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일본의 선거로 자민당은 소위 '55년 체제'(1955년부터 시작된 자민당과 사회당의 양당체제)의 끝을 보게 되었다(1993년 오자와가 자기 계파 의원들을 이끌고 자민당을 탈당하면서 삐그덕거리긴 했지만). 그러니 약 49년의 장기집권체제가 무너진 셈이다.
다소 삐그덕거리긴 했지만 일본 특유의 연합으로 권력을 유지할 줄 알았건만 일본 사회 내에서도 변화의 물결이 불고 있는 셈이다.
오바마의 당선 이후 이어지는 변화의 물결이라고 해야 하나....

물론 오바마나 민주당을 혁신세력이라 부를 수 없는 분명한 한계가 존재한다.
다른 인물이긴 하지만 그 인물들이 표방하고 있는 미래가 우리 세계의 근본적인 대안이 될 수 없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오랜 권력독점의 역사가 끝났다는 점에서 이 변화는 주목을 받을 만하다.

특히 내가 재미있어 하는 점은 풀뿌리운동의 한계를 지적하는 사람들이 늘상 미국과 일본을 근거로 삼았기 때문이다.
미국정치와 일본정치의 보수성을 얘기하며 풀뿌리운동이 전국정치를 바꾸지 못하는 분명한 한계를 가진다고 얘기했던 사람들, 지역사회의 변화가 사회 전체의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한다며 그 한계를 논하던 사람들이 지금은 어떤 새로운 논리를 개발할지 사뭇 궁금하다.
물론 오바마나 민주당의 승리를 풀뿌리의 힘으로만 해석하는 건 분명 억지이다.
변화에 대한 열망이나 인터넷을 통한 소통이 분명 큰 몫을 차지했을 것이다.
그런데 누가 변화와 소통을 꿈꾸는가, 기성정치에 환멸을 느껴 투표하지 않지만 자신의 정책에 공감해 투표할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생각하면, 그것은 아래로부터 조직된 풀뿌리 사람들임이 틀림없다.
아래가 보수화되어 있다면 아무리 변화를 외치고 소통을 해도 그것이 선거에서의 지지로 드러나지는 않을 터이니...
그러니 밑바닥을 흐르는 변화의 기운은 분명 풀뿌리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변화가 한국의 풀뿌리에게 주는 시사점은 무엇일까?

일단 정치를 무거운 과제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정치적인 변화는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래로부터 꾸준히 밀고 나가는 힘이 있어야 어느 시점에서 그 변화가 이루어진다.
그런데 '정치적인 중립성'이라는 신화가 풀뿌리단체들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제는 그 중립성의 틀을 벗어나야 한다.

물론 중립성의 틀을 벗어던지는 것이 특정 정당에 대한 선거지지로 곧바로 이어져야 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정당들이 풀뿌리단체들이 조직하고 있는 사람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자신을 변화시키도록 유도해야 한다. 전 세계 어느 정당에나 계파는 있지만 계파끼리의 소통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고 서로를 증오하는 문화는 우리 사회의 누적된 업보이니 그런 문화를 변화시키도록 유도해야 한다.
내가 아니면 절대로 안 된다는 식의 논의, 나는 참이요 진리며 다른 의견은 위선이고 악이다라는 식의 논의도 사라지도록 유도해야 한다. 그런 변화된 모습을 갖추기 전까지 풀뿌리운동의 활동이 특정 정당에 대한 지지로 이어지기는 어렵다. 그러니 정당에 대한 지지보다는 정책에 대한 지지를 드러내고, 어느 쪽이 풀뿌리운동의 활동에 도움을 줄 환경을 만들고자 하는가를 판단해야 한다.
선거연합은 후보자 나누기가 아니라 그런 정책의 공유를 통해서, 그리고 그런 정책을 실현하겠다는 분명한 약속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정당의 역할 자체를 근본적으로 부정할 필요는 없다. 풀뿌리운동은 권력이 아니라 사람을 통해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데, 그런 변화의 과정에서 권력의 형태도 함께 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람들과 정책에 관해 많은 얘기를 나눠야 한다. 좀 지겹고 신물이 나고 별로 희망이 없어 보이긴 하지만 많은 얘기를 나누고 투표나 선거에 대비하도록 해야 한다.
단 선거나 투표만이 희망인 듯 얘기하지 말고 그런 정치행위를 통해 무엇을 실현하고자 하는지, 사람들의 마음 속에 담긴 진정한 희망을 끌어내야 하고 그 희망을 정책화시키도록 해야 한다.
풀뿌리 사람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며 정치를 논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풀뿌리운동이 지원해야 한다.

시흥시장보궐선거, 제주도 주민소환투표에서 드러나듯이 풀뿌리 사람들의 자신감은 아직까지 10% 근처를 헤매고 있다. 권력의 분명한 잘못이 드러나고 충분히 그것을 심판할 수 있을 때도 사람들은 변화를 선택하지 않았다.
아직까지 사람들의 마음은 변화와 대안을 추진할만큼 자신감을 품지 않고 있다.
현실의 정치는 진공상태가 아니어서 무수한 관계와 많은 일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참여를 수없이 강조해도 그것이 곧바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사람들의 관심이 직접적인 정치행동으로 이어지도록 중간에 많은 징검다리를 놓아야 하는데, 사람들이 돌다리 하나만 두드려보고 돌아서지 않도록, 자신감을 가지도록 손을 잡아주고 등을 두들겨주고 어깨도 걸어보며 함께 가야 한다.
그런 자신감을 불어넣는 방법은 여러가지일 것이다. 나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혀주는 인문학도 그런 방법의 하나이고, 마쓰모토 하지메처럼 지역사회에서 구체적인 변화를 목적으로 삼는 행동계획(action-plan)도 중요하다고 본다.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자신감의 원천도 필요하지만 나는 눈에 보이는 자신감도 필요하다고 본다. 국가나 시장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풀뿌리가 자립할 수 있다면 자신감은 더더욱 강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나는 풀뿌리운동이 서로 나누고 보살피는 '공유의 공간'을 확장시켜야 한다고 본다. 사람들이 개별적인 이해관계로 부서지지 않도록, 공동체의 이해관계(이를 공공성이라 부를 수도 있겠다)를 이해하고 그것을 다룰 수 있는 장이 필요하다. 서로 공유하는 것이 있다면 참여하라고 목 아프게 외치지 않아도 사람들은 참여할 것이다( 나는 참여예산제의 활성화도 어느 정도 그런 부분에 있다고 믿는다).
풀뿌리운동의 애매함은 공동체에 기반한 운동이 이미 공동체가 와해된 곳에서 활동을 펼쳐야 한다는 점에 있을 수 있는데, 다시 공동체를 만드는 작업은 사람간의 관계를 잇는 것만이 아니라 그 관계를 물질화시키고 규범과 제도로 만들 터전이 필요하다.
한때 위에서 내리꽂는 방식으로 'NGO센터'나 '도서관' 등이 논의되기도 했는데, 아래로부터 조직되는 방식의 공유영역 확장 운동이 중요하다.
이런 영역이 확장되는 만큼 나는 사람들의 자신감도 더욱더 강해지리라 믿는다. 실제로 운영해보고 만들어보고 토론하고 합의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의 마음은 점점 강해지고 희망을 구체적인 삶으로 드러내리라 믿는다.

다 쓰고 보니 일본의 선거와 그리 관계가 없는 듯하기도 하지만...^^;;

[작가세계]에 쓴 글입니다.
요즘 분위기 돌아가는 걸 보면 심상치 않네요.
인터넷에서도 망명객과 난민들이 늘어날 듯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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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고라라는 저잣거리

옛날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Socrates)는 저잣거리에서 청년들에게 앎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사는 게 올바른가를 가르쳤다. 왜 그는 학교가 아니라 시장 저잣거리에서 청년들을 가르쳤을까? 당시 소피스트들이 돈 많고 힘있는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가 생활하던 것과 비교하면 소크라테스의 삶은 아주 엉뚱했다.

하지만 그에겐 그렇게 해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앎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삶 속에서 깨달음을 얻어가는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구두공은 구두를 만드는 삶에서, 목수는 나무를 깎고 다듬는 삶을 통해 자신의 지혜와 탁월함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지혜와 탁월함을 서로 견주는 과정에서 시민들은 공동체의 앎과 공공성을 구성했다. 이렇게 앎이 삶과 분리되지 않았을 때에만 좋은 삶을 살 수 있고 좋은 시민이 될 수 있기에 청년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되물어야 했고, 소크라테스는 이런 청년들이 스스로 해답을 찾도록 도왔다.


소크라테스의 무대였던 그리스의 저잣거리 아고라(agora)는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이 아니라 다양한 삶의 질문들이 오고가는 정치적인 장이기도 했다. 서로 가진 것을 나눠야 하는 삶의 필요가 만든 아고라는 앎과 삶이 함께 숨을 쉬는 만남의 장이었다. 새로운 사람들이 만나 물건의 가치를 흥정하고 따지는 과정에서 앎의 폭은 더욱더 넓어졌다. 그리고 아고라에서 열리는 민회는 개인의 고민을 넘어 전체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며 앎의 깊이를 더하는 소통의 장이었다.

고대 그리스만이 아니라 이 땅에서도 장이 서는 곳은 만남과 소통의 장이었다. 먹거리가 있고 축제가 있고 사람 사는 냄새가 풍기는 곳이 장이었고, 많은 수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여 정보와 지혜를 나누고 공동체의 미래를 걱정할 수 있는 공간도 바로 장이었다. 이런 장은 일제 식민지와 군사독재의 탄압을 받으며 사라지거나 물건만 사고 파는 시장으로 변질되었지만 만남과 소통의 필요성은 그런 장의 부활을 기다려 왔다.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공간의 출현은 이런 장을 부활시켰다. 인터넷은 새로운 만남과 소통을 가능하게 했는데, 데이터로 구성된 이 세계에서는 서로 만나고 소통하는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졌고 그 범위도 확장되었다. 더구나 디지털 카메라나 캠코더의 등장, 자유자재로 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있는 유비쿼터스(ubiquitous) 환경 등은 만남과 소통의 방식 자체를 변화시키고 있다. 인터넷은 이전 사회의 시․공간 개념을 뛰어넘은 새로운 현실을 만들고 있다.

이런 속도와 새로움에 힘입어 인터넷은 아고라로 대표되던 고대의 직접민주주의를 부활시키려 한다. 현대의 아고라에서는 내가 굳이 광장으로 나가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네트워크를 통한 전자민주주의(teledemocracy)는 단순한 투표를 넘어 시민들이 많은 양의 문자와 영상정보를 서로 교환하며 의견을 나눌 수 있게 한다. 그런 점에서 [텔레데모크라시](거름, 1994)를 쓴 아터튼(Christopher Arterton)은 인터넷이 커뮤니케이션과 대화, 정보교류에 바탕을 둔 새로운 정치체제를 만들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리고 한국처럼 가부장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정치문화가 뿌리를 내린 곳에서 사회적 약자들은 소통과 만남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인터넷은 그런 제약을 극복하도록 돕는다. 인터넷 세계에서는 나이나 성별, 장애를 감추고 자신이 원하는 인물로 탈바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포스터(Mark Poster)는 컴퓨터 글쓰기가 고정된 역할을 없애고 기존의 위계질서를 혼란에 빠뜨려서 의사소통을 새롭게 배치하고 주체가 속한 시공간을 변화시켜서 주체를 분산시킨다고 본다.[각주:1] 이런 재배치와 분산을 통해 사람들은 자신이 바라는 상상된 정체성을 구성할 수 있다. 그리고 권력과 돈, 지식이 지배하는 현실세계에서는 그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던 사람들도 인터넷에서는 빛을 발하는 고수가 될 수 있다.

실제로 인터넷 세계에서는 청소년들이 어른들과 동등하게 맞짱을 뜨며 논쟁을 벌일 수 있다(이명박 대통령 탄핵서명운동을 발의한 고교생 안단테를 보라!). 몇 살이냐를 따지고 초딩, 고딩이라 비난하기도 하지만 현실세계만큼 나이가 폭력적으로 상대방의 입을 막지는 못한다. 이렇게 누리꾼들은 현실의 제약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자신의 욕망을 표출하고 현실에서는 만들기 어려운 자신들의 공동체를 형성하기도 한다.

그리고 인터넷에서는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경계도 사라진다. 미네르바같은 이가 정부의 경제정책을 비판할 수도 있고, 일반 대중이 진중권을 공격하기도 한다. 비전문가가 전문가를 공격하는 방식을 문제삼을 수는 있지만 뒤집어 보면 그것은 전문가가 대중에게 개입하는 방식이기도 하기 때문에 부작용만을 강조할 수는 없다. 더구나 의견을 말하는 순서도 먼저 로그인한 순서를 따르니 각각의 의견이 똑같이 관심을 받을 수 있다. 이런 인터넷에서의 만남은 이미 만들어진 위계질서를 뛰어넘을 수 있다.

또한 인터넷은 소통의 방식도 새로이 재구성한다. 옛날에는 직접 참여한 사람들만 그 내용을 공유할 수 있었지만 인터넷은 여러 의견과 실천을 저장해서 참여하지 못한 사람들도 그 내용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정보가 필요한 사람들은 정보를 직접 검색할 수 있고 자신의 견해를 보태어 위키피디아(http://www.wikipedia.org/)처럼 집단지성을 구현하거나 UCC로 재창조할 수도 있다. 인터넷은 아무리 하찮은 개인이라도 모든 지식에 접할 수 있다는 계몽주의의 꿈을 기술적으로 실현했다.[각주:2] 또한 동시에 여러 곳에서 벌어지는 토론에 동시에 참여하며 토론을 이끌어 갈 수도 있기 때문에 이런 소통은 기존의 시․공간 개념을 뛰어넘는다.

이렇게 다른 점도 그 장의 성격은 옛날 아고라와 비슷하다. 옛날 아고라처럼 인터넷에서도 물건을 사고 팔고 정보와 의견을 나눌 뿐 아니라 비슷한 취미와 정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뭉치기도 한다. 내가 관심을 두는 취미생활이나 상품 구매에 대한 품평과 정치적인 사안이 맞물릴 수 있다는 점은 그런 세계의 총체성을 증명하는 일이기도 하다.[각주:3] 삶의 공간이기에 인터넷은 여러 가지 다양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고 사람들의 참여를 자극하고 독려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인터넷의 발달로 권위적인 사회, 권력과 자본, 언론이 지배하는 한국사회에서 시민들이 직접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 2008년을 뜨겁게 달군 촛불집회이고, 미디어다음의 아고라(http://agora.media.daum.net/)는 그 변화의 중심에 섰다. 실제 현실에서는 불가능해 보이던 대통령의 탄핵이 인터넷에서는 백  만명을 넘기는 서명을 받았다. 그리고 촛불집회에 나가면 아고라라고 적힌 깃발이 나부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정치, 사회, 문화를 토론하는 공간이 마치 정당이나 시민단체처럼 깃발아래 뭉쳤으니 다른 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현상이다.

촛불집회만이 아니라 그 뒤를 이은 촛불산책이나 명동 무한도전×2도 그런 변화를 반영한다. 아고라와 블로그, 카페 등의 인터넷 공간에서, 그리고 길거리와 광장, 학교와 동네같은 현실 공간에서도 변화의 싹은 조금씩 계속 자라고 있다. 이제 시민들은 영웅이나 지도자가 자신을 대신해주길 바라지 않고 스스로 주권(主權)을 행사하려 한다. 그동안 정치에 무관심한 자기 모습을 반성하면서 책이나 교과서에서 외우기만 했던 민주주의나 민주공화국을 구체적인 삶의 물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각주:4]. 단지 목소리를 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인터넷은 현실세계에까지 영향력을 미치는 가상‘현실’로 성장하고 있다.


인터넷 권력이동

2008년 미국 선거에서 오바마는 흑인으로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흑인이 미국 대통령이 되는 일은 불가능하거나 아주 먼 미래에나 가능하리라 믿었는데 오바마는 그런 예상을 완전히 뒤집었다. 오바마의 정치적인 성공을 보며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의 영향력을 강조했다.


오바마는 블로그 형태의 홈페이지를 운영하며 유권자들과의 적극적으로 소통을 시도했고, 1천만 명이 인터넷 공간에서 오바마를 지지했다. 이 유권자들이 자발적으로 오바마의 전략과 정책을 복사해서 다른 곳으로 퍼날랐고, 그 중 3백만 명은 홈페이지를 통해 선거자금을 내기도 했다. 오바마는 인터넷 네트워크를 만드는 사이트(Social Network Site)인 페이스북(http://www.facebook.com/)과 마이스페이스(http://www.myspace.com/), 트위터(http://www.twitter.com/)와 동영상 제공 사이트인 유투브(http://www.youtube.com/) 등에 자신의 정보를 올리고 사람들이 이것을 자유로이 활용하게 했다.

물론 오바마가 선거에 인터넷을 활용한 최초의 정치인은 아니다. 그런데 오바마는 인터넷을 단순한 홍보의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고 그 세계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활용했다. 선거정보와 정책이 가공되고 복제되어 무수히 퍼져나감으로써 오바마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선거운동을 펼칠 수 있었다.[각주:5] 오바마만이 아니다. 유투트에서 진행되었던 정책토론회 역시 많은 시민들의 관심을 받았다. 2007년 미국 대선을 다룬 유투브 정책토론회에서는 전문가가 아니라 시민들이 직접 후보자에게 질문을 던졌는데, 각 후보당 평균 조회수는 민주당이 약 8만 건, 공화당이 약 1만 6천 건이나 되었다.[각주:6] 그리고 이런 관심은 후보자들의 사이트나 블로그 방문으로 이어졌다.

그동안 사람들은 정당이나 사회단체가 다루는 이슈들, 국회나 청와대같은 곳에서 벌어지는 일만이 정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고라의 저잣거리는 그동안 우리가 정치의 장이라고 믿어온 공간이 아주 좁은 것이었음을 증명한다. 시시껄렁한 동영상이나 드라마 등을 공유한다고 여겼던 유투브가 정책토론회를 진행하고, 블로거나 UCC가 독립언론을 외치며 블로거 저널리즘을 만들고 있다.

심지어 인터넷에서 파워블로그들의 영향력은 정치인이나 기자와 맞먹거나 그것을 능가하고 있다. 그리고 블로그와 블로그를 이어주는 메타블로그의 등장으로 블로그 전문사이트도 엄청나게 성장하고 있다. 올블로그(http://www.allblog.com/)와 같은 메타블로그는 개별 블로그를 서로 묶어주면서 이용자들이 의견을 공유하고 덧붙어 더욱더 풍성한 콘텐츠를 만들게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각주:7]

이런 환경에서 스스로 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가공하여 판단을 내리고 그런 판단을 다른 이들과 공유하려는 시민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 더욱이 인터넷은 정보를 전달하고 공유하는 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췄기 때문에 굳이 내가 정보를 만들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의 정보를 자유로이 복사, 활용할 수 있게 했다(인터넷에서는 내가 직접 글을 쓰지 않아도 내 생각과 비슷한 사람들의 글을 퍼오는 것만으로 내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다).

이런 새로운 흐름은 ‘웹 2.0’이라는 개념으로 정리되고 있다. 기존의 인터넷이 정보를 제공하는 일차적인 역할만을 담당했다면, “웹2.0에서의 웹은 콘텐츠와 서비스 플랫폼 역할을 하게 됨으로써 이용자 스스로가 정보를 생산하고 소비하고, 정보는 양방향으로 소통하게 된다. 플랫폼으로써의 웹! 이것이 곧 웹2.0이다.”[각주:8] 그러니 ‘웹 2.0세대’라는 말은 인터넷에 능한 세대만이 아니라 현실의 부조리에 항의하고 참여하는 능동적인 시민세대를 뜻하기도 한다. 그래서 아고라의 논객 권태로운 창은 이를 “21세기의 시민 민주주의”라 부르기도 했다.[각주:9]

웹2.0의 정신인 개방과 공유, 참여는 능동적인 시민의 가치와 어울린다. 웹2.0의 정신은 자신을 드러내며 개방하고 자신이 가진 지식과 정보를 타인과 나누며 그것을 바탕으로 대중의 자발적인 참여를 끌어내고 있다. 이 정신은 정보와 가치를 독점하며 대중을 계몽하고 이끌려 했던 기존의 사회운동이 가지지 못한 개방과 공유의 정신을 가지고 있다. 한 블로거는 여기에 연결과 협업을 덧붙여 웹 2.0의 정신을 주장하기도 한다. “연결 = 경계를 넘어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자. 협업 = 신뢰를 바탕으로 함께 시작하고 함께 완성하자. 나는 운동의 기본 중의 기본이 소통과 조직화라고 생각한다. 소통과 조직화를 위한 필수조건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위와 같은 개방, 공유, 참여, 연결, 협업의 정신이다.”[각주:10] 물론 이 정신이 누리꾼들의 삶에 지금 온전히 반영되고 있다고 믿기는 어렵다. 많은 점에서 아직 인터넷은 가능성의 장으로 남아있고 이 정신은 그 가치를 구현하기 위한 실천을 필요로 한다.

어쨌거나 인터넷은 현실의 장애물이 소통과 만남을 방해하는 한국사회에서도 새로운 장으로 떠올랐다. 과학수사대(CSI)를 능가하는 누리수사대, 공무원이나 학자를 능가하는 집단지성, 종이신문의 폭과 속도를 앞지른 블로그 저널리즘, 시사잡지를 능가하는 메타블로그 등은 대중의 참여문화를 퍼뜨리고 발전시키는 힘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인터넷의 힘이 강해지는 만큼 현실의 권력과 자본은 그 힘을 길들이려 한다.


인터넷 디아스포라의 출현과 식민화

인터넷의 힘이 가상을 넘어 현실로 침투할수록 현실을 지배하는 권력과 자본의 반격도 거세진다. 아고라에서 활동하던 권태로운 창이나 미네르바와 같은 누리꾼들을 수사하거나 체포, 구속하는 것은 그 반격의 신호탄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인터넷의 힘을 통제하려는 시도는 그 이전부터 있어 왔다. 이미 2007년에 정부는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을 추진한 바 있고, 지금도 4월 국회 통과를 목표로 개정안을 추진하고 있다. 한나라당이 제안한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은 수사기관의 감청대상을 확대하고 통신사업자가 의무적으로 감청설비를 설치하도록 하고 있다. 만일 이 개정안이 통과되면 수사기관은 법원의 영장 없이도 용의자로 지목한 사람의 휴대전화기록이나 IP, 로그기록 등을 통신사에 요구할 수 있다. 그리고 지난 4월 1일 통과된 저작권법 개정안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불법 복제물을 올리는 인터넷 게시판에 대해 3회 이상 삭제 명령을 내린 뒤에 게시판을 최대 6개월동안 폐쇄시킬 수 있게 했다. 또한 정보통신망법안 개정안은 불법정보의 유통을 막는다는 취지로 불특정다수에게 제공되는 정보를 통신사가 모니터링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정치적인 면에서 상황은 더욱 심각한데, 현행 공직선거법은 선거 180일 전부터 후보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글 또는 사진을 인터넷에 올리는 것을 금지한다. 이것은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범하는 것이다. 후보들간의 상호비방을 막는다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이 조항은 시민들의 정치적인 표현을 근본적으로 제한한다(실제로 선관위는 이 조항에 따라 UCC활용을 막았다). 더구나 이 법은 19세 미만의 청소년들의 선거운동도 금지해서 미래시민의 정치참여를 원천봉쇄한다.

이런 법안들이 다소 어지러운 인터넷 세계를 정화시키리라 기대하는 순진한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현실을 보면 그 힘은 언제나 강자보다 약자를 향해 행사되어 왔다(용산참사는 그 점을 비극적으로 증명했다). 그러니 이런 법안들이 인터넷 세계를 공평하게 만들 것이라 기대하는 건 헛된 생각이다. 지금 당장은 문제가 없는 듯하지만 권력을 가진 자의 판단에 따라 이런 조항들은 악법으로 활용될 수밖에 없다.


아렌트(H. Arendt)는 전체주의 국가의 특징을 설명하면서 국가가 그 범죄를 정하고 모든 시민을 잠재적인 범죄자로 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경고한 바 있다.[각주:11] 독일 나치즘이 수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했을 뿐 아니라 그들을 난민으로 만들었듯이, 이런 법안들은 수많은 누리꾼들을 인터넷 디아스포라[각주:12]로 만들 수 있다. 만일 현실세계라면 이런 법안들은 시민에게 정치적인 추방령을 내려 그들을 디아스포라로 만드는 법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법에 따라 경찰과 검찰은 촛불집회에 참석했던 사람들을 구속하고 카페를 운영하는 운영진들을 위협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자기 글을 지우거나 서버를 외국 사이트로 옮기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권력이 인터넷의 자유로움을 억압한다면, 자본은 그 자유로움을 변질시킨다. 자본은 자유로운 인터넷 공간을 사유화된 공간으로 바꾸려고 시도하고 있다. 인터넷 공간을 기업의 마케팅 공간으로 변질시키거나 저작권을 내세워 디지털의 속성인 자유로운 복제를 사유화로 대체하려는 시도가 대표적이다. 이런 현상은 18세기의 인클로저 운동처럼 공유지인 인터넷을 사유화된 공간으로 바꾸고 있다. 권력이나 자본과 결탁해 독점적인 위치를 누려온 언론사들 역시 여론형성과 전파에 미치는 자신들의 영향력을 잃을까 걱정하며 인터넷의 부정적인 면만을 부각시키려 애쓴다.

그리고 대형 포털회사들이 인터넷 세계를 관장하면서 여러 문제점들을 낳고 있다. 일단 누리꾼들이 네이버와 같은 대형 포털을 이용하다보니 그곳의 환경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각주:13] 김헌식은 ‘포털 매트릭스’에 포획된 포털 네티즌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그들이 활동하는 공간은 다른 곳이 아니라 포탈 공간이기 때문이다. 포털은 미디어의 블랙홀이다. 결국 포털은 대중을 다중으로 해체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포털 대중을 만들어 냈다. 기존의 대중문화는 해체되고 포털 대중문화가 만들어진 것이다. 각 매체로 분산되었던 것이 포털 안에 집적되어 하나의 현상을 만들어 낸다.”[각주:14] 실제로 누리꾼들은 포털 사이트에서 토론이나 포털기자단에 참여하기보다 주로 실시간 검색어를 클릭하거나 커뮤니티 게시판의 글을 읽는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블로그를 활용하는 방식도 자료저장(41.6%)이나 개인적인 기록공간(36.4%)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고, 그러다보니 블로그의 일부 콘텐츠를 비공개를 설정하는 경우도 많다. 즉 누리꾼들 스스로가 블로그를 사적인 공간으로 인식하고 블로그를 아는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 네트워크(SNS)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환경에서는 능동적인 시민이 출현하기 어렵다.[각주:15]

이렇게 권력과 자본이 자유로운 생활공간를 장악하는 현상을 하버마스(J. Habermas)는 ‘생활세계의 식민화(colonization of life world)’라 불렀다. 하버마스는 생활세계의 공론장이 위계질서를 무시하고 이제까지 의문시되지 않았던 주제를 다루며 공개적인 토론으로 비판적 공개성을 확립했다고 본다. 즉 공론장에서는 지위가 없는 사람들도 토론을 통해 의견을 제시할 수 있고 여론으로 정부나 기업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런데 하버마스는 수용성이 높고 침투성이 강한 대중매체(라디오, 영화, 텔레비전 등)의 발달과 문화산업(cultural industry)의 성장이 이런 공론장을 점점 변질시켰다고 본다.[각주:16] 대중매체와 문화산업의 발달은 공중에게서 발언권과 공권력에 대한 비판적인 관심을 제거할 뿐 아니라 사생활에도 개입하고 그 삶을 조작한다. 하버마스의 견해를 빌린다면,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공론장의 출현은 생활세계의 식민화 현상을 극복하고 새로운 비판적 공개성을 확립하는 듯했지만 체계의 힘이 이를 다시 식민지로 만들고 있다. 이런 식민화는 개방과 공유, 참여, 연결, 협업이라는 웹2.0의 정신을 파괴한다.

아직 결말이 나진 않았지만 권력이 누리꾼들을 디아스포라로 내몰고 자본이 인터넷 공간을 사유화하고 식민화하려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열심히 즐긴 당신, 떠나라는 그들의 요구에 어떻게 답해야 할까?


망명을 떠나지 말고 그들을 망명보내기

문화는 순간적인 변동보다 오랜 시간 동안 누적된 경험과 삶으로 구성된다. 인터넷 공간에서 새로이 불붙은 능동적인 시민참여의 문화 역시 그런 경험과 삶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현실의 권력과 자본은 그런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만일 그것이 갑갑하고 두려워 짐을 싸 떠날 생각을 한다면, 능동적인 시민의 문화는 구성될 수 없다. 권리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고 쟁취하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떠남은 새로운 가능성을 찾지 못하고 우리가 사는 세계 자체를 파괴시킬 수 있다. 내가 서 있는 이 세계를 포기하지 않을 때에만 우리는 변화의 가능성을 기대할 수 있다.

권태로운 창은 아고라를 “모든 것의 근원이자 부활의 노래”인 바다라고 불렀다. 그의 말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인터넷이 새로운 아고라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 옛날 아고라가 반역과 반란의 장이기도 했듯이, 누리꾼들은 인터넷을 식민화하려는 자들에 맞서 싸워야 한다. 그런 개입은 인터넷만의 저잣거리만이 아니라 실제 세계의 저잣거리에서도 등장해야 한다.

물론 2008년에 촛불집회가 몇 달 동안 이어졌지만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막지 못한 걸 보면 실제 세계의 개입은 분명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짐을 싸 떠나야 할 사람은 시민이 아니라 부패한 권력자와 자본가들이다. 설령 디아스포라로 떠돌지라도 언젠가는 그들을 몰아내고 다른 시민들과 함께 자유롭고 억압이 없는 공동체를 만들고 말리라는 신념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전두환이 아직도 발을 붙이고 사는 이 사회에서 그들이 망명을 떠나는 선례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 아이들이 미래를 꿈꿀 수 있다.

  1. 마크 포스터. 『뉴미디어의 철학』(민음사, 1994), 219~222쪽. [본문으로]
  2. 마크 포스터. 같은 책, 140쪽. [본문으로]
  3. 촛불집회의 한 축을 담당했던 인터넷 동호회 82cook의 김수진은 이렇게 얘기한다. “요리라는 주제에 관심이 있어 모이기 시작한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나면서, 회원들의 관심사는 자연스럽게 요리에서 삶의 지혜, 주부들의 너무나 큰 관심사인 시댁 문제, 패션, 자식교육 등으로 옮겨갔고, 급기야는 그 관심사가 확대되면서 삶의 거의 모든 분야를 접할 수 있는 커다란 커뮤니티가 되었다.”(김수진. 「여성들이 뿔났다」. 『창작과 비평』 2008년 가을호. 102쪽). [본문으로]
  4. “그동안 나라 돌아가는 것에 무관심했던 점에 대해서 속죄하는 마음으로, 지극히 개인주의자였던 내가 ‘우리’라는 개념을 마음속에 품게 됐으며, ‘우리’나라에서 살아갈 후손들에게 제대로 된 나라를 물려줘야 한다는 생각이 뚜렷하게 박혔다.”(김수진. 앞의 글. 107쪽) [본문으로]
  5. “웹에서 오바마 강세현상에 대해 미국 네티즌들은 오바마와 마니아(mania)의 합성어인‘오바마니아’, 버락(Barack) 오바마와 민주주의(democracy)를 합친 Barackacy 등의 신조어를 만들어 지지할 정도였다.”(송경재․민희. 「미국 유튜브 정치(YouTube Politics)의 시민참여: 한국적 함의를 중심으로」. 『정보화정책』 2008년 여름호. 51쪽). [본문으로]
  6. 송경재․민희. 앞의 논문. 50쪽. [본문으로]
  7. 이호영․정은희. 「블로그를 중심으로 본 디지털 콘텐츠의 사회적 확산」. 『KISDI 이슈리포트』. 17쪽. [본문으로]
  8. http://actionbasecamp.net/ [본문으로]
  9. 나명수. “이것이 아고라다”. 『창작과 비평』 2008년 가을호. 94쪽. [본문으로]
  10. 앞의 웹사이트. [본문으로]
  11. 한나 아렌트 지음. 이진우․박미애 옮김. 『전체주의의 기원1』(한길사, 2006), 192~201쪽. [본문으로]
  12. “대문자의 디아스포라Diaspora라는 말은 본래 ‘이산’離散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이자 ‘팔레스타인 땅을 떠나 세계 각지에 거주하는 이산 유대인과 그 공동체를 가리킨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물론 사전상의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날 ‘디아스포라’라는 말은 유대인뿐 아니라 아르메니아인, 팔레스타인인 등 다양한 ‘이산의 백성’을 좀더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소문자 보통명사diaspora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졌다.“(서경식 지음. 김혜신 옮김. 『디아스포라 기행: 추방당한 자의 시선』(돌베개, 2006), 13쪽). [본문으로]
  13. 양적인 측면에서는 네이버가 전체 57.6%의 블로그를 유치하고 있으며 게시물(포스트)의 경우도 59.4%를 차지함으로써 전체 블로그 시장에서 압도적인 지위를 차지한다(이호영․정은희, 앞의 논문, 15쪽) [본문으로]
  14. 김헌식. 『포털 매트릭스: 포털 제국과 문화의 위기』(로크미디어, 2008). 27쪽. [본문으로]
  15. 이호영․정은희. 앞의 논문, 20~24쪽 [본문으로]
  16. “그것들은 공중을 시청자로서 자신의 궤도로 끌어당기는 동시에 공중으로부터 ‘성숙’의 거리, 즉 말하고 반론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한다.…대중매체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는 표면상으로만 공론장이다. 게다가 대중매체가 그 소비자에게 보증하는 사적 영역의 고결함도 역시 환상이다.…공중은 비공공적으로 논의하는 소수 전문가들과 공공적으로 수용하는 소비대중으로 분열된다.”(하버마스. 한승완 옮김. 공론장의 구조변동](나남출판, 2001), 280~285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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