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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1.24 자본주의의 유령들, 우리는 누구의 편일까?(문학동네)
posted by 몽똘 2019.01.24 23:14

                                                                                                         하승우

자본주의 잔혹사와 연대의 전령

 

반가운 연대자, 아룬다티 로이는 가장 낮은 곳, 가장 깊은 곳을 들리는 사람이다. 로이는 사람만이 아니라 벌거벗은 산과 죽은 강, 말라붙은 우물과 이야기를 나누고 손을 잡는 작가이다. 국내에 소개된 다른 저작들에서 그랬듯이, [자본주의: 유령 이야기]에서도 로이는 생명을 갈아 이윤을 만드는 자본주의라는 악마의 맷돌과 그 회전력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에 관해, 그들이 지키려는 생명에 관해 얘기하고, 자신이 보고 들은 바를 작가의 통찰력으로 해석하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잔혹한 학살이 일어나고 있는 인도 카슈미르의 작은 사과 산지 쇼피안을 급하게 들렸다 나오던 로이는 희생자의 아버지에게 급하게 전해 받은 따뜻한 삶은 달걀의 전복적인 힘”(119)을 이야기한다. 온기가 남아 있는 삶은 달걀은 누구도 찾지 않는 곳을 방문한 반가운 이에게나 건네질 수 있는 선물이고, 그 힘은 연대자만이 느낄 수 있다. 우리는 아직 포기하지도 지지도 않았다는. 로이의 글에서는 이 작은 것들의 전복적인 힘이 느껴진다.

로이의 이야기가 우리 삶과 동떨어진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 주변 곳곳에서도 이런 참상들을 목격할 수 있으니. 다만 이 이야기는 인도인의 삶 속으로, 신자유주의에서 배제당한 사람들의 삶 속으로 깊이 들어간다. 그러면서 묻는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서 있냐고.

이 책을 읽는 내내 제주도를 떠올렸다. 미군정과 국가폭력이 만든 4.3이라는 비극적인 참사를 경험한 땅, 끔찍한 비극 이후에도 빨갱이 섬이라는 낙인이 찍히고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관광지로 끊임없이 소비된 땅. 섬을 찾은 외지인에게 슬퍼도 웃기를 강요당하는 섬. 민주화 이후에도 발전을 빌미로 1991년에 제주도개발특별법이 제정되고, 급기야 2006년에는 제주특별자치도 설치와 국제자유도시 조성을 합친 특별법이 제정된 섬.

1991년에 제주도개발특별법이 제정될 당시 고 양용찬씨는 나는 우리의 살과 뼈를 갉아먹으며 노리개로 만드는 세계적 관광지 제2의 하와이보다는 우리의 삶의 터전으로서 생활의 보금자리로서 제주도를 원한다며 분신했다. 사람과 자본의 이동을 자유롭게 한다며 국제자유도시를 추진하고 있는 사람들은 양용찬이라는 이름을 얼마나 의식했을까? 제주도민들은 국제자유도시라는 비전에 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더구나 2006년의 특별법은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JDC, 이하 개발센터)라는 특별한 기관을 승인했다. 제주공항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들리는 면세점이 이 개발센터의 영업장이다. 당시 정부는 개발센터를 위해 내국인의 면세점 이용을 허용했고, 이로서 한 해에 면세점 수입만 5천억원 이상 거두는 대기업이 된 개발센터는 그 이윤으로 제주도를 난개발하고 있다. 신화역사공원, 헬스케어타운, 휴양형 주거단지, 국제문화복합단지, 영어교육도시 등 이름만 들어서는 그 성격을 알기 어려운 개발사업들이 하나둘씩 개발센터의 이름으로 추진되었고 개발센터는 대대적인 개발을 위해 싱가폴과 중국 등의 외국 자본까지 끌어들였다.

특이한 점은 개발센터가 오로지 국제자유도시 개발을 위해 만들어진 국토교통부 산하의 공기업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제주특별법에 따르면 개발센터는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제 147조에 따르면, “개발사업을 시행하려는 자는 도지사의 시행승인을 받아야 한다. 다만, 개발사업을 실행하려는 자가 국가 또는 개발센터인 경우에는 도지사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 즉 개발센터는 도지사의 시행승인이 필요하지 않은 유일한 기업이다. 또한 제 164조 제 1항은 국가 또는 제주자치도는 개발센터가 과학기술단지의 조성, 투자진흥지구의 입주기업에 임대할 용지매입비의 융자, 토지 등의 임대료 감면과 그 밖의 개발사업에 드는 자금의 지원을 요청하면 최대한 지원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한마디로 개발센터가 개발계획을 세우면 국가와 제주도청이 이를 지원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일개 기업이 주민들의 토지를 강제수용하고 마을공동체를 위협한다. 21세기 한국의 민낯인데, 육지 사람들은 이런 현실에 관심이 없다.

아룬다티 로이가 비판하는 인도의 대기업 타타 그룹, 진달 그룹 등은 정부를 등에 업고 군대의 폭력까지 사용한다. 그런 점에서 한국과 인도가 똑같지는 않다. 인도에서는 마오주의 테러리스트라는 딱지가 붙으면, 개발에 반대하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 한국은 그 정도의 폭력적인 상황은 아니다. 그렇지만 용산참사 때 이미 경찰은 도심 테러리스트라는 말을 사용했다. 물리적인 폭력의 강도에서 차이가 있을지언정 그 둘의 방향이 다르다고는 할 수 없다.

특히 압도적 개발 규모 앞에선 그 어떤 반대도 무기력해진다. “길이 1500킬로미터에 너비 300킬로미터의 그 널따란 통로는 초거대 산업지대 아홉 곳, 고속화물 라인, 항구 세 곳, 공항 여섯 곳, 교차로 없는 6차선 고속도로, 그리고 4000메가와트급 전력공장을 포함하는 델리 뭄바이 산업회랑(이하 DMIC)과 연결될 것”(32~33쪽)이고, 그 프로젝트는 "18000만 명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거라고 한다. 그러나 정확히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칠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신도시 몇 곳이 건설될 것이라는 예측과, 그 지역 인구가 현재의 23100만 명에서 2019년에는 31400만 명으로 증가할 것이라는 추산이 제시되어 있을 뿐이다. 7년 만에 말이다.”(33)

제주도에 제2공항을 지으려는 국토교통부나 제주도지사는 말한다. 2025년까지 관광객을 4천 5백만 명으로 늘리려면, 인구 1백만명이 되려면, 성산읍에 제2공항을 지어야 한다고. 7년 만에 관광객 수가 두 배 이상 늘어나고 주민이 1/3이상 늘어날거라 말한다. 하지만 공항을 지으려면 제주도의 오름을 10여개나 깎아내야 하고 천연동굴을 매립해야 한다는 사실은 가볍게 무시된다. 심지어 성산읍 주민들은 국토부가 제2공항 건설을 발표하고 난 뒤에야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제주도청의 산하기관인 제주관광공사의 조사에 따라도 제주도의 환경수용력은 이미 포화상태이고 관광객 2천만명을 넘어서면 혼잡비용과 폐기물처리비용 등으로 사회적 비용이 관광수익을 넘게 된다. 무비자 입국까지 허용하며 국외에서 관광객을 모으고 있지만 정작 지역경제나 도민들의 삶이 더 팍팍해지고 있다는 사실 역시 무시된다. 대체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개발일까?

그리고 현지 주민들이 모르게 진행되는 인도의 공청회와 성산읍 주민들도 모르게 진행되는 제주도 제2공항은 얼마나 다를까? 지역 주민들의 생각도 묻지 않고 추진되는 온갖 개발사업들, 인도와 한국은 얼마나 다를까?

이렇듯 자본주의는 사람과 자연을 갈아 넣어 이윤의 재료로 삼는다. 그렇지만 이런 일이 조용히 진행될 수는 없다. 누군가는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정부 정책과 기업에 맞서고 있다. 강정마을의 4천일이 넘는 투쟁과 삼성전자 사옥 앞 반올림 농성 1천일이 말해주듯 이미 끝나버린 압도적인 싸움처럼 보여도 여전히 싸우는 사람들이 있고 그 존재는 늘 다른 존재의 등불이 된다그리고 언젠가는 로이의 말처럼 단테와다의 죽은 이들도 말을 하기 시작할 것이다. 죽은 사람들뿐만이 아니다. 죽은 토지, 죽은 강, 죽은 산, 그리고 죽은 숲속의 죽은 생물들이 청문회를 요구할 것이다.”(105) 산 자들은 이 요구들을 들을 준비를 해야 하고, 아직 시작되지 않은 요구를 준비할 연대의 전령들이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그러나 이 책에서 로이가 비판하고 있듯이 한국에서도 이런 전령들의 모습을 찾기란 어렵다. 지식인들이 주관하는 이런 저런 행사들은 많지만 죽어가는 것들 곁을 지키며 그 이야기를 전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찾는 건 어려운 일이다.

 

 

누가 자본주의를 돕고 있나?

 

로이가 저주하는 대상은 대기업, 초국적 자본들이지만 분노하는 대상은 바로 지식인들이다. 국가와 기업들은 옛날처럼 노골적으로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을 멈추진 않지만 그걸 드러내놓고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들은 언론과 지식인들을 길들이고 그들을 위한 축제를 연다. “숲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서 그 축제의 후원사들이 한 역할,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들, 발 디딜 틈 없는 감옥들을 다룬 기사는 거의 없었다. 반정부적인 생각을 품는 것조차 재판심리 가능한 범죄행위로 만드는 불법행위예방법과 차티스가르 특별 대중보안법에 관한 기사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지역주민들의 진정을 처리하기 위한 타타 철강의 의무공청회가 실제 그 소재지인 로핸디구다로부터 수백 마일 떨어진 자그달푸르의 지방행정관청 구내에서, 용역 방청객 50명과 무장경비대의 감시 속에서 열렸다는 사실 역시 다루어지지 않았다.”(36~37)

한국의 상황도 비슷하다. 2016년에 국민보호와 공공안전을 위한 테러방지법제정을 막는다며 국회의원들이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를 9일 동안 진행했다. 그런데 당시 반대와 개정 의사를 표명했던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었지만 테러방지법은 전혀 개정되지 않고 있다. 테러방지법이 개정되거나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치인이나 언론, 학자는 없다. 너희가 쓰면 위험하지만 우리가 쓰면 괜찮다는 식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당시 테러방지법은 테러를 예비 또는 음모하거나 그렇다고 의심할 이유가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사찰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았다. 그리고 그런 결정을 내리는 기관이 다른 곳도 아닌 바로 국정원이다. 예를 들어, 테러방지법 제 9조에 따르면, “국가정보원장은 테러위험인물에 대하여 출입국, 금융거래 및 통신이용 등 관련 정보를 수집할 수 있다.” 그리고 국가정보원장은 대테러활동에 필요한 정보나 자료를 수집하기 위하여 대테러조사 및 테러위험인물에 대한 추적을 할 수 있다. 이 경우 사전 또는 사후에 대책위원회 위원장에게 보고하여야 한다.” 로이가 얘기하는 반정부적인 생각을 품는 것조차 범죄행위로 만드는 인도의 불법행위예방법과 의심을 받을 만한 점이 있다는 이유로 추적을 하는 한국의 테러방지법, 얼마나 다를까? 공포를 이용한 통치는 누구에게 이로울까?

로이는 정부와 기업이 시민단체와 활동가들도 길들이고 있다고 비판한다. 민중이 더 이상 봉기하지 않도록 그들의 상상력을 제약하는 대가로 이들은 정부와 기업의 지원을 받고 축제를 연다. 그래서 로이는 가난에는 큰 돈이 걸려 있고, 노벨상도 몇 개 끼어 있다”(49)고 비판한다. 한 때 가난한 사람들의 구세주처럼 얘기되고 노벨상까지 받았지만 그들의 등골을 빼먹고 있는 방글라데시의 그라민은행도 마찬가지이다(이에 대한 생생한 증언은 라미아 카림의 가난을 팝니다』(박소현 옮김, 오월의 봄, 2015)에 적혀 있다). 그래서 로이는 "가난에는 큰 돈이 걸려 있고, 노벨상도 몇 개 끼어 있다"(49쪽)고 비판한다.

대다수 비정부기구들, 특히 기금이 빵빵한 기구들의 임무는 기업의 전 지구화라는 프로젝트를 밀어붙이는 것이지 방해하는 것이 아님을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 말이다. 수십억 달러의 돈으로 무장한 이런 비정부기구들은 세계 곳곳에 침투해 혁명가의 재목들을 월급쟁이 활동가들로, 펀드(공익기금) 유치 전문가로, 지식인들로, 그리고 영화제작자들로 바꾸어놓고, 그들을 살살 달래서 정면대결을 피하게 만들고, 다문화주의, 성 평등, 공동체 발전의 방향으로 인도하고 있다. 그들의 담론은 정체성 정치학과 인권의 언어로 쓰인다. 정의의 개념이 인권산업으로 탈바꿈한 것은 비정부기구와 재단들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개념적 쿠데타였다.”(59)

이는 로이만의 주장도 아니다. 피터 도베르뉴와 제네비브 르바론은 저항 주식회사: 진보는 어떻게 자본을 배불리는가』(황성원 옮김, 동녘, 2015)에서 전 세계의 많은 운동가들이 기업의 언어를 구사하고 기업이나 국가의 신경을 긁을 수 있는 부분들을 자기 검열하면서 한때의 저항이 저항주식회사로 화려하게 변신했다.”고 비판한다. 이들은 그 증거로 운동이 기업의 원리와 방식을 받아들이고 기업형 모금 활동에 집중하며 운동이 브랜드화하는 현상을 지적한다. 안보와 안전을 내세워 시민사회운동을 탄압하는 국가와, 삶을 사유화하고 개인화하는 자본주의의 문제가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는데, 이를 감시하고 비판하고 대안을 조직하는 시민사회운동의 힘은 약화되고 있다는 평가이다.

운동이 프로젝트화되고 비영리를 내세우며 운동의 언어를 잃어가고 있는 것은 이곳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시민운동가 출신의 시장이 통치하는 서울특별시를 보면 그 모순이 잘 드러난다. 한편으로 시민참여, 공동체, 혁신이 얘기되고 있지만 지한에선 도로가 뚫리고 터널이 만들어지고 지하광장까지 생긴다. 그런데 이를 비판하는 시민사회단체의 목소리를 듣기 어렵다. 서울의 그 많은 단체들은, 지식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옮긴이에 따르면, 로이는 이 책의 주제를 현대 자본주의의 작동방식이라 말했다 한다. 예전의 작동방식이 가혹한 착취였다면, 지금의 작동방식은 우리를 길들이고 우리의 생각과 상상력을 체제 속에 묶어놓는 것이다. 그래서 로이는 그 틀을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둠이 내려앉으면 등장하는 유령처럼 이제 밝은 빛에 대한 동경에서 벗어나 포근한 어둠에 안길 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 밤을 도둑맞은 사람들이 유령처럼 배회하며 기득권층에게 위협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자본주의에 대한 위협은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아니라 기득권층의 밝은 성벽을 넘으려는 민중들을 통해 가능할지 모른다.

 

 

유령을 불러들일 안두릴은 어디에?

 

2011년에 미국에서 시작된 오큐파이 운동은 99퍼센트 민중의 힘으로 1퍼센트 기득권의 힘에 맞서겠다고 선언했다. 로이는 오큐파이 운동을 지지하는 미국 뉴스쿨에서의 연설에서 스스로를 마개주의자와 뚜껑주의자로 소개한다. 불평등한 체제의 뚜껑을 덮을 뚜껑주의자, 고삐풀린 부와 재산축적에 마개를 꽂아넣을 마개주의자로서 로이는 다음과 같은 요구사항을 내건다.

첫째, 기업 교차소유를 금지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무기제조사들이 텔레비전 방송국을 소유해서는 안 되고, 채굴기업들이 신문사를 운영해서는 안 됩니다. 기업들이 대학에 기금을 대서도 안 되고, 제약회사들이 공공보건기금을 멋대로 주물럭거려서도 안 됩니다.

둘째, 천연자원과 물, 전력, 건강, 그리고 교육 같은 필수적 사회기반시설은 민영화될 수 없습니다.

셋째, 모든 사람이 주거, 교육 그리고 보건의 권리를 누려야 합니다.

넷째, 부자의 자녀들이 부모의 부를 물려받아서는 안 됩니다.

이 투쟁은 우리의 상상력을 다시금 흔들어 깨웠습니다. 자본주의는 어느새 정의라는 개념을 그저 인권이라는 뜻으로 주저앉혔고, 평등을 꿈꾸는 것을 불경한 행위로 만들었습니다. 우리 싸움의 목적은 체제를 수선해보겠다고 찔끔찔끔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 아예 갈아엎는 것입니다.”(149~150)

 

로이의 말대로 체제를 수선하는 것이 아닌 갈아엎는 전복적인 상상력이 필요하다. 파괴되고 짓밟히는 것들의 목소리를 들어온 로이에겐 이 부조리가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이런 답답함에 로이는 책 곳곳에서 인권운동이나 페미니즘의 문제의식이 반자본주의 운동을 포괄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인권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엄청난 불의들을 인지하거나 어렴풋이라도 이해하기 위한 프리즘 역할을 하기에는 너무 부족하다는 것이다. 또 다른 개념적 쿠데타는 재단들이 페미니스트운동에 개입한 것과 관련이 있다. 인도의 대다수 공식적페미니스트들과 여성단체들은 어째서 그들 자신의 공동체 내의 가부장제와 단다카란야 숲에서 강제이주를 강요하는 채굴기업들에 맞서 싸우는 아디바시 여성 혁명위원회 소속 9만 명의 여성들과 거리를 두려 하는가? 수백만 여성들이 소유하고 일하던 땅을 빼앗기고 쫓겨나는 것은 어째서 페미니즘의 문제가 될 수 없는가?”(60)


지금 이곳 한국에서도 정체성의 정치와 전복적인 상상력을 연결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한 과제이다. 이미 제정된 인권조례들이 폐지되고 같은 사회운동단체에서조차 갈래치기 당하는 상황은 혼란을 낳고 있다. 더구나 정치인에 대한 팬덤이 논리적인 가치판단을 방해하고 특정 언론매체의 영향력이 기본적인 사실확인절차를 압도하는 한국사회에서 체제의 전복을 꿈꾼다는 건 불가능해 보이기도 한다. 외려 한반도 평화라는 급진성이 통일대박이라는 자본주의적인 욕망과 뒤섞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할까? 로이가 그 해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다만 우리가 어디에 서야 할 것인지를 끊임없이 질문한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아라곤은 안두릴이라는 칼을 이용해 유령들과 거래하고 적을 물리친다. 산자의 절박함과 죽은 자의 속죄를 이어줄 힘은 어디에 있을까? 가장 낮은 곳, 가장 엄습한 곳을 찾는 연대자의 눈에는 그 힘이 보일 거라 믿는다. 우리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