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리 동네 급진주의자의 탄생'이라는 과격한 제목을 달았는데, <시사인>에 실릴 때는 '우리 동네 두 아이'라는 부드러운 제목으로 실렸다. 내가 참 좋아하는 아이들이라 좀 조심스럽기도 하지만, 아이들의 웃음이 계속되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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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가 끝났다. 해도 뒤숭숭, 안 해도 뒤숭숭, 언제나 선거의 끝은 찝찝하다. 이번 선거는 특히 그랬다. 절박한 일과 너무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아 선거에 거는 기대가 남달랐던 것 같다. 그 기대만큼 선거 후유증도 크다. 괜히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탓하기도 하지만 그런다고 허전한 마음이 달래지진 않는다.

 

아직 대통령선거가 남아 있으니 이 후유증은 계속 갈 듯 싶다. 그리고 이 후유증 때문에 쓸데없이 치고받는 일도 더 많아질 것 같다. ‘비판적 지지’라는 말이 언제쯤이면 한국정치에서 사라질지 모르겠지만 이번 대선도 비슷하지 않을까?

 

그래도 흥미로운 점은 제도정치의 장에서 보수와 진보의 경계가 거의 사라졌다면, 생활정치의 장에서는 그 경계가 뚜렷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정치인들의 정책은 두리뭉실하게 될 것이다. 자본주의/반(反)자본주의라는 대립각이 사라진 제도정치에서는 보수와 진보를 나눌 근거가 사라진다.

 

하지만 생활의 영역에서는 반대다. 똑같은 현상을 보고도 한편은 희망을 보고 다른 편은 말세를 본다. 선거로는 도저히 드러날 수 없는(대표할 자가 없으니!) 선호가 생활의 영역에서 첨예하게 대립한다. 그래서 제도정치와 생활정치의 고리를 잇거나 아예 새로운 판을 짜는 역할이 필요할 것 같은데, 그 역할을 맡을 새로운 주체가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논평하기 좋아하는 지식인들의 역할이 끝나간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지식인들이 관전평만 했는데 이제는 감정이입과 실제개입까지 뒤섞여 그 말이 똥인지 된장인지를 구분하기 어렵다. 더구나 상대의 마음을 읽는 관심법이라도 익힌 듯 자신만이 전체 판을 읽는다는 논평을 쏟아내는데, 듣고 있으면 참 불편하다. 마치 정치는 전문가들의 몫으로 맡겨두고 훈수를 두는 대로 움직이라는 무언의 압박이 깔려 있는 듯하다.

 

하지만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보면 자기가 직접 보고 경험한 것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그것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다. 한걸음 떨어져 하나마나한 얘기를 논리적으로 쏟아내는 사람보다 현장에서 올라오는 오타 섞인 글들에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인다. 아직까지는 명망가들의 영향력이 세지만 계속 그럴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나는 세상이 왜 이 모양이냐는 좌절감을 별로 느끼지 않는다. 그리고 이미 동네에서 흥미로운 변화를 목격하고 있다.

 

우리 동네 여섯 살 선이와 여덟 살 안이는 이번 총선에서 진보신당과 녹색당을 지지했다. 어떤 정당에서 어떤 사람들이 출마했는지를 엄마에게 묻고 내린 결론이라고 한다. 아이들은 청소부 할머니가, 핵을 반대하고 자연을 지키는 사람들이 국회로 가야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상식이니까. “왜 어른들은 우리한테 반말하고 예의 없이 해도 되는 거야?”라고 묻는 급진주의자들이 자라고 있다.

 

그리고 얼마 전에 이 아이들은 송전탑 싸움 중인 밀양과 4대강 사업으로 위기에 몰린 두물머리에도 다녀왔다. 두 아이의 머리 속에는 송전탑을 세울 자리에 심은 나무가, 두물머리에 심은 감자와 땅콩이 계속 자라고 있다. 그러니 이 아이들의 판단기준은 논리가 아니라 생명이 될 것이다.

 

물론 이 급진주의자들이 학교를 다니면서 총명함을 잃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한다. 하지만 적어도 이 아이들은 노동자들의 넋을 기리는 분향소를 짓밟는 폭력을, 해군기지와 핵발전소, 송전탑, 골프장을 반대하는 주민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그걸 상식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 같다.

 

우리 동네만이 아니라 다른 동네에서도 안이와 선이들이 자라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 아이들의 운명이 곧 우리 사회의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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