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인에 쓴 칼럼이다.
몇 줄이 짤렸고 분량 때문에 하고 싶은 말을 다 못하긴 했지만(여차하면 다음 기회에 교수직의 실상을 폭로?ㅎㅎ) 대충 할 말은 했다.
2012년, 이제 비고용노동자로서의 삶을 새로이 시작한다.
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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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부터 대학에서 강의를 했으니 햇수로 10년이다. 그동안 직함도 시간강사, 겸임교수, 연구교수, 객원교수로 바뀌었다. 직함은 여러 번 바뀌었지만 아직까지 정식으로 계약을 해본 적이 없다. ‘이상한 공장’ 대학에는 기본적인 규칙이 없다. 핸드폰으로 해고문자를 보내는 야만적인 규칙조차 대학에는 없다. 다음 학기에도 강의를 맡는다는 연락이 없으면 그걸로 끝이다.


이번에 통과된 고등교육법 개정안은 학기마다 맺던 고용계약을 최소 1년으로 연장시킨다고 한다. 눈 가리고 아웅하는 짓이다. 계약을 해본 적이 없는데, 어떤 조건으로 강의를 맡는지 확인한 바 없는데, 기한만 연장하는 게 무슨 소용일까? 결국에는 강의를 주겠다며 전화를 하는 교수들에게, 대학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다.


지난 해 시민교육이라는 과목을 강의하면서 학생들에게 어떤 알바를 하든 반드시 고용계약서를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연한 상식이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청년유니온을 인터뷰하고 알바 실태를 조사해서 수업시간에 발표하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나는 한 번도 고용계약서를 써본 적이 없다. 여기서 어떤 교육이 가능한가? 누가 누구에게 시민됨을 가르칠 수 있는가?


몇몇 학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인권을 내세운 대학에서도 비정규직은 해고되고 어떤 강사들은 외부 프로젝트를 한다는 이유로 강사료를 받지 못한다. 학교 밖에서는 진보를 자처하는 교수들도 학내에서는 놀라우리만치 보수적인 면모를 드러낸다. 이득을 보는 건 사학재단이고, 교수들은 이런 야만을 승인하고 때로는 결탁하며 자리를 보존한다.


강의를 하는 사람들만 야만의 상태에 놓인 건 아니다. 비싼 등록금을 내고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도 마찬가지이다. 휴학하고 다른 학교 시험준비를 하는 ‘반수’를 막는다며 1학년생들의 휴학을 금지하는 대학들이 많다. 학생증이 은행의 체크카드로 변한 지 오래되었고, 학교 공간 곳곳에 기업들이, 상품의 논리가 침투했다. 이 모든 게 학교 발전을 위해서란다. 한국의 대학들이 제아무리 인문정신을 떠들어도 그곳은 이미 인간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상품의 공간이다.


그래도 대학에서 필요한 전공과 교양을 배우지 않느냐고? 천만의 말씀이다. 학기 초마다 학생들은 듣고 싶은 과목을 수강하기는커녕 들을 수 있는 과목을 찾아 수강신청하느라 바쁘다. 그렇게 수강하니 당연히 수업분위기는 좋지 않다. 그리고 졸업반 학생들이 조별로 활동하는 수업, 토론하는 수업을 처음 했다고 할 정도로, 대학의 분위기는 갈수록 중고등학교를 닮아간다. 좀 쉬었다 하자고 하면 다들 책상에 얼굴을 묻는다. 뭐가 그리 피곤하냐고 물으면 쪽지시험에, 과제에 너무 힘들단다. 상대평가방식이 점점 더 세분화되니, 교수들이 가장 쉽게 성적을 매길 방법은 과제와 시험이다. 교육 원칙이나 소신 따윈 필요 없다. 한국의 대학은 학생이 아니라 학교를 위해 존재하니까.


이런 일이 가능한 건 한국 교육의 정점이 대학이고 교육의 목표가 학벌을 높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엄청난 적립금이 문제되어도 사학재단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대안학교가 발버둥을 쳐도 학벌의 그물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듯, 학생들이 계속 대학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조용한 노동자, 무기력한 학생, 영악한 교수, 오만한 사학재단, 부모들의 욕망이 교육을 빙자한 야만의 대학을 유지시킨다.


그래서 대학을 관두기로 했다. 인간으로서, 시민으로서 내 품위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교수라는 직함보다 새로운 교육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힘을 쏟으려 한다. 현장과 이론을 잘 아는 연구자, 그들과 학생을 이어줄 시스템, 시민사회의 다양한 공간을 활용한다면 야만의 대학을 무너뜨릴 새로운 대학을 만드는 건 불가능하지 않다. 누군가는 이 공모관계에서 벗어나야 교육이 바뀔 수 있다. 나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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