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지방화시대 대안적 지역발전 전략

 

하승우(한양대 제3섹터연구소)

 

 

1. 지구지방화 시대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헬드(D. Held)와 여러 학자들은 지구화와 지방화를 구분하면서 지구화는 “무엇보다도 사회적․정치적․경제적 활동이 국경을 가로질러 확장되어 세계 어느 한 지역의 사건․결정․활동이 먼 지역의 개인과 공동체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을, 지방화(localization)는 “특정 장소 내에서의 흐름과 네트워크가 강화되는 것”을 뜻한다고 주장한다(헬드 외 2002, 37). 헬드 등의 정의를 따르다면, 시간과 공간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하부구조와 제도화, 계층화, 상호작용 양식이라는 조직적 차원도 갖추고 있는 지구화는 공동체와 국가, 사회의 모든 세력에 일정한 제한을 가하면서 활성화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더 이상 고립된 섬은 존재할 수 없고 지구화라는 변화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전망을 구성해야 한다.

네그리(A. Negri)와 하트(M. Hardt)는 신자유주의를 “자본의 전지구적 운동과 이윤을 가장 잘 도와주는 국가규제형태”이라 정의하면서 신자유주의와 국가의 결합을 비판한다(네그리․하트 2008, 335).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신자유주의가 판을 치는 제국에서 고립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건전한 대안일 수도 없다.

하지만 이런 주장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지구화를 하나의 ‘경향’으로 인정할 수 있지만 그것이 최종적인 변화를 결정할 정도로 결정적이지는 않다는 입장이다. 『제국이라는 유령』에서 여러 사람들이 주장한 바 있지만 국가의 경계가 무뎌지고 새로운 노동형태가 출현했다는 주장은 다분히 이론적이고 은유적일 뿐이다(캘리니코스 등 2007, 77). 특히 엘린 우즈(E. M. Wood)는 “지구화의 본질은 민족국가가 가진 능력의 쇠퇴가 아니라 지구적 자본을 위해 세계를 조직화하는 민족국가의 독특한 기량”이라고 주장한다(캘리니코스 등 2007, 126~127).

해리스(J. Harriss) 등은 지구화가 세계를 통합하면서 국가적인 차원을 주변화시켰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주권국가의 종말을 뜻하지는 않고 국가권력과 정치의 전면적인 변형이라고 주장한다. 더구나 세계은행과 같은 국제기구가 강조하는 굳 거버넌스(good governance)나 분권 등으로 드러나는 지방화가 민주화에 실제로 기여하는지에 관한 경험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강조하면서 주목을 받고 있다. 해리스 등은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런 변화가 결코 긍정적이지 않다고 강조하면서 “지방의 정치적 장과 그런 장 내에서 활동하는 행위자들의 정치관행을 규정하는 담론과 제도들의 결합을 검토하고 민주화를 위한 지방정치의 함의”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Harriss 등 2004, 3). 즉 굳 거버넌스는 행정의 투명성과 책무성을 강화하고 그것을 측정하는 지표일 수 있지만 민주주의를 측정하는 지표로서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런 맥락에서 노드홀트(H. S. Nordholt)는 분권과정이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의 이행이나 강한 국가에서 강한 시민사회로의 이행과정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노드홀트는 인도네시아의 분권과정을 분석하면서 분권과 더불어 부패가 더 늘어나고 갈등이 더 심해지는 특이한 현상의 원인을 지역의 엘리트와 인종에서 찾았다. 노드홀트는 인도네시아의 지방정부에서 관료와 정당보스, 기업가, 군부와 범죄자들의 동맹이 그림자정부로 행세한다고 비판한다(Nordholt 2004, 30~48).

그리고 김성현은 국제금융기구의 발전모델이 선거를 통해 대표성을 확보하는 정부기관을 거치지 않고 시민공동체를 직접 지원해서 민주주의를 훼손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지적한다. 시민사회가 그 자체로 도덕성과 중립성을 가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고 거버넌스 자체가 가난한 빈민들의 역량강화(empowerment)를 뜻하지 않는다는 비판이다(김성현 2008).

지구화는 한국처럼 수도권으로의 집중되고 중앙정부가 불균형한 발전계획을 추진하는 국가의 문제점을 바로잡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리고 한국의 지역사회가 다른 나라처럼 국제기구의 직접 원조를 받으며 국제기구의 정책을 국내에서 재생산하는 사례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국가의 약화가 지역사회나 시민사회의 강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국가/시장/시민사회라는 관계로 접근하면, 국가의 약화가 시민사회의 강화를 뜻하지 않고 오히려 시장의 강화로 이어지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지구화의 영향이 국민국가의 권력구조에 영향을 미치고 그 집중성을 약화시킨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그렇게 분산된 권력이 시민사회로 넘어가 그 역량을 강화시키는 현상은 충분히 증명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한국의 지방자치제도가 중앙정부가 독점해 온 발전전략을 지역 차원에서 재검토하고 지역특성을 살리기 위한 발전의 근거를 마련했지만 획일적인 발전노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점 역시 그 점을 증명한다. 신개발주의라 정의되는 과도한 개발열풍의 원인은 단지 지방정부나 중앙정부같은 정치권력에만 있지 않다. 한국의 경제구조 자체가 개발산업, 건설업을 중심축으로 삼는 구조적인 문제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구조적인 경제구조를 바로잡지 않을 경우 지역사회는 경제적인 자생성을 가지지 못하고 중앙정부의 발전전략을 복제할 수밖에 없다.

또한 지금 세계는 전쟁 중이다. 무기를 든 병사들이 서로를 죽이는 ‘드러난 전쟁’만이 아니다. 전 세계적인 빈곤과 가뭄은 사회적 약자들의 목숨을 빼앗고, 심각한 사회적 양극화는 아무런 보호장치 없이 현실에 내팽개쳐진 사람들을 벼랑 끝으로 몰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전쟁’이 드러난 전쟁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의 삶을 옥죄며 위협하고 있다.

전쟁은 밖에서만 벌어지지 않는다. 이제는 내 몸 안에서도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광우병이나 아토피처럼 인류가 자초한 질병이나 불안한 먹거리와도 우리는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비단 신체적인 질병만이 아니다. 도시의 삶이나 직장생활 등에서 비롯되는 스트레스와 같은 정신적인 질병들도 삶의 건강함을 위협한다. 그리고 식량자급율 27%라는 한국의 현실은 삶의 질을 넘어 삶의 가능성 자체를 의심하게 한다. 그러니 우리는 외부적인 생존경쟁만이 아니라 내 몸을 지키고 유지하는 ‘살기 위한 전쟁’도 감당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 ‘현재의 전쟁’만이 아니다. 미래세대는 지금 우리 세대가 물려준 ‘유산(遺産)으로서의 전쟁’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한국의 에너지 수입률은 97%이고, 수입 에너지의 상당수가 피크 오일(peak oil)에 이르고 있다는 석유이다. 더구나 빙하가 녹으면서 해수면이 높아지고 있고 지구온난화로 인한 각종 기상이변과 지진, 황사와 사막화 등의 현상을 보면 지구가 인류를 향해 전쟁을 선포한 듯하다. 이제 인류는 영화에서나 나오던 묵시론적인 종말을 향해 다가서고 있는 듯하다.

따라서 지구지방화라는 시대적 흐름 자체가 대안적 가능성을 증명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이런 시대적 흐름은 대안을 지향하는 의도적이고 의식적인 노력 속에서만 제 가치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노력은 발전 자체를 다시 정의하고 지역사회를 변화시키는 능동적인 전략 속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

 

 

2. 발전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아마르티아 센(A. Sen)은 발전이 인간의 실질적 자유를 확장시키는 과정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발전은 단순히 경제적인 부를 증가시키는 것만으로 보장될 수 없고 “사회․경제적 제도(예컨대, 교육시설, 의료보호)나 정치적 권리 및 시민권(예컨대, 공공토론이나 투표에 참여할 자유)과 같은 다른 결정요인”과도 연관되어 있다(센 2001, 19). 따라서 센은 발전이 ①정치적 자유, ②경제적 편의, ③사회적 기회, ④투명성 보장, ⑤보호적 안전성이라는 다섯 가지 기준을 충족시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센은 기존의 발전관이 주민을 수동적인 수혜자로 만들기 때문에 발전의 지속성과 효과성을 담보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센의 발전관은 중요한 요소를 놓치고 있는데, 이 글은 그것이 바로 생태주의와 민주주의라고 본다. 센의 발전관에는 현재의 성장이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점이 드러나지 않고 그가 정치적 권리와 시민권을 보장하리라고 믿는 대의민주주의는 현실에서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현실에서 ‘1인 1표’의 정치적 평등은 ‘1인 1원’의 경제적 논리로 이미 대체되었다).

생태주의적 전환의 필요성은 러미스(D. Lummis) 등이 주장하는 ‘제로성장’이라는 개념에서 더욱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식량이나 환경오염, 자원고갈 등은 인류가 더 이상 성장을 고집할 수 없는 상황으로 세계를 몰아가고 있고, 최근의 여러 위기에서 드러나듯이 자본주의라는 경제시스템 자체가 지속성을 담보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러미스 등이 가난한 풀뿌리 민중들을 방치하겠다는 주장은 아니다. 오히려 러미스는 풀뿌리 민중의 삶을 보장할 수 있는 방법이 경쟁적인 발전보다 상호부조와 협력에 있다고 강조한다.

그런 점에서 구도완과 여형범은 생태주의를 받아들이는 생태복지국가모델과 생태적 공동체/어소시에이션의 병행전략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들은 “생태적 공동체/어소시에이션을 바탕으로 개발국가/자본주의 국가를 생태적으로 전환하여 생태복지국가를 만들어 가면서 동시에 국가를 넘어서서 생태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자치연합을 만드는 전략”을 강조한다. 이들은 국가와 자본의 개발과 폭력에 맞서 “생태 공동체/어소시에이션의 담론과 행동이 국가와 자본을 전환하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넘어설 때에만 호혜와 연대의 관계를 유지시키고 확장”시켜야 한다고 강조한다(구도완․여형범 2008, 96~100).

하지만 발전을 지상목표로 삼는 CEO 출신의 불도저 대통령과 신개발주의에 매몰된 사회에서 생태주의적 전략을 실현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선진화’ 담론은 노골적으로 개발과 발전을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면서 다른 대안적 담론의 가능성 자체를 봉쇄한다. 대표적으로 박세일은 “지방시장보다는 국가시장으로, 국가시장보다는 세계시장으로 시장이 확대되면 될수록 분업의 세분화(특화) 가능성이 커지고, 그 결과 경제성장과 발전의 가능성도 커진다”라고 주장하고 있다(박세일 2006, 23). 자연히 그의 해답은 “기업과 산업의 구조조정 강화라는 발전주의적 해결책”이 새로운 고용을 창출해서 빈곤을 해결할 것이라 주장한다(박세일 2006, 36). 생태주의가 국가와 시장을 변화시키기는커녕 ‘녹색성장’과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빌미로 국가와 시장이 생태주의를 포섭하고 있다.

따라서 대안적인 발전을 주장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대안적인 발전이 가능하다고 믿지 않아서가 아니라 개발주의 담론이 다른 모든 대안을 압도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가능성은 고려조차 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하승수는 “지역주민의 삶의 질을 우선에 놓는 새로운 지역발전전략”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토건국가식 개발이 지역내총생산(GRDP, Gross Regional Domestic Product)을 증가시킬 수 있지만 환경을 파괴하고 주거비용을 높이는 등 삶의 질을 악화시키고 있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선전해야 하려면, 다른 무엇보다도 지역내 민주주의, “지역주민들의 참여에 바탕을 둔 민주적인 정치․행정체제가 수립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하승수 2008).

스스로 판단하고 민주적으로 실천하는 시민이 늘어날 때에만 대안적인 발전은 가능하다. 대안적인 발전관이 풀뿌리 민중의 가슴 속에 ‘상식’으로 자리잡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지속가능한 가설일 뿐 실현가능한 대안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그런 상식으로의 자리매김은 ‘자각’을 필요로 한다. 김종철이 지적하듯이 민주주의와 물질적인 경제성장이 동시에 추구할 수 없는 목표라는 점을 자각하고 그런 전제 위에서 대안적인 발전관을 실천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그 대안적인 발전을 위한 디딤돌을 찾을 것인가? 선드호슨(U. Sundhaussen)은 “서구식 처방은 무시하고, 자신들의 과거의 결함으로부터, 또 산마리노 같은 나라의 역사로부터 배워서, 다수 인민 즉 농민계급을 민주적 정치 속으로 참여시키는 길을 선택”하자고 얘기한다(선드호슨 2008, 169). 1만년 이상을 이어온 자급자족과 지속의 공동체로 다시 돌아갈 방법은 결코 과거를 낭만적으로 회상하는 반동사상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오랜 전통을 복원하고 주권의 논리로 민중을 억압하는 국가를 넘어설 대안일지 모른다. 따라서 무기력하게 대의민주주의의 필요성을 주장하지 말고 민중의 역동적인 삶 속으로 들어가 그 속에 녹아있는 정치적 잠재력에 주목해야 한다.

대안적인 발전은 농업을 기반으로 한 자급과 자치의 생태 민주주의 속에서만 가능하다. 생태 민주주의라는 자신의 이익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표를 거래하는 방식이 아니라 공동체 내부와 외부의 관계망을 회복하는 것으로 실현될 수 있다. 곧 닥쳐올 식량과 에너지라는 위기를 고려한다면 자급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조건이고, 민주주의 역시 자급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대안적인 발전은 국가라는 틀과 잘 맞지 않고 지역사회라는 틀과 어울리는데, 지금 한국의 지역사회로는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 대안적 발전이라는 목표를 위해서는 지역사회 역시 대안적인 조직화를 이루어야 한다.

 

 

3. 지역사회의 대안적인 조직화는 가능한가?

 

한국의 지역사회는 보통 소규모 공동체로 규정되어 왔다. 정지웅은 “지역사회란 일정한 크기의 지리적 영역을 가진 지역과 두 사람 이상의 인간집단을 뜻하는 사회의 합성어이기보다는 보통 공동체의식(community sense)을 가진 인간집단이 사는 작은 규모의 지역사회(the community)를 말한다”며 지역사회의 소규모 공동체성을 강조한다(정지웅 2005, 11). 더 나아가 최옥채는 지역사회의 공동체성을 부각시켜 ‘지역사회주의(communitism)’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최옥채는 지역사회가 생활공동체이자 이웃, 동네, 마을 정도의 소규모 공간이기 때문에 지역과 지역사회를 구분하면서 지역사회를 “동질성이나 자체 변화를 위한 역동성 등이 강한 주민들로 구성된 소규모 수준으로 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최옥채 2003, 8).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지역사회를 공동체성만으로 단일하게 규정하기는 어렵다. 전통적인 혈연과 지연같은 귀속적인 관계가 강한 농촌과 비교하면 도시에서는 그런 영향력이 약하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농촌의 지역사회는 도시보다 소규모이고(인구의 고령화와 지속적인 인구 이탈), 인근의 규모가 더 큰 지역사회(배후도시)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원활한 생활조건(학교, 시장 등)을 유지할 수 있다.

그리고 소규모 공동체성만을 강조할 경우, 지역의 억압적인 노동관행이나 가부장적인 구조, 억압적인 생활방식이 지역사회의 고유함이나 특수성으로 포장될 수 있다(하비 2001, 120). 그런 점에서 정근식은 지역사회를 공동체로 표상하는 것이 “지역내 계급관계나 사회적 지배관계를 대체하거나 희석시키는 효과를 갖는 것”이라며 “공동체적 요소와 내부의 지배관계를 적절하게 포착할 수 있는 단위가 설정되는 것이 지역사회 연구에서 중요하다”고 지적한다(정근식 2003, 17).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지역사회는 도/농에 따른 구조적 차이점을 가지고 있고 단순히 공동체로 규정될 수 없으며 다양한 세력들이 영향을 주고받는 장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즉 지역사회의 공동체성을 강조하며 그 내부의 이해관계를 단순화시키거나 다양성을 억압해서는 안 된다(물론 지역사회의 다양한 이해관계는 지역이라는 한정된 공간을 매개로 삼기 때문에 일정한 공통점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지역사회의 공동체성은 이미 확립된 전통이나 외부의 모델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지역주민들이 새로운 정체성을 구성하며 민주적인 의사소통구조를 확립하는 지향점이 되어야 한다. 공동체성은 지역사회의 변화를 위한 전략으로 고민되어야 하지만 새로운 정체성은 그에 걸맞는 의사소통구조를 갖춰야 하고 공동체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유동적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요즘은 지역사회의 의사결정구조나 참여구조, 지역자원을 분석하는 개념으로 사회자본(social capital)과 로컬 거버넌스(local governance)가 많이 활용되고 있다. 두 개념은 정부가 주도하지 않고 지역내 이해당사자가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협의해서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과정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그리고 지역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자원들이 서로 참여하고 협력하면 과거의 정부주도형 통치방식보다 더 나은 사회발전을 가져올 수 있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이런 서구적 개념을 비서구사회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예를 들어, 아이작(T. Issac)과 헬러(P. Heller)는 퍼트남(R. Putnam)을 비판하면서 사회자본이라는 개념이 ‘이미’ 성숙한 시민의식을 가진 자발적인 결사체만을 강조하기 때문에 국가가 강력하고 계급갈등이 첨예한 제 3세계에 적용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아이작과 헬러는 오히려 계급갈등과 사회동원 과정에서 능동적인 시민이 구성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Issac․Heller 2003, 83~86). 마찬가지로 신희영은 사회자본이론의 방법론적 개인주의로는 사회조직의 특성을 측정하기 어렵고, 국가제도가 사회자본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조건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고 비판한다(신희영 2005, 13~14). 또한 사회자본이론이 사회운동의 중요성을 간과한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높다(주성수 2006, 61~62).

실제로 한국에서는 자율적인 협력과 참여, 네트워크를 얘기할 수 없을 만큼 중앙의 국가권력이 지역사회에 깊숙이 개입해 왔다. 과거 군대와 경찰, 검찰 및 사법기구, 각종 정보기관 등 폭력을 전문적으로 사용하는 억압적인 국가기구들이 군과 면 단위까지 지부조직을 만들고 대책협의회를 꾸리며 활동해 왔다(한국농어촌사회연구소․한국가톨릭농민회 1990, 66). 그리고 새마을운동협의회, 민족통일협의회, 사회정화추진협의회, 청소년선도위원회, 자유총(반공)연맹 등의 단체들도 중앙정부의 민간동원단체로서 지방권력을 분점해 왔다. 이런 단체들은 공공기관을 중심으로 권력연합을 형성해 왔고, 이런 단체들에 소속된 지역유지들은 “시가지 개발과 관련한 각종의 개발정보는 물론이고 각종 관급공사의 수주나 지방공무원 인사도 지방관료와 유지들의 담합에 의해 좌지우지”(지수걸 2003, 27)하는 지역의 실세들이다.

특히 지방자치제 실시 이후에는 지방의 자치단체장들이 독자적인 권력구조를 확보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신희영 2005, 2). 자치단체장들은 지방의 자율성이라는 명목으로 중앙정부의 견제와 감독을 피하고, 중앙집권적인 행정구조와 빈약한 재정을 핑계 삼아 지역의 건전하고 지속가능한 발전전략을 수립하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 지방의 단체장들은 예산을 무리하게 집행하고 각종 이권에 개입하며 인사권을 남용하는 등 각종 부조리를 일삼으며 자신들의 권력기반을 강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지식인들과 대학 역시 이런 잘못된 권력구조에 편승해서 자기 이익을 취하려 하고 있다.

따라서 대안적 발전을 추구하려는 노력은 이런 지역사회의 지배구조를 무너뜨리는 노력과 분리될 수 없다.

스퇴커(R. Stoecker)는 지역사회발전모델이 크게 ‘주민조직화(Community Organizing)’와 ‘지역개발법인(CDCs, Community Development Corporations)’의 두 가지로 구분된다고 주장한다(Stoecker 2003, 495).

 

주민조직화

지역개발법인

목적

지역사회의 권력 형성하기

주택 공급과 일자리 창출

세계관

갈등: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가 공동의 이해관계나 관계를 맺지 못하는 제로섬 게임

협력: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가 공동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관계를 맺는 윈윈 게임

전략

주민이 엘리트와 맞서도록 조직하고 권력배분의 변화를 요구

주택과 일자리 창출을 위해 기금을 마련하거나 보조금을 받도록 엘리트와 협력

인적 자원

마을에 관한 경험을 폭넓게 활용하는 주민(대부분은 자원봉사자)

특수한 전문기술을 가진 월급을 받는 간사(대부분은 주민이 아님)

이런 차이점 때문에 두 가지 모델은 통합되기 어려운데, 스퇴커는 주민조직화가 갈등과 대결로 지역사회의 구조를 바꾸려 한다면 지역발전은 개인들의 생활을 편리하게 하고 복지를 향상시키는데 초점을 맞춘다고 본다. 지역개발법인은 주민조직화라는 장기적 성과보다 공공․시장․비영리민간 영역간의 효율적인 역할분담(정부보조금, 민간기부, 세금공제 등), 특히 공공영역의 지원체계와 관리체계의 변화를 주도하되 주민참여를 보장하는 지역사회 이사회(community board) 운영한다. 하지만 지역개발법인은 차츰 이윤을 위한 투자사업으로 전락하고 전문성을 강조하다보니 사회적 약자와 멀어지며 주민통제 원칙이 지켜지지 않아 지역기반조직(community-based organization)으로서의 역할이 축소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김형용 2008).

스퇴커는 주민조직화와 지역개발법인의 모델을 통합시키려 했던 미국 오하이오주 톨레도(Toledo)의 실험을 분석하면서 그 통합이 쉽지 않음을 지적한다. 그러면서도 스퇴커는 그 둘의 통합을 시도하는 프로그램이 일정한 성과를 거뒀으며 지역개발법인의 조직을 변화시키고 지역개발법인이 주민조직화의 방식을 끌어안을 수 있는 구조(지역사회이사회의 민주화, 지역리더 발굴 등)를 드러냈다고 평가한다(Stoecker 2003, 507~510).

빈(R.V. Veen)은 적극적인 시민이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바로 공동체 발전이라고 보면서 가난한 빈민이 교육을 통해 성장하는 시민교육과 공동체발전의 연관성을 분석한다. 빈은 보수적인 공동체의 기득권 구조를 깨려는 다양한 운동이 1960년대 미국에서 등장했으며 주민조직화, 지역재단, 지역사회만들기(community builidng)가 그 대표적인 형태라 얘기한다(Veen 2003, 585~586). 이 각각의 운동은 빈민조직화와 사회서비스 전달, 지역사회 욕구달성에 효과적으로 기여했고 교육을 중요한 방식으로 활용했다.

그런데 빈은 이런 운동이 강조하는 교육의 양태가 각기 다른 목표와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억지로 통합하는 것이 좋지 않고 포괄적인(inclusive)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것이 좋다고 주장한다. 분명한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주민들을 조직가로 양성하는 교육은 교육자의 역할이 일정 시간과 보조적인 위치로 제한되지만, 주민들의 사회의식을 향상시키는 교육은 지속적이고 상당한 수준의 개입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회서비스를 전달하는 교육은 직접 목표를 달성하지 않고 목표달성에 필요한 심리적이고 문화적인 조건을 마련하려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런 운동은 제한된 지역사회 내에서 각자 재원이나 주민을 놓고 경쟁하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의 운동을 평가절하하거나 의심하기도 한다. 따라서 빈은 공동체발전을 위한 전문적인 통합교육(integrated professional education)이 아주 중요하다고 강조한다(Veen 2003, 593~594).

한국의 지역사회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주민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노동운동이나 농민운동같은 전통적인 사회운동이 지역사회와의 결합을 모색하고 있고, 풀뿌리운동이라 정의되는 지역운동도 서서히 정착되고 있다(하승우 2007). 기득권세력이 지역사회를 포획하고 있어 그 사회가 자율성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미국사k회처럼 다양한 형태로 지역사회 발전이 시도되어오지 못했다. 하지만 생활협동조합운동이나 빈민운동이 풀뿌리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디딤돌을 만들어 왔고(하승우 2008), 최근에는 자활공동체나 사회적 기업처럼 지역개발법인과 비슷한 성격을 가진 기구들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민단체가 이와 유사한 기구들로 전환되기도 하고 있다.

이런 다양한 흐름들은 한국의 지역사회가 대안적인 지역발전전략을 추진할 수 있는 주요한 자원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앞서 스퇴커나 빈이 지적했던 것과 비슷한 문제들도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자원확보를 놓고 서로 경쟁하거나 정치적인 갈등을 회피하거나 주민참여의 중요성을 당위적으로 강조하는 경향이 드러나기도 한다.

따라서 대안적 지역발전전략을 위한 지역사회 조직화의 첫 단계는 각 모임이나 단체의 역량강화(empowerment)를 위한 통합적인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것이다. 스퇴커가 분석한 톨레도 사례에서처럼 지역사회 내의 다양한 주체들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과정을 밟는다면 그 힘은 배가 될 수 있다. 지역사회의 강고한 기득권 구조나 후견주의(clientalism)를 생각한다면, 지역사회 내의 변화역량은 ‘명목상의 연대’를 넘어 실질적인 연대를 이뤄야 하고, 그런 연대는 소통과 상호이해(mutual understanding)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특정한 이슈를 해결하기 위해 결합하는 ‘느슨한 연대’는 다양한 삶의 의제를 소통하며 신뢰와 우정을 형성하는 강한 연대로 발전해야 하고 이런 발전은 일정한 과정을 거치면서 이루어질 수 있다.

그리고 다양한 운동의 흐름이 주민참여와 주민리더십의 형성에 힘을 쏟아야 한다. 사회적인 대안은 진공상태에서 검증되지 않고 수많은 장애요인들과 기성담론들이 훨씬 우세한 상황에서 주민들과 접촉해야 한다. 그리고 오랜 권위주의 시기를 거치면서 한국의 지역사회는 수동성을 몸에 익혔다. 따라서 올바른 주장을 했다고 해서 주민들이 그것을 지지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빈이 강조했듯이 포괄적이고 통합된 교육프로그램들을 통해 주민들이 지역리더로 성장하도록 다양한 운동의 흐름이 힘을 모아야 한다.

또한 대안적인 발전이 가능하려면 대안적인 경제의 망이 구성되어야 한다. 그 구성의 단계는 사회적 경제(social economy)라는 개념으로 정리될 수 있는데, 그것의 성공 여부는 그것이 기존의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다른 자신의 ‘사회적 시장’, ‘윤리적 시장’을 만들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만일 사회적 경제가 기존의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자신을 적응시킨다면 그것은 자신의 기반을 갉아먹을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협동조합운동이 중요하다. 협동조합운동은 사회적 일자리 사업이나 레츠(LETS), 마을만들기운동 등을 통해, 그리고 친환경급식이나 로컬푸드만이 아니라 주거, 보험, 문화 등 다양한 영역에서 사회적 관계망을 회복시켜야 한다. 그리고 이런 관계망의 구성에서는 협동조합만이 아니라 협동조합운동의 가치에 동의하는 다양한 지역단체들도 참여시켜야 한다. 그리고 그 관계의 망은 국경선을 넘어 확대될 수도 있다. 그런 관계망의 확대가 공동소유의 영역을 확대시킨다면 그것은 새로운 노동과 거래(trade)의 원칙을 확립할 수도 있을 것이다.

 

 

4. 결론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이념을 중심으로 탄탄한 후견주의 구조를 확립한 세력들은 신개발주의를 추진하며 지역사회를 개발의 희생양으로 만들려 하고 있다. 반면에 이런 흐름을 변화시키려는 다양한 노력들은 아직 연계되지 않고 그 자체적인 힘도 미약하다.

따라서 대안적인 발전의 가능성을 낙관하기는 어렵다. 경기도 조치원에서 이장-공무원-업자의 개발동맹에 맞서 아파트 건설반대싸움을 벌였던 강수돌의 말은 이 어려움을 잘 말해준다. “우리는 저들의 개발동맹보다 훨씬 나은 ‘대안동맹’을 결성해야 한다. 우선은 마을 주민들이 더욱 똘똘 뭉쳐야 하고, 양 대학 학생과 교직원들이 나서야 한다. 그리고 환경운동과 노동운동 등 시민사회단체들이 측면 지원하고, 소신과 실력을 겸비한 변호사 등 10명 정도가 ‘목숨’ 걸고 결합해야 한다. 진행 중인 2건의 행정소송을 수행할 팀도 필요하고, 주민의 역동성을 전면적으로 활성화할 팀이 필요하다. 생명의 대안을 향한 주민들의 생동하는 투쟁이 법정 속으로 ‘제도화’하는 것을 경계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군수와 도지사, 군의회와 도의회를 상대로 민원 제기와 대안의 협상을 담당할 팀도 필요하고, 언론 및 홍보를 전담할 팀도 필요하다. 이 모든 팀들이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다양한 빈틈 전략들을 활발히 구사해야 한다.”(강수돌, 2007: 201)

대안적 발전모델을 구상하고 실현시킬 수 있는 힘은 지역사회 내외부의 다양한 운동세력들이 구체적인 의제를 중심으로 강한 연대를 구성하고, 아직 조직되지 않은 주민들을 지역사회의 정치주체로 성장시키고 조직화하며 대안적인 발전모델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서서히 형성될 것이다.

참고문헌

 

강수돌. 2007. “살기 좋은 지역 만들기: 건설자본과 마을공동체”. 한국사회포럼 ‘연구참여단체’ 발표자료집.

김성현. 2008. “국제금융기구와 빈곤축소프로그램”. 《경제와 사회》 겨울호 수록예정.

김종철. 2008. 『땅의 옹호: 공생공락의 삶을 위하여』. 대구: 녹색평론사.

김형용. 2008. “미국 지역사회개발 동향과 지역개발법인(CDCs)”. 《국제사회보장동향》 봄호.

러미스, 더글러스 지음. 김종철․이반 옮김.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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