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것질의 추억
음식으로 맺는 인간관계 점점 단절… 함께사는 행복세상만들기 고민할때
2009년 03월 20일 (금) 하승우webmaster@kyeongin.com
   
 
   
 
찬바람이 부는 초봄, 지하철역을 나서다 김을 모락모락 피우는 오뎅이나 떡볶이를 보면 잠시 망설이게 된다. 잘 구워진 풀빵이나 호떡을 봐도 꿀꺽 침을 삼키게 되는 걸 보면, 어릴 적이나 지금이나 군것질의 잔재미는 강력한 유혹이다.

그런데 그 강한 유혹을 견디며 망실이게 되는 건 저 오뎅이나 호떡의 재료가 무엇일까라는 궁금증 때문이다. 중국산 재료나 미국산 쇠고기가 식탁을 차지해버린 시절에 거리에서 파는 군것질 재료들이 국산이기를 기대하는 건 지나친 욕심일 것이다. 사람이 먹어서는 안 되는 물질들이 중국산이나 수입 재료들에 섞여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출처를 모르는 음식을 꺼리며 불안함에 빠져든다. 그러다보니 정겹고 유혹적인 군것질거리들은 점점 추억으로 밀려나고 있다.

그렇게 밀려나는 게 단지 추억만일까? 예전에는 먹거리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이어주는 중요한 소재였다. 새로운 곳에 이사를 가면 이사떡을 돌리고, 맛난 음식을 장만하면 동네 사람들과 나눠 먹는 풍습은 먹거리에 담긴 관계성을 잘 알려준다. 그리고 음식을 먹기 전에 한 점 떼어 고수레 외치며 버리는 행위는 사람만이 아니라 자연의 뭇 생명들과도 먹거리를 나누고 관계를 맺는 방식이었다.

어떤 생명도 먹어야 살 수 있다는 보편성은 음식이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고 이미 맺어진 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역할을 맡게 했다. 어릴 적 군것질을 즐긴 것도 단지 그것이 먹을 것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군것질을 하며 사람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오뎅이나 떡볶이를 사가면 뜻밖의 먹을 것에 즐거워할 친구나 가족 등이 떠오르곤 한다. 이렇게 보면 나눠 먹을 음식이 사라진다는 것은 불안을 넘어 고립과 고독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경제논리나 통계수치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은 이런 고립과 고독을 합리적인 것으로 여길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미 세상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그런 관계가 거짓일 뿐이라며 자기 살길이나 잘 닦으라고 충고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지만 우리는 언제나 외롭다. 주말이면 모든 텔레비전 채널이 가족적인 느낌으로 가득 채워지는 건 우리가 외롭기 때문이다. 전혀 다른 사람들이 '가족처럼' 행동하는 걸 보며, 서로가 서로를 돌봐주는 패밀리의 이야기를 보며 우리는 자신의 고독함을 달랜다. 그리고 집에 앉아 자신과 비슷한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로 웹서핑을 하며 우리는 고립감을 달랜다.

그러나 그런 일시적인 달램이 일상적인 관계를 대체할 수는 없다. 현실의 고립을 그런 가상의 관계로 달래고 있는 우리 모습이야말로 참으로 어리석다. 대문 밖만 나서면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된 현실, 타인에 대한 사소한 친절이나 관심이 범죄의 소재로 변해버린 현실에서 우리는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옆자리에 앉은 누군가가 친절하게 먹을 것을 나눠도 그것을 선뜻 받지 못할 뿐 아니라 그 사람의 선의(善意)조차 의심하는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기 때문이다. 홀로 살아갈 능력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그런 사회가 천국이겠으나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야 하는 다수의 사람들에게 그런 사회는 지옥이다.

이런 사회에 살면서도 과연 우리가 삶의 안정과 행복을 논할 수 있을까? 더구나 이런 고독과 고립이 파괴하는 것은 우리의 행복만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미래를 다룰 정치마저 파괴한다. 서로 반가이 만나며 전체 공동체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토론하는 과정인 정치는 이런 현실에 뿌리를 내릴 수 없다. 마치 쇼핑하듯 자신의 고립된 욕망을 채워줄 정치인에게 투표할수록 관계가 만드는 공유의 영역이 파괴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아마도 우리 아이들은 이제 군것질과 같은 사소한 삶의 재미들을 더 이상 즐길 수 없게 될 것이다. 스스로의 선택이 아니라 우리가 만든 이 고독한 세계 때문에.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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