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 기술과잉, 초고령사회라는 감당하기 어려운 무거운 주제들을 받고 부족하지만 최근의 고민들을 짧게 정리하려 합니다. 가장 근본적인 고민은 경제성장을 지상과제로 삼은 산업문명이 한계에 봉착했고 그로 인해 불거진 재난들이 잦아지는 상황에서 지역이 과연 전환의 기회가 될 수 있는가라는 물음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럴 가능성은 있지만 한국에서는 그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판단입니다. 왜냐하면 압축성장의 그늘과 문제점을 진지하게 성찰하는 분위기보다는 여전히 메가서울, 메가시티와 같은 선택과 집중의 전략이 중요하게 다뤄지기 때문입니다. 지역과 다양성이 논의되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따라잡기와 복제의 힘이 훨씬 더 큽니다.

성북구에서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온 지역과 지역학은 의미가 있고 진지하게 다뤄야할 주제입니다. 저 역시 지역의 가능성을 보고 오랫동안 자치와 자급의 힘을 강화시킬 방안을 찾기 위해 고민해 왔습니다. 그렇지만 회복과 재생에 대한 공동체적인 믿음을 넘어 다수를 설득하고 전환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만들기까지는 넘어야 할 장애물이 여전히 많은 것 같습니다.

물론 가능성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우연은 갑작스레 찾아오니까요. 그렇다면 우연을 기회로 만들 준비가 필요한데, 어떤 준비가 가장 중요할까요? 준비는 문제에 대한 진단에서부터 시작하기에 진단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려 합니다.

 

 

1. 진단: 문제에 대한 확인

 

최근의 지역과 로컬에 대한 논의를 따라가며 답답함을 느꼈던 부분은 장소성과 다양성, 회복력 등의 긍정적인 성격을 부각시키는 것에 비해 그것의 실현을 가로막는 현실적인 장애물들에 대한 분석과 대응이 부족하다는 지점이었습니다. 마치 한편에서는 병원, 상점 등의 필요시설 부족으로 지방소멸이 얘기되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지역의 문제를 창의적, 혁신적으로 해결하는 로컬 크리에이터가 마치 대안처럼 얘기된다고 할까요. 여러 위기를 고려해 자원의 동원을 신중하게 조절해야 할 시기에 대규모 자원을 투입하는 메가도시 전략이 얘기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쟁력을 위해 서울을 더 키워야 한다는 주장과 균형발전을 위해 비수도권에도 서울과 같은 중심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은 한국에서 낯선 이야기가 아닙니다. 경제성장이라는 목표를 위해 정부가 대규모 자원을 기획/투자하고 이를 바탕으로 글로벌 경쟁에서 일정한 위치나 우위를 점해야 한다는 주장은 계속 반복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전략이 기후위기와 기술의 선택적 과잉, 불평등으로 인한 인구구조의 붕괴를 불렀다고 생각합니다.

경제성장   중앙/지방정부 계획   글로벌 경쟁
   

 

기후위기는 산업문명의 이득이 소수에게 집중되고 피해가 다수에게 전가되는 현상이 문제이고, 기술과잉이란 것도 기술의 편리성이 소수에게만 이득이 되고 위험성이 다수에게 전가되는 현상이 문제이며, 초고령화도 위협으로 느껴지는 건 소수를 위한 사회시스템을 지탱해줄 토대가 위태로워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성장의 서사구조와 불평등 구조를 바꾸지 않고서는 사회의 전환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동안 한국사회에서 이런 고민들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성장이 아닌 다른 가치지표를 찾고, 정부가 아니라 지역이 주도해서 그런 지표를 실현할 힘을 만들어 경쟁보다 순환공존하는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 또한 계속 있어 왔습니다. 그것이 현실의 운동으로 작은 성공들을 거둬왔지만 사회의 전환을 이루지는 못했다고 봅니다.

대안적 가치지표   지역주도(자치/자급)   순환공존체계/지속가능성
   

 

그러면서 지금 목격하는 현상은 대안적인 가치와 언어조차도 성장담론에 포획되어 관료주의라는 깔때기를 거치면 획일화, 서열화되어 버리는 기묘한 상황입니다. 마을, 공동체, 대안경제, 공유지같은 가치와 언어들은 계속 사용되고 있지만 그 전환적 성격은 약화되고 기존 사회의 보완적 성격이 강화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성격변화에는 관료주의의 영향력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관료주의의 특성이라 할 도구적 합리성과 목표달성을 위한 공학적 접근, 선택적 자원동원, ()정치성이 이런 대안적 가치/언어에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대안마저도 획일화, 서열화되는 상황을 자주 목격하고, 그것이 내부의 경쟁을 초래하면서 애초의 가치를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가치/언어의 포획   관료주의(중앙/지방)   획일화/서열화
   

 

재난의 시대에 지역이 대안이 되려면 다양성이 반드시 필요한데, 지금은 다양성조차 해법으로 제한되어 버립니다.

 

 

2. 준비: 우연을 가능성으로

 

서두에서 밝혔지만 저는 한국사회의 전환 가능성에 대해 비관적입니다. 그렇지만 우연과 사건이 언제든 등장할 수 있으므로 저는 준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준비는 앞서 했던 진단과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사실 저는 기후위기, 기술과잉, 초고령화가 어떤 지점에서는 사회전환을 초래할 수밖에 없는 계기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전환의 방향이 문제일 텐데요. 기후위기가 불러올 재난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것이라면, 그 재난이 초래할 상황에 대한 대비가 필요할 겁니다. 그런 대비에 지역이 어떤 역할이 할 수 있을까요? 한재각은 기본적 필요를 넘어서 더 많은 소비를 위한 부의 ()분배를 희망하며 이를 가능하도록 경제성장을 추구하는 정책에 (암묵적으로나마) 동의해 온 관행과 결별하는 것”(기후정의, 2022)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탈성장과 좋은 삶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하는데요, 저는 이 주장에 동의하고 나아가 좋은 삶에 대한 더 구체적이고 풍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좋은 삶과 그것을 가능케 할 공동의 토대에 대한 논의가 현실적으로 발전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선택지를 만들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런 점에서 국가의 관리대상으로서의 고령(인구)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벗어날 필요도 있다고 봅니다. 농촌에서는 일흔 살도 청년이라는 말은 고령화의 그늘을 묘사하는 부정적인 말로 사용되지만 달리 보면 여전히 마을의 주체라는 점도 뜻합니다. ‘고령=무기력, 복지수혜층의 도식은 다분히 국가 중심적인 시각이고, 다양성은 각자의 쓸모를 찾아가는 사회를 요구합니다. 국가가 미래를 담보로 현재의 희생을 요구한다면 지역은 현재의 행복을 바탕으로 미래의 가능성을 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인구감소보다 1인가구의 증가가 사회시스템에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봅니다. 서울시의 경우 1인 가구 비율이 200016.3%였다면 202034.9%로 증가했습니다. 2050년이 되면 고령 1인가구의 비율이 41.1%를 차지할 것이란 전망도 나오고 있습니다. 지금의 주거형태와 공공서비스체계는 1인 가구가 절반을 차지하는 시대에 적응될 수 있을까요?

그런 적응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등장할 것이 권력화된 통제장치로서의 기술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승일은 물리적인 환경만이 아니라 개인의 정신적인 능력과 활동까지 관리하는 이중관리사회에 저항하려면 현재의 우리가 어떤 합리성의 원칙으로, 어떤 메커니즘과 프로세스를 통해, 어떻게 통치되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 필요가 있다”(기계, 권력, 사회, 2021)고 봅니다. 기술과잉의 반대는 기술을 쓰지 않는 사회가 아니라 과잉의 이유와 방향을 통제하고 기술의 다양성을 보장하는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제임스 스콧은 메티스라는 개념을 통해 변화하는 상황에 부단한 적응을 요구하는, 비슷하지만 똑같지 않은 과업을 오랫동안 수행할 때에만 얻어지는 지식”, “지역적이고도 상황적인 지식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국가처럼 보기, 2010). 이런 메티스가 활성화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메티스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중요성을 약화시켰던 반대의 지식, 강력하고 찬란한 진보를 확신했던 하이 모더니즘을 이해하고 해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크게 세 가지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상징과 의식을 통한 공통감각의 회복   정치의 불씨 살리기   정답 없음의 인정을 통한 대안의 다양화
   

 

첫째, 포획된 가치/언어의 탈환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상징과 의식(儀式)’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지역이 집중해야 할 영역이 이 부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곳이 어떤 장소라는 것에 대한 논의는 있지만 그 장소를 통해그 가치와 언어를 체화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상징과 의식이 중요합니다. 사회가 유지되려면 기본적인 공통감각이 필요한데 그 감각을 회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상징과 의식을 거쳐야 할까요? 그 장소에 도달하기까지 서로를 알아볼 수 있고 신뢰할 수 있는 의식은 무엇일까요? 장소가 정체성과 공통감각을 체화시킬 수 있는 의식은 무엇일까요? 김광석은 인간 신체에 체화된 한 사회의 기술 정서”(포스트디지털, 2021)기술감각이라 부릅니다. 물리적으로 확장된 지역의 공간에서 기술은 관계밀도를 높이는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둘째, 관료주의를 깨뜨릴 비판의 무기들을 벼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관료주의는 도구적 합리성과 목표달성을 위한 공학적 접근, 권위주의적인 선택적 자원동원, ()정치성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메티스는 관료주의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까요? ‘생활세계의 식민화라는 개념을 굳이 얘기하지 않더라도 이미 시민사회의 많은 부분이 관료화되었다는 점에 동의할 사람이 많다고 봅니다. 관료주의를 통제할 정치는 전혀 작동하지 않고 있습니다. 역설이지만 그래서 더욱더 정치의 불씨를 살리는 과정이 중요하고 필요하다고 봅니다. 비합리적인 것을 선택하거나 목표를 포기할 결단, 느리고 수다스러운 공론장, 민주적인 자원배분과 재조직 등이 정치의 역할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치제도만이 아니라 정치문화의 변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과정에서 지역은 어떤 역할을 맡을 수 있을까요? 예를 들면, 지역정당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가능하기 위한 조건과 변화의 지점들을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셋째, 획일화/서열화에서 벗어나 각각의 고유한 존재를 인정해야 할 뿐 아니라 기록 이후의 존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록을 통해 재현된 존재는 정지된 물체가 아니고, 지역 역시 재현을 통해 계속 변화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변화가 어디로 향할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지역학은 답을 내놓을 수 있을까요? 지역은 답일까요? 그렇지만 존재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명은 꿈틀거릴 수밖에 없고, 모든 존재는 생로병사의 과정을 밟는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것이 부패할 수 있고 부패한 것에서 좋은 것이 생성될 수 있습니다. 작년에 함께 번역했던 심층적응(착한책가게, 2022)이라는 책에서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부분은 붕괴는 피할 수 없다, 길을 찾는 지도는 없다는 점을 받아들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생성하고 사라지고 부패하는 대안의 다양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시대에는 기술감각의 조절과 생태감각의 회복이 기후위기와 기술과잉, 초고령화 대응에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답을 내려놓아야 질문이 좀 더 분명하게 인식되고 더 풍부하게 논의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게는 답이 없습니다. 고맙습니다.

이후연구소가 이번 7월부터 1인 체제에서 2인 체제로 전환합니다. 기존의 하승우 소장과 함께 할 분은 녹색당과 안동청년공감네트워크에서 활동했던 김범일 님입니다. 앞으로 부소장 직을 맡아 하승우와 함께 이후연구소를 운영하실 겁니다. 2017년부터 서로 알던 사이이고 같이 몇 번 사업을 진행해본 사이라 케미가 좋으리라 예상합니다.

 

새로운 사람이 왔으니 그만큼 이후연구소가 맡을 일도 늘어납니다. 지금까지는 하승우의 개인적인 판단에 따라 회원들과 소통했고 활동도 최소화시켜 왔지만 이제는 이후연구소의 기획사업들이 준비될 예정입니다. 회원들도 더 많이 모아 연구소의 재정도 강화시켜야 하고, 부소장이 앞으로 한국사회에서 맡아야 할 역할이 있으니까요. 그동안은 하승우 개인 중심의 작업이었다면 이제 이후연구소라는 단체의 활동으로 무게중심이 이동될 예정입니다. 그리고 이제 회원들과의 소통도 더 정례화될 예정입니다.

 

이후연구소의 대표 사업은 사회변화에 필요한 컨텐츠를 생산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동안은 글이 편한 하승우가 책을 내는 형태로 진행해 왔는데요, 김범일 부소장의 결합으로 이제 팟캐스트와 유튜브를 겸하려 합니다. 김범일 부소장은 말에 능한 사람인데요, 전직 전도사라는 개인 경험을 반영한 컨텐츠를 제작하고 중요한 지적 흐름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을 예정입니다. 김범일 부소장의 다양한 컨텐츠를 기대해 주시구요.

 

그렇다고 김범일 부소장이 글을 안 쓸 것은 아니구요. 내년 상반기를 목표로 하승우와 청()년 정치참여 활성화를 위한 매뉴얼을 작성해서 책으로 낼 예정입니다. 하승우가 그동안 쌓아온 경험을 김범일의 경험과 인도로 정리해볼 생각입니다. 책이지만 책 이상의 역할을 할 텍스트로 만들 예정입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질문하는 형태로 개인적인 고민과 사회적인 고민을 엮는 글을 한 주에 한 편씩 써서 회원들에게 공개할 예정입니다.

 

이후연구소의 주요한 또 다른 사업은 함께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독서모임, 공부모임을 해오다 코로나19 때문에 좀 뜸해졌는데요, 두 개의 큰 줄기로 모임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하나는 하승우가 진행하는 정치학 강의입니다. 대학에서 진행되는 정치학원론을 좀 더 현실적이고 한국적인 고민으로 재정리해서 진행할 예정입니다. 좀 긴 호흡으로 진행되는 강의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다른 하나는 하승우와 김범일이 함께 진행하는 정당과 민주주의공부모임입니다. 이 모임은 정당과 민주주의와 관련된 책을 함께 읽고 서로 고민을 나누는 모임입니다. 강의와 공부모임은 좀 더 정리해서 가을에 공개하겠습니다.

 

옥천의 고래실이나 다른 단체들과 제휴해서 진행하는 특강들은 계속 비정기적으로 진행될 예정입니다. 하승우와 김범일은 정치에 관한 토론을 활성화시키는데 관심이 있습니다. 이와 관련된 기획도 내년 정도에 다양한 기획으로 담아내 보겠습니다.

 

, 그러니 이후연구소의 회원이 되시면 다양한 혜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 1회에 공개되는 하승우와 김범일의 대화 경계의 기록을 빨리 보실 수 있구요,

팟캐스트와 유뷰트로 제작될 컨텐츠도 미리 감상하실 수 있구요,

이후연구소에서 발간되는 책 1권을 받으실 수 있구요,

이후연구소에서 진행되는 강의와 공부모임에 무료 또는 비회원보다 낮은 가격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 이후연구소 회원가입은 https://docs.google.com/forms/d/e/1FAIpQLSfNmvmpatYr2Vh-dGJCrQBSNowFTkGRxH7tz4On3iCblkVs1A/viewform?fbclid=IwAR3OwYicuL913t0EakwLjEDb-GN_3VlmPDRf-VteSctzpM7PNyceVICxIXk

이후연구소 관련 문의는 hereandnowlab@gmail.com 으로 해주세요.

 

함께 할 회원들을 기다립니다.

 

2022711

이후연구소 하승우, 김범일

<녹색평론>을 처음 접한 건 창간 이후 몇 달 지나지 않아서였다. 당시 프리조프 카프라의 신과학운동이나 한살림선언을 먼저 접했기에 <녹색평론>의 문제의식은 낯설지 않았다. 1989년 현실 사회주의권의 붕괴, 1991년의 소위 분신정국을 거치며 나는 뭔가 다른, 조금 더 근본적인 대안을 찾고 싶었다. 그러면서 <녹색평론>을 찾아 읽게 되었고, 1993년도엔 실리지 않았지만 당시 학생운동 내의 반(反)생명 분위기를 성토(?)하는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대학원을 가고, 군대를 다녀오면서 <녹색평론>을 볼 기회는 줄어들었지만 생태계의 위기와 진보역사관의 한계를 인식해야 한다는 고민은 이어졌다.

그 뒤로도 가끔 <녹색평론>을 뒤적이긴 했지만 독자로서만이 아니라 필자로 참여하게 된 건 2007년 이후였다. 당시 오창은, 이명원씨와 함께 <지행네트워크>라는 단체를 만들 때 김종철 선생을 처음 만났다. 교보문고 근처에서 밥을 먹으며 막걸리를 마셨고, 선생은 다른 지원 없이 각자의 돈을 모아 단체를 만드는 걸 무척 반기셨다. 하고 싶은 거 맘껏 해봐라, 내가 가끔 밥은 사줄게. 그렇게 본격적인 인연이 시작되었다. 그것이 김밥모임(김종철 선생과 밥을 먹는 모임)의 시작이었고, 각자가 초대한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밥도 먹고 막걸리를 마셨다.

 

밥을 먹는다()는 것의 의미

 

한국에서 식구(食口)의 의미는 이중적이다. 끼리끼리 모여 이해관계를 나누며 먹는 밥이 짬짜미라면, 사람들과 어울려 토론하고 대안을 모색하며 나누는 밥은 대동미이다. 자신감은 홀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서로 북돋우는 것이고, 밥을 나누는 건 그 자신감에 든든함을 더한다. 혼밥이 일상화된 사회에서 밥모임은 어지러운 세상을 함께 견디게 한다.

매일의 일상이지만 먹는다는 행위만큼 이 세계의 질서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일은 없다. 김종철 선생은 녹색평론에 실린 마지막 글에서도 먹음에 관해 이야기했다. 평소에도 선생은 해월 최시형 선생에 관해 자주 이야기를 했고, 이번 글에서도 이천식천(以天食天)’을 언급했다. “이 세상의 뭇 생명체들이 모두 자신을 희생하여 다른 생물들의 먹이가 되고 자기도 다른 생물들이 공여하는 먹이를 먹고 생을 누림으로써, 그런 순환적 증여의 질서 속에서 삼라만상이 존재하고 있는 근본이치를 말씀하셨다. 여기에도 밥은 결코 누구 혼자의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생명들의 공희(供犧)의 산물이라는 것, 그러기에 밥을 먹는 행위야말로 가장 뜻깊은 공생공락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어 있다.”(김종철, <코로나 시즌, 12개의 단상>, 녹색평론20207~9월호, 178.) 순환적 증여의 질서, 이것이야말로 밥의 질서이다.

좀비처럼 자기 식욕만 남은 존재가 아니라면, 뭇 생명들은 다른 생명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고 또 그러면서 자신을 돌보기 위해 밥을 먹는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의 위기는 이런 순환적 증여의 고리가 끊어지고 일방적인 먹이사슬이 만들어진 것과 무관하지 않다.

<녹색평론>에 실린 글들이 강조하던 소농을 농업에 대한 강조로 받아들여진다면, 그건 의미를 단편적으로 만드는 해석이다. 농업은 단순히 먹거리를 생산하는 산업이 아니라 순환질서를 유지시키는 토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소농 중심의 사회는 순환이 기본질서인 사회이자 그 질서를 무너뜨리려는 힘에 맞설 수 있는 사회이다. 따로 떨어진 개별 농가의 질서가 아니라 자급력을 갖춘 소농들이 사회의 기반을 이루고 자치를 행사하는 사회이다. 김종철 선생은 이런 자치와 자급의 힘이 만들어져야 순환적 증여의 질서도 회복, 유지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순환의 질서가 농업에만 적용되는 것도 아니다. 내가 가진 건 순간이고 자연으로 돌아가고 순환될 거라 생각하면 부의 독점이나 상속도 덧없는 일이 된다. 반면에 순환이 아니라 축적과 독점이 상식을 차지하면 부패는 자연스럽고, 약자의 처지는 갈수록 나빠진다. 선생에게 기본소득은 순환의 질서를 다시 세우기 위한 방편이었다.

성장 중심의 산업사회에서 소농에 관한 이야기는 비현실적으로 들렸지만 지금 우리는 더 이상 경제성장이 불가능한 시대를 살고 있다. 그레타 툰베리가 경고하는 기후위기는 가장 구체적으로는 식량위기로, 그로 인한 갈등(전쟁)으로 경험될 것이다. 지금이야 버튼만 누르고 클릭만 하면 먹거리를 배송시키거나 음식을 사먹을 수 있지만 가뭄, 홍수 등 자연재해가 늘어나고 작물 재배지가 줄어들면 식량난이 심각해질 것이다. 그리고 이미 소득 상위층과 하위층의 장바구니는 유기농과 패스트푸드로 양분되고 있고, 이런 먹거리불평등은 건강불평등으로 이어진다. 성장이 아니라 생존이 화두인 사회에서 소농은 순환의 고리를 다시 이으려는 노력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의 만남을 막고 밥을 나눠 먹는 걸 금지하는 코비드19는 각자 알아서 살아남으라는 신자유주의를 대변하는 바이러스이다. 그런데 우리가 흩어지면 흩어질수록 약육강식, 각자도생의 질서는 강화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시대에 밥을 같이 먹는 모임이야말로 가장 급진적인 모임이다. 그 급진적인 시간을 함께 보냈기에 든든했고, 이제 그 기반을 나누는 것이 산자의 과제라고 생각한다.

 

()를 생각하며

 

김종철 선생이 끝까지 놓치지 않았던 화두는 근대의 본질이라 생각한다. 앞서 언급한 마지막 글에서도 선생은 슬픈 미나마타를 쓴 일본 작가 이시무레 미치코를 언급하며 근대를 돌아본다. 그리고 단상의 마무리는 장일순 선생에 대한 이야기로 끝난다. 잘남을 겨누며 이름을 날리려는 것이 근대의 허명이라면, 장일순 선생은 바닥을 기어라고 했고 세상 사람들 앞에 감히 나서지 않는다(不散爲天下先)”라는 노자의 구절을 즐겨 인용했다. 김종철 선생은 이를 비폭력주의 행동의 원칙으로 해석하며 이 세상의 모든 목숨붙이들이 평화롭게 공존하고 저마다의 타고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하려면, 무엇보다 우리 각자가 자기중심적 배타적 권력욕망에서 벗어나서 스스로 가난해지기를 자발적으로 선택해야 한다는 얘기라고 풀이했다(김종철. <나락 한알 속의 우주>, 무위당을 기리는 모임 엮음,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녹색평론사, 2004), 71.). 성장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과잉이 아니라 검소이다.

개화기의 최시형 선생이 동학을 통해 비근대의 길을 열려 했다면, 장일순 선생은 소위 원주캠프를 통해 비중심, 비국가의 사유를 설파했다. 김종철 선생은 이 사상계보를 이은 사람이고 근대의 문제를 치유하기 위한 비근대적 삶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마지막 책인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녹색평론사, 2019)는 그런 주장을 빼곡히 담고 있다.

그런데 그런 전환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까? 19891028일 한살림모임 창립기념식에서 장일순 선생은 ()에 관하여란 강연을 했다. “시는 무위이화(無爲而化)라는 최시형 선생의 말을 인용하여 살아 있는 것에 대한 존경의 문화로 돌아가야, 생명을 모시는 경제로 돌아가야 본원적인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말했다(한살림이 그런 모심의 생활태도와 관계를 키워가는 틀이 되기를 원했다)(장일순 지음, 나락 한 알 속의 우주(녹색평론사, 1997), 70.).

이 시의 세계관은 자기 밖의 객체를 이용의 대상으로 보는 근대적 세계관을 거부한다. 그리고 동일한 이원론에 기초한 객체를 변화시켜야 나를 바꿀 수 있다는 생각 역시 거부한다. <녹색평론>에 실렸던 다양한 글들은 이런 세계관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었고, 김종철 선생은 복지국가가 아니라 복지사회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가의 힘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그런 방식만으론 시의 태도와 관계를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시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외려 성장을 반대하고 개발을 막으려면 그것을 따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힘을 하지 않는 것에 써야 한다. 권력을 잡아 한방에 세상을 바꾸려는 게 아니라면 일상에서 전환의 기반을 닦는 일에 더 많은 힘을 써야 한다. 어떻게 보면 시는 존중과 기다림을 통해 더 많은 힘을 끌어내는 방법, 특별한 능력이 아니라 이미 가진 힘을 끌어내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요즘은 환대라는 말이 주로 쓰이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말은 모심이라 생각한다. 시천주(侍天主)라는 말처럼 모심은 하늘과 땅, 돌이나 풀, 벌레까지 모두가 한울님을 모시지 않은 것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게 모시려면 먼저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그건 인간의 근본 한계를 자각하고, 자신의 욕망을 조절할 줄 아는 정신적 능력”(126)을 기르는 것이기도 하고 나아가 남들과 더불어서 소박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겠다는소국사상(小國思想)이기도 하다(김종철,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녹색평론사, 2019년), 126, 143쪽.). 김종철 선생은 물질적 빈곤보다 사상적 빈곤을 채우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더 필요한 과제라고 주장했다.

지금 우리는 이 과제를 잘 풀고 있을까? ‘녹색’, ‘그린’, ‘인권마저도 더욱더 성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야기하는 사회라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그런 점에서 김종철 선생이 채우던 자리의 공백도 더 크게 느껴진다. 그렇지만 가던 길을 계속 가는 것 외엔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다. “죽은 것처럼 보이는 나무일망정 우리가 인내심을 가지고 일념으로 물을 길어 붓기를 계속한다면 언젠가는 그 마른 나뭇가지에 푸른 싹이 돋아나는 기적을 보는 행운이 우리에게도 찾아올지 누가 알겠는가.”(앞의 책, 9.) 밥을 먹던 식객이자 다른 세상을 함께 꿈꿨던 동지로서 선생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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