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 만 2살이 된 아이의 아빠다. 그래서 솔직히 학교보다 어린이집에 관심이 더 많다. 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낼 때마다 약간의 해방감과 자유를 느끼지만 그만큼의 불안 속에 산다. 어린이집에서 무슨 일이 없을까, 애는 아프지 않을까, 택시 운전석 앞에서 딸랑거리는 ‘오늘도 무사히’라는 장식을 가슴에 품고 산다.

그럼에도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는 이유는 내 삶을 살기 위해서이다. 많은 부모들이 그 점을 잊고 산다. 내가 살기 위해 우리는 누군가에게 기대야 하고, 그러면서 불안과 갈등이 싹틀 수밖에 없다. 아니, 갈등하는 게 정상이다. 서로 다른 조건과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타자에게 기대며 함께 살아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갈등할 수밖에 없다. 갈등을 피하는 방법은 기대지 않는 법 외엔 없다.

그래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공통된 윤리적인 명제, ‘네가 타인에게 대우받고 싶은 대로 타인을 대하라’는 명제가 등장한다. 갈등을 조절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인 셈인데 타자의 얼굴을 마주보지 못하는 사회, 타자의 존재를 인식하거나 인정하지 못하는 사회에서는 이 명제가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어린이집과 학교에 CCTV를 설치하려 하고, 어울려 살 경우에 일어날 수밖에 없는 소소한 일들을 법에 따라 심판되어야 하는 사건들로 만든다.

우리의 삶을 위해 타자를 필요로 하면서도 우리가 매달리는 건 타자가 아니라 기계와 규칙이다. CCTV가 필요 없는 환경을, 굳이 폭력을 쓰지 않아도 되는 환경을 만들면 될 일을 우리는 타자를 ‘감시’하고 ‘처벌’해서 해결하려 든다. 내 것을 악착같이 지키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타자를 마주 보지 않으니 타자가 더욱더 두렵고, 얼굴을 맞대지 않으면서 타자가 우리를 더욱더 대우하길 원한다. 그 결과는 종잡을 수 없는 폭력, 폭력의 경계를 넘어선 폭압이다.

우리가 무시하는 또 다른 사실 하나. 감기와 마찬가지로 일상 속의 갈등과 폭력은 상황이 나빠지고 있음을 경고하는 징후이다. 그 징후에 주목하지 않고 감추면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야 그 심각성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러니 갈등과 폭력을 완전히 제거하겠다는 발상처럼 어리석은 생각은 없다. 그리고 우리가 누군가에 기대어 살아야 하는 이상 폭력이 완전히 사라지는 건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갈등의 소멸을 원하나?

 

1. 폭력에 관한 내밀한 알리바이

청탁받은 주제는 ‘폭력과 불화’인데, 그 내용을 말하기 전에 다음과 같은 고민을 먼저 나누고 싶다. 학생들의 폭력이 예전보다 더 조직적이고 광범위하다는 점을 빼면 그런 폭력은 항상 있었다. 나도 그 폭력의 장에서 성장한지라, 학교를 내세우는 모임에는 눈꼽만큼도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몇 년 전에 고등학교 동문회에 한번 나갔다가 폭력에 폭발하던 아이들이 어느덧 폭력을 즐겁게 회상하는 존재로 변한 걸 보고 모임에 나가지 않는다. 이제 나이를 먹었다고 애들을 그 감옥으로 보내고 등 두드리며 격려하니 이 무슨 지랄인가. 학교에서의 폭력이 더 심각해졌을까, 사회의 폭력이 더 심각해졌을까?

그리고 학교폭력의 심각성을 얘기하는데 내 기억에 폭력의 주범은 삥을 뜯는 서클이나 서로 치고 박았던 친구들이 아니라 바로 교사들이었다. 성적이 낮다고 두드려 맞고 반성하는 기미가 없다며 두들겨 맞고 지시를 따르지 않는다고 화장실 청소를 전담하고, 내 기억 속의 학교는 그런 공간이다. 학교폭력이 불거진 것은 학생들간의 폭력빈도보다 학생과 교사간의 폭력, 그리고 학생의 폭력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교사의 무기력함 때문이다. 그런데도 왜 학교와 교사가 아니라 학생들이 학교폭력의 대상이어야 할까?

교사들에게 물어보고 싶다. 앞의 명제처럼 교사는 학생에게 대우받고 싶은 대로 학생을 대하고 있는가? 그렇게 대하고 있는데도 폭력이 계속 불거지는 걸까? 교사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건 교사들이 더 이상 교사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수능 족집게 능력으로는 학원선생보다 신뢰감을 잃어버렸고, 아이들의 실제 사정을 파악하는 능력으로는 동네 도서관이나 복지관에서 일하는 사람들보다 못한 실정이다. 교사라는 ‘직위’가 학교장이나 교육청, 교육부의 손아귀에 있다는 사실을 잘 아는 학생들이 교사의 권위를 세워줄리 없다. ‘우리 그런 사람들 아니에요’, ‘학교가 바뀌지 전까진 무엇도 하기 어려워요’라는 알리바이가 계속 통할 수는 없다. 불편하게 들리겠지만 교사들은 폭력의 조정자가 아니라 학교폭력의 한 축이다.

서울의 한 초등학교는 ‘화장실 용무 이외에는 복도에 나가지 않는다’, ‘교실 밖을 나가더라도 3명 이상 모이지 않고 30초 이상 만나지 않고 3문장 이상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6학년 공통생활규칙을 배포했다고 한다. 그리고 수원의 초등학교에서는 다른 반에 출입하지 말라는 일종의 규칙이 내면화되고 있다고 한다. 충남 아산의 한 초등학교 교사는 시험 성적에 따라 학생들을 신과 귀족, 평민, 천민, 노예로 나누고 체벌을 가했다고 한다. 이곳이 학교인가? 이곳이 정녕 자아를 발견하고 성장하는 곳인가? 자아란 건 끊임없는 만남을 통해 발견되고 성장은 희로애락을 겪으며 자연스레 이루어지는데, 이런 곳에서 자아발견과 성장이 어떻게 가능할까? 이런 규칙이 정해지는 곳은 이미 학교가 아니다. 그러니 학교폭력에 앞서 우리 사회에 진정 학교가 존재하는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그리고 학교가 아닌 곳에서 일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전교조>가 참교육이라는 좌표를 잃고 노동조합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지 오래되었다.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고용주에게 복종하는 노동자, 학생들을 관리하는 관리자들이라면 더 이상 할 말은 없다. 하지만 교사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면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노동자들은 옥쇄파업을 하고 망루에 매달리며 저항하는데, 왜 교사들은 그러지 못할까? 학교가 바뀌지 않아 어려우면 교사들이 나서서 그런 학교를 불태워야 하지 않을까? 이계삼의 말처럼 “학교 자체가 폭력의 숙주”라면 그것을 도려내야 하지 않을까?

폭력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사소한 갈등까지 미리 제거하려는 곳이 학교라면 그 속에 있는 교사는 교사가 이미 아니고, 학생도 더 이상 학생이 아니다. 그러니 우리는 학교폭력이 아니라 ‘이곳이 학교인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먼저 던져야 한다. 이 외에 무슨 다른 대안이 가능한가? <전교조> 교사가 다수인 학교가 만들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할까? 그런데 우리가 집권하면 세상이 바뀔 거라고 주장하는 ‘소위’ 진보정당들과 <전교조>는 무엇이 다른가?

그런데 이런 근본적인 질문이 던져지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오늘의 교육》 지난 호를 읽고 마음이 씁쓸했다. ‘누가 진짜 일진인가’라는 물음보다 폭력이 경고를 보내는데도 둔감한 그 현실 때문이었다. 그보다 더 씁쓸한 것은 학교에서 일하는 교사들의 글보다 외부에서 활동하는 활동가들의 글이 학교현장과 학생들의 삶, 심리상태를 잘 꿰뚫어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경은 ‘센 척’할 수밖에 없고 ‘끓는점’을 참지못하는 아이들을 얘기하며 “그러한 행동을 유발한 분노라는 감정과, 그러한 분노를 느끼게 한 이유들까지 그저 덮어 놓고 부정하”지 말자고, “왜 그들이 가출했는지, 어떤 욕구가 있는지, 그 욕구를 어떻게 함께 해결해 나갈 것인지”를 성찰하자고 얘기한다. 그리고 한낱은 “돌봄, 상담, 치유와 같은 언어들이 무조건적 대안이나 완전한 이상태”가 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자며, 그렇지 않다면 그건 지금의 학교를 지속시키는 도구일 뿐이라고 강조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교사들은 말 그대로 다양한 입장과 상황을 반영하고 중재하려고만 든다. ‘착한 교사’의 면모가 드러나는데, 나는 그런 입장이 불만스럽다. 교사만의 문제일 수는 없지만 교사의 문제가 아닐 수는 없다. 학교를 관둔 아이들이나 학부모들의 얘기는 거의 대부분 교사의 태도와 생각을 문제 삼는다. 교사는 학교폭력의 당사자이자 피해자이니 중립적인 관점이 아니라 자기 관점을 가지고 그 문제에 개입해야 한다.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가 아니라 ‘나는 이런 일을 겪었습니다 또는 목격했습니다’로 사안을 구체화시켜야 한다. ‘학생들이 이런 폭력을 겪고 있다’가 아니라 ‘나도 이런 폭력을 겪었다’, ‘나는 이런 폭력을 썼다’로 교사가 겪는 문제와 학생들이 겪는 문제가 동일한 기반 위에 있음을 드러내야, 내가 사는 생활 속에서의 문제로 만들어야 소통과 연대가 가능하다.

그러면서 학생만이 아니라 왜 교사도 학교에서 존엄한 존재가 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사상가 함석헌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생각사, 1979년)에서 “덕이 있어야 교사인데 덕은 스스로는 있는 줄 모르는 것이다. 덕을 득(得)이라(속에 얻은 속) 하지만 속에 정신적으로 얻은 것은 참 자아가 된 것인데, 그것은 이른바 득은 아니다. 그러므로 덕은 스스로 모르는 것이다. 내가 덕이 있다 하면 덕은 아니다. 내가 교사다 하면 교사는 아니다. 교사되기 위하여는 교사 아니 돼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너무 교사답지 않은가?

 

2. 불화의 제거는 폭력이 아닌가?

1년 넘게 사라졌던 한 친구가 얼마 전 우리 집에 와 술을 마시고 자고 갔다. 이 친구가 가장 싫어하는 계절이 여름이다. 돈 들여 예쁘게 심은 문신이 아니라 말 그대로 막 그린 그림이 상체에 그득하다(작년에 돈 들여 기어이 붕어 한 마리를 더 그리셨다). 나시티 입고 다니면 그 문신이 확 드러나니 모세의 기적처럼 사람들이 길을 터준다. 덕분에 나는 이 친구와 술을 마실 때면 두려울 게 없다. 다들 알아서 친절하게 대해주니.

그다지 살갑게 대하지도 않고 잘해주지도 못한다. 오면 밥 먹이고 술 왕창 먹여 재워주는 정도. 누구 욕하면 같이 욕해주는 정도. 이렇게 심심하게 대하는데도 이 친구가 찾아오는 이유는 한 가지란다. 자기 몸에 그린 문신을 이상하게 쳐다보지 않고, 자기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이라서. 가끔은 돈 얘기도 꺼내지만 요즘은 내가 더 궁해 보여 그러지는 않는다(우리 아이 두돐 때 선물을 사오겠다며 사라졌는데 진짜 그럴지는 두고 볼 일이다).

술 마시다 이 친구에게 물어보면 지난 호에서 나경이 얘기한 바와 비슷하다.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에 기술은 없고 생활리듬은 매우 불규칙하다. 그래도 지금껏 살아올 수 있었던 건 일종의 오기와 가오 덕분이다. 조직폭력에 가담하지 않고 독고다이로 살아온 이 친구에게 문신은 갑옷이요 폭력은 자신을 보호할 유일한 무기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그 무기를 빼앗고 갑옷을 벗기려 한다. 이 친구를 쏙 빼서 우리가 생활하는 세상 밖으로 내보내면 세상이 안전해질까?

오히려 나는 이 친구가 미래에 굉장히 중요해질 거라고 믿는다. 위에서 지침이나 명령을 받지 않으면 쭈뼛거리며 무엇도 선택하지 못하는 대학생보다 이 친구가 훨씬 더 능동적이다. 파국의 상황에서 빛을 발할 능력이다. 그리고 적어도 이 친구들은 상대방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을 하고(물론 그것 때문에 자주 시비도 붙지만), 당신이 뭔데 나를 이런 식으로 대하냐고 대들기도 한다. 자신이 선택한 삶은 아니지만 주어진 조건 속에서 나름의 방식대로 살아온 사람이다. 물론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괴롭히기도 하고 사고도 친다. 하지만 그것이 온전히 한 개인의 몫인가?

권정생은 『우리들의 하느님』(녹색평론사, 1997년)에서 물 한 그릇의 양심을 얘기한다. “열사람에게 열 그릇의 물이 필요한데 힘이 센 한 사람이 다섯 그릇을 차지해버리고, 또 한사람이 세 그릇을 차지하고 다시 한사람만이 자기 몫의 한 그릇을 차지했다. 나머지 일곱 사람은 한 그릇을 가지고 나눠 마셔야 하는 게 요즘 사회의 실정이다. 일곱 사람의 대부분은 갈증을 견디며 얌전히 참고 견디다 목이 타서 죽는 사람이 생기고, 그 중의 한두 사람은 참지 못해 결국은 칼을 휘두르게 된다. 그 칼이 바로 이런 모순된 사회구조를 만든 장본인에게 꽂혔을 땐 그래도 괜찮지만 대부분이 엉뚱하게 같은 피해자들끼리 휘둘러져 억울한 희생이 이중 삼중으로 생긴다. 이럴 때 일어나는 불상사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칼을 들고 휘두르는 사람은 더 큰 칼에 의해 죽음 직전까지 이르렀던 선량한 사람이었는데도 그는 살인자가 되어버린다.”

그렇다면 교사들은 자기 양심을 지키고 학생들이 서로 칼을 휘두르는 비극을 적극적으로 막고 있나? 사실 그런 일에 개입하기는 싫고 어떤 면에서는 모범생들을 바라보는 건 아닐까? 허나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엘리트들이 대부분 모범생 출신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들만큼 폭력적인 인간은 없다. 그런데도 교사들이 모범생을 보며 안심하는 이유는 뭘까? 선과 악의 기준은 없다고 말하면서도 마음은 자신의 지시가 선이라고 생각하고 그 지시에 따르는 모범생에게 만족하는 건 아닐까?

지나친 청결이 면역체계를 파괴해서 병을 부르듯이, 서로의 생존에 다양성이 필요하고 그 때문에 불편해질 수밖에 없는데도, 애써 불편함을 피하려는 이유는 뭘까? 불화를 막기 위해 폭력을 제거해야 한다는 생각은 기본적으로 ‘통제의 관점’이다. 『국가처럼 보기』(에코리브르, 2010년)에서 제임스 스콧(J. Scott)은 프로이센의 공리주의적인 삼림계획에서 그 단초를 찾아낸다. “가치있는 종들과 경쟁하는 종, 이들을 포식하는 종, 혹은 그들의 산출량을 감소시키는 종들로 재분류한다. 따라서 가치 있는 식물은 ‘농작물’이 되고, 그 농작물과 경쟁하는 종은 ‘잡초’로 낙인찍힌다. 그리고 농작물에 기생하는 벌레는 ‘해충’으로 낙인찍힌다. 또한 가치있는 나무는 ‘목재’가 되는 반면, 이와 경쟁하는 종은 ‘잡목’이 되거나 ‘덤불’쯤으로 여겨진다. 이와 동일한 논리는 동물의 경우에도 적용된다. 높은 가격이 매겨진 동물은 ‘사냥감’이나 ‘가축’이 되지만 그것과 경쟁하는, 혹은 그것들을 먹이로 삼는 동물은 ‘약탈자’나 ‘야생동물’쯤으로 간주된다.” 이런 논리가 사회와 학교에 적용되면 양아치나 비행청소년, 폭력학생 등으로 변한다.

좋은 학교를 만들자고 얘기하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체제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체제의 귀로 학생들의 말을 듣는다. 그러니 시인이 사라진다. 시인이 없어지는 이유는 시집을 읽지 않아서가 아니라 세상과 불화하는 존재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면 우리의 언어는 자기 존재가 쉴 곳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존재하는 세계와 갈등하고 불화하는 문학의 언어, 시의 언어는 지금의 학교에 뿌리를 내릴 수 없다. 교사도 더 이상 시의 언어로 학생들에게 말을 건네지 않는다. 학교의 문제일까?

그런 의미에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폭력의 본질이 무엇이고 그것을 제거할 방법에 관한 논의가 아니라 폭력으로 드러난 학생들의 삶에 대한 공감과 소통이다. 불편하고 어려워도 그렇게 다가서야 이 사회가 지속될 수 있다. 그리고 불화와 갈등이야말로 새로운 것을 낳는 불씨이다. 폭력을 예방한다는 명목으로 착한 학생, 착한 학교, 착한 사회를 만들려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사회의 생명력과 평화를 파괴하는 근본적인 폭력이다. 갈등이 잦은 학교가 좋은 학교이고 소란스러운 나라가 건강한 나라이다. 교육은 그런 갈등과 소란에 주목해야 한다.

당위적인 말을 하며 교사에게 세상의 모든 짐을 지우려는 게 아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현장을 지키고 산다. 학교가 학교이기 위해 교사가 해야 할 역할, 학생이 해야 할 역할이 있을 텐데, 서로가 서로를 마주볼 수 있는가, 서로를 타자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이게 관건이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 했다. 하나(同)로 만들지 않고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하나로 합쳐지는 것을 막기 위해 단일자에게 맞서는 것, 그것이 화이부동이다. 교사와 학생이 단결해서 학교라는 체계에 맞서는 그림을 그리는 것은 왜 불가능할까?

 

3. 수평적인 잡음에서 수직적인 소음으로

예전에 난곡의 빈민지역에서 활동하신 분의 얘기를 들은 적 있다. 강제로 밀려난 사람들은 기본시설조차 없는 환경에서 생활해야 했는데, 특히 판자집의 판자가 너무 얇아 옆집의 소리가 다 들렸다고 한다. 지금의 우리라면 참을 수 없을 그 환경에서 놀랍게도 주민들은 서로 협동했다. 혼자서는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기에 자연스럽게 협동의 전략이 만들어졌다.

무슨 일이 있는지 알고 싶지 않아도 알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옆집이나 옆방에서 들려오는 잡음은 서로의 삶을 읽고 챙길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준비물이 없는 아이에게 준비물을, 급히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십시일반으로 모은 돈을. 그래서 그 때는 힘들게 운동했지만 보람을 많이 느꼈다고 한다.

그곳에서도 당연히 갈등이 생기고 충돌이 벌어졌지만 그 잡음은 서로를 이해하게 만들거나 일상을 움직이는 동력이기도 했다. 우리가 깜깜한 달동네라 부르며 두려워하던 그곳에서 폭력과 잡음은 일상이었지만 그 폭력이 반드시 삶을 두렵게 만들거나 배제로 이어지진 않았다.

지금의 난곡은 아파트촌으로 재개발되었다. 깔끔하게 세워진 아파트 숲에서는 그때의 잡음이 사라졌다. 하지만 사람들의 삶이 평온해지지는 못했다. 수평적인 잡음이 수직적인 소음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지금 사는 아파트로 이사를 오면서 난생 처음 층간소음이라는 것을 경험했다. 아침과 밤마다 울리는 워킹머신 소리에 신경이 날카로워졌고 한바탕 분쟁을 겪기도 했다. ‘개발’된 공간에서 잡음은 소음으로 변했다.

사실 이것은 수평과 수직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수평의 위치에서 퍼지는 소리들은 한 측이 일방적으로 들어야 하는 소리가 아니다. 소리는 섞이고 공명하며 새로운 파장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수직의 공간에서 내려오는 소리는 한 측이 일방적으로 말하고 다른 측은 듣는 관계이다. 물론 위, 아래층을 고려하면 그것은 상대적이지만, 수직으로 높이 세워진 아파트라는 공간이 살갑지 않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물론 좋은 방음벽과 방음바닥을 만들고 층간의 거리를 넓히면 소음은 줄어들 것이다. 그런데 소음이 줄어들면 문제가 해결될까? 서로 얼굴을 맞대지 않고 생활하면, 서로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면, 삶이 행복해질까? CCTV와 세콤으로 무장한 학교와 아파트 단지에 살아도 그곳을 벗어나는 순간 삶은 더욱더 두려워질 수밖에 없다. 학생들을 향해 일방적으로 소리 지르는 교사는 학교 밖을 나서는 순간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다. 안전한 학교라는 목표는 불가능해서가 아니라 지속가능하지 않고 올바르지 않기 때문에 부정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할까? 이제는 소란과 불화를 인정하고 그것과 함께 사는 법을 연습해야 하지 않을까? 교육도 그런 연습과정이어야 하지 않을까? 교사와 학생의 관계도 그런 연습으로 조금씩 바뀌지 않을까?

근대의 사상가 마키아벨리는 『로마사논고』에서 시민의 소란과 그들간의 불화야말로 국가의 자유를 유지시키는 힘이었다고 주장했다. 갈등이 나라를 좀먹고 무너뜨린다는 상식에 맞서 마키아벨리는 왜 갈등이 필요한지를 설명하며 로마 공화국을 파고든다. 공화국이란 서로 다른 두 가지 성향, 즉 민중의 성향과 지배계급의 성향이 갈등할 때 유지된다. 예를 들어 원로원은 법률을 통해 민중의 행동을 제한할 수 있었고, 민중들은 귀족들이 논의할 때 원로원을 향해 소리를 지르며 반대의사를 표현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어느 한 편도 다른 편의 이익을 쉽게 억압하거나 무시할 수 없는 균형이 이루어졌다. 이런 역사를 바탕으로 마키아벨리는 정치적 자유의 가치를 옹호하면서도 시민들의 불화가 위험하다고 주장하던 사람들을 비판했다. 마키아벨리에게 소란과 갈등은 민주주의를 살아있게 하고 공화국을 유지시키는 힘이었다.

현대의 사상가 랑시에르(J. Ranciere)도 비슷한 주장을 펼친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19세기 프랑스의 노동자들이 파업으로 요구한 것은 단지 임금이나 노동조건만이 아니라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나눔, 힘과 형태의 나눔을 폐지하는 것”, “정치적 형태와 사회적 내용 사이의 대립을 폐지하는 것”이었다. 파업이라는 대규모 집단행동이 매우 논쟁적이고 갈등하는 공적 공간을 만들었고, 그 공간에서 “투표권이 없었고, 시민이 아니라 그저 사적 개인으로 간주되었던 이 노동자들은 그럼으로써 공적 공간 ― 지배질서는 노동자들을 이 공적 공간에서 배제했다 ― 의 구성원으로서 스스로를 긍정했다.” 이 때문에 랑시에르는 불화야말로 포함과 배제의 관계를 전복하는 중요한 정치원리이고 “지배공간에서 말로 인정되지 않고 그저 고통이나 분노의 소음으로만 간주되던 말들을 그 지배 공간에서 듣게 만”드는 것이라 주장한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사회는 어떠한가? 우리에게도 그런 장이 존재하는가? 공식적으로 회의에 참여하진 못해도 회의에 참석한 자들에게 야유를 보내고 소란을 일으키며 자신들의 의지와 의견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하는 장,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경계, 학생다운 것과 학생답지 않은 것의 경계, 모범과 폭력의 경계를 허무는 장이 존재하는가? 상황은 정반대이다. 농촌에 가면 학교 근처에 사는 선생님들은 거의 없고 다들 읍내에 살고, 도시에서도 비슷한 상황이다. 이런 상황이니 서로를 마주칠 기회도 없고, 서로의 삶에 대한 관심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불화가 아니라 타자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회, 소음만 들리고 잡음은 사라진 사회에서는 연대가 불가능하다. 같이 살기 위해 손을 잡아야 하는데 서로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안타까운 일이 아니다. 어울리고 부대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당연한 일이다.

 

4. 왜 좋은 학교를 기대하는가?

《오늘의 교육》을 읽다보면 내가 딴 세상을 산 것 같다. 아니, 이렇게 좋은 선생님들이 계시는데 왜 우리가 사는 현실이, 학교가 이 모양이지? <교육공동체 벗>의 카페에 들어가면 진지한 고민들이 매일 올라오고, 그런 고민을 나누는 조합원이 600명을 넘고 카페 회원은 2,0000명을 넘는데 학교가 왜 이 모양이지?

돌이켜보면 <전교조>가 처음 만들어질 때도 나는 좀 불편했다. ‘참교육’을 내세웠는데 나는 한 번도 그런 교육을 경험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 말을 믿기 어려웠다. 교사들이 참교육을 우리에게 ‘선물’할 수 있을 거라 믿지도 않았다. 내가 만난 <전교조> 교사들은 참 좋은 분들이었지만 다분히 ‘계몽적’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냥 지긋지긋한 학교가 싸그리 없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그 폐허에서 참교육이 출현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학교라는 집 속에 교사와 학생이 산다. 학교라는 집 자체가 못되게 지어져서 교사와 학생들 모두가 고생하고 있다. 집이 문제이면 그 집을 허물고 새로운 집을 지어야 한다. 그런데도 그런 생각을 입밖에 내지 않는다. 우리 사회의 교육잡지도 고만고만하다는 생각을, 누가 정해준 것도 아닌데 묘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민들레》를 읽으면서는 대안학교/대안교육에 대한 고민이 교육에 관한 고민인가, 《오늘의 교육》을 읽으면서는 학교를 바꾸자는 고민/공교육에 대한 고민이 교육에 대한 고민인가, 이런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우리가 논하는 교육이란 대체 무엇인가?

함석헌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에서 “혁명을 하는 자가 교육을 할 수 있다. 혁명하자는 마음이 가르치잔 마음이다. 썩은 살 잘라 버릴 용기와 성의를 가지지 못한 자는, 자격이 없는 자요, 생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자다. 그야말로 죽은 자요, 또 죽이는 자다. 혁명은 곧 교육이다. 그러나 혁명은 잘못된 교육이요, 교육은 옳게 된 혁명이다. 혁명자는 살리려다가 죽이는 자나, 교육자는 죽여 가지고 살리는 자다. 마땅히 죽일 것을 참 죽이기 위해 살펴 가지고, 그 죽을 죽음을 내가 죽어가지고 너와 나를 하나로 참 살려내는 것이 교육자다. 살신성인이다. 살신 아니 하고는, 내 몸을 희생하지 않고는 인(仁)은 없다. 교육은 없다. 그러나 그 능히 죽이고 능히 살리는 마음을 늙은 것 속에서는 만날 수 없다. 그러므로 젊은 교사의 자기 반성에 있다는 것이다. 원자보다도 더 작은 일점심(一點心)이 잘 터지기만 하면, 그리하여 그 속에 가지고 있는 호생지덕(好生之德)이 천성의 힘을 잘 방사하기만 한다면 온 세계라도 개조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새로운 집을 짓는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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