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일보=]지난 주 주민소환투표가 실시된 제주도에 다녀왔다. 도지사의 소환 여부를 결정하는 중요한 투표에 제주도민의 단지 11%만이 참여했다. 유권자 수의 3분의 1을 넘기지 못하면 개표하지 못한다는 법규에 따라 11%의 주민들이 내린 결정은 찬반 여부를 밝히지도 못한 채 묻혀버렸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참담한 마음을 감추기 어려웠다.

단지 투표율이 낮아서가 아니었다. 이번 주민소환투표는 유권자의 자유로운 선택을 보장하는 '비밀선거'의 원칙을 어겼다. 김태환 도지사는 소환을 당한 뒤에 노골적으로 주민들의 투표불참을 유도했다. 도지사는 선관위의 공보물에서도 "주민소환에 반대한다면 투표는 안하셔도 됩니다"라며 "투표장에 가지 말아 달라"고 얘기했다. 자연히 투표장에 가서 투표를 한 사람들은 주민소환을 찬성하는 사람들이 되었으니, 실제로는 '공개투표'가 이루어진 셈이다. 개표는 되지 않지만 투표율은 공개되고 서로 잘 아는 사람들이 한 마을에 모여 살다보니 시민의 권리인 투표는 부담스러운 짐이 되었다.

더구나 행정조직들이 조직적으로 투표를 방해했다는 주장들이 있고, 마을 이장이 투표를 방해한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제주의 소리'에 따르면, 제주도 선관위는 총 31건의 위반사례를 적발했고 이 건수는 그동안 총선, 대선 때의 선거법 위반 건수보다 더 많다고 한다. 도지사의 일방적인 정책결정이 주민소환의 이유였던 만큼 공권력은 철저히 중립을 지켜야 했건만 그러지 않아 '관권선거'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게 되었다.

하지만 11%라는 낮은 투표율을 공개투표와 관권선거의 탓으로만 돌리기는 어렵다. 소환 청구 때는 7만7천367명이 서명을 했는데, 투표를 한 사람의 수는 4만6천76명이었다. 그러니 소환을 청구한 사람들조차 모두 투표를 하지 않은 셈이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지만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 했는데, 그런 모습은 부족했다. 자연히 투표에 나선 사람들만 고스란히 그 책임을 뒤집어쓰게 되었다.

더구나 제주도 밖의 사람들은 이번 주민소환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영리병원이나 해군기지, 케이블카라는 사안이 나와 무관한 듯하나 이런 사업들은 분위기를 타기 마련이다. 특히 한국처럼 다른 지역의 사례를 모방하기 좋아하는 곳에서 그런 분위기는 다른 지방자치단체의 정책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제주도 주민소환투표는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어느 지방자치단체에서나 이미 벌어지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벌어질 수 있는 사건이다.

하지만 힘을 모아 함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노력해야 했을 사람들조차 투표에 무관심했다. 한나라당의 독주에 맞선다고 외치던 정당들조차 주민소환과 관련해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았다. 성명서 한 장 제대로 발표하지 않고 있다가 투표가 무산된 뒤에야 한나라당을 공격하는 성명서를 발표했을 뿐이다. 한국의 정당들은 권력에만 관심을 둘 뿐 머슴이 주인을 어떻게 섬기고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중앙의 여론싸움에만 관심을 가질 뿐 지역사회에서 벌어지는 소소하지만 중요한 결정들을 항상 무시한다.

그러니 지방의 머슴들은 갈수록 오만해진다. 지난 8월 서울시는 탈시설을 요구하며 농성을 하는 장애인들에게 불법농성이라며 활동보조서비스를 제공하지 않겠다고 통보했다가 나중에 그 결정을 철회했다. 그 뒤에 전주시와 청주시도 합법적인 범위 내에서만 장애인의 활동을 보조해야 한다는 공문을 관련 기관에 내려보냈다. 장애인도 응당 시민이고 권력의 주인인데 한국의 머슴들은 마치 주인을 머슴처럼 취급하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주인이 머슴의 일에 무관심하면 안 된다. 그런 무관심이야말로 우리 사회를 부정과 부패의 수렁으로 밀어넣을 것이다. 주인을 얕잡아보는 머슴은 오만할 수밖에 없다. 더 이상 머슴만 탓하지 말고 주인임을 선언하고 주인답게 행동해야 한다. 중앙정치의 혼탁함만 탓하지 말고 내가 사는 지역의 정치에 관심을 두고 오만한 머슴들을 심판해야 한다. 그게 바로 민주주의이다.

한국의 현대사에 여러 비극이 있었지만 제주도 4․3만한 비극은 없다. 1947년 3월 1일 경찰이 기념행사를 치르던 주민에게 발포해 6명이 사망하면서 비극은 시작되었다. 그 뒤 1년 동안 2,500여명의 주민이 감금되거나 고문을 당했고, 48년 4월 3일 무장대가 경찰지서와 우익단체를 공격했다. 1954년 한라산 금족지역이 개방될 때까지 7여년 동안, 4․3사건 위원회 보고서를 따르면 제주도민의 약 10%인 2만 5천명에서 3만명이 희생당했다(그 중 86.1%가 군대나 경찰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한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저질러진 이 학살은 제주도민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한 증언자는 누이를 산에 묻고 돌아오니 온가족이 죽어 있더라며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2003년 10월 노무현 정부는 4․3에 대해 공식적으로 과거 권력의 잘못을 사과하며 상처를 달래는 듯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 국방부는 교과서에서 4․3을 “남로당의 폭동지시에 의해 발생한 좌익세력의 반란”이라 규정할 것을 요구하고, 심지어 소설가 현기영의 『지상의 숟가락 하나』라는 작품을 ‘불온서적’으로 규정했다. 최근 벌어지는 많은 다른 일들처럼 역사의 시계바늘도 거꾸로 돌아가고 있는 셈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역사는 더 이상 역사이기를 포기하고 바늘을 멈춘 채 권력을 가진 자들의 노리개가 되고 있다.

역사만 노리개감이 되는 건 아니다. 제주도민들의 삶은 또다시 육지를 지배하는 사람들의 노리개가 되고 있다. 2007년 국방부는 제주도 강정마을에 주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규모 해군기지를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밝혔고 그 계획을 은밀히 추진하고 있다.

얼마 전 강정마을을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 서귀포에서 제주도 올레길을 따라 걸으며 찾아간 그곳은 아름답고 고즈넉한 포구였다. 해군기지추진단이라 이름붙인 콘테이너 박스만 없다면 아주 평화로울 곳이었다.

그런 곳에, 소위 세계평화의 섬이라 불리는 제주도에 해군기지를 만들겠다는 해괴한 발상은 누구의 머리에서 나왔을까? 주민들의 반대를 줄이기 위해 사용하는 ‘민군복합형 관광미항’이라는 해괴한 말은 핵을 사용하지 않는 대규모 재래식 폭탄을 뜻하는 ‘친환경 폭탄’처럼 기괴한 우리 현실을 드러낼 뿐이다. 하지만 더 이상 아름다움과 더러움을 뒤섞어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그런 말들이 우리를 속일 수는 없다.

일제 식민지 시기에는 일본 본토 상륙을 막는 최후의 전쟁기지로 사용되었고, 해방 이후에는 미군정과 육지에서 건너온 우익단체의 발에 짓밟혔던 제주도는 지금 시험대에 서 있다. 한반도 최남단에 만들어지는 해군기지가 우리의 목적을 위해 사용되리라 생각하는 무뇌아들은 그리 많지 않다. 해군기지의 건설은 외부의 정치상황, 정확히는 동북아나 국제정세가 또 다시 제주도민과 한반도 주민의 삶과 생명을 좌우하리라는 것을 뜻한다.

물론 평택에서 그랬듯이 정부는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려 할 것이다. 그리고 어느 것에도 호소할 길 없는 힘없는 주민들은 또다시 돈 몇 푼 쥐어든 채 쫓겨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언제나 모든 사건이 그렇게 끝날까? 그 무엇도 자신들을 돕거나 보호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언제나 순순히 물러나기만 할까?

최근 어느 정치인은 무더기 법안통과를 시도하며 ‘전쟁’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에게는 이 표현이 하나의 정치적 수사에 지나지 않았을 수 있다. 하지만 그동안 끔찍한 고통에 시달려온 사람들에게 그 표현은 단지 수사가 아니라 순간적으로 드러난 일그러진 현실의 진실인 셈이다. 정치가 극단으로 치닫을수록 비극은 우리 앞으로 성큼 다가선다.

방치된 세상은 흘러가지 않고 오히려 그 끝으로 향한다. 그래서 우리는 호소할 곳 없는 사람들의 호소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전쟁을 막을 정치에 관심을 쏟아야 한다. 잠들지 못하는 남도는 우리의 미래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