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동사회경제란 말은 낯설다. 사회경제란 말도 익숙하지 않은데 협동사회경제라니... 낯설지만 이미 ‘협동사회경제’라는 말을 쓰는 곳들이 여럿 있고 계속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 외국에서도 협동사회경제라는 말을 쓸까? 찾아보면 ‘cooperative/social economy’라는 말은 쓰지만 협동사회경제라고 붙여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렇다면 왜 이런 말을 쓰게 되었을까?

 

한국협동사회경제연대회의는 자신의 출범배경으로 “‘협동조합기본법’ 제정을 위해 시민사회단체들로 구성된 <협동조합기본법제정연대회의>와 ‘사회적기업육성법’의 올바른 제정을 위해 구성되어 6년 여 동안 활동한 <한국사회적경제연대회의>가 통합된 조직으로, 2012년 11월 21일 출범하였습니다. 연대회의는 한국의 협동조합, 사회적 경제 영역에서 활동하는 제 단체들이 연대하고 협력하는 네트워크 연대조직으로서 한국의 사회적 경제운동의 활성화와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활동할 것”이라 밝힌다. 이 맥락을 읽어보면 협동사회경제란 협동조합을 중심으로 한 진영과 사회적 기업을 중심으로 한 진영의 결합체를 뜻하고, 궁극적으로는 사회적 경제운동의 활성화와 발전을 도모하는 듯하다. 그렇다보니 두리뭉술하고 ‘협동사회경제’라는 말이 뭔가 입에 짝짝 달라붙지는 않고, 협동사회경제네트워크를 만드는 것이 약간 붐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 강의의 주제인 협동사회경제의 사례를 본다는 것은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의 사례들을 본다는 것일까? 어느 협동조합의 규모가 어떻고 어떤 사회적 기업이 잘 된다는 얘기는 이미 언론이나 출판을 통해 여러 차례 다루어졌다고 생각한다. 기획재정부가 만든 협동조합 사이트에서 알림마당→자료실로 들어가면 ‘아름다운협동조합 만들기’를 다운받을 수 있다. 거기서 기본적인 자료들을 얻을 수 있고, 서울시청 홈페이지에서 사회적 경제→사회적 경제 자료실에 들어가면 ‘협동조합 운영 사례집’을 다운받을 수 있다. 그 사례집에는 국내외 50개의 사례가 소개되어 있다. 김현대 등의 『협동조합, 참 좋다』(푸른지식, 2012년), 김성오 등의 『우리, 협동조합 만들자』(겨울나무, 2013년)를 참조해도 좋다.

 

이 이상의 사례들을 논하는 건 나의 능력 밖이다. 심지어 나는 외국에 사례를 보러 나가본 적이 없고 그런 욕망도 없다. 그런 사람에게 사례 얘기를 들어야 하니 좀 우울하실 터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이 자리에 섰을까? 몇 가지 고민을 나누고 싶어서이다.

 

 

1. 사례를 본다는 것의 의미는?

 

우리는 왜 사례를 보고 듣고 싶어 할까? 한국사회는 좀 과다한 싶을 정도로 사례에 집착한다. 어느 곳이 주목을 받으면 그곳을 도는 것이 일종의 코스가 되고, 외국 사례도 그곳 관계자들이 힘들어할 정도로 주목을 받으면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방문한다. 왜 그럴까?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는 말을 믿어서일까?

 

사례를 보고 온 사람들은 그 사례의 전도사가 되어 여기저기서 많은 얘기들을 한다. 그런데 정말 사례를 논할만 할까? 내 경험상 하루 들린 사람들은 견학 정도이고 보름 정도 지긋하게 눌러 있어도 그곳의 역사나 사회조건, 문화적인 특징 등을 잘 모르면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된다(반대로 생각하면 된다. 사천 지역을 알아보겠다는 사람이 하루 돌고 난 뒤에 사천에 관해 얘기하면 어떻겠는가?). 그래서 나는 직접 가서 보고 듣는 것도 필요하지만 잘 정리된 연구들을 보는 게 때로는 훨씬 낫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꼭 가서 보고 싶은 곳도 있을 수 있지만 지금까지 그렇게 마음을 흔든 사례는 없다.

 

그럼에도 왜 우리는 사례를 보려 할까? 뭔가를 빨리 만들어내고 싶은 욕망이 사례를 보게 만들 수 있다. 우리도 빨리 저런 걸 만들고 싶다, 우리 지역도 빨리 저렇게 변하면 좋겠다. 그러니 가서 어떻게 되었는지를 듣고 빨리 그 방식을 우리 삶에 적용하고 싶어진다. 직접 보고 와서 얘기하면 주변 사람들을 설득하기도 쉽다. 내 눈으로 봤다 아이가, 이런 식이다.

 

그런데 이럴 경우 사례와의 만남은 우리를 억압한다. 내 옆의 사람과 손을 잡고 그를 신뢰하는 게 아니라 어떤 틀을 만들고 사람과 관계를 그 속에 밀어 넣게 된다. 잘 안 되면 그 탓은 틀이 아니라 내 옆의 사람 탓이다. 이렇게 되면 사례는 성공의 지름길이 아니라 실패의 지름길이 된다.

 

그렇다고 사례를 보면 안 된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사례를 보려는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는 얘기를 하고 싶다. 적어도 내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알고 있으면 그 사례에서 내가 필요한 부분을 취할 수 있다. 보통 나는 나라서 나를 매우 잘 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타자의 얼굴에 비친 내 모습을 통해 자기를 알아 간다. 어쩌면 사례의 진정한 의미는 따라가고픈 그 모습이 아니라 그것에 비친 내 모습일 수 있다. 우리가 만남을 가지는 이유는 타자에게 종속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유로워지기 위해서이다. 사례에 들뜨거나 사례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사례를 보는 자신의 모습을 잘 살펴야 한다.

 

그리고 사례를 본다는 것의 의미는 그냥 들어보는 게 아니라 그렇게 할 ‘의지’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좋은 얘기 잘 들었습니다’로 그치지 않고 그 사례가 실제 내 삶에서 의미를 가지려면 나의 준비를 확인해야 한다. 다른 지역의 특수한 사례로 여기지 말고 우리 지역 내에 그런 특수성을 접목시킬 수 있도록 노력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사례를 볼 때는 그 맥락을 조심스레 살펴야 한다. 우리는 어떤 방식이나 제도를 금방 수입하고 만드는데, 그렇다보면 그것의 정신이나 문화를 무시하게 된다. 외국의 좋은 제도들이 한국에 들어오면 다들 이상해지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어떤 제도를 성공하게 하는 건 탁월한 리더십의 역할도 있지만 전체 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구조의 탓도 크다. 우리는 사례를 볼 때 사람이나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만 보는데, 보이지 않는 구조들도 고려해야 한다.

 

이처럼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과 뭔가 변화를 도모하려는 의지, 맥락을 읽는 눈이 없다면 사례를 봐도 아니 봄만 못하다. 이를 전제하고서 사례를 보자.

 

한국에서 협동사회경제를 이룩한 지역이 어디 있을까? 협동조합 메카로 유명한 강원도 원주? 마을만들기로 유명한 전라남도 진안군? 커뮤니티 비즈니스로 유명한 전라북도 완주군? 풀무학교로 유명한 충청남도 홍성군? 성미산마을로 유명한 서울시 마포구 성산1동?

 

협동사회경제를 이룩한 외국 지역은 또 어디일까? 스페인의 몬드라곤? 이탈리아의 볼로냐? 캐나다의 퀘벡? 영국의 토드네스? 유럽의 또 어느 지역?

 

 

2. 원주의 이야기

 

원주협동사회경제네트워크는 협동조합과 사회적 기업, 공동체운동기관 등 19개 단체가 모인 네트워크 조직이다. 2003년 6월 5일 원주협동조합운동협의회로 시작했고, 2009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바꿨다. 각 단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수는 460여 명이고, 조합원과 회원 수를 합하면 원주시 전체 인구의 10%인 3만 5천여 명에 이른다. 네트워크의 각 구성단체는 조합원 수와 매출액에 따라 회비를 낸다. 네트워크 내에는 정책위원회, 지역농업위원회, 식생활교육위원회, 협동기금위원회, 편집위원회, 국제교류위원회 등 6개 위원회가 있어 사업을 담당한다.

 

2011년 3월에 네트워크의 구성단체들은 원주 사회적 경제 블록화 사업 심포지엄에서 ‘생명공동체를 위한 사회적 경제 조직 협약문’이라는 것을 작성했다. 이 협약문은 ‘공동 소유, 민주적 운영, 인간적 사회 서비스 실현, 협동을 통한 사회적 목적 구현’을 목적으로 삼는 조직을‘사회적 경제 조직’이라 정의했고, 다섯 가지 내용을 담았다.

 

①사회적 경제 조직 간 협동정신을 바탕으로 상호 발전을 위한 시스템을 안착시키자.

②둘째는 상호 발전을 위한 시스템을 통해 각 조직의 발전을 도모하는 한편, 이를 통해 창출되는 잉여는 사회적 목적 실현에 재투자하자.

③민주주의를 바탕으로 각 조직의 주인인 조합원 및 회원 등의 참여 보장과 이들에 대한 정보 전달에 힘쓰며 사회적 경제 조직 확대를 위해 노력하자.

④우리 모두를 위해 각 조직은 민주성, 투명성, 신뢰성 확보에 힘쓰고 인적·물적 서비스에 대한 자율 구제 등을 실천하자는 것입니다.

⑤경쟁과 이윤 추구로 대변되는 주류 경제 질서에 대항하여 돈보다는 사람이 우선되는, 생명이 살아 숨쉬는 지역공동체를 만들자.

 

원주협동사회경제네트워크는 아래와 같은 비전을 가진다.

①사회적 협동조합: 기아 및 식량 문제 대응, 인간적이고 생산적인 일자리 제공, 상업적 성공으로 머물지 않고 사회 보전자 역할로서의 임무 확대.

②협동조합의 사회적 기여 : 한살림 등 기존 생협의 지역사회 기여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운동 모색

③사회경제 운동을 통한 지역 공동체 건설: 이윤보다 회원과 공동체를 위한 운영, 국가로부터의 자율성, 민주적 경영(1인 1표), 자본에 대한 개인과 노동의 우위, 참여의 원칙과 개인 및 집단의 권력화(empowerment)

풀뿌리 민주주의 확립

 

협동사회경제네트워크는 ‘사회적 경제 영역 발전을 위한 방안’을 다음과 같이 마련한다.

①협동조합 정신 등 사회경제 영역의 가치와 지향점 대중적 공유: 원칙을 바탕으로 한 사회경제 영역의 운영 및 협동조합 정신의 대중적 공유와 미래비전 제시→ 제도화되지 않은 자기 원칙의 설립과 준수
선순환 구조와 사회적 경제 블록 구축을 위한 상호부조 시스템 확립: 사회적 경제 블록의 선순환 구조의 시스템화

③영역확대를 위한 노력: 네트워크 내 회원단체 확대와 영역별 구축

사회적 경제 지표를 통한 네트워크의 가능성과 규모 파악(인적 능력과 인간적 연대포함): 사회적 경제 지표를 통한 역량 파악 및 홍보, 제도개선에 활용

⑤역사와 브랜드 홍보를 위한 체계 확립: 역사와 현재 역량을 바탕으로 한 브랜드 가치 창출 및 홍보, 축제 및 세미나, 포럼 개최

⑥사회적 경제 가치를 통한 발전계획 및 지역의 미래상 정립: 협동의 도시 트렌토 등의 방식으로 지역의 미래상 정립

⑦정부 - 자치단체 간 교류협력 및 투쟁(제도 및 지원): 생협법 개정 및 조례 제정(사회적 경제 지원 및 육성에 관한 조례), 기금조성 등

⑧국제·국내적 연대와 연구: 지속적인 교류활동을 통한 가치 및 제도, 시스템의 학습

⑨주민 삶을 책임지는 새 영역 구축: 새로운 협동조합과 사회적 기업 창립 지원

협동조합 등 사회적 경제 영역 확장을 위한 기금 조성 및 운영: 협동기금 설치 및 운영

매체의 안정적 발행과 내용의 대중화

사회경제 일꾼 재생산을 위한 비전의 공유와 교육의 장 마련: 미래 비전을 통한 재생산 및 지속적인 만남과 교육의 장 마련

네트워크의 서비스 프로그램 정착 및 안정화, 체계화: 네트워크 강화 및 서비스 프로그램 창조

⑭한국식 전형 창출: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 공동체 운동기관, 협동조합 형 사회적 기업 등

⑮민주주의 확립

⑯지역사회와의 연대와 기여: 시민사회단체, 정당, 노동조합, 주민조직


이런 역사가 하루 아침에 이루어졌을까? 원주협동사회경제네트워크의 전신(前身)인 원주협동조합운동협의회는 10년 전에 만들어졌고, 네트워크는 2009년에 만들어졌다. 원주 협동조합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지학순 주교의 부임은 1965년의 일이다. 밝음신협은 1972년에 설립되었고, 한 살림의 전신인 원주소비자생활협동조합은 1985년에 설립되었다. 이처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고, 그 역사 속에 수많은 인물과 단체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사라졌다. 다양한 사람과 단체가 만나 사건을 일으키고 서로 충돌하고 화합하며 지금의 모습을 만들어왔다.

 

그렇다고 원주시 협동사회경제의 미래를 무조건 낙관할 수는 없다. 협동조합운동은 초기 운동가들의 연로와 후진양성의 미흡, 신자유주의와 제1금융권의 팽창, 정부 개입의 증가, 조합원 활동의 위축, 새로운 협동조합 정책 및 이론 생산의 미흡 등 운동과 경영 양 측면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리고 원주시청이나 원주시의 경제상황, 문화적인 조건들이 협동사회경제에 유리한 조건을 마련하고 있지는 못하다.

 

그렇다면 사천시에는 어떤 역사가 있는가? 협동사회경제와 관련된 인물과 단체들을 꼽는다면 누가, 무엇이 있을까? 협동사회경제를 함께 도모할 수 있는 사람과 단체, 자원은 무엇일까? 네트워크가 공동으로 소유할 수 있는 자산은? 민주적으로 회의하고 공동으로 결정해본 경험은 있는가? 여러 단체들이 공동으로 대처하여 성공했던 경험은 있는가?

 

단체 회원이나 조합원, 구성원들은 협동사회경제를 이해하고 이와 관련된 활동을 하고 있는가? 서로 기꺼이 역할을 나눠가지려는 자세는 되어 있는가? 협동사회경제의 확대/확장을 위해 기꺼이 내 자원을 공유할 의지는 있는가?

 

한국정부나 사천시청은 협동사회경제를 실현하려는 의지를 품고 있는가? 한국의 경제구조나 사천시의 경제현황은 협동사회경제에 유리한 생태계를 조성하고 있는가? 지역에 활용할 만한 기술이나 자원은 있는가?

 

 


3. 해외 사례 이야기


사례라고 해서 꼭 잘되는 사례만 들을 이유는 없다. 때로는 안 되는 이유를 듣는 것이 훨씬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이탈리아 볼로냐대학의 바띨라니(Patrizia Battilani)와 베르겐대학의 쉬뢰터(Harm G. Schröter)는 “탈협동화와 그 문제점들”(Demutualization and its Problems)”(Quaderni DSE Working Paper, 2011년)이라는 주제로 다음과 같은 공동연구를 진행했다. 이 연구는 기본적으로 소유권 구조의 변화, 전통적인 협동조합에서의 이탈, 협동조합의 사회적 가치변화에서 탈협동화의 원인을 찾는다. 바딸라니와 쉬뢰터는 20세기부터 탈협동화가 진행되어 왔고, 1980년대 이후 특히 미국과 영국,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탈협동화 경향이 두드러졌다고 지적한다(그래서 2007년에는 <국제협동조합연맹(ICA)>이 탈협동화를 심층적으로 조사할 연구위원회를 소집하기도 했다). 반면에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는 탈협동화되었던 협동조합들이 다시 협동조합으로 변신하는 재협동화(re-mutualization) 경향도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한다. 바띨라니와 쉬뢰터는 기본적으로 탈협동화가 미국식 경쟁 자본주의와 비슷하고, 세계화의 흐름이 이런 경향을 강화시키고 있다고 본다.

 

이 연구에서 바띨라니와 쉬뢰터는 탈협동화의 원인을 다섯 가지로 지목한다.

 

첫째, 기업이나 정치․사회제도의 영향을 받아 협동조합이 사기업이나 투자자소유기업의 절차와 전략을 따르면서 협동조합의 조직이 점점 비슷해지는 경향(organizational isomorphism)

둘째, 공동소유구조가 너무 경직되어 급변하는 현실을 따라잡기 어렵다며 사유화를 지지하고, 급속도로 강화되는 경쟁에 적응해야 한다는 문화적 요인(cultural reasons)

셋째, 일반경제학 교육을 받고 상호성을 옹호하지 않는 경영진이 취임하고 이들이 조합원을 희생시켜 자기 이득을 취하려 하면서 생겨난 경영진의 착취(expropriation by managers)

넷째, 사회주의 국가들의 붕괴로 협동조합에 대한 반감이나 협동조합을 낡은 모델로 보는 의식이 확산된 정치적인 요인(political reasons)

다섯째, 자본이 제한되고 관리자에 대한 통제체계가 없는 협동조합의 비효율성 또는 성장전망의 부재(inefficiency or lack of growth perspectives)

 

이런 요인을 정리하면서 바띨라니와 쉬뢰터는 지난 20년 동안 ①조합원제도에 바탕을 둔 상호부조라는 전통적인 인센티브가 흐려질 경우(협동조합이 자신의 정체성을 잃을 때), ②정부가 탈협동화를 유도하는 인센티브를 제공할 경우, ③미래의 전망을 발전시킬 방법에 관한 대안적인 견해가 전통적인 견해보다 더 매력적일 경우에 탈협동화가 진행되었다고 지적한다. 특히 바띨라니와 쉬뢰터가 강조하는 건 협동조합이 기업으로 전환되기가 쉽지 않은데 정부가 탈협동화를 가능케 하는 법률들을 제정함으로써 여러 협동조합들(특히 보험과 관련된 협동조합들)이 탈협동화를 부추겼다는 것이다. 탈협동화가 적절한 법적인 틀을 필요로 할 뿐 아니라 때로는 그런 법적인 틀이 탈협동화를 자극한다는 것이다.

 

보통 탈협동화가 성과와 성장을 내세우지만 바띨라니와 쉬뢰터는 탈협동화가 더 나은 효율성과 성과를 보장한다는 명확하고 보편적인 증거를 찾을 수 없다고 판단한다. 아울러 잘라 말하긴 어렵지만 미국과 캐나다의 신세대협동조합과 같은 혼성조합(hybridization)이 탈협동화와 관련되어 있고 탈협동화가 혼성조합의 어두운 면이라고 말한다.

 

바띨라니와 쉬뢰터의 연구를 통해 탈협동화의 경향이 수십년 동안 강화되어 왔고 미국식 경제의 확산과 세계화의 흐름이 이런 경향을 강화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한미FTA를 체결하고 세계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는 한국의 상황은 어떨까? 바띨라니와 쉬뢰터가 지적한 탈협동화의 원인이 한국의 협동사회경제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의 대의원총회나 이사회가 형식적인 의결기구로 변하고 일반기업과 비슷하게 관리자를 중심으로 재편되는 현상, 외부환경의 변화에 대응한다는 명목으로 1인 1표와 민주적 참여의 원칙이 훼손되는 현상, 일반기업의 경영전략이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에 무차별적으로 적용되는 현상 등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까? 그리고 한국에서 보편화된 무한경쟁, 승자독식의 논리가 협동사회경제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있을까?

 

이런 상황에서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을 일자리 창출의 도구로 보는 정부의 시각은 어떤 형태로든 협동사회경제의 성격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가 외부의 우려처럼 사회적 기업과 협동조합을 동원하는 ‘제2의 새마을운동’을 시작할 경우, 협동사회경제의 탈협동화 경향은 훨씬 더 강화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협동사회경제를 준비하는 진영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최근에 등장한 ‘협동조합간의 경쟁’이라는 틀은 이런 현실의 경향에 저항하고 그것을 바로잡기는커녕 탈협동화 경향을 강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예를 들어, 소비자생협의 매장경쟁과 관련해 어느 한 매장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다고 해서 그 지역에 다른 매장이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은 ‘독점’이고 협동조합 사이에도 경쟁이 필요하다는 논리가 등장했다. 조합원을 위하고 전체 협동운동의 몫을 고려한다는 전제가 붙긴 했지만 이것은 경쟁이 시장을 활성화시킨다는 논리를 바탕에 깔고 있다. 그리고 독점의 반대말이 경쟁이라는 것은 하이예크를 비롯한 자유주의 경제학자들(한국에서는 주로 자유기업원)이 강조하는 논리이다. 소비자생협이 이런 논리를 따라야 할까?

 

자유주의 경제학과 다른 관점에 따르면 독점의 반대말은 경쟁이 아니라 공유나 경제민주화, 자급자족이다. 생협매장의 지나친 경쟁을 막고 상생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 경쟁을 방해한다는 논리로 빠지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설령 어쩔 수 없이 경쟁을 고려하더라도 그건 일반기업과의 경쟁에 대처하는 방법이어야지 협동조합 간에는 적합하지 않다. 외려 소비자생협이 일정한 매장운영협정을 만들고 그런 규칙이 사회적 시장을 만들도록 자극해야 하지 않을까?

 

멘자니(Tito Menzani)와 자마니(Vera Zamagni)는 “이탈리아 경제의 협동조합 네트워크(Cooperative Networks in the Italian Economy)”(《Enterprise&Society》, 2010년)에서 이탈리아 협동조합운동의 성공이 네트워크에서 비롯되었다고 강조한다. 보통 네트워크라고 하면 하나의 중심을 가진 중앙화된 네트워크나 이리저리 분산된 탈중심화된 네트워크를 생각하지만 이탈리아의 협동조합들은 수평적인 네트워크(horizontal network)를 구성했기에 강한 힘을 키울 수 있었다는 거다. 이 네트워크에서 한 단위는 단순한 구성원일 수 있지만 때때로 다른 단위와 선으로 연결되거나 전체 네트워크를 코디네이터하는 역할을 맡으면서 다른 단위들이 자신에 의지하게 되면 전체 네트워크의 주요한 단위가 될 수 있다. 이 수평적인 네트워크가 시장경쟁력을 증가시키고 생산을 합리화시키며 공동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위험과 기회를 공유했다는 게 멘자니와 자마니의 평가이다.

 

그런 점에서 국내의 협동사회경제 네트워크가 멘자니와 자마니가 말한 수평적인 네트워크를 지향하고 그렇게 형성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더 중요하게 지역의 다양한 사회적 기업과 협동조합, 단체들은 그런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주요한 단위가 되고자 하는가? 아직 그런 경험이 없다 하더라도 그것이 불가능하다가 아니라 그런 경험을 지금부터라도 조금씩 축적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래야 협동사회경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고 기업문화가 바뀔 수 있다. 그래야 끊임없이 자본주의 사회의 영향을 받는 조합원/회원/자원활동가들이 현실의 경쟁논리에서 벗어나 협동의 논리로 현실을 바라보고 삶을 기획할 수 있다. 만일 그런 문화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경쟁의 논리가 부메랑처럼 돌아와 협동사회경제를 탈협동화시킬 수도 있다.

 

《협동조합운동, 21세기의 대안》(들녘, 2003년)의 저자로 국내에 알려진 존스턴 버챌(Johnston Birchall)은 “소비자협동조합의 합병시도에서 배우는 이론적, 실천적 함의(Some theoretical and practical implications of the attempted takeover of a consumer co-operative society)”(《Annals of Public and Cooperative Economics》, 2000년)라는 글에서 협동조합이 외부의 자극과 영향에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버챌은 1997년에 앤드류 리건(Andrew Regan)이라는 민간업자가 유럽에서 가장 큰 협동조합이던 영국의 도매협동조합(Co-operative Wholesale Society, CWS)을 합병하려 했던 과정을 분석하면서 협동조합이 미디어의 영향이나 내부매수 등에 취약하다고 지적한다. 아울러 이런 문제가 2차 대전 이후 진행된 사업(business enterprise)과 결사(membership association)의 분리에서 불거졌다는 점도 지적한다. 버챌은 협동조합이 사업 면에서 다른 경쟁자들보다 잠재적으로 이로운 건 조합원들 때문이라는 점을 경영진이나 관리자들이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점을 자각하고 잘 활용한다면 소비자생협이 시장에서 제한되지만 잠재적으로 아주 유용한 위치(limited but potentially quite fruitful place in the market)를 점할 것이라는 거다.

 

비슷한 맥락에서 미국 세인드 메리 대학 경제학과의 노브코비츠(Sonja Novkovic)는 협동조합/신용조합과정(MMCCU, the Master of management : Co-operatives and Credit Union)을 소개하는 자료에서 협동조합이 ‘협동조합의 차이(Co-operative difference)’를 사회적으로 인식시켜야 성공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협동조합은 조합원이나 시민들이 이 차이를 이해하고 믿도록 하고 이 가치를 만들고 관리해야 한다는 거다. 노브코비츠는 협동조합의 사업은 이런 차이를 마케팅하는 것이고 마케팅이 곧 교육이고 교육이 마케팅이라는 점, 시설이 교육이고 브랜드를 만드는 것이 교육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협동조합에서 일하는 노동자(활동가)가 생산품에 대한 이야기, 우리 사람과 큰 뜻에 관한 이야기, 구체적인 활동에 관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소비자생협이 활동하는 장소는 자본주의 사회이다. 버챌과 노브코비츠는 협동조합이 적대적인 시장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시장의 논리를 내면화하는 것이 아니라 협동조합의 논리를 내부에서 더 많이 교육하고 그 가치를 사회적으로 확산시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결국은 조합원들이 협동조합을 성장시키는 것이고 조합원들이 스스로 움직이도록 만드는 것이 협동조합의 전략이다. 마찬가지이다. 협동사회경제를 강화시키는 힘은 막대한 자원의 투입이 아니라 사회적인 관계를 강화시키고 신뢰와 협동을, 궁극적으로는 민주주의를 확대시켜야 한다. 정치적인 시민권과 사회경제적인 시민권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플레차(Ramon Flecha)와 크루즈(Ignacio Santa Cruz)는 “경제적인 성공을 위한 협력: 몬드라곤 사례(Cooperation for Economic Success: The Mondragon Case)”(《Analyse & Kritik》 2011년)에서 협동조합의 민주주의가 경쟁력을 만들고 협동조합간의 연대나 이익의 공유, 매우 평등한 봉급체계, 안정적인 고용구조 등이 협동조합의 차이를 만들고 확산시킨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노동인민금고나 인도주의적인 경영만이 아니라 공개적인 지적 토론과 풀뿌리민주주의가 있었기에 몬드라곤의 성공이 가능했다고 지적한다.

 

국내에서도 많이 거론되는 <로치데일공정선구자조합>은 노동자들의 최저임금이나 8시간노동제, 연금같은 기본적인 노동조건을 보장했을 뿐 아니라 노동자들이 새로운 사회를 보는 눈과 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지원했다. <선구자조합>이 매장에 읽을거리를 비치하고 대규모의 도서관을 만들었던 것은 당시 노동계급에게 절실했던 정치의식과 계급의식을 고양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에드워드 톰슨의 《영국노동계급의 형성》을 보면, 당시 영국의 노동자들이 다양한 공간에서의 토론과 학습을 통해 계급의식을 형성해간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그것이 <선구자조합>의 성공을 보장했다고 나는 본다.

 

따라서 ‘협동과 연대의 의식’을 만들고 확산시키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1978년에 부산에서 만들어진 <양서협동조합>이 단순히 좋은 책을 거래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1978년에 협동서점을 만들고, 1979년에는 협동출판사, 1985년에는 협동도서관, 1990년에는 협동연구소, 2000년에는 협동대학을 설립한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던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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