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진으로 집이 무너지고 시커먼 해일이 도시를 삼키는 광경을 보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렇지만 그냥 철렁하기만 했다. 허나 그 뒤를 이은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의 폭발사고는 강 건너 불구경일 수 없었다. 영화에나 나올법한 종말이 다가온 듯했다. 심각한 재난을 보면서 새삼 우리나라에 이미 21개의 핵발전소가 있고 6개를 짓고 있고 2030년까지 핵발전소가 총 41개까지 늘어날 것이라는 끔찍한 사실을 떠올렸다. 우리에게 불구경할 여유가 있을까?


사고소식을 들으며 이제 돌을 맞이하는 아이 얼굴을 바라본다. 어느 순간 핵발전과 관련된 보도들이 조금씩 사라지고 안전한(?) 한국형 원자로가 전략적인 수출품목으로 떠오르는 걸 보며 머릿 속이 핑 돌았다. 이 아이를 영화 <터미네이터>에 나오는 전사로 키워야 하나? 보태줄 건 없더라도 최소한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은 남겨줘야 할텐데, 핵은 미래 자체를 파괴한다.



핵발전과 민주주의의 파괴


지금 우리는 통제할 수 없는 재앙을 미래세대에게 떠넘기고 있다. 우리가 쓸 에너지를 생산하기 위해 미래를 팔고 있다. 핵발전으로 생기는 핵폐기물은 최소한 2만 5,000년 동안 해결되지 않는 끔찍한 물질이다. 이런 물질을 두고 누가 ‘안전’을 논할 수 있을까?


그리고 자연방사능이나 병원에서 순간적으로 쬐는 방사선과 달리 핵사고로 인한 방사능은 호흡기와 피부, 음식을 통해 체내에 흡수되어 몸 속에 축적된다(오염된 땅과 물은 반드시 인간에게 복수한다). 당장은 우리에게 해가 없다손 치더라도 체내에 축적된 방사능이 미래세대에게 영향을 미치리라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이 위험하고 끔찍한 물질에 관한 정보를 철저히 통제하고 있다. 왜 핵발전소를 더 지어야 하는지, 어디에 지을 것인지, 거기서 나오는 핵폐기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이와 관련된 정보들은 철저히 차단된다. 소수의 핵심관료들과 전문가들이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과 건강을 담보로 도박을 벌이고 있다.


사실 핵무기만큼 핵발전은 ‘비밀스럽고 비민주적인’ 기술이자 위험한 기술이다. 핵무기가 현재를 파괴한다면 핵발전은 ‘예고된 파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반전(反戰)과 반핵(反核)은 함께 붙어다닐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왜 예고된 파괴가 중단되지 않는가? 북한의 핵개발을 막고 대량살상무기를 없애야 한다고 호들갑을 떨면서도 왜 핵발전에는 이렇게 너그러울까? 원인 없는 결과 없듯이, 이윤 없는 부패는 없다. 원전 1기당 건설비용이 대략 2조원을 넘긴다고 하니 이윤을 노리는 똥파리들이 어찌 꼬이지 않겠는가. 위험하고 끔찍한 핵발전이 중단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을 통해 이득을 보는 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여러 신문과 주간지들이 핵발전을 추진하는 한국의 핵마피아를 다뤘다. 대략적인 그림은 교육과학기술부와 지식경제부, 현대건설, 두산중공업, 삼성물산, 대림산업, 대우건설의 5대 재벌기업, 이들과 어울리는 학계와 전문가 집단이 한국의 핵산업을 이끌고 있다. 즉 권력과 자본, 이들에 빌붙은 지식인들이 시민들의 참여를 막고 ‘중립’과 ‘전문성’을 내세우며 핵개발을 주도하고 있고 갖은 이권을 나눠먹고 있다. 외국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원전 건설과 관련된 핵마피아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며 제 3세계를 노리고 있다. 토다 기요시의 말처럼 “원자력개발은 전문가 지배, 관료 지배, 대기업 지배를 강화한다.” 핵발전은 민주주의를 파괴할 수밖에 없다.


핵개발이 비민주적인 이유는 핵마피아가 나눠먹는 이권에만 있지 않다. 한국의 에너지 정책은 중앙정부의 손에서 결정되고 전력소비는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다(서울의 전력자급율은 1.9%에 불과하다). 핵발전소가 세워지는 지역들을 보라. 대부분 한반도의 외곽지역이고 그 중에서도 가장 못 사는 지역들이다. 핵마피아들은 지역발전을 빌미로 주민들을 유혹하고 그들의 터전을 파괴한다. 그래서 지방은 자신들이 쓰는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의 전력을 생산해서 수도권에 ‘에너지 조공’을 바쳐야 한다(조공을 바쳐야 중앙정부로부터 예산을 얻을 수 있으니). 에너지 조공을 계속 받기 위해 핵마피아들은 지속가능한 발전이나 민주적인 지역발전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리고 핵발전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이다. 안전하고 깨끗한 에너지라며 핵을 선전하는 원자력문화재단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직접 핵발전소에서 일할 리 없고, 원자력 르네상스를 꿈꾸는 이명박 대통령이 핵발전소의 연료봉을 갈 리도 없다. 핵발전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하청 노동자들이고 위험한 곳에서라도 일하며 생계를 꾸려야 하는 사람들이다. 자발적 노동이라고 하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는 노예노동인 셈이다. 나의 안락함을 위해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면서도 민주주의를 논할 수 있을까?


핵발전소만이 아니다. 핵발전에 반드시 뒤따르는 핵쓰레기들, 그것을 처리하는 과정도 민주주의를 파괴한다. 1978년에 고리 1호기가 처음 발전을 시작한 이후 계속 쌓여가는 핵쓰레기를 처리하기 위해 정부는 비밀리에 핵폐기장 건설을 추진해 왔다. 그동안 핵폐기장을 만들기 위해 정부가 추진한 곳도 역시 지방이다. 경북 영덕군과 영일군, 강원도 울진군, 충남 안면도, 경남 양산, 경기도 굴업도, 전남 영광, 전남 고창, 전북 부안 등이 핵폐기장 후보지로 거론되어 왔다. 처음에는 주민들에게 알리지도 않은 채 핵폐기장을 몰래 지으려다 주민들의 반발로 계속 실패했고, 지금은 한수원이 많은 돈을 풀어 주민들의 여론을 내세워 신청을 하게 만들고 중앙정부가 이를 받아들이는 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 역시 민주주의의 껍질을 쓰고 있지만 참으로 비민주적인 과정이다.


핵발전소와 마찬가지로 핵폐기장이 들어설 후보지에서 핵의 안전성 여부는 쟁점조차 되지 못한다. 대부분의 후보지들은 ‘지역발전’을 내세워 핵폐기장 유치를 추진하고, 붕괴한 지역경제에 낙담한 주민들이 이에 동조하는 식이다. 허나 누가 핵발전소나 핵폐기장이 있는 곳을 발전된 지역이라 여길까.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으면서 주민들은 떠나고 지역은 더 뒤처지고 생활은 더 어려워진다. 승자는 중앙의 비민주적 권력과 주민의 이름을 팔아먹는 지역의 토호권력 뿐이다.



반핵운동과 주민들의 살아있는 민주주의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은 싹트는데, 핵폐기장이 들어서려는 곳마다 주민들은 상황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적극적으로 저항했다. 평범한 주민들이 권력의 부당한 억압에 직접 맞설 수 있을까, 의심하는 사람이 있다면 반핵운동의 역사를 봐야 한다.


1989년 3월 정부가 경북 영덕군을 핵폐기장 후보지 1순위로 정하자 주민들의 저항이 시작되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전 주민의 1/3 가량이 집회에 참여했고 국도를 점거하기도 했다. 주민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히자 정부는 계획을 포기했고, 이에 힘을 얻은 반핵운동은 4월에 ‘전국핵발전소추방운동본부’를 만들어 본격적으로 반핵운동을 벌였다.


그 이후에도 정부가 핵폐기장을 지으려는 곳마다 주민들의 저항은 이어졌다. 그 중 광주항쟁 이후 최악의 주민시위로 꼽히는 안면도 투쟁은 눈여겨 볼 만하다. 1990년 11월 과학기술처가 안면도에 원자력 제2연구소라는 이름으로 핵폐기장을 건설하려 한다는 보도가 <한겨레>에 실리자 주민들의 저항이 시작되었다. 당시 <공해추방운동연합>의 간사가 안면도에 들어가 주민저항을 조직했고, 보수적인 단체로 분류되는 청년회의소(JC), 로타리클럽, 라이온스클럽, 청년회들, 심지어 지역의 건달들까지 힘을 모아 <안면도핵폐기장반대추진위원회>를 결성했다. 약 2만 여명의 주민 중 절반이 집회에 참여했는데, 이 과정에서 지역공동체가 힘을 발휘했다(최대규모의 집회로 불린 11월 8일의 집회에는 약 1만 5천명의 주민이 참여했다). 주민들은 한 가구당 한 명 이상을 반드시 집회에 참석시키고 참여하지 않는 가구에 5만 원씩 벌금을 물린다는 규약을 만들었다. 나아가 핵폐기장 유치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장례식이나 결혼식에 참여하지 않고 동네 상여도 빌려주지 않는 징계를 내리기도 했으며 유치 신청자나 그 자식들을 해고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안면도의 주민항쟁은 폭력/비폭력의 경계를 넘어서 진행되었다. 경찰의 폭력진압에 맞서 청년결사대가 조직되고, 안면지서가 불에 타기도 했다. 주민들은 안면읍사무소를 접수하기도 했고 육지와 연결되는 하나뿐인 다리를 폭파시킨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리고 ‘안면공화국 만세’라는 구호가 시위 도중에 등장하기도 했다. 만일 주민들이 저항하지 않았다면, 죽음의 평화가 안면도를 뒤덮었을 것이다. 안면도 투쟁은 주권을 회수한 민중들이 국가의 법치주의나 폭력/비폭력의 경계를 넘어설 수밖에 없다는 점을 증명했다.


이런 저항에 밀려 정부는 안면도 핵폐기장 건설을 포기하는 듯 보였지만 실제로는 주민들을 돈으로 유혹하며 안면도의 공동체를 분열시키려 들었다. 허나 이마저도 1992년 5월 주민공작을 일삼던 원자력환경관리센터 직원들이 묵던 여관을 마을청년들이 습격해서 서류를 빼앗고, 1993년 1월 유치를 찬성하던 주민의 양심선언이 이어지면서 정부는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허나 핵폐기장을 짓겠다는 계획은 포기될 수 없었다. 핵발전을 이미 시작한 곳에서는 포기가 불가능하다. 핵발전소가 늘어나는 만큼 핵폐기물의 양도 계속 늘어났기 때문이다. 1994년에는 경기도 굴업도에 핵폐기장을 건설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자 그 옆의 덕적도 주민들의 저항이 시작되었다. 주민들은 고립된 섬에서 빠져나와 서울과 인천을 오가며 반대시위를 벌였고 당시 액수로 500억이라는 거금을 투자하겠다는 정부 발표에도 계속 시위를 벌였다. 주민들의 시위가 1년을 끌었지만 꿈쩍도 하지 않던 정부는 지반이 약해서 핵폐기장에 알맞지 않다는 지질조사 결과가 나와 스스로 계획을 접는다(이처럼 핵과 관련된 사업들은 상식을 거부한다).


표류하던 핵폐기장 건설은 2003년 5월 중앙정부와 전북 부안군수가 폐기장 유치를 반대하는 부안군민의 의견을 뒤집고 위도 주민 80%의 서명을 받아 핵폐기장 유치를 신청하자 다시 시작되었다. 이에 부안군민들의 반대집회가 이어졌고 180여 일의 눈물겨운 촛불집회가 시작되었다.


그러자 주민들에게 현금보상을 하겠다는 산자부와 한수원의 거짓말 행진과 주민들을 분열시키려는 공작이 시작되었다. 더구나 정부는 주민들과 대화하면서 합의를 유도하기는커녕 공권력을 투입해 강제로 촛불집회를 막았다(인구 7만이 안되는 부안에 8천여명의 전경이 투입되었으니 정부는 주민들의 입을 공권력으로 꽁꽁 틀어막은 셈이다). 그리고 중앙언론들은 지역이기주의, 폭력사태 등의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뽑으며 부안주민들을 몰아붙였다.


결국 부안에서는 주민투표라는 새로운 대안이 등장했다. 주민투표는 이렇게 돈과 공권력의 힘이 주민들의 입을 완전히 틀어막은 상황에서 주민들의 의견을 밝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정부는 그 주민투표마저 거부하며 주민들의 의견을 무시하려 들었다. 그럼에도 부안의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투표를 준비했고, 외부의 시민단체와 자원봉사자, 변호사들이 투표진행을 위해 힘을 모았다. 주민투표 이전에 약 10개월 동안 방폐장과 관련된 다양한 정보가 지역사회 내에 퍼져서 사람들의 이해를 돕고 토론을 불러일으켰고, 부안주민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핵폐기장을 막아냈다.


핵폐기장 건설은 4개 지역 방폐장 동시 주민투표라는 희대의 사기극으로 마무리되는 듯했지만 여전히 심각한 문제가 남아 있다. 경주의 지반이 매우 약해 핵폐기장에 적합하지 않고 공사현장에 수맥이 흘러 방사능이 유출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런데도 공사는 계속되고 있다. 우리가 민주적인 나라에 살고 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제 우리는 ‘핵폐기장 사고’를 예약한 채 살고 있다. 다만 사고가 언제 터질지 알지 못할 뿐이고 내가 살아있는 동안 끔찍한 사고가 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허나 미래의 누군가는 그 공포를 감당해야 한다.



재난자본주의를 넘어서


왜 끔찍한 재난이 반복되는가? 가장 큰 이유는 누군가의 재난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엄청난 기회이자 이익이기 때문이다. 재난이 쑥대밭을 만들고 간 자리에서 누군가는 재건축과 재개발의 가능성을 본다. 이를 막을 수 있는 ‘정상적인’ 방법은 없다. 앞서 주민들의 저항이 증명하듯 현 사회를 움직이는 힘은 재난을 당한 사람들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오미 클라인은 이를 ‘재난 자본주의(disaster capitalism)’라고 부른다. 전 세계의 재난 현장을 돌아보고 주민들을 인터뷰하면서 나오미 클라인은 위기가 권력의 독점을 정당화시킨다는 결론을 내린다. 가난하고 약한 대다수 사람들이 쓰나미나 지진, 전쟁같은 재난으로 고통을 겪는다면, 소수의 기업과 정치인들은 그런 재난으로 이득을 취하며 더욱더 배를 불린다. 심지어 경제공황이나 전쟁같은 재난을 의도적으로 일으키기도 하고 이를 위해 군대를 동원해 쿠데타를 일으키고 수많은 시민들을 고문하며 죽음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재난을 통해 정치와 경제, 공과 사의 경계를 뛰어넘어 권력을 독점하는 세력이 바로 재난 자본주의의 지지자들이다.


이들은 주민들의 반대가 거세도 힘으로 누르고 돈으로 유혹하면 일이 성사될 수 있고 그러면 엄청난 돈을 챙길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그러니 아무리 설득하고 요구해도 이들은 자신들의 계획을 수정하거나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겐 국가나 공동체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절망적인 재난을 막을 방법은 그들의 뜻을 대표할 대의제도나 공권력에 있지 않다. 주민들이 직접 나서서야 가까스로 재난을 막을 수 있었다. 안면공화국이 선포되고 부안독립신문이 발간되어야 기득권층은 타협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정치학 교과서에나 나올법한 수준에서 한국의 민주주의를 논하는 얘기들은 사람들의 착각을 부추길 뿐이다. 근본적으로 한 국가 내에 두 개의 나라가 만들어져 있고 민중이 사는 나라의 삶이 불안정하고 위험한데 어떻게 민주주의를 논할 수 있을까? 몇몇 사람이 바뀐다고 재난자본주의가 무너질까? 민중을 대표하기는커녕 내부의 민주적인 의사결정이나 진보적인 정책조차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진보정당들은 헛된 기대만 부추길 뿐이다.


따라서 민중의 힘을 드러낼 방법은 직접행동이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권력이나 자본이 아니라 민중에게 힘을 주기 위한 방법이기에 직접행동은 민주주의의 토대이다. 이 민주주의에서 나라가 생기고 권력이 생긴다. 이 힘을 포기한다면 민중은 온전히 자신의 삶을 살 수 없다. 반핵운동은 이 점을 가장 분명하게 증명한다.


그리고 반핵운동은 다른 사회운동과 달리 ‘보편운동으로서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반핵운동은 제 1세계와 제3세계의 구분을 뛰어넘어 전 세계의 민중이 보편적으로 공감하며 함께 싸울 수 있는 운동이다. 핵의 개발은 인류에게 공멸(共滅)이라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질문을 던졌고, 핵의 위험은 국경을 넘어 퍼져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 핵은 인류를 진정한 운명공동체로 만들었다. 함께 멸망할 것인가, 아니면 함께 생존할 것인가?


또한 반핵운동은 사회운동과 주민운동이 손을 잡을 기회를 마련한다. 과거 반전(反戰)과 반핵, 양키고홈을 함께 외쳤던 ‘반전반핵가’에서 잘 드러나듯이, 핵발전소를 반대하는 운동은 식민지에서 해방되려는 운동,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운동, 억압적인 정권에 저항하는 운동, 개발에 반대하는 운동일 수밖에 없다. 즉 반핵운동은 비민주적인 정부와 독점재벌, 토호세력에 맞서는 운동이다. 반핵운동은 주민운동이 지역을 벗어나 전국적인 이슈에 개입하게 만들고, 근본적으로 다른 사회를 꿈꾸게 한다.



지옥문 앞에서의 피스몹


30년의 수명을 넘긴 고리 핵발전소 1호기는 지금도 계속 돌아가고 있다. 언제 사고가 터질지 모르는 고장 난 시한폭탄이다. 그 폭탄을 해체할 생각은 않고 미래를 논하는 우리는 얼마나 어리석은가.


자동차 사고가 무서워 자동차를 타지 않겠냐며 핵발전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참으로 어리석은 자들이다. 자동차와 원자력이 어찌 같을까? 핵발전소나 핵폐기장에서 사고가 터지는 순간 그 곳은 죽음의 땅으로 변하고 죽음의 재는 멀리 멀리 퍼진다. 미국의 쓰리마일, 소련의 체르노빌 사고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거나 고통을 겪고 있고 아직도 그 고통은 계속되고 있으며 앞으로 얼마나 고통이 이어질지 우리의 시야로는 가늠할 수 없다. 이를 자동차와 비교할 수 있을까?


원자력은 ‘근본적인 악’이다. 그 어떤 이유를 대더라도 정당화될 수 없는 재앙이다. 저주받은 죽음의 물질을 대대손손 후손들에게 물려줄 것인가? 억압적인 권력보다도 더 무서운 유산이 바로 원자력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핵이다.


그러니 우리의 미래를 위해 우리의 현재와 싸워야 한다. 이 길고 긴 싸움은 이기기 위해, 나를 증명하기 위해, 온전히 나 자신으로 살기 위해 결코 포기될 수 없는 싸움이다. 그리고 다른 누군가가 대신해줄 수 없는 싸움이다. 그래서 희망은 나의 삶에 있다. 라페는 이렇게 얘기한다. “우리 본성에 대한 이러한 움츠러든 관점은 지배적인 정치경제 이론뿐만 아니라 끊임없는 기업광고에 의해서, 숱한 종교 압력에 의해서도 강화되고 있다. 지배적인 정치경제 이론과 기업광고는 우리를 경쟁적으로 자기 것을 축적하는 존재로 환원시키고 있고, 종교는 우리를 더러운 죄인이라고 강조하면서 더 나쁜 역할을 하고 있다.…지구의 생존은 그러므로 우리가 단절을 이루어 낼 수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 내가 강조했듯이 우리가 인간 본성 그 자체의 선함이 아니라 인간 본성에 내재하는 풍요로움을 긍정할 수 있을지 없을지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다.” 미래의 희망을 꿈꾸며 우리는 지금 현재와 단절해야 한다. 그것도 아주 단호하게.



참고한 책


토다 키요시 지음, 김원식 옮김, 『환경학과 평화학』(녹색평론사, 2003)

녹색평론 좌담회, ‘핵발전, 무엇이 문제인가’, 《녹색평론》 2011년 5~6월호.

신동호, “안면도 반핵항쟁”, 《뉴스메이커》 제 684, 685, 686호.

나오미 클라인 지음, 김소희 옮김, 『쇼크 독트린』(살림Biz, 2008).

프란시스 무어 라페 지음, 우석영 옮김, 『살아 있는 민주주의』(이후,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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