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한국의 대학이 처한 상황은 위기가 아니다. ‘이미’ 대학은 파국으로 치달았기 때문이다. 올해 3월의 김예슬 선언은 대학을 “이름만 남은 자격증 장사 브로커”, “글로벌 자본과 대기업에 가장 효율적으로 ‘부품’을 공급하는 하청업체”로 묘사했다. 누가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을까? 심지어 대학이 손수 땅장사를 하거나 용역노동자들을 착취하기도 하니 막장이라고 불러도 지나치지 않다. 그 실상은 이미 드러났고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파국을 극복할 방법을 찾는 것이다.


대학과 윤리


얼마 전 경희대의 한 여학생이 화장실을 청소하는 아주머니에게 막말을 한 사건이 인터넷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다. 마치 심각한 문제가 터진 것처럼 난리이지만 이미 윤리가 사라진 대학에서 무슨 패륜을 논하는가? 불법비자금 조성으로 형을 선고받은 대학이사장이 ‘대학개혁’을 내세우며 구조조정을 추진하는 현실에서 어떤 윤리를 얘기할 수 있을까? 용역노동자들에게 최저임금이나 휴식공간조차 제공하지 않고 이에 항의하면 해고하는 대학에서 어떤 윤리를 얘기할 수 있을까?


지금의 대학이 비윤리적이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사건들을 디딤돌로 삼아 대학이 자신의 윤리를 정의하고 실천할 것을 요구해야 옳다. 진리의 상아탑이라는 위선의 막을 걷고 자신이 어디로 가고자 하는지, 그것이 윤리의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 윤리라는 언어의 모순을 드러내고 진정한 윤리를 실천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


만일 대학이 이런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거나 자신의 윤리를 증명하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김예슬은 대학생이 대학을 거부할 수도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이미 증명했다. 그리고 《녹색평론》 2010년 5․6월호에는 미국에서 대학수학능력시험(SAT)을 거부하자고 외치는 존 테일러 개토(J. Y. Gatto)의 ‘바틀비 프로젝트’라는 흥미로운 글이 실렸다. 이 글에서 개토는 “시위도 필요 없고, 돌을 던질 필요도, 반대를 위한 정치활동을 할 필요도 없다”고 얘기하며 답안지에 “나는 이 시험을 보지 않겠습니다”라고 쓰자고 주장한다. 만일 시험을 거부한 학생들이 불이익을 받으면 어떻게 하냐는 물음에 개토는 이렇게 답한다. “대학은 다른 무엇이기 이전에 하나의 사업이다. 고객을 필요로 하는 사업체인 것이다.” 그러니 고객이 애써 대안을 고민할 필요는 없다. 거부의사를 밝히면 기업이 대안을 고민해야 한다. 그것이 자본주의의 윤리이다.


지금은 대학이 이런 거부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등록금이 계속 오르면 굳이 국내대학을 다닐 필요가 있을까? 그리고 교육개방으로 곧 외국대학들(막강한 경쟁업체들!)이 국내에 캠퍼스를 만들기 시작하면 누가 국내대학을 다니려 할까? 지금은 중앙일보라는 일개 신문사가 만든 ‘대학평가’에 목숨을 걸고 있지만 그런 방식이 계속 통할까? 따라서 거부가 계속 이어진다면 대학은 대안을 고민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대학 밖의 다양한 학문공동체들이 늘어난다면 대학은 긴장할 수밖에 없다. 세미나팀, 생활공동체, 학회 등 다양한 공동체들이 활동하며 대학의 변화를 자극할 수 있다. 이런 대학 밖의 공동체들에 관심을 기울이며 학생들에게는 대학에 끊임없이 새로운 학문을 요구해야 한다. 학생들이 공부를 하겠다는데 대학이 이를 말릴 수 있을까?


기죽지 말고 나의 요구, 우리의 요구를 ‘당당하게’ 대학에 요구해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대학생 선언, 대학원생 선언이 빛을 볼 수 있는 때이다. 더 많은 선언이 새로운 윤리를 만들 수 있다.


대학과 협동


선언이 특정한 사람들만의 언어가 아니듯 대학은 대학생들만의 공간이 아니다. 대학기구에서 일하는 노동자, 프랜차이즈 업체과 용역업체, 위탁급식업체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대학교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다. 대학강의의 절반을 도맡는 시간강사도 노동자이고, 자신을 특권층이라 믿는 교수들도 사실은 고용된 노동자일 뿐이다. ‘미래의 노동자’인 대학생들은 이들과 대화를 나누며 자신의 미래를 설계해야 한다.


과거의 학생운동은 학교 밖으로 나가 공장에서 ‘노학연대’를 외쳤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다. 지금의 대학이야말로 노학연대가 필요한 최전선이다. 이미 그런 흐름이 드러나고 있다. 고려대와 연세대, 이화여대, 동덕여대, 성신여대 등 여러 대학에서 학생들이 청소용역노동자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며 얘기를 나누는 모임들이 생겨나고 있다. 이런 연대의 범위가 더욱더 넓어져 강사와 교수들까지 끌어들일 수 있다면, 대학을 바꿀 든든한 힘이 될 수 있다.


연대가 꼭 과거의 이념적인 방식을 따라갈 필요는 없다. 그런 점에서 대학생협의 구성과 발전과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88년에 처음 만들어지고 현재 전국 22곳의 대학에서 활동하는 대학생협(
http://www.univcoop.or.kr/)은 좋은 본보기이다. 대학구성원들이 공동출자해서 만든 대학생협은 매점, 서점, 식당 등으로 조합원들의 생활상의 필요를 충족시키며 관계망을 확장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협동은 이념이 아니라 생활로 자신의 필요성을 증명할 수 있다.


지금의 대학에 가장 절실한 부분도 바로 협동이다. 서로가 자신의 몫을 내놓고 서로 필요한 부분을 채워주며 함께 할 일을 찾으면 된다. 학생들은 강좌만이 아니라 생활에서 여러 노동자들에게 도움을 받고 다양한 자원활동에 열정을 쏟는다. 교수와 강사들은 학교가 ‘정한’ 강좌 외에 자신있는 강좌를 열어 학생만이 아니라 지역주민들도 초대한다. 노동자들 역시 자기 업무와 연관된 생활의 지혜를 가르치고 대학의 현안을 얘기하며 다양한 관계를 맺는다. 캠퍼스 근처의 상인들이나 지역주민들도 참여한다면 협동의 관계망이 더욱더 넓어질 수 있다. 누가 ‘멍석’만 깔아주면 이런 논의들이 이어질 수 있고, 이런 흐름이 이어진다면 대학당국 없이도 대학을 운영할 수 있다.


당연히 이런 흐름이 순조롭게만 진행되지는 않을 것이다. 족벌과 기업이 지배하는 대학은 이런 자율적인 흐름을 가로막으려 온갖 노력을 다할 것이고, 승자독식의 사회질서는 관계를 끊고 경쟁을 강요할 것이다. 하지만 생활로 엮인 공동체는,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공동체는 외부의 힘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대학이 우리를 버린다면, 우리도 대학을 버리자. 비우면 채울 것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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