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후배와 같이 막스 슈티르너(Max Stirner)의 The Ego and Its Own(1844년작)을 읽고 있다.
읽다보니 이런 독창적인 사상가를 진작에 제대로 공부하지 않았던가라는 후회가 든다.
니체보다 훨씬 앞서 독창적인 사유의 틀을 만들었고, 중세를 벗어나지 못한 근대의 사유를 비판했던 사상가, 슈티르너.
중간까지 읽으며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아래는 슈티르너가 정치적 자유주의(political liberalism)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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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슈티르너는 계급제도가 사상의 지배요, 정신의 지배라고 얘기한 바 있다. 그것은 중세만이 아니라 근대에도 이어져 내려온 지배이고 혁명도 서열을 바꾸었을 뿐 그 지배 자체를 제거하지 못했다(개혁이 있을 뿐 진정한 혁명은 없었다). 고대인의 지혜가 모두 세계에 관한 학문이라면 근대인의 지혜는 모두 신에 관한 학문이다. 프로테스탄티즘과 근대적 사유는 내적인 종속을 더 심화시켰을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슈티르너는 자유주의도 바라본다. 슈티르너에 따르면, “자유주의는 단지 깔개 위에 다른 개념을 가져왔을 뿐이다. 신성 대신에 인간을, 교회조직 대신에 정치를, 교리 대신에 ‘과학’을, ‘조잡한 도그마’와 가르침 대신에 현실의 개념과 영원의 법칙(eteranl laws)을.”(88쪽)


사람은 누구든 인간으로 대우받길 원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건 우리를 인간으로 인정하고 비인간적으로 대우받을 위험에서 보호해주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그를 진정한 보호자요 수호자로 인정할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 우리는 서로 단결하고 그런 단결의 형태가 공동체와 국가로 나타난다.

그런데 자유주의는 민족(nation)이나 국가(state)의 형태로 단결할 때에 우리가 진정한 인간이라고 본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자유주의가 지향하는 삶은 인간이 아니라 시민으로 사는 삶이라고 얘기한다. 자유주의는 개인적인 성격이나 고립을 버리고 사적인 삶을 공적인 삶을 누릴 때 참된 인간(true man)이 된다고 얘기한다. 과거에 좋은 기독교인을 요구했듯이, 근대는 좋은 시민을 요구한다. “국가는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의 공동체가 되고 모든 사람은 ‘전체의 복지’에 스스로 헌신해야 한다.”(90쪽) 슈티르너는 이를 세속신(mundane god)의 출현이라 본다.


프랑스 혁명은 소유(property)라는 강렬한 재료로 불이 붙었다. 그래서 그들은 돈에 강렬한 애착을 보이고 자신의 소유를 인정받고 소유자가 되려 한다. 슈티르너는 이 과정에서도 새로운 이상이 출현했다고 본다. 그것이 바로 민족, ‘인민의 자유’, ‘자유로운 인민’이라는 이상이다. 평민들(commonalty)은 기득권 계층의 권리를 폐지하지 않으면서 자신을 ‘민족’이라 부르며 특권을 ‘권리’로 전환시켰다. 이것이 새로운 군주제의 출현을 가져왔고 제한된 군주제를 절대 군주제(absolute monarchy)로 전환시켰다. 부르주아지가 그 과정을 주도했다.

그러면서 국가는 권리를 누려야할 수많은 군중을 가졌다(Now the state has an innumerable multitude of rights to give away). 그것이 바로 국가의 권리이자 ‘정치적’ 권리이다. 더구나 국가는 그 권리에 조건을 붙여 위임된 권리에서 파생되는 의무를 충족시킬 경우에 권리를 인정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지만 명령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 전에는 다수의 작은 군주국들(little monarchies)이 있었고 개인들은 이런 작은 사회에 속해있었다. 혁명은 이런 작은 군주국들을 무너뜨렸을 뿐이고, 제3계급은 자기 외의 다른 계급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유일한 계급을 만들기 위해 자신을 민족으로 선언한다. 슈티르너는 이를 신과 직접 연결되려는 프로테스탄트와 비교하며 정치적 프로테스탄트라 부른다.


부르주아지는 국가라는 영혼에 봉사하는 좋은 시민이다. 순종적인 시민이 자유인이라는 생각이야말로 부르주아지의 뜻을 대변한다. 충실한 하인보다 더 합리적인 시민은 좋은 시민을 국가의 하인으로 본다. 그런 점에서 혁명은 오랫동안 지속된 정신의 지배, 영혼의 지배를 무너뜨리지 못했고 도덕(moral spirit)이나 도덕의 영향력(moral influence)을 없애지 않았다. 그것을 다른 형태의 개념으로 대체했을 뿐이다. 슈티르너는 이것을 자유주의의 실제 모습이라 본다. ‘합리적인 질서’, ‘합리적인 법’을 얘기하지만 그 틀은 과거를 반복할 뿐이다. 자유주의자는 신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자신의 지배자인 이성에 대한 광신도(zealots)이다.


정치적 자유(political liberty)는 프로테스탄티즘의 두 번째 단계일 뿐이고 ‘종교의 자유’와 비슷하다. 종교를 가진 사람만이 종교의 자유를 누릴 수 있고 종교의 자유가 종교의 사라짐을 뜻하지 않듯이 정치적 자유 역시 국가 내에서의 자유이다. “Political liberty means that the polis, the state, is free.…State, religion, conscience, these despots, make me a slave, and their liberty is my slavery”(97쪽). 여기서 슈티르너는 기독교와 자유주의의 공통점을 또 하나 지적한다. 그것은 바로 목적이 수단을 신성하게 만든다(the end hallows the means)는 생각이다.

개인의 자유(individual liberty) 역시 사람이 아니라 법을 따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즉 자의적인 의지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법적인 군주(constitutional prince)에 종속된다. “Only liberal matter, only lawful matter”(98쪽)

슈티르너는 이런 과정이 결국 국가만을 유일한 군주로 승인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자유로운 경쟁도 국가를 전제한다. 개인적으로는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군주가 되지 못한다. 심지어 아이들도 부모가 아니라 국가에 속한다.


“If the revolution ended in a reaction, this only showed what the revolution really was.”(99쪽) 신중함(discretion)이야말로 반혁명의 신호로 한계를 정하는데, 자유주의자는 진정으로 신중함을 원한다. “The revolution was not directed against the established, but against the establishment in question, against a particular establishment. It did away with this ruler, not with the ruler.”(100쪽) 슈티르너는 이런 것이 결국 개량으로 이어진다고 본다. 낡은 자리에 새로운 지배자를 세우는. 혁명을 통해 세계를 바꾸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인민이고 민족이고 주권국가이다. 그것은 “A fancied I, an idea, such as the nation is, appears acting; the individuals contribute themselves as tools of this idea, and act as 'citizens'. The commonalty has its power, and at the same time its limits, in the fundamental law of the state.”(100쪽) “People keep carefully within the limits of their authorization.…I am a―law-abiding citizen!”(101쪽)

그런데 이 세계에도 세계의 붕괴에서 아무 것도 잃어버리지 않을 위험한 계급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프롤레타리아트와 빈민이다. 평민들은 자기 주변의 빈곤을 신의 현명한 뜻에 따라 불평등하게 나눠진 행운이라 여기고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하지만 빈곤이 날뛰면 그것을 가두고 밀어내려 한다. 그러면서도 출생이 아니라 노동이 소유를 보장한다고 강조한다.

이런 점에서도 슈티르너는 과거와의 유사성을 발견한다. 고통을 겪으며 지혜를 깨우친다는 중세의 ‘진리’를 평신도들이 믿지 않게 되듯이, 노동자들도 돈의 ‘진리’를 믿지만 그럴 수 없음을 깨우친다. “‘Money governs the world’ is the keynote of the civic epoch.”(103쪽)

소유자들의 지배는 국가가 그 빈곤한 ‘신민’들을 훈련시키고 그들이 따르는 만큼 돈(봉급)을 주고, 평민은 국가의 보호와 자비를 통해 존재한다. 그래서 만일 국가권력이 붕괴되면 평민은 반드시 모든 것을 잃을까 두려워할 것이다. 하지만 잃을 게 없는 노동자들은 어떨까? 가진 게 없는 자(non-possessor)는 가진 자를 보호하고 가진 자에게 특권을 주는 권력으로 국가를 볼 것이다. 좋은 시민은 가진 자이고, 경찰은 노동자들에게 적은 임금을 주기 위해 기꺼이 많은 세금을 내는 좋은 시민을 위해 존재한다('good citizens' gladly pay high tax-rates to it in order to pay so much lower rates to their labourers).


정치적 자유주의를 끝맺는 슈티르너의 말은 맑스보다 더 빠른 1844년에 위선적인 부르주아 사회의 미래를 예고한다.

The labourers have the most enormous power in their hands, and, if they once became thoroughly conscious of it and used it, nothing would withstand them; they would only have to stop labour, regard the product of labour as theirs, and enjoy it. This is the sense of the labour disturbances which show themselves here and there. The state rests on the―slavery of labour. If labour becomes free, the state is lost(105쪽)


슈티르너는 세속세계에 관심을 가졌던 고대와 정신에 사로잡힌 중세와 근대를 얘기하면서 진정한 에고이스트가 등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슈티르너는 새로운 인간의 탄생을 기대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 인간은 누구일까? 니체가 말한 초인과 다른 또 다른 존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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