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와 출파: 역사의 이단은 어떻게 등장하나?



조경달의 『이단의 민중반란』(역사비평사, 2008)과 『민중과 유토피아』(역사비평사, 2009)를 읽고 있다.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역사학자 조경달은 근대 이행기의 민중운동이 자율적인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근대 이행기의 민중운동을 지식인들이 주도하는 민족운동과 혼동”하면 안 되고 “민중이 자신들의 생활주의에서 비롯된 고유한 문화와 논리를 가지는 이상, 비록 지식인들의 지도를 받아들였더라도 그 운동에는 자율적인 측면이 많이 있을 것”이라 주장한다. 그 증거로서 조경달은 갑오농민전쟁과 동학, 3․1운동 등 각지의 민중반란을 분석한다.


이런 연구를 통해 그는 무엇을 말하고 싶을까? 조경달의 관점을 받아들인다면 한국의 근대사가 근대국가 건설이라는 하나의 일관된 목표를 향해 발전되었다는 주장은 허구이다. 조경달의 목소리를 빌리면, “유토피아와 현실의 국가는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의 국가는 민중의 유토피아사상을 배신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점은 근대국가의 창설이 실패해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의 과거, 그리고 현재까지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그래서 현재로부터 제기되는 중요한 의문, 즉 민중의 입장에서 근대=국민국가란 어떠한 의미를 가진 것이었던가 하는 의문을 조선 근대사의 맥락에서도 제기해야만 한다. 아직도 통일국가를 실현할 수 없는 회한에 가득 찬 조선의 현실은 자칫하면 국민국가를 이상화理想化할 수도 있다. 그러나 거꾸로 그러한 불행한 현실이 있기 때문에 조선은 유토피아로서 국가의 상을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민중과 국가의 관계를 다시금 냉정히 바라보는 지평에 설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조경달은 『이단의 민중반란』에서 갑오농민전쟁을 꼼꼼히 분석한다. 최제우의 원시동학과 최시형의 정통동학이 만든 체계의 틈에서 서장옥과 전봉준, 김개남의 이단동학이 자라고 민중들은 이에 열광한다. 조경달은 흔히 갑오농민전쟁의 성과로 알려진 집강소에 대해서도 그것이 실제로는 ‘관민상화’의 산물, 즉 힘을 잃은 공권력이 반란을 통제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로 본다. 결론을 보면, 조경달은 갑오농민전쟁을 통해 민중이 변혁의 주체로 등장하기는 했으나 정치의 주체로 등장하지는 못했다고 분석한다. “변혁의 주체를 단 한 사람의 초인적 진인=구세주에서 총체적인 민중으로 확대하고자 한 것이야말로 동학의 획기적인 면”이지만 국왕에 대한 환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민중은 스스로를 정치의 주체로 등장하지 못했지만 끊임없이 근대에 저항하는 반근대적 변혁지향을 품었다.


책을 읽다보면 우리 역사에서 다양한 정치적 계기들을 만나게 되는데, 조경달은 임술민란이 민란시대를 알린 신호탄이라 얘기한다. 조경달은 수령구조에서 소외된 몰락양반이나 향촌 지식인들이 ‘덕망가적 질서’를 갖췄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덕망과 정의감이 있는 사족이 존재하기를 바라고 그들에 의해 향촌의 질서가 조화롭게 재생하기를 기대하는 심성”을 가진 민중이 이들과 함께 일종의 유토피아를 꿈꿨다고 본다.


임술민란이 일어날 당시 전라좌도 3읍 암행어사였던 김원성金元性은 이런 보고를 남겼다고 한다. “호남(전라도)의 여러 읍에는 출파出波와 좌파坐波의 명맥이 있는데, 모두 향유鄕儒 가운데서 문자를 조금 해독하고 자못 권력을 가진 자들이다. (그들은) 관정官政을 살펴 득실을 논하고 시비를 말하며 잘못을 기꺼이 비방한다. 앉아서 지휘하는 자를 좌파라 하고, 분주하게 노동하고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지 않아서 경향京鄕으로 출몰하는 자를 출파라 한다. 이번 여러 읍의 소요는 (사람들이) 관리의 가혹한 정치를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이른바 수창자首昌者는 출파나 좌파와 같은 자들이다.”


흥미로운 기록이다. 반란의 수장인 출파와 좌파라. 이 구절을 읽으며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와 묘하게 겹친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 시대에 스스로를 좌파라 칭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대중들 사이에서 조그만 권력을 가진 그들은 외국의 급진적인 이론을 수입하기에 바쁘고 권력을 비방하기에 바쁘다. 그렇게 분주하게 일하며 그들은 반란을 일으키는데 일정한 기여를 한다.


하지만 좌파들은 ‘앉아서 지휘’하고자 한다. 자신들은 큰 판을 읽으며 마치 도박바둑을 두듯이 말을 움직이려 한다. 저만큼 떨어져서 보면 크게 읽을 수 있겠지만 가까이 가서 두루 살피지 않으면 사람들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 정통이 필요하지만 이단도 필요한 것은 현실의 층이 다양하고 사람들의 삶 역시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분주하게 노동하고 움직이며 온갖 동네에서 출몰하는’ 출파가 필요하다. 민중과 더불어 새로운 일을 도모하는 출파들은 곳곳에 반란의 씨앗을 심고 기운을 일으켰다. 출파와 좌파의 힘이 모이고 민중들이 함께 꿈틀거리면서 반란이 일어났다.


허나 모두가 앉아서 지휘하려 들면, 자연히 분란이 생기고 망할 수밖에 없다. 분란과 갈등이 생기는 건 부정적이지 않지만 앉아서 지휘하는 자들의 분란은 망하는 지름길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좌파만 수두룩하고 출파는 거의 없거나 인정과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런 상황에서 이단의 혁명이 일어날 수 있을까?


그리고 좌파들은 더불어 꿈꾸기를 주저한다. 자신의 순수성이 훼손될까 걱정일까, 아니면 함께 하길 싫어하는 천성일까? 혼자 고고한 삶을 추구하다보니 ‘명망’은 높지만 ‘덕망’은 낮다. 똑똑하고 말을 잘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 속으로 다가서지 못한다. 좌파가 하지 못한다면 출파가 그런 역할을 보완해야 할 터인데 좌파는 넘쳐 나지만 출파는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가 거듭 반란의 실패를 경험하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나는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출파의 모습을 풀뿌리운동에서 본다. 풀뿌리의 힘이 강해질수록 이단의 힘도 강해지고 새로운 반란이 싹을 틔울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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