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 드라마 <지붕뚫고 하이킥>에 나오는 줄리엔이 친구와 함께 버스를 탔는데, 양복입은 아저씨가 “더러워, 이 개새끼야. 이 냄새나는 새끼야. 너 어디서 왔어”라고 욕을 하며 시비를 건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얀 피부와 긴 기럭지를 가진 줄리엔에게 시비를 걸만한 사람은 없겠지만, 설령 시비를 걸더라도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인도인 보노짓 후세인은 그런 모욕을 고스란히 당했다.


지금 한국의 한 아파트 주민들은 정신장애인과 그 가족을 내쫓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작년 5월에 벌어진 사소한 갈등을 ‘정신질환자가 부녀자를 폭행하는 사건’으로 확대시킨 아파트 주민들은 떼를 지어 가족을 괴롭히고 있다. 아파트 부녀회와 입주자대표회는 가족들에게 “불쌍한 건 불쌍한 거고 이사 가라. 사람들 보이지 않는 데로 숨어 살아라,” “정신분열증환자는 갑자기 뒤에서 사람을 칼로 찌를 수 있다. 그것도 모르냐?”라며 몰아세운다고 한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와 공익변호사그룹 공감이 가족의 편에서 탄원서를 모으고 있지만 우리 사회의 편견을 넘어설 수 있을까?



관용, 참을만한 것만 받아들이는 통치술


이런 사건들에서 드러나듯 우리는 타인을 혐오하는 편견에서 자유롭지 않다. 왜 우리는 이유 없이 타자를 혐오하고 몰아내려 하는가? 웬디 브라운의 『관용: 다문화제국의 새로운 통치전략』은 그 답을 찾는데 도움을 줄 좋은 길잡이이다.


브라운은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탄생한 미국에서 더욱더 강력해진 편견을 본다. 차이를 관용하자는 목소리만 높지 여전히 전쟁은 계속되고 소수자들은 차별을 겪고 있다. 그래서 브라운은 관용을 “흔히 생각하듯이 초월적이고 보편적인 개념․원리․원칙․미덕이라기보다는, 목적과 내용, 행위주체와 대상에 따라 다양한 역사적․지리적 변형태를 가지는 정치적 담론이자 통치성(governmentality)의 실천”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소 어렵게 들리지만 쉽게 정리하면 관용이라는 말이 등장하고 활용되는 맥락을 잘 살펴야 한다는 얘기이다. “관용 담론은 특정한 차이를 ‘문제’로 만드는 규범적이고 물질적인 힘의 작동에 대해선 아무런 설명이 없기” 때문에 누가 누구를 대상으로 관용이라는 말을 쓰는지, 왜 어떤 것은 인정되고 다른 것은 거부되는지, 그런 관용이 목적으로 삼는 효과는 무엇인지를 잘 관찰해야 한다는 얘기이다.


브라운에 다르면 서구사회에서 관용의 대상은 ‘믿음’에서 ‘존재’로 바뀌었다. 과거에는 다른 종교나 신념이 관용의 대상이었다면 19세기부터는 그 대상이 특정한 인종이나 존재를 가리켰다. 대표적으로 19세기에는 유대인이, 20세기에는 공산주의자가, 21세기에는 무슬림이 관용의 대상이다. 브라운은 이런 변화가 관용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고 본다. 왜냐하면 관용의 대상이 존재로 이동하면서 인종이나 성적 선호 등이 다른 가치와 행동을 낳는 근본적인 이유로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앞서 얘기했던 보노짓 후세인이나 정신장애인이 모욕을 당하고 내몰리는 건 개인의 삶과 상관없이 인종과 장애가 그 사람의 정체성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와 더불어 브라운은 관용이 지배전략으로 활용되는 방식을 설명한다. 브라운은 유대인과 여성을 예로 들며 관용이 어떻게 현재의 지배질서를 보호하는지를 설명한다. 가령 이성애자인 여성은 남녀평등의 대상이 되지만 동성애자인 여성은 관용의 대상이 된다. 이성애자는 현재의 사회질서로도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동성애자는 그럴 수 없기 때문에 동성애자는 평등이 아니라 관용의 대상이다. 즉 동성애자가 현재의 질서를 더욱더 위협하기 때문에 지배질서는 그들을 정치적 평등이 아니라 관용의 대상으로 만든다. 유럽의 국가들이 유대인들을 관용의 대상으로 만든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브라운은 이를 ‘대리보충(supplement)’이라 부르며 “관용은 평등의 확장이 아니라 평등의 대리보충으로 등장한다”고 얘기한다.


국가는 부족한 정당성을 보강하기 위해 관용이라는 말을 필요로 하기에 언제나 관용의 대상을 만들고 그들을 관리해야 한다. 따라서 관용의 뒤에는 언제나 폭력이 따라다닌다. 변화될 수 없는 차이를 타고난 관용의 대상들은 국가가 정한 선을 넘어서려하면 곧바로 폭력에 노출된다. 미국인으로 살려는 착한 흑인, 착한 무슬림이 아닌 다른 삶을 생각하는 순간 그는 테러리스트가 된다. 테러리스트에게 관용은 없다. 브라운은 얘기한다. “오늘날에도 개인은 예전 공동체에 대한 공적 애착과 충성을 버리고 새로운 공동체에 충성을 바칠 때에만, 즉 하나의 민족주의를 다른 민족주의로 대체할 때에만, 관용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한 국가를 넘어서 이런 논리를 확장하면 서구사회는 야만을 만들어 관리하고 관용해 왔다. 브라운은 미국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인 자유주의가 관용의 통치술을 적절히 활용해 왔다고 얘기한다. 자유주의는 관용에 스며있는 통치술을 부정하며 관용을 탈정치적인 가치로 만들지만 실제로는 ‘정치의 문화화(culturalization of politics)’에 앞장서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는 문화를 공공재나 공적 유대의 차원으로 보지 않고 삶을 향유하는 선택의 차원으로 보면서 각자의 문화를 존중하자는 다문화를 주장한다. 하지만 자유주의의 실제 모습은 자기 문화 외의 다른 문화들을 야만으로 몰아붙이고 자신의 문화를 교육하려 든다. 타고난 차이는 변하지 않으므로 관용의 정신에 따라 교육을 받아야 한다. 브라운은 다문화교육의 실상이 “과거 서구의 식민주의와 냉전이 남긴 효과로 고통받는 이들이, 오히려 서구의 문명화 기획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대상이 되어 버리는” 과정이라고 비판한다. 그리고 그런 과정의 최종 목표는 “자유주의적 원리들의 보편적 지위에 도전하는 사회 내부의 집단과 초국가적인 비자유주의 세력을 연결․결합시키고, 이 둘을 동시에 길들이”는 것이라고 폭로한다.


따라서 브라운은 “관용이 유통시키고 있는 존재론, 정동, 에토스와 같은 반反정치적 언어에 맞서, 권력과 사회적 힘, 정의와 같은 언어들을 되살리”고 그런 언어들에 기반해 새로운 대항담론들을 만들자고 주장한다.


브라운의 얘기는 자유주의와 다문화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실제로는 타자를 배척하는 한국사회의 모순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관용의 현란함이 아니라 그것이 가리려는 실제 현실로 들어가야 변화가 가능하다.



좌파의 딜레마?


홍세화의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창작과비평사, 1995)가 베스트셀러를 차지한 이후 똘레랑스라는 말이 유행했다. 그리고 예전에 『왜 똘레랑스인가』(상형문자, 2001)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던 필리프 사시에(Philippe Sassier)의 책이 『민주주의의 무기, 똘레랑스』(이상북스, 2010)로 올해에 다시 번역되어 나오기도 했다. 이런 흐름은 우리의 실제 현실로 들어가려는 몸짓이다.


그런데 브라운의 칼날은 미국 사회만이 아니라 서구 사회를 전체를 겨눈다. 그런 점에서 똘레랑스라고 얘기되는 유럽식 관용도 그 칼날을 피할 수 없다. 똘레랑스가 우리 현실을 드러내는 무기가 되려면 브라운의 물음에 답을 해야 한다.


똘레랑스는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투쟁의 무기이고 사회정의를 위해 똘레랑스할 수 없는 것에 저항한다는 점을 내세운다. 사시에는 “똘레랑의 문제는 견디는 것에 있기보다는 똘레랑스를 보존하기 위하여 어느 선에서 견디는 것을 멈추어야 하는지를 아는 데에 있다”고 얘기한다. 그런 점에서 똘레랑스는 미국식 관용과 달리 권력에 저항하는 사회정의의 관점을 내세운다.


그러나 똘레랑스는 탈정치화를 경계하지만 관용의 대상이 만들어진다는 점을 얘기하지 않고, 문명인과 야만인을 가르는 제국주의 시선에서 자유롭지도 않다. 양창렬과 이기라 등 프랑스의 한국 유학생들이 쓴 『공존의 기술』(그린비, 2007)에서 잘 드러나듯이 2005년 프랑스 파리 근교의 방리유에서 이주민들이 일으켰던 폭동은 공화국의 숨겨진 실상을 드러냈다. 우리는 프랑스만큼만 되어도 좋겠다고 얘기할지 모르지만 프랑스의 꿈은 사라지고 있다.


브라운의 얘기가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다. 브라운도 언급하듯이 60년대에 마르쿠제(H. Marcuse)가 이미 그 속성을 폭로한 바 있고, 논리적으로 탄탄하진 않지만 나 역시 『희망의 사회윤리 똘레랑스』(책세상, 2003)에서 똘레랑스의 한계를 지적한 바 있다.


관용담론의 실체보다 흥미로운 것은 관용의 르네상스 배경에 좌파의 딜레마가 깔려있다는 점이다. 브라운은 “관용 담론의 르네상스 배경에는, 통합이나 동화보다 정체성과 차이의 문제를 부각시키려던 좌파들의 시도와, 다양한 소수자들의 권리 요구를 보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특수한’ 것으로 매도하려는 우파들의 노력도 자리잡고 있었다”고 말한다. 소수자들의 권리를 주장하던 좌파들은 어느 순간 그 차이를 인정하며 따로 살자는 우파들을 만나고 있다. 이 땅을 이미 차지했다고 생각하는 우파들은 그러려면 나가서 너희들의 나라를 따로 만들어 살라고 얘기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니 각자 서로를 인정하고 알아서 살아남자고 얘기한다. 더 이상 싸우지 말고 오늘부로 정리하고 쿨하게 끝내자고 얘기한다. 세계화의 시대이니 우리가 갈 곳은 많다고.


이런 주장들에 좌파는 어떤 해답을 가지고 있을까? 계속 함께 살자고 매달려야 하나, 아니면 깔끔하게 헤어져야 하나? 만일 헤어지려면 지금까지의 몫을 챙겨야 하는데, 관용은 그 몫을 쳐주지 않는다. 지난 역사를 돌이켜 상대를 비판할 수는 있지만 내 몫을 받을 힘이 없기에 우리는 관용에 호소할 수밖에 없다. 관용을 비판하지만 어느 순간 다시 관용에 호소할 수밖에 없는 이 딜레마.


이런 딜레마에 빠진 건 관용만이 아니라 인권이라는 개념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모욕을 당한 후세인과 곤경에 처한 장애인에게 우리는 어떤 말을 건네고 함께 할 수 있을까? 무엇이 우리의 무기가 될 수 있을까?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요즘 후배와 같이 막스 슈티르너(Max Stirner)의 The Ego and Its Own(1844년작)을 읽고 있다.
읽다보니 이런 독창적인 사상가를 진작에 제대로 공부하지 않았던가라는 후회가 든다.
니체보다 훨씬 앞서 독창적인 사유의 틀을 만들었고, 중세를 벗어나지 못한 근대의 사유를 비판했던 사상가, 슈티르너.
중간까지 읽으며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아래는 슈티르너가 정치적 자유주의(political liberalism)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
 

앞서 슈티르너는 계급제도가 사상의 지배요, 정신의 지배라고 얘기한 바 있다. 그것은 중세만이 아니라 근대에도 이어져 내려온 지배이고 혁명도 서열을 바꾸었을 뿐 그 지배 자체를 제거하지 못했다(개혁이 있을 뿐 진정한 혁명은 없었다). 고대인의 지혜가 모두 세계에 관한 학문이라면 근대인의 지혜는 모두 신에 관한 학문이다. 프로테스탄티즘과 근대적 사유는 내적인 종속을 더 심화시켰을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슈티르너는 자유주의도 바라본다. 슈티르너에 따르면, “자유주의는 단지 깔개 위에 다른 개념을 가져왔을 뿐이다. 신성 대신에 인간을, 교회조직 대신에 정치를, 교리 대신에 ‘과학’을, ‘조잡한 도그마’와 가르침 대신에 현실의 개념과 영원의 법칙(eteranl laws)을.”(88쪽)


사람은 누구든 인간으로 대우받길 원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건 우리를 인간으로 인정하고 비인간적으로 대우받을 위험에서 보호해주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그를 진정한 보호자요 수호자로 인정할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 우리는 서로 단결하고 그런 단결의 형태가 공동체와 국가로 나타난다.

그런데 자유주의는 민족(nation)이나 국가(state)의 형태로 단결할 때에 우리가 진정한 인간이라고 본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자유주의가 지향하는 삶은 인간이 아니라 시민으로 사는 삶이라고 얘기한다. 자유주의는 개인적인 성격이나 고립을 버리고 사적인 삶을 공적인 삶을 누릴 때 참된 인간(true man)이 된다고 얘기한다. 과거에 좋은 기독교인을 요구했듯이, 근대는 좋은 시민을 요구한다. “국가는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의 공동체가 되고 모든 사람은 ‘전체의 복지’에 스스로 헌신해야 한다.”(90쪽) 슈티르너는 이를 세속신(mundane god)의 출현이라 본다.


프랑스 혁명은 소유(property)라는 강렬한 재료로 불이 붙었다. 그래서 그들은 돈에 강렬한 애착을 보이고 자신의 소유를 인정받고 소유자가 되려 한다. 슈티르너는 이 과정에서도 새로운 이상이 출현했다고 본다. 그것이 바로 민족, ‘인민의 자유’, ‘자유로운 인민’이라는 이상이다. 평민들(commonalty)은 기득권 계층의 권리를 폐지하지 않으면서 자신을 ‘민족’이라 부르며 특권을 ‘권리’로 전환시켰다. 이것이 새로운 군주제의 출현을 가져왔고 제한된 군주제를 절대 군주제(absolute monarchy)로 전환시켰다. 부르주아지가 그 과정을 주도했다.

그러면서 국가는 권리를 누려야할 수많은 군중을 가졌다(Now the state has an innumerable multitude of rights to give away). 그것이 바로 국가의 권리이자 ‘정치적’ 권리이다. 더구나 국가는 그 권리에 조건을 붙여 위임된 권리에서 파생되는 의무를 충족시킬 경우에 권리를 인정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지만 명령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 전에는 다수의 작은 군주국들(little monarchies)이 있었고 개인들은 이런 작은 사회에 속해있었다. 혁명은 이런 작은 군주국들을 무너뜨렸을 뿐이고, 제3계급은 자기 외의 다른 계급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유일한 계급을 만들기 위해 자신을 민족으로 선언한다. 슈티르너는 이를 신과 직접 연결되려는 프로테스탄트와 비교하며 정치적 프로테스탄트라 부른다.


부르주아지는 국가라는 영혼에 봉사하는 좋은 시민이다. 순종적인 시민이 자유인이라는 생각이야말로 부르주아지의 뜻을 대변한다. 충실한 하인보다 더 합리적인 시민은 좋은 시민을 국가의 하인으로 본다. 그런 점에서 혁명은 오랫동안 지속된 정신의 지배, 영혼의 지배를 무너뜨리지 못했고 도덕(moral spirit)이나 도덕의 영향력(moral influence)을 없애지 않았다. 그것을 다른 형태의 개념으로 대체했을 뿐이다. 슈티르너는 이것을 자유주의의 실제 모습이라 본다. ‘합리적인 질서’, ‘합리적인 법’을 얘기하지만 그 틀은 과거를 반복할 뿐이다. 자유주의자는 신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자신의 지배자인 이성에 대한 광신도(zealots)이다.


정치적 자유(political liberty)는 프로테스탄티즘의 두 번째 단계일 뿐이고 ‘종교의 자유’와 비슷하다. 종교를 가진 사람만이 종교의 자유를 누릴 수 있고 종교의 자유가 종교의 사라짐을 뜻하지 않듯이 정치적 자유 역시 국가 내에서의 자유이다. “Political liberty means that the polis, the state, is free.…State, religion, conscience, these despots, make me a slave, and their liberty is my slavery”(97쪽). 여기서 슈티르너는 기독교와 자유주의의 공통점을 또 하나 지적한다. 그것은 바로 목적이 수단을 신성하게 만든다(the end hallows the means)는 생각이다.

개인의 자유(individual liberty) 역시 사람이 아니라 법을 따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즉 자의적인 의지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법적인 군주(constitutional prince)에 종속된다. “Only liberal matter, only lawful matter”(98쪽)

슈티르너는 이런 과정이 결국 국가만을 유일한 군주로 승인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자유로운 경쟁도 국가를 전제한다. 개인적으로는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군주가 되지 못한다. 심지어 아이들도 부모가 아니라 국가에 속한다.


“If the revolution ended in a reaction, this only showed what the revolution really was.”(99쪽) 신중함(discretion)이야말로 반혁명의 신호로 한계를 정하는데, 자유주의자는 진정으로 신중함을 원한다. “The revolution was not directed against the established, but against the establishment in question, against a particular establishment. It did away with this ruler, not with the ruler.”(100쪽) 슈티르너는 이런 것이 결국 개량으로 이어진다고 본다. 낡은 자리에 새로운 지배자를 세우는. 혁명을 통해 세계를 바꾸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인민이고 민족이고 주권국가이다. 그것은 “A fancied I, an idea, such as the nation is, appears acting; the individuals contribute themselves as tools of this idea, and act as 'citizens'. The commonalty has its power, and at the same time its limits, in the fundamental law of the state.”(100쪽) “People keep carefully within the limits of their authorization.…I am a―law-abiding citizen!”(101쪽)

그런데 이 세계에도 세계의 붕괴에서 아무 것도 잃어버리지 않을 위험한 계급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프롤레타리아트와 빈민이다. 평민들은 자기 주변의 빈곤을 신의 현명한 뜻에 따라 불평등하게 나눠진 행운이라 여기고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하지만 빈곤이 날뛰면 그것을 가두고 밀어내려 한다. 그러면서도 출생이 아니라 노동이 소유를 보장한다고 강조한다.

이런 점에서도 슈티르너는 과거와의 유사성을 발견한다. 고통을 겪으며 지혜를 깨우친다는 중세의 ‘진리’를 평신도들이 믿지 않게 되듯이, 노동자들도 돈의 ‘진리’를 믿지만 그럴 수 없음을 깨우친다. “‘Money governs the world’ is the keynote of the civic epoch.”(103쪽)

소유자들의 지배는 국가가 그 빈곤한 ‘신민’들을 훈련시키고 그들이 따르는 만큼 돈(봉급)을 주고, 평민은 국가의 보호와 자비를 통해 존재한다. 그래서 만일 국가권력이 붕괴되면 평민은 반드시 모든 것을 잃을까 두려워할 것이다. 하지만 잃을 게 없는 노동자들은 어떨까? 가진 게 없는 자(non-possessor)는 가진 자를 보호하고 가진 자에게 특권을 주는 권력으로 국가를 볼 것이다. 좋은 시민은 가진 자이고, 경찰은 노동자들에게 적은 임금을 주기 위해 기꺼이 많은 세금을 내는 좋은 시민을 위해 존재한다('good citizens' gladly pay high tax-rates to it in order to pay so much lower rates to their labourers).


정치적 자유주의를 끝맺는 슈티르너의 말은 맑스보다 더 빠른 1844년에 위선적인 부르주아 사회의 미래를 예고한다.

The labourers have the most enormous power in their hands, and, if they once became thoroughly conscious of it and used it, nothing would withstand them; they would only have to stop labour, regard the product of labour as theirs, and enjoy it. This is the sense of the labour disturbances which show themselves here and there. The state rests on the―slavery of labour. If labour becomes free, the state is lost(105쪽)


슈티르너는 세속세계에 관심을 가졌던 고대와 정신에 사로잡힌 중세와 근대를 얘기하면서 진정한 에고이스트가 등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슈티르너는 새로운 인간의 탄생을 기대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 인간은 누구일까? 니체가 말한 초인과 다른 또 다른 존재일까?

형준의 블로거에 들렸다가 하워드 진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http://blog.naver.com/caujun
1월 27일 하워드 진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한다...

뭐랄까...
하워드 진은 특별한 지식인이었다.
어떤 이념에 맞춰 세상을 재단하지도 않고 자신을 부각시키지 않으면서도 그는 세상과 올바른 관계를 맺어 나갔다.
내가 하워드 진에게 호감을 느낀 건 그가 공군 폭격수였음을 스스로 드러내고 그것을 극복하며 반전과 인권, 자유를 외치는, 투쟁하는 지식인으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그는 [전쟁에 반대한다](이후, 2003)에서 이렇게 얘기한다.


"나는 여전히 파시즘을 저지하기 위해 뭔가를 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항공대에 들어가 열렬한 폭격수가 되도록 나를 떼밀었던 도덕적 올바름을 지탱하는 명쾌한 확실성 위로 바야흐로 많은 생각들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아마도 내게 『요가수행자와 인민위원The Yogi and the Commissar』을 빌려줬던 다른 승무조 사수와 나눈 대화를 통해 최초로 의구심이 지펴진 듯했다. 그는 이 전쟁이 ‘제국주의 전쟁’이며 양 진영 모두 국가적 힘을 위해 싸우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영국과 미국이 파시즘에 반대하는 이유는 단지 파시즘이 자국의 자원과 국민에 대한 자신들의 지배권을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렇다. 히틀러는 미치광이 독재자이자 침략자였다. 하지만 그렇다면 대영제국은, 이윤과 제국의 영광을 위해 곳곳의 원주민을 상대로 정복전쟁을 벌인 대영제국의 기나긴 역사는 무엇인가? 또 소련을 보라. 역시 야만적인 독재는 아니지만, 전 세계 노동계급이 아니라 자신의 국가적 힘에만 관심이 있지 않았던가?"

그에게서 나는 지식인의 성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자기만족이나 이념에 갇혀 성장을 거부하는 지식인이 아니라 민중과 함께 호흡하며 성장하는 지식인, 그것이 하워드 진의 참모습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지식인으로서 하워드 진의 또 다른 매력은 지행합일, 언행일치이다.
그는 많은 연구를 통해 다양한 진실을 드러내면서도 대학의 교수보다 강연장이나 거리의 투사로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대학이라는 공간이 지식인의 삶을 구속하는 현실에서 진은 그 현실을 넘어설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노엄 촘스키 등이 지은 [냉전과 대학](당대, 2001)에 하워드 진은 이런 글을 실었다.
박사학위논문 주제를 정하던 촘스키는 시민적 자유에 관한 논문을 준비하며 전문가를 찾았다.


"컬럼비아의 중견 역사학교수를 찾아가 시민적 자유와 관련한 주제를 쓰고 싶다고 했더니, 그는 다른 분야를 시도해 보라고 주의를 주었다. 시민적 자유는 너무나 논쟁의 여지가 많아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기가 무척 어려울 것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그런데 그는 시민적 자유의 옹호자로 유명한 사람이었다.한 개인의 직업이 그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권력 범위 내에서 승인 혹은 거부당하는 조건에서도, 설령 그 상황이 불리하다는 점을 감안한다 해도 선택 가능성은 존재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우리가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 느끼는 가치관에 따라 가르치고 행동하는 것과, 아니면 우리 위에 군림하고 있는 권력자들로부터 인정을 받거나 안전을 위해 자신에 대해 부정직해지고 자기검열을 하는 것 중 하나가 된다."


박사학위를 받고 난 뒤에도 진은 미국인들이 가장 불편해하는 얘기를 미국인들과 전 세계에 전하며 자신의 앎을 삶과 일치시켰다.

여전히 세상은 위선과 전쟁에 휩싸여 있기에 그의 마지막 발걸음이 그리 가볍지는 않을 듯하다.
하지만
형준이 번역한 [권력을 이기는 사람들](난장, 2008)이 진의 마지막 책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책에서 진의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을 듯하다.

"시민불복종은 우리를 자극하고 생각하도록 만든다. 우리가 서로 조직할 때, 우리가 참여할 때, 우리가 일어서서 함께 외칠 때, 우리는 어떤 정부도 억누르지 못하는 힘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니 슬퍼하기엔 아직 이르다.
하늘이 진을 부른 것은 야속하지만 어쩌면 그의 죽음은 우리에게 더 적극적인 삶을, 더 실천적인 앎을 요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워드 진의 책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아픈 진실에 눈을 뜬 사람들이 교양을 넘어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참여하도록 그는 자신의 자리를 비켜준 것일지도...

고인의 명복을 빈다.

영어로 유토피아의 의미는 '어느 곳에도 없는 장소(no where)'이다.
말장난처럼 보이지만 단어를 다시 조합해서 '지금 여기(now here)'로 쓰기도 하지만 지금 이곳에서 당장 이상적인 대안이 실현되리라 기대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계급론으로 유명한 라이트(E. O. Wright)가 주도하는 'Real Utopias Project'는 그런 회의적인 시각을 넘어서기 위해 1991년에 시작되었다. 라이트만이 아니라 수많은 사회학자, 경제학자, 정치학자들이 이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 모이고 토론을 거치며 조금씩 그 실현가능한 대안을 완성해 가고 있다.
그리고 그 논의의 결과물들이 Verso출판사를 통해 출판되고 있다. 벌써 5권이 출판되었다.
더 좋은 점은 그 내용들을 웹사이트에서 다운받아 볼 수 있다는 점인데... 아래 주소로 가면 원문들을 다운받아 볼 수 있다(물론 전부를 볼 수 있는 건 아니지만).
http://www.ssc.wisc.edu/~wright/RealUtopias.htm
더 많은 논의를 위해 자료들을 과감하게 공개하는 점이 참 마음에 든다.

이제 20년을 향해 가는 대규모 프로젝트, 이런 것이 한국에 가능할까?
1년마다 연구성과를 비교하고, 양적인 비교에만 익숙한 한국에서 이런 프로젝트는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그것을 불가능하다 여기지 말고 조금씩 만들어가는 것도 연구자들의 몫이 아닌가 한다.

많은 사람들은 아나키즘이 국가와 자본의 능력을 무시하는 비현실적인 대안이라 비판한다. 우리는 그 비판에 옳다고 박수칠 뿐 그것을 반박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적 없다. 콜린 워드는 『아나키즘, 대안의 상상력』에서(원래 제목인 anarchism in action을 ‘대안의 상상력’이라 번역한 이유가 참으로 궁금하다. 아마도 책이 번역될 당시의 ‘상상력 유행’ 탓인 듯하다), 자신이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책에서 이렇게 답한다. “아나키즘은 역사의 낭만적 샛길이 아니라 인간 조직을 대하는 한 가지 태도”이기에 “지금 아나키즘은 그 어느 때보다 시의적절한 태도가 되었다.” “아나키즘은 인간의 존엄성과 책임감을 내세우는 주장이다. 아나키즘은 정치변혁 프로그램이 아니라 사회적 자기결정 행동이다.”

워드는 국가를 없앤다는 것이 대통령이나 수상직을 없애는 것과 다르다고 본다. 독일의 아나키스트 란다우어의 말처럼 국가는 “혁명에 의해 없어질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의 조건이자 하나의 인간관계이자 하나의 인간 행동양식”이기에 “다르게 관계를 맺고 다르게 행동함으로써 국가를 없앨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란다우어는 “예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것, 국가와 공존하는 것, 파묻히고 버려져 있는 것을 현실화하고 재구성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워드는 이런 ‘오래된 미래’를 “스스로 결정하고 자신의 운명을 조정하는 개인과 집단의 확장된 네트워크”라는 현대어로 번역한다. 그리고 많은 예를 들며 이런 네트워크가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증명한다. 도시계획과 사회복지, 마을자치회, 스쿼터, 협동조합, 청소년의 집, 모험놀이터, 탈학교․탈대학운동 등 대중의 자발적인 질서가 만들어온 수많은 대안들이 존재한다. 이런 수많은 대안들이 존재하는데도 왜 우리는 아나키즘을 비현실적이라 생각하는 걸까?

아마도 그건 국가와 자본의 힘이 너무 강하기에 조직적으로 맞서지 않고는 그것을 넘어설 수 없다고 믿어왔고 그렇게 배워왔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국가와 자본의 힘을 상대할 만큼 강한 힘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국가의 관료제와 자본의 자원동원력에 맞설, 폭력과 무한경쟁에 맞설 힘을 만드는 것이 가능할까? 소수의 전위정당이나 전위조직과 그들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그 힘을 만들 수 있을까? 전 지구를 지배하는 강력한 힘에 맞설 또 다른 힘은 구성될 수 있을까?

우리가 사회를 바꾸는 방법으로 ‘대항(counter)’을 생각한다면, 아나키즘은 대항과 더불어 그 강력한 힘의 기반을 무너뜨리려 한다. 상층의 기득권자들을 끊임없이 공격하고 그들에게 공포를 불어넣을 뿐 아니라 ‘협력하지 않음’, ‘협조하지 않음’으로 그 힘의 기반을 조금씩 무너뜨리고 자급과 자치로 그들을 더 이상 ‘필요없게’ 만들려 한다. 그런 점에서 워드의 말처럼 “아나키즘의 접근방식은 분명하다. 제도들을 파괴하여 사회적 차원에서 자조(self-help)와 상호부조(mutual support)를 기반으로 작동하는 작은 단위로 쪼개는 것이다.”

워드가 분명하게 강조하지 않지만 나는 아나키즘에 내포된 중요한 개념 중 하나가 바로 ‘성장’이라고 생각한다. 주어지고 규정되는 ‘피동형’ 인간들은 성장의 경험을 갖지 못한다. 부딪치고 깨고 파괴하는 능동적인 인간들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성장하고 자신의 잠재력을, 더 이상 다른 사람에게 권력을 위임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우두머리가 필요없다는 점을, 자신의 자아를, 자존감을 깨닫는다. 이런 사람들이 늘어나는만큼 국가와 자본의 힘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 늘어나는만큼 기성체제의 힘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미 존재하는 수많은 대안들을 통해, 그 대안들을 더욱더 넓혀서 우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아나키즘이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에 한국의 백무산 시인은 이렇게 답했다.

--------------------

기대와 기댈 곳

 

백무산

 

방글라데시에서 왔다고 했다
검은 얼굴의 두 사내가 쇼핑을 나왔다
할인매장 계산대에서
기름때가 다 가시지 않은 손으로
라면과 야채를 넣었다 뺐다 들었다 놓았다
돈에 맞추느라 줄였다 늘렸다 했다

계산서를 구기던 여직원이 무전기 든 덩치를 불렀고
덩치는 주먹을 흔들고 욕을 퍼붓고 침 튀겼다
깜둥이 새끼들 돈 없으면 처먹지 말지
여기까지 와서 지랄은 지랄이야!
옆 계산대를 빠져나오던 자그마한 한 비구니가 그 소리를 들었다
두 배는 됨직한 그 덩치를 무릎 꿀렸다

저 자리에서 절절매며 살던 덩치가
우리도 인간이라고 외치던 때가 엊그제였다
힘있는 덩치와 문명의 나라에 기대를 걸었던 사람은 맑스였고
희망없는 '인류의 쓰레기'들과 땅을 잃은 뜨내기들이 우글거리는 나라에
새로운 역사의 기대를 걸었던 사람은 바꾸닌이었다
한줌 가진 것에 기대 비굴하게 오염되어
열정을 잃어버린 덩치들을 그는 경멸했다
그로 인해 그는 패배자가 되어 역사에
이름을 더렵혔지만 진실은 그의 것이었다

꿈꾸지 않는 자의 절망은 절망이 아니다

마음에 티끌 하나 남기지 않고 비구니는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순결은 것은 스스로 기댈 곳이 없다
---------------

그렇다. 꿈꾸지 않는 자의 절망은 절망이 아니다. 선을 넘지 못하는 자에게 꿈은 공상일 뿐이다. 꿈이 현실을 만든다.

때 아니게 <열하일기>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한문학자인 영남대 김혈조 교수가 <열하일기> 완벽본을 내면서 기존 번역본의 오역을 조목조목 지적했기 때문이다. 특히 김혈조 교수는 작년에 <열하일기>를 세계 최초의 여행기라 소개한 고미숙 등의 번역본이 북한의 리상호 번역본을 그대로 따랐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녹색평론> 2009년 11-12월호에 기고한 글에서 김혈조 교수는 "고미숙본은 리상호본에 윤색을 가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이러한 예는 일일이 거론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난해한 문장의 오역일수록 더욱 베낌의 현상이 두드러지는데, 특히 인명․지명 등의 고유명사와 전고 부분에 집중된다"고 지적했다.

그동안 자신을 <열하일기>의 전령사라 자처했고 길진숙, 김풍기 등과 함께 <열하일기> 번역본을 낸 고미숙 평론가는 아마도 이 지적에 충분한 답을 해야 할 듯하다. 고미숙 평론가는 "꼬박 5년"  동안 이 책을 번역했고, 원문을 꼼꼼히 새기고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언어를 찾기 위해 한문학을 제대로 공부한 김풍기, 길진숙 등과 공동작업을 추진했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도중에 보리출판사에서 북한판 완역본이 나와 "완역의 부담에서 자유로워졌다"고 밝히긴 했지만 풀어쓰기가 아니라 번역이란 말을 썼다면 답해야 할 부분이 분명 있는 셈이다. 더구나 최근 들어 [열하일기]가 잇따라 번역된 건 고미숙 평론가의 활동과 무관하지 않고 더구나 고미숙 평론가가 그토록 강조했던 부분이 박지원의 '문체'라는 점을 고려하면, 분명한 입장이 필요하다 하겠다.

번역이 반역이 되지 않으려면 많은 논쟁이 필요하다.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런 논쟁을 통해 더욱더 풍성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면 그건 학문의 발전에도 큰 도움을 준다. 어떤 이야깃거리가 나올지 기대해 본다.

일제 식민지기에 일본의 아나키스트들은 무엇을 꿈꿨을까? 제국의 심장부에서 강권을 부정하는 아나키스트들은 어떤 활동을 펼쳤을까? 따지고 보면 한국으로 아나키즘이 전파된 경로가 일본이고 일본의 아나키스트들도 한인들과 적극적으로

연대활동을 펼쳤기에, 일본의 한인 아나키스트들의 삶을 살펴보는 것은 반란의 사상이 제국의 심장부에서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스며들었는지를 살필 수 있는 흥미로운 계기를 마련한다. 그런 작업에서 김명섭의 『한국 아나키스트들의 독립운동: 일본에서의 투쟁』(이학사, 2008)은 좋은 출발점이 된다.

일본의 한인 아나키즘 운동은 공부를 하러 온 유학생들의 모임에서 그 싹이 트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본으로 일자리를 구해 찾아온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더욱더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1910년대의 토지조사사업과 식민지 지주제의 확립, 1920년대의 산미증식계획 등은 많은 자작농과 소작농을 도시빈민으로 내몰았고 또 다른 사람들이 만주와 일본으로 일자리를 찾아 떠나야 했다. 낯선 땅 일본에서 이들이 겪어야 했던 민족차별이나 계급모순은 이들이 일본 사상단체의 시국 강연회나 노동쟁의 활동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일본의 대표적인 아나키스트인 고토쿠 슈스이나 구즈미 겟손, 오스기 사카에 등은 일본 군국주의에 저항하면서 한국 유학생이나 노동자들과 적극적으로 연대의 움직임을 보였다.

이런 연대에 힘입어 도쿄의 유학생과 고학생들은 민족반역자를 처단하는 의거단(義擧團), 혈권단(血拳團), 박살단(搏殺團) 등의 단체를 만들어 활동했다. 그리고 오사카 등지의 노동자들은 오스기 사카에의 아나코 생디칼리즘을 따라 노동조합과 공제조합, 협동조합을 만드는 활동에 투신하기도 했다. 김명섭은 ““도쿄 지역의 항일운동이 주로 사상단체를 중심으로 한 이념투쟁으로 전개되었다면, 오사카 등 기타 지역에서는 노동자들에 의한 노동운동과 주거권 확보 투쟁 등 일상 투쟁과 지역 내 인권운동이 주류를 이루었음을 주목할 수 있다”고 평가한다. 이처럼 아나키스트들의 활동은 각자 자신의 생활영역에서 사상을 실천하고 이념을 구성하는데 집중되었다. 김명섭은 1920년대 후반 한인 아나키스트들의 이념을 자본주의․제국주의 전쟁 반대, 부르주아 민족주의와 애국주의 비판, 공산주의 비판, 자유연합주의, 순정 아나키즘과 아나르코 생디칼리즘으로 설명한다.

일본 아나키스트들의 다양한 활동은 당시 확산되던 볼셰비즘과 충돌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는데 이 점은 한인 아나키스트들도 예외는 아니다. 192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러시아 정부의 후원을 받으며 공산주의 운동이 성장하고 <흑우연맹>을 비롯한 아나키스트들은 친일단체와 공산주의를 똑같은 타도의 대상으로 보았다. 이런 대립을 거치면서 일본 내 아나키즘 운동은 서서히 쇠락하거나 변화의 계기를 맞이하게 된다. 1930년대를 넘어서면서 한인 아나키스트들은 <일본무정부공산당>이나 <농촌운동사>같은 일본 아나키스트들의 단체에서도 활동하기도 했다.

낯선 땅에서 일본 군국주의와 친일 세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 모두와 싸워야 했던 한인 아나키스트들의 삶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들의 삶과 활동은 자기 뿌리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외부적인 조건의 변화에 큰 영향을 받았다. 국내나 만주에서와 달리 자율적인 공동체를 만들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아나키스트들이 허무주의와 개인주의를 넘어서 자유연합주의와 상호주의로 나아갈 구체적인 방법을 찾기 어려웠다. 따라서 비밀결사가 일반적인 활동이었고, 생협이나 주거권 확보 투쟁 역시 노동운동과의 연관성 속에서 가능한 활동이었는데 노동운동이 공산주의로 전환되면서 그 힘은 약화되었다(고순흠의 노동운동과 해운운동이 실패한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일본 내 한인아나키스트들은 ‘민족’이라는 관념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이는 박열의 삶에서 잘 드러난다. 보통 일본의 한인 아나키스트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이가 박열로 꼽히지만 나는 그보다 그의 연인 가네코 후미코의 삶에서 더 강한 인상을 받았다. 가네코 후미코는 사회 밑바닥 계층의 여성이 국적과 신분을

넘어 연대와 사랑의 삶으로 성장할 수 있는지를 몸소 증명했기 때문이다. 『가네코 후미코: 식민지 조선을 사랑한 일본 제국의 아나키스트』(산처럼, 2003)을 지은 야마다 쇼지의 말처럼,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는, 후미코의 가난과 고통이 개인적인 원인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구조에서 발생한 것이며, 따라서 그녀가 지배하는 자에게 품고 있던 반항심이나 자신과 같이 지배를 받으며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에게 품고 있던 연대감각”은 다른 이의 모범이 된다. 특히 “후미코가 자기를 철저하게 투시함으로써 비전향 즉 반천황제를 꿰뚫고자 했던 데 비해, 자기 사상의 기저에 민족을 두고 있었던 박열은 그녀만큼 자아를 깊이 있게 탐색하지는 않는다. 제국주의 나라의 국민은 내셔널리즘으로부터 탈피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그리고 당연하게도 억압받는 식민지 민족의 구성원에게는 개인의 해방보다 민족해방이 우선하는 과제라고 말할 수 있지만, 민족과 개체로서의 자아의 관계를 심도 있게 묻지 않은 것이 박열이 얼마 안 있어 옥중에서 조선민족으로부터 이반하여 천황제에 굴복하고 전향한 내적 원인이 아니었을까”라는 야마다 쇼지의 지적은 따끔하다(1930년대 일본사회 내에서 사회주의자들의 대량 전향 사건은 우리 시대 뉴라이트들의 모습과 관련지어 한번 따져볼 만한 사건이다). 그 지적처럼 한인 아나키스트들의 그룹 내에서 민족과 국가라는 틀에서 벗어나 자신의 자아를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에 관한 진지한 탐구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가네코 후미코가 감옥에서 쓴 수취인 불명의 편지는 지금 시대에도 다시 읽어봄직하다. “지금 내가 찾고 있는 것은 남자가 아닙니다. 여자도 아닙니다. 인간일 뿐입니다. 나는 인간으로서 살고 있습니다. 나는 이상의 이유에 기초하여 ‘연약한 성을 지닌’ 여성으로 간주되는 것을 거부함과 동시에 그런 전제 위에서 내게 제공되는 모든 은혜를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상대를 주인으로 간주하여 시중드는 노예, 상대를 노예로 간주하여 딱하게 여기는 주인, 이 둘 모두를 나는 배척합니다. 개인의 가치와 평등한 권리 위에 선 결속 그것만을, 오로지 그것만을 긍정합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 상호간의 정당한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와 타인의 모든 교섭을 그 기초 위에서 구할 것임을 나는 다시금 소리 높여 선언합니다.” 일본이라는 네이션 속에서 반일이라는 민족감정을 품었던 한인 아나키스트들의 활동은 새로운 자아를 구성하는 차원으로 확장되기 어려웠다.

김명섭의 말처럼 일본 지역에서 전개된 아나키스트들의 투쟁에 대해서는 더 많은 연구를 필요로 하는 부분이 있다. 그런 점에서 책 뒤의 부록인 재일 아나키스트운동 관련 인명록은 자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다.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박현주씨의 [행동하는 양심]을 읽다 문득 든 생각이다.


브라질 열대우림에서 천연고무를 채취하는 세링게이루들은 열대우림을 파괴하는 지주와 기업가들에 맞서 싸우고 있다. 그 운동을 이끌다 암살범의 총탄에 목숨을 잃은 치코 멘데스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역대 정부들은 아크리 주에 값싼 땅이 넘쳐난다고 말했을 뿐, 그 땅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은 빠뜨렸습니다. 여러 시도를 해봤지만 숲은 계속해서 사라져갔고, 우리는 매일 땅을 잃어갔습니다. 그래서 투쟁에 나서게 된 것입니다. 늘 비난받으며 선동가라는 딱지나 붙여지는 게 우리가 원했던 것이겠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투쟁은 권리를 지키고자 했던 우리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길이었고, 생존 자체였습니다.”

그곳이나 이곳이나, 그때나 지금이나 실제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권리를 잃고 사막처럼 생명이 말라버린 땅으로 내몰리고 있다. 이미 사람들과 생명이 살고 있는 땅이 공터로 불리고, 사람들의 보금자리가 재개발 대상지로 불린다. 

이렇게 내몰리다 자기 땅과 보금자리를 지키려 입을 열고 주먹을 불끈 쥔 사람들은 그곳이나 이곳이나, 그 때나 지금이나 비난받고 선동가, 빨갱이, 떼잡이라 욕을 먹고 테러리스트라 불리며 버림받는다. 살기 위해 부딪치는 사람들이 법치주의라는 그물에 갇혀 메마른 땅으로 끌려간다.

푸근한 인상을 가진 우리 이웃들이, 이웃집 사람들이 하루하루 어딘가로 사라진다. 나는 결코 사라지지 않으리라 자신할 수 있을까?

세링게이루들의 힘든 싸움에서 또 하나 발견한 점. 세링게이루들은 경제적 자립을 위해 천연고무를 스스로 팔고 수익금을 공동체를 위해 사용하기 위해 협동조합을 세웠다. 치코 멘데스는 암살될 때까지 샤푸리 농업노동조합의 의장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그곳이나 이곳이나, 그때나 지금이나 대안은 이미 분명하지 않을까? 왜 그들은 치코 멘데스를 암살해야 했을까? 무엇이 무서웠을까?


나는 도서관이 좋다.
케케묵은 책냄새보다는 책장 사이를 비집고 다니는 목적없는 방황을 좋아한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나는 지식인들의 고질병 중 하나인 '책에 대한 욕심'을 버렸다.
늘어나는 책값을 감당하지 못한 현실적인 이유만이 아니라 이사할 때 책을 싸는 게 너무 귀찮았다.
그래서 요즘은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도서관에 책을 신청해서 본다.
지역도서관에 신청할 때도 있고 학교도서관에 신청할 때도 있고.
좋은 책이라면 신청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보는 즐거움도 있고...

도서관을 애용하는 또 다른 이유는 목적없이 책장 사이를 헤매다 우연히 좋은 책을 발견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원래 찾으러 간 책 옆에 꽂혀 있는 책에 꽂혀 그 책을 빌려 도서관을 나올 때가 종종 있다.

오늘 도서관에서 빌린 책은 세 권이다.
원래는 각시를 위해 '인권의 발명'이란 책을 빌리려 했으나 어쩐 일인지 책장에 꽂혀 있지 않았다.

첫번째 고른 책은 조희연 등이 엮은 '한국 민주화와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동학'이다.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가 학진과제로 수행한 개별 연구들을 묶은 책이라 내용이 아주 튼실하지는 않지만 몇몇 글들은 흥미로울 듯해서 빌렸다.
주된 관심은 김동춘 교수가 쓴 '민주화 이후의 지구화 국면에서 한국의 계급구조화'이다.
목차를 보니 이광일 선배의 '민주화 전후 지역정치와 사회경제적 독점구조의 재구성'이라는 글도 눈에 띈다.
예전에 토론회 때 잠깐 읽은 적이 있는데 마무리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다른 한 권은 내가 좋아하는 일본 사상가 후지따 쇼오죠오의 '전향의 사상사적 연구'이다.
기회가 되면 한국 뉴라이트들의 정신세계를 밝히는 글을 써보고 싶었는데 그럴 가치조차 없을 듯해서 미뤄왔다.
신지호를 비롯한 여러 인간들의 정신세계를 분석하는데 도움이 될 듯해서 빌려왔다.
쓰루미 슌스케의 책과 서로 엮여있는 책인데, 우리 사회에서도 한번 전향연구회를 만들어보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여간 글을 쓸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면 뉴라이트들을 까발리는 글을 한번 써볼까 생각중이다.

책장 사이를 헤매다 발견한 수확이다.
박현주씨가 쓴 '행동하는 양심'.
각시의 권유로 불복종에 관한 연재를 고민하고 있는데, 한발 앞서 그 내용을 잘 묶어냈다(올 7월에 나온 따끈따끈한 책!).
미국의 프리덤 라이더스와 함께 남미의 치코 멘데스, 인도의 칩코운동, 간디의 소금행진 등을 흥미롭게 잘 썼다.
이미 잘 다룬 책이 나와 있기에 불복종에 대한 연재는 포기하고 다른 기획으로 바꿔야 할 듯.
하지만 '법원이 시민불복종을 재판할 수 있는가'라는 다소 문제적 제목의 논문을 쓰고 있는 관계로 시민불복종에 관한 고민을 정리하는 건 필요할 듯 싶다.
불복종이라는 부정의 개념 말고 긍정의 개념을 새로이 만드는 것도 흥미로울 듯 싶다.

어쨌거나 오늘 도서관을 헤맨 결과 나름의 성과를 거뒀다.
이 책들에 대한 구체적인 리뷰는 다음 기회에...^^

식민지 시대 한국의 지식인들은 어떤 세상을 꿈꿨을까? 일본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이 그들의 주된 관심사였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해방이 되고 난 뒤에 그들은 어떤 사회를 만들고 싶었을까? ‘국사(國史)’를 배워온 우리들에게 그 사회는 그냥 민족‘국가’였고, 대학의 세미나에서 사회주의 사상을 접한 뒤에는 민족이 사회주의로 바뀌었을 뿐 대안은 여전히 ‘국가’였다. 이호룡의 『한국의 아나키즘』(지식산업사, 2001)은 1910년대 이후 한국의 지성사가 발전해온 과정을 아나키즘의 관점에서 조망한다는 점에서 국사를 재해석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호룡은 우리가 근대의 지성사를 파악할 때 첫 단추를 잘못 꿰었기 때문에 한국의 근대사상 연구가 몇 가지 문제점을 가지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사회주의를 수용한 시기와 수

용한 동기가 잘못 파악되었고, 사회주의의 조류가 다양하다는 점을 알지 못했으며, 공산주의 수용의 사상적 배경을 놓쳤고, 1920년대 초 사상계의 분화를 잘못 이해했다고 한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우리는 한국 근대의 사회주의 운동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지만 설령 안다고 해도 매우 편향되게 그 역사를 파악했다는 지적이다. 안재성의 『경성 트로이카』(사회평론, 2004)가 그동안 억눌려져 왔던 사상의 단면을 드러낸 것은 맞지만, 그 역시 빙산의 일각일 뿐 빙산을 드러내는 작업은 훨씬 더 많은 역사적인 추적과 분석을 요구한다. 이호룡은 이런 문제점을 제기하면서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외의 사상을 그 아류로서가 아니라 독자적인 체계를 갖춘 사상으로 인정”할 것을 요구한다.

식민지 시기 한국의 민중에게는 제국주의를 뒷받침하던 사회진화론을 극복할 사상체계가 필요했고, 이를 준비하던 과정에서 사회주의와아나키즘이 함께 소개되었다. 그리고 대동사상이나 사회개조론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제국주의를 대체할 사회의 원리로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런 점에서 이호룡은 한국사회가 이미 1880년대부터 아나키즘을 접했고 190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아나키즘을 받아들였다고 주장한다. 더구나 이호룡은 1910년대 사회주의의 주류가 아나키즘이었다고 주장한다. 1905~1920년 동안 일본, 중국에서 아나키즘운동이 활발했고 그 영향을 받은 한국에서도 자연히 아나키즘운동이 대세였다는 해석이다.

사실 내 관심은 1919년 3월 1일 이후 한국사회의 민심(民心)과 운동이 어떻게 변화했는가이다. 닭이냐 달걀이냐, 아나키즘이냐, 사회주의냐를 떠나 어느 문헌에서건 3․1운동을 한국사회의 운동에서 핵심적인 변화의 지점으로 지적하기 때문이다. 3․1운동으로 드러난 민중의 폭발적인 힘은 외부의 힘이 아니라 내부의 힘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민중이 역사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이론이 아니라 경험으로 학습하게 했기 때문이다. 수많은 지식인들이 그 힘에 주목하며 의식화, 조직화의 길로 나서게 된다. 아마도 아나키즘이 그 과정에서 주목을 받았던 것은 민중의 힘에 주목했던 사상이자 우리 몸에 익은 상호부조의 전통을 반제국주의 사상과 잘 결합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이호룡은 책에서 “‘문화정치’가 시행됨에 따라 언론․출판․집회․결사․사상 등의 부르주아민주주의적 자유가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한국인에게도 주어졌고, 그 합법공간을 이용하여 아나키즘 선전작업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이런 지적은 조금 더 깊은 고민을 요구하는 듯하다.

또 하나 관심을 끄는 사건은 1920년 조선노동공제회의 창설이다. 이호룡은 조선노동공제회의 주축이 아나키즘 세력이었다고 얘기한다. 이는 사회주의운동 연구자들이 지적하는 바와 상당한 차이를 보이지만 그가 책에서 인용하듯이, 공제회의 기관지인 《공제》에 아나키즘 관련 글이 올라온 것도 사실이고, 보통 사회주의 계열로 분리되는 서울청년회의 김명식 등이 아나키즘에 많은 관심을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조선노동공제회의 구체적인 활동 상황을 추적하는 것 또한 중요한 함의를 가지고 있을 듯하다.

어쨌거나 이호룡은 일제 강점기에 아나키즘이 주된 사회운동의 흐름으로서 존재했음을 선언한다. 민족주의, 사회주의와 어깨를 나란히 겨누며 아나키즘은 한국사회에 자리를 잡았다. 이호룡은 얘기한다. “한국 사상계는 다양성을 상실하고 민족주의와 공산주의의 극단적인 좌우 대립으로 치달았다. 좌우 대립을 완충시킬 수 있는 제3의 사상의 존재가 사라짐으로써 민족의 사상적 통합에 많은 문제점이 초래되었다.” 민족의 사상적 통합에 많은 문제점이 초래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의 사상적 좌표가 상상력 없이 사라져버린 시대에 아나키즘은 새로운 상상력을 줄 수 있다.

우리가 다른 역사의 과정을 밟았다면 어땠을까라는 공상보다 지금 우리가 어떤 사회를 지향할 것인가라는 상상에서 아나키즘은 다시 질문을 던진다. 누구와 함께 어떻게 새로운 사회를 만들 것인가?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