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청탁을 받은 내용은 ‘협동조합 신드롬’이었다. 협동조합기본법이 만들어지면서 협동조합들의 수는 빠르게 늘어나고 있지만 내실 있게 성장할 것인가라는 의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 주제는 이미 여러 차례 논의된 바이고(나도 한 편의 글을 쓴 적이 있다1)), 당분간 그 진행과정을 보며 판단해야 할 문제이다.

 

그래서 이 글은 지금 이곳의 소비자생활협동조합으로 초점을 맞췄다. 새로운 협동조합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지만 이미 자리를 잡은 협동조합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불협화음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가장 많이 드러나는 불협화음은 매장을 둘러싼 문제이다. 급기야 지난 5월 2일에는 광주광역시에서 생협매장 문제로 <아이쿱 광주권 생협>과 <한살림광주생협>의 토론회가 개최되기도 했다.

 

그런데 정말 매장 문제가 현재 소비자생협들의 가장 큰 쟁점일까? 매장이나 그 입지가 중요하다는 건 일반 유통기업들과 다를 바가 없고, 공급에서 매장으로 생협의 물류망이 바뀌고 있기 때문에 갈등은 예견된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왜 그동안 서로 의논해서 원칙이나 기준을 마련하지 못했을까라는 아쉬움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협동조합간의 연대라는 원칙이 희미해진 상황에서 이런 갈등을 둘러싸고 ‘협동조합간의 경쟁’이라는 논리가 등장한 것은 유감이지만 매장 외에도 소비자생협의 정체성과 방향을 놓고 진지한 논쟁이 필요할 것 같다.

 

그런 맥락에서 최근 《녹색평론》에 실린 박승옥 선생과 신성식 경영대표의 논쟁은 의미가 있다. “망하지 않고 사업체로서 살아남고 사업이 지속되는 것과 성장신화에 갇히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라는 박승옥 선생의 지적과 “성장의 한계를 분명히 인식하고 그에 맞는 경영원칙을 세워야” 하지만 한국에서 소비자생협의 성장은 불가피하다는 신성식 대표의 반박은 곱씹어 볼만한 주제이다.

 

이 논쟁을 시작으로 다양한 논쟁들이 활성화되면 좋겠다. 협동조합의 정체성이나 비전, 그 사업방식이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은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 협동조합운동역사에서도 주요한 주제였다. 이런 물음들이 있었에 협동조합운동이 지금껏 자기 몫을 충실히 해 오고 있었던 거라 믿는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은 논의를 조금 더 풍부하게 만들 이야기꺼리들을 제안하려 한다.

 

협동조합의 탈협동화, 다른 나라의 일일까?

 

《살림이야기》제 17호(2012년 여름호)에 “살리지 못하면 죽는다― 유럽 탈협동화 경향이 주는 교훈”이라는 제목으로 협동조합의 탈협동화와 관련된 이야기를 소개한 적이 있다. 그 글은 주로 갈러(Zvi Galor)의 글을 인용했는데, 이 글은 탈협동화 문제를 더 깊이 다룬 볼로냐대학의 바띨라니(Patrizia Battilani)와 베르겐대학의 쉬뢰터(Harm G. Schröter)의 공동연구 “탈협동화와 그 문제점들(Demutualization and its Problems)”(Quaderni DSE Working Paper, 2011년)을 소개하려 한다.

 

탈협동화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정의할 수 있지만 이 연구는 기본적으로 소유권 구조의 변화, 전통적인 협동조합에서의 이탈, 협동조합의 사회적 가치변화를 특징으로 본다. 바딸라니와 쉬뢰터는 20세기부터 탈협동화가 진행되어 왔고, 1980년대 이후 특히 미국과 영국,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탈협동화 경향이 두드러졌다고 지적한다(그래서 2007년에는 <국제협동조합연맹(ICA)>이 탈협동화를 심층적으로 조사할 연구위원회를 소집하기도 했다). 반면에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는 탈협동화되었던 협동조합들이 다시 협동조합으로 변신하는 재협동화(re-mutualization) 경향도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한다. 바띨라니와 쉬뢰터는 기본적으로 탈협동화가 미국식 경쟁 자본주의와 비슷하고, 세계화의 흐름이 이런 경향을 강화시키고 있다고 본다.

 

이 연구에서 바띨라니와 쉬뢰터는 탈협동화의 원인을 다섯 가지로 지목한다.

 

첫째, 기업이나 정치․사회제도의 영향을 받아 협동조합이 사기업이나 투자자소유기업의 절차와 전략을 따르면서 협동조합의 조직이 점점 비슷해지는 경향(organizational isomorphism)

둘째, 공동소유구조가 너무 경직되어 급변하는 현실을 따라잡기 어렵다며 사유화를 지지하고, 급속도로 강화되는 경쟁에 적응해야 한다는 문화적 요인(cultural reasons)

셋째, 일반경제학 교육을 받고 상호성을 옹호하지 않는 경영진이 취임하고 이들이 조합원을 희생시켜 자기 이득을 취하려 하면서 생겨난 경영진의 착취(expropriation by managers)

넷째, 사회주의 국가들의 붕괴로 협동조합에 대한 반감이나 협동조합을 낡은 모델로 보는 의식이 확산된 정치적인 요인(political reasons)

다섯째, 자본이 제한되고 관리자에 대한 통제체계가 없는 협동조합의 비효율성 또는 성장전망의 부재(inefficiency or lack of growth perspectives)

 

이런 요인을 정리하면서 바띨라니와 쉬뢰터는 지난 20년 동안 ①조합원제도에 바탕을 둔 상호부조라는 전통적인 인센티브가 흐려질 경우(협동조합이 자신의 정체성을 잃을 때), ②정부가 탈협동화를 유도하는 인센티브를 제공할 경우, ③미래의 전망을 발전시킬 방법에 관한 대안적인 견해가 전통적인 견해보다 더 매력적일 경우에 탈협동화가 진행되었다고 지적한다. 특히 바띨라니와 쉬뢰터가 강조하는 건 협동조합이 기업으로 전환되기가 쉽지 않은데 정부가 탈협동화를 가능케 하는 법률들을 제정함으로써 여러 협동조합들(특히 보험과 관련된 협동조합들)이 탈협동화를 부추겼다는 것이다. 탈협동화가 적절한 법적인 틀을 필요로 할 뿐 아니라 때로는 그런 법적인 틀이 탈협동화를 자극한다는 것이다.

 

보통 탈협동화가 성과와 성장을 내세우지만 바띨라니와 쉬뢰터는 탈협동화가 더 나은 효율성과 성과를 보장한다는 명확하고 보편적인 증거를 찾을 수 없다고 판단한다. 아울러 잘라 말하긴 어렵지만 미국과 캐나다의 신세대협동조합과 같은 혼성조합(hybridization)이 탈협동화와 관련되어 있고 탈협동화가 혼성조합의 어두운 면이라고 말한다.

 

바띨라니와 쉬뢰터의 연구를 통해 탈협동화의 경향이 수십년 동안 강화되어 왔고 미국식 경제의 확산과 세계화의 흐름이 이런 경향을 강화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한미FTA를 체결하고 세계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는 한국의 상황은 어떨까? 바띨라니와 쉬뢰터가 지적한 탈협동화의 원인이 한국의 소비자생협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협동조합의 대의원총회나 이사회가 형식적인 의결기구로 변하고 일반기업과 비슷하게 관리자를 중심으로 재편되는 현상, 외부환경의 변화에 대응한다는 명목으로 1인 1표와 민주적 참여의 원칙을 훼손하는 현상, 일반기업의 경영전략이 협동조합에 적용되는 현상 등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까? 그리고 한국에서 보편화된 무한경쟁, 승자독식의 논리가 협동조합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고 있을까? 그러다보면 조합원들이 협동조합을 ‘조합’으로만 인식하게 되지는 않을까? 아울러 자본출자를 둘러싼 논쟁과 협동조합의 전략부재에 관한 논쟁 등도 불거지고 있는데, 이에 대한 판단의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이런 상황에서 협동조합을 일자리 창출의 도구로 보는 정부의 시각은 어떤 형태로든 협동조합의 성격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가 외부의 우려처럼 사회적 기업과 협동조합을 동원하는 ‘제2의 새마을운동’을 시작할 경우, 탈협동화 경향은 훨씬 더 강화될 수 있다. 바띨라니와 쉬뢰터가 지적하듯이 협동조합에 대한 정부정책이 탈협동화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소비자생협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일단 ‘협동조합간의 경쟁’이라는 틀은 이런 현실의 경향에 저항하고 그것을 바로잡기는커녕 탈협동화 경향을 강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한살림광주생협>과 <아이쿱 광주권 생협>의 토론회에서 매장경쟁과 관련해 어느 한 매장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다고 해서 그 지역에 다른 매장이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은 ‘독점’이고 협동조합 사이에도 경쟁이 필요하다는 논리가 등장했다. 조합원을 위하고 전체 협동운동의 몫을 고려한다는 전제가 붙긴 했지만 이것은 경쟁이 시장을 활성화시킨다는 논리를 바탕에 깔고 있다. 그리고 독점의 반대말이 경쟁이라는 것은 하이예크를 비롯한 자유주의 경제학자들(한국에서는 주로 자유기업원)이 강조하는 논리이다. 소비자생협이 이런 논리를 따라야 할까?

 

자유주의 경제학과 다른 관점에 따르면 독점의 반대말은 경쟁이 아니라 공유나 경제민주화, 자급자족이다. 생협매장의 지나친 경쟁을 막고 상생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 경쟁을 방해한다는 논리로 빠지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설령 어쩔 수 없이 경쟁을 고려하더라도 그건 일반기업과의 경쟁에 대처하는 방법이어야지 협동조합 간에는 적합하지 않다. 외려 소비자생협이 일정한 매장운영협정을 만들고 그런 규칙이 사회적 시장을 만들도록 자극해야 하지 않을까?

 

멘자니(Tito Menzani)와 자마니(Vera Zamagni)는 “이탈리아 경제의 협동조합 네트워크(Cooperative Networks in the Italian Economy)”(《Enterprise&Society》, 2010년)에서 이탈리아 협동조합운동의 성공이 네트워크에서 비롯되었다고 강조한다. 보통 네트워크라고 하면 하나의 중심을 가진 중앙화된 네트워크나 이리저리 분산된 탈중심화된 네트워크를 생각하지만 이탈리아의 협동조합들은 수평적인 네트워크(horizontal network)를 구성했기에 강한 힘을 키울 수 있었다는 거다. 이 네트워크에서 한 단위는 단순한 구성원일 수 있지만 때때로 다른 단위와 선으로 연결되거나 전체 네트워크를 코디네이터하는 역할을 맡으면서 다른 단위들이 자신에 의지하게 되면 전체 네트워크의 주요한 단위가 될 수 있다. 이 수평적인 네트워크가 시장경쟁력을 증가시키고 생산을 합리화시키며 공동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위험과 기회를 공유했다는 게 멘자니와 자마니의 평가이다.

 

국내에서도 ‘사회적 경제블록’이라는 말이 등장했지만 그것이 멘자니와 자마니가 말한 수평적인 네트워크를 지향하고 그렇게 형성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더 중요하게 소비자생협들은 그런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주요한 단위가 되고자 하는가? 아직 그런 경험이 없다 하더라도 그것이 불가능하다가 아니라 그런 경험을 지금부터라도 조금씩 축적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래야 협동조합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고 기업문화가 바뀔 수 있다. 그래야 끊임없이 자본주의 사회의 영향을 받는 조합원들이 현실의 경쟁논리에서 벗어나 협동의 논리로 현실을 바라보고 삶을 기획할 수 있다. 만일 그런 문화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경쟁의 논리가 부메랑처럼 돌아와 협동조합을 탈협동화시킬 수도 있다. 소비자생협들이 경쟁논리를 도입해 서로간의 적대적인 경쟁을 강화시킨다면, 당장은 개별 생협들이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 모르나 장기적으로는 탈협동화의 경향에 편입될 수밖에 없다. <한살림>도 예전에 이랬다, <아이쿱>도 그랬다,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건 자기 살을 깎아먹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다보면 소비자생협의 구조가 비슷하게 적대적인 합병을 시도하려는 외부의 기업들에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협동조합의 차이를 만들어야!


협동조합이 현실에 기반한 실사구시 운동이라지만 협동조합‘운동’으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지 않는다면, 소비자생협은 언제든 탈협동화의 위험에 빠질 수밖에 없다. 실사구시(實事求是)와 무실역행(務實力行)을 강조한 안창호 선생은 그 방식이 정의돈수(情誼敦修), 사랑을 도탑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협동은 내가 더 이상 홀로 살 수 없음을 자각하는 과정이고, 협동조합은 그렇게 자각한 사람들이 서로를 떠받치는 장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정체성이 명확하지 않을 경우 소비자생협은 여러 가지 외부위협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협동조합운동, 21세기의 대안》(들녘, 2003년)의 저자로 국내에 알려진 존스턴 버챌(Johnston Birchall)은 “소비자협동조합의 합병시도에서 배우는 이론적, 실천적 함의(Some theoretical and practical implications of the attempted takeover of a consumer co-operative society)”(《Annals of Public and Cooperative Economics》, 2000년)라는 글에서 협동조합이 외부의 자극과 영향에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버챌은 1997년에 앤드류 리건(Andrew Regan)이라는 민간업자가 유럽에서 가장 큰 협동조합이던 영국의 도매협동조합(Co-operative Wholesale Society, CWS)을 합병하려 했던 과정을 분석하면서 협동조합이 미디어의 영향이나 내부매수 등에 취약하다고 지적한다. 아울러 이런 문제가 2차 대전 이후 진행된 사업(business enterprise)과 결사(membership association)의 분리에서 불거졌다는 점도 지적한다. 버챌은 협동조합이 사업 면에서 다른 경쟁자들보다 잠재적으로 이로운 건 조합원들 때문이라는 점을 경영진이나 관리자들이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점을 자각하고 잘 활용한다면 소비자생협이 시장에서 제한되지만 잠재적으로 아주 유용한 위치(limited but potentially quite fruitful place in the market)를 점할 것이라는 거다.

 

비슷한 맥락에서 미국 세인드 메리 대학 경제학과의 노브코비츠(Sonja Novkovic)는 협동조합/신용조합과정(MMCCU, the Master of management : Co-operatives and Credit Union)을 소개하는 자료에서 협동조합이 ‘협동조합의 차이(Co-operative difference)’를 사회적으로 인식시켜야 성공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협동조합은 조합원이나 시민들이 이 차이를 이해하고 믿도록 하고 이 가치를 만들고 관리해야 한다는 거다. 노브코비츠는 아래와 같은 것이 협동조합의 차이라고 본다.


표1. 협동조합의 차이 이해하기

 

투자자 소유 기업

협동조합

가치 기준

상장과 경영

실질성과 고유함

목적

투자자 수익 극대화

조합원과 공동체의 필요

윤리적 태도

자선

정의

요점

단일함, CSR= 비용

다차원성; 최적화된 사회

출처: http://www.vtsummit.coop/pdf/Novkovic-Managing_the_Co-operative_Difference.pdf


노브코비츠는 협동조합의 사업은 이런 차이를 마케팅하는 것이고 마케팅이 곧 교육이고 교육이 마케팅이라는 점, 시설이 교육이고 브랜드를 만드는 것이 교육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협동조합에서 일하는 노동자(활동가)가 생산품에 대한 이야기, 우리 사람과 큰 뜻에 관한 이야기, 구체적인 활동에 관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소비자생협이 활동하는 장소는 자본주의 사회이다. 버챌과 노브코비츠는 협동조합이 적대적인 시장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시장의 논리를 내면화하는 것이 아니라 협동조합의 논리를 내부에서 더 많이 교육하고 그 가치를 사회적으로 확산시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결국은 조합원들이 협동조합을 성장시키는 것이고 조합원들이 스스로 움직이도록 만드는 것이 협동조합의 전략이다.

 

플레차(Ramon Flecha)와 크루즈(Ignacio Santa Cruz)는 “경제적인 성공을 위한 협력: 몬드라곤 사례(Cooperation for Economic Success: The Mondragon Case)”(《Analyse & Kritik》 2011년)에서 협동조합의 민주주의가 경쟁력을 만들고 협동조합간의 연대나 이익의 공유, 매우 평등한 봉급체계, 안정적인 고용구조 등이 협동조합의 차이를 만들고 확산시킨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노동인민금고나 인도주의적인 경영만이 아니라 공개적인 지적 토론과 풀뿌리민주주의가 있었기에 몬드라곤의 성공이 가능했다고 지적한다.

 

국내에서도 많이 거론되는 <로치데일공정선구자조합>은 노동자들의 최저임금이나 8시간노동제, 연금같은 기본적인 노동조건을 보장했을 뿐 아니라 노동자들이 새로운 사회를 보는 눈과 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지원했다. <선구자조합>이 매장에 읽을거리를 비치하고 대규모의 도서관을 만들었던 것은 당시 노동계급에게 절실했던 정치의식과 계급의식을 고양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에드워드 톰슨의 《영국노동계급의 형성》을 보면, 당시 영국의 노동자들이 다양한 공간에서의 토론과 학습을 통해 계급의식을 형성해간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그것이 <선구자조합>의 성공을 보장했다고 나는 본다.

 

그렇다면 지금 소비자생협에게도 ‘협동과 연대의 의식’을 만들고 확산시키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지역사회 조직화에는 식생활이나 취미 등을 매개로 하는 모임도 필요하지만 사회적인 의식을 형성하며 지역사회의 변화를 도모할 모임도 필요하다. 가령, 소비자생협의 주요한 조합원인 주부들이 가부장적이고 자본화된 한국사회를 이해하고 다른 사회의 전망을 구상하고 실천할 수 있는 교육도 필요하다. 각자의 다양성과 차이를 드러내고 무엇이 소비자생협의 전망인가를 토론할 수 있는 다양한 장도 필요하다. 1978년에 부산에서 만들어진 <양서협동조합>이 단순히 좋은 책을 거래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1978년에 협동서점을 만들고, 1979년에는 협동출판사, 1985년에는 협동도서관, 1990년에는 협동연구소, 2000년에는 협동대학을 설립한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던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그런데 소비자생협들이 빠른 속도의 성장에도 이런 장을 구체적으로 마련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이런 차이가 부각되지 않다보니 ‘의식과 삶의 괴리’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소비자생협들이 이런 괴리를 조장하는 면도 없지 않다. 이것은 소비자생협이 생산에 대한 관심을 놓고 소비와 매출고를 높이는데 관심을 두면서 생기는 문제이기도 하다.



윤리적 소비와 생산-소비의 연대


캐나다 토론토대학의 호세 존스턴(Josée Johnston)은 “시민-소비자 혼성의 이데올로기 긴장과 홀 푸드 마켓 사례(The citizen-consumer hybrid: ideological tensions and the case of Whole Foods Market)”(《Theor Soc》 2008년)에서 윤리적 소비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존스턴은 윤리적 소비운동이 역사적으로 네 단계, ①소비자의 힘을 조직해서 지역 내 생산에 개입하려 했던 19세기 영국의 협동조합운동, ②대량생산 대량소비의 포디즘에서 출현했고 생산자보다 소비자의 정체성에 주목했던 소비자 행동주의, ③미국의 소비자운동으로 유명한 네이더주의(Nadersim)가 통제받지 않는 기업자본주의를 비판하며 공정한 정보와 기업의 책임성을 강조한 시기, ④개인소비자에게 안전한 시장을 보장하는 것을 넘어서 지속가능하지 않은 집단적인 소비에 관심을 두고 환경과 같은 후기 산업사회의 가치에 주목했던 1980년대 이후의 대안적인 소비운동 시기를 거쳤다고 본다. 그런데 이런 역사를 거치면서 기업들도 소비자운동에 대응하기 시작했고 일정 부분 적응하며 심지어 이런 운동을 새로운 사업기회로 받아들였다. 그런 점에서 존스턴은 윤리적 소비운동이 이런 현실적인 맥락에서 평가되어야 한다고 본다.

 

존스턴은 해외에서 유기농 시장이나 대안적인 식생활문화를 개척한 성공적인 사례로 평가받는 <훌 푸드 마켓>을 분석하면서 윤리적 소비운동이 일정한 자기모순에 빠져 있다고 본다. 이 어려움은 그 개념 자체의 모순에서 생기기도 하는데, 존스턴은 소비자운동(consumerism)과 시민의식(citizenship)이 원론적인 의미에서 다음과 같은 차이를 가진다고 본다.


표2. 소비자운동 대 시민의식

 

소비자운동: 개인이익의 최대화

시민의식: 사회와 생태계의 공공재에 대한 공동책임

문화

개인의 선택과 다양성에 우선순위

개인의 선택과 다양성을 제한하고 공동의 해결책을 모색

정치경제학

소비자시장에 우선순위; 소비를 통한 사회지위

사회 모든 계급의 공평한 접근과 역량강화; 시장을 제한함

정치생태학

소비를 통한 보존

소비의 감소; 욕구와 필요의 재평가

출저: 앞의 논문


이 구분은 원론적인 의미이고 현실의 소비자는 두 가지 모습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런데 존스턴은 <훌 푸드 마켓>을 분석하면서 이 두 모습이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점점더 한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다고 본다. 소비자의 입장에서 개인의 자발적인 선호가 강조되다보니 절제하며 공공재를 보존하도록 국가를 압박하는 시민의 책임은 최소화되는데, 기업은 이런 편리하고 즐거운 쇼핑을 부추긴다. 그리고 좋은 맛과 영양, 건강함을 강조하는 <훌 푸드 마켓>의 홍보전략은 엘리트 계층의 문화자본(cultural capital)을 정당화시키고 불평등한 소득구조를 바꾸려하지 않는다. 또한 소비를 통한 보존이라는 전략은 더 많은 욕망과 소비를 자극하고, 자급하고 짧은 거리 내에 유통되며 에너지를 많이 소모하지 않는 포장, 상품화되지 않은 식재료 등에 많은 관심을 두지 않는다. 존스턴은 이런 결과를 토대로 “시민-소비자를 섞는 기업의 프레임이 녹색을 팔아먹는 전략과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프레임과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다. <훌 푸드 마켓>의 윤리적 소비라는 프레임을 통해 시민-소비자는 전지구적 자본주의가 사회와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다는 사실을 점점 깨달아가는 대중적인 관심과 더 높은 소비생활로 기업이윤을 늘려야 한다는 필요성을 겉으로는 일치시킬 수 있었다. 시민-소비자는 약간의 제한요건만 받아들이면 영원한 경제성장과 소비자 주권이라는 소비자 이데올로기에 계속 몰입하면서도 시민으로서 사회적이고 생태적인 관심사를 표현할 수 있다.”고 비판한다.

 

한국의 소비자생협들은 이런 존스턴의 비판에서 자유로울까? 생산과 소비를 분리시키고 개인의 소비를 통해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바로잡을 수 있다는 ‘환상’을 주입시키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자료를 보면, <한살림>의 ‘2009 수도권 지역 한살림 조합원 의식조사’에서 조합원의 자가주택 소유율이 74.7%, 월평균 가계소득이 454만원으로 조사되었다. 그리고 ‘2012년 아이쿱생협 조합원 소비생활과 의식에 관한 조사’에 따라도 응답자의 77.6%가 대졸이고, 64.9%가 자기 집을 소유했으며, 가구의 평균소득은 약 422만원이다. 그렇다면 소비자생협운동 자체가 중산층의 전유물이라고 보지는 않더라도 현재 한국 소비자생협의 조합원 구성이 중산층을 반영하고 그들을 마케팅목표로 삼는 전략을 계속 사용하고 있다면 야박한 평가일까? 또한 소비자생협들 조합원들에게 무조건적인 소비의 확대보다 자기 욕구와 필요를 평가하고 재구성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나? 자본주의 소비문화와 조합원의식이 충돌할 경우 소비자생협은 어떤 대안을 마련하고 있나? 직거래되는 농수산물에서 가공품으로 생활재의 비중이 변하고 있는데 소비자생협들은 생산자, 노동자의 삶에 어떤 관심을 쏟고 있나? 그리고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가 400 ppm을 넘은 기후변화 시대를 맞아 소비자생협은 어떤 대안을 준비하고 있나?

 

이런 물음들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소비자생협에 필요하다고 본다. 이것은 단지 조합원 교양이나 교육의 차원이 아니라 조직의 정체성과 사업 차원의 문제로 다뤄져야 한다. 자신의 차이를 부각시키고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바로잡지 못한다면 협동조합운동의 지속을 쉽게 장담하긴 어렵기 때문이다. 생산과 노동자를 고민하지 않는 소비자생협이 대안적인 사회를 만들기는 어렵다. 리스트(Gilbert Rist)는 《발전은 영원할 것이라는 환상》(봄날의 책, 2013년)에서 “‘발전’은 분명히 한정된 자원을 끊임없이 수탈함으로써만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경제성장은 풍요의 약속을 지키기는커녕 보편적인 결핍을 낳을 뿐이라는 사실을 얼버무리는 실체적인 환상”이라고 비판한다. 즉 소비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생산과의 연계를 고려하지 않는 소비자협동조합은 경쟁 자본주의에 쉽게 동화될 뿐 아니라 자신의 뜻은 아니라 할지라도 타자에 대한 수탈을 정당화시킬 수밖에 없다.

 

소비자생협에서 소비자라는 단어를 부담스러워하는 <한살림>은 이런 물음을 더욱더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본다. <한살림>이 <한살림농산>에서 <한살림공동체소비자협동조합>으로, <한살림생활협동조합>으로 변해온 역사는 이런 고민을 반영한다. 그렇다면 초기의 고민은 지금의 정체성과 방향, 사업방식에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가? 최혜성 선생은 1989년 7월에 발표된 “한살림운동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생명의 세계관이란 “인간이 사회 안의 공동체적 협동, 자연과의 조화된 공생 속에서 자기 자신을 실현할 수 있음”을 밝히는 것이고 한살림의 이념은 “사회적 노동에 의해 창출되는 모든 생활가치가 협동적으로 생산되고 공정하게 배분되는 정의로운 사회를 실현하고, 생활가치가 인간노동의 소산이자 자연의 소산임을 인식하고 인간에게 생명의 젖을 먹여주는 자연의 생태균형을 유지시키고, 정의의 사회적 실천, 자연과의 조화된 생활을 통하여 내면적 자기실현을 추구하는 것을 그 실천목표로 삼고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한살림 초창기의 소식지나 가입안내서를 살펴보면 유기농산물 거래의 목적은 안전한 먹을거리가 아니라 자연과 외국농산물의 수입으로 쓰러져가는 농촌 살리기, 농약으로 신음하는 농민의 삶을 개선하는 것이었다. 이런 근본적인 사회변화를 지향하는 (사회)운동과 소비자생협이라는 틀의 모순을 해결하는 과제가 <한살림>에 있다고 본다. 즉 한살림은 윤리적 소비운동을 넘어서는 인식틀을 가지고 있지만 이를 스스로 실현하고 있는가? 이에 대한 답을 조합원과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이 필요한 시점이다.


한살림서울생협 장기과제 포럼에서 발표한 글입니다.


 

안이 아니라 밖에서 무언가를 얘기한다는 건 언제나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한 사람의 삶에 관해 얘기하는 것도 어려운데 여러 사람들의 공동활동에 관해 얘기하는 건 더더욱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도 누군가가 어려운 짐을 져야 하는 건 안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이 놓치기 쉬운 부분들이 때때로 밖에서 관찰하는 사람에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 Arendt)는 “관찰자는 관여하지 않기 때문에, 행위자에게는 숨겨져 있는 신 또는 자연의 이러한 계획을 지각할 수 있다. 그래서 한편에는 광경과 관찰자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행위자와 모든 개별사건들 그리고 우연하고 일시적인 일들이 존재한다”고 말했는지 모릅니다.


제가 숨겨져 있는 신이나 자연의 계획을 알지는 못하지만 애정을 가지고 한살림의 활동을 지켜보던 사람으로서 그 어려운 짐을 한번 지려 합니다. 다소 불편한 얘기일 수도 있지만 서로의 불편함을 드러내야 더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으로 이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제가 안의 일을 세세하게 알지는 못하기 때문에 <모심과살림연구소>가 2010년에 발표한 ‘한살림조합원 의식조사결과보고서’와 ‘한살림이 만들어가는 지역살림활동’을, 그리고 『죽임의 문명에서 살림의 문명으로』를 참고했습니다. 제가 새로운 과제를 제시할 능력이 부족하기에 그동안 한살림이 주장해온 과제와 성과들을 되짚어보며 그것들이 지금 현실에서 갖는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1. 한살림선언과 세계의 변화


한살림운동이 우리 사회에서 갖는 의미는 중요합니다. 위기의 시대에 협동운동이 이루어야 할 뜻을 ‘생명사상’이라는 틀로 담아냈기 때문입니다. 다들 그 틀에 관해 잘 아실 터이니 그 뜻에 관해 제가 구구절절 얘기할 필요는 없을 듯하고 그 사상과 현실의 틈에 관해 얘기하려 합니다.


한살림선언은 오늘날 산업문명이 직면한 위기를 핵위협과 공포, 자연환경의 파괴, 자원고갈과 인구폭발, 문명병의 만연과 정신분열적 사회현상, 경제의 구조적 모순과 악순환, 중앙집권화된 기술관료체제에 의한 통제와 지배, 낡은 기계론적 세계관의 위기에서 찾았습니다. 모든 선언은 “이리 될 것이다” 또는 “이리 할 것이다”라는 기대나 의지를 품고 있습니다. 그러니 한살림선언 역시 그런 기대나 의지를 품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현실은 그 선언을 실현하는 방향이 아니라 이미 20년 전에 지적된 위기들이 더욱더 심각해지는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위기에 대한 진단은 정확했는데 의지가 약했던 탓일까요? 새만금이나 4대강 외에도 우리가 생활하는 세계 곳곳에서 죽임과 파괴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특히 그런 죽임과 파괴는 바로 이곳 서울에서 결정되어 지방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서울이 바로 그런 위기의 정점에 있고 그런 위기를 세계로 퍼뜨리고 있습니다. 서울을 유지하기 위해 핵발전소나 방폐장이 세워지고 지방의 온갖 자원이 약탈되며 수도권의 인구는 계속 늘어나고 온갖 문명병이 만연되고 있습니다. 재벌중심의 경제구조는 더욱 강화되고 지방자치제도의 실시에도 중앙집권화된 관료체제는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4대강사업이 대표적인 예겠죠). 낡은 세계는 몰락하고 있는데 새로운 세계로 건너갈 방법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실용주의’와 ‘현실주의’가 판을 치면서 ‘생명’과 ‘협동’, ‘공생’은 책에서나 볼 수 있는 아름다운 낱말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살림서울생협의 지역살림운동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리 삶을 위협하는 위기들에 맞서 지역살림운동은 어떤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요? 조합원의식조사 결과보고서를 보면, 조합원들은 ‘안전한 먹을거리를 지키기 위한 활동’(60.2%), ‘농업과 농촌을 지키고 살리는 활동’(18.9%), ‘생명의 가치에 맞게 생활양식을 변화시키는 활동’(8.6%), ‘환경 및 생태계를 지키고 보호하는 활동’(8.3%) 순으로 한살림의 활동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보고서는 이런 대답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지만 저는 좀 다르게 생각합니다. 유기농먹거리를 찾는 ‘웰빙바람’이나 환경을 지키자는 ‘착한 운동’에서도 이런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한 그릇의 밥’ 속에 많은 의미가 들어있고 그 의미를 깨우쳐야 하지만 그것만 강조되고 우리사회의 생활문화가 바뀌다보니 한살림선언의 뜻은 외려 묻히고 있습니다. 산업문명위 위기를 극복하자던 선언의 의지는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그리고 보고서를 보면, 한살림이 그동안 집중해온 ‘안전한 먹을거리나눔’ 활동을 토대로 하여 지역에서 활동영역을 ‘환경’, ‘복지’, ‘문화’, ‘교육’ 등으로 넓혀야 한다고 조합원들은 대답했습니다. 심지어 응답자의 13.7%가 구체적으로 참여의사(적극 참여의사가 5.7%, 물품이나 기부금 등으로 후원의사가 8%)를 밝히고 있으니 이는 축복이라고 봅니다. 다만 이런 관심사들이 세대나 소득별로 나눠지는 게 아니라 지역살림이라는 큰 틀 내에서 다뤄져야 할 것 같습니다. 부분을 키우다보면 전체가 드러나리라 생각하는데, 최근의 사회상황은 전체를 보지 않으면 부분을 키우기가 어렵거나 그 부분의 의미를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정부(중앙/지방)나 재벌들이 이런 영역들을 끊임없이 견제하거나 흡수하려고 하니까요.


따라서 다양한 활동들이 하나로 엮여 산업문명의 위기를 극복할 지역사회의 단단한 그물망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서울이나 수도권에서는 이곳이 위기의 근원이기에 그런 노력이 더욱더 많이 필요합니다. 저는 지역살림운동이 잘못되고 있다고 비판하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지역살림운동에서 드러난 힘들이 이런 쪽으로 자랄 수 있도록 영양분을 주는 게 한살림서울생협의 역할이라고 봅니다.


돌아가신 함석헌 선생님은 인간의 사회조직이 “하나 하나의 개체들이 보다 높은 하나를 드러내는 방법”이라 말했습니다. “각 개체가 다 전체를 가능성으로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전체의 발전은 개체의 발전을 통해서만 되게 되어 있다. 민족적인 본성은 개인의 자아 속에서만 볼 수 있고 발전시킬 수 있다.”고 하셨지요. 그 말을 따르면 개인의 타락이나 제도의 불완전함이 아니라 전체의 통일이 깨졌기에 우리의 삶이 위기와 불안,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겁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다시 이 전체의 통일과 균형을 잡는 것입니다. 각자가 서로의 삶에 의존해 살고 있음을 인정하고 자기 품을 내어주는 게 필요합니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지역살림운동이 품을 내어준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지역살림운동 속에서 자기선택과 공생 진화, 협동진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고민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방법은 한살림만의 힘으로 가능한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을 겁니다. 일단은 가능한 것부터 시작해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것을 가능하도록 만들 힘도 필요합니다. ‘불가능한 것을 상상하라’는 구호가 가진 힘을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삶터와 일터의 분리를 극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삶터와 일터의 분리를 극복한다는 것은 공장이나 사무실로 출근하지 말고 집에서 일하자는 게 아닙니다. 지역살림살이의 자족성을 갖출 여러 가지 방안이 얘기되고 있지만 그건 시간이 많이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 기반이 마련될 때까지 손 놓고 기다리지 말고 일단 삶터와 일터의 삶이 서로 소통되게 해야 합니다. 공장과 사무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삶터에서 얘기되고, 반대로 삶터의 일들이 공장과 사무실에서 얘기되어야 합니다. 이런 과정들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공생진화는 헛된 말일 뿐입니다. 특히 조합원의 약 2/3가 경제활동에 참여하지 않고 생활인으로 살아가기에 이런 과정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에서 조합원이 아닌 사람의 삶, 그러나 지역사회에서 함께 생활하고 조합원들이 지역사회에서 생활하며 만나는 사람들의 삶도 얘기되어야 합니다. 환경미화원, 식당종업원, 배달원 등 다양한 직종의 비정규직/일용직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고통들이 그들이 생산한 제품과 서비스를 이용하는 소비자들 사이에서 얘기되어야 합니다. 또 재벌들이 만드는 열악한 노동시장의 조건에 소비자들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예를 들어, 삼성그룹의 제품을 쓰고 보험을 들고 주식투자를 하는 게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조합원들이 고민해야 하고 그 대안을 구체적으로 보여줘야 합니다.


반대로 생활정치의 영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에 그 지역에 위치한 공장과 사무실 노동자들의 관심을 유도해야 합니다. 지역의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공장과 사무실, 공공기관, 자영업 등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깨달아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경제활동에 참여하는 한살림서울생협 조합원의 85.4%가 출퇴근 1시간 이내 지역에서 일하고 있으니 이런 과정은 충분히 마련될 수 있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한 공간 안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점을 깨닫고 바라봐야 합니다. 영화 <아바타>에 나오듯 서로를 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더욱 단단하게 손을 맞잡을 수 있고 예상치 못했던 힘을 구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생각해보면 너무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우리는 생산자이자 소비자인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다만 삶터와 일터의 거리가 너무 멀다보니 동시에 삶을 산다는 점을 망각하고 분리해서 생각할 뿐입니다. 이렇게 분리된 우리 사회의 살림살이구조, 정치와 경제구조를 바꾸고 합치는 일에 한살림서울생협이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더글러스 러미스는 『Radical Democracy』라는 책에서 “지역적으로 생각하고, 지구적으로 행동하라.”라고 주장합니다. 토착공동체를 지키는 힘이, 결국에는 우리가 뿌리는 내리고 사는 세계를 지키는 힘이 국경을 가로지르는 운동 속에서도 만들어질 수 있다는 지적입니다.


아쉬운 점은 기업들은 협동의 힘을 깨닫고 온갖 방법을 마케팅으로 동원하고 있는데 정작 그 힘의 기원인 협동조합들은 거꾸로 기업의 투자논리와 마케팅을 따라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장의 세계관은 지구적인데 그 전일성을 주목했던 협동운동의 세계관이 지구를 보듬지 못한다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리고 한살림서울생협이 풀어야 할 중요한 화두 중 하나가 저는 로컬푸드라고 봅니다. 대한민국 인구의 절반 가량이 사는, 자급의 능력을 거의 상실해가는 수도권은 10년 뒤에 한국에서 가장 위험한 공간이 될지도 모릅니다. 갑자기 도시가 망한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서울은 식량, 에너지 면에서 너무나 취약하기 때문에 로컬푸드에 관한 고민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다행히도(?) 서울과 달리 경기도는 그런 잠재력을 완전히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정해진 모범을 따르려 말고 다양한 상상력을 발휘하면 좋겠습니다. 로컬푸드와 도시텃밭, 베란다텃밭, 마을텃밭 등 지역에서 다양한 관계가 얽히고 설키어 서로의 삶을 살리고 모시면 좋지 않을까요? 그리고 에너지 소비량을 줄이고 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베네주엘라에서는 정부가 텃밭을 만들어 지역주민들이 가꾸게 하고 자유롭게 필요한 만큼 가져가게 한다고 합니다. 서울에도 이런 공간이 많이 만들어지도록 함께 노력하면 좋지 않을까요?


또 여러 대학에서 ‘청년 생태주의자’ 모임이 만들어지고, 레알텃밭학교도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만행이라는 청년공동체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여러 모임에서 생태주의와 대안적인 삶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특히 대학들이 몰려있기 때문에 많은 청년들이 수도권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찾아보면 의외로 귀농을 고민하거나 생태적인 삶을 살려는 청년들이 많습니다. 이런 청년들이 ‘젊은 날의 치기’로 고민을 접지 않고 실제로 그 삶을 꾸준히 살아가려면 여러 디딤돌이 필요합니다. 알아서 헤엄쳐 강을 건너오길 기다리지 말고 절반이라도 건너와 꿈을 꿀 수 있도록 징검다리를 놓아주면 어떨까요? 이 역시 찾아오길 기다리지 말고 먼저 품을 내어주는 게 필요합니다. 학교나 대학, 학생회와 협약을 맺고 공동사업을 추진하는 것도 고민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런 과정을 만드는데 한살림서울생협의 지역살림운동이 적극적으로 동참하면 좋겠습니다.



2.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


밖에서 얘기하길 한살림운동을 ‘중산층운동’이라고 합니다. 조합원 의식조사를 보니 조합원의 월평균 가계소득수준이 454만원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수도권에서 자기 집을 소유한 비율이 무려 74.7%라고 하니, 그 구성원으로만 보면 중산층이 아니라 중상층의 운동이라고 해야 옳습니다. 이런 상황이니 한살림은 ‘섬’이 되어 간다는 얘기가 근거없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재산이 많은 것이 문제는 아니고, 섬이 되는 것 자체도 문제는 아닙니다. 어찌되었건 우리는 다른 누군가에게 섬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한살림의 정신을 실현하려면 그런 섬을 연결할 수 있는 많은 다리를 놓아야 할 겁니다.


한살림의 지역살림운동에서 그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녹색장터와 벼룩시장, 지역아동센터, 방과후 교육공동체, 장애인편의시설 실태조사 등 다양한 가능성이 싹을 틔우고 있습니다. 한 살림서울생협의 경우 10세 이하 자녀수와 30대, 40대의 비중이 높으니 이와 여계된 사업들을 활성화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싹이 나무로 자라 튼튼하게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힘을 모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한살림운동이 ‘너무’ 순수하고 착한 운동으로 가는 듯한 모습도 보입니다. 그런 마음이야 한살림운동의 중요한 힘이지만 때로는 그 마음이 사람의 성장을 가로막기도 합니다. 그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순수하거나 착하지 않기 때문이고, 그런 마음이 다른 사람을 대상화시키기 때문입니다. 모심은 내가 상대를 동정하거나 연민하는 게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삶을 돌본다는 의미인데, 일방적인 관계가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때로는 그런 마음과 그렇게 만들어진 관계가 사회구조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로막기도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런 변화를 추구하는 운동과의 거리감을 만든다는 점에서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역사회에는 반(反)생명적인 세력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중앙/지방정부와 결탁한 관변단체와 지역언론사, 보수적인 주민자치위원회, 각종 직능단체 등이 각종 개발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작은 4대강 사업들이 지방정부의 사업 곳곳에 숨어 있습니다. 이런 세력들이 있기에 때로는 충돌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이들과 무작정 싸움을 벌이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돌아가신 장일순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도둑을 만나면 도둑이 돼서 얘기를 나눠야 해요.

도둑은 절대 샌님 말은 안 들어요.

저 사람도 나와 같은 도둑이다 싶으면

그때부터 말문을 열기 시작한단 이 말이에요.

그때 도둑질을 하려면 없는 사람 것 한두 푼 훔치려 하지 말고 있는 사람 것을 털고 그것도 없는 사람과 나눠 쓰면 좋지 않겠냐고 하면 알아들어요.

부처님은 마흔네 개의 얼굴을 갖고 계시다는 말이 있는데 말하자면 이런 거지요.

‘누구를 만나든 그 사람과 하나가 된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저는 한살림운동이 조금 덜 착한 운동이면 좋겠습니다. 소득수준과 생활수준이 높은 만큼 주민들 속에 더 낮게 들어가면 좋겠습니다.


이미 고민들이 지역살림운동에서 조금씩 드러나고 있습니다. “유기농 먹을거리에 대한 사회 전반적인 인식들이 많이 성장을 하듯이 사회와 지역과 더불어 소외계층에 대한 나눔의 미덕도 커졌으면 한다. 녹색장터가 비록 한살림 조합원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지만 지역의 다른 생협들과 함께 장을 연다면 지역연대활동으로 이어져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게 될 것이다.…우리가 하고 있는 품앗이 활동이 소모임의 차원에서 벗어나 지역사회에 큰 영향을 주려면 우리가 하고 있는 교육공동체가 무엇인지, 왜 해야 하는지, 얼마나 중요한지 제대로 알아야 한다. 하지만 그동안은 내부 프로그램이나 활동 위주로 가다보니, 대외적인 홍보가 부족했다. 교사 재교육이나 경제 여건 등 해결해야 할 문제점도 많다.”(군포지부)


“한살림도 지역에서 활동하는 여러 단체들과 연대의 고리를 지속하면서 사회복지분야를 비롯한 지역문제를 조합원과 지역주민들에게 널리 알려내어 공감대를 마련하고, 자치단체가 이 문제에 대해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제도를 개선해 나갈 수 있도록 다양한 활동을 해 나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서울 동부지부)


그래서 한살림서울생협의 여러 가지 새로운 시도들이 그런 운동을 시도해온 단체와 함께 진행하거나 그런 운동의 앞선 사례들을 꼼꼼하게 분석하면 좋겠습니다. 《민들레》라는 대안교육잡지 제 69호(2010년 5․6월호)를 보면, 공부방과 지역아동센터 교사들의 고민을 엿볼 수 있습니다. 조금만 인용해 볼까요?


“공부방 활동을 하다 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사건을 겪을 때가 많다. 오죽하면 옛날부터 머리털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는 말이 있겠는가? 그만큼 누군가를 돌보는 일은 힘들고 어렵다는 말일 게다. 초라함과 졸렬함, 어리석음과 야비함, 교활과 탐욕, 게으름과 변명, 무지와 공포, 편견과 선입관 등, 인간의 온갖 밑바닥 감정들이 버젓이 활개치고 다니는 곳이 공부방이다. 때로는 선의나 너그러움을 교묘히 악용하고 자극하여 교사들을 옴짝달싹 못하게 얽어매는 경우도 있다.”


“지금 지역아동센터가 당면한 과제 중 하나는 그거라고 본다. “우리가 왜 존재하는가? 이 사회에서, 그것도 사회적 돌봄이 필요한 아동 옆에 왜 존재하는가?”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집단에게도 질문해서 같이 토론해야 한다. 센터로 교육하러 다녀 보면, 사람들이 공통으로 이야기하는 게 있다. 아이들에게 사랑을 쏟으면 쏟을수록 훨씬 더 의존적인 아이들로 자라는 것 같다는 것이다. “또 무슨 도움 없어요?” “이번에는 왜 이렇게 조금밖에 안 줘요?” 우리가 원하는 건 자립적인 아이들인데, 실천하다 보니까 오히려 의존적인 아이가 되더라, 이런 고민이 드는 거다. 우리는 이제 이런 이야길 해야 한다. 당신이 주는 사랑의 내용이 뭐냐? 우리가 아이들에게 주는 게 뭐냐? 선의로 사랑을 주려고 했는데 그게 독이 될 수도 있다. 대신 해결해 주는 교육과정을 통해서는 절대 주체적인 인간이 나오지 않는다. 그럼 어떻게 하면 주체적인 아이들이 길러지나? 바로 실천할 수 있는 것 한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여러분들이 무엇인가 하기 전에 언제나 아이들에게 물어 봐라.” 일반적으로 교사들은 잘 묻지 않는다.…사실 아이들이 현재와 같은 방식의 공부는 못 해도 된다. 단, 미래사회에 자기주도적으로 살려면 꼭 필요한 능력이 있다.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 능력이다. 아이들이 자기 삶에서 펼쳐지는 문제에 대해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 줘야 한다.”


한살림의 정신이 반드시 한살림 조직으로 실현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저는 그것도 ‘이천식천(以天食天)’의 정신이라고 봅니다. 자기 이름을 내걸려는 운동은 많지만 다른 운동과 손을 잡고 아래로부터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운동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한살림이 먼저 손을 내밀고 잡으면 어떨까요?


왜 한살림이 그런 일까지 맡아야 하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는 한살림 자신을 위해서 그런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 세계에서 사회적 양극화가 가장 심하다는 브라질에서는 부자들이 출근할 때 헬기를 이용한다고 합니다. 수영장이 딸린 대저택 바로 옆에 빈민가들이 줄을 지어 늘어서 있습니다. 총을 든 경비원들이 순찰을 도는 문 밖만 나가면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으니 공중으로 날아다니는 겁니다. 10년 뒤 서울의 모습이 이렇게 않으리라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요? 저는 용산참사가 이미 그 미래를 예고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홍대 앞 두리반, 왕십리 등이 제 2, 제 3의 용산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공간들이 하나씩 바뀌기 시작하면 나중에는 어떻게 될까요? 착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과 손을 잡아야 합니다.


만일 이런 얘기에 동의하신다면 남은 과제는 다른 운동과 소통할 수 있는 언어를 개발하는 것입니다. 이건 한살림만의 과제가 아니라 한국사회를 바꾸려는 여러 운동들이 함께 고민해야 할 과제입니다. 어떻게 하면 서로 소통할 수 있을까요? 서로의 마음을 잘못 읽거나 멋대로 해석하지 않고 진심에 다가설 수 있을까요? 한살림이 가려는 길이 다른 운동의 길과 다르지 않음을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동안 한살림운동이 강조해온 ‘스스로의 변화’는 소수자들이 겪는 우리 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그들의 문제’로 만들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동체’라는 특성이 ‘배타성’을 띠기도 합니다. 자기부정 없이 ‘우리’만 부각되다 보면 공동체들이 ‘우리들만의 공동체’가 되기도 합니다. 이런 문제를 벗어나려면 한살림운동이 일상적인 생활정치 속에 소수자의 시각을 녹여내고 그것이 가진 차이를 통합하려는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메이데이, 2007)에서 김도현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노라 그로스Nora E. Groce라는 사회학자는 미국 뉴잉글랜드 지방 해안가의 외딴 섬인 마서즈 비니어드Martha's Vineyard에서 농인deaf people들의 생활상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였다. 그 섬에서 농인들은 사회로부터 배제되지 않았으며 그들 자신만의 농 문화를 형성하지도 않았는데, 이는 섬의 모든 사람들이 영어와 수화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바이링귀스트bilinguist들의 사회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곳에서는 농인들에 대한 사회적 제약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으며, 농인들은 지역사회의 삶에 자연스럽게 통합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한 살림운동의 언어가 아이들의 언어, 주부의 언어, 장애인의 언어로도 표현될 수 있으면 좋을 겁니다. 그리고 이제는 어른들이 바라는 ‘아이들을 위한 도시’에서 ‘아이들의 도시’로, ‘주부들을 위한 정치’에서 ‘주부들의 정치’로, ‘장애인을 배려하는 도시’에서 ‘장애인의 도시’로의 관점이 변하면 좋겠습니다.


물론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서 조합원 활동에 참여하지 않는 조합원이 62.3%나 되는데, 이렇게 어렵고 힘든 활동을 굳이 해야 하는가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꼼꼼하게 따져보면, 중산층이고 비교적 젊은 세대인 한살림서울생협의 조합원들에게 왜 시간적인 여유가 부족할까요? 어쩌면 서울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여유를 없애는 것이고 이는 개인의 노력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여유를 만들려면 혼자만의 노력에서 벗어나 그런 여유를 없애는 사회질서를 바꿔야 합니다. 승자독식의 경쟁질서를 서로 보살피는 공생의 질서로 바꿔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이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내가 살기 위해 여유를 만들고 서로 손을 잡아야 하겠지요. 여유 없는 조합원들이 다른 것을 포기하고 조합원 활동을 택하도록 만드는 것, 그것은 구호가 아니라 한살림서울생협의 구체적인 사업을 통해, 다른 시민사회운동단체들과의 손잡음을 통해 준비되어야 하는 일입니다. 장기적으로 보면서 서로의 언어를 맞춰가야 합니다.



3. 내실을 다져야 할 시기


최근에 흥미로운 글을 하나 읽었습니다. 인터넷에서 다운받아 볼 수 있는 글입니다. 갈러(Zvi Galor)라는 이가 지은 “Demutualization of Cooperatives: Reasons and Perspectives”라는 글입니다. 한글말로 옮기면 “협동조합의 탈협동화: 이유와 전망”이 되겠네요. 갈러는 전 세계의 많은 협동조합들이 더 많은 상부상조와 협동보다 경쟁과 탈협동으로 가고 있는 이유를 분석합니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미국, 캐나다, 유럽연합, 동남아시아, 이스라엘 등을 분석한 뒤에 갈러는 특히 소비자협동조합과 전력공급협동조합에서 탈협동 경향이 두드러진다고 지적하면서 중요한 원인을 조합원의 참여부족에서 찾습니다. 협동조합의 중요한 원리 중 하나인 조합원의 적극적인 참여와 그것을 통한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데서 갈러는 문제점을 찾고 있습니다. 이런 탈협동화의 결말은 협동조합이 문을 닫거나 협동조합들이 통합되거나 주식회사(조합원소유/주주소유)로 전환되거나 협동조합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것(소유권의 분할과 개인회사 취득)이라 얘기합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면 갈러는 협동조합의 탈협동화를 불러온 조합 내부의 원인을 조합원과 협동조합의 관점에서 각각 살핍니다. 조합원의 경우 그 원인은 소유권의 제한, 조합원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음, 조합에 대한 관심 부족과 교육의 부족이고, 협동조합의 경우 원인은 조합원에서 주주로의 변화, 협동조합 정체성의 상실, 살림에서 이윤으로의 가치변화, 자금조달능력 확대의 필요성입니다. 한살림이 해당하는 항목은 없는지 잘 살펴볼 일입니다.


그리고 갈러는 탈협동화를 불러오는 조합 외부의 원인도 지적합니다. 그 원인은 소유권의 재설정(redefinition), 대안적인 협동조합 해결책의 부족, 협동조합이 낡은 방식이라는 생각, 협동조합과 다른 외부환경, 탈협동화중인 협동조합부문(미국의 농업부문, 오스트레일리아와 영국의 신용협동조합부문, 캐나다의 생명보험부문, 서유럽의 협동조합은행)입니다.


아쉽게도 갈러는 이런 다양한 현상을 보여줄 뿐 이런 경향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에 관해서는 얘기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이런 얘기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역살림운동이 조합원들의 자발적이고 의식적인 참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지역살림운동은 조합원운동이기도 합니다.


한국식으로 번역하면 이런 고민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조합원이지만 1년에 조합을 한 번도 이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49.5%나 되면 이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리고 조합원이지만 매장만 이용할 뿐 조합의 소유권과 운영에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매출고와 조합원 확대에 관한 고민은 많지만 그것이 조합 내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인지에 관한 고민은 부족한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갈러는 협동조합의 탈협동화를 안타까워하는데, 앞서 얘기한 러미스는 그것이 결국 그 사회의 비민주화, 보수화를 가져온다고 비판합니다. 우리는 정치와 경제를 떼어놓고 생각하지만 역사상 어느 사회도 그것이 분리되지 않았고 그런 분리를 이용한 자들이 기득권층이라고 러미스는 지적합니다. 공장과 사무실에서 복종에 길들여지는 사람들이 정치영역에서 능동적인 시민이 될 수는 없다는 얘기지요. 그리고 기득권층은 일자리와 임금 등을 무기로 시민들의 발을 묶으려 든다는 얘기입니다. 정치민주화에만 매달려온 우리사회의 민주주의가 이토록 취약한 것도 그 때문이고 재벌그룹의 사장이 대통령이 된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협동운동은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되살리는 운동입니다. 그러니 한살림의 규모가 커지고 조합원이 늘어날수록 한살림의 관계가 기존의 사회관계를 변화시켜야 협동운동이 튼튼해질 수 있습니다. 한살림이 조합원과의 관계를 돈독히 다지고 한살림이 위치하고 사회의 외부환경을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켜야 장기적인 과제를 정할 수 있습니다.


국가는 힘과 권력에서 자유롭지 않아 힘 센 이에게 더 많은 관심을 둘 수밖에 없고 민초의 삶을 세세하게 돌보지 못합니다. 더구나 국가와 자본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사회의 힘을 빼려 합니다. 국가/시장/사회의 관계로 본다면 사회의 힘은 여전히 약합니다. 사회가 강해지고 난 뒤에야 국가나 시장이 제대로 민초의 뜻을 받들려 할 겁니다. 그러니 사회의 힘을 길러야 하고 그 힘을 기르는 방법은 바로 민초들의 관계입니다. 사회적 경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얘기를 할 수 있습니다. 지역사회의 관계망이 단단해지지 않으면 모두 모래성일 뿐입니다.


조합원이 한살림에 관심을 가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모범답안은 이미 나와 있습니다. 보고서의 결론에 나와있듯이 조합원의 특성과 욕구를 고려한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고 다양한 교류의 장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강조하자면, 더 많은 정보와 권한을 조합원들에게 줘야 합니다. 정보 없는 관심 없고 권한 없는 참여란 불가능합니다. 본부나 지부가 정보를 만들어서 조합원에게 제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약간 벗어날 필요도 있습니다. 조합원들이 필요한 정보를 모으고 스스로 구성해서 조합원들끼리 공유할 수도 있습니다. 권한이라고 해서 꼭 의사결정과정에서의 표결권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권한은 말과 행동에서 나오는데, 표결권이 없어 말할 권리만 보장할 수도 있습니다.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에 나오듯,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너는 나에게로 와 꽃이” 됩니다. 한살림이 조합원들의 이름을 끊임없이 불러줘야 합니다. 서로에게 하나의 의미가 되어야 합니다.


요즘 리더십에 관한 얘기가 많습니다. 그런데 리더십은 카리스마나 지도력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념이 분명하면 누구라도 리더십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위기는 이념이 사라진 데서 불거지고 있습니다. 하늘의 별을 보며 자신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면 캄캄한 밤에도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도시의 환한 불빛에도 우리의 삶이 불안과 공포 속에 헤매는 건 그런 별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한살림서울생협이 그런 별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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