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생활방식이자 삶의 과정이다. 독재자가 지배하는 국가에서도 사람들이 민주주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수는 있지만 민주적으로 살지는 못한다. 민중의 지배를 뜻하는 민주주의는 스스로 정치과정에 참여하려는 시민이 있을 때에만 빛을 발한다. 따라서 민주시민이 없으면 민주주의도 없다.


최근 한국사회의 중요한 화두도 민주주의이다. 선거로 대통령, 국회의원, 시장을 뽑는 한국에서 새삼 민주주의가 화두로 되는 건 민주시민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사회가 민주시민의 등장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청소년들이 우정과 사랑을 나누며 자연스레 민주시민으로 성장해야 민주주의가 지속될 수 있는데, 경쟁에서 이긴 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는 승자독식의 사회에서는 그런 성장이 어렵다. OECD 가입국가들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일하지만 가장 불행하고 자살률이 높은 국가에서는 정치에 대한 관심보다 무관심과 냉소가 생기기 쉽다. 대다수의 국민이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고 4대강 사업을 찬성하지 않아도 일방적으로 정책을 결정하는 국가에서는 민중의 지배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민주화 이후에도 민주주의를 외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불안의 시대를 건너는 청춘들에게’라는 부제를 단 손석춘의 책 『민주주의 색깔을 묻는다』(우리교육, 2010)도 그런 목소리 중 하나이다. 지은이는 이렇게 묻는다. “대다수 한국인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모른 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유권자가 된 어느 날부터 투표를 하며, 그것이 민주주의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평생을 누군가에게 꼭 뒤눌려 살아가며 삶을 마감합니다. 씁쓸하게 인생에 마침표를 찍는 그 순간, 그에게 민주주의는 무엇일까요.”


청년들이 스펙을 쌓느라 정신을 놓아버린 시대에 지은이는 진정한 자기계발이란 주권자로 사는 것이고 그렇게 살아야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책을 통해 지은이는 “자기계발의 ‘제1과 제1장’이 왜 ‘민주주의 학습’인지, 민주주의의 빛깔을 묻는 게 왜 우리 개개인의 자아실현과 직결되는지를 밝”히려 한다.


그동안 민주주의를 얘기하는 책들이 많이 나왔기에 지은이는 “민주주의를 자유와 평등, 또는 법치라는 고답적이고 식상한 틀로 분석하지 않”고 “민주주의에 대한 난해한 이론을 다루지도 않”겠다고 얘기한다. 그런 원론적인 얘기보다는 “민주주의란 우리 개개인의 인생과 직결된 ‘삶의 문제’라는 데서 출발”하고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일상이나 사건을 중심으로 생생한 보기를 들어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를 풀어”가겠다고 얘기한다.


그래서인지 지은이는 먹고 사는 경제적인 면에서도 민주주의가 중요한 이유, 대화나 타협보다 싸움과 갈등이 필요한 이유 등을 얘기한다. 그리고 지은이는 정치의식이나 주권의식이 저절로 생기지 않기에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많은 사건들과 현상에 관해 공부하며 자기계발을 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결론적으로 지은이는 7가지 습관을 익히자고 제안한다.


“1. 민주주의가 자신의 인생이라는 진실에 눈떠라.

2. 사람의 존엄성을 부정하는 사람이나 세력과는 싸워라.

3. 신문-방송의 틀을 벗어나 대화하고 토론하라.

4. 직업 정치인이 정치를 독점하도록 방관하지 말라.

5. 생계 차원을 넘어 창조적 경제생활을 하라.

6. 단 한 번인 자신의 인생을 주권자로 살아가라.

7. 다른 사람의 삶을 존중하며 사랑하고 연대하라.”

손석춘의 말처럼 몸에 익은 습관이 될 때에 민주주의는 꽃을 피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좋은 얘기이긴 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아쉬움도 많이 느끼게 된다. 다른 무엇보다도 독자에 대한 고려가 아쉽다. 정말 불안한 청춘들에게 이야기를 건네고 싶었다면 그들이 실제로 겪고 있는 문제들을 소재로 삼아야 할 텐데 그런 소재들을 보기 어렵다. 스파르타쿠스의 반란과 프랑스혁명, 동학농민혁명, 4월혁명, 80년 5월의 광주항쟁, 촛불항쟁 등 민주주의와 연관되는 주옥같은 사건들이 다뤄지는 건 좋다. 하지만 그 사건과 지금 현실을 연결하지 못한다면 그런 사건들은 청춘들에겐 ‘그냥 역사’일 뿐이다.


손석춘은 “민주주의를 굳이 자기계발의 맥락에서 제안하는 이유는 우리가 민주주의를 ‘다 아는 이야기’로 여기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밋밋하게” 느낀다고 얘기한다. 그런데 민주주의가 정말 다 아는 이야기일까? 현실을 사는 청년들은 밋밋해서가 아니라 자기 것이 아니기에 민주주의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예를 들자면 김순천의 『대한민국 10대를 인터뷰하다』(동녁, 2009)에서 학교를 떠난 한 소녀는 커서 뭐가 되려고 이러냐는 아저씨에게 이렇게 되묻고 싶단다. “아저씨는 커서 된 게 그거예요?” 왜 이렇게 물을까? “할 말 없잖아요. 그쪽은 다 큰 거고, 우리는 크는 중이니까. 우리는 아직 꿈도 있고 나이도 어리잖아요. 아무리 눈에 안 좋게 보여도, 저희도 사람이니까 의견을 존중해줬으면 해요.”


그러니 진짜 문제는 청년들의 밋밋함이 아니라 민주적으로 생각하는 청소년들을 학교 밖, 사회 밖으로 내몰고 냉대하는 기성세대의 관점이다. 청소년들이 민주적으로 살지 못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민주주의가 지극히 성인 중심, 기성사회 중심이기 때문에 미래의 민주주의는 불안하다.


2010년 3월 10일, 대학교를 거부한다고 선언한 김예슬의 『김예슬선언』(느린걸음, 2010)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나는 대학과 기업과 국가, 그리고 대학에서 답을 찾으라는 그들의 큰 탓을 묻는다. 깊은 분노로. 그러나 동시에 그들의 유지자가 되었던 내 작은 탓을 묻는다. 깊은 슬픔으로. ‘공부만 잘하면’ 모든 것을 용서받고 경쟁에서 이기는 능력만을 키우며 나를 값비싼 상품으로 가공해온 내가, 이 체제를 떠받치고 있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자기 자신이 비민주적인 체제를 떠받쳐 왔다고 고백하면서 김예슬은 그 체제에서 벗어나 거부의 삶을 살겠다고 선언했다.


반면에 기성세대는 이 선언에 묵묵부답이다. 그러니 자신이 체제를 떠받치고 있음을 고백하지 않는 기성세대야말로 민주주의를 가로막는 걸림돌이다. 김예슬의 얘기를 들어보라. “대학거부 선언 이후 많은 중고생, 대학생들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지금 대학 1학년생들은 고교시절 촛불집회를 경험한 친구들이다. 그 친구들이 공통으로 호소했던 말이 있다. “명박산성보다 더 무서운 게 뭔지 아세요? ‘부모산성 뛰어넘기’에요.”


김예슬이 특별한 사람일 수 있지만 많은 대학생들의 자기고백이나 공감이 뒤를 잇는 걸 보면 이미 청춘들은 자기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과거의 역사보다는 지금 그들이 민주주의를 경험하고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이 필요하다.


민주주의는 ‘꼰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혁명가’를 원한다. 새로운 혁명가들이 계속 탄생하려면 그들에게 책을 안겨줄 게 아니라 혁명에 쓸 무기를 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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