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세계일보>에 썼던 글을 파일 정리하다 우연히 찾았다.
2003년에 쓴 글인데 별로 바뀐 게 없다.
참 우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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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대학에 관해 좋은 얘기를 듣기 어렵다. 학문의 전당이라 불렸던 대학은 입시부정, 임용비리, 회계비리 같은 부정을 키우는 곳이자 이공계 위기, 인문학 위기 등 위기를 낳는 모태로 변했다. 게다가 성폭력, 엄격한 도제관계, 시간강사에 대한 부당한 대우와 착취 등 폭력과 억압을 조장하는 모습까지 보이고 있다.


왜 학문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런 모습이 나타나는 걸까? 그 답은 이미 전 국민이 알고 있다. 바로 시선과 관심을 막으며 대학을 빙 둘러싸고 있는 ‘권위라 불리는 벽’들이다. 손오공의 여의봉처럼 자유자재로 늘어났다 줄어드는 이 벽은 밖으로 ‘대학의 자율성과 전문성’을 내걸어 개입을 막고 안으로 ‘대학 경영의 원칙과 효율성’을 외치며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대학은 사학재단이라는 영주의 성채로 변했다. 교육부라는 군주의 대신과 계약을 맺은 영주는 성 안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에 대해 결정권과 심의권을 가지며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한다. 성 내의 법률인 학칙도 영주의 마음대로 정해진다. 연초에 한번 세금을 바치는 학생들이 벌이는 등록금 투쟁을 제외하면 앞을 가로막을 장애물은 없다. 어떻게든 학생 수를 늘려 세금을 많이 걷는 게 중요하다보니 대학교의 교원 일인당 학생수는 1965년 23.2명에서 2002년 40.1명으로 늘어났다. 고등학교와 비슷한, 때론 훨씬 더 많은 학생들이 조그만 강의실에 갇혀 있다. 영주는 백성들의 말을 듣는 게 귀찮을 뿐 아니라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자연히 교수충원이나 교과과정 개편도 학생들의 욕구가 아니라 영주에게 이윤을 가져다 주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영주와 계약을 맺고 학생들을 지배할 권위를 부여받은 기사들이 대학교수다. 그리고 이 기사들은 대학원생과 시간강사라는 부하들로 자기들만의 부대를 꾸리고 그 속에서 영주와 같은 권력을 행사한다. 똑똑한 부하들이 자신의 지위를 위협할 수도 있기에 기사들은 이 부대에게 더욱더 절대적인 복종을 강요한다. 얼마 전 한 대학교수가 “내가 너를 여인으로 만들어주겠다”며 제자를 성추행했듯이 자신이 중세 시대 초야권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는 기사도 있다. 이 기사들은 학생들의 절대적인 복종과 함께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라는 부분에서도 학생들의 의견을 철저히 무시한다. 학위라는 갑옷과 학점이라는 창으로 무장한 이 기사들은 전문가주의의 쇠퇴라는 사회의 흐름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정말 두려운 것은 이런 봉건질서의 완고함만이 아니라 학생들이 이런 권위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는 사실이다. 이제 학생들은 대학의 봉건질서를 무너뜨리려 하지 않고 그 질서에 복종하며 착실히 계단을 밟고 올라가 기사나 영주가 되려 한다. 또는 만사를 귀찮아하며 스스로 농노, 노예가 되려 한다. 한국의 대학은 중세의 봉건제를 능가할 만큼 단단한 주종의 계약관계 혹은 먹이사슬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대학이 중세시대 등장한 공동체이기는 하다. 독일의 역사가 자입트(F. Seibt)는 대학이 신학공동체(universitas)에서 출현했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암흑의 시대라 불리는 중세에도 대학은 가르치고 배우는 방식이 아니라 교수와 학생이 서로 질문을 던지는 토론공동체였고 권위로 인정되어 온 원전에 의문을 품었다. 토론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대학의 학풍은 그것이 자리잡은 지역사회까지 변화시켜내며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하지만 한국의 대학은 어떤가? 토론은 없고 권위만 있다. 그 권위의 합리적이고 정서적인 바탕은 일방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토론을 통해 만들어질 수 있다. 일반인들도 다 아는 상식을 왜 지성인들이 모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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