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프강 작스와 여러 사람들이 지은 『反자본 발전사전』(아카이브, 2010)은 참으로 불편한 책이다. 책을 읽다보면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말, 그리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온 말들이 실제로는 세뇌당한 이데올로기라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발전, 환경, 평등, 도움, 시장, 요구, 한 세계, 참여, 계획, 인구, 생산, 진보, 자원, 과학, 사회주의, 생활수준, 국가, 기술 등 뭔가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한 디딤돌이라 ‘배워온’ 말들이 실제로는 우리 삶을 지배해 온 언어들이다. 더구나 우리가 지금 당장 이런 말들의 의미를 바로잡고 새로운 말을 찾지 않는다면 미래세대는 이런 성찰의 기회마저 누리지 못한다는 점을 알지만, 지금 누리는 생활수준을, 또는 앞으로 누리려는 생활수준을 포기할 수 없기에 마음은 더욱 불편해진다.


이상기온과 구제역, 조류독감 등의 재앙을 겪으면서도 여전히 개발에 심취한 나라, 국민소득 몇 만불에 목을 매는 나라 한국에서 이 불편한 책은 너무 늦게 번역된 듯하다. 19명이 토해내는 말의 무게가 우리의 안락함을 쿡쿡 찌르지만 우리의 마비된 몸이 이런 자극에 반응할지는 의문이다. 허나 말에도 힘이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는 이 책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마지막일지도 모를 선택을 내려야 한다.



1. 계획된 파괴(발전)와 의도된 정치(경제)


한 아이가 태어났다. 이 아이는 엄마, 아빠의 아이이지만 우리와는 다른 존재이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울음’이라는 한 가지 언어로만 표현하기에(다행히 요즘은 ‘웃음’으로도 표현한다) 아직까지 그 속내를 알 수 없지만, 내 판단으로 이 아이를 재단할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지구상에 똑같은 사람은 없다(그래서 나는 인간복제를 믿지 않는다). 새로 탄생한 생명은 언제나 기존의 것과 다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하나의 사회를 만들고 더불어 살아간다. 그러니 지구상의 모든 사회를 비교할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을 만들겠다는 발상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오만함이자 엄청난 폭력이다. 온 세상을 지배하겠다는 생각이 아니라면 감히 그런 말을 입에서 꺼낼 수조차 없다.


인류의 비극은 이런 기준을 만들려는 사람들이 자기 분에 넘치는 힘을 가지게 되었을 때 시작되었고, 희망은 이런 사람들의 힘을 빼앗고 세상의 다양함을 회복시키려는 사람들이 등장했을 때 모습을 드러냈다. 다행스럽게도 이런 과정이 반복되지 않았다면 인류의 역사는 지금껏 이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허나 예전의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파괴적인 역사가 20세기에 시작되었다.


‘발전’의 뜻을 풀이하는 구스타보 에스테바의 글을 읽으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저발전은 1949년 1월 20일에 시작되었다. 그날 세계 20억 인구는 저발전인이 되었다. 까놓고 말해서 그때부터 사람들은 온갖 다양성을 잃어버리고 남들의 현실로 자기를 비추는 뒤집힌 거울로 일그러졌다.” 이 문장이 눈에 밟혀 책장을 넘기기 어려웠다. 미국의 대통령 트루먼이 미국사회를 기준으로 삼아 발전과 저발전을 나누는 순간, 미국이 인류의 발전을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순간 미국‘과는 다른 사회’에 살던 사람들은 덜떨어진 존재가 되어버렸다. 하나의 선언으로 전 세계는 선진국과 후진국으로 나뉘었다.


서구사회는 간절히 도움을 바란다면 기꺼이 뒤를 봐주겠다며 ‘키다리아저씨’를 자처했다. 반면 그 외의 사회들은 발전된 미래를 위해 현재의 행복을 포기하고 외부의 구원에 매달려야 했다. 아프리카 남부 수단의 알리에르 대통령이 종글레이 운하를 건설하기 위한 토론회에서 한 말은 이런 사고방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몽둥이를 들고라도 국민을 낙원으로 몰고 가야 한다면 우리는 국민을 위해서 또 우리 다음에 올 후손을 위해서 그렇게 할 겁니다.”


그런데 그런 구원이 실현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위선에 지나지 않는다는 진실은 은폐되었다. 즉 미국 로스앤젤레스시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수준에 맞추려면 지구가 다섯 개나 필요하다는 점, 로스앤젤레스시에도 엄청난 빈부격차가 존재한다는 점은 은폐되었다. 그러니 이런 변화가 자연스러울 리 없다. 강한 힘을 가진 자들이 힘없는 사람들을 속여서 벼랑 끝으로 몰아붙여야 이런 변화는 가능하다.


따라서 ‘발전하지 않을 권리’를 무시하고 발전권만을 강요하는 발전이데올로기의 힘은 경제가 아니라 정치에서 나온다. 경제발전은 기업이 아니라 정부의 몫이기에, “정치적 구상으로서의 경제”라는 표현은 본질을 드러내는 날카로운 지적이다. 이 책에 따르면, 경제발전의 원래 이름은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파괴의 정치이다.


사막 위에 스키장과 세계 최대의 쇼핑몰을 세운 기적의(?) 두바이는 이 사실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자본주의, 그들만의 파라다이스』(아카이브, 2010)에 따르면, 이미 두바이의 “국가와 사기업은 거의 일심동체가 되었”고 “두바이의 고위 관리자들은 정부의 핵심 직책을 맡는 동시에 알막툼이 지배하는 주요 부동산 개발회사를 경영한다.” 그리고 ‘주식회사 대한민국’이라는 우리식 표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사실 우리의 상식과 달리 빈곤과 빈민이라는 개념도 원래는 정치적인 개념이었다. “유럽에서는 오래전부터 pauper 곧 빈민의 대립항을 부자로 본 것이 아니라 potens 곧 세도가로 보았다. 9세기까지만 하더라도 빈민은 자유인으로 여겨졌고 그의 자유는 오직 세도가에 의해서만 위협받는다고 여겨졌다.” 부는 내게 없는 것을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만드는 힘이고, 돈의 힘이 아니라 돈 없이 살 수 없게 만들고 그 돈을 필요하게 만드는 힘이 가난한 이들을 지배한다. 그러니 빈부라는 개념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고, 경제가 아니라 정치로 풀어야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2. 진보의 강박(기술)과 타자없는 관료주의(도움)


따라서 아무리 열심히 일해 파이를 키워도 더 나은 세상은 찾아오지 않는다. 그동안 인간사회의 생산력은 엄청난 발전을 거듭해 왔지만 여전히 누군가는 밥을 굶고 병들어 고통을 받고 추위에 몸을 떤다. 조금만 더 참으면 새로운 미래가 온다지만 그 미래는 언제나 미래일 뿐 실현되지 않는다. 진보가 내세우는 미래는 현재를 정당화시키는 ‘알리바이’이다.


그러니 자기 눈앞의 사람이나 사건을 방치한 채 열심히 아이폰을 만지작거리는 것도 진보이고, 옆집 사람 얼굴도 모르면서 지구 반대편 소식에 몰두하는 것도 진보이다. 백 명이 일할 자리를 기계화시켜 다섯 명만 일하게 하는 것도 진보이고, 서울-부산을 오가는 시간을 몇 십분 줄이려고 산을 깎고 터널을 뚫는 것도 진보이다. 이렇게 진보적인 일들이 우리의 삶터와 일터, 생태계를 파괴해 왔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진보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특히 무한히 발전할 과학기술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리라 기대한다. 허나 이런 진보는 “모든 도덕적 제약과 윤리적 맥락으로부터 ‘해방된’, 오로지 지적이고 수학적이고 과학적인 지식에 대한” 맹목적인 신념일 뿐이다.


오토 울리히는 이제 진보에 대한 헛된 기대를 접어야 한다고 따끔하게 충고한다. “공업체제의 효율성을 그렇게 칭송하고 공업기술의 높은 생산성을 그렇게 떠들어대지만, 거기에는 아직도 많이들 모르는 이런 배경이 깔려 있다. 효율성과 생산성은 자신들이 노력을 기울여서가 아니라 이미 자연이 이룩해놓은 것을 약탈하는 방식을 통해서만(지구에 있는 이른바 자유재의 내부화), 또 자연에, 제3세계에, 미래 세대에게 비용을 어마어마하게 떠넘기는 방식을 통해서만(오염물질과 쓰레기문제 같은 형태로 나타나는 비용의 외부화) 실현된다. 높은 생산성을 가졌다는 공업체제는 지구에 얹혀사는 기생식물인 셈이다. 인류 역사에서 기생식물도 그런 기생 식물은 유례가 없었다.”


영화 <매트릭스>에 등장하는 스미스 요원의 말처럼 과학기술로 무장한 인류가 메뚜기떼처럼 지구를 파괴하고 있다. 특별히 더 파괴하지 않아도 우리의 생활 자체가, 생활수준을 유지하려는 우리의 노력이 지구를 폐허로 만든다. 이익에 눈 먼 기득권층과 민주주의의 토대라는 고상한 중산층이 지구를 파괴하는 메뚜기떼의 또 다른 이름이다. 자신들이 기생하고 있다는 점을 감추기 위해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전 세계로 수출한다. 도움과 원조가 이 수출품의 상표이다.


너무나 이타적인 그들은 눈 앞의 비참한 광경을 외면할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그러기 전에 먼저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한다. 누가 누구를 왜, 그리고 어떻게 도와야 할까? 책을 읽으며 또 한 문장에 가슴이 울린다. “가난한 사람의 존재는 굳이 자기가 가난해지지 않으면서도 자기 영혼을 챙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안겨주었다.” 가난이 삶의 필수조건은 될 수 없지만 가난의 존재는 그 가난을 목격하는 존재들에게 윤리를 되새기게 만든다. 아주 단순한 그 윤리는 내가 누리는 것들이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를 묻는다. 도움은 그런 윤리적인 관계에서나 가능하다.


그러나 발전이데올로기 속에서 도움은 받는 사람의 입장이나 문화를 고려하지 않는 일방적인 선물로 변한다. 그래서 “무언가를 주는 척만 해도 그것을 왜 주는지, 어떤 종류의 선물인지, 받는 사람에게 어떤 쓸모가 있는지는 따져보지도 않고 무조건 도움으로 규정한다.” 이런 “도움은 자기 문명 곧 서구 문명의 업적을 살리는 노력으로 뻗어나간다.” 이 속에 타자가 들어설 자리는 없다. 타자가 사라지면서 이런 타자들로 구성되는 공적인 공간도 사라지고, 그럴수록 도움은 “관료주의 조직을 필요로” 한다.


원빈과 안성기가 등장하는 국제기구의 광고는 아름다운 멘트로 채워지지만 그 실상은 아름다움과 거리가 멀다. 폰트놋과 아이완디는 『자본주의, 그들만의 파라다이스』에서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에서 활동하는 국제기구를 이렇게 묘사한다. “유엔, 비정부기구, 외국 도급업체, 주요 구호기관 등의 일급 숙소와 사무실에 대한 수요는 토지 가치 인플레이션의 상당 부분을 조장하며, 고위 공무원과 군벌들의 전략적인 토지강탈도 자극하고 있다. 국제조직들은 높은 수준의 물리적 안전 뿐 아니라,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가난한 나라에서 쉽게 구하기 힘든 제1세계 수준의 사치를 추구한다.”



3. 익숙한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요즘은 대안이라는 말처럼 식상하게 느껴지는 말도 없다. 이미 너무나 많은 대안들이 유행처럼 휩쓸고 지나간 한국사회에서 대안은 쇼핑몰에 전시된 상품 같다. 대안을 구매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들은 끼리끼리 모여 숙덕거리며 그런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질타한다. 너희들이 우리의 대안을 가로막고 우리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파괴한다고.


허나 『반자본 발전사전』의 글쓴이들은 생태학이나 지속가능성을 무조건 지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은 생태담론을 걱정하고 때로는 비판한다. “1990년대부터 바야흐로 펼쳐지는 생태 관료주의 담론”은 “희귀한 자연 자원의 관리를 목적으로 삼는 생태학”을 내세우며 “지역에서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을 지키고 싶어하는 생태학과 충돌”해 왔기 때문이다. 나아가 볼프강 작스는 이런 흐름이 “지구상에 울긋불긋하게 존재하는 문화의 다양성을 새롭게 위협하는” “생태 식민주의”라고 지적한다.


마찬가지로 글쓴이들은 대안발전이나 내생발전을 지지하지도 않는다. 에스테바는 이렇게 되묻는다. “추진력이 정말로 내생적이라면, 다시 말해서 다채로운 문화와 다양한 가치 체계에서 원동력이 나오는 것이라면 발전을 어떤 식으로 정의하는가와는 무관하게 거기서 필연적으로 발전이 이루어지리라고 우리가 믿어야 할 이유도 없고, 심지어 추진력이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리라고 믿어야 할 이유도 없다. 제대로 따라가면 내생 발전이라는 개념은 온 세계를 하나의 문화 모델로 덮어씌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마련이므로 발전이라는 관념 자체를 허물어뜨릴 수밖에 없다.”


사전이라는 제목답게 이 책은 개념의 잘못된 정의를 바로잡고 원래 뜻을 밝혀 준다. 발전은 “두 개로 나뉜 세계”이고 빈곤은 “특정한 문명의 발명품”이며 자원은 “재생되지 않는 자연”이다. 그리고 평등은 “발전이 약속하는 먼 미래”이고 도움은 “세련된 간섭”이며 참여는 “교묘한 통제의 방법”이다. 진정 다른 삶을 살고 싶다면 이런 조작된 언어에서 벗어나 나 자신의 요구를 드러낼 말을 찾고 직접 행동해야 한다.


이제 말과 행동이 바뀌어야 한다. 발전이데올로기를 없앨 방법은 “탈경제 운동의 활성화를 가능하게 만드는 정치적 통제”이다. 그러려면 정치에 개입하는 주체의 범위나 그들간의 관계도 달라져야 한다. “공정한 분배의 규칙이 각자에게 몫을 나누어 주는 것이라면 이 세상에는 땅에게도 땅의 몫을 주고 바다에게도 바다의 몫을 주고 숲에게도 숲의 몫을 주고 물고기에게도 새에게도 짐승에게도 각자의 몫을 주는 공동체가 있다는 사실을 헤아려야 한다. 땅에게도 제 몫을 주려고 극도의 가난을 받아들인 공동체는 사실 이런 식으로 엄청난 ‘잉여’를 지키면서 공동의 부를 공유한 셈이다. 공동의 부에 대해 우리가 먼 옛날부터 가져온 생각과 환경에 대해 오늘날 우리가 이제 막 또는 다시금 이해하려는 내용이 합쳐지면 정말로 새로운 ‘부’의 관념이 생겨날 가능성이 있다.”


나도 요즘 그동안 몰랐던 세계에 눈을 뜨고 있다. 우리 동네의 ‘거친 청년들’(?)이 나의 친구들이다. 우리 사회의 발전기준으로 보면 엄청나게 뒤처진 친구들이다. 대부분은 고등학교도 채 마치지 못했고 최후의 밑천이라는 몸도 별로 좋지 않다. 가족이나 사회의 보살핌은 딴 나라 이야기이고, 어릴 적부터 알바를 전전하며 세상의 쓴맛을 경험해온 청년들이다.


사회의 기준으로 보면 턱없이 부족하지만 이들은 ‘살처분’이라는 해괴한 명칭으로 산 생명을 땅에 파묻고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경제를 걱정하는 위선을 떨지 않는다. 배움과 기술에서 떨어져 있기에 이들은 날것의 상식으로 세상을 살아간다. 이 친구들을 통해 나는 세상을 온전히 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


딱히 하는 일은 없다. 같이 밥 먹고 담배 피고 술 마시고 가끔 책도 읽으며 한마디씩 말을 섞는 게 전부다. 이 친구들을 ‘발전’시킬 생각은 전혀 없다. 이 친구들이 스스로 ‘성장’하길 바랄 뿐이다. 가끔 그런 성장에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 내 인맥에서는 매우 자연스럽지만 그 친구들의 인맥에서는 너무나 만나기 어려운 사람들을 데려와 같이 밥 먹고 술을 마신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뒤섞이고 서로의 간격이 조금씩 좁혀지길 기대한다.


때로는 발전을 강요하는 우리 사회가 이들의 성장을 참아주거나 기대하지 않기에 마음을 졸이기도 한다. 폭력적인 우리 사회가 이 친구들의 마음에 새긴 상처들은 이들이 다른 선택보다 익숙한 선택을 하도록 강요하고 성장을 방해한다. 그리고 이 친구들을 바라보는 ‘건전한 사람들의 편견’은 이런 친구들이 없어져야 자신들의 삶이 지속될 수 있다고 착각한다. 이런 폭력과 편견이 만나 이들의 곤경을 당연한 것으로 만든다.


허나 잘 만든 공장식 농장이 구제역 한방에 도살장으로 변하듯, 발전에 미친 사회는 퇴보 한방으로 지옥의 아수라장으로 변할 수 있다. 그 지옥에서도 살아갈 힘을 가진 이들은 모범생이 아니라 바로 이 친구들이다. 이기적으로 들리겠지만 나는 살아남기 위해 이 친구들과 친하게 지낸다.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뒤엉켜 징글맞게 살아야 이 사회가 지속될 수 있다는 점을, 삶의 다양성만이 사회를 지속시키는 힘이라는 점을 나는 요즘 새삼스레 배우고 있다. 그리고 교육을 받을 권리, 학교에 다닐 권리도 중요하지만 교육을 받지 않을 권리, 학교에 가지 않을 권리도 필요하다는 점을 배운다. 모두가 서로에게 무한한 관심을 쏟는 따스한 사회에서도 혼자 앉아 고독을 즐길 벤치가 필요하다는 점도. 이제 익숙한 것에서 좀 벗어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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