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5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제 13회 인권영화제 개막식에 다녀왔다. 서울시 시설관리공단이 장소사용을 허가했다 취소하고 경찰이 무대설치를 방해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으며 영화제는 개막했다.

용산철거민들의 이야기를 다룬 개막작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용산만이 아니라 흑석동, 성남 등 전국 곳곳에서 뉴타운과 재개발 열풍이 불고 있기 때문이다. 용산 4구역에서만 약 47조원의 엄청난 이윤을 볼 수 있으니 힘 있는 자들은 악착같이 개발을 하려 든다. 세입자들은 전혀 알지 못하는 개발계획, 그들을 위협하는 용역깡패, 용역의 불법적인 활동을 묵인하는 공권력, 한국사회에서 40년 이상 반복되어온 야만이다. 철거촌은 한국의 게토이자 수용소이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한길사, 2006)에서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제 2차 세계대전 때 많은 유대인을 학살한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풍경을 기록한다. 이 재판에서 아이히만은 “유대인을 죽이는 일에 나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나는 유대인이든 비유대인이든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아렌트는 이 살인마가 평범한 공무원으로 성실히 일했다고 보면서 타인과 소통하지 않고 생각 없이 법과 명령을 따르는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가 비극의 원인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유명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말이 나왔다.

그런데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재판정에 세운 것이 일종의 정치쇼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비극의 책임은 아이히만만이 아니라 유대인 자신과 그들의 이웃들에게도 있었기 때문이다. 나치와 협력해서 유대인의 명단을 작성하고 기차에 태워 수용소로 보내고 심지어 사형을 집행하기도 했던 사람들은 바로 유대인과 이웃들이었다. 아렌트는 이들의 협력이 없었더라면 나치의 계획이 결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얘기한다.

영화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에서 나는 수많은 아이히만들의 모습을 보았다. 철거민들을 끌어내고 방패로 찍는 전경들, 6명의 죽음을 책임질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경찰과 그들을 사면한 검찰, 그들이 바로 우리 시대의 아이히만이고 우리 시대의 무사유를 대표한다.

그와 함께 나는 우리 각자의 아이히만도 발견했다. 그 이웃들이 유대인을 외면했듯이 우리 역시 함께 살던 주민들이 철거민으로 규정되는 순간 그들을 외면하지 않았던가. 나의 일상을 지속시키기 위해 타인의 고통을 묵인하지 않았던가. 보편적인 정의의 원칙에 따라 현재의 부조리를 거부할 인간 최후의 권리를 우리 스스로가 포기하지 않았던가. 아직 시신을 모시지도 못한 유족들의 절규에 귀를 막지 않았던가.

강력한 야만의 힘을 꺾으려면 우리 자신이 문명의 정치, 살림의 정치를 실천해야 한다. 희망이 우리 내부에서 싹틀 수 있도록 인간이길 포기하지 말고 고통받는 타자와 손을 잡아야 한다. 영화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며,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으며 되묻는다. 우리는 인간인가?


서울 시내 곳곳에는 광장이라는 이름을 단 공간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시청 앞에 위치한 서울광장도 그런 공간 중 하나이다.
하지만 요즘 많은 시민들은 그곳을 광장이 아니라 '차벽'으로 둘러싸인 공터로 여긴다.
사진에서 드러나듯이 차벽으로 둘러싸인 서울광장은 그냥 잔디가 깔린 공터일 뿐이다.
쥐새끼 한마리 지나가지 못하도록 촘촘히 쌓은 차벽 속에 덩그러니 남겨진 공터이다.
굳이 경찰청에 '광장'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설명해줘야 할런지 모르겠으나 혹 모르고 그럴 수 있으니 설명하자면  광장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브리태니커] 광장: 개방된 장소에 사람들이 한데 모이고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장소.
[국립국어원] 광장: 1.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게 거리에 만들어 놓은, 넓은 빈 터.
                           2. 여러 사람이 뜻을 같이하여 만나거나 모일 수 있는 자리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이 사전적 의미에 따르면 광장은 여러 사람들이 자유로이 모여 이용하고 뜻을 펼칠 수 있는 장이다. 그러니 광장에서 사람들이 추모제를 열거나 집회, 문화제를 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서울시와 경찰청, 정부는 폭력시위가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며 서울광장 사용을 막아왔다.
경찰이 막지 않는다면 폭력시위가 벌어질 가능성 자체가 없을 터인데, 오히려 무리하게 시민들의 광장 진입을 막아서 폭력을 유발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심지어 서울광장 앞에 설치된 노대통령 분향소까지 강제로 철거하는 만행마저 일삼고 있다.

시민들이 쓸 수 없는 공간을 광장이라 부를 이유가 없다.
이제부터 서울광장은 서울광장이 아니라 서울공터라 부를 일이다.

더 어처구니 없는 일도 벌어졌다.
올해로 제 13회를 맞이하는 인권영화제는 내일인 6월 5일부터 3일간 청계광장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서울시 시설관리공단이 불과 행사 이틀을 앞두고 불허 통보를 했다.
문장이 쓸데없이 길고 비문투성이인 것은 그냥 넘어가자(어차피 말도 안 되는 얘기를 길게 나열하다보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
시설을 보호하기 위해 광장사용을 불허한다는 논리는 참으로 황당하다.
시민들이 쓰기 위해 광장이 있는 거지, 광장을 위해 시민들이 나가야 하나.
그러면 서울광장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도 저 파란 잔디를 보호하기 위한 환경주의자 오세훈, 이명박씨의 마음인가?

아무래도 서울시의 마음은 다른 곳에 있는 듯하다. 신문기사에 따르면, 서울시는 "영화 상영작 다수가 정치적인 내용을 담고 있고 영화제가 불법 집회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며 승인 취소 이유를 밝혔다.
당연히 인권영화제에는 정치적인 내용의 영화가 많을 수밖에 없다.
아니 인권 자체가 정치적인 주제이니 당연히 인권영화제는 정치적인 내용을 다뤄야 한다.
인권영화제에서 정치적인 영화를 빼라고 하면 무슨 영화를 틀 것인가?

이 역시 솔직하지 못한 답변이다.
아마도 서울시나 정부의 마음은 또 다른 곳에 있는 듯하다.
제 13회 인권영화제의 개막작품은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 개발에 맞선 그들의 이야기"이다.
소위 용산참사에서 철거민들이 망루에 오를 수밖에 없었던 사연과 유가족들의 고독한 싸움을 다룬 영화다.
자신들이 애써 잠재운 사건을 다시 물 위로 건져 올려 다루고 뉴타운과 재개발같은 삽질이 다시 공론의 장에 오르니 서울시나 정부가 발을 동동 구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구나 인권영화제는 무료로 진행되어 누구나 그 영화를 감상할 수 있으니 무조건 영화제를 막을 수밖에.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노력 덕분에 용산은 잊혀지지 않고 서서히 정치적인 의제로 되어가고 있다.
그동안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미사가 평화미사를 드려온 데 이어, 천주교 서울대교구 김운회 주교가 용산현장을 방문해 분향소를 찾았다.
종교계까지 움직일 정도로 민심은 요동치고 있다.

그런데 광장을 가로막고 행사를 불허하는 것으로 이런 민심을 막을 수 있을까?
광장을 막을테면 막으라.
광장을 공터로 만들 수는 있어도 시민의 마음을 사막으로 만들 수는 없으니 되살아난 정의의 불씨가 부조리한 권력을 무너뜨릴 날은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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