세기 한국에도 계속 재현되었다. 절대 혼자 올라서는 안 된다는 그 크레인을, 초여름에도 견디기 어렵다는 그 크레인을 한진중공업 故김주익 위원장은 혼자 올랐다. 골리앗 투쟁이 노조간부들을 식칼로 찌르고 헬기와 해군함정으로 진압하는 노골적인 폭력에 맞섰다면, 김주익 위원장의 투쟁은 노조간부들을 매도하고 고발하며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은밀한 폭력에 맞섰다. 골리앗 투쟁이 빨갱이로 매도당했다면, 김주익 위원장의 투쟁은 무관심으로 외면당했다.


지상에서 35미터 떨어진 곳에서 그는 가장 강력한 태풍이라 불리던 매미를 견디며 무려 129일 동안 고공농성을 벌였다. “노동자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나라, 그런데도 자본가들과 썩어빠진 정치꾼들은 강성노조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고 아우성”인 나라에서 김주익 위원장은 “잘못은 자신들이 저질러놓고 적반하장으로 우리들에게 손해배상 가압류에 고소고발로 구속에 해고까지 노동조합을 식물노조로 노동자를 식물인간으로 만들려는 노무정책을 이 투쟁을 통해서 바꿔내지 못하면 우리 모두는 벼랑 아래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승리할 때까지 이번 투쟁은 계속되어야 할 것”이라 부르짖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스스로 목을 매어야 했다. “휠리스인지 뭔지를 집에 가면 사주겠다고 크레인에 올라온 지 며칠 안 되어서 약속을 했는데 그 약속조차도 지키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다.”는 유서를 남긴 채.

세상은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까지 그를 주목하지 않았다. 언론매체는 태풍 매미의 강력함을 연일 방송했지만 그 태풍을 견디며 한 사람이 크레인 위에 버티고 있다는 소식을 알리지 않았다. 그를 인터뷰한 사람도 없었다. 그가 죽음을 택하고 나서야 많은 이들이 그를 기억하며 눈물을 훔쳤고, “35m 상공에서 100여 일도 혼자 꿋꿋하게 버텼지만 세 아이들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에는 아픈 마음을 숨기지 못한 아버지. 그 아버지를 대신해서 남겨진 아이들에게 인라인 스케이트를 사준 사람이 있습니다. 부자도, 정치인도 아니구요. 그저 평범한, 한 일하는 어머니였습니다. 유서 속에 그 휠리스 대목에 목이 메인 이 분은요, 동료 노동자들과 함께 주머니를 털었습니다. 그리고 휠리스보다 덜 위험한 인라인 스케이트를 사서, 아버지를 잃은, 이 위험한 세상에 남겨진 아이들에게 건넸습니다. 2003년 늦가을. 대한민국의 노동귀족들이 사는 모습입니다.”라는 故정은임 아나운서의 멘트는 그의 죽음 뒤에도 인터넷을 떠돌고 있다. 이 역시 한국에서는 일상이 되어버린 소설같은 현실이다.


사람들은 스스로 크레인에 올랐다. 하지만 그들은 크레인으로 들려질 수밖에, 내몰릴 수밖에 없었다. 지상에서 수십 미터 떨어진 위험한 곳에 그들은 둥지를 틀어야만 했다. 높은 크레인을 오르며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희망을 품었을까? 이번에 올라가면 다시 지상에 발을 디딜 수 있을 거라 생각할까?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그 높은 곳으로 올라간 사람들을 왜 우리는 보지 못했을까? 크레인으로 들려진 사람들의 꿈은 지상에서 꾸역꾸역 일상을 사는 우리들의 꿈과 달랐을까? 왜 우리는 눈을 감았을까?


이 외면의 역사를 이야기하지 않고 희망을 얘기할 수는 없다. 그동안 크레인에서 떨어진 땀과 고통의 눈물이 지상으로 스며들지 못했다면, 지금과 같은 분노의 불길이 타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의 희망은 과거의 절망을 인정하고서야 온전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고통의 기억만을 부여잡자는 건 아니다. 모든 희망이 다 이루어졌다면 아마 희망이라는 말도 소용없을 것이다. 희망이 필요한 건 우리 사회가 절망적이기 때문이다. 연꽃이 썩은 연못에서 피듯 희망도 절망 속에 핀다. 이제 희망을 얘기할 시간이다.



2. 타지 않은 버스에 관한 이야기



희망버스에 관한 얘기를 할 텐데, 미안하게도 나는 ‘아직’ 희망버스를 타지 못했다. 갓 돌을 지난 아이를 데리고 희망버스를 타기엔 여유가 없었다. 경험하거나 목격하지 않은 사건에 관해 말을 꺼내는 건 참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 고향이 부산이고 영도는 내가 힘겹게 고등학교 시기를 버티던 장소였다. 한진중공업은 당시 내 아지트였던 태종대에 가기 위해 지나쳐야만 했던 곳이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변하지 않은 그 곳 사람들, 그 곳 지리가 머릿속에 그려진다.


사실 직접 경험하면 알게 될 만한 이야기를 경험하지도 못한 내가 간접적으로 얘기한다는 건 꽤나 주제넘은 짓이다. 그럼에도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은 건 희망버스 참가기가 아니라 희망버스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희망버스를 달리게 하는 에너지가 무엇인지 나도 궁금했다.


타보지 않았기에 버스를 탄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희망버스를 기획한 사람들이 만든 『깔깔깔 희망의 버스』(후마니타스, 2011년)를 읽으며 웃음은커녕 눈시울만 붉혔다. 시인의 예찬이 없어도 그동안 집회현장, 추모집회에서 발표된 김진숙 씨의 말과 글은 이미 한 편의 문학이었다.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희극을 예감하는 사람을 보며 나는 깔깔깔 웃을 수 없었다. 어느 대목에서 깔깔깔 웃어야 할지 좀 난감했다.


그래서 인터넷을 검색했다. 타지 않은 버스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해 희망버스를 탔던 사람들이 언론에 기고하거나 인터넷에 올려놓은 글들을 검색해서 읽어봤다. 그러면서 희망버스 외에도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희망을 찾으러 떠난 사람들이 있었고 직접 부산으로 가지는 못했어도 각지에서 희망을 지지하고 보살폈던 사람들이 많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희망버스는 부산으로 떠난 버스가 아니라 부산에서 전국으로 떠난 버스였던 셈이다.


인터넷에서 접한 대부분의 글들은 희망버스에서 희망을 발견했고 그 희망을 일깨워준 소금꽃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자발적으로 돈을 내고 1박 2일을 내어 희망버스를 탄 사람들, 그들에게 온갖 물건과 마음을 건넨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한국에 1만 명 이상 있다는 건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신문과 잡지들이 앞을 다투어 특집을 기획했고 다양한 말들이 쏟아져 나왔기에 그런 얘기를 반복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다만 영의정 버스(청소년 활동가들의 버스), 퀴어버스, 장애인연대버스, 농민-노동자 연대버스가 등장했다는 점은 기억해 둘만하다. 숨어야 했던 사람들이, 서로를 마주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손을 잡는 건 어떤 모순과 비판꺼리가 있더라도 좋은 일이다.


그리고 단지 위로하거나 확인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뭔가를 서로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들(개인이든, 단체이든)의 수가 늘어난다는 점 또한 주목할 만하다. 시국회의와 만민공동회에서 시민들은 서로의 말과 생각을 나눌 뿐 아니라, 양말을 나누고 밥을 나누고 약을 나누고 음악과 미술, 웃음과 눈물을 나눴다. 무한경쟁의 시대, 자기 앞가림만 강요하는 시대에 생판 모르는 사람들과 뭔가를 나눈 기억은 우리가 존엄한 사람으로 살도록 도울 것이다. 사실 그동안 어느 집회장을 가든 그런 나눔은 하나의 문화였지만 이제 그 나눔이 일상을 집회의 장으로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 즐거운 상상을 하게 되었다.


인터넷을 뒤지다보니 희망버스를 욕하는 사람들도 만나게 되었다. 몸소 부산으로 내려가 간만에 완장 차고 어깨에 힘준 어버이연합도 있고, 똥오줌 못 가리는 대학생들도 있었다. 종북좌파, 빨갱이 색출에 여념이 없는 구국시민들도 있고, ‘영도주민’이라며 희망버스를 절망버스라고 욕하는 사람들도 인터넷 댓글에 자주 등장했다(내가 영도주민이라도 제법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정말 영도 주민일까?). 어쨌거나 그들도 자신이 존재해야 할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나름 애쓰고 있었다.


그렇게 애쓰는 이들보다 내 마음을 더 불편하게 만든 사람들은 희망버스를 ‘타지 않을’ 사람들이었다. 나처럼 버스를 못타 못내 미안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도 있지만 희망버스를 비아냥대는 사람들도 있었다(내 눈엔 비아냥으로 보였다). 스머프 마을의 똘똘이 스머프를 보는 느낌이랄까. 사람들은 분주히 일하고 있는데 옆에서 가르치고 충고하려 드는 불편한 사람들. 눈 앞의 사람에게 직접 묻지 않고 몇 푼의 얄팍한 지식에만 의존하려는 사람들.


단지 불편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그런 얘기를 보며 90년대 초반의 고백논쟁을 떠올렸다. 당시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과 사회주의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에서 일했던 신지호 씨는 “당신은 아직도 혁명을 꿈꾸는가”라는 글로 고백운동(?)의 테이프를 끊었다(그는 얼마 전 폭탄주 음주토론으로 술 먹으면 말 더 잘한다는 상식을 굳이 몸소 증명했다). 그 뒤로 운동권이었다는 사람들의 간증이 이어졌고 그 사람들이 지금은 뉴라이트라는 기괴한 이권모임(이념모임이 아니다!)을 꾸리고 있다. 희망버스를 비아냥대는 이들의 행보는 이런 과거와 다를까?


사회디자인연구소의 김대호 소장은 2011년 8월 2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희망버스에서 희망을 찾을 수가 없다”고 얘기했다. 한진중공업의 문제는 조선산업의 문제이고, 중국과의 경쟁에서 밀리는 조선사업의 구조조정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현실을 잘 아는 노조의 합의와 판단을” 김진숙씨가 “시민들의 상식에서 동떨어져” 무시하고 있고, 조남호 회장이 무리하게 경영하지 않았는데도 진보가 이런 판단을 계속 무시한다면 “국민 다수와 대부분의 기업주들은 진보의 집권을 ‘한국의 재앙’이자 ‘절망’으로 여기지 않겠는가”라고 그는 물었다. 아울러 “정리해고 없는 세상은 사회주의”이고 “‘정리해고 철폐’라는 우상을 숭배해선 결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사실 2010년 제주인권회의에서도 이 사람의 얘기를 들으며 참 불편했는데 그 때도 이와 비슷한 얘기를 반복했다. 그 때도 그랬지만 이 인터뷰를 보며 왜 그가 ‘진보논객’이라 불려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과거에 운동경력이 있으면 모두 진보라 불려야 할까? 그러면 김문수나 신지호, 이재호 씨도 모두 진보정치인이라 불러야 한다(그렇게 부르면 아마도 보수를 자처하는 그 사람들은 화를 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시대의 진보가 참으로 가볍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세 치 혀에 진보가 놀아날 수 있다면, 나는 진보를 버리고 싶다. 그리고 집권을 위해서 진보가 현실과 타협을 한다면, 그런 진보가 집권하는 걸 보느니 차라리 진보가 망하는 걸 나는 기다리겠다.


비슷한 맥락에서 《한겨레신문》과의 2011년 8월 4일 인터뷰에서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사태 해결을 요구하면서 시작된 희망버스는 정리해고 철폐라는 실현 불가능한 목표를 외치고 있다”며 “좀 더 현실적인 목표를 주장해야 한다”고 주문하는 방송통신대 김기원 교수의 말도 불편했다. 그의 진심이 김대호 소장보다는 조금 더 우리 사회에 닿아 있음을 알지만 회사 쪽과 함께 대책을 찾아봐야 한다는 얘기는 참 한가로운 얘기로 들렸다. 그렇게 함께 대책을 논의할 수 있다면 누가 높은 크레인에 오르겠는가?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공리(公理)는 현실과 상식이라는 말로 재단될 수 없다. 한국 현실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비현실과 비상식이 지배하는 우리 현실을 어찌 현실이라 부를까. 노동운동이 민주노조를 세우기 위해 어렵사리 마련한 복수노조 허용방침은 허용 이후 불과 한 달만에 322개의 노동조합이 새로 만들어지는 쾌거(?)를 이뤘다고 한다. 노동조합이 새로 만들어졌다니 기뻐할 일이지만 이 노조들 중 대부분의 노조가 회사 측이 만든 노조라고 한다(대표적인 것이 삼성 에버랜드의 노동조합이다). 대학의 청소노동자들이 어렵사리 만든 노동조합들도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다(각 대학의 노동자들이 만든 산별노조는 이화여대나 연세대에서 새로이 만들어진 개별노조에 교섭권을 빼앗길 처지라고 한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는 어떤 상식을 얘기할 수 있을까? 경북 구미의 전자부품업체 KEC는 노조의 파업에 맞서 1년이나 직장폐쇄를 한 뒤에, 공장으로 복귀한 노조원들에게 파업가담 정도에 따라 다른 색깔의 티셔츠를 입히고 정신교육을 시키고 있다.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현실에서 우리는 어떤 현실적인 상식을 따라야 할까?


이런 비현실은 노동자만의 일이 아니다. 노동자에게 해고가 살인이라면, 농민에게는 땅의 포기가 곧 살인이다. 땅 없는 농민이란 말 자체가 모순이다. 하물며 농민들에게는 올라갈 크레인조차 없다. 허나 농업을 산업으로 보고 취사선택하듯이 이쪽 산업을 저쪽 산업과 거래하는 사람들에게는 땅의 포기가 곧 살인이라는 말도 우상이나 비현실적인 얘기로 들릴 것이다. 자살하는 농민들이 목숨으로 증명하는 공리를 우리는 비현실적이라며 외면해야 할까? 그런 외면이 부메랑처럼 우리의 삶을 파고들지는 않을까? 이 현실에서 눈을 돌린다면 우리가 대체 어떤 대안을 얘기할 수 있을까?


기득권층이 좌지우지하는 ‘말로만 공화국’에서 정의로운 공리는 불가능한 것을 상상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이 상상하는 최악의 상황을 벗어날 수 있다. 희망버스를 타는 사람들은 기득권층의 상상에 맞서는 정의로운 상상이다.


나는 김진숙 씨가 크레인에 텃밭을 만들고 식물을 키운다는 얘기를 들으며 감탄 또 감탄을 했다. 고공에서도 지상에서의 삶이 이어질 뿐 아니라 그곳이 지상으로 변할 수 있음을, 사회운동이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를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3. 위로와 희망의 사회운동



그동안 여러 학자들이 촛불집회나 희망버스를 보며 시민운동과 노동운동의 분리,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분리 등을 한국 시민사회운동의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핵심적인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런 분리보다 일터와 삶터의 분리, 일상과 제도의 분리, 활동가와 시민의 분리, 그로 인한 운동의 선택과 집중전략이 더욱더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시민운동은 그 시작부터 전문가 중심이었고, 노동운동은 80년대부터 대기업 남성 정규직 노동자 중심이었다. 이것은 최근에 갑자기 불거진 문제일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시민운동과 노동운동의 부진이 시민들의 능동성을 강화시켰다고 보기도 어렵다. 오히려 운동이 공감하지 못하거나 채우지 못한 부분을 시민들이 직접 채우려 뛰어들고, 운동이 주목하지 않던 주체들이 스스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고 봐야 한다. 전문가나 지식인들처럼 거시적인 전망이나 정책을 제안하지는 못하지만 시민들은 어떤 사건에 공감하거나 분노하며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행동으로 드러낼 수 있다. 이런 시민들의 공감과 분노, 직접행동이야말로 사회를 달구는 군불이다. 이렇게 보면 시민사회운동과 시민의 직접행동이 서로를 멀리할 이유는 없고 외려 서로 끌고 당기며 돌봐줘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서로 눈을 맞추지 못하고 있다. 언제나 그랬듯이 기득권층은 눈을 마주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시민과 운동을 이간질한다. 기득권층이 공격하는 건 시민사회운동이 아니라 그 운동에 관심을 둔 시민들의 마음이다. 경찰의 방패와 캡사이신이 공격하는 건 정의로운 장에 서려는 시민들의 의지이다.


서로 눈을 맞추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건 기득권층만이 아니다. 촛불집회 때와 마찬가지로 반짝하고 불타올랐다 수그러드는 건 사건 속의 사람들이 아니다. 실제로는 그 사건에 콩놔라 팥놔라 훈수두기 좋아하는 지식인들이 그런 모습을 보였고 지금도 그렇다(지식인들이 할 역할은 훈수가 아니라 참여이다).


시민들의 직접행동은 시민사회운동을 대체하려는 게 아니다. 아니, 그럴 필요도 없고 사실 대체는 불가능하다. 일상을 사는 사람들이 전업 활동가로 일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직업적인 시민사회운동의 노하우와 조직력은 시민들에게 부족한 힘을 제공할 수 있다. 반면에 조직운동이 둔감해진 일상의 영역을 시민들의 직접행동은 활성화시킬 수 있다. 시민사회운동이 일상을 제도화하고 시민의 직접행동이 제도가 일상으로 스며들도록 발판을 마련한다면, 이렇게 서로가 상대방의 활동에 주목하며 힘을 실어줄 수 있다면, 모두의 힘이 강해질 수 있다.


시간 되면 뛰어들었다 시간 없으면 어쩔 수 없이 다음을 기약하는 건 일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자연스런 일이다. 그런 점에서 내가 없는 ‘공백’을 메워주고 ‘전망’을 제안하는 시민사회운동단체의 역할은 중요하다. 따라서 그런 단체들의 힘이 빠지지 않도록, 국가나 자본에 휘둘리지 않도록 기반을 단단하게 다져줘야 한다. 하루에 밥 한 숟갈씩, 일주일에 담배 한 갑, 소주 한 병, 그렇게 모은 정성은 단체에게 힘을 줄 수 있다. 인권센터를 짓는데 힘을 보태고 사회적 파업기금을 모으고 강정마을 후원주점에 참여하는 시민들에게서 이미 그런 움직임을 찾아볼 수 있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영화배우 김꽃비와 제작자 김조광수, 감독 여균동이 보여준 ‘I ♡ CT85, GANG JUNG’의 퍼포먼스도 그런 선언이 아닐까? 그에 앞섰던 배우 김여진과 날라리 외부세력도 마찬가지이다. 드라마와 영화보다 우리 현실이 더 드라마같고 영화같다는 점을 배우와 감독들도 깨닫기 시작했다. 일상생활 속에서 연대는 다양한 형태로 실현되어 왔고 더 다양하게 발전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희망버스를 ‘촛불의 진화’라고 부르는 게 좀 불편하다. 왜냐하면 진화라는 말은 발전이라는 말처럼 과거를 부정하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희망버스는 진화가 아니라 ‘개화’이다. 희망버스는 더 이상 그들을 나와 다른 사람으로 외면하지 않겠다는 하나의 선언이다.


죽은 그가 나일수도 있음을, 크레인에 들려진 사람이 나의 친구, 나의 형제․자매, 나의 부모․자식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희망은 싹을 틔울 수 없다. 희망버스는 권력과 자본이 만든 경계를 허물고 “그가 나일 수 있다”고 인정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런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히 선언하도록 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사회의 위기는 사람들에게 다시 ‘공통의 정체성’을 부여하고 있다. 모든 차이를 무로 만드는 공통성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로서의 공통성. 나는 당신과 다르다가 아니라 나도 언젠가는 당신의 처지가 될지 모른다는 공통성, 그렇기에 함께 손을 잡아야 한다는 깨달음. 유럽의 ‘브뤼셀 아고라’, 뉴욕의 ‘제너럴 어셈블리’, 한국의 ‘희망버스’는 그런 공통성과 깨달음을 반영한다.


그리고 이런 선언은 확산되고 계속 소통되고 있다. 여전히 신문이나 TV는 이런 선언을 제대로 전하지 않고 있지만 트위터나 페이스북같은 소셜 네트워크를 타고 소식은 돈다. 주류 언론매체는 여전히 이권에 목을 매고 있지만 사람들의 대화는 늘어나고 수다스러워지고 있다. 김진숙씨가 핸드폰을 들고 크레인에 오른 것도 김주익의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일 것이다.


허나 희망이 항상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이 글을 쓰다 몇 년 만에 아는 동생을 만났다. 동생은 부산에서 경찰로 일한다.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다 둘째 얘기가 나왔다. 희망버스를 막고 대기하는 일을 하다 아이가 유산되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무슨 말을 해줄까 단어를 찾았지만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희망버스가 우리 사회의 희망이라는 글을 쓸지라도 아이를 잃은 동생에게 희망을 얘기할 수는 없었다.


물론 이것은 나의 문제도 동생의 문제도, 시민과 경찰의 문제도 아니다.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비극을 만든 장본인은 따로 있으니 우리의 탓이 아니다. 허나 그렇다고 마음이 아프지 않을 수는 없다. 비극은 소리없이 찾아와 희망을 비틀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희망을 품으면서도 세심하게 서로의 고통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래야 함께 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함께할 사람, 함께 하고픈 사람에게로 연대가 넓어질 수 있다.


아픈 이들에게 필요한 건 충고나 동정이 아니라 ‘위로’이다. 힘을 가진 자들의 사회는 위로를 나약하다 말하지만 자신을 약하다 생각하지 않고 타자를 동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나누는 위로는 결코 약하지 않다. 위로는 우리가 느끼는 고통의 무게를 덜고 같이 일어설 수 있게 한다.


얼마 전 루시드폴의 노래 ‘고등어’를 우연히 듣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나를 고를 때면 내 눈을 바라봐줘요. 나는 눈을 감는 법도 몰라요. 가난한 그대 날 골라줘서 고마워요. 수고했어요. 오늘 이 하루도.” 눈 감지 않고 따뜻하게 손 잡으며 고마워요, 수고했어요, 라고 얘기하는 연대만큼 강한 것이 있을까?


나는 ‘결사항전’, ‘사수’같은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 결의를 보여주기에 좋은 말이지만 그것은 나의 선택을 제한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크레인에 오르는 운동도 필요하지만 크레인에 오른 사람을 살아 내려오게 하는 운동도 필요하다. 지지하고 격려하는 운동도 필요하지만 위로하고 보듬어 안아주는 운동도 필요하다.


김진숙 씨는 크레인 위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지금 주익 씨가 앉았던 자리에 앉아 하루를 보내고 주익 씨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잠을 자고 주익 씨가 살아생전 마지막 봤던 세상의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저는 주익 씨가 못해 봤던 일, 너무나 하고 싶었으나 끝내 못했던 내 발로 크레인을 내려가는 일을 꼭 할 겁니다. 그래서 이 85호 크레인이 더 이상 죽음이 아니라, 더 이상 눈물이 아니라, 더 이상 한과 애끓는 슬픔이 아니라 승리와 부활이 되도록 제가 가진 힘을 다하겠습니다.”
이 힘에 우리의 힘을 보태야 한다. 날마다 내려오는 연습을 하는 그 사람이 살아 내려올 수 있도록.




4. 파란 나라와 빨간 나라



우리 아이는 지금 15개월이다. 아이를 키우다보니 지금 현재만큼 미래가 걱정이다. 일본 대지진에 이어 후쿠시마 핵발전소의 사고를 보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 어려웠다. 전 세계적인 탈핵 움직임에도 원자력 르네상스를 부르짖는 이상한 나라, 핵발전소의 고장이 잇따르는데도 괜찮다며 안심하라고 강요하는 나라, 사계절은 옛말이고 열대 폭우가 내리는 나라에서 아이를 키워야 하니 걱정이 태산이다.


요즘 아이랑 같이 ‘뽀로로와 함께 노래해요’를 자주 본다. 동요가 쭉 나오는데 그 중엔 ‘파란나라’라는 동요도 있다. 대학 때는 이 노래를 ‘빨란 나라’로 바꿔서 부르기도 했는데. 사실 색깔이야 빨갛든, 파랗든 그게 뭐 그리 중요할까. 노래가사처럼 우리가 한번 해 보고 온 세상 모두가 손을 잡고 함께 바꿔갈 수 있다면.


사실 온 세상이 한 가지 색깔만 가져야 한다는 건 끔찍한 상상이다. 색깔보다 중요한 건 우리가 손을 잡고 어떤 나라를 상상하고 그 나라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간다는 점이다. 당신은 지금 누구의 손을 잡고 있는가?

  1. 나는 비정규직 노동자이다. 강사도 아니고 교수도 아닌, 계약서도 없이 1년 마다 재계약을 하는 이상한 신분의 노동자이다. 대학이 O15B나 토이도 아닌데 객원교수라니... 정리해고, 산업재해, 이런 말을 할 수 없는 이상한 ‘공장’ 대학에서 일한다. 그런 신분이니만큼 눈치도 보지 않고 쓸데없는 요구에도 응하지 않지만 불안감은 어쩔 수 없고, 아이가 태어난 뒤에는 더욱더 그렇다. 한국의 대학이 변할 수 있을까? 큰 기대는 없다. 나는 동네의 도서관에서 반상근으로 일을 한다. 몇 년 전 강의를 했던 도서관의 인상이 강해서 그 동네로 이사를 왔다. 처음에는 동네 청년들 멘토를 하다, 도서관의 이런저런 일에 한발가락씩 담그다, 그냥 눌러앉게 되었다. 도서관에 어떤 책을 꽂고 어떤 책을 뺄지, 도서관이 커뮤니티 공간으로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게 내 몫이다. 재밌는 일은 일로 하지 말라는데 살다보니 일로 해도 재밌는 일도 있다. 매달 후원하는 단체를 세어보니 15개 정도 된다. 매달 30만원 정도를 회비로 낸다. 회비만 내지 않고 운영위원을 맡거나 이런저런 일을 돕는 단체들도 몇 되지만 회비와 마음으로만 지지를 보내는 단체들이 더 많다. 간혹 술 한잔 나누며 얘기도 나누고픈 활동가들도 많다. 사정이 어려워서 후원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겠다는 말을 꺼내지 않도록 알바도 종종 뛴다. [본문으로]
다른 사람의 페이스북에서 아래의 사진을 봤다.


원전 사고 이후 일본 각지에서 측정된 세슘의 양이란다.
평년과 금년의 수치가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세슘의 반감기는 30년.
세슘을 마시며 살아야 하나.

바로 옆 나라 한국은 무조건 안전하니 안심하란다.
이런 상황이야말로 진정 파국이다.
'닥치고 정치'라는 구호만큼 절실한 구호는 '닥치고 반핵'이다.

일본에서도 녹색당이 창당될 것 같은데, 한국에서도 곧 녹색당이 창당될 것 같다.
반핵을 중심으로...
원자력과 反민주주의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만큼, 반핵이 가능하려면 한국의 정치/경제/사회적인 구조 모두가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근본적인 변화가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가자...

“어디로든 갈 수 있는 튼튼한 지느러미로/ 나를 원하는 곳으로 헤엄치네. 돈이 없는 사람들도 배불리 먹을 수 있게/ 나는 또 다시 바다를 가르네.” 루시드폴이 부른 ‘고등어’라는 노래의 가사이다. 노래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울렁거린다. 고등어라는 존재가 주는 감동보다 그 존재를 바라보는 가수의 시선 때문이다. 고등어를 보며 “나는 참 바보다. 엄마만 봐도 봐도 좋은 걸”라고 노래하는 김창완의 시선과는 또 다른 따뜻함과 공감이 가사에 묻어난다.


어쩌면 사회운동, 인권운동도 고등어의 처지와 비슷하지 않을까? 나를 원하는 곳으로 헤엄쳐 가는 튼튼한 지느러미. 부자들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이 배불리 먹는 삶을 위해 자기를 아끼지 않고 바다를 가르는. 그런 존재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누군가는 위안을 얻을 것이다.


허나 고등어가 단지 먹히기 위해 태어난 존재는 아닐 것이다. 그 나름의 삶이 있고 꿈도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평생을 투쟁으로 살아온 사람들에게도 해방이나 변혁이라는 말로만 설명되지 않는 꿈과 소망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 설명되지 않는 꿈과 소망에 관해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을까?



‘새로운’ 사회운동의 출현?



내가 이 연재를 시작한 이유 중 하나는 새로움에 대한 거부반응이었다. 새로운 사회운동이 출현했다는 환호를 나는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을 믿어서도 아니고 어제와 같은 오늘은 없다는 말을 싫어해서도 아니다. 새로운 것의 등장을 기대하지만 그 새로움이 아무런 기반 없이 출현했다고 믿지는 않기 때문이다.


사실 인류는 끊임없이 새로이 태어난다. 사상가 아렌트(H. Arendt)가 말한 ‘탄생성(natality)’의 의미처럼, 새로운 사람이 태어나지 않는다면 인류 자체(human beings)가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새로운 인간의 탄생이 새로운 사회의 출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새로이 태어난 인간은 이미 태어난 사람과 세계(world)에서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이전 세계를 완전히 파괴하지 않는 한 완전한 새로움은 없다. 특히 세계를 변화시키려는 사회운동이 그런 새로움을 취하기란 불가능할 뿐 아니라 위험하다고 나는 믿는다.


예전에는 새로움에 들뜨는 분위기를 단지 갈망이라 생각했다. 워낙 현실이 갑갑하니 뭔가 새로운 게 나타나길 기대하는 사람들의 흥분이라 여겼다. 그런데 요즘엔 생각이 좀 달라졌다. 새로운 것에 대한 환호는 그 새로운 것을 자신의 기반으로 삼으려는 사람들의 의도로 느껴진다. 특히 지식인들에게서 그런 의도를 찾아볼 수 있다. 새로운 것이라며 이전과 다른 양식을 만들고 그것을 설명하고 주도하는 과정에서 지식인들의 욕망이 개입하는 듯하다. 그래서 나는 새로움에 대한 환호를 언제나 의심스런 눈초리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촛불집회나 희망버스는 분명 기존에 찾아보기 ‘어려웠던’ 운동이다. 하지만 보기 어려웠던 것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 역사를 되짚어보면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이 자존심을 버리지 않고 권력과 자본에 맞섰던 수많은 사건들을 찾을 수 있다. 기술이 발달하면서 방법은 새로워지겠지만 그 뜻과 과정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우리가 그런 사건들을 기억하지 못할 뿐이다.


예를 들어 1924년의 암태도 소작쟁의는 최초의 소작쟁의이자 성공적인 쟁의로 불린다. 부조리한 소작료를 거부하는 불납동맹이 결성되고, 지주측이 이를 탄압하고 식민경찰이 간부들을 구속시키자 소작인들은 면민대회를 열고 저항에 나섰다. 이들은 소작인들이 구속된 목표경찰서와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으로 몰려갔고 석방하지 않으면 법정에서 굶어죽겠다고 결의했다. 남녀노소 모두가 굶어죽기를 각오한 아사동맹이 4일을 넘기자 언론이 이 사건을 보도하기 시작했고, 전국에서 모금운동이 벌어지고 변호사들이 변호를 자처했다.


작가 송기숙은 소설 《암태도》에서 당시 소작인들의 고민을 글로 복원했다. “요새 세상에는 싸운다는 것이 그냥 버티는 이렇게 버티는 것만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한쪽에서는 이렇게 버티면서 또 한쪽으로는 신문으로 세상에다 대고 왜장을 치고, 양수겹장으로 몰아쳐야 해요. 개명한 세상에 산다는 것이 뭡니까? 연락선 놔두고 풍선 타고 다니던 생각만 하면 그만치 세상에서 뒤떨어지는 것이 됩니다.…옛날 동학난리 때도 요새같이 신문만 있었더라면 일이 그렇게 전라도 쪽에서만 일어나다 말지는…….” 기술은 달라졌지만 기술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조건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자세히 보면 사람들을 동요시키던 논의꺼리도 변하지 않았다. 《암태도》에서 소작인들은 투쟁을 방해하는 사람들에 관해 회의를 열며 이렇게 얘기한다. “저자들하고 실랑이가 벌어졌을 때 부애난다고 혹시라도 저 작자들한테 손을 대서는 큰일납니다. 악담은 얼마든지 퍼부어도 좋지만 손을 대서는 절대로 안돼요. 혹시 저쪽에서 먼저 손을 대더라도 그냥 맞아요. 저놈들은 내중에 가서는 이쪽에서 그렇게 손을 대도록 수를 쓸지도 모릅니다. 경찰을 불러들일 언턱거리를 만들자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부애난다고 때리는 것은 저자들 수에 말려드는 것이고, 같이 치고 맞더라도 경찰을 불러들일 구실이 되기는 마찬가지니까 결국 이 쪽이 지는 것입니다. 이 점 각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1924년의 일이니 무려 87년 전이다. 허나 지금의 상황과 얼마나 비슷한가?


암태도 소작쟁의 당시 소작인들이 내세웠던 조건은 잡혀간 소작인들의 석방과 소작료율을 7, 8할에서 4할로 내리는 것이었다. 당시 5, 6할을 하던 소작료를 4할로 내리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불납동맹, 아사동맹을 각오했던 암태도민의 저항은 그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지주측은 소작료율 인하와 함께 2,000원이라는 큰 돈을 소작인들에게 기부해야 했다. 희망버스와 관련해 불가능한 요구라니, 산업계의 동향을 파악하지 못한다느니 떠들어대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우리 역사이다.


마찬가지로 1919년 3․1운동 때 사람들이 외쳤던 “대한독립 만세”는 불가능한 구호였다. 어쩌면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이라는 구호보다 훨씬 더 실현 불가능한 구호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전국에서 그 구호를 외친 수십만 명의 민중들은 모두 어리석은 사람들이었을까? 지금처럼 조직을 주도하는 사람들도 없는 상태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 구호에 자신의 불만과 꿈을 걸었다. 구호는 하나였지만 그 속엔 민중들의 다양한 소망과 꿈이 담겨 있었다. 일제 관리의 못된 행동에 대한 불만, 무거운 세금과 부역에 대한 불만, 인민의 권리를 무시하는 정책에 대한 분노, 강제로 묘목을 심게 하는 것에 대한 분노, 독립된 삶을 살고자 하는 꿈, 공동체와 나라를 다시 세우려는 꿈 등이 그 구호에 뒤섞였다.


그 불가능한 구호가 아니라면 무엇으로 그 다양한 꿈들을 담을 수 있을까? 제 아무리 운동경력이 화려하고 오래 되었다고 한들, 아무리 많은 지식을 습득했다고 한들, 아무리 대단한 비전을 갖고 있다고 한들, 하나의 구호로 터져 나오는 그 수많은 꿈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는 사회를 바꿀 수 없다. 수많은 시민의 이름을 팔아도 그는 홀로 있는 자일 뿐이다. 홀로 있는 자는 운동을 하는 자가 아니다.



운동과 정서, 연대



나는 문제를 추상화시키면서 자신들이 그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에 관한 답을 가지고 있다는 사람들을 믿지 않는다. 사회를 바꾸는데 어찌 모범답안이나 정답이 있을까. 다른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얘기는 반갑지만 옳다, 그르다의 관점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은 밥맛이다. 누구나 훈수를 둘 수 있지만 아무도 자신의 생각을 정답이라 주장해서는 안 된다. 정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운동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렇다면 그 과정을 움직이는 힘은 무엇일까? 당연히 이념과 조직이 사람들을 움직인다. 인적․물적 자원을 조직하고 동원하는 단체도 필요하고, 그런 단체가 내세우는 이념도 중요하다. 그런데 관변단체가 폭넓게 퍼져있고 노동조합과 같은 기본조직조차 제대로 조직되지 않은 한국사회에서 조직화되지 않은 시민들을 움직이는 에너지는 이념이나 단체의 힘으로만 구성되기 어렵다. 만일 이념이나 조직만이 문제라면 김대호나 김기원이 지적했던 조선산업계의 동향이나 실현가능한 정책이 중요할 수 있다. 허나 그것이 사람들의 마음과 몸을 움직이는 게 아니라면?


식민지 시기 농민운동과 관련된 책을 뒤적이다 재미있는 구절을 봤다. 3․1운동 당시 “주변 마을이 다 하니까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라는 생각에서 이른바 ‘체면시위’라는 것이 등장했다고 한다. 이 체면시위의 규모가 얼마나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체면이라는 것도 사람들을 움직이는 중요한 동기이다.


지금 우리라고 해서 다를까? 집회 때마다 나부끼는 깃발도 어느 정도는 그런 체면을 상징한다. 그리고 ‘나도 그곳에 있었다’고 증명하고 싶어 하는 ‘인증’욕구도 그런 체면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체면 차리기’라고 비난하려는 게 아니다. 누구나 체면을 세우려 드는 건 아니고 체면이 밥 먹여주나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기 때문이다. 체면을 생각한다면 평화를 깨고 남의 삶터에 침입하는 경찰이 되지 않을 것이고, 어른의 멱살을 잡는 용역깡패가 되지도 않을 것이다. 체면을 세우려는 용기는 품위있는 사회를 만든다. 단 하루라도 품위있게 살고자 하는 체면이 하루하루의 일상이 될 때 운동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어떤 사건에 대한 분노나 공감도 사람들을 움직인다. 한 사람이 129일 동안 높은 크레인에 올라가 모진 비바람을 견디며 외쳤건만 기업과 세상은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까지 그 목소리를 무시했고 그 사실에 사람들은 분노했다(그 사연을 소개한 故정은임 아나운서의 멘트가 아직도 인터넷을 떠다닌다). 시간을 더 앞으로 돌려보면 1991년 5월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가 안양병원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고 많은 노동자들이 분노했다. 그러니 지금 85호 크레인에 올라가 있는 사람은 한 명이 아니다. 김진숙의 어깨 위엔 여러 사람들의 짐과 꿈들이 실려 있다.


분노하는 사람들에게 분노하지 말라고 하는 건, 냉정하게 이성을 차리고 이해관계를 따지자고 얘기하는 건 그 분노의 원인을 인정하지 않는 위선이다. 그 속에는 공감하지 않고 타자의 꿈을 배제하려는 폭력의 싹이 똬리를 틀고 있다. 반면에 공감이나 정서를 담은 합리성은 삶의 다양성을 받아들인다.


그런 합리성에 바탕을 둔 위로의 마음도 사람들을 움직인다. 누군가는 크레인 위에 올라 있어야 희망버스가 출발할 수 있다. 그 누군가가 꼭 나일 필요는 없지만 그 버거운 짐을, 자신의 다른 소망과 꿈을 포기하고 그 짐을 지려는 사람을 위로하고픈 마음. 평생을 투사로 싸워주길 기대할 수도 있지만, 그리고 그이가 삶을 선택할 수 있고 때론 쉴 여유를 가졌으면 하는 생각도 든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있다. 홀로 크레인에 올라간 이를 보며 우리가 건네고 싶은 그 많은 말들이 희망버스로 이어졌을 것이다. 먼 발치에서나마 그 얼굴 한번 보고 건강하세요, 꼭 이기세요, 라고 말하고픈 그 맘이, 나도 힘들지만 함께 힘을 내요, 라고 말하고픈 그 공감이 희망버스를 움직이는 에너지이다. 또 다른 현장에서 열심히 싸우는 사람들이 당신의 승리로 우리도 힘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연대의 마음이 사람들을 움직인다. 희망버스의 희망은 하나일 수 없다.


그런데 소위 ‘운동권’은 위로에 인색하다. 고맙다, 수고했다며 손 한번 꼭 쥐어주고 등 한번 두드려주면 될 텐데 그런 정서에 익숙하지 않다. 운동의 결과와 상관없이 그 운동을 책임졌던 사람들에게 우리는 어떤 말을 건네고 있을까? 앞서 루시드폴의 ‘고등어’라는 노래를 얘기했는데, 그 노래의 후렴구는 이렇다. “나를 고를 때면 내 눈을 바라봐줘요. 난 눈을 감는 법도 몰라요. 가난한 그대 날 골라줘서 고마워요. 수고했어요 오늘 이 하루도.”


위로는 동정이 아니다. 고맙고 수고했다고 얘기하는 게 어찌 동정일까. 동정은 사람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지만 위로는 상처를 입히지 않는다. 왜냐하면 위로는 동병상련(同病相憐)의 감정, 즉 같이 아파하는 감정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내 상처를 걱정하는 마음이 우리 상처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퍼진 것이 위로이니 위로는 서로의 마음을 분리시키지 않고 연결시킨다. 위로는 계속 꿈을 꾸자며 서로를 다독인다. 서로에 대한 위로 없이 연대가 가능할까?



다양한 삶과 꿈이 만나는 장



2008년 촛불집회 때 참여자들이 이랜드나 비정규직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며 운동의 한계를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똑같은 논리로 따지면 지금 희망버스를 보며 버스가 고리핵발전소로 가지 않는다, 포이동으로 가지 않는다며 볼멘소리가 나야와 할 것이다. 그런데도 그런 얘기가 없는 걸 보면 노동이슈가 다른 모든 사안보다 중요하다는 고정관념이 있는 듯하다.


우리는 하나의 꿈을 서로에게 강요하는데, 이 꿈이 다른 꿈보다 앞선다며 설득하는데 익숙하다. 힘들 때 서로를 위로하기보다는 서로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데 익숙하다. 조그만 차이도 불편해하며 상대방을 설득시키려 한다. 대화와 토론은 서로의 꿈과 소망을 나누는 게 아니라 내 꿈과 소망을 상대방에게 설득하는 과정이다. 내 귀에 들리는 소리만 들으니 아무리 토론을 많이 해도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할 수 없다.


당연히 노동이슈는 중요하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만으로 꿈을 꿀 수 없다. 우리의 일상이 어찌 노동으로만 정리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꿈이 열심히 일만 하는 사회도 아니고. 그러니 이 사회에 살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의 꿈이 다양한 사건들로 녹아들어가야 한다.


그러려면 서로의 꿈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내 앞가림하기도 바쁜 시기라고 얘기하지 말고 내 앞만이 아니라 다른 운동의 앞도 봐야 총체적이고 장기적인 비전을 세울 수 있다. 예를 들어, 지금이야말로 농민운동과 노동자운동이 만나야 할 때이다. 도시에서 계속 비정규직, 일용직 노동하며 살아라가 아니라 농촌에서 땅을 일구며 살 수 있는 기회도 필요하지 않을까. 그렇게 보면 노동운동의 중요한 이슈는 땅과 종자를 지키는 농민운동이어야 한다. 그리고 도시빈민이나 노동자의 상당수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온 농민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노동자의 조건은 농민운동의 중요한 사안이기도 하다. 또한 노동자의 일상이 공장이나 사무실에서만 이루어지지 않고 생활공간에서도 이루어지니 노동운동과 주민운동, 풀뿌리운동의 거리도 멀지 않아야 한다. 그러려면 서로를 바라볼 때 조금 더 자세를 낮추고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김진숙 역시 이렇게 얘기했다. “민들레에게 올라오라고 할 게 아니라 기꺼이 몸을 낮추는 게 연대입니다. 낮아져야 평평해지고 평평해져야 넓어집니다. 겨울에도 푸르른 소나무만으로는 봄을 알 수 없습니다. 민들레가 피어야 봄이 봄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생애 처음 민들레를 기다리는 봄. 이 설렘을 동지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이번 글이 마지막 연재이다. 그동안 심심한 글을 참고 읽어준 독자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 참고한 글

김진숙, 『소금꽃나무』(후마니타스, 2007년)

송기숙, 『암태도』(창작과비평사, 1981년)

한밤 중 월드컵 축구에서 골을 넣었을 때와 비슷한 함성이 동네를 뒤흔들었다. 선잠이 들었다 일어나서 무슨 일이 있나 생각해 봤다. 한 가지 떠오르는 건 평창 올림픽 유치. 아침에 일어나 텔레비전을 틀었더니 온통 동계올림픽 유치 소식에, 사람들이 기뻐하며 눈물 흘리는 광경에, 꼴 보기 싫은 인물들의 등장에 난리법석이다.

그런데 하계 올림픽, 아시안게임, 월드컵, 엑스포 등 수많은 국제행사를 치르는 동안 우리의 살림살이는 얼마나 나아졌나? 복지에 써야 할 엄청난 세금을 쏟아 부었지만 남은 건 빚밖에 없다. 차량을 통제하고 이런저런 행사에 동원되고 전 국민이 영어를 공부해야 할 것 같은 소동을 불평 없이 받아들였건만 돌아오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런데 또 올림픽을 유치했다며 소란을 피우고, 또 사람들은 눈물을 흘린다.

이런 사회 분위기는 그렇다 치더라도 민주노동당의 입장은 고개를 갸우뚱 거리게 만든다. 2007년 7월 민주노동당은 2014년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러시아의 소치가 선정되었을 때 “언제까지 스포츠 쇼비니즘에 국민을 들러리 세울 건가?”라고 묻는 논평을 발표했다. 이 논평은 국제스포츠경기가 일자리를 만들고 지역을 발전시킨다고 선전하지만 실제로는 빚밖에 남기지 않는다는 점, 동계올림픽이 반(反)생태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 개발지의 인구가 오히려 감소한다는 점 등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올림픽 유치 실패가 오히려 주민들의 행복하고 윤택한 삶을 보장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불과 4년이 지난 2011년 7월, 민주노동당의 논평은 “2018년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강원도 평창이 선정된 것을 진심으로 환영한다”로 시작한다. 동계올림픽이 ‘평화와 통일의 올림픽’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4년 전의 논평이 지적했던 문제점은 어떻게 할 것인가?

살림살이 면을 보면, 2010년 강원도의 재정자립도는 27.5%로 매우 낮다. 동계올림픽 개최지인 평창군은 재정자립도가 19.9%로 지방세 수입으로는 공무원의 인건비를 근근히 해결하는 실정이다. 강원도는 자생적인 산업기반이 부족한 상황에서 각종 교부세와 보조금으로 근근이 지방정부를 운영해 왔다. 이런 상황에서 동계올림픽이 평창군과 강원도에 어떤 도움을 줄까? 강원도민의 살림살이에 들어가야 할 예산이 얼마나 건설사와 지역토호들의 손으로 사라질까?

물론 올림픽 유치로 많은 국비 지원을 받겠지만 대규모 경기장과 시설을 짓고 나면 그걸 관리하는 것은 지방자치단체의 몫이다. <정보공개센터>에 따르면 2010년 각 월드컵 경기장의 평균 사용횟수는 30~40회에 그치는데, 관리비는 수십 억원에 달했다. 마찬가지이다. 동계올림픽을 흥청망청 전국 잔치로 치르겠지만, 행사가 끝나면 이런 비용은 고스란히 지방자치단체의 부담으로 변한다.

그리고 6개의 경기장을 더 지을 뿐 아니라 강원도 내에 국제공항이 없어 경기장까지 도로를 닦고 고속철도를 놓는다고 한다. 그런데 생태계를 파괴하지 않으면서 경기장을 짓고 도로와 고속철도를 놓는 신기술이 지난 4년 동안 개발되었다는 얘기를 나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어떻게 ‘생태 친화적인 올림픽’이 가능하단 말인가? 한번 파괴된 생태계를 회복시키기란 거의 불가능한데 강원도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한바탕 벌어지는 소동을 보며 한숨을 멈출 수가 없었다.

진보정당이라면 지역 내부의 힘을 끌어내고 모아서 자생적인 지역발전의 비전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비전을 파괴하는 동계올림픽과 같은 대규모 행사를 민주노동당이 ‘진심으로 환영’하는 이런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나는 아직도 이런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다.

평창올림픽에 들어갈 7조 이상의 세금으로 우리는 엄청나게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진보정당의 새로운 대안을 기대한다.

내 나이 마흔 하나, 예비군도 끝났고 이제 민방위도 끝날 나이이다. 그러니 군대에 관해 다시 생각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사람 사는 일이 생각대로 되지는 않는다. 어찌하다 보니 군대에 관한 책도 한 권 쓰게 되었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다보면 군대문제로 고민하는 학생들을 만나기도 하고, 대학과 거리가 먼 우리 동네 청년들에게도 어김없이 영장은 날아온다.


내게 선배(?)군인으로서 조언을 구할 때마다 고민이 생긴다. 나는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친분 있는 병역거부자들을 예로 들며 군대를 거부하라고 권할까?(나도 못 했으면서!) 아니면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는 하나마나하고 때로는 폭력적인 얘기를 해줄까?(즐길 게 없다는 걸 알면서!) 군대도 사람 사는 곳이니 너무 걱정 말라며 등을 두들겨줄까?(군대에 다시 가라면 절대로 가지 않을 거면서!) 나도 갔다 왔으니 너도 가서 고생 한번 해보라는 식의 악담을 할까?(본전 생각?)


사실 군대라는 주제는 아직도 내게 무거운 주제이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이제 군번을 외우지는 못한다는 점이다(불행하게도 국민교육헌장의 첫 구절은 지금도 불쑥 튀어나오지만). 무거운 얘기들을 글로 꺼내자니 걱정이 앞서고, 마감날이 다가오자 결국 새벽에 잠이 깨어 컴퓨터 앞에 앉았다(아직도 가끔 가위눌린 듯 군대 꿈을 꾼다).



나의 심심한 군대 이야기


나는 대학원 석사학위를 받고 27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입대했다. 의정부의 306보충대를 거쳐 철원의 6사단에 배치를 받았다. 휴가와 각종 부대업무를 담당하는 중대 행정병으로 배치되었다가 시위 전력이 있다는 이유로 쫓겨나 위병소 근무를 서기도 하고 매점(PX)을 관리하다 다시 행정반으로 복귀되는 등 부대 내에서 뺑뺑이를 돌다 큰 사고 없이 제대했다(다행스럽게도 남자들 사이에 흔하다는 수색대나 스나이퍼를 할 기회가 없었다).


에피소드라면, 사단 훈련소에 입소했더니 대학 후배가 소대장을 맡고 있었다. 얼굴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을 했건만 하필이면 그가 화생방 훈련 교관이었다. 내 얼굴을 유심히 보던 그는 혹시 형이 자기 학교에 다녔냐고 물었고 나는 내가 그 학교를 다녔다고 대답했다. 그 후배의 당혹스러운 눈동자를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리고 자대 배치를 받고 대기하던 중, 어느 일병이 고향과 고등학교를 묻기에 대답했더니 자기랑 같은 학교라고 아주 좋아하며 기수를 묻더라. 허나 그는 나의 6년 후배였다(그 때는 나도 동안이었단 말인가?). 짧은 물음과 대답 이후 긴 침묵이 이어지는 곳, 군대는 그런 곳이다.


침묵은 지겨웠지만 군대는 나름 재미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군대에서 배운 가라 영수증 만들기와 숫자 맞추기는 지금도 요긴하게 써먹곤 한다. 사실 한국사회에서 군인들의 생활을 무조건 악의 온상으로 보기는 어렵다.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계급이 사회적 격차를 의식하지 않고 그야말로 짬밥 순대로 대할 수 있는 곳은 한국사회에 군대 밖에 없었다(물론 그곳에도 특권층은 있지만). 군대라는 조직은 밉지만 그 속에서의 생활은 우리에게 결핍된 것을 채워주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다른 관계로는 채울 수 없는 ‘군대동기’라는 관계.


막상 갔다 오니 별것 아닌 것도 같은데 나는 왜 27살까지 군대를 미뤘을까? 그 당시에는 총을 든 폭력의 문화를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외려 나중을 대비해서 그런 기술을 익혀야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할 정도였으니 폭력이 군대를 미룬 이유는 아니었다. 문제는 군대라는 ‘조직’이었다. 하극상(下剋上)을 친구로 삼아온 내게 일방적인 조직은 독약과 같았다(군대에서 그런 독약이 내 속에도 있다는 점을 확인했지만). 군대가 자유롭고 편안한 곳이라면 누가 입대를 거부할까?


군인들의 삶과 별도로 군대라는 조직은 분명 폭력적인 조직이다. 아무리 좋은 명분을 내세워도 군대는 권력을 가진 자의 명령에 복종하는 조직이고, 생명을 해치기 위한 조직이다. 그곳에 있다 보면 판단의 기준이 영향을 받고 폭력에 둔해질 수밖에 없다. 내 자신이 아니라 외부의 것이 세상과 인간을 보는 잣대라는 건, 그 잣대가 타인에 대한 폭력을 내포하고 있다는 건 위험하다.


조심을 했음에도 군대에 갔다 온 뒤에 한 가지 변화가 생겼다. 군대를 회피하는 연예인들을 보면 적개심이 샘솟았다. 군대를 면제받았다는 사회 지도층을 볼 때마다 분노가 치솟았다. 그 적개심과 분노가 온전히 불공평과 부조리에 대한 정의로운 분노였을까를 곰곰이 따져보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인간은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말을 들으며 위안을 삼는다).


이 부조리한 분노가 언젠가 영장을 받을지 모를 우리 아들에게는 전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가 바라는 세상이 모든 젊은이를 군대에 보내 사람을 만들려는 세상이 아니라면 말이다.



달라진 군대 이야기


최근에 대학생이나 청년들과 만나며 느끼는 점은 군대에 관한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군대에 갔다 와서 복학했다는 여학생이 수업에 등장했고, 숙명여대에는 여대생 학생군사교육단(ROTC)이 만들어졌다. 수업시간에 군대나 군가산점에 관한 토론을 붙이면 생각지도 못한 반응이 나온다. 여자들도 군대에 가야 한다는 남학생들의 얘기에 여학생들이 심심찮게 공감하고 청춘을 바쳤으니 군가산점제를 인정해야 한다고 여학생들이 말하기도 한다. 이제는 군대도 ‘스펙’이고 ‘직장’이다.


전쟁의 위협이 실감나지 않는 곳에서 군대는 위험한 곳이 아니다. 천안함이 침몰하고 연평도가 포격을 당해도 쉽게 전쟁이 벌어지리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그러니 영장을 받을 때의 부담감이 줄어든다. 그리고 요즘은 구타도 줄어들고 인터넷도 하며 ‘우리 군대가 달라졌어요’라는 얘기가 솔솔 흘러나오니 거부감도 좀 줄어든다(등록금도 비싼데, 한번 정도 쉬어줘야 할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폭력이 일상화된 곳에서는 폭력에 둔감해질 수밖에 없다. 사회의 폭력성이 군대의 폭력성을 열심히 따라가고 있고, 대중매체나 게임, 영화 등에서 느끼는 폭력성이 감수성을 둔하게 만든다. 폭력이 오락으로 변한 세상에서 군대는 ‘우정(?)의 무대’이다.


또한 조금 바꿔 생각하면 한국사회에서는 직장도 군대이다. 비정규직에 적은 월급을 받아도 끽 소리 못하고 상급자의 눈치를 봐야 하는 곳이 직장이다. 사회가 빡세지는 만큼 군대의 빡셈은 거쳐야할 과정일 뿐이다. 어차피 집단적이고 획일적인 한국사회, 군대에 잘 적응하면 직장에도 잘 적응한다니 군대는 나의 사회성을 시험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일지 모른다.


물론 여전히 군대는 청춘을 갉아먹는 곳이지만 적절한 타이밍에 시간을 벌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대학 등록금도 비싼데, 한번쯤 휴학하고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이다(심지어 군대에서 수업을 들을 수도 있다). 그리고 억압적인 조직문화도 계급‘놀이’로 여기면 느낌이 달라진다. 시간이 흘러 새로운 계급장(아이템)을 먹으면 내 위치도 달라지니 무조건 나쁘다고 느껴지지 않는다(심지어 군가산점제도까지 부활된다니).


그리고 고무신을 거꾸로 신는다지만 요즘은 군화를 거꾸로 신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어차피 관계의 지속성이 중요하지 않은 시대이니 쿨하게 만나고 쿨하게 헤어지면 그만이다. 또 모두가 가야 하는 군대에 가지 않는 나쁜 인간들이 있다지만 그건 일종의 능력같기도 하고 그걸 비난하자니 그 모습이 좀 찌질해 보이기도 한다. 무한경쟁의 시대에는 부정(不正)도 능력이 아닌가? 능력껏 빠지는 게 문제는 아니지 않은가? 쿨한 시대에는 청년들의 가슴과 머리도 차갑게 식는다.



나는 사람이 되기 싫다!


차갑게 식어버린 한국사회에서는 지금도 초등학생들이 소총을 들고 안보교육을 받곤 한다. 동네에서 서로에게 비비탄을 쏘며 장난감총(정말 장난감일까?)을 들고 뛰어다니는 아이들도 철없는 어른들의 작품이다. 국익을 위해 파병을 하는 나라에서 아이들은 미래의 군인으로, 바람직한 인간으로 자란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군대에 갔다 와야 사람이 된다’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신경이 바짝 곤두선다. 도대체 그 말에서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아직도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한국사회이지만 그 기준이 군대라니 우울할 뿐이다.


다행히 우울한 시대에도 희망은 꽃핀다. 얼마 전 병역거부로 수감 중인 친구를 면회했다. 두꺼운 유리벽, 마이크와 스피커로 대화를 나눠야 하는 우울한 상황에서도 그 친구는 유쾌했다. 다행스럽게도 군대든, 감옥이든, 어느 곳에서나 사람은 살 수 있다. 중요한 건 내가 어디에 있는가보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라고 우리는 아직까지 자신을 확신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진정한 인간이 되기 위해 그들이 강요하는 사람의 길을 걷지 않는 것, 그것이 큰 힘이다.


내년이면 감방에서 그 무게를 견디고 있는 그 친구와 술잔을 나눌 수 있을 듯하다. 우정과 사랑이 없다면 힘겨운 세상을 어찌 버틸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군대의 가장 큰 적은 로맨티스트이다. 우정과 사랑을 즐기고 지킬 줄 아는 사람, 복불복의 경쟁 사회를 갉아먹는 암적인 존재이다. 나는 사람이기 싫은 암적인 존재이다.


 

진보정당에게 고민거리를 던지는 사건들이 계속 벌어지고 있다. 진보정당 소속의 시의원이 주민자치센터 직원에게 행패를 부렸던 사건에 뒤이어, 서울시의 한 구의원은 연수를 빙자한 해외관광에 동참해서 물의를 빚고 있다. 그리고 전라남도에서는 도의원이 술을 마시고 차량사고를 낸 뒤에 뺑소니를 쳤다 경찰에 붙잡히는 사고가 터지기도 했다. 일어나지 않아야 할 사건들이 계속 터지면서 진보정당의 정체성을 의심하거나 되묻는 목소리들이 여기저기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단순히 물의를 빚은 의원을 징계하거나 그 의원을 탈당시켜서 이런 문제를 해결될 수는 없다. 근본적인 원인을 짚지 않으면 이런 일은 앞으로도 반복될 것이고, 진보정당이 제도권으로 더 많이 진입하면 할수록 더욱더 커질 수밖에 없는 중요한 문제이다.


그리고 단지 선거에 나갈 후보자의 자격을 심사하는 것만으로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뺑소니를 제외하면 이런 일은 정치‘현실’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지방의원이라는 ‘직책’에서 생겨난 이런 문제들은 후보자 개인의 품성이나 자질만으로는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진보정당의 의원이 지방의회에서 경험하는 현실은 생각보다 훨씬 힘들다. 보수정당의 의원들이 키득거리며 몰려다니고 이해관계에 따른 표결을 할 때, 한 명의 의원이 이에 대처할 방법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더구나 비협조적인 공무원들도 많고 지역토호들이 호시탐탐 허점을 노린다. 그렇다고 중앙당이 적절히 지원을 해주지도 못하는 상황이니 험난한 가시밭길을 홀로 걷는 기분일 게다. 한 치만 삐끗해도 앞을 예상할 수 없는 싸움터에서 지방의원은 활동해야 한다.


그래서 왜 유독 진보정당 소속 의원들의 문제만 파헤치고 보수정당 소속 의원들의 수많은 문제점들은 덮어 두냐며 불만을 드러낼 수도 있다. 그리고 왜 정치의 기준이 도덕성이어야 하냐고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허나 의정활동의 어려움들이 앞서의 문제들을 정당화시키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진보정당의 의원들은 바로 그런 문제점들을 해결하라는 시민들의 요구를 받으며 지방의회로 진출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보수 정치인들과 똑같이 행동할 거라면 진보정당에 소속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진보적이라 부를 수는 없다.


그리고 이것은 도덕성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인 사명의 문제이다. 지방의원들은 정치에 대한 인식을 부정적인 것에서 긍정적인 것으로 전환시키는 중요한 사명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지방의원은 중요한 사안을 이해하고 판단해야 하지만 개인의 상식과 기준이 아니라 ‘진보적인 기준’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보수언론들이 유독 진보정당의 문제점만 파헤친다는 푸념은 타당한 지적이지만 ‘정치적으로 올바른’ 지적은 아니다.


대중이 정치에 관심을 쏟기 어렵다, 정치인의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권력을 몰아주고 밀어주자는 식의 논의가 있는 것 같은데, 참으로 진보적이지 않고 부끄러운 소리이다. 왜냐하면 그런 주장은 대중의 정치흐름에 관심도 없고 그것을 이해하려 들지도 않으면서 권력에 대한 욕망만 키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방의원의 활동을 어떤 기준으로 평가할 것인가? 여러 기준들이 있겠지만 진보적인 지방의원은 자신의 경쟁자들을 발굴하고 성장시키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 즉 지역사회에서 자신의 역할과 고민을 나눌 수 있는 ‘원외 지방의원들’이 등장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진보적인 지방의원은 정보와 권력을 독점하는 역할이 아니라 시민들과 정보와 권력을 공유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 그래야 장기적인 관점에서 지역사회가 변할 수 있고 정치의 역할이 바뀔 수 있으며 진보정당의 기반이 넓어질 수 있다.


지금 우리사회에서 리더십에 관한 얘기들은 이미 리더십을 가진 사람들의 ‘동원욕구’에 지나지 않는 듯하다. 바로 이 점에 우리 사회의 슬픈 딜레마가 있다. 진보적인 지방의원이라면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헌신해야 한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야권은 단일화를 통해 ‘공동지방정부’라는 최초의 실험을 시작했다. 그 전에도 선거단일화 전략이 활용되곤 했지만 공동의 정책을 마련하고 지방정부의 행정권을 공유하는 실험은 없었다는 점에서 공동지방정부는 최초의 실험이라 평가될 수 있다. 단일후보전략으로 선거에서 승리한 곳은 광역자치단체 3곳(경상남도, 강원도, 인천광역시), 자치시와 자치구를 포함한 기초자치단체 26곳이나 된다. 적지 않은 곳에서 공동지방정부 실험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2010년 11월 17일에 민주노동당 지방자치위원회가 주관한 ‘진보적 지방자치와 공동지방정부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정책토론회 자료집을 보면 그 실험이 초기부터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화장실 들어갈 때랑 나올 때 틀리다고, 당선된 단체장들은 다른 정당이나 시민사회단체와의 공동정부 구성이나 정책연대에 소극적이었다. 중앙 차원의 합의가 실패하고 지역 차원에서 합의가 이루어지다보니, 당선이 되고 난 뒤에 ‘실질적인’ 공동지방정부를 추진할 내부/외부의 힘이 모아지지 않았고 당의 입장도 분명하지 않았다. 모범적인 사례로 꼽혔던 고양시에서조차 공동지방정부 구성이 처음부터 삐그덕거렸다.


물론 새로운 실험이 계속 진행되고 있는 곳들도 제법 있다. 광역자치단체 차원에서는 경상남도에 민주도정협의회가 2010년 11월에 출범했고, 기초자치단체 차원에서도 공동구정(시정)운영위원회, 정책협의회, 거버넌스위원회, 발전협의회 등이 꾸려졌다. 하지만 이런 협력/거버넌스 기구들의 위상은 대부분 ‘공동결정’이나 ‘심의’가 아니라 ‘자문’에 그치고 법적인 위상도 임의기구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런 문제들 때문에 최초의 실험이 실패했다고 단정 짓기는 어렵고, 선거 후 고작 1년이 지났을 뿐이라 그 성과를 평가하기도 어렵다. 그렇지만 지난 1년간의 과정을 돌아보며 공동지방정부가 공동정부로서 제 몫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지, 그런 문제점들을 바로잡을 대안은 무엇인지를 분석하려는 노력은 필요할 뿐 아니라 매우 중요하다.


공동지방정부가 제대로 추진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그 목적이 ‘선거의 승리만’을 목적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러니 선거에서 승리하면 목적이 달성되어 앞으로 협력할 필요성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한다. 물론 선거가 아니라면 여러 정당들이 협력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따라서 선거승리까지가 아니라 선거 이후 그 다음 선거 때까지 어떤 정책과 계획에 따라 서로 협력할 것인지를 큰 틀에서 합의해야 한다. 이런 합의를 이루려면 각 정당이 지역에 대한 명확한 비전을 선거 전에 미리 마련하고 서로 협상을 벌여야 한다.


그리고 중앙당이 이런 선거연합에 대해 명확한 원칙을 세워야 한다. 지금은 선거 전에는 얼버무리다 당선되고 나면 당론이나 당의 이해관계를 앞세우지만 실제로는 정당이 단체장이나 지방의회를 전혀 통제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이런 판단 하에 각 정당은 공동정부에 관한 합의를 이룰 만큼 능력이 있는지 내부를 먼저 점검해야 한다. 목적과 그 목적을 실현할 과정이 바뀌지 않으면 어떤 명분과 실리를 내세우더라도 공동지방정부는 식물인간이 되기 쉽다.


현재로서는 이런 과정을 지원할 국가 차원의 기구도 없고 정당 내부에서 이런 실험들을 지원할 정책단위도 없다. 몇몇 민간단체들이 싱크탱크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정당 자체가 변해야 한다.


더욱더 중요한 물음은 지난 1년 동안 주민들이 어떤 변화를 ‘체감’했는가이다. 윗선에서 열띤 토론을 벌이며 수많은 새로운 계획들을 제시하더라도 주민들이 그 변화를 느끼며 지역사회의 지배구조를 바꾸려 참여하지 않는 이상 모든 건 모래성일 뿐이다.


2012년 총선과 대통령선거를 앞두곤 여러 가지 논의가 한창이다. 논의가 활발한 것은 좋지만 이런 논의들이 이전의 사례들을 얼마나 분석하고 대안을 마련했는지는 의문이다.

 

한국사회에서 선거는 공무원들이 들어가면 안 되는 ‘금단의 영역’이다. 공직을 맡은 사람이 특정 후보자를 지지하거나 돕는 행위는 법적으로 금지된다. 국민을 대신해 중요한 정책들을 집행하는 책임을 맡기 때문에 공무원들은 정치논리가 아니라 법률과 규칙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할 것을 요구받는다. 그래서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진정한 관료는 ‘분노도 편견도 없이’ 자신의 직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우리 역사를 돌이켜보면 부패한 권력층은 끊임없이 선거에 공무원들을 동원해 왔다. 아직도 ‘관권선거’라는 말이 언론매체에 등장할 만큼 동원의 뿌리는 깊다. 위계질서에 따라 상부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고 인사평가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또는 학연, 지연, 혈연 등의 연고주의 때문에, 사실상 한국의 공무원들은 어느 한 편에 설 것을 요구받아 왔다. 사회가 민주화되어도 이런 처지는 달라지지 않았다.



정치개입과 정치참여의 차이점


이런 상황에서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명제는 현실을 감추고 변화를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즉 중립성은 마치 공무원들이 중립을 지키는 것처럼 시민들을 착각하게 만들거나 정치논리에 영향을 받지 않는 행정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공무원들이 참여하는 것을 금지해왔다.


물론 공무원들이 수동적으로 동원만 되지는 않았다. 때로는 권력층의 비리를 폭로하고 때로는 권력층과 적절히 타협하기도 했다. 그리고 공직을 그만두고 선거에 출마해서 정치인으로 변신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런 폭로나 변신은 개인의 선택과 결단으로 머물렀고 시스템 자체를 바꾸지 못했다.


그래서 공직사회와 시스템을 변화시키려는 공무원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중요하다.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공개적으로 자신의 선택을 밝히고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사회 전체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행동이다. 반면에 정치에 개입하는 것은 밀실에서 은밀히 이루어지고 사회의 이득보다 개인적인 이득을 취하려는 행동이다. 그러니 공무원들은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


사실 사회적으로 중요한 계획을 짜고 결정하는 권한이 행정당국에 집중된 한국사회에서 공무원은 이미 정치의 중요한 주체이다. 따라서 ‘올바른 정치’가 실현되도록 공무원들이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설령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을 지지하더라도, 그런 중립이 가능한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공무원은 정치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 시민으로서 투표할 권리를 통해 사회와 행정시스템을 변화시켜야 공무원의 역할을 올바로 정할 수 있다.



시민 공무원의 생각이 중요하다


미국의 사상가 한나 아렌트는 제 2차대전 당시 수백만 명의 유태인 말살계획을 이끌었던 아이히만의 재판과정을 지켜본 뒤 ‘악의 평범함’에 관해 얘기했다. 재판정에 선 아이히만은 악의 화신이나 전쟁에 미친 사람이 아니라 옆집 아저씨, 평범한 공무원처럼 보였다. 아이히만은 국가의 명령에 따라 책임감있게 일했을 뿐이라며 항변했다. 아렌트는 그 모습을 보며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는 것, 잘못된 부조리에 대해 언제나 마음속으로만 반대를 하는 것이 엄청난 비극을 불러왔다고 주장했다.


그러니 혹시 내 속에도 아이히만이 없는지 잘 생각해야 한다. 공직사회에 뿌리내린 권위주의와 관존민비의식, 반공이데올로기, 개발이데올로기, 연고주의 등은 합리적인 판단과 공감어린 연대를 가로막는다. 공무원들도 시민으로서 판단하고 행동하며 이런 아이히만들을 몰아내야 한다.


국내외에서 큰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다. 시민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시민 공무원이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얼마전 성공회대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불편한 마음을 담은 글을 올렸다.
오늘 성공회대 홈페이지에 들어갔더니, 그동안 나만 불편했던 건 아닌 모양이다.
성공회대 부총장을 맡고 계신 사회복지학과 이영환 교수가 글을 올렸다.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학내 피케팅에 대한 불편한 마음을 담은...
http://www.skhu.ac.kr/board/boardread.aspx?idx=13514&curpage=1&bsid=10017

학교측의 공식적인 입장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방적인 피케팅, 참으로 유감입니다'라는 제목이다.
글을 읽다 보면 참으로 놀라운 '사실'들을 알게 된다.
학교의 행정직원이 "원래 학과장을 보조하는 조교에서 출발하였고, 후에 사회진출을 준비하는 졸업생들이 학과 일을 보좌하면서 여러 가지 업무능력 신장을 도모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미를 담은 직책"이라는 점을 대학에 20년 이상 있었지만 처음 들었다.
앞으로 학교에 계신 직원분들을 만나면 얘기를 드려야 할 것 같다. 사회진출을 준비하시라고...
심지어 '바람직하지 않다'는 마음으로 기간을 2년으로 정했다니...
참 놀라운 마음이시다...

또 하나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계약이 만료되어 사회로 진출하게 된 상황(정말 사회로 진출한다고 생각한 걸까)이 "일방적이고 살인적인 부당해고"가 아니라고 얘기하는 점이다.
"학교측에 공식적인 대화제의 한 번 없이, 일방적으로 우리 대학을 부도덕한 대학으로 매도하는 것"이 불만이라고 하는데, 세상에 어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공식적인 대화제의 한번 없이 집단행동을 시작할까?
아주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말이 안 되는 얘기이다.

마지막으로 놀라운 점. "교수들의 봉급수준이 항상 바닥권을 헤어나지 못할 만큼 아껴써야만 살림이 가능한 대학입니다. 누가 누구를 착취하는 대학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성공회대 교수들의 봉급수준이 얼마이길래 바닥권을 헤어나는지 모르겠지만 교수봉급이 낮은 건 교수들이 학교측에 요구해야 할 얘기이지 비정규직으로 고용된 사람들에게 해야 할 얘기는 아닌 듯하다.
살림을 아껴쓴다는 것하고 착취하고는 또 무슨 상관이 있는지.
사회복지학을 전공하신 분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닌 듯 싶다.

그런데 참으로 의아한 일은 이 얘기를 학교 홈페이지에 올린 분이 수구 꼴통이나 신자유주의의 신봉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외려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분이다.
한겨레신문의 사외이사이기도 하고, 구제역 살처분을 비판하는 분이기도 하시며, 한국의 빈곤문제가 매우 심각하고 구조적이기 때문에 비정규직 등의 빈곤은 불공정한 제도적 편견의 산물이라고 외부에서 주장하는 분이기도 하시다.

이 분 외에도 성공회대에 비정규직 문제를 '외부에서' 비판하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가?
성공회대 사회학과 교수들이나 여러 교수들은 외부활동을 많이 할 뿐 아니라 언론 인터뷰에서도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시켜야 한다고 주장할 뿐 아니라 비정규직의 '편에 서겠다'고 공언했던 사람들이다.
그 많은 교수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내가 또 하나 의아한 점이 있다.
성공회대에서 비정규직 문제로 집단행동이 시작되면서 여러 신문사에 보도자료를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알기로 경향신문에 성공회대 대학원생이 글을 쓴 것 외에 기자들이 취재한 기사를 한번도 보지 못했다.
왜일까?
기자들이 너무 바빠서?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그래도 희망인건 학생들이다.
성공회대 홈페이지 커뮤니티에 가면 학생들이 계속 글을 올리고 있다.
외부에서 다뤄지든 말든 내부에서의 논의는 계속 끓어오르고 있다.
학교측은 100도씨가 되길 기다리는 걸까?
'인권과 평화의 대학'의 진면목을 보여주길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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