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승우(땡땡책협동조합 땡초)


“그게 정말 대안이야?”, “본질적인 해결책이 맞아?”, 어떤 문제에 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흔히 받게 되는 질문이다. 그런데 이 질문이 나오는 순간부터는 토론이 어렵다. 합리성이 아니라 근본적인 믿음의 문제로 토론이 전환되기 때문이다. 근본과 본질이 중요하다는 점은 알지만 무엇이 근본이고 본질인가에 관한 생각은 모호해서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더구나 질문은 답을 찾기 위한 것인데, 보통 이런 질문들은 말문을 막는다. 말을 할 수 없으니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행동은 늦춰지고 대안은 아닐지라도 디딤돌이 될 수 있는 방법들은 바다에 떠보지도 못한 채 좌초한다. 그러면서 “야, 그거 예전에 해봤는데 안 돼!”라는, 선배라 불리고 싶은 사람들의 흐릿한 기억들이 후배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의 새로운 시도조차 가로막는다. 대안을 찾으려는 시도는 어느새 진부한 논리싸움으로 전락한다.

 

물론 이런 전락이 그런 물음을 던지는 개인들의 탓만은 아니다. 권력이 일상을 억압하고 자본이 노골적으로 착취하는 한국사회는 자꾸 이런 본질적인 질문들을 던지게 만든다. 제정신이라면 단 하루도 분노하지 않고선 살기 어렵게 만드는 현실은 다양한 혁명들이 있음에도 ‘단 하나의 혁명’, 모든 것을 한순간에 뒤바꿀 수 있는 혁명만을 상상할 것을, 아니면 그냥 냉소할 것을 강요한다. 단단하게 가로막고 선 현실의 벽은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라는 어쩌면 호연지기일 수도 있는 자세를 가학적인 희망고문으로 만들기도 한다. 벽을 피해 우회하다 보면 맞닥뜨리는 건 변화보다 우리가 이 일을 왜 시작하게 되었을까라는 ‘초심’이다. ‘열심히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정말 열심히 하는’데, 기우뚱한 현실에서는 한순간 삐끗하면 동지(同志)들의 반대편에 서게 된다.

 

 

이러니 사는 게 어렵고 피곤하다. 피로도를 따지면 한국이 세계 최강 아닐까. 그리고 대안을 찾는 사람들일수록 더 피곤하다. 피곤해도 언젠가 낙이 온다고 믿을 만하면 기다리기라도 할 텐데, 그런 전망은 보이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본질적인 질문과 피로에 지친 사람들의 갈증을 풀어줄 시원한 책 한권이 나왔으니, JK깁슨-그레엄의 『그따위 자본주의는 벌써 끝났다』(알트, 2013년)가 그것이다.

 

먼저 고백하자면 나는 그동안 여성주의를 추상적으로 인식했다.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실용적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여성주의가 다른 학문체계를 자극하고 무너뜨릴 주요한 방법일 거라 생각만 했지 그것이 실제로 어떻게 가능할지를 구체적으로 고민한 적이 없다. 민주주의 이론을 뒤흔들 방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하나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다양한 민주주의들이 있다고 주장했지만, 그걸 구체적인 일상에 적용하지 못했다. 그런 무능함은 나 역시 기존의 관행에 길들여져 있음을 알려준다. 따라서 여러 ‘중심주의’에 대한 깁슨-그레엄의 비판은 내 정신을 번쩍 들게 해줬다(책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함께 읽고 토론하며 공동의 이름으로 책을 쓰는 작업을 남성들이 과연 할 수 있을까, 이런 상념에 빠지기도 했다).

 

솔직히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많은 민주주의‘들’이 있음은 생각했지만 자본주의‘들’이 있다는 생각에는 미치지 못했다. 풀뿌리운동이나 협동조합운동이 우리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꿀 대안이라고 믿지만, 중앙집권형 국가와 재벌 중심 경제의 결탁이라는 강력한 장벽을 넘어서려면 일단은 힘을 더 길러야 한다고 믿어왔다. 단단한 벽이니 우리도 더 단단해질 수 있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언제쯤이면 우리의 단단함이 저 벽을 뚫을 수 있을까? 매일 들리는 소식은 나조차도 가능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1. 자본주의 앞에서 쫄지마!


깁슨-그레엄도 아마 나와 비슷한 경험, 비슷한 고민을 많이 했고 어떤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다양한 경제diverse economy’라는 이름으로 깁슨-그레엄은 “자본주의 경제의 자연화된 지배를 무장해제하고 탈구시키며, 새로운 경제적 생성들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내”자고 제안한다(15쪽).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시대에 그것이 가능하겠냐고? 깁슨-그레엄은 자본주의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생각이야말로 “유기체적 사회 개념, 영웅적인 역사의 서사, 진화론적 사회발전의 시나리오, 본질주의적 남근중심적 이원적 사고 패턴의 복합적 산물”(74쪽)이라고 비판한다.

 

시장과 비시장, 자본주의와 비자본주의라는 이분법을 피해 그 내부의 다양한 균열들을 접하고 보고 관계를 맺어 가면 대안은 도래할 미래의 것이 아니라 이미 실현되는 중인 가능성이다. “자본주의와 비자본주의의 관계를 위계적으로 설정하는 방식은 경제적 차이를 이론화하고, 자본주의 헤게모니 담론을 경제적 복수성과 이질성으로 보완할 가능성에 덫을 놓는다. 이 가능성을 해방시키는 것이 바로 이 책의 중요한 목표인 반본질주의 기획”이다(82쪽). 이 책은 본질적인 해결책을 찾는 것보다 이런 가능성에 주목하는 것이 좌파의 전략이라고 강조한다.

 

이런 주장이 깁슨-그레엄만의 생각은 아니다. 그동안 균열을 찾아내려는 많은 시도들이 있어왔다. 그 중에서 깁슨-그레엄은 중층결정에 바탕을 둔 포스트모던 맑스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적 여성주의 전략을 강조한다. 이 전략은 기존의 이론구조에 강한 충격을 준다. 여성주의자들이 남성과 여성이라는 젠더관계를 재구성하려는 것은 개념에 이미 내포되어 있는 위계질서를 깨기 위해서이다. 남성과 대비되는 여성은 이미 그 자체가 어떤 틀에 갇혀 있다. 마찬가지로 깁슨-그레엄은 자본주의와 대비되는 비자본주의라는 구도를 거부한다. 말로는 쉬운데, 참 쉽지 않은 주장이다(이 주장의 오류가 아니라 곤혹스러움에 관해서는 뒤에서 다룬다). 깁슨-그레엄은 이런 위계 때문에 “비자본주의는 이질성과 차이의 다양한 영역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헤게모니 담론에 포섭되는 것으로 재현”되고 자본주의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고 본다. 마치 “여성이 남성의 대립물이나 보완물이 아니라 특수성의 집합으로 인식되려면 남성 또한 특수성의 집합이 되어야” 하듯이, 자본주의도 그 자체로 통일되거나 완결된 틀이 아니라 특수한 것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이렇게 자본주의를 특수한 것들의 공존으로 이해하는 순간, 비자본주의도 “긍정적이고 특수한 존재로 이해할 조건”이 마련된다(85쪽). 특히 깁슨-그레엄은 자본주의 경제가 없는 것처럼 말했던 가정경제를 끌어들임으로써 경제를 재구성한다. 즉 “가정경제의 다양성과 착취에 대한 강조는 가정 이외의 분야에서의 계급다양성을 이론화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열어준다.”(212쪽) 또한 깁슨-그레엄은 알튀세르에게 영향을 받은 중층결정이라는 렌즈로 보면 자본주의 각각이 환원불가능한 특수성을 드러낸다고 본다. 이렇게 “대문자 자본주의가 자본주의적 차이들에게 길을 양보할 때, 비자본주의적 타자는 단수성과 종속에서 해방되어 차별화된 다중성으로 드러날 잠재력을 지닌다.”(88쪽)

 

요즘 내 고민 중 하나는 우리의 일상적인 삶과 체념이 이 빌어먹을 사회를 지속시킨다는 점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자본주의의 착취와 영향력이지 대안이 아니다. 자본주의로부터의 탈출불가능을 얘기하는 순간, 자본주의는 자가발전하는 시스템이 되고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절대적으로 것으로 변한다. 그러면서 “지배하는 쪽은 독립적인 것”이 되고, “자신의 존재를 위해 자신의 타자에 의존해야 한다는 사실이 망각”된다. “반면 종속되는 쪽은 상대방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 되고 “지배하는 쪽과 달리 지배당하는 쪽은 항상 부정적으로 규정된다”(193쪽) 이런 인식틀을 깨지 않으면 현실에 순응하거나 체념하게 된다. 그래서인이 깁슨-그레엄은 파격적으로 마커스의 강간 스크립트 분석을 자본주의에 적용한다.

슬럿워크가 성폭력에 관한 고정관념에 도전하듯이, 마커스는 여성이 강간의 희생자라는 인식에 도전한다. “지배적인 강간 스크립트에 도전하기 위해 마커스는 상당히 다른 두 개의 행동 경로를 제시한다. 하나는 스크립트 자체를 내부로부터 변화시키는 것, 즉 희생자 역할을 거부함으로써 스크립트의 전형성에 도전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강간 스크립트에 각인된 섹슈얼리티 담론과 거기에서 도출되는 합법성과 자연스러움에 도전하는 것이다. 두 방법 모두 지구화에 대한 대안적 대응을 고려할 때도 도움이 된다.”(222쪽) 초국적 자본에 짓밟히는 불쌍한 노동자라는 서술에서, 자본이 노동을 착취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고 노동은 자본에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는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여성이 남근을 비틀고 고환을 걷어찰 수 있듯이, 노동자도 자본가에 맞설 수 있고 때로는 새로운 형태의 노동관계, 비자본주의 기업을 만들 수도 있다. 이렇게 마음을 먹어야 ‘삼성이 한국을 떠나면 어떡할까’라는 걱정보다 ‘어차피 삼성은 한국을 떠나지 못하니 그들을 제대로 바꾸자’라는 투지가 생긴다. 모든 악의 근원인 ‘신자유주의’는 우리가 만든 환상이다. ‘지구화의 희생양’이라는 도식을 버려야 비자본주의의 투기가 살아날 수 있다. 깁슨-그레엄은 “지구화의 각인들 중에서 다양한 과잉의 지점들을―즉 그러한 각인이 통제불가능한 것 혹은 확정불가능한 것으로 보이는 곳들, 혹은 비자본주의적 정체성이 새겨질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지는 곳들을― 부각시킴으로써, 우리는 지구화에서 남성의 생식기나 남근의 속성을 약화시키고자 시도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247쪽).

 

이렇듯 파격적인 주장을 일삼지만 이 책은 어떤 분명한 답도 제시하지 않는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제시하지 못한다. 무엇을 규정하고 경계 지움으로써 그 속에 포함되지 않는 다양한 시도들을 말살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깁슨-그레엄의 공동체 경제를 어떤 특정한 것으로 규정하는 순간 그 속에 포함되지 못하는 시도들은 다른 시도를 가로막는 장벽으로 변할 수 있다. “사회와 경제의 재현들 그 자체가 하나의 탈중심적이고 무정형인 실재에 중심을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탈 중심의 실재 그 자체가 항상 서로 상이하니까, 또 항상 변화하는 외부가 이들에게 변화무쌍하고 모순적인 정체성을 부여하고 이들을 중층결정하니까 말이다.”(121쪽) 그러니 대안을 논하는 것이 다른 중심을 만들 필요는 없다.

 

이 책은 어떤 해답을 제공하는 것보다 “자본주의와 비자본주의 경제 현존 양측 모두에서 나타나는 이질공간heterospace을 해방시키려는 시도”(75쪽)이다. 이런 시도는 모든 형태의 착취를 한번에 없애겠다고 주장하지 않고 착취를 낳는 상황을 분석하고 그런 착취를 변화시킬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나 조건을, 다양한 주체들이 접합될 수 있는 과정을 찾으려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가령 이런 질문들이다. “으레 좌절된 자의 처지라고 여겨지곤 하는 반자본주의 주체의 부정적 이미지를 털어내기 위해 우리는 어떤 생각과 정서를, 어떤 기질과 태도를 지녀야 하며, 어떤 힘들을 길러내야 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우리는 단순한 자본주의의 적대자를 넘어 ‘비자본주의’를 욕망하고 빚어낼 주체로 우뚝 설 수 있을까?”(22쪽)

 

깁슨-그레엄은 자본주의 헤게모니, 자본중심주의, 본질, 대문자 자본주의, 남근성을 전복시키려면 세 가지의 정치가 필요하다고 본다. “언어의 정치: 경제와 경제적 가능성에 대해 참신하고 풍부한 그 지방만의 언어들을 만들어 내기”, “주체의 정치: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비자본주의적 발전의 주체로 육성하기”, “집단행동의 정치: 대안적인 경제조직과 공간들이 특정 장소에 싹틀 수 있도록 공동 협력하기”(12쪽). 이런 정치를 통해 이미 그 끝을 드러내고 있는 자본주의의 민낯이 드러난다.


2. 한국 사회의 특이성은?


사실 한국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비자본주의적 경제실천들이 있었으나, 한국 자본주의 전체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거나 그 영향이 미미하다는 이유로 무시되어 왔다. 그렇게 평가할 수는 있지만 이미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을 경제가 아니라고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 점에서 깁슨-그래함의 관점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편견을 부수는데 효과적이다. 아니, 강력하다.

 

다만 그 관점을 우리 것으로 만드는 과정에는 여러 가지 경험들이 더 첨부되어야 할 것 같다. 이 책에서 깁슨-그레엄이 많이 거론하지 않는 건 국가이다. 한국의 역사를 반영하면 ‘그냥’ 국가나 근대국가가 아니라 식민지국가, 반공국가, 개발독재국가이다. 한국 자본주의‘들’의 발전을 가로막은 것은 바로 재벌을 뒷받침한 국가, 재벌과 결탁한 국가이기도 하다. 물론 깁슨-그레엄의 관점에 따른다면, 국가도 다양한 통치형태‘들’로 분해될 수 있다. 하지만 주체들이 어떻게든 시작할 수 있는 자본주의와 달리, 한국의 국가영역은 의지하는 주체가 진입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국가의 경계를 넘나들기도 어렵고 국가에 진입할 수 있는 주체는 제한된다. 이는 다양성을 억압하고 중심성을 강요한다. 그리고 김용철의 『삼성을 생각한다』(사회평론, 2010년)에 나오듯, 정부와 재벌은 ‘유착’이라는 말로 설명될 수 있는 단계를 이미 넘어서 ‘합병’의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 이명박과 정몽준이 그 단계를 현실화시켰고 나오미 클라인은 이를 ‘재난 자본주의’라 부르기도 했다. 이런 국가를 고려하지 않으면 깁슨-그레엄이 말하는 정치의 가능성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것은 주체적인 역량이나 전략의 부재보다 주체의 등장 가능성 자체를 철저히 말살하는 구조적인 문제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현실은 녹녹치가 않다.

 

이런 현실적인 어려움은 비자본주의의 다양한 가능성들을 논하는 곳에서도 드러난다. 예를 들어, 금융회사를 논하는 부분에서 깁슨-그레엄은 “어떤 회사는 독립적 상품생산의 현장으로서 비자본주의적 성격”을 가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원주의 ‘밝음신협’같은 곳을 생각하면 그렇기도 하다. 따라서 모든 금융회사를 자본주의적이라고 부를 수 없기는 하다. 그렇지만 역으로 농협이나 수협, 축협같은 관제 협동조합이 존재하는 현실을 고려한다면, 특히나 이런 협동조합들이 “잉여노동을 집단적으로 생산하고 전유”하며 “생산관계에서의 이러한 차이들”을 낳지 않는다(90쪽)는 점을 고려한다면, 깁슨-그레엄의 관점이 조금 더 복잡해진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현실은 더욱더 복잡해진다.

 

이런 복잡함은 자영업에 대한 관점에도 적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깁슨-그레엄은 “라우즈는 미국 내 도시의 서비스산업에 종사하는 멕시코계 이주노동자들이 어떻게 임금노동자로서의 삶을 살아내면서 동시에 멕시코에서 소규모 가족농장이나 상점 운영과 같은 구분되는 삶의 형태를 유지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미국에서 임금으로 벌어들인 돈이 생산 투자금으로 흡수되어 멕시코 경제 안의 비자본주의적 활동에 투자되는 것이다.…이 경우는 감염의 메타포를 통해 만들어지는 생산적 불일치의 놀라운 사례이다”(242쪽)라고 주장한다. 알다시피 한국은 자영업의 비중이 매우 높은 나라이다. 그렇다면 이런 자영업의 활성화가 한국 자본주의 내에 다양한 틈을 만들어왔는가, 라고 질문하면 그렇지 않다는 답을 얻을 수 있다.

 

그건 우리 삶의 거대한 힘들이 재벌들로 흡수되고 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정녕 한국의 자영업들이 비자본주의적인 경로를 만들고 있나? <알바연대>가 조사해서 발표하는 사례들을 보면, 많은 자영업자들이 ‘노동력의 판매’와 ‘인격의 판매’를 혼동하며 자본주의를 넘어선 착취논리에 젖어 있다. 이는 자본주의 고용과 착취에 대한 긍정적인 대안을 한국의 자영업이 자임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자영업자들이 영세 자영업자에 머물고 있고, 프랜차이즈에 종속된 자영업 노동자로 변하고 있다는 점은 그 가능성을 자신할 수 없게 한다.

 

또한 공정무역은 ‘원조가 아니라 무역’을 주장했지만 사실상 원조의 색깔을 벗어나지 못했고, 우리사주조합이 노동자의 개별화를 부추기며, 소액주주운동이 주주자본주의를 강화시키며,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이 비자본주의를 확장시키기는커녕 정부에 포획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작년 11월 깁슨의 한국 방문에서도 이 의문은 속 시원하게 풀리지 않았다.

 

아울러 깁슨-그레엄의 관점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은 농사이다. 굉장히 많은 경제들이 있을 수 있지만 살림살이의 기본은 먹는 것이다. 농업은 단지 산업의 문제로, 특히 1차 산업의 문제로 생각할 수 없고 그것이 대안경제의 핵심이라 얘기할 수 있다. 그래서 미즈와 벤홀트-톰젠은 『자급의 삶은 가능한가』(도서출판 동연, 2013년)에서 명확하게 소농경제가 자급경제의 기초라고 주장하면서 “자급을 위한 생산수단인 땅에 대한 접근을 기초로 하는, 상향식의 상호관계를 통해 조직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당연히 이런 어려움들이 깁슨-그레엄의 관점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건 아니다. 이 관점은 본질과 중심의 논리에 빠져 사람과 삶을 보지 못하는 이론, 도플갱어식 논리에 빠져 있는 이론을 극복하게 한다. 다만 이 관점을 한국 현실에 뿌리내리게 하려면 현장 활동가들과 이론가들이 마주 앉아 차분히 방법을 찾는 과정이 필요할 것 같다. 한국의 특이성을 찾고 다시 이론을 가공하는 그런 과정에서 어쩌면 우리는 정말 그 끝을 드러내고 있는 자본주의를 맞닥뜨릴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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