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삐이잉 소리를 내는 모뎀을 통해 나는 ‘천리안’이라는 마법의 세계와 접속했다. 그 첫 경험은 정말 짜릿했다. 지금의 인터넷 문화와 비교하면 원시시대처럼 느껴지겠지만 그 당시로서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지금이라면 몇 분안에 다운받을 영화를 열 몇 시간 동안 통화중 상태를 유지하며 밤을 꼴딱 새서 다운받던 기억, 인터넷 동호회라는 낯선 공간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던 기억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 때, 내가 가장 열중했던 일은 무림동호회라는 곳에서 무협지를 열심히 다운받아 읽는 것이었다. 몇 달 동안 남들이 아래한글로 쳐서 올리는 무협지를 공짜로 읽으며 그 세계의 매력에 푹 빠졌고, 댓글의 성원에 힘입어 코피를 쏟으며 무협지를 올리는 사람들의 열정에 감탄했다. 저런 열정은 어디서 나왔을까.


한때는 인터넷 상의 토론에 열심히 참여하기도 했다. 누군가의 글이나 이미지에 곧바로 참견해서 답글을 달 수 있다는 게 새로웠다. 그러나 인터넷 논쟁에 끼어들면서 회의적인 생각도 들었다. 벽을 보고 얘기하는 듯한 느낌, 욕하고 까는 건 화끈하게 할 수 있지만 왠지 돌아서면 허전하고 공허한 느낌이 들었다. 스윽 지나가다 발끈하며 개입하는 건 쉽지만 다른 사람의 속내를 파악하기가 매우 어려운 공간이 인터넷이었다.


그 뒤 인터넷은 내게 ‘할 수 있다’와 ‘할 수 없다’ 사이를 오가는 애매한 공간이 되었다. 인터넷에 이런저런 글을 쓰며 사람들과 소통하지만, 지금도 인터넷은 거북하고 부담스러운 공간이다. 댓글에 때로는 즐거워하고 때론 분노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내가 왜 그랬을까라는 허탈함이 밀려들었다. 그리고 축복받은 체력이나 끈기를 지니지 못했기에 키보드워리어의 삶을 살기도 힘들었다.


요즘도 인터넷을 쓰지만 필요할 때만 사용하고 가급적이면 사용시간을 줄이려 노력한다. 인터넷에 쏟을 시간보다 첫 돌이 다가오는 아이에게 쏟을 시간이 더 절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글을 청탁받을 때 좀 망설였다. 내가 잘 모르는 세상의 이야기인데... 그리고 두 사람의 이름을 몇 번 들은바 있는데, 논객은 왠지 두렵다. 청탁을 받고 두 사람의 블로그를 보고 나니 두려움이 더 커졌다. 자신들의 이름이 거론되는 곳이면 거의 대부분 댓글을 달고 트랙백을 거는 사람들인데, 나라고 예외일 수는 없지 않을까? 인터넷 논쟁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괜한 짓을 하는 건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두 사람의 논쟁글을 읽어보니 몇 마디 보태고 싶은 생각이 들어 청탁을 받아들였다. 부디 인터넷에서 까이더라도 내가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며 떨리는 손가락으로 키보드 앞에 앉는다.



두 논객의 진검승부?


한윤형과 박가분은 언론과 사회의 관심을 받는 ‘이미’ 유명한 20대이다. 많은 사람들이 두 사람의 블로그를 방문하고 있고 두 사람의 이름으로 검색을 해보면 지지자(?)들도 꽤 많다. 이런 두 사람이 논쟁을 벌였으니 인터넷 세상이 들썩거릴 만하다. 실제로 이 논쟁을 품평하는 글들도 제법 있다.


논쟁을 접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두 사람의 논쟁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박가분이 자신의 블로그와 공동생활전선 블로그(공동생활은 참 좋은데, 꼭 전선이라는 말을 붙여야 했을까)에 최장집과 의회민주주의자들을 비판하는 자칭 ‘최장집 3부작’을 올렸고, 한윤형이 이 글을 비판하면서 논쟁이 시작되었다. 박가분이 한윤형의 글을 반박하고, 다시 한윤형이 반박하고, 박가분이 또 반박하고, 한윤형이 또 반박하면서 이 논쟁은 ‘대충’ 마무리되었다. ‘대충’이라고 한 건 서로가 더 이상 이 논쟁에 관해 글을 쓰지 않겠다고 밝히며 다소 어정쩡하게 끝이 났기 때문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면, 박가분은 ‘최장집 3부작’을 통해 부르주아 의회민주주의에 집착하는 최장집주의자들의 논의를 “정당에 대한 이론적 물신주의”라 규정하고 이것이 정치적 냉소주의와 구별되지 않는다고 평가한다. 문제는 부르주아 의회민주주의에 있지 않다며 사회의 주요 모순(적대적 모순)과 비적대적 모순을 구분하고 맑스주의 관점을 회복하자고 주장한다(아마도 이 글은 최장집 교수가 맑스주의를 비현실적이라 비판한 것에서 시작되지 않았나 싶다).


박가분은 “대중 자신들이 스스로 억압해 왔던 급진적 요구들을 ‘봉기’의 형태로 표출하는 것을 통해서만 근본적으로 전환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지지한다. 무기력한 냉소주의, “정책적 대안의 진정성과 호소력이 부족해서 그동안 실패”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 진보진영은 ‘적대적인 모순’을 폭발시키는 도화선이 되어야 한다. 무능력한 좌파라는 딱지를 떼려면 “민주적 절차의 보장에 대한 공허한 약속이 아니라, 사회적 불안에 직면한 민중의 급진적 요구들을 그들 자신들로부터 동원해내는 것이고, 그것에 대한 즉각적이고 양보 없는 실현을 ‘약속’하는 것”, “민주적 절차와 제도 전반을 ‘민중의’ 관점에서 ‘재정의’하겠다는 가장 급진적인 제안”을 해야 한다.


한마디로 화끈한 글이다. 사실 박가분의 글을 읽으며 어디서 이런 친구가 등장했을까 궁금했다. 맑스, 레닌의 원전을 아직도 신봉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긴 하지만 20대들 사이에서 그런 얘기가 불쑥 튀어나올지는 몰랐다. 물론 박가분이 그토록 자신있게 맑스와 레닌을 지지할 수 있는 건 가라타니 고진과 슬라보예 지젝이라는 든든한 후원자가 있어서일 수 있다. 어쨌거나 박가분의 글은 최장집주의를 비판하고 봉기와 비타협적인 투쟁을 지지한다.


한윤형은 이 글에 관해 논평하며 최장집에 대한 평가만이 아니라 “한국의 진보정당운동이라는 ‘컨텍스트’”에서 평가해 보자며 비판의 문을 연다. 한윤형은 박가분이 최장집의 논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비판하고 최장집 논의의 현실적인 가치와 논리적 일관성을 지적한다. 그리고 맑스주의 방법론을 무시하진 않지만 그 현실성을 평가하며 “정당론과 운동론의 무성의한 대립”을 넘어서자고 주장한다. 한윤형은 “진보신당의 가장 큰 문제는 이 정당을 지지해야 할 계층의 사람들을 조직화할 ‘운동’이 부재하다는 것”이라 지적하며 “진보신당의 현실에 개입하는 실천적 모색”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한윤형의 글을 읽으며 참 조리있고 길게 글을 쓴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의 글에서 빈틈을 찾아내어 적절히 찌르고 들어가는 모습은 인상적이다. 허나 텍스트가 아닌 컨텍스트를 다루거나 자신의 얘기를 담백하게 풀어가는 부분에서는 그 인상적인 날카로움이 좀 떨어지는 듯하다.


아쉬운 점은 이렇게 입장을 드러낸 뒤에 벌어진 논쟁이 논쟁이라고 이름을 붙이기엔 좀 미안한 형태로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한윤형의 비판에 박가분은 다분히 감정적인 자세로 대응한다. 비판에 대한 반박이 울컥 할 수 있다는 점은 감안하더라도 그냥 던져지는 문장들이 너무 많다. 두 번의 반론에서 박가분은 “이론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저 일군의 우아하고 예의바른 사회학도들에 대해 현장에 있는 저 교양없고(?) 맹목적(?) 좌파들이 터뜨리는 분통”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내가 탓하고 싶은 것은 현장에서 싸우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적으로 유복하고 나은 환경에 있는 중간계급의 ‘교양 있는’ 좌파와 진보주의자들이 그러한 전망에 대해 가져왔던 ‘이론적-지적 태만’”이라고 얘기한다. 그냥 들으면 맞는 얘기이지만 ‘그런데 누구?’라는 의문을 감출 수 없다. 이렇게 날카로운 비판일수록 그 대상이 분명해야 할 텐데 그렇지 않다. ‘현장’과 ‘이론’의 대립각은 필요하지만 좀 분명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분명하지 않음은 사회를 설명하는 부분에서도 드러난다. “지난 날 공산권 국가들의 파국적인 몰락과, 시민사회의 새로운 계급구성의 출현은, ‘자본’의 존재가 사회적 의제를 근본적으로 ‘제약’하는 가장 중요한 모순이라는 사실에 아무런 변화를 가져다 주지 않는다.”, “내가 이 글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도 실천 이전에 ‘사태를 밝히는’ 것이었다. 문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의제가 근로대중에 대한 당파성에 기초해 있어야 할 진보(좌파)세력의 의제와 혼동되는 사태에 있었고, 내가 내 글에서 밝히고 싶었던 것도 바로 그러한 문제적인 ‘사태’였다.” “PT독재는 결코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적 전망이 아니라, 정확히 의회독재 속에서 불가능한 민주주의를, 새로운 민주적 합의의 틀을 구현하기 위한 대중동원적 실천들을 의미한다.” “한윤형이 간과하는 것은 ‘계급적대’가 시민권이라는 일견 저 중립적인 제도적 틀 역시 가로지른다는 사실이다.” 이 역시 그냥 끄덕끄덕 하며 읽을 수 있는 부분이지만 여전히 분명하지 않다. 앞서 이론과 현장의 대립처럼 이분법적인 대립을 너무나 당연시하며 받아들이기에 더욱더 애매해지는 부분이다(가끔 대가인양 하는 양반들이 맥락없이 큰 얘기로 툭툭 던졌다가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는 부분이기도 하다). 과연 부르주의 민주주의와 진보, 의회독재와 PT독재같은 이분법이 우리 현실에 그대로 대입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근로대중’이라는 표현은 참 오랜 만인데, 어떻게 이런 단어를 쓰게 되었을까?). 이런 부분이 더 분명해져야 자신이 주장하는 ‘현장’에 더 가까운 글쓰기가 되지 않을까?


한윤형의 반박은 이런 틈을 파고든다. “그의 글은 모든 문장이 꼬리를 물고 빙글빙글 돌고 있으며, 핵심과 주변, 주장과 근거를 구분할 수도 없”다고 지적하며 박가분의 문제제기가 잘못된 현실분석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촛불시위나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평가가 다분히 추상적이고 프롤레타리아독재라는 주장 역시 현실을 설명할 수 있는 대안이 되지 못한다고 평가한다. “운동권이 정신을 차리지 않아 사태가 이렇게 되었다는 식의 서술은 현실을 호도하는 것”이고 프롤레타리아독재는 “뭐라 말하기 애매한” 관념적인 차원에서 논의된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한윤형은 “박가분은 스스로의 글의 정당성을 위해 타인의 내면의 공백을 구성해내는 경향이 강하다”고 꼬집기도 하는데, 사실 이런 점은 두 사람 모두에게서 드러난다. 가령 박가분도 한윤형의 “남의 논지를 꼬는 버릇”을 지적하며 “나는 한윤형에게 저 서툴고 어색하기 짝이 없는 안면의 냉소를 거두길 바란다”고 충고하기도 한다. 음, 서로에게 대략 난감한 충고들이다. 정말 마음가짐을 바꾸길 바래서 충고하는 건지, 아니면 확인사살을 하는 건지.


어쨌거나 이 둘의 길고긴 논쟁을 검색해서 읽으며 생각이 복잡해졌다. 이 영민한 두 사람이 왜 이리 소모적으로 논쟁을 할까? 현실을 논리적으로 분석하는 글도 필요하지만 현실에 대해 감정적으로 분노하는 글도 필요할 텐데, 왜 이리 인색하게 상대방의 글을 평가할까?


어떤 점에서 두 사람의 논쟁은 ‘매우 소모적이었던’ 80년대의 사상투쟁(사투)을 닮았다. 그리고 그 시대의 논쟁을 관람했거나 이에 참여했던 이들이 이 두 사람의 논쟁을 흥미롭게 지켜보거나 부추기는 것도 같다(사실 두 사람의 글에서 왜 ‘냉소주의’가 핵심적인 키워드가 되어야 하는지를 나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겠다). 그러다보니 냉소주의라는 쟁점은 한국정치의 ‘컨텍스트’가 아니라 누가 더 지젝을 잘 이해하고 있는가라는 ‘텍스트’의 문제로 돌아가 버린다.


이런 의문을 품고 이런저런 블로그를 돌아다녔다. 박가분, 한윤형 두 사람의 논쟁을 검색해서 읽다가 그 글들에 트랙백을 건 다른 사람들의 블로그를 방문하게 되었고, 그 블로그를 통해 이택광과 김우재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는 점과 그 논쟁이 자연과학과 인문학/사회과학 논쟁으로 비화되었다는 점도, 그리고 노정태와 홍명교, 조영일과 김영하 등 여러 논쟁이 일어났다는 사실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인터넷 세상과 별로 친하지 않다보니 이렇게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는 사실도 몰랐다. 안타까운 점은 대부분의 논쟁이 상처로 끝나고 그 전투의 기록들이 허무하게 사라졌다는 점이다(어느 한 편의 블로그의 폐쇄나 이전!).


당연히 공론장(公論場)은 중요하다. 특히 한국처럼 자기 얘기를 꺼내기 어려운데 인터넷이 발달한 곳에서는 인터넷이 중요한 공론장이다. 하지만 공론장이 활성화되려면 배경지식이 필요하고 서로간의 이해(理解)도 중요하다. 그런데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논쟁을 보면 이해라는 말이 무색해진다. 바로 앞의 사람에게 무관심한 채 열심히 어느 곳에 있는 누군가와 소통하려 아이폰을 뒤적이는 사람을 바라보며 드는 느낌이랄까. 서로의 얘기를 진지하게 들어주기는 하는 걸까? 우리는 왜 논쟁하는가?



인문학 키드와 인문학 오타쿠



두 사람의 논쟁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책 속으로 들어가 보자. 박가분의 『부르주아를 위한 인문학은 없다』(인간사랑, 2010)를 읽으니 또 감탄이 터졌다. 이름만 들어도 어려운 칸트, 고진, 지젝, 아렌트, 바디우, 랑시에르, 버틀러, 라클라우, 라캉, 들뢰즈, 벤야민 등이 한칼에 정리된다. 낯설고 어려운 사상가의 이론을 자기만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분석하는 능력이 돋보인다. 그 내용을 자신의 언어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만 빼면 무척 탁월한 능력이다.


그런데 자신의 언어로 해명하지 못하다보니 ‘정리’는 되지만 ‘이해’는 잘 되지 않은 듯하다. 번역책에서 바로 튀어나온 듯한 개념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그 뜻을 알기 힘들게 꼬인 문장은 난감하다. 책을 읽고 정리한 인문독서 후기라 하더라도 책으로 나오려면 독자를 고려해 내용을 다듬어야 했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사회를 분석한 글도 독서후기와 다르지 않은 걸 보면 단지 글의 형식의 문제는 아닌 듯하다. 예를 들자면, 인터넷의 정치적 주체성을 다룬 글에서 박가분은 “인터넷상의 대중 이데올로기 안에서만 머문다면 오늘날 ‘적이 누구인지’ 정세를 결정하는 ‘주요 모순’이 무엇인지에 대한 첨예한 사유의 지평이 닫히고 만다. 자신의 정치적 지향을 다원적인 욕구들이 공존하는 세계와 등치시키는 오늘날 경향은 ‘정치’가 ‘정치적인 것’으로 다변화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기는커녕 우리 사회의 주요한 탈정치화의 첩경을 구성한다. 그것은 정치적인 것을 관용․불관용이라는 몰역사적인 풍경으로 환원하는 것의 징후에 불과하다”(435쪽)고 얘기한다. “인터넷 상의 대중 이데올로기”는 무엇이고, “자신의 정치적 지향을 다원적인 욕구들이 공존하는 세계와 등치시키는 오늘날 경향”은, “주요한 탈정치화의 첩경”은, “몰역사적인 풍경”은 무슨 말일까? 책을 읽는 사람들이 이 정도는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는지 박가분은 설명하지 않는다. 어려운 말을 쓰지 말자는 게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줘야 할텐데, 남이 풀다 남겨둔 낱말맞추기를 푸는 느낌이다. 말이 안 들어맞다보니 앞서 맞춰놓은 낱말을 다시 맞춰갈 수밖에 없다.


박가분의 글에서 느낀 또 다른 불편함은 좋아하는 인문학자에 대한 열광과 반대자에 대한 냉소가 너무 분명하다는 점이다. 사랑과 열정을 말릴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한쪽으로 치우치다보니 다른 쪽의 무게를 너무 가볍게 여긴다. 가벼이 여길만한 상대라면 가볍게 다뤄야 하겠지만 상대를 잘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상대를 누르려는 경향도 보인다. 다른 사상가들은 어려워서 잘 모르겠고 그나마 알만한 사상가인 아렌트를 가지고 얘기하자면, 사실 박가분의 아렌트 해석은 지젝의 해석을 모방한 것에 가깝다. 지젝의 해석을 모방했다는 점을 숨기지는 않으니 솔직하지만 지젝의 해석이 가진 문제점 또한 그대로 지니고 있다.


박가분은 한나 아렌트의 이론을 신자유주의와 연관짓는 지젝의 분석에 기대어 비판한다. “정치적 판단이란 ‘진리’와 무관하지 않으며, 그것은 취미판단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사실을 역설해야만 한다! 이런 점에서 아렌트의 견해는 정확히 쁘띠 부르주아들의 환상을 대변한다”(51쪽)고 주장한다. 아렌트가 쁘띠 부르주아(오랜만에 보는 단어다!)의 환상을 대변한다니 무슨 소리일까? 다음 얘기를 들어보자. “스탈린식 전체주의도 나쁘다. 어쨌든 그것은 말 그대로 전체주의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나 아렌트와 같은 자유주의 사상가들과 그녀가 대변하는 참여민주주의적 이상은 ‘더 나쁘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적 조류와 광기어린 전체주의적 폭력에 맞서 공론공간을 방어하겠다는 바로 그 제스처를 통해 그들이야말로 정확히 공론공간 그 자체의 고유한 정치적 성격을 희생시켜 버렸기 때문이다.”(53쪽) 박가분의 비판은 아렌트가 주장한 공론장이 다양성을 빌미로 자신의 정치성을 포기하고 정치행위를 “수동적인 의미체험의 영역으로 격하시키는 효과를 낳는다”(60쪽)고 비판한다. 결국 “이들 참여적 민주주의․자유주의 사상가들의 진짜 요망은 공론공간을 순수한 환상으로 유지하는 것에 불과하며, 오히려 이러한 환상을 진짜로 유지시키는 사람은 자신들이 요구하는 특수한 논리, 정체성, 경제적 판단을 곧바로 전 사회적 보편성과 일치시키려는 ‘유토피아적’ 기획을 추구하는 ‘신자유주의’ 정치세력”이다(55쪽).


박가분이 비판하는 바는 아렌트가 정치적인 적대의 장을 순수한 의견교환의 장으로 전환시키고 정치와 진리를 분리시켜서 신자유주의 세력이 그 장을 장악하도록 문을 활짝 열어줬다는 혐의이다. 그러나 아렌트는 적대가 없는 정치공간이 가능하다고 보지도 않았고 특정한 세력이 그 공간을 점유하는 것을 걱정했다. 오히려 아렌트는 공감적 참여의 중요성을 지적하고 시민불복종을 결사의 자유의 권리로 해석했다.


사실 박가분은 아렌트가 정치와 진리를 구별지으려 했던 바로 그 지점에서 아렌트를 비판한다. 아렌트는 순수한 정치공간이 아니라 인간의 고유함이 보장되는 다원적인 공간을 정치의 장으로 삼으려 했다. 왜냐하면 공적 영역은 특정한 사람들의 독점물이 아니라 타인과 공존해야 하는 인간 공통의 장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프롤레타리아라 하더라도 그 장을 독점할 수는 없다.


사실 현대의 유럽철학자들이 아렌트를 깎아내리려 안간힘을 쓰는 건 그만큼 아렌트의 무게가 무거웠다는 점을 반증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 무게를 제대로 재지도 않은 채 내팽개치는 건 올바르지 않다. 박가분은 라캉을 비판하는 버틀러를 비판하면서 “만약 라캉에 대해 알려져야 할 다른 부분이 있다면 어쩔 것인가? 라캉은 자신의 성차 공식을 통해 이미 상징적 금지의 작인 자체가 성별화된 입장으로 분열된다는 사실을 지적했다.”(104쪽). 이 얘기는 박가분이 비판하는 아렌트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만약 아렌트에 대해 알려져야 할 다른 부분이 있다면 어쩔 것인가? 아렌트는 인류 역사에서 되풀이해서 나타났던 평의회를 새로운 형태의 정부로 환영하면서 노동자평의회만이 아니라 다양한 평의회들이 새로운 주권권력을 구성해야 한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박가분의 책에서 가장 위험한 부분은 목적과 수단을 분리시키는 사고방식이다. 도구적 합리성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불러왔는지는 이미 인류 역사가 증명했다. 그런데도 박가분은 “물론 전쟁은 전 인류를 수단화하는 반인륜적인 범죄이다. 그러나 그러한 폭력성을 통해서만 바로 그것에 대한 국제적 규제가 가능하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전쟁을 겪어나갈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반복될수록 오히려 우리는 희망에 한걸음씩 다가가게 될 것이다.”(42쪽) 이것이 칸트를 올바로 해석한 것인지는 또 다른 문제이고, 이런 칸트라면 도시락 싸들고 다니면서 말리고 싶다. 사실 ‘평화를 위한 전쟁’, ‘정당한 전쟁’은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말이 아닌가. 19세기 러시아 혁명가의 사고방식이 21세기 한국의 청년에게서 부활했다.


그 자신이 비판한 인문학 오타쿠가 되지 않으려면 자신의 언어를 가져야 할 것 같다. 그의 급진적 사유를 뒷받침할 수 있는 익숙한 언어가 개발되어야 그 말의 힘이 강해질 것 같다. 그리고 외국이론을 한국의 현실에 대입하는 과정은 매우 신중해야 하고, 그런 과정 자체가 이미 오류일 수 있다. 인문학 오타쿠가 아니라 인문학 키드가 되려면 숙성의 과정을 거쳐야 할 것 같다.



논객의 탄생과 현실주의자


한윤형의 『키보드워리어 전투일지』(텍스트, 2009)를 읽으며 감탄에 또 감탄을 거듭했다. 인물비평을 매개로 ‘자생적으로’ 대중문화의 세계에서 정치의 세계로 넘어간 고등학생이라, 참으로 놀랍다. 안티조선운동에 공감하긴 했지만 그 논쟁에 큰 관심을 갖지 않았던 내게 한윤형의 글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화려한 경력도 그렇지만 하나의 운동에 저토록 헌신적인 사람을 보기가 쉽지 않은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 모습을 이리저리 바꿔내며 인터넷 세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재치있게 창조할 줄 아는 사람 역시 보기 드물기 때문이다.


사실 너무도 일찍 ‘결단’의 의미를 깨달은 한윤형의 모습은 좀 비장하기도 했다. 안티조선운동 당시 다른 대학생들에게 “어른들이 일을 더 시키려고 할 테니 절대로 말려들지 말라”고 충고할 정도로 현실을 잘 꿰뚫고 있는 그이기에 자조적인 독백과 열정적인 주장이 책 속에 공존한다. 산전수전을 거치며 너무 일찍 늙어버린 한윤형은 이렇게 얘기한다. “당시의 나는 노빠들을 정말로 싫어할 만큼의 순수함을 지니고 있었다. 세상사의 돌아가는 방식에 적당히 체념하고 그 전에 결코 이해할 수 없었던 많은 이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지금의 나로선 돌아갈 수 없는 세계인 것이다.”(90쪽)  회고록에서나 나올법한 얘기가 20대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나는 여기저기서 내가 이미 겪은 것과 같은 문제들이 반복되고 어떤 좋은 흐름들을 좌초시키는 것을 지켜보았다. 세상은 지겨우리만큼 반복적이었고 그 반복을 거부하려는 이들의 몸부림조차도 또한 반복적이었다. 기록에 대한 갈망은 내가 그 ‘사실’을 그저 ‘현실’로 받아들일 만큼 어른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일까? 기억과 자료가 사라지기 전에 기회가 있다면 아직도 그 일을 시도해 보고 싶다. 아직도 종종 그 시절의 꿈을 꾼다.”(50~51쪽).


이미 너무 많은 사건을 겪었고 그 중심에 있었기에 그가 보고 듣고 겪은 바는 압축적이다. 한국의 압축성장이 사회에 미친 영향을 보면, 압축성장의 경험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걱정된다. 그러니 그에게 필요한 건 ‘여유’인 듯하다. 세상을 책임지고 바꾸려는 의지를 잠시 내려놓고 세상의 다양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좋겠다. 짐을 잠시 내려놓아도 세상이 갑자기 망하지는 않을 테니.


허나 열정을 포기하고 차갑게 식은 한윤형의 글에서 가장 두드러진 점은 ‘논리’이다. 타고난 논리적 인간일 수 있지만 그는 인터넷 게시판의 논쟁을 통해 논리적으로 ‘단련’된 사람 같다. 인터넷 논쟁의 주요한 무기가 ‘발빠른 대응’이다보니 상대방의 글을 읽고 즉각적으로 논점을 파악하고 그 허점을 짚는 게 논쟁의 정석이다. 때론 상대방이 정말 얘기하고 싶은 바가 글 속에 정확하게 드러나지 못할 수 있는데, 그 점은 이해의 대상이기보다 비판의 대상이다.


그 자신도 이렇게 얘기한다. “게시판 논쟁 시대에 유용한 방식이기도 했지만, 나는 남들의 주장을 종합해서 나 자신의 주장을 만드는 편이었다. 여러 관점을 가진 이들이 있으면 그들의 글을 유심히 보고, 그들 입장의 장점과 난점을 파악하고, 그것들을 새로운 주장 속에서 끼워 맞추는 것이 내가 좋아하는 일이었다. 논쟁의 과정에 내가 몰랐던 사실들을 발견하면 그것들을 수용하는 글을 새로 쓰기도 했다. 그래서 기묘하게도, 나보다 스무 살이나 많은 진중권이 노빠들을 향해 직격탄을 쏘아 논란이 거세지면, 진중권의 진테제와 노빠들의 안티테제를 종합하여 내가 새로운 주장을 만들어내는 일이 잦았다.”(91쪽) 고등학교 때부터 이런 내공을 길러왔으니 그의 공력이 지금은 어느 정도일지 짐작하기 어렵다.


그런데 논리의 내공이 현실을 바꾸는 동력이 되려면 “인간은 꿈의 세계에서 내려온다”는 체게바라의 얘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한윤형은 “지금의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정치적인 대안을 지니고 있지 않고, 사실주의적인 분석은 회의와 냉소의 늪에 빠진다. 하지만 나는 이 늪이 위험하기는 해도 섣부른 희망의 아편만큼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꿈에 취해 살아서는 안 되고, 제정신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들이 무엇인지 직시해야 하는 것”이라 얘기한다(95~96쪽). 하지만 이런 현실주의는 그가 보는 세계를 너무 단편적으로 만든다. 단지 현실의 조건에서 시작하는 것을 현실주의라 부르지 않는다면, 이상을 가진 사람이야말로 현실주의자이고, 그런 현실주의자들 덕분에 인류 문명은 지금의 현실로 발전해 왔다. 전지적 작가 시점이 아니라 1인칭 시점에서 세상에 말을 걸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이, 민중‘을 위해서’가 아니라 민중‘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이 새로운 세상을 만든다.


허나 안티조선운동의 상처 탓인지, 그가 겪어온 민주노동당 분당, 김선일 사건 등의 영향 때문인지 한윤형은 그런 현실주의를 받아들이진 않는 듯하다. 나는 한윤형이 키보드워리어에서 현실주의자로 변신해서 세상의 열정을 많이 느껴보면 좋겠다.



아름다운 논쟁은 없다!


지금 성공회대에서는 ‘이상한 풍경’이 연출되고 있다. 학교 내의 행정직원들이 비정규직법안 때문에 해고되었는데, 밖에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사회적 약자의 대변자를 자처하는 교수나 지식인들은 하나같이 입을 닫고 있다. 심지어 이 일이 자신과 무관하다고 주장하거나 때로는 학교측의 입장을 대변하는 사람들까지 등장했다고 한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진보와 보수를 떠나 인간의 기본조차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이 남을 가르치려 한다니. 나는 앞길 창창한 두 논객의 삶이 소위 진보적이라 ‘떠드는’ 지식인들과는 다르길 기대한다.


그리고 똑똑한 두 사람이 성장하기에 인터넷이라는 세상은 너무 좁다. 넓은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몇 다리 건너면 하나의 세상이다. 좁은 세상에 똑똑한 사람들이 많으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고 사소한 자극에도 예민한 반응을 보이게 된다. 그러니 영역을 좀 넓히고 시야도 다양한 방면을 향하면 좋겠다.


80년대 사회과학논쟁, 사회구성체논쟁이 현재로 의미있게 이어지지 못하고 있는 건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원전에 대한 집착’ 탓도 컸다. 치열한 논쟁, 사상투쟁은 많았지만 교조주의나 개량주의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사회변혁을 둘러싼 논쟁마저도 이 땅의 현실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특정한 원전이 논쟁의 승패를 가늠했다. 그러다보니 현실을 바꾸는데 현실이 주가 되지 못하고 현실을 해석할 하나의 방법에 불과할 원전이 주가 된다. 앞뒤가 뒤바뀐 논쟁은 그만둬야 하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논쟁을 벌이다보면 왜 논쟁을 하는가라는 목적이 사라지는 것 같다. 내가 예전에 읽은 동화책엔 남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안경과 자기 마음을 보여주는 단추 얘기가 나온다. 남의 마음을 보는 게 엄청난 권력이지만 그 권력이 삶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 나같은 소심쟁이들은 그냥 자신의 소심함을 보여주는 단추를 붙이고 사는 게 행복하다. 이 글을 쓰며 나는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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