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을 달궜던 촛불은 잦아들고, 이명박 정권은 그 남은 불씨를 없애느라 여념이 없다. 이명박 정권은 아고라의 논객들을 구속했고 조중동 광고중단운동을 펼쳤던 사람들에게 유죄를 선고했으며 안티이명박을 외치는 카페의 운영진들까지 위협하고 있다. 그러면서 헌법이 보장하는 ‘결사의 자유’나 ‘사상의 자유’는 무의미한 권리목록으로 변하고 있다.

심지어 정부는 삼권분립의 원칙을 위반하고 사법부의 재판에까지 개입해서 촛불집회 참여자들을 범죄자로 몰아가고 있다. 그리고 인터넷 미디어의 힘을 깨달았는지 통신비밀보호법, 저작권법, 정보통신망법 등을 총동원해서 ‘표현의 자유’에 족쇄를 채우려 하고 있다. 대중매체의 상황도 비슷하다. 정부는 방송통신위원회를 앞세워 YTN과 KBS를 장악하고 MBC로 그 칼끝을 겨누며 민주주의의 기본이라는 ‘언론의 자유’마저 짓밟고 있다.

이런 정부에 맞서는 시민사회단체들의 상황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이다. 용산재개발과 관련해 5명의 애꿎은 생명을 앗아갔으면서도 정부는 사과는커녕 관련된 시민사회단체들을 벼랑 끝으로 몰아가고 있다. 그러면서 정부는 지역토호의 중심세력인 새마을운동중앙회와 한국자유총연맹과 손을 잡고 ‘3대 신국민운동’을 추진하고 있다. 옛 것이 가고 새로운 것이 자리를 잡아야 할 시기에 우리는 낡은 것의 부활을 목격하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2008년의 전복적인 촛불은 호된 탄압을 받으며 2009년을 보내고 있고, 1년을 10년처럼 보내는 피로감은 올 해도 여전할 듯하다. 양극화를 비롯한 경제위기와 식량, 에너지 위기 등 온갖 위기가 누적되어 온전히 삶을 지키기조차 힘들고 희망적인 전망은 보이지 않는다. 여러 지식인들이 이런저런 전망들을 제시하고 있지만, 2008년 거리의 전복이 기존의 모든 권위에 물음표를 붙였기 때문에 그 전망은 외로운 메아리로 울려 퍼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정치를 기대할 수 있을까? 변화를 꿈꾸는 사람들이 기대하듯이 촛불은 계속 이어질 수 있을까?

 

 

I. 대의민주주의는 웃음을 바라지 않는다

 

미국의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 Arendt)는 사람이 힘에 눌리거나 설득을 당하지 않고 무조건 복종을 받아들일 때에만 권위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얘기한다. 예를 들어, 부모가 아이를 때리거나 아이와 논쟁을 벌이는 것은 권위의 상실을 불러온다. 왜냐하면 아이를 때리는 순간 부모는 권위가 아니라 폭력으로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이고, 아이와 논쟁하는 것은 아이와 부모가 동등하다는 점을 뜻하기에 권위가 서지 않는다. 권위는 자신을 존경하는 곳에서만 확립될 수 있기 때문에, 그 권위의 가장 강력한 적은 경멸이고 상대를 경멸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웃어버리는 것이다.[각주:1] 그래서 움베르토 에코(U. Eco)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 나오듯, 권위는 웃음을 철저하게 금지한다.

2008년 촛불집회의 파괴력은 단순히 시민들이 정부의 쇠고기수입정책을 직접 반대했다는 점, 그리고 10대 청소년에서 유모차 부대까지 새로운 정치주체들이 등장했다는 점에만 있지 않았다. 촛불집회의 힘은 기존의 권위를 비웃으며 그것을 해체시켰다는 점에도 있었다. 청소년들이 권력의 핵심인 대통령을 쥐박이라 부르며 비웃었고, 아고라 논객들은 정부의 정책을 비웃었다. 카메라와 노트북을 든 누리꾼들은 신문이나 방송의 권위를 비웃었고, 전경차를 끌어내던 시민들의 밧줄이나 닭장투어, 국민토성은 경찰의 권위를 비웃었다. 아고라의 깃발은 사회운동단체들의 깃발을 비웃었고, 내가 직접 참여하고 결정하겠다는 시민들의 결심은 대의민주주의 자체를 비웃었다.

웃음의 전복적인 힘은 대표나 전문가들의 권위에 의지하는 대의민주주의 질서를 헝클어버렸다. 대의민주주의는 명성이나 돈, 학위를 가진 대표가 선거를 통해 가진 것 없는 유권자의 동의를 얻어 지배하는 체제이기 때문이다.[각주:2] 대의민주주의에서 대통령이나 국회의원같은 대표는 ‘무지한’ 유권자의 통제를 받지 않고 그들의 동의만을 구한다. 다음 선거에 유권자는 다른 대표를 뽑을 수도 있지만 그 자신이 직접 대표로 나서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자신은 권위를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치를 정치인들의 손에, 경제를 기업인들의 손에, 학문을 지식인들의 손에 맡기고 시민이 먹고 사는 일에만 몰두해야 한다는 대의민주주의의 충고는 촛불집회에서 그 힘을 잃어버렸다. 따라서 촛불 이후 시민들은 대의민주주의로 다시 돌아가거나 대의민주주의의 틀에 갇힐 수 없었다.

그러자 대의민주주의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거리의 웃음을 금지하려 한다. 권력이 평범한 시민과 자신의 차이점을 드러내는 가장 단순한 방식은 공권력을 폭력적으로 동원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시민을 구속하거나 폭행해서 자신을 비웃는 대가가 얼마나 비싼 것인지 깨닫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웃음의 힘이 배가 되지 못하도록 사람들이 모이지 못하도록 광장을 없앤다.

그리고 웃음의 전복적인 힘을 없애는 더욱더 근본적인 방법은 그 자신도 웃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복적인 힘을 가진 웃음이라도 그것이 상투화되면 웃음은 그 힘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권력은 대의민주주의를 비웃는 웃음을 따라서 그 자신도 대의민주주의를 비웃기 시작한다. 권력이 스스로 대의민주주의의 기본적인 절차마저 무시하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다시금 대의민주주의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와 관련해 체코의 작가 밀란 쿤데라(M. Kundera)는 재미있는 얘기를 들려준다. 세계의 합리적인 의미를 부정하는 악마가 질서를 비웃는 신무기인 웃음을 만들어내자 천사는 그 웃음소리를 듣고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 어떤 것으로도 웃음의 악마적인 힘에 저항할 수 없자 천사는 악마의 전략을 따라 같이 웃기 시작했다. 악마가 웃음에 사물의 부조리를 담았다면, 천사는 웃음에 이 땅의 모든 것이 올바르고 질서를 유지하기 때문에 아름답고 선다하는 의미를 담았다. 그래서 웃음은 전혀 다른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가지게 되었다.[각주:3]

이렇게 대중의 전복적인 웃음을 변질시키는 천사의 웃음은 기득권층이 변화를 가로막기 위해 자신의 힘을 ‘총체적으로 동원’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서구에서 68혁명이 일어났을 때 미국의 사상가 마르쿠제(H. Marcuse)는 저항이 있다 한들 기득권 체제가 바로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그 체제가 반(反)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마르쿠제는 기성사회가 가장 자유로운 상상력마저도 체계적으로 남용하면서 우리 현실을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로 만들 수 있다고 경고했다.[각주:4] 왜냐하면 기성체제는 공권력의 이름으로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하면서 자신의 상대방에게 폭력의 딱지를 붙일 수 있기 때문이다. 체제의 적은 깨끗하게 정리되어야 할 불결한 존재인 빨갱이, 좌파, 이주노동자 등의 구체적인 인격으로 나타나고, 공권력은 유색인종이나 히피, 급진적인 지식인들에게 폭력을 집중시킨다. 이런 공격성의 증가와 함께 대중매체는 사실적인 보고를 해설이나 평가와, 정보를 선전과 뒤섞어 진리를 혼동시킨다(정보화 사회는 이런 혼동의 속도를 더욱더 빠르게 한다). 그래서 이제는 정보의 독점만이 정보의 남발 혹은 왜곡이 더욱더 큰 문제를 낳는다. 이런 분석을 통해 마르쿠제는 대항운동이 권력이 강제하는 법적․초법적인 억압과 “내부의 이데올로기적 갈등과 조직의 결여” 때문에 위기를 겪으리라 예상한 바 있다.[각주:5]

지금 우리 현실도 그리 다르지 않다. 웃음은 대의민주주의를 위기로 몰고 가지만 대의민주주의는 그 웃음을 왜곡시켜 다시금 자신의 위기를 벗어나 자각한 시민들에게 반격을 가할 수 있다. 웃음의 힘은 강하지만 대의민주주의의 힘 또한 쉽게 무너지지 않을 만큼 강하다. 그렇다면 웃음을 넘어선 또 다른 힘이 필요한 걸까?

 

 

II. 촛불집회는 카니발이었나?

 

2008년 촛불집회의 경험은 참여한 시민들에게 정부에 대한 비판적인 의식만이 아니라 즐거움도 줬다.[각주:6] 그런 새로운 시위문화를 주목하면서 여러 연구들이 촛불집회와 카니발을 비교했다.[각주:7] 분명 촛불집회는 “삶 자체가 놀이를 하는 것이고, 이 놀이는 잠시 삶 자체가 되는 것”, “웃음의 원리 속에서 구성된 민중들의 제2의 삶이며, 민중들의 축제적 삶”[각주:8]인 카니발과 많이 닮았다. 특히 카니발의 웃음은 양면적 가치를 가진다는 점에서, 즉 “유쾌해하기도 하고 환호작약하기도 하며 동시에 조소적이기도 하고 비웃기도 하는데, 부정하기도 하고 동시에 긍정하기도 하며, 매장되기도 하며 부활하기도 한다”[각주:9]는 점에서 체제의 정형화된 웃음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만들 수도 있다.

러시아의 사상가 바흐찐(M. Bakhtin)이 주목했던 카니발은 일상생활의 규범과 금지들을 넘어서 새로운 의사소통과 만남의 형식을 만든다. 공식적인 진리와 지성의 엄숙함을 조롱하고 비웃는 카니발은 그로테스크한 광기를 표현하는 민중의 공론장, 민중이 벌이는 축제이다. 나와 너의 경계를 넘어 몸과 마음으로 우리를 구성하는 “카니발은 대화와 공동체의 의식이며 사람들을 해방시키고 함께 참여케 함으로써 공동생활에 참여하도록 만든다. 폭력적 파괴의 형태인 혁명과 달리 카니발은 대화 속에서 이루어지며 반항의 유쾌한 몸짓이다.”[각주:10] 웃음을 배제하는 혁명과 달리 카니발은 반항과 저항에 소통과 즐거움을 더한다.

그런데 촛불집회가 바흐찐이 말했던 카니발의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카니발은 모든 위계질서를 파괴하며 군중을 “민중의 방식으로 조직화된 전체로서의 민중”으로 묶는 특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런 카니발의 과정에서 민중은 “그 몸의 육체적 접촉까지도 일정한 의미”를 갖고 “개인은 자신이 집단에서 분리될 수 없는 부분임을, 민중의 거대한 몸의 한 기관임을” 느낄 정도이다.[각주:11] 심지어 카니발은 모든 계급과 연령을 동등하게 바라보게 한다.[각주:12]

그러나 한국의 촛불집회는 기존의 권위와 질서를 완전히 파괴하지 못했고 그러다보니 시간이 흐르면서 기존의 성인/남성 중심의 위계와 계급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청소년과 여성들은 점점 운동의 뒷전으로 밀려났고[각주:13], 촛불집회를 계급의 시선으로 재단하려는 시도도 있었다.[각주:14] 촛불집회가 이런 위계질서와 계급적인 균열들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참여한 주체들은 개별적인 자각을 했을지언정 집단적인 자기변형을 경험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내용만이 아니라 그 형식을 본다면 촛불집회는 카니발과 다른 특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촛불집회는 인터넷이라는 개별화된 시공간을 매개로 출현했기 때문이다. 커넥터(connector)나 노드(node), 허브(hub)라는 인터넷 형식은 사람들을 하나의 민중이 아니라 사회화된 개인으로 만들었다. 이런 개인들은 자신의 주체성을 포기하지 않는 한에서만 집단적인 흐름에 동참했다.

또한 촛불문화제나 촛불집회가 촛불산책이나 명동무한도전×2와 같은 다른 형태로 이어지며 전환되기는 했지만 이명박 정권이 물러날 것을 외치는 촛불집회의 함성은 보편적인 세계관에 도전하는 근본적인 웃음을 만들지도 못했다.[각주:15]

그렇다면 대의민주주의의 균열선과 개별성, 세계관을 넘어설 수 있는 카니발은 어떻게 구성될 수 있는가? 100일을 넘기며 진행되었던 촛불집회는 일상생활과 분리되어 있었기에 그 역동성을 확장시킬 수 없었다. ‘생활정치’라는 개념이 주장되기는 했지만 그 개념 역시 일상과 분리된 공허한 메아리로 그쳤다. 일상과 분리될 경우 웃음과 카니발의 전복적인 힘은 신데렐라의 무도회처럼 12시를 넘기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일상과 분리되지 않은 전복의 힘이 필요하다.

 

 

III. 일상을 전복하자!

 

미국 대통령 오바마가 자신의 정치적 스승이라고 밝히기도 했던 미국의 빈민운동가 사울 알린스키(S. Alinsky)는 생활 속의 변화를 추구했다. 왜냐하면 세상을 바꾸려면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서 시작해야 하고 변화를 두려워하는 수동적인 대중과 함께 가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알린스키는 기존 질서를 무조건 부정하지 말고 그것을 적절히 활용하며 때로는 넘어서는 다양한 방식을 개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각주:16]

실제로 알린스키는 재미있고 유쾌한 여러 가지 운동을 고안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를 몇 가지 들자면, 빈민지역을 조직하려는 조직가는 이런 물음을 던지며 사람들을 만난다.

조직가: 저 빈민가 건물에서 살고 있습니까?

답변: 예. 그런데요?

조직가: 도대체 저기에서 왜 살지요?

답변: 무슨 말이오. 저기에서 무엇 때문에 살다니? 그럼 어디에 가서 살란 말이오? 나는 생활보호자요.

조직가: 아아, 그러면 저기에서 집세를 내고 있겠군요?

답변: 이봐요, 장난치는 거요? 웃기는군! 어디 돈 안 내고 살 수 있는 데가 있소?

조직가: 음, 저곳은 쥐나 벌레들이 우글거리는 곳처럼 보이는데요.

답변: 당연하지요.

조직가: 집주인에게 무슨 조치를 해 달라고 해 본 적이 있습니까?

답변: 집주인에게 무언가 해 달라고 해 보았느냐고! 그게 싫으면 당장 나가. 집주인은 틀림없이 그렇게 말할 거요.

조직가: 집세를 내지 않으면 어찌 될까요?

답변: 십 분 안에 나를 내쫓을 거요.

조직가: 음, 저 건물에 있는 사람이 아무도 집세를 내지 않으면 어찌 될까요?

답변: 글쎄, 쫓아내기 시작하겠죠.……어어, 알다시피 모두를 쫓아내려면 힘이 들겠죠, 그렇지 않을까요?

조직가: 예, 아마 그렇겠죠.

답변: 이봐요, 당신, 뭔가 있는 모양인데. 좋소. 당신, 내 친구들 몇 사람 만나보시겠소. 한 잔 합시다.”[각주:17]

또 다른 예도 있다. 알린스키는 미국 은행이 가난한 흑인청년들에게 대출을 거부하자 흑인청년들에게 매일 잔돈을 나눠주고 은행에 가서 예금을 하게 했다. 아무리 잔돈이라도 예금을 하겠다는 것을 막는 법은 없었기 때문이다. 매일 수십 명의 흑인들이 은행 창구 앞에 서있자 시간이 많이 걸리고 다른 고객들이 거래은행을 바꾸기 시작했다. 결국 그 은행은 흑인청년들에게 돈을 대출해야 했다.[각주:18] 그리고 백인 엘리트 계층이 자신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 않자 알린스키는 심포니 오케스트라 공연 티켓 200장 정도를 사서 흑인들에게 나눠준 뒤 그들이 배불리 식사를 하고 공연장에 가서 방귀를 뀌며 위협하는 전술을 쓰기도 했다. 또한 1971년에 일본을 방문한 알린스키는 재일동포들이 사는 곳을 방문하고 난 뒤에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의 집에서 쥐를 다 잡아서 차에다 싣고 도쿄의 긴자 거리에 가서 다 풀어 놓으시오. 거리의 잘난 사람들이 놀라면 ‘뭐 그렇게들 놀라시오. 우리는 이들과 같이 사는 데요’ 하시오”[각주:19]

알린스키가 이런 기발한 방법들을 쓴 것은 세상의 주목을 받고 운동을 성공시키기 위해서였지만 평소에 유머감각을 강조했던 그의 철학 탓도 있었다. 알린스키는 부조리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활동가들이 유머감각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머감각을 가져야 “확신을 가지지 않고 자유롭고 편견 없는 마음으로 탐구하며 독단적 교리를 혐오”할 수 있고 “그가 모순을 인지하고 그 의미를 알 수 있도록 도와”주며 “인류에게 알려진 가장 힘 있는 무기는 풍자와 조롱”라는 점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각주:20]

일본의 궁상스러운 청년 마쓰모토 하지메(松本哉)도 알린스키처럼 일상 속의 변화를 추구한다. 만국의 노동자가 아니라 만국의 가난뱅이여 단결하라, 라고 외치는 하지메는 가난뱅이를 등쳐먹는 자본주의 경제에 맞서는 방법이 재활용 가게를 만들고 빈집을 점거하며 지역에 공공공간을 확보하고 사람들과 관계를 새로이 맺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백수청년들이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쓸모없는 물건을 모으거나 동네회의에 참여하며 자신이 사는 동네를 ‘양산박’으로 만들고 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하지메는 이렇게 얘기한다. “매일 저녁, 인터넷 라디오 방송을 생중계하고 이웃의 말뼈다귀 같은 놈들을 모아 술을 마시다 보니까, 혼돈과 에너지가 넘치는 가게가 되었다.”[각주:21]

도심지를 불바다로 만들자는 과격한 방을 붙이고 난 뒤 길거리에 모여 숯불로 찌개를 끓여 술을 마시고, 집회신고를 낸 뒤에 아무도 참여하지 않아서 경찰을 ‘바람맞히기 데모’를 열며, 길목 좋은 곳에서 데모를 하기 위해 지방선거 후보자로 나서는 하지메의 행동은 단지 기행으로 그치지 않는 전복의 기운을 품고 있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하지메는 일상적인 삶을 바꿔야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일상생활 속에서 얼마나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가느냐, 이거다. 따분한 직장에서 일하는 친구가 “아이고, 이런 일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거야. 3년만 다니고 그만둬야지, 그때는 자유롭게 살아가야지”하는 놈치고 진짜 회사를 그만 두고 자유롭게 사는 꼴을 본 적이 없다. 항상 안정감 위주로 무리도 안 하는 대신, 하고 싶은 일도 못한다면 해방감 있는 세상을 맛볼 수 없다.”[각주:22]

다른 시공간을 살았지만 알린스키와 하지메는 같은 얘기를 하고 있다. 기존의 룰에서 벗어나 새로운 활동을 당장 시작하라. 그러면 우리는 다르게 살 수 있다.

 

 

IV. 스스로 웃게 하라!

 

루쉰(魯迅)이 『아Q정전』에서 주장했듯이, 대중이 패배주의적인 ‘정신승리법’을 버리고 자신의 상황에 눈을 뜰 때에만 웃음은 전복적인 힘을 가질 수 있다. 그러니 우리도 이제 고통을 참으며 현실을 똑바로 보는 법을 익혀야 한다. 변화는 새로운 감성, 새로운 공감에 바탕을 둔 비판적인 인식을 회복할 때에만 가능하다.

그 힘은 이미 마련되어 있다. 촛불집회의 결과가 어찌되었건 사람들은 정치행위에 참여할 때 느끼는 즐거움을 깨닫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이익만이 아니라 전체 공동체의 행복을 위해 일하는 것이 즐겁다는 것을, 자신의 이익이 공동체의 이익과 다르지 않음을 깨닫기 시작했기 때문이다.[각주:23] 이런 깨달음은 일상 속의 다양한 실천을 통해 새로운 감성, 새로운 이성을 활성화시킬 수 있다.

모든 사건은 언제나 진행 중이기에 그 방향을 미리 점칠 수는 없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새로운 감성과 이성을 가진 새로운 주체가 등장할 때에만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새로운 주체의 탄생을 가로막지 않고 그들이 스스로 말하고 웃게 할 때에만 민주주의는 그 활력을 유지할 수 있다. 대의민주주의를 활용하건 부정하건, 새로운 전술은 현실의 조건을 따라야 하지만 한 가지 전제는 반드시 필요하다. 다른 누구를 대변하려 하지 말고 우리들 스스로 말하고 스스로 웃자!

그리고 때때로 민주주의가 고통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런 고통과 어려움을 견디게 하는 힘이 뭘까? 그것이 바로 웃음이다. 영국의 작가 로렌스(D. H. Lawrence)가 ‘제대로 된 혁명’에서 노래했듯이, “우리 노동을 그렇게 하자! 우리 재미를 위한 혁명을 하자!”

  1. 한나 아렌트, 김동식 옮김, 『공화국의 위기』, 도서출판 두레, 1979, 165~166쪽. [본문으로]
  2. 미국의 정치학자 마넹(B. Manin)은 전문가 중심의 정치를 불신하는 추첨제도가 선거제도로 바뀐 것에서 대의민주주의의 본질을 찾는다. 왜냐하면 추첨제도는 누구나 권력을 가질 수 있도록 보장했는데, 선거는 탁월한 사람들만 권력을 갖도록 보장하기 때문이다(버나드 마넹, 곽준혁 옮김, 『선거는 민주적인가』. 후마니타스, 2004, 61쪽). [본문으로]
  3. 밀란 쿤데라, 정인용 옮김, 『웃음과 망각의 책』, 문학사상사, 1992, 96쪽. [본문으로]
  4. Herbert Marcuse, One-dimensional Man(Boston: Beacon Press, 1964), pp.248~250. [본문으로]
  5. Herbert Marcuse, Counterrevolution and Revolt(Boston: Beacon Press), 1972), p.29 [본문으로]
  6. “조롱과 비웃음은 억압적 권위를 겨냥하는 무기이면서 만인을 유쾌하게 만든다. 촛불집회를 유쾌하게 만든 무수한 패러디는 웃음의 미학과 상상력의 힘을 여실히 보여주었다.”(민유기, 「폭력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과 2008년 촛불신화의 역사적 의미」, 『실천문학』 2008년 겨울호, 340쪽) [본문으로]
  7. 촛불집회 참여자를 “프랑수아 라블레가 묘사했던 신명난 군중, 통 큰 기괴와 기상천외한 유머를 한 몸에 체현한 미래의 군중”(김상준. 2008. 「대한민국 민주주의 60년을 보는 시각」,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한국사회학회 특별심포지움 발표문, 13~14쪽)으로 보거나 “촛불집회는 바흐찐이 말하는 다음․다성적 카니발(carnival)의 속성을 매우 닮아있으며, 그 주체는 단연코 개인인 동시에 대중인 인․민”(전규찬, 「촛불집회, 민주적․자율적 대중교통의 빅뱅」, 『문화/과학』 2008년 가을호, 116~117쪽)이라 얘기하기도 한다. [본문으로]
  8. 미하일 바흐찐, 이덕형․최건영 옮김,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문화』, 아카넷, 2001, 30쪽. [본문으로]
  9. 바흐찐, 앞의 책, 36쪽. [본문으로]
  10. 정화열, 박현모 옮김, 『몸의 정치』, 민음사, 2000, 81쪽. [본문으로]
  11. 바흐찐, 앞의 책, 396쪽. [본문으로]
  12. 바흐찐의 말을 빌린다면, “여기 한 소년은 아버지의 촛불을 불어 끄며 이렇게 외치는 것이다. ‘Sia ammazzato il signore Padre!(아버지는 죽어버려라!)’ 유쾌하게 아버지에게 죽음을 위협하며 그의 촛불을 끄는 소년의 이 놀라운 카니발적 외침”(바흐찐, 앞의 책, 390쪽) [본문으로]
  13. “촛불진영 내부적으로는 5월 집회초기와 달리 다양하고 이질적인 사회세력이 촛불집회에 참여하면서 10대의 참여가 거대한 촛불 대중에 묻히게 되고 10대의 문제를 의제화하지 못한 데서 나온 평가로도 볼 수 있다.”(이해진, 「촛불집회 10대 참여자들의 참여 경험과 주체 형성」, 『경제와 사회』 2008년 제 80호, 89쪽) [본문으로]
  14. 기존의 사회운동은 하나가 되는 경험보다 어떻게 촛불을 전략적으로 활용할 것인가만 주로 고민했다. “촛불은 끝내 홈에버 매장 앞으로 오지 않았다. 짬짬이 시간 내서 십여 차례 참석한 촛불집회에서 만난 비정규직 투쟁 사업장 노동자들은 이방인이었다. 정규직 17년차인 나도 소외감을 느끼는데 실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10년 후 광우병을 일으킬 수 있는 쇠고기 수입 반대에는 그렇게도 열정적인 시민들이 당장 생존권을 박탈당하고 있는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선 의외로 차가웠다.…촛불은 아름다웠지만 계급적 문제에 대해선 무력했고 둔감했다.”(이남신, 「아름다운 촛불이 홈에버 매장 앞으로 오지 못한 까닭은」, 『내일을 여는 역사』 2008년 가을호, 148쪽). 촛불집회에 중산층 이상의 계층이 참여한다는 주장도 마찬가지이다. [본문으로]
  15. “카니발은(가장 넓은 의미에서 이 말을 쓰고 있다는 것을 다시금 밝힌다) 공식적 세계관의 지배로부터 의식을 해방시켰으며, 세계를 새롭게 보도록 하였다. 두려워하지 않고, 경건함 없이, 완전히 비판적으로, 그러나 동시에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 게다가 긍정적으로. 왜냐하면 카니발은 풍부하고 물질적인 세계의 시원과 형성, 변형, 그리고 새롭고 불멸하는 민중의 억누를 수 없는 힘과 영원한 승리를 드러냈기 때문이다.”(바흐찐, 앞의 책, 424쪽) [본문으로]
  16. “나는 나 자신에게 유일하게 현실적이라고 생각되었던 대답만을 젊은 급진주의자들에게 해줄 수 있었다. ‘세 가지 중 하나를 하라. 첫째, 가서 통곡의 벽을 쌓고 너 자신을 위로하라. 둘째, 미쳐 버린 후에 폭탄 투척을 시작하라. 하지만 그 방법은 단지 사람을 우파로 돌아서게 만들 뿐이다. 셋째, 교훈을 얻어라. 고향으로 가서 조직화하고, 힘을 모아서 다음 전당대회에서는 너희 자신이 대의원이 되어라.’”(사울 D. 알린스키, 박순성․박지우 옮김,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 아르케, 2008, 33쪽) [본문으로]
  17. 알린스키, 앞의 책, 166~167쪽. [본문으로]
  18. 이를 본 따서 국내에서도 알린스키식 운동이 시도되기도 했다. 1999년 11월 7일 이화여대 총학생회 여성위원회는 부부직원 중 여성을 먼저 퇴직시키는 농협의 성차별 정책을 바꾸기 위해 농협중앙회로 몰려가 줄줄이 10원짜리 통장을 만듦으로써 농협의 일상 업무를 마비시키자고 주장하는 공고를 붙였다(이신행, 「사회만들기로서의 주민운동」, 한국도시연구소 편, 『지역주민운동 리포트』, 한국도시연구소, 1999, 33쪽 참조). [본문으로]
  19. 알린스키, 앞의 책, 16쪽. [본문으로]
  20. 알린스키, 앞의 책, 128쪽. [본문으로]
  21. 마쓰모토 하지메, 김경원 옮김, 『가난뱅이의 역습』, 이루, 2009, 71쪽. [본문으로]
  22. 하지메, 앞의 책, 201쪽. [본문으로]
  23. “우리 시대에 새로운 또 다른 경험이 정치라는 게임에 나타났는데, 그것은 행위한다는 것이 즐거운 경험이라는 점이다. 이 세대는 18세기에 ‘공공의 행복(public hapiness)’이라 불리웠던 것이 무엇인가를 발견했다. 이들이 뜻하는 ‘공공의 행복’은 인간은 공적 생활에 참여할 때, 참여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만 머무르고 말았을 인간경험의 한 차원을 자신에게 개방하는 것이며 이 차원은 완전한 ‘행복’의 일부를 구성한다는 의미다.”(아렌트, 앞의 책, 246쪽) [본문으로]

[대안지식연구회]의 정치사회비평에 쓴 글입니다.
충분히 얘기를 다루지는 못했지만 지금 현실에 대한 답답함을 좀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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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재보궐 선거가 끝났다. 결과는 예상대로 한나라당의 패배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1명, 진보신당 1명, 무소속 후보 3명이 당선되었고, 경기도 시흥시장도 민주당 후보가 차지했다. 시도의원 선거에서도 서울시 광진구에서 한나라당 후보 1명이 시의원으로 당선된 것을 제외하면 강원도에서 무소속 후보가, 전라남도에서는 민주노동당 후보가 당선되었다. 구시군의원 선거에서도 한나라당은 1석도 얻지 못했고 민주당이 2석, 민주노동당이 1석, 무소속이 2석을 차지했다.

그 전에 치러진 경기도 교육감 선거까지 고려한다면 집권 여당의 완전한 패배라 얘기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이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약 1년이 지난 뒤에 치러졌다는 점에서, 이번 선거는 그동안의 정부정책에 대한 평가이기도 하다. 따라서 선거 결과만 보면 민심은 이명박 정부에게서 서서히 멀어지고 있다. 그 점은 계속 떨어지던 투표율이 올라갔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왜 투표에 환멸을 느끼던 유권자들이 의식적으로 투표소를 찾았을까? 투표에 참가하지 않으면 이미 조직화된 표를 가진 여당 후보가 당선될 터이니, 이를 막기 위해 유권자들이 의식적으로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을까?

어쨌거나 정치에 대한 환멸이 참여의 관심으로 변한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된 걸까? 한나라당이 참패를 했으니 정치의 희망이 생긴 걸까?

작년 초 서울시 교육감 선거가 한나라당의 승리로 끝난 뒤 많은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이 ‘촛불의 실패 또는 패배’를 얘기했다. 제도정치로 이어지지 못하는 촛불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도 심심찮게 나왔다. 그렇다면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판과 촛불의 목소리가 선거로 이어졌으니 이제 진보의 승리가 눈앞에 다가온 걸까?

오히려 선거 이후 이명박 정부는 지난 노동절 집회와 촛불 1주년 기념집회를 무참히 짓밟았다. 4월 30일부터 5월 2일까지 221명이 연행되었고, 용산철거민대책회의가 용산에 설치했던 천막도 기습 철거되었다. 선거결과로 드러난 민심에도 이명박 정부는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더욱더 철저히 탄압하겠다는 의도를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다.

지난 5월 2일 법무부와 문화체육관광부, 행정안전부 장관이 발표한 대국민담화문은 그런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한 푼의 관광수입도 아쉬운 때입니다. 그리고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실날같으나마 도처에서 경제의 회복의 기미가 보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때 폭력시위로 국력을 낭비할 시간이 어디에 있습니까?…우리는 지난해 무분별한 시위로 많은 국력을 낭비했습니다. 값비싼 교훈을 얻은 것입니다. 올해에도 이러한 상황이 재발된다면 정부는 부득이 법에 따라 단호히 조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푼의 관광수입도 아쉬우니 시위를 벌이지 말라는 논리가 참으로 터무니없지만, 실제로 연행된 사람들은 48시간을 꼬박 갇혀 있다 석방되었으니 단호한 법의 집행이라 하겠다. 앞으로 정부는 자신을 반대하는 모든 목소리를, 자신을 반대하는 모든 민심을 폭력이라 규정하고 탄압하려 들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부는 지역토호의 중심세력인 새마을운동중앙회와 한국자유총연맹과 손을 잡고 ‘3대 신국민운동’을 추진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이제 정부는 민심을 따르기는커녕 자신이 민심을 만들고 조작하겠다는 강한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이 점은 과거와 달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대국민담화문에 동참했다는 점에서도 그러난다. 왜냐하면 개정될 통신비밀보호법이나 저작권법에 따르면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사이버 법치주의’를 실현하고 ‘사이버 민심’을 조작할 중요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명박 정부와 기득권층은 아예 민심이 형성될 수 있는 장을 없애고 과거처럼 순종하는 국민을 만들려고 노력할 것이다. 이미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결사의 자유, 집회 및 시위의 자유 등 시민의 온갖 기본권이 위협을 받고 있으니, 이런 흐름은 단지 가능성으로만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비극은 민심을 거역하는 정부가 이명박 정부만의 특징이 아니라는데 있다. 그동안 한국사회에서 권력을 장악한 정부는 언제나 민심을 거역하고 민심을 억누르고 조작해 왔다. 그리고 좌/우를 떠나 많은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은 그런 과정에 동참하며 이득을 누려왔다. 언제나 민심은 민중의 가슴이 아니라 전문가들의 통계수치나 지식인들의 전문용어, 정치인들의 공약(空約)으로만 드러나야 했다. 그런 점에서 이명박 정부는 과거의 정부보다 조금 더 노골적일 뿐이다.

더구나 이명박 정부에서 권력을 쥔 자들은 이런 흐름을 계속 지킬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왜냐하면 재보궐 선거에서 몇 번을 패배해도 3년 반 뒤의 대통령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명박 정부에 대한 불만이 새로운 정치세력의 출현보다 박근혜라는 보수정치인에 대한 지지로 전환되리라 예상하고 있다. 즉 한국의 기득권층은 대표선수만 바꾸면 이권을 지킬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러니 민심 따위가 어찌 무섭겠는가?

그렇다면 한국의 진보는 이런 분위기를 바꾸고 자신이 그토록 강조하는 민중의 가슴에서 민심을 끌어낼 어떤 대안을 가지고 있을까? 촛불 1주년을 기념하는 많은 자리에서도 나는 그런 대안들을 잘 찾을 수 없었다. 진보의 위기는 바로 그 점에 있고, 그런 점에서 위기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덕성여대 신문의 청탁을 받고 쓴 글입니다.
어제 학교에 갔더니 서울지역 대학생들이 반독재투쟁을 벌이자며 쓴 대자보가 붙어있더군요.
대자보 내용은 http://www.20eye.net/35?srchid=BR1http%3A%2F%2Fwww.20eye.net%2F35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청년들의 행동이 필요한 시기인 듯합니다.
물론 이명박이 문제의 본질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몸짓은 반갑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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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집회 또는 촛불시위는 한국을 대표하는 저항문화로 자리를 잡았다. 해가 진 저녁을 밝히는 촛불은 시민들이 중요한 사회적 결정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려는 신념의 불꽃을 뜻했다. 이런 촛불의 흐름이 한국사회에서 문화로 자리를 잡았다는 사실은 그동안 정부가 일방적으로 정책을 결정해 왔고 시민들이 그 과정에서 배제되어왔다는 점을 증명한다. 촛불의 구호나 참여하는 시민들의 수는 사안에 따라 달라지겠으나, 저항문화는 그 원인인 권력구조의 잘못이 고쳐지지 않는 이상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한다

그런데도 정부는 자신의 잘못을 반성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촛불시민의 저항을 힘으로 억누르려 하고 있다. 경찰은 상습 시위꾼을 검거한다며 촛불시민을 조사하고 인터넷 IP를 추적하고 있다(거리에 나와 중무장한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는 것을 상습적으로 즐길 사람이 과연 있을까?). 그리고 대법관이 재판과정에 개입해 촛불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을 범죄자로 몰아가고 있다(법관이 생각할 필요가 없다면, 컴퓨터로 재판을 하는 게 옳다). 또한 국회에서는 한나라당이 시민들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할 집시법, 방송법, 정보통신법 등을 다수당의 힘으로 밀어붙이고 있다(힘이 장땡이라면 국회의원을 쌈박질 순으로 뽑는 게 옳다). 민주주의 국가라면 당연히 지켜야 할 입법, 행정, 사법체계의 삼권분립조차 무시되는 게 한국의 현실이다.

이처럼 저항의 이유가 사라지기는커녕 더 많은 이유들을 만드는 현실에서 과연 시민들이 촛불을 꺼야 할까? 아니 과연 촛불이 꺼질 수 있을까? 물론 정부의 강한 탄압이 일시적으로 촛불의 흐름을 주춤하게 만들 수는 있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는 결코 권력의 억압이 자유를 가둘 수 없고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음을 증명해 왔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수많은 독재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이 영원한 왕국을 건설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우리 역사만 봐도 힘없고 가난한 농민들이 탐관오리나 왕에게 반기를 들며 수많은 반란을 일으킨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한국의 88만원 세대는?

더구나 지금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경제위기는 시민들이 저항의 촛불을 내려놓을 수 없게 한다. 유럽에서는 700유로세대가 그리스와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등 곳곳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옆 나라 일본에서도 2천여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도쿄의 히비야공원에 모여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하고 있다.

일자리를 달라고 구걸하는 게 아니다. 경제위기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고통을 주지 않는다. 위기는 힘을 가진 자에겐 기회였고 모든 이가 고르게 누려야 할 공동의 재산은 그동안 소수의 사람들에게 독점되어 왔다. 상위 10%의 사람들이 전 세계 부의 85%를 독점하고 있다는 보고가 나올 정도이고, 불행히도 그런 불공정함은 지금 상태라면 더욱더 강화될 전망이다. 전 세계적인 분노는 부를 독점해 온 사람들에게 그 부를 공정하게 나눌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저항의 흐름이 뭉쳐져 촛불이 횃불로 변한다면, 어떠한 권력도 그것을 무시할 수 없다. 바로 그렇기에 권력은 촛불이 횃불로 타오르지 못하도록 갖가지 방해를 하고 있다. 권력은 우리 88만원 세대가 거리보다 도서관에서 스펙쌓기에 열중하기를 원한다. 88만원 세대가 함께 모여 공동의 미래를 고민하지 않고 따로 떨어져 서로 경쟁을 벌이기를 원한다.

적극적인 문제제기가 바로 대안이다

따라서 그런 방해를 뛰어넘어 횃불이 되려면 우리에게는 더 많은 대화와 만남이 필요하다. 자본주의가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할 수 없다면 우리는 다른 세상을 실현하기 위해 나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실천해야 한다.

문제제기와 대안은 분리되지 않는다. 문제를 제기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나와 같은 신념을 품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그와 우정을 쌓을 수 있다. 내가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수많은 사람들과 대화하고 만나는 과정에서, 특히 국가나 학교, 기업이 꺼리는 사람이나 모임을 만나는 과정에서 우리는 배우지 않은 지식을 경험하게 된다.

그런 만남의 과정에서 새로운 운동이 자연스레 출현할지 모른다. 그런 운동이 가능할까라고 미리 물을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도 운동의 흐름을 미리 예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치는 다양한 사람들이 자기 뜻을 드러내고 토의하는 과정이기에 운동의 방향을 예측하는 건 인간의 몫이 아니다.

그리고 예측할 수 없기에 운동은 다양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문화가 운동으로 확장되고 단단해질 수 있다면, 대안사회는 꿈이 아닌 현실로 우리를 맞이할 것이다.

'인권연구소 창'이 주관하는 철학과 인권 세미나(http://www.khrrc.org/index.php)에 참여하며 미국의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글을 다시 읽고 있다. 아렌트는 유대인이라는 신분으로 1, 2차 세계대전을 몸소 겪었고, 미국에서 흑인민권운동과 베트남전쟁 반대운동이 한창이던 60년대말, 70년대 초의 정치상황을 관찰하기도 했다. 아렌트가 말한 '권리를 가질 권리(the right to have rights)'라는 개념이 현대적인 인권 개념의 재구성과 관련해 주목을 받고 있다.


아렌트가 인권을 자기 철학의 핵심주제로 다루지는 않았지만(아렌트는 인권보다 시민권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이탈리아의 철학자 지오르지오 아감벤이 아렌트의 인권 개념을 비판하며 자기 얘기를 꺼내면서 아렌트의 사상이 자연스레 인권의 주제로 옮겨진 듯하다. 그런데 아렌트의 인권개념을 논의하는 방식이 아렌트의 사상 전체를 살피고 그 속에서 인권개념을 논의하는 자연스런 과정을 따르고 있지는 않은 듯하다. 그래서 인권활동가나 인권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아렌트의 여러 책을 함께 읽으며 그 개념의 흔적을 찾아보는 세미나를 하고 있다.

그와 관련해 아렌트가 쓴 [공화국의 위기]를 읽고 있다. 이 책은 60, 70년대 미국사회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글인데, 현재 우리사회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과도 맞닿아 있는 듯하다. '시민불복종'이라는 글에서 아렌트는 당시 베트남전쟁을 반대하던 양심적 병역거부운동과 흑인민권운동을 벌이던 시민불복종운동을 다룬다. 아렌트는 어떤 정치적 의견이 공동체 내에서 소통되며 사람들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것을 정치라 보고 그런 소통과 관계의 장을 보장하는 것을 권력의 역할이라 봤다.

아렌트는 어떤 사안을 개인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것을 경계하는데, 가령 양심적 병역거부는 법을 어기는 행위의 정당성을 개인의 양심에서 찾기 때문에 정치적인 사안을 비정치적인 문제로 환원시킨다. 그러다보니 어떤 개인의 양심과 다른 개인의 양심이 충돌할 때(아렌트의 표현을 빌리면 흑인의 권리를 주장하는 킹 목사의 양심과 미시시피의 인종주의자의 양심이 충돌할 때), 그 주장은 타당성을 가지기 어렵다. 더구나 그런 양심이 정당화되려면 그 사람이 선과 악을 근본적으로 구별하는 능력을 가져야 하는데, 그런 능력은 자연적으로 타고날 수 없다. 이런 점 때문에 아렌트는 양심적 병역거부가 사회적인 인정을 받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고 봤고 그 근거를 양심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에서 찾기를 바랬다.

양심적인 거부자와는 달리 불복종 시민은 한 집단의 성원이며 싫든 좋든 이 집단은 자발적 결사를 이루는 것과 같은 정신에 따라 형성된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 논의에서 가장 큰 오류는 우리가 개인들―그들은 자신을 주관적이며 양심에 따라 사회의 습관과 법에 도전한다―을 다루고 있다는 가정이다.


아렌트는 양심적 병역거부와 시민불복종을 구분하면서 시민불복종을 중요한 정치행위로 바라본다. 왜냐하면

불복종 시민의 실상은 조직된 소수집단이며, 공동이익이라기보다는 공동의견에 의하여 결합되어 있고, 정부의 정책이 다수에 의해 지지받을 것을 알 경우라도 그 정책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에 서리라는 결의를 갖는다. 그들의 일치된 행동은 그들의 일치된 의견에서 나온다.
시민불복종은 자신의 행위가 현재의 법질서를 해치거나 다수의 상식과 반대될 것이라는 점을 알면서도 여러 시민들이 힘을 모으는 정치행위이다. 특히 정상적인 방식으로는 법질서의 변화를 기대할 수 없거나 정부가 적법하고 올바르게 행동하지 않고 음모를 꾸밀 때에, 시민불복종은 변화를 이룰 유일한 수단이다. 아렌트는 당시 미국사회가 이런 상태(정부가 통킹만 사건을 조작해 베트남전쟁을 벌이고 정보기관이 은밀히 활약하는)였다고 보고 시민불복종 행위를 미국의 건국행위만큼 중요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미국의 건국행위란 따져보면 식민지 질서를 뒤엎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기 위한 시민불복종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시민불복종은 공개적으로 법에 도전하기 때문에 일종의 딜레마를 가진다. 사회가 유지되고 정치가 이루어지려면 그 경계를 짓는 법이 필요한데, 시민불복종은 그 법의 경계를 넘어서려 하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아렌트는 법조문보다 법의 정신이 중요하고 준법정신이 입법자의 태도를 가질 때, 즉 내가 곧 법을 제정하는 사람이자 스스로 그 법에 복종하는 사람(인민주권이라고 해야 할까)일 때 가능하기 때문에 시민불복종이 정당하다고 본다. 특히 새롭게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들은 자신이 합의하지 않은 그 사회의 질서에 도전하고 문제를 제기할 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불복종은 피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아렌트는 그런 불복종이 약속과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사람의 행동이란 예측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서로 간의 합의와 약속이 필요하다. 따라서 시민은 불복종을 하는 만큼 자신이 시민으로서 따를 수 있고 따라야 하는 것을 약속하고 그 약속을 지켜야 한다. 

이 글에서 흥미로운 내용은 시민불복종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판단을 법률가들에게 맡기면 안된다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법률가들은 이런 시민공동체의 중요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집단적인 행동을 개인의 범죄행위로 다루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불복종 시민을 한 집단의 성원으로 인정하기보다는 법정에서 피고가 될 개인적 범법자로 간주하기가 훨씬 쉽기 때문이다. 개인에 대한 정의의 할당에는 관심을 가지면서 다른 모든 것―피고는 다른 자들과 함께 뜻을 하며 법정에서 그를 진술하려 한다는 여론이나 시대정신(Zeitgeist)―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이 재판절차의 위풍이다.
법은 법에 대한 불복종을 정당화시키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아렌트는 시민불복종의 권리가 자유로이 단체를 만들 권리(결사의 권리)와 맞닿아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정치제도는 불복종하는 시민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자유로이 단체를 만들도록 보장해야 한다. 아렌트는 로비스트들이 정부에 영향력을 미치는 만큼 시민불복종하는 단체들이 압력단체를 만들어 정부를 압박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미국 헌법 제 1조가 보장하는 결사의 권리가 현실에서 제대로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미국이 위기에 빠졌다고 아렌트는 분석한다.



이런 분석은 지금 한국 현실과도 맞닿아 있다. 이 사회가 정상적인 방식으로는(요즘은 이런 방식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럽지만) 자신의 주장을 더이상 받아주지 않는다고 여긴 시민들이 곳곳에서 촛불을 들고 저항하고 있다. 정부는 이 저항을 법으로 가로막으려 하지만 아렌트가 얘기하듯 촛불시민들의 불복종 행위에 대한 판단은 법원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정치행위는 기존의 정치질서가 가진 문제점 때문에 비롯된 것이고 시민들은 불복종의 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과제들이 비정치적인 방식으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의 정치위기는 아주 심각하다.

국회의원이나 관료들이 중요한 사회적 의제들을 자꾸 법원으로 가져가서 해결하려 하는데, 그것 역시 심각한 문제이다. 기본적으로 법원은 그 의제를 사회와 소통하지 않고 스스로 판단을 내리려 하기 때문에 공동체의 문제를 다루기에 적절하지 않은 기관이다. 그리고 그 사법적인 판단의 잣대는 이미 낡은 것으로 새로이 나타나는 것을 규정하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또한 한국의 사법계는 민주적인 방식으로 충원되지도 않고 그 작동과정 역시 민주적이지 않다(최근에는 아예 대놓고 판결에 개입하기도 하니).

아마도 이명박 정부는 이런 정치의 위기를 더욱 심화시킬 게 뻔하다. 시민불복종의 권리는 짓밟히고 그와 함께 결사의 권리, 공동체의 시민으로서 자신의 주장을 펼칠 단체를 자유로이 만들 권리도 무기력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어쩌면 이제 저항은 아주 근본적인 수준으로 진행되어야 할지 모른다. 권력이 정치를 포기하고 시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때, 저항은 건국행위 수준의 정치행위를 지향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단순히 법에 복종하지 않고 정부에 저항하는 것만이 아니라 이 사회의 사람들이 맺을 새로운 약속, 새로운 결사들을 만들며, 그들의 국가를 버리고 우리들의 공동체를 조금씩 만드는 노력이 필요하다. 비폭력 불복종의 정신이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려는 노력으로 터져나와야 한다.

공동체가 무기력하고 정치가 왜곡되었으니 그것을 버릴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정치를 구성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제 개인으로 흩어지지 말고 새로운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권리를 만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그런 정치행위는 국가가 보장하는 시민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응당 누려야 할 근본적인 조건이다.

쇠고기를 넘어 삶의 변화로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관련한 촛불행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놀라운 광경이지요. 단지 거리로 나온 사람들의 수가 많기 때문에 놀라운 건 아닙니다. 더 이상 부당한 대우를 참지 않겠다라는 분노와 권력에 대한 조롱이 거리를 메우고 있기 때문에, 내가 권력의 주인이라고 자각하며 정치가 그들의 독점물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에 놀라운 것이지요.

돌이켜 생각해보면 권력이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한국의 시민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왕에 맞서 일어난 수많은 민란들, 일제 식민지 권력에 맞섰던 평범한 민초들의 3․1운동, 부패하고 정당성을 잃은 권력에 맞섰던 4․19, 부마항쟁, 광주항쟁, 87년 6월 항쟁, 91년 5월, 2002년 촛불집회 등 수많이 사례들이 우리 역사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번 촛불행진을 새롭고 특별한 일로만, 그리고 준비되지 못한 우발적인 사건으로만 기록하는 건 그런 저항의 역사를 망각하길 바라는 강자들의 바람에 말려드는 겁니다. 맨 손으로 권력에 저항하는 우리 민족의 의지는 매우 강하고 그렇기에 우리에게 미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다지 진심을 담은 것 같지는 않지만 대통령이 사과하고 미국과 추가협상도 진행되며 조금씩 촛불의 힘을 빼려는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습니다. 그와 함께 앞으로 촛불행진이 어디로 가야 하는가에 관한 고민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촛불은 어디로 가야 할까요?

한편에서는 이제 정당과 대의민주주의로 저항의 초점을 옮겨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언제까지 거리로 나와 요구를 주장할 수는 없지 않냐고 묻습니다. 하지만 정당과 대의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했다면, 그리고 앞으로 그것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면 사람들은 거리로 나오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시민의 뜻과 바람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고 시민을 소외시키는 정당 내부의 잘못된 구조와 대의민주주의의 문제점을 바로잡지 않은 채, 제도정치로 돌아가야 한다고 외치는 건 문제의 본질을 놓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들이 그렇게 외칠 수밖에 없는 건 대중을 신뢰하지 않아서일 겁니다. 권력이 시민의 것이라는 주장은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이고, 실제로는 자신들이 권력과 민주주의에 관한 논의를 독점해야 한다고 믿는 엘리트주의자들이라 대중의 정치를, 거리의 정치를 믿을 수 없는 겁니다.

또 다른 편에서는 국민소환제나 국민투표, 정권퇴진을 주장합니다. 문제는 그런 방식으로 지금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을 몰아낸다고 해도 그 뒤를 이을 사람들이 없다는 겁니다. 사실상 그런 제도들이 한 번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듯 하지만 그런 바람은 환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난 저항의 역사를 살펴보면 제도에 의지하는 것이야말로 죽 쒀서 개 준다는 속담을 실현하는 방법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제도는 언제나 이미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을 돕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이 가능할까요? 요즘 ‘생활정치’라는 말이 많이 등장하는데, 가만히 보면 좀 이상하게 사용되는 듯합니다. 단순히 먹거리의 문제, 생명을 위협하는 사안이기 때문에, 그리고 생명과 건강에 관한 고민을 담고 있기 때문에 이를 생활정치라고 불러야 할까요?

생활정치는 기존 정치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정치의 주체로 등장할 뿐 아니라 일상 속에서 삶의 변화를 추구하는 과정을 강조합니다. 이번 촛불행진에서 청소년과 여성들이 새로운 운동의 주체로 등장했다고 하지만, 사실 청소년과 여성들은 그 전부터 정치의 주체가 되려고 꾸준히 노력해 왔습니다. 기존의 성인 남성 중심의 정치제도가 이들을 정치주체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 뿐이지요.

그런데 ‘새로운 등장’을 강조하는 세력들은 기존의 정치구조를 전혀 바꾸지 않은 채 그 성과를 자신들의 것으로 가져가려 합니다. 이런 세력들은 청소년과 여성의 참여를 놀라워 하지만 정작 그들이 살고 있는 일상의 문제에 대해 여전히 무관심합니다. 참여를 찬양하지만 실제로는 무한경쟁이 지배하는 학교와 가부장제가 지배하는 가정으로 청소년과 여성을 다시 돌려보내려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자신의 기득권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려는 기존 정치구조의 교묘한 방식이고, 소위 진보세력이라는 사람들조차 그런 구조와 은밀히 타협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 촛불은 일상의 삶 속으로 뿌리를 내려야 우리 사회를 바꿀 수 있습니다. 일상의 장을 참여의 장으로 만들며 성인 남성 중심의 대의정치제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힘을 축적해야 합니다. 민주주의를 실험하고 경험하는 장으로 가정과 학교를 바로 세우고 더 많은 청소년과 여성들이 정치의 주체로 설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수동성과 냉소를 심는 일상의 생활과정을 능동적인 정치참여의 과정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럴 때에만 진정한 생활정치가 실현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뜻을 바로 세우고 그 뜻을 지키고 키우려 노력해야 합니다. 반드시 거리에 나와 촛불을 켜야 하는 건 아닙니다. 내 맘 속의 촛불이 꺼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제든 다시 거리로 나설 수 있습니다(아마 이명박 정부 5년 동안 거리로 뛰쳐나올 일은 수없이 많을 겁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거리로 나온 사람들의 수를 두려워하는 듯하지만, 그들이 정말 두려워하는 건 복종하지 않겠다는 시민들의 뜻, 자발적으로 검열을 하지 않으려는 뜻입니다. 냉소하며 물러서려는 마음이야말로 권력을 쥔 자들이 가장 기뻐할 상황입니다.

그렇게 뜻을 키우면서 우리 사회에서 더 소외되고 배제된 사람들의 손을 잡고 그들도 함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연대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장애인, 이주노동자, 성소수자 등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과 손을 잡을 수 있다면 촛불은 더욱 밝아질 겁니다. 오래 타오를 뿐 아니라 더 크게 타오르면 촛불은 세상을 바꾸는 횃불이 될 수 있습니다.



잘못된 권력에 시민들이 맞서 싸우지 않았다면 지금 세상은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는 권력을 가진 자들이 우리의 신념과 자유를 짓밟을까 두려워하지만, 시민들의 저항이 거세지면 그들 역시 두 다리 뻗고 잠을 청할 수 없다. 그것은 아주 간단한 정치의 법칙 때문이다. 즉 제 아무리 강한 권력자라도 형식적으로는 국민의 ‘동의’를 구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도 어느 순간이 되면 ‘국민’ 또는 ‘시민’을 내세워 자신을 정당화시켜야 한다.

그러니 우리는 질문을 던지는 방식을 바꿔야 한다. “시민들은 왜 저항하는가?”라는 물음은 정치의 본질을 건드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시민들이 언제나 권력의 부조리에 맞서 자유나 평등, 정의와 같은 큰 뜻을 실현하기 위해 저항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민들은 어떻게 저항하는가?”라는 물음 역시 핵심을 건드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시민들은 자신이 취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엄청난 권력에 저항해 왔기 때문이다. 지나친 권력이 있는 곳엔 언제나 시민의 저항이 있었다.

실제로 우리 역사를 살펴봐도 시민들은 언제나 저항해 왔다. 우리 헌법이 지목하는 대표적인 저항인 3․1운동과 4․19민주이념은 누가 어떻게 시작한 사건인가? 가장 억압적인 제국주의 지배나 잔혹한 독재를 경험하면서도 시민들은 각자 자기 삶의 터전에서 자발적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저항했다. 동학농민운동이나 각종 민란, 제주도와 광주, 마산, 부산 등 지역사회의 크고 작은 저항들도 시민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끊임없이 권력에 맞섰다는 점을 증명한다. 권력의 비리와 억압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시민들은 저항했다.

따라서 우리는 “권력이 어떻게 시민의 저항을 가로막고 그 의미를 왜곡시켜 왔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그렇게 물어야 저항의 실마리를 놓치지 않고 이어갈 수 있다.

 

시민 없는 시민참여제도

 

한때 ‘시민 없는 시민운동’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그동안 한국의 시민사회운동에서 전문가나 활동가가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이들 역시 시민이라는 점에서 이 말은 ‘절반의 진실’만을 담고 있다. 그런데 권력을 가진 자들은 이런 말을 열심히 퍼트려서 시민들이 시민사회운동을 자신과 ‘무관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들의 말에 동의하지 않기를 원했다.

그러면서 힘을 가진 자들은 자신들이 독점하고 있는 권력의 크기를 계속 키웠다. 국회의원이나 대통령, 공무원, 법관들은, 그리고 그들과 결탁한 재벌과 중앙언론들은 평범한 시민들이 접근할 수 없는 정보와 힘을 가진 채 시민들을 지배해 왔다. 관존민비(官尊民卑)라는 거짓된 상식을 널리 퍼트리면서 그들은 자신의 권력에 도전하거나 그 힘을 줄이려는 시도들을 억눌러 왔다.

시민의 불만을 억누르기 위해 그들은 그런 시도를 잠재울 ‘시민 없는 시민참여제도’를 만들었다. 동(洞)에서 구(區), 시(市), 도(道)까지 설치된 각종 자문위원회들은 권력의 일방적인 정책결정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담당해 왔다. 그래서 소위 민의(民意)를 수렴한다는 절차들은 언제나 그들을 무조건 지지하는 배후세력이 되어 왔다. 힘을 가진 자들은 자신들의 말에 복종하는 자들만을 시민으로 인정하고 저항하는 자들을 시민이 아닌 폭도나 무지한 군중으로 내몰았다.

그리고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橘化爲枳)는 말처럼, 좋은 제도들도 한국으로 건너오면 하나같이 시민참여를 가로막는 제도로 악용되고 있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도 ‘소리 소문 없이’ 대의민주주의의 문제점을 보완한다는 직접민주주의제도들이 도입되었다. 중앙정부 차원에서는 여전히 직접민주주의가 ‘불가능한 신화’로만 얘기되고 있지만 지방정부 차원에서는 서서히 직접민주주의 제도가 도입되었다. 주민발의, 주민소환, 주민투표처럼 널리 알려진 제도만이 아니라 주민참여예산제도나 시민감사옴부즈만같은 제도들도 이미 한국에 도입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제도들은 거의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함께하는시민행동>의 조사에 따르면, 2002년 7월부터 2006년 6월까지 5년 동안 시민 138만 명이 총 123건의 조례를 발의했지만 그 중 원안대로 의결된 것은 12건 뿐이고, 54건은 수정된 채 의결되었다. 주민투표제도는 법 제정 이후 단 3건만 실시되었고, 3건 모두 지방정부나 중앙정부가 추진한 관주도 주민투표였다. 주민소환제도는 여러 지역에서 추진했지만 실제로 소환한 곳은 경기도 하남시 뿐이다. 새로운 민주주의의 희망이라던 참여예산제도 역시 토호들의 민원청탁용 창구로 전락해 버렸다.

사실상 한국에서는 평범한 시민들이 정책결정에 참여하거나 힘을 가진 자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런 제도를 활용하는데 엄청난 노력이 들 뿐 아니라 설령 활용하더라도 그 효과를 거두기 어렵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서울시의 경우 주민발의를 하려면 약 14만 명의 서명이 필요하고, 서울시장을 소환하려면 약 80만 명의 서명이, 주민투표를 신청하려면 약 40만 명의 서명을 받아야 한다. 그냥 서명을 받으면 되는 게 아니라 서울시의 경우 선관위에 미리 신고한 사람들이 주민발의나 주민투표의 경우 90일, 주민소환은 120일 이내에 서명을 받아야 한다. 시보다 작은 구로 내려가도 용산참사를 빚었던 용산구의 경우, 주민발의는 90일 동안 약 4천 6백 명, 주민투표는 약 1만 7천 명, 주민소환은 약 2만 8천 명의 서명을 받아야 한다. 돈을 주고 사람들을 사서 서명을 받지 않는다면 엄두를 내기 힘든 일이다.

더구나 중앙정부는 주민발의나 주민투표, 주민소환의 내용을 정해서 시민의 참여를 차단한다. 국가의 권한이나 사무에 속하는 사항, 법률에 위반되거나 행정기구에 관한 사항, 자치단체의 예산과 관련된 내용들은 아예 투표나 발의의 대상조차 할 수 없다.

그러니 한국의 시민참여제도는 하나같이 토호들을 위한 참여제도이거나 허수아비/꼭두각시 참여제도인 셈이다. 이렇게 힘을 가진 자들은 이런 허울뿐인 제도로 시민들의 참여의지를 꺾고 아무리 노력해도 세상이 변하지 않으니 자기 몸이나 잘 간수하라는 생각을 심어 왔다. 그리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재갈을 물리고 입을 막으며 언제나 자신들을 통해서만 얘기하라고 강요했다.

흥미로운 점은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이미 자신의 발언권을 확보하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직접민주주의를 싫어하며 자신을 통해서만 말할 것을 강요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2008년을 밝혔던 촛불집회는 바로 이런 잘못된 상식에 도전했다.

 

촛불이 밝힌 시민저항의 가능성

 

보통 온라인에서의 다양한 소통이 오프라인의 활동으로 직접 연결되기는 쉽지 않다. 근본적인 면을 따지면 그것은 ‘속도의 차이’ 때문이다. 온라인에서의 정보와 논의는 망을 타고 빠른 속도로 퍼지지만 현실에서의 삶은 삶의 다양한 조건들과 맞물려 있기 때문에 그렇게 빨리 움직일 수 없다. 마우스를 클릭하기만 하면 되는 온라인과 달리 오프라인의 실천은 항상 참여에 필요한 시간과 노력을 요구한다.

오히려 시민들의 저항은 끊이지 않고 조금씩 퍼지고 있다. 경제가 나빠지면 시민들의 마음이 온통 4대강 정비사업이나 대운하로 몰릴 것이라는 비관적인 예상과 달리, 시민들의 관심은 다양한 방면으로 퍼지고 있다(사실 이명박 정부가 등장하고 난 뒤 그런 암울한 예상을 뒤엎은 것도 촛불문화제였다). 진보적이든 보수적이든 발언권을 가진 엘리트들은 시민들의 저항을 낮게 평가하지만, 시민들의 움직임은 그런 평가를 비웃듯이 활발해지고 있다.

촛불집회 이후 시민저항이 다양한 형태로 이미 퍼지고 있다. 비리나 부조리가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 사람들이 촛불을 손에 들고 나온다. 그러면서 촛불이 일종의 저항의 상징으로 규정되었고, 촛불을 드는 행위 자체가 저항의 정체성을 드러내게 되었다(대표적인 예가 촛불산책이다). 그리고 이런 저항은 한동안 한국사회에서 자취를 감췄던 ‘참여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작년 연말을 달궜던 명동 무한도전×2 ‘널 기다릴께’ 역시 시민들의 뛰어난 아이디어가 빛을 발했던 저항이다. 매일 2배의 사람들이 모여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는 생각은 경찰의 방해를 받으면서도 추운 거리를 밝히는 횃불이 되었다. 그리고 ‘반쥐원정대’나 ‘보신각 촛불타종’ 역시 시민들의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드러낸 사건들이다. 기륭전자와 KBS, YTN, 여의도 등을 누비는 촛불의 발걸음은 새로운 정치문화의 출현을 예고한다.

왜 시민들은 이런 어려움을 몸소 겪으려 할까? 자신이 거리로 나서도 세상을 전혀 바꿀 수 없으리라 믿었다면 시민들은 거리로 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시민들은 권력을 쥔 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진리, 시민의 동의를 구하지 못한 정부가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에 열심히 거리로 나오고 있다. 그리고 자신들을 대변한다는 세력들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 거리에 나서야 한다는 점도 깨달았다.

더구나 시민들은 저항을 통해 권력의 억압성을 몸으로 느끼며 그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던질 즐거움과 여유도 만들어가고 있다. 권력을 조롱하고 비웃는 시민들의 저항은 기성 권위와 질서를 파괴하며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확산되기에 지상의 그 어떤 권위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말이 터져 나온 순간 그것은 막을 수 없는 진실이 되어 인터넷에서 무수히 복제되어 전파된다. 그렇게 시민의 웃음으로 폭발한 촛불의 힘은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되고 있다.

인터넷에서 만들어진 수많은 저항카페와 커뮤니티들이 만들어지고 있고, 자신의 취미가 이 정부와 쉽게 어울릴 수 없음을 여러 동호회들도 자각하고 있다. 이들은 더 이상 화면이나 텔레비전 앞에 머물지 않고 자신이 거리로 나가야 할 이유를 찾으며 시민으로 변하고 있다. 이미 진실이라는 바이러스는 온/오프를 넘나들며 사람들을 감염시키며 새로운 정치문화의 출현을 알리고 있다.

다만 자신의 목소리를 직접 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을, 그리고 경찰이나 검찰의 탄압을 받더라도 자신의 삶을 심하게 해치지 않는 수준에서 저항을 펼칠 방법을 시민들은 고민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저항이 단지 권력의 나쁜 면을 폭로하거나 다그칠 뿐 아니라 우리의 공적인 이익을 실현할 수 있는 방법 역시 고민한다. 그렇게 고민하고 스스로를 의식화하고 조직화하며 시민들은 다음 저항을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저항을 북돋우며 손을 맞잡을 사람들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전 세계의 시민들이 저항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세계를 보수적으로 만들었다고 하지만 저항의 흐름은 끊이지 않았다. 더 이상 노예로 살지 않으려는 새로운 스파르타쿠스, 새로운 만적과 망이, 망소이들이 반란을 모색하고 있다. 그리스에서 시작해 지금 유럽 전역을 달구고 있는 시민들의 저항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 군부에 맞섰던 70년대의 역사를 딛고 ‘700유로 세대’라 불리는 그리스 청년들과 시민들은 경찰과 정부에 맞서 저항을 벌이고 있다. 높은 실업률과 열악한 교육환경,경제정책의 실패, 경찰의 만행 등을 비판하는 시위가 매일 이어지고 있고,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하고 농민들이 국경을 봉쇄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시위는 경제위기를 맞이해 전 유럽으로 퍼지고 있다. 누가 이 저항의 불길을 다스릴 수 있을까?

미국의 역사학자 하워드 진(Howard Zinn)의 『권력을 이긴 사람들』(난장, 2008)이나 에이프릴 카터(April Carter)의 『직접행동』(교양인, 2007)을 보면 인류가 억압적인 권력에 맞서 얼마나 치열하게 싸워왔고 지금도 싸우고 있는지가 잘 묘사되어 있다. 굳이 두 사람의 말을 인용하자면, 진은 “시민들이 복종하지 않을 때, 노동자들이 일하기를 거부할 때, 군인들이 총을 들지 않을 때, 기존 권력은 힘을 잃고 항복할 수밖에 없습니다”라며 확신을 가지고 얘기한다. 초강대국 미국 내에서 미국에 저항하는 다양한 운동들이, 즉 백인-남성-부자에 맞서는 노동계급, 빈민, 흑인, 여성, 원주민들의 불복종과 저항들이 이런 힘을 만들고 있다.

카터 역시 대의정치에서 소외된 원주민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려는 운동, 석유회사와 같은 다국적기업을 반대하는 불매운동이나 저항운동, 세계은행과 같은 국제기구의 지원을 받는 댐건설을 반대하는 비폭력 저항운동, 최빈국을 위해 외채탕감을 주장하는 직접행동, 다자간투자협정을 반대하는 운동, 세계무역기구(WTO)를 반대하는 운동, 토지를 요구하는 농민들의 직접행동, 전 지구적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원주민 공동체, 농민, 학생, 노동자, 실업자의 운동 등 다양한 형태로 민주주의를 실천하려는 운동들을 얘기한다. 이런 운동을 통해 시민들은 역량을 강화하는 효과(empowering effect), 즉 “공개적으로 자기 목소리를 당당하게 냄으로써 자부심과 존엄함을 얻을 수 있고,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있으며, 타인과 연대감을 고양”시키는 경험을 얻게 된다. 이렇게 담금질을 경험하며 시민은 타인의 고통에도 귀를 기울이는 세계시민으로 거듭난다.

물론 자연발생적인 시민들의 운동은 흐름을 형성할 뿐 그 힘을 집중시키지 못한다. 이미 조직화된 정당이나 단체들이 스스로를 의식화하고 조직화하는 시민들의 힘을 증가시키고 그 힘에 일정한 방향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세력들이 시민들을 소외시키지 않고 변화의 성과를 시민들의 것으로 돌릴 때에만 그런 어울림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권력은 결코 진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권력은 시민을 이길 수 없고 속일 뿐이다. 그렇게 우리를 속이기에 거짓을 줄이려면 정당이나 단체의 내부구조나 성격 자체가 분권화되고 투명해야 한다. 그런 자기변화 없이 시민과 어울리는 것은 불가능하다(그런 점에서 반이명박 연대는 또 다른 거짓말을 낳을 수밖에 없다).

그런 과정에서 시민들은 이미 존재하는 방식들을 사용할 수도 있다. 이미 만들어진 참여제도를 활용하는 법도 그 중 하나이다. 4월에 있을 재보선이나 2010년의 지방선거를 활용하거나 기득권층의 독점물로 전락한 참여제도들을 시민의 것으로 만드는 것도 방법이다.

하지만 제도는 참여를 감싸는 껍데기일 뿐이다. 제 아무리 훌륭한 제도가 있다 하더라도 그 제도를 활용하려는 능동적인 참여의지와 그런 의지를 자극하는 정치문화가 없다면 그 제도는 쓸모 없는 것이다. 스위스의 직접민주주의를 다룬 『직접민주주의로의 초대』(리북, 2009)에서 우리는 중앙으로 집중된 권력을 나누고 시민들의 통제를 받는 제도, 시민권을 실현하려는 시민들의 의지, 민회를 통한 참여의 전통과 문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확인할 수 있다.

먼 길일수록 돌아가라고 했다. 역사의 경험은 저항의 불꽃이 뿌리를 내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외부의 조건에 흔들리지 않으려면 이 땅에 든든히 뿌리를 내리고 스스로 필요한 것을 마련하고 서로 나누며 함께 결정해야 한다. 시민저항의 싹은 자급(自給)과 자치(自治), 자결(自決)의 기반을 마련할 때 활짝 피어날 수 있다. 첫 질문으로 돌아가자면, 그런 기반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시민저항은 언제나 권력의 거짓말에 포섭될 수밖에 없다. 조급하지 말고 기반을 튼튼히 다질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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