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과 코뮨을 논하다

 

하승우

 

조한혜정 지음 《다시, 마을이다》(또하나의문화, 2007년)

조한혜정 외 지음 《가족에서 학교로 학교에서 마을로》(또하나의문화, 2006년)

고병권․이진경 외 지음 《코뮨주의 선언》(교양인, 2007년)

 

풀뿌리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난 뒤 공간을 보는 법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시선이 높이 올라가야 전방 15도 정도였고 땅바닥을 보며 걷거나 가야할 목적지로 빨리 걸음을 옮기느라 바빴다. 하지만 요즘은 주변을 휘휘 둘러보며 주민자치센터나 마을도서관, 놀이터, 공원, 학교, 복지관 등이 어디에 있는지를 살핀다. 그리고 아파트나 다세대주택, 단독주택이 어느 정도 있는지,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연령대는 어떻게 되는지, 사람들의 표정은 밝은지 살피느라 걸음이 늦다. 가끔 지방에 내려가야 할 때도 한 시간 정도 미리 내려가 마을 분위기를 파악하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예전에는 이런 시선의 변화가 많은 얘깃거리를 줬기에 좋았지만 요즘은 버거울 때도 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마을 풍경이 불편해서다. 어디를 가든 비슷한 모습과 내용의 시설물들, 차도가 넓어지는 만큼 줄어드는 인도와 그만큼 위험해지는 보행자들, 하루가 다르게 올라가는 아파트와 삶에 지친 사람들의 한숨, 문을 닫는 구멍가게들...

얼마 전 전셋집을 구하러 서울 바닥을 헤매며 든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가급적이면 아파트가 시야를 가리지 않는 집에 살고 싶어 여기저기를 돌아다녔고, 그런 동네들을 찾기도 했지만 좁은 골목엔 어김없이 재건축조합 공고나 조합장 선거 공고가 붙어 있었다. 재개발 예정이 되어 있지 않은 곳은 거의 없었다. 이대로라면 ‘토박이’라는 말은 곧 사전 속의 단어가 될 듯하다.

물론 남쪽의 농촌과 어촌으로 내려가면 아직 시골도시의 분위기가 많이 남아 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곳의 고즈넉함에는 북적거리는 생명의 기운이 없다. 젊은이들은 대부분 일자리를 찾아 인근의 대도시로 떠나고, 주름진 사람들과 거리만이 사라질 날을 예감하며 그곳을 지키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마을은 비전(요즘 귀가 따갑게 듣는 단어이다)을 가지고 있을까?

 

 

‘다시 마을’에서 ‘어떤 마을’로

 

《다시, 마을이다》는 조한혜정씨가 신문이나 잡지에 썼던 칼럼과 대안교육 현장에서 나눈 이야기를 모은 책이다. 짧은 글들을 모았고 글재주 있는 사람의 글이라 읽기에 부담이 없다(반면 사건에 관한 통찰은 있지만 ‘깊이’ 얘기하지 못한다). 하자센터라는 대안교육의 브랜드를 만들었고 성미산학교의 교장을 맡는 등 도시형 대안학교운동을 벌이며 느꼈던 고민들이 책 속에 담겨 있다.

그런데 제목은 마을을 강조하지만 실제로 책의 많은 부분은 교육을 다루고 있다. 물론 대안교육은 대안적인 삶과 연결되어 있기에 대안교육의 문제는 마을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아이들이 미래의 시민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그 연관성은 더 깊어진다(아이들이 ‘미래의 마을주민’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대안교육으로 만난 사람들이 서로 공간을 나누고 돌보며 살아가는 사례들도 늘어나고 있으니 이 책의 제목은 절반의 진실을 담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조한혜정씨는 위험사회에서 살아남고 삶의 안정성을 확보할 방안으로 마을에 주목한다. 책을 살펴보면 조한혜정씨는 성미산 공동체에서 많은 영감을 받은 듯하다(성미산 주민들이 만든 생활협동조합과 학교, 아이스크림 가게, 반찬 가게, 차병원, 마을방송, 마을축제 등은 지역운동에서도 모범적인 사례로 알려져 있다). “노인들이 골목길 이곳저곳에 모여 아이들이 뛰노는 것을 보고 있고, 수시로 물물교환이 이루어지고, 서로가 잘 알기에 함께 있음으로 안전한 마을, 사람들이 자주 이사를 가지 않고 가게도 자주 망하지 않아 단골이 되는 그런 마을이 후기 근대적 주거의 핵심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나는 100% 동의한다.

하지만 나는 그 마을로 가는 방법에 동의하기 어려웠다. 저자는 대안교육이든 마을만들기든 ‘국가의 지원’을 요구하고 활용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저자의 논리에 따르면, 한국사회를 파헤치고 무한경쟁을 가속화시키는 세력은 시장과 자본이다. 저자는 “국가와 시민이 힘을 합쳐 자본이 독점해 가는 학습 영역을 탈환해 와야 할 때”이고 “대안교육계는 정부와의 긴밀한 협조아래 그간의 교육적 실험을 체계화하여 널리 공유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더구나 저자는 도로가꾸기와 건물세우기로 변질되고 있는 정부의 마을만들기 사업을 “놀라운 일”이라 평가한다.

이 무슨 해괴한 소리인가? 한국의 국가권력이 시장과 손을 맞잡고 땅덩어리를 파헤치고 교육을 망가뜨려 왔다는 건 상식이라 믿었던 터라 저자의 논리를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언론매체에 실린 글이고 연설문처럼 대상을 염두에 둔 글이 많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책에 실린 글만으로 조한혜정씨의 생각을 섣불리 판단하긴 어려웠다.

그런 점에서 《가족에서 학교로 학교에서 마을로》는 나의 궁금증을 많이 풀어줬다. 이 책의 1부는 2005년 봄의 「돌봄과 소통이 있는 가족문화와 지역사회를 위한 심포지움」을, 2부, 3부는 현장의 목소리를 다뤘다. 그래서 2, 3부도 《다시, 마을이다》와 연관성을 갖지만 가장 연관된 내용은 1부이다.

1부는 ‘돌봄사회’를 핵심주제로 내세우고 “집중적 권력과 배제의 논리로 움직이는 경쟁사회에서 포용과 소통의 원리가 주도하는 ‘따뜻한 근대’”로 이행할 방법을 가족과 대안학교, 마을에서 찾고 있다. 조한혜정씨만이 아니라 발제자들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해체가 한창 진행 중인 후기 근대적 위기 상황을 타개할 새로운 국가 패러다임”을 돌봄이라는 개념에서 찾고 있다. 특히 “남성 이익을 대변하는 억압적인 지배기구”로 국가를 파악하던 기존의 페미니스트 관점에서 벗어나 국가를 “여러 행위 주체들의 네트워크로 보면서 돌봄을 바탕으로 한 국가형성에 참여를 할 준비”(조한혜정)를, “여성운동을 통한 여성결사체의 정책 참여”, “성별적인 돌봄 규범과 실행이 일상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우리 사회의 질서를 바꾸는데는 보편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정책적 접근”(허라금)을 강조한다.

사적인 영역이 다시 정치화되고 있고, ‘돌봄’에 대한 강조는 그 경향을 대표한다. 과거에 페미니스트들은 “개인적인 것이야말로 정치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며 전통적인 공사영역의 경계를 허물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허무는 방향이 과거와 다르다. 과거의 방식이 사에서 공으로 뚫고 나가는 것, 즉 공적인 영역으로 진출하는 것을 방해하던 장벽을 허무는 것이었다면, 현재의 방식은 사적인 영역 자체를 정치화하는 방향으로, 돌봄을 국가의 재구성원리로 내세우는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이런 방향전환은 국제결혼, 이주의 여성화라는 변화된 현실을 반영하기도 한다).

나는 돌봄의 가치가 중요하고 돌봄의 사회화가 필요하다는 얘기, 키테이(Kittay)가 제안한 ‘돌봄의 사회적 책임의 원리’에도 공감한다. 하지만 그것이 국가나 제도화를 통해 실현될 수 있다는 생각에는 여전히 공감할 수가 없다. “돌봄을 바탕으로 한 국가”가 현실에서 가당키나 한 걸까?

그러면서 ‘돌봄’이라는 탈근대적 사유가 근대적인 복지국가에 갇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가가 자발적인 결사체들의 역할에 개입할 경우 기존의 자율적인 활동이 제한을 받는다. 이 점은 돌봄의 일종인 지역아동센터가 제도화되면서 ‘공부방’의 역할이 애매해졌다는 점으로 이미 증명된 바 있다. 국가는 시설중심의 과시하는 사업, 목적을 효율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사업을 지원하기 때문에,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활동은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고 운동의 의미도 퇴색되기 쉽다.

그리고 근대이든 후기 근대이든 국가의 폭력성, 특히 한국 국가의 폭력성은 여전하다. 국익을 빌미로 농민의 삶과 농촌공동체를 무참히 짓밟고 경쟁력을 핑계로 시장의 손을 일방적으로 들어주고 있는 한국의 국가권력에 왜 참여하고 어떻게 바꾸겠다는 건지 나의 상식으론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책이 주장하는 돌봄의 가치가 단순히 어느 한 편이 다른 편을 일방적으로 가르치거나 돕는 게 아니고 “돌보고 돌봄을 받는 관계를 구축함으로써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엄성에 근거한 행복한 삶과 사회”(사토 마나부)를 추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국가와 어울릴 수 없다. 통치이건, 요즘 유행하는 거버넌스(governance)이건 국가권력의 속성은 내부를 동질화하고 획일화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돌봄의 가치와 국가의 속성은 일치될 수 없다.

국가는 결코 마을을 만들 수 없다. 국가는 마을의 구역을 정하고 공무원을 임명하며 마을 안에 건물을 세울 수 있지만 그 마을의 자율성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을의 자율성과 자치를 인정하는 순간 국가는 자기 내부에 자신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공간을 허용하는 셈이다. 그런데 자율성과 자치의 권리를 가지지 못한 마을은 마을일 수 없기 때문에 마을과 국가는 공존하기 어렵다.

《다시, 마을이다》와 《가족에서 학교로 학교에서 마을로》는 마을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그 마을이 어떤 것인가를 얘기하지 못한다. 마을이 필요하고 마을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 주장은 옳지만 그 주장을 실현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코뮨주의 선언》이 도움을 줄 수 있을 듯하다.

 

 

코뮨주의, 우정과 기쁨의 공동체?

 

《코뮨주의 선언》은 여러 지식인들이 힘을 모아 만든 <수유+너머>에서 펴낸 책이다. <수유+너머>는 국내에 스피노자, 들뢰즈, 가타리의 철학을 알리고 노마디즘, 유목민 등의 개념을 유행시킨 바 있다. 이 책은 <수유+너머>가 10년 동안 준비한 이론적 노력의 결실이자 맑스,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 발표 160주년을 맞이하는 선언이다.

10년의 연구성과가 축적된 탓인지 낯선 개념들이 예전보다 많이 줄었고 자신의 언어로 얘기하려는 노력이 곳곳에서 드러난다(여전히 기계나 감응, 지층화같은 낯설고 어려운 개념들이 보이지만). 모두 9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6장부터는 코뮨주의 선언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철학적 정리이다(이진경, 고병권이 예전에 했던 작업들처럼 다른 사상가들의 입장을 근거로 자신의 입장을 세우는 글들이다).

《코뮨주의 선언》은 여러 가지 흥미로운 주장들을 코뮨주의라는 하나의 줄기에 꿰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작업이 “완성에 저항하는 사유이고 실천”으로서의 코뮨주의라고 주장한다. 코뮨주의는 완성된 목표가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변형시키는 유연한 틀로 제시되고, 그 내부는 적대의 정치를 넘어선 우정의 정치학, 사적 소유로부터의 ‘떠남’과 ‘탈주’, 타자성을 추방하거나 배제하지 않고 우정의 관계를 맺는 구성의 정치학 등으로 채워진다. <수유+너머>의 코뮨주의는 과감하게 국가에서 떠나 “자본과 국가에 의해 추방당한 광범위한 지대에서 코뮨적 삶의 방식을 구성”하려 한다.

코뮨을 건설하기 위해 망설일 필요가 없다. 고병권씨와 이진경씨는 “중요한 것은 당신의 삶을 바꾸는 것”이고 “코뮨주의는 언젠가는 도달해야 할 세상의 이름이 아니라, 언제든 도달할 수 있고 언제든 실현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이라고 선언한다. 이제 우리 삶의 곳곳이 코뮨의 가능성을 가진다.

이 코뮨은 개체와 집합체의 대립,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넘어서고 분리와 경쟁이 아니라 공생과 공-조(共-調), 협조에 바탕을 둔 공동체이다. 적을 없애기 위해 내부의 차이를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친구를 사귀기 위해 이질성과 타자에 문을 연 우정과 환대의 관계, 코뮨의 활동에 참여하는 한에서 구성되는 공동체, 리더나 중심을 제거하지 않고 각각의 영역이 모두 중심이고 능력을 가진 공동체, “인간과 비인간을 가르는 그 경계를 근본에서부터 변환하는” 공동체이다.

책을 읽고 있으면 참 많은 고민을 하고 상상력을 발휘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렇기에 저자들이 들으면 어리석다 나무라겠지만 이런 코뮨을 현실에 세우기가 참 힘들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많은 내용을 몸과 마음으로 소화하려면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 같고, 그래서 좋은 내용임을 인정하지만 멀게 느껴진다.

사실 코뮨을 얘기하기 위해 어려운 철학적 개념을 쓸 필요가 있을까? 어려운 얘기는 하나도 없지만 《우리들의 하느님》에서 권정생 선생은 우리 시대의 문제가 무엇이고 우리가 어떤 마음(능력이 아니다)을 가져야 하는지를 이미 얘기한 바 있다. 우리시대의 “제국주의와 전쟁과 핵무기와 분단과 독재와 폭력”이, 우리의 이기적인 욕망이 사회와 삶을 파괴하고 있다. 중요한 건 우리의 마음을 회복하고 하느님을 찾는 길이다. “가장 사람다운 삶과 모습이 바로 하느님의 모습”이고 “인간을 사랑함이 곧 하느님을 사랑함이며 인간을 사랑하는 길은 이웃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살도록 하는 길”임을 자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렵게 우정과 환대를 얘기하지 않아도 “가족 중에 누군가 먼길을 떠나면 그날부터 끼니마다 밥을 한그릇씩 떠놓”고 “우연히 집에 찾아오는 나그네가 있으면 기꺼이 대접”하는 마음, “좀 여유가 있는 집에서는 아예 사랑채를 비워놓고 나그네를 받아들”이고 “들판에서 점심을 먹다가도 지나가는 나그네가 있으면 큰 소리로 불러 함께 점심을 먹는” 마음, 고수레와 까치밥, 까마귀밥을 남기는 마음은 자연의 생명체와도 우정과 사랑을 나누었다. 코뮨을 얘기하지 않아도 “산에 사는 노루나 토끼가 마을에 내려오면 절대 잡지 않는다. 그들이 마을에 내려온 이상, 우리 마을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집안에 살고 있는 능구렁이도 우리집을 지켜주는 집지키미가 된다”는 마음은 이미 코뮨을 내포하고 있다. 문제는 우리가 코뮨을 몰라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그런 마음을 이미 잃었고 생존경쟁과 독식의 욕망만이 호소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을의 희망은 살아있나?

 

국가는 신자유주의 현실에서도 잘 살아남았고 오히려 자기 기능의 확대를 꾀하고 있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이런 ‘국가약화의 신화’는 국가를 근본적으로 사유하는 사상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비판을 감소시킨다. 《제국이라는 유령》(이매진, 2007)에서 엘린 메익신즈 우드는 “지구화의 본질은 민족국가가 가진 능력의 쇠퇴가 아니라 지구적 자본을 위해 세계를 조직화하는 민족국가의 독특한 기량”이라고 주장한다. 자본이 세계화에서 이득을 보는 건 사실이지만 그들이 세계를 조직할 능력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드는 “참으로 효과적인 반대투쟁을 하려면 자본의 힘이 모든 곳에 있지만 어디에도 없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국가 안의 중심점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얘기한다. 마을은 국가 없는 곳이 아니라 국가가 지배하는 곳에 자리잡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마을이나 코뮨에 관한 논의들은 이런 현실을 자꾸 비켜가려고만 한다.

그리고 마을의 자치는 스스로 물자를 공급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자급할 수 없는 사회는 자치할 수 없다. 제 아무리 마을을 세우고 특이성이 서로 리듬을 이루는 사회를 만든다 하더라도 그것이 국가 외부에서 존재하려면 자급이 가능해야 한다. 가장 기본적인 먹거리조차 자급하지 못하는 마을이 어떻게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을까? 앞서 살핀 논의들 어디에도 이런 고민을 찾을 수 없다. 농민공동체가 해체되어 가고 있는 상황에서 마을은 어떻게 자치를 할 것인가? 나라의 자치만이 아니라 마을의 자치를 위해서도 자급의 문제는 반드시 고민되어야 한다.

대안은 더 밑바닥에서 나올 수 있고 이미 현실에 잠재되어 있다고 믿는다. 현실에 대한 대안이 어느 순간 대안 없음으로 바뀐 건 대안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대안이 현실과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 속에서, 현실 속에서 대안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자기들만의, 우리들만의 대안으로 자라버렸기 때문이다.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퍽퍽하기 이를 데 없는데 대안을 외치는 사람들은 어느 순간 ‘잘 난 사람들’이 되어버렸다. 진보에 대한 냉소를 넘어 진보에 대한 분노가 폭발한 건 그런 분리 때문이 아닐까? 이제 우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먼저 다독이고 사로잡아야 한다.

탈선하고 탈주한 사람들이 만든 마을이 이 세상에 소금처럼 귀한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마을이 주류가 되려 하거나 벗어남으로 그친다면 그 소금은 소금일 뿐 세상을 이롭게 하는 물질이 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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