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정당들이 모두 청년에게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가장 보수적인 새누리당마저도 27세의 이준석 씨를 비상대책위원으로 선정하고, 27세의 손수조 씨를 국회의원 후보로 공천했다. 민주통합당은 청년비례대표를 공개모집하고 경선을 통해 4명을 후보로 뽑았다. 통합진보당 역시 2030 국회의원 만들기 ‘위대한 진출’이라는 경선오디션을 통해 31세의 김재연 씨를 후보자로 선출했다. 녹색당에서는 ‘녹록하당’이라는 청년모임이 활동 중이고, 진보신당은 “3포 세대에 연애를 허(許)하라”라는 슬로건으로 청년정책을 제안했다. 그리고 안철수 교수 등이 강연했던 희망콘서트에서 자원활동했던 청년층을 중심으로 청년당이 만들어졌다.


청년정치의 등장이라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뜨거운 열기가 정치현장에서 뿜어지고 있다. 제 18대 국회의원의 평균연령이 53.5세라는 점을 고려하면, 20, 30대의 정치진출은 정치란 연륜을 필요로 한다는 잘못된 상식을 깨는 긍정적인 현상으로 평가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열기가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올지는 의문이다. 제 19대 국회의원 공천결과를 보면, 새누리당의 평균연령은 55.3세, 민주통합당의 평균연령은 53세이다. 두 당만 놓고 보면, 청년대표들은 낙동강 오리알이 될 수밖에 없다. 과연 이런 열기가 청년의 세력화나 새로운 정치의제의 등장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청년은 실재하는가?


청년의 삶이 주요한 사회이슈로 부각된 것은 처음이 아니다. 이미 1990년대에 ‘신세대’나 ‘X세대’라는 세대담론이 있었고, 2000년대 후반에는 ‘88만원 세대’가 화두로 떠올랐다. 세대담론의 속성상, 그 담론은 담론에서 배제된 사람들(非대학생)을 만들고 세대로 호명된 사람들 내부의 차이(계급이나 계층의 차이)를 감춘다. 그리고 계속되는 새로운 호명은 언제나 기존 담론의 쇠퇴를 불러왔다. 지금의 청년담론은 이런 관행에서 벗어났을까?


청년이 하나의 존재로 실재하려면 그들을 묶을 공통의 문제나 집합정체성이 필요하다. 즉 기존의 계급이나 계층논의에 포섭되지 않는 독특성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 지금 한국사회에 그런 독특성이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을 먼저 던져야 한다.


이번 총선에서 20, 30대 후보들은 하나같이 청년실업과 20대의 정치적 발언권을 얘기한다. 정당들도 청년정책으로 대학생 주거지원, 대학구조 개혁, 청년 고용 및 노동정책 등을 얘기한다. 청년을 전면에 내세운 청년당의 정책 역시 국공립대 무상교육 및 사립대 반값등록금, 청년 창업․창직 기금 100조 조성 및 해외 일자리 100만개 창출을 주요 의제로 내세웠다.


그런 공약과 정책이 청년들의 삶을 개선시킬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그들만의’ 문제일 수는 없다. 한국사회에서 주거와 노동시장에서의 배제가 청년만의 문제일까? 그리고 20대의 대학생 비중이 80%를 넘는 사회라 청년정책이 대학생을 배제할 수 없지만 정책의 수혜층이 너무 빤하다. 대학생의 삶도 고되지만 실업계 고등학교나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청년들의 삶은 더욱 심각한 위기에 노출되어 있다(사회는 이들을 시민이나 주민의 범주에 잘 포함시키지도 않는다).


한국사회에서 20대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해결책이 특정 세대로 한정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청년정치 논의는 일종의 해프닝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청년정치가 제 길을 가고 있나?


그런 점에서 지금의 청년정치는 ‘그들만의 리그’로 제한될 가능성이 높다. 더구나 오디션이라는 기이한 방식으로 정치신인들을 뽑는 과정이 과연 민주적일까? 그런 과정에서 청년의 의제화와 정치세력화가 정말 가능할까?


청년당이 공직피선거권을 19세로 낮추자는 정책을 내세우고, 녹색당과 진보신당도 이를 정책으로 만들려고 한다. 피선거권이 낮아지고 20, 30대의 세대별 집단투표가 실현된다면 젊은 정치인들이 많이 배출될 수도 있다.


하지만 정치세력화만으로 청년정치가 활성화되기는 어렵다. 인물정치에서 정책정치로의 전환을 모색하려면, ‘청탁․시혜담론’에서 ‘요구․권리담론’으로의 근본적인 전환이 필요하다. 대표에게 이것저것을 청탁하고 고마워하는 대의정치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청년을 비롯한 그 어떤 존재의 정치세력화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적어도 대학생이 대학에서조차 기본적인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학생인권조례를 비롯해 시민의 시민권, 사회권을 강화시키려는 시도들이 하나같이 심각한 도전을 받는 이 한국사회에서는 말이다. 각자가 자신의 몫을 요구해야 그 공통의 몫의 실체가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다.


그리고 경제민주화 없이 정치민주화는 불가능하다. 청년에 대한 시혜적인 조치가 아니라 일하고 노는 문화와 노동조건 자체가 변해야 한다. 많은 일자리가 아니라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야 하고, 많이 일하는 게 아니라 적게 일해도 정당한 대우를 받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해고는 살인이다’는 명제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국사회에서 그런 변화를 이루려면 노동현장에 깊숙이 관심을 가지고 개입해야 한다. 이타적인 연대가 아니라 ‘예비노동자’로서의 요구가 필요하다. 지금의 청년정치는 어떤 가능성을 일구고 있을까?



청년에게 정말 미래가 있을까?


단지 세대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인 위기에 맞서야 청년정치가 가능하다. 고장과 사고가 자주 일어나도 그 소식조차 제대로 알 수 없는 핵발전소가 이 땅에 이미 21개나 있다. 청년의 미래를 백날 얘기해 봐도 핵발전소 사고 하나면 모든 기반이 사라진다. 이런 근본적인 위기 상황에서 어떤 미래를 얘기할 수 있을까?


20대의 활발한 정치참여가 새로운 정치문화를 만들고 있다고 얘기하지만 아직까지 그 변화를 실감하지 못하겠다. 그냥 과거의 담론들이 유령처럼 되살아와 정치권 언저리를 배회하는 모습만 보일 뿐이다. 20대가 정치주체로서 현실을 살려면 ‘현장’이 필요하다. 정치에서는 빠른 속도의 소통도 중요하지만 악착같이 달려드는 활동도 필요하다. 그런 활동이 펼쳐지는 곳이 바로 현장이다.


멀리 볼 필요 없다. 대학부터 시작하자. 정치는 이곳에서도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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